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 19:11ㆍ대륙조선 총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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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 황제[편집]
1370년 5월 27일 혜종 토곤 테무르 칸이 붕어하자 아유르시리다르가 몽골 고원의 응창부에서 제위를 계승했다. 연호는 '선광'(宣光)으로 정해졌다. 그는 두보(杜甫)의 시집 《 북정 (北征) 》의 시 중 "주나라와 한나라처럼 다시 일어나게 하실 것이니, 우리 임금은 선왕과 광무제처럼 명철하시다.(周漢獲再興,宣光果明哲)"에서 따서 연호를 선광이라 지었다. 그는 자신이 주 선왕, 후한 광무제와 같이 왕조를 중흥시킬 것을 다짐했다. 바로 장군 코케 테무르를 도총병(都總兵) 중서우승상에 임명하고 하남왕(河南王)에 봉했다.
몽골어식 존호는 빌레그트 칸인데, 명나라 태조실록에 고 태자 필리독(빌레그트의 오역)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생전에 붙여진 존호였다. 6월 10일 명나라의 이문충 군대가 흥화(興和)를 거쳐 응창부로 침입했고, 소종은 카라코룸으로 천도했다. 실각당했던 코케 테무르는 새로운 북원 세력에 참여해서 황제의 호위를 수행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소종에게 항복을 권고했으나, 소종은 항복을 거부했다. 소종은 카라코룸을 공식 수도로 선언했다.
그해 12월 장군 강문청(江文淸), 왕자 실독아(失篤兒)와 더불어 국구 아리마사하라(阿里麻思海牙), 부마 망갈라시(駙馬 忙哥剌失) 등이 명나라에 투항했다(이들 중 실독아는 원 혜종의 서자인지의 여부가 있고, 아리마사하라가 혜종의 비빈 중 누구의 친부인지의 여부가 있으며, 망갈라시가 어느 칸의 사위인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소종은 명나라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고려 공민왕에게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공민왕에게 보낸 서한에서 소종은 "왕이여, 그대는 나와 같은 칭기즈 칸의 후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 하늘 아래 정의와 진리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은 원 소종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고, 북원에 대항하여 반원 정책을 펼쳤으며, 1270년대에는 원나라에 병합된 고려의 서북쪽 영토를 탈환했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고려의 친원 세력은 공민왕의 아들 왕우의 책봉을 요청하는 사절을 북원으로 보냈다. 소종은 형식적으로 승인하여 고려 사절을 돌려보냈다. 우왕의 즉위를 계기로 북원 소종은 고려에 함께 명나라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요청했으나, 고려 조정은 답변을 회피했다.
1371년 연호를 '선광'(宣光)으로 개정했다. 1371년 2월 요양행성의 평장정사 유익(刘益) 등이 명나라에 투항했고, 이로써 요령성 남부 지역을 명나라에 빼앗겼다. 유익은 곧 홍보보(洪寶寶), 마언휘(馬彥翬)에게 살해되었고, 마언휘는 다시 요양행성 내 장량좌(張良佐)와 방고(房暠)에게 살해되었다. 홍보보는 곧 나하추에게 망명했지만 요양행성의 남부 지역을 속수무책으로 명나라에 빼앗겼다.
1372년 1월 명 태조는 서달(徐達), 이문충(李文忠), 풍등(馮勝)에게 군사를 주어 몽골로 보냈다. 명나라 장군 서달이 이끄는 15만명의 대군이 몽골 고원으로 침공하여 20일만에 툴루 강변에 도달했다. 소종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소종이 이끄는 군대는 서달의 명군에게 패하여 고비 사막으로 물러났지만, 코케 테무르가 이끄는 북원의 군대는 1372년 1월말, 오르콘강과 카라코룸 일대에서 서달(徐達)이 이끄는 명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명군 2만명 정도가 전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감숙성을 명나라 서달의 군대에게 빼았겼고, 2만 마리의 소와 말, 포로들이 명나라로 끌려갔다. 명나라 군대의 일부는 분산하여 케룰렌 강 주변을 공격, 약탈했으나 코케 테무르의 군대가 이를 모두 격파하고 오르콘 강변으로 패주시켰다.
