2023. 1. 7. 17:13ㆍ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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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1년 갑술(1874) 7월 15일(을묘) 맑음
11-07-15[33] 중희당에서 약방이 입진하고 대신 등을 인견할 때 도제조 이유원 등이 입시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중국에서 자문이 오고 남쪽 오랑캐는 소식이 뜸한데 아직 그 허실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방비하는 방책은 힘써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고 재용을 풍족히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지금 지방 고을이 피폐하게 된 것은 실로 못된 수령들이 마구 거두어들이는 데에서 연유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못된 수령들을 징계하는 방도는 이 장물(臟物)들을 받아내는 데에 있어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일일이 다 내게 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그 고을 백성들의 폐단을 바로잡는 데에 쓰게 하기도 하고 혹은 호조에 보내어 군수(軍需)에 보태게도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데, 이것은 또한 옛 제도이지 지금 시대에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송 태조(宋太祖)는 충후(忠厚)로서 나라를 세우는 근간을 삼았으면서도 장리(贓吏)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명(明) 나라의 구례(舊例)에 장은(贓銀)은 모두 변지(邊地)로 보냈었으며, 신라(新羅)의 유법에도 장물에 대해서는 세 배로 추징하는 법조문이 있었습니다. 지금 신이 주달한 것은 그런대로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고 재용을 풍족하게 하는 한 방도는 될 수 있으니, 우선 팔도와 사도(四都)에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탐장죄를 범한 것을 추징하여 군수(軍需)에 보충하는 것은 참으로 재용을 풍족하게 하는 방도이기는 하다. 그러나 탐장의 재물로 다시 국가의 재용에 보태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는 방백(方伯), 곤수(梱帥)로부터 주(州)와 현(縣)의 수령에 이르기까지를 막론하고 탐장죄를 저지른 자가 있으면 일일이 다시 추징해 내어 해당 지역 백성들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뜻으로 행회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박규수가 아뢰기를,
“영상이 주달한 것은 탐묵(貪墨)을 징계하는 정사에 있어 실로 엄준한 방법이며, 상께서 하교하여 처분하신 것은 더욱 합당합니다. 그러나 신의 구구한 소견을 삼가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장리(贓吏)에 대해 반드시 장물을 추징하는 것이 이전 명 나라 때에는 그 장물만을 헤아려 추징하고 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번 탐장의 죄를 범하면 그의 가산(家産)까지도 모두 적몰하였는데, 지금 청(淸) 나라까지도 이러한 법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대개 천하가 넓고 군현(郡縣)이 너무 많아 장리(長吏)들의 직무 수행을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여부를 조정에서는 하나하나 상세히 살필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법을 엄하게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주현이 300여 곳에 불과하여 수령으로서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세신(世臣)의 자손이고 이따금 방백이나 곤수들도 중히 예우하는 시종신이 내려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장오죄를 범하여 종신토록 금고(禁錮)에 처해지거나 자손이 청환(淸宦)에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크게 수치스러운 일이 되므로 국조(國朝) 4, 5백년 동안 탐장을 징계하는 정사가 이와 같았을 따름입니다.
