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랄산부터 대마도까지 수륙 수만리 우리 선조 즐기시던 보금자리라

2023. 1. 19. 19:34대륙조선 총설

흑룡은 백두산(알타이산), 태원은 산서성 영파,절강

-노래 “신흥무관학교교가”-

 서북(西北)으로 흑룡(黑龍) 태원(太原) 남(南)에 영절(寧浙)에

여러 만만 헌원(軒轅)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 것을 품에다 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독립운동가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1881∼1964)선생께서 기록한 애국가 가사
김승학 선생의 애국가 가사
3절
우랄산부터 대마도까지 수륙 수만리 우리 선조 즐기시던 보금자리라
무궁화 화려한 금수강산 배달민족 배달나라 길이 보전하세

剌어그러질 랄, 수라 라  亏剌山 : 우라(랄)산

세종실록 66권, 세종 16년 10월 27일 경오 2번째기사 1434년 명 선덕(宣德) 9년

사신이 야인에게 돌려 보낸 잡물의 상세한 기록을 요구하고 파저강에 들어가는  등을 묻다

 사신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강계 등지는 길이 험하고, 야인들은 우라산 지면으로 옮겼다고 하니, 어느 길을 경유하여 들어갔다 돌아와야 합니까."

하니, 인손이 대답하기를,

"야인이 나오면 반드시 그들이 사는 곳과 경과할 길을 알 것입니다."

野人等移住亏剌山地面, 由何道入歸乎?" 引孫答曰: "野人出來, 則必知

 

세종실록 66권, 세종 16년 10월 23일 병인 4번째기사 1434년 명 선덕(宣德) 9년

첩아한 등을 돌려 보낸 시기에 대해 사신에게 답하고 사은사가 가지고  사목을 정리하다

1. "사신들이 지금 우라산(亐剌山)을 경유하여 모련위(毛憐衛)·건주위(建州衛) 등지로 들어가려고 길 인도할 사람을 청하였는데, 그대로 들어 주어야 할 것인가."

使臣等今欲道經亏剌山, 入毛憐建州等衛, 請指路人, 從之乎?" 

 

『震光』 제4 · 5호 합간(중국어본)(1935년 11월호)▪ 先民의 遺蹟과 민족의 전도

 한 민족의 흥망성쇠는 정해진 운명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적자생존의 처절한 경쟁의 결과인가? 三苗와 漢族의 투쟁, 왜노와 대화민족의 투쟁은 시간이 흘러 이제 대화민족과 중한 두 민족 연합세력 간의 투쟁으로 바뀌었다.

과거의 역사가 증명하듯 민족과 민족 간의 투쟁에서 승리한 민족만이 자립자존할 수 있으며, 위대한 유산을 후세에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중한 두 민족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공동의 적으로부터 위기에 처한 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중한 두 민족은 삼묘나 왜노처럼 경쟁에서 패배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우리의 선인들은 동아의 개척자이자 지도자로서 찬란한 문화를 사방에 전파하는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오늘날의 東三省은 과거 고구려 · 발해 · 금 · 청 등 여러 나라에 의해 개척되었다. 역대 개척과정에서 韓人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도 한인은 동삼성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한인들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동삼성을 개발하여 맨 처음 이곳에