수복 실패와 최후[편집]
1373년 소종은 만리장성을 넘어 신허, 랴오닝 일대와 가오저우, 수이쭝, 허베이 성의 푸닌, 수진 지역 일대를 탈환했다. 그러나 감숙성에서 다시 서달과 대적할 때 북원군은 심하게 몰려서 고비 사막으로 달아나야 했다. 이 승리를 기회로 아유르시리다르는 한지 지역의 탈환을 목표로 코케 테무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남하시켜 일시적으로 산서 성 북부까지 장악했다. 1374년 명나라는 대군을 보내, 싱허와 가오저우를 명나라 군대에게 빼앗겼다. 1374년 소종은 고려에 사절을 보내 랴오양에 있는 명나라군대에 대한 공격 지원을 요청했으나, 고려 공민왕은 거절했다. 1375년 랴오닝이 명나라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소종은 고려 조정에 도움을 청했으나, 고려에서는 원나라로부터 독립할 기회로 여기고 그의 지원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1374년 10월 22일 고려 공민왕이 살해당하자 12월 이인임 등이 북원의 중서성에 편지을 보냈고, 이에 소종은 우왕에게 책봉 고명을 내려주었다. 소종은 1375년 1월 나하추를 보내 고려의 왕위 계승 전말을 파악하도록 했다. 그해 나하추가 여진족의 지원을 얻어내 명나라군을 랴오둥 밖으로 쫓아냈다. 1375년 5월 소종은 고려에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 조정에서는 북원의 사신을 강계에서 되돌려보냈다. 같은 달 명나라 장군 남옥(藍玉)이 백주천(白酒泉)에서 원나라 군대를 패배시키고, 마침내 흥화(興和)를 함락했다. 소종은 황궁 관원들을 이끌고 알타이 산으로 피신했다. 그해 7월 명나라 장군 이문충이 군사를 이끌고, 대령고주(大寧高州)를 점령했고 원나라 백성들은 북으로 후퇴했다.
1375년 9월 17일 코케 테무르가 알타이 산맥에서 명나라 잔당과 싸우던 중 병사하자, 소종의 중국 재탈환 기도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소종은 끝까지 한지(중국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1376년 봄, 장군 바얀 테무르(伯顏帖木兒)가 연안(延安)을 공격했으나 명나라 장군 박우덕(傅友德)에게 참패하고, 명나라로 투항했다.
1377년 소종은 고려에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의 신하들은 북원과의 외교를 단절하라는 상소문을 빗발치게 올렸다. 김구용(金九容) 등은 소종이 보낸 사신들의 고려 입국을 막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1377년 7월 소종은 고려에 선휘원사(宣徽院使) 테리테무르(徹里帖木兒)를 보내 정요위(定遼衛)를 협공할 것을 요청했으나, 그해 9월 고려는 계품사(啓稟使) 강인유(姜仁裕)를 보내 거절했다. 1377년 8월 카라코룸에 온 고려인이 황제가 심왕을 고려왕으로 삼으려 한다(帝將以沈王孫爲高麗國王)는 소문을 유포하자, 붙잡았으나 불문율에 붙이고 되돌려보냈다.[1] 결국 1378년 5월 10일에 황제 아유르시리다르가 카라코룸에서 붕어했다. 신원사에 의하면 알타이 산 근처에서 사망했다 한다.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은 전해해지 않는다.
사후[편집]
고려인 권황후와의 사이에서 황녀 1명과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황자 1명을 두었으나, 아들은 12세에 요절했다. 김황후 소생의 황자 마이다리팔라(매적리팔라)는 1368년 대도가 함락될 때 명군에게 잡혀 포로로 끌려갔다가 소종의 사망을 기점으로 명나라가 석방해주었다고 하나 이후 행방이 실종되었다. 소종의 뒤는 이복동생 혹은 친동생이라는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가 계승했다. 1388년 4월 11일 명나라 장군 남옥(藍玉)이 소종의 처와 딸 등 59인과 동지 타린테무르(脫因帖木兒) 등을 사로잡아갔다.