신이 전에 암행어사가 되어 장오죄를 범한 자를 논핵한 것이 또한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아무가 범한 장오죄는 과연 사실과 틀리지 않았는지 끝내 마음에 의심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만약 발각되는 대로 그 장물을 따져서 다시 추징한다면 사실대로 명확하게 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란 간혹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운 법이어서 사적인 감정을 풀려고 허위로 남을 모함하는 자가 반드시 없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되는 점은, 이와 같이 법이 제정된 뒤에 간혹 장리(長吏)들이 죄를 범한 것을 차마 매번 거론하지 않아 점점 이런 죄를 덮어주고 보호하는 것이 고질이 되어 나중에는 참으로 큰 탐장죄를 저지른 자가 있더라도 더욱 성상께 상달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점 또한 크게 헤아려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탐장죄를 저지른 자에게 추징한 물건을 국가의 재정에 보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까지 성상께서 하교하시니,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비록 각도의 감영이라 할지라도 죄인의 속전(贖錢)은 이서(吏胥)들에게 주었지 관(官)에서 취하여 쓴 적이 없었습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전례에 없는 일을 군부(君父) 앞에서 진달하였겠습니까. 우상이 말한 400년 동안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 것은, 신이 전고(典故)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삼한(三韓)의 옛 법이 일월처럼 밝게 있고 본조(本朝)로 말하더라도 중엽 이전에는 또한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대부분 멀리 한당(漢唐)의 옛일을 모방해서 한 것이니,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유법(遺法)은 이러한 것을 거듭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명 나라의 법은 평소 가혹하다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장물을 추징하는 것도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실려 있습니다. 신이 법 밖의 일을 주달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장물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우상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군대라는 것은 흉기(凶器)이니, 깨끗하지 않은 물건을 흉기에 사용한들 무엇이 안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진달한 것은 경상 비용에 쓰자고 청한 것이 아니라 군수(軍需)에 쓰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경상 비용으로 말하더라도 적몰(籍沒)한 물건은 호조로 보내니, 그렇다면 장리(長吏)의 물건이 무엇이 깨끗하지 못한 것입니까. 그리고 양향(糧餉)과 군물(軍物)을 모두 적몰한 물건으로 만드니, 그렇다면 이 물건을 군수에 쓰더라도 무엇이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암행어사에 대해 말한 것은 신이 비록 이 직임을 거치지는 못했으나 외임(外任)에 있을 때에 여러 차례 암행어사를 겪어보았습니다. 상께서 직접 선발하여 특별히 보내시면서 매양 자신이 직접 가시는 것처럼 하교하시니, 이 직임의 중함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만일 암행어사가 잘못했다면 암행어사를 죄주어야 하고 도신이나 수령이 잘못했다면 암행어사의 말을 따라야지 어찌 곧바로 ‘암행어사는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믿을 만하지 못하다면 당초에 암행어사의 제도를 무엇 때문에 만들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장물을 모두 거두어들이면 장물에 대해서 다시는 보고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의논은 과연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형벌을 행함은 형벌이 없게 하고자 해서이니, 형벌을 주어 다시는 죄로 인해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있게 된 뒤에야 형을 주라.’고 한 것은 성인 세상의 일입니다. 만일 법이 중하여 법을 범하지 않는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지금 비록 관장(官長)이더라도 뒷날 죄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게 된다는 의논도 좋습니다. 관석(關石)과 화균(和鈞)같은 왕법이 구비되어 있으니, 사대부들이 어찌 이것을 혐의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려 하겠습니까. 관장(官長)된 자들이 만약 백성들이 이러한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의당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에는 법이 있는 듯하다가 나중에는 흐지부지해서 마치 법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쇄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장물이 없게 하려고 이와 같이 한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는 바로 공자(孔子)께서 아예 송사(訟事) 자체가 없게 만들겠다고 하신 뜻과 같은 것이니, 너무나도 감격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답에서는 민간에 돌려 주는 것으로 하였는데, 묘당에서 아뢴 것은 늘 국가의 재정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렇게 군수(軍需)에 보태 쓰자는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 이번에 진달한 것은 상하의 체모가 모두 합당하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전하의 뜻이 어디로 향하고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신이 비록 군수에 보태 쓰자고 아뢰었으나 백성들을 위하시는 성상의 뜻으로서는 이와 같이 하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일은 신하나 주상이나 모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우러러 아뢸 것이 있습니다. 장물을 추징하는 방도에 있어서 백성들과 관련이 있는 것은 민간에 돌려 주지만 국가의 공금을 범한 것은 구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귀속할 데가 없는 것은 묘당에서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모두 살펴서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규홍이 아뢰기를,
“사관이 비답을 읽을 때에 잘못한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니,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생소해서 그런 것이니, 특별히 용서해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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