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7. 19:04ㆍ고대사
고전번역서 > 해동역사 > 해동역사 속집 제6권 > 지리고 > 최종정보
해동역사 속집 제6권 / 지리고(地理考) 6
고구려(高句麗)
[DCI]ITKC_BT_1433A_0790_010_0010_2007_008_XML DCI복사 URL복사
강역총론(疆域總論)
○ 고구려는 본디 동이(東夷)의 나라 이름이다. 한(漢)나라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7)에 멸망되어 진번군(眞番郡)에 속하였다가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현도군(玄菟郡)의 치소(治所)를 이곳으로 옮겼으며, 지금의 흥경(興京) 등지이다.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의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옛 구려호(句麗胡)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안국(孔安國)의 《상서대전(尙書大傳)》을 보면, “무왕(武王)이 상(尙)나라를 쳐서 이기자 해동(海東)의 여러 오랑캐들 가운데 구려(駒驢)의 족속이 모두 길을 통하였다.” 하였는바, 구려(句麗)라는 명칭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할 적에는 항복한 나라들을 현으로 만들어 고구려를 진번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시원 5년에 이르러서 현도군의 치소를 이곳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흥경이 바로 그 지역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사군 현도조(四郡玄菟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한나라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고주몽(高朱蒙)이 졸본천(卒本川)에 나라를 세우고는 또다시 고구려라고 하였다. 졸본은 지금의 폐여연군(廢閭延郡)에서 강 건너편쪽 지역이다.
《후한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요동(遼東)에서 동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은 조선(朝鮮), 예(濊), 맥(貊)과 접하였고, 동쪽은 옥저(沃沮)와 접하였고, 북쪽은 부여와 접하였으며, 사방 2000리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은데, 백성들이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선과 예, 맥은 평안도 지역이고, 옥저는 백두산 남쪽 대간(大幹) 동쪽 지역이며, 부여는 개원현이다. 이것으로 미루어서 따져 보면 고구려의 사방 경계를 대략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주몽(朱蒙) 초기에는 현도군의 경내에 부쳐 살아 사방 경계가 한(漢)나라의 한 현의 지역에 불과하였다. 그런즉 범엽(范曄)의 《후한서》에서 이른 바는 반드시 고구려가 개국한 초기에 이미 이와 같았다는 것은 아니다. -졸본천에 대한 안설(按說)은 흘승골성조(紇升骨城條)에 나온다.
○ 그 뒤에 강역이 점차 커져서 후한 초기에 이르러서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한나라 요동군에 접하였고, 남쪽으로는 청천강(淸川江)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부여에 접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명왕(東明王) 10년(기원전 28) -한나라 성제(成帝) 5년- 에 북옥저를 멸하고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 유리왕(琉璃王) 33년(14) -왕망(王莽) 6년- 에 양맥국(梁貊國)을 멸하고 군사를 보내어 한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해 취하였다. ○ 대무신왕(大武神王) 9년(26) -한나라 광무제 2년- 에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군현으로 삼았다. ○ 태조왕(太祖王) 4년(56) -광무제 32년- 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옥저와 북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이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은 지금의 흥경이며, 개마국은 지금의 삼수(三水)ㆍ갑산(甲山) 등지이고,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으로 강 남쪽 지역은 바로 낙랑의 경계 지역이며 -이상에 대한 내용은 모두 사군조(四郡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창해는 지금의 관북 지방의 경흥(慶興) 앞바다이다. 이때에 이르러서 고구려가 그 지역을 병합하여 차지하였으니, 고구려의 지경이 점점 커진 대개를 알 수가 있다.
또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태조왕 3년(55)에 요서(遼西) 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를 방비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한나라의 요동군과 현도군이 모두 요수(遼水)의 동쪽 강안(江岸)에 있으면서 날마다 고구려와 싸움을 하였는데, 고구려가 어떻게 요수를 넘어가서 10개의 성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필시 한때에 잠시 탈취하여 점거하였다가 곧바로 빼앗긴 것이다.
○ 이때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후한 말기에 이르러서는 또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들은 모두 압록강(鴨綠江) 북쪽 지역에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국내성조(國內城條) 및 환도성조(丸都城條)에 나온다.
○ 조위(曹魏) 때에는 고구려가 점차 서북쪽 경계 지역을 잃어서 드디어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사방이 2000리이고, 호구 수가 3만 호이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후한 때에는 사방이 2000리였다가 위(魏)나라 때 이르러서는 남북 간의 거리가 점차 좁혀져 겨우 1000리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지》를 보면, 한나라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고구려를 쳐서 그 나라를 격파하고 읍락(邑落)을 불태웠으며, 위나라 정시(正始) 연간에는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환도성을 도륙하였다. 대개 공손씨(公孫氏)가 이때 한창 강성하여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지역을 모두 관할하면서 요수(遼水)와 패수(浿水) 사이의 지역을 다 차지하고 있었는바, 고구려의 변경 지역이 형세상 반드시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옛 도성이 잔파되자 다시는 지탱할 수가 없어서 남쪽인 평양으로 도성을 옮긴 것이다. 그런즉 이 당시에 고구려가 쇠약했다는 것은 더욱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통전》에서 이른 바는 맞는 말이다.