몽골식 존호는 '빌레그트 칸'으로 중세 몽골어로 '지성인', '지혜로운'이라는 뜻이었다. 명나라에서는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고 태자 필리독'(故太子必里秃)이라고 칭했다. 일각에서는 소종의 연호를 따서 '선광제'로도 칭한다. 청나라때 만주족은 소종의 이름을 '애육실리달랍'(愛猷識理達臘)으로 음역했다.
그의 묘호는 소종이라는 설과 철종이라는 설이 있다. 명나라의 작가 겸 사학자인 왕세정(王世貞)의 《북로시말지》(北虜始末志)에 의하면 그의 묘호는 소종(昭宗)이라고 한다. 그런데 청나라 건륭제 시기의 《몽골 세계보》에는 그의 묘호가 철종(哲宗)으로 되어 있다.
가계[편집]
그의 첫 부인은 태자비 오지라슨다리씨(瓦只剌孫答里氏)로 《원사》 25권에 등장한다. 1366년까지 생존해있었던 오지라슨다리씨의 행적은 이후 미상이다. 명나라 명태조실록에 등장하는 명나라군에 끌려간 故太子必里禿妃가 김황후인지, 권황후인지 2명 모두 끌려간 것인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들 : 매적리팔라(買的里八刺)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29년 정묘 > 7월 27일 > 최종정보
세종 29년 정묘(1447) 7월 27일(정사)29-07-27[01] 사졸 훈련과 징병에 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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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에는 사적(沙賊)이 망한 원(元) 나라의 남은 졸병들로써 갑자기 서쪽 지방을 침범할 제, 변방이 막아내지 못하매, 드디어 거침없이 사뭇 밀어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니, 이런 것이 곧 은감(殷鑑)이 되옵니다. 其在前朝, 沙賊以亡元之餘燼, 卒犯西鄙, 邊方失馭, 遂長驅不止, 如入無人之境, 是謂殷鑑
목은문고 제6권 / 기(記)보법사기(報法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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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해 겨울에 사적(沙賊 사유(沙劉) 등이 이끈 홍건적(紅巾賊))의 유린을 당한 나머지 전각과 기명(器皿)을 비롯해서 불서(佛書)와 불상(佛像) 등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해동역사 제15권 / 세기(世紀) 15
고려(高麗)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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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흘러 들어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동환봉사 > 동환봉사 > 올리려던 16조의 상소[擬上十六條疏] > 최종정보
아! 이 수십 만이라는 것이 모두 정병(精兵)이라 하더라도, 가령 전조(前朝)의 말에 왜선(倭船)이 하삼도(下三道)와 경기ㆍ황해에 운집(雲集)하고, 몽고의 홍건적(紅巾賊)이 양계(兩界)에서 봉기(蜂起)하듯 한다면 이 20만으로는 능히 분담하여 방어하지 못할 것이 명백합니다.設如前朝之季。倭船雲集於下三道。畿,黃之境。蒙古紅巾。蜂午於兩界之地。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7월 19일 병신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최이ㆍ연사종ㆍ김승주ㆍ이종무ㆍ조비형ㆍ윤곤ㆍ마천목 등을 외방의 군 책임자로 보내다
내가 들으니 옛날 거란(契丹)의 홍군(紅軍)이 있었을 때 본래 우리 나라를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그 화를 입었다.