○ 서진(西晉) 말기에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낙랑을 병탄하였다. 진송(晉宋) 즈음에는 고구려의 사방 경계가 북쪽으로는 개원현(開原縣)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황해도의 바다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에 닿았다.
《후위서(後魏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나라 세조(世祖)가 이오(李敖)를 고구려에 보냈다. 이오가 고구려 왕이 있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가지 사정을 탐문하고는 말하기를, “요동에서 남쪽으로 1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책성(柵城)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옛 부여(夫餘)에 이릅니다. 백성들의 호구 수는 전위(前魏) 때에 비해 3배에 이르며, 그 지경이 동서는 2000리이고, 남북은 1000여 리입니다. 백성들은 모두 토착민이며, 산골짜기를 따라서 살고 있습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후위 태연(泰延) 1년(435)에 이오(李敖)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는바, 바로 송(宋)나라 문제(文帝) 원가(元嘉) 12년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책성은 지금의 부령부(富寧府)이다. -발해조(渤海條)에 나온다.- 소해는 지금의 해주(海州) 남쪽 바다에서 곧바로 건너가 충청도 당진(唐津) 등지의 앞바다에 이르는 지역으로, 《위서(魏書)》에도 “백제는 소해의 남쪽에 처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을 이른 것이다. 대개 발해(渤海)는 한쪽 구비가 충청도와 황해도 사이에 끼어 있어 경기(京畿) 지방이 그 동쪽에 위치해 있는바, 해주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자는 그곳을 소해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부여는 지금의 개원현이다. 부여는 진(晉)나라 영화(永和) 2년(346)에 모용연(慕容燕)에게 멸망당해 그 지역이 모두 고구려에 병합되었으며, 현도와 요동 역시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사군조(四郡條)에 나온다.- 그런즉 요수 동쪽 지역은 모두 고구려가 관할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동한(東漢) 초기에는 고구려가 낙랑과 살수(薩水)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위나라 정시(正始) 8년(247)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 뒤부터는 대방군, 낙랑군과 해마다 싸움을 하였다. 진(晉)나라 건흥(建興) 초기에 이르러서는 낙랑의 전 강역이 마침내 고구려에 병탄되었다. 그러므로 이 당시에 남쪽 경계가 해주의 바다에까지 이른 것이다.
○ 수당(隋唐) 시대에는 고구려의 사방 경계가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건넜으며, 북쪽으로는 개원(開原), 오라(烏喇) 등지까지였고, 남쪽으로는 한강(漢江)에 이르렀는바, 그 지역이 총 5부(部) 176성(城)이었다.
《후주서(後周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그 지역이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건너서 2000리가 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말갈과 이웃하여 1000여 리이다. 치소는 평양성이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수나라 때에 이르러서 점차 커져 동서가 6000리였다.
《구당서(舊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경사(京師)에서 동쪽으로 51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요수를 건너서 영주(營州)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말갈과 접경하였다. 동서의 거리는 3100리이고, 남북의 거리는 2000리이다. 바깥에 주현(州縣) 60여 성(城)을 설치하였다. ○ 정관(貞觀) 5년(631)에 고구려가 장성(長城)을 수축했는데, 동북쪽의 부여성(夫餘城)에서 시작해 서남쪽의 바다에까지 이르니, 1000여 리였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그 지역이 동쪽과 서쪽은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른다.