註 248]
홍군(紅軍) : 홍건적(紅巾賊).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10년 갑자 > 1월 19일 > 최종정보
숙종 10년 갑자(1684) 1월 19일(을유)
10-01-19[01]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재이에 대하여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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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예전에 동방의 땅을 다스린 자는 거의 다 다른 땅에서 왔는데 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이것이며, 유복통(劉福通)은 중국에서 크게 일어나 곧바로 송경(松京)을 쳤고, 납합출(納哈出)은북방에서 반란하여 자주 변방의 우환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보면 왜서(倭書)가 참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劉福通大創於中原, 而直擣松京;
> 고전번역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23권 > 편서잡고 3 > 최종정보
철목진(鐵木眞)은 사막 동북 알난하(斡難河)에서 처음 일어나고 와활태(窩闊台)는 사막 서쪽 화림(和林)에서 즉위하니, 본디 당(唐) 나라 때 회골(回鶻)의 비가사한(毗伽司汗)의 옛 성을 회동의 장소로 삼아서, 처음에는 원창로(元昌路)를 세웠고, 나중에 화림사(和林司)로 고쳐 운영하다가,홀필렬이 연경(燕京)으로 천도하여 대도(大都)라고 부르면서부터는 화림 선위사(和林宣慰司)로 개설하여 늘 훈구 왕공으로 통할하게 하였다. 여기서 북으로 3천 리를 가면 아지리해자(阿只里海子)이고, 또 5백 리를 가면 겸주(謙州)ㆍ익란주(益蘭州)이며, 다시 1천 리를 가면 대택(大澤)에 이른다.
상도(上都)는 환주(桓州) 동쪽에 있는데, 온 지역이 모두 소나무여서 천리송림(千里松林)으로도 불린다. 흘필렬이 개평부(開平府)로 일컫다가 이윽고 상도(上都)로 올려 일찍이 그곳에서 피서하였고, 궁궐과 시사(市肆)의 웅장함은 대도와 대등하다
고전번역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23권 > 편서잡고 3 > 최종정보
4년(1256, 헌종 6), 유병충(劉秉忠)을 시켜, 환주(桓州) 동쪽 난수(灤水) 북쪽 용강(龍岡)에 성시(城市)와 궁실(宮室)을 영건하고 ‘개평(開平)’이라 하였다.
> 고전번역서 > 치평요람 > 치평요람 제139권 > 송 > 최종정보
이때에 이르러 헌종(憲宗)이 성시(城市)를 건설하고 궁실(宮室)을 수축하여 도회지(都會地)를 조성하려고 하자, 황제 홀필렬이 말하기를, “유병충은 천문(天文)ㆍ지리(地理)의 법에 정밀합니다.”라고 하니, 헌종이 유병충으로 하여금 터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유병충이 “환주(桓州)의 동쪽이자 난수(灤水)의 북쪽에 위치한 용강(龍岡)이 길지(吉地)이다.”라고 하니, 헌종이 유병충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하고, 개평부(開平府)로 이름을 지었는데, 3년이 되어 공역을 다 마쳤다.【21】
기언 제34권 외편 / 동사(東事) 3
말갈(靺鞨)
고구려의 옛 지역이 서경(西京)이니, 또한 압록부(鴨綠府)라고 하고,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 4주를 통할하였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환도고(丸都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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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지리지에,
“녹주(淥州)는 본래 고구려의 고국(故國)인데, 발해가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라 불렀으며,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를 관할 감독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환주가 곧 환도이기 때문에 고국이라 한 것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영변부(寧邊府)의 검산(劒山)이 곧 옛날의 환도이다.”