《신당서(新唐書)》 흑수말갈열전(黑水靺鞨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속말부(粟末部)는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태백산(太白山)에 닿아 있어서 고구려와 서로 접해 있으며, 속말수(粟末水)의 강가에 의지하여 산다. 속말부의 동쪽에 있는 것이 백산부(白山部)로, 백산부는 본디 고구려에 신하로 복속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당서(唐書)》를 보면, “발해가 고구려의 옛 지역을 장령부(長嶺府)로 삼았다.” 하였는데, 장령은 지금의 혼동강(混同江) 서쪽의 오라(烏喇), 영길(永吉) 등지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발해조에 상세히 나온다.- 그렇다면 동쪽으로는 오라에서부터 서쪽으로는 개원현에 이르는 지역이 고구려의 북쪽 경계이다. 《수서(隋書)》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요수 서쪽에 무려라(武厲邏)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금주(金州), 복주(復州), 해주(海州)가 모두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그렇다면 북쪽으로는 개원현에서 요수 서쪽을 따라 광녕(廣寧)과 여순(旅順)의 바다에 이르는 곳이 바로 고구려의 서쪽 경계인데, 장성(長城)의 수미(首尾)는 바로 이 경계를 따라서 쌓은 것이다. 그리고 말갈의 속말부는 백두산 북쪽에 있고, 백산부는 속말부의 동쪽에 있으면서 고구려에 신하로 복종하였다. 그런즉 고구려의 동북쪽 경계가 백두산 동쪽에서 뻗어 두만강의 안팎에까지 이른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살펴보건대, 고구려가 낙랑을 병합한 이후에 남쪽으로는 신라, 백제와 이웃하여서 서로 간에 강역을 빼앗기고 빼앗고 하여 몹시 어지러웠다. 유송(劉宋) 시대에는 고구려가 국경을 개척하여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까지 이르렀으며,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때에는 다시 신라에게 빼앗겨서 그 남쪽 경계가 한산(漢山)까지에 불과하였다. 고려(高麗)의 서희(徐煕)가 칭한바 ‘삼각산(三角山) 북쪽이 고구려의 지역이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남쪽 경계의 연혁에 대해서는 신라조(新羅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의 동북쪽 모퉁이에서 일어났는데, 한나라가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이래로 호령(號令)이 중간에 쇠약해졌으며, 다시 왕망(王莽) 때 경시(更始)의 난리를 겪어서 고구려가 그 강역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북쪽은 바로 부여(夫餘)인데, 부여는 유리왕(琉璃王)에게 격파되어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부여의 서북쪽은 바로 흉노(匈奴)인데, 흉노는 다섯 선우(單于)와 남북(南北) 선우의 난리를 겪으면서 도망쳐 숨어 그 지역이 또 비었다. 이에 고구려가 그 틈을 타고서 남쪽으로 침략하고 북쪽으로 정벌하여 토지가 날로 넓어졌다.
건무(建武) 연간에는 고구려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노략질하였는데, 우북평은 바로 순천부(順天府)이고, 어양은 우북평의 서쪽에 있고, 상곡은 또 어양의 서쪽에 있고, 태원은 또 상곡의 서쪽에 있다. 이들은 모두 한나라의 북쪽 변경 지역으로, 흉노의 요충지에 해당된다. 고구려가 이곳을 침략하면서 사군(四郡)의 지역을 경유하였는바, 일찍이 북쪽으로 그 땅을 개척하고 점차 서쪽으로 뻗어서 사군의 경계와 서로 가까이 닿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호(胡)라고 칭하나 지역은 실로 북쪽과 가까우며, 지금의 압록강 동쪽 연안과 처음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뒤에 비록 동쪽에서 군사를 써서 살수(薩水)를 경계로 하였으나, 그 지역은 역시 고구려의 변경 지역에 불과하였다.
그 뒤 중국 지역에 삼국(三國)이 정립해 대치하고 있을 적에 공손강(公孫康)이 바다 밖으로 기세를 펼치고 관구검(毌丘儉)이 환도성(丸都城)을 도륙하여 고구려가 마침내 쇠약해졌다. 《통전》에서 이른 바 고구려가 조위(曹魏) 때에 이르러서는 남북 간의 거리가 점차 줄어들어 겨우 1000여 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때를 두고 한 말이다.
그 뒤에는 또 모용씨(慕容氏)가 요수의 북쪽에서 일어나 근공책(近攻策)을 쓰자 고구려가 지탱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에 도읍하여 드디어 동방의 나라가 되었다. 그 뒤에는 또다시 모용씨가 잔멸(殘滅)되고, 풍씨(馮氏)가 투항해 오고, 두 위(魏)나라가 패권을 다투면서 중국 지역이 전란에 시달렸다. 그러자 고구려가 다시 강성해져서 국경을 넓혔다. 《통전》에서 이른 바 수(隋)나라 때에 이르러서 국토가 점차 커져 동서 간의 거리가 6000리였다고 하는 것은 이때를 두고 한 말이다.
○ 지금 성경(盛京)에서 관할하고 있는 요동의 군현들은 모두 고구려의 지역이었다.
'고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今上 19년 盛京將軍 左宗棠이 廣開土王碑를 발굴하다 (0) | 2022.12.31 |
---|---|
정화(鄭和)가 사신으로 가서 사자국에서 불아(佛牙)를 취하여 중국에 들여왔는데 (1) | 2022.12.23 |
“당(唐) 나라 이적(李勣)이 우리나라의 문물(文物)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모두 불태워버렸으며, (0) | 2022.11.22 |
고구려가 풍씨(馮氏)의 남은 세력을 근거로 강성해져서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1백만 군이 살수(薩水)에서 대패 하였고 (1) | 2022.11.16 |
中土에 본래 잇든 三苗族 酋長인 雖尤를 정복하고 (0) | 2022.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