하였는데, 대개 방언에 칼을 환도(環刀)라 칭하므로 또한 억측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동사강목 부록 하권
황룡국고(黃龍國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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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국(黃龍國)은 요지(遼地) 동북쪽 지경에 있었는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졸본은 지금 흥경 등지이고 황룡국과 졸본은 이웃 나라라고 칭하였으니, 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용강(龍崗)은 옛날의 황룡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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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봉천부(奉天府)의 개원현(開原縣)을 또한 황룡부(黃龍府)라 칭하니, 요(遼)가 발해를 칠 때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 권2 〈옥저읍루〉에 “《일통지(一統志)》에 ‘개원성은 삼만위(三萬衛) 서문(西門) 밖에 있다.’라고 하였고, 《원지(元志)》에는 ‘개원 서남쪽을 영원현(寧遠縣)이라 하고, 또 서남쪽을 남경(南京)이라 하며, 또 남쪽을 합란부(哈蘭府)라 하고, 또 남쪽을 쌍성(雙城)이라 한다.’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개원로(開元路) : 요양성(遼陽城)에 소속된 지명으로, 원나라에서 처음 설치하였다. 《원사》 〈지리지(地理志)〉에 “을미년(1235)에 개원 만호부(開元萬戶府)와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하고 치소(治所)를 황룡부(黃龍府)에 두었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길림성 농안(農安)이라고 한다.
기언 별집 제9권 / 기(記)
형산비기(衡山碑記) 무오년(1678, 숙종4)
성조(聖祖)의 …… 곳 : 성조는 태조 이성계의 선대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이고, 왕적을 일으킨 곳은 두만강과 덕원(德源) 일대를 가리킨다. 태조의 선조들이 원나라의 남경인 간도를 거쳐 두만강과 덕원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조선을 건국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옥오재집
조선 후기 문신 송상기(宋相琦: 1657~1723)의 시문집. | 18권 9책. 운각활자본. 아들 필환이 편집, 손자인 재희가 1760년(영조 36)에 간행했다
옥오재집 제2권 / 시(詩)
심양〔瀋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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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요동에서 이곳이 제일 웅장하니 / 全遼第一此雄藩
화려한 성가퀴와 망루가 구름에 싸였네 / 粉堞華譙入塞雲
다른 시절 중국의 방어선이 되었고 / 中國異時堪保障
원나라 때 수도로 부질없이 고초 불렀지 / 上都元代漫辛勤
깊숙한 방 비밀스러운 궁궐은 천 겹이요 / 陰房秘殿千重合
화려한 가게 향기로운 거리 이곳저곳에 / 寶肆香街百隊分
성 옆에 흐느끼는 샘물만이 / 獨有城邊嗚咽水
지금까지 하장군을 원망하는 듯 / 至今如怨賀將軍
심양을 방비하지 못하였을 때, 대장 하세현은 도망가다 죽었다.
[주-D001] 원나라 …… 불렀지 : 원의 수도 체제는 양경제(兩京制)였다. 겨울 수도인 대도(大都)는 지금의 북경이고 여름 수도인 상도는 심양이다. 그 두 수도 사이로 많은 위락시설, 상업지구, 창고, 군사주둔지 등이 있었다. 원나라 황제는 대도와 상도 사이로 계절에 따라 거대한 이동식 천막 부대를 이끌고 이동하였다. 이것은 유목민의 관습을 버리지 못한 것으로, 이런 관습은 황제 신변 경호에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이동하는 도중에 황제를 암살하는 사건도 일어났고, 대도와 상도 사이에서 형제끼리 각각 정권을 세워서 내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남파의 변과 천력의 내란이 있다.
인조 15년 정축(1637) 7월 4일(경오) 맑음
15-07-04[24] 사은사 세 사람을 인견할 때 상사 이성구 등이 입시하여 사행의 결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성구가 아뢰기를,
“심양은 날씨가 일찍 추워져서 신들이 나올 때가 마침 6월이었는데도 이미 서늘한 기운이 있었습니다. 세자궁의 겨울 옷감을 미리 들여보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4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4(한국사료총서 번역서4) > 1902년(광무 6년, 임인년) > 4월 > 6일(음력 2월 28일)《일요일》 흐림.
6일(음력 2월 28일)《일요일》 흐림
...십일이면 구일은 바람이 불고, 4계절 중 3계절에 눈이 내린다(十日分排九日風 四時統計三時雪) 원래 조선의 최북단 지역 기후를 묘사하는 이 말은 바람에 관한 한 원산에도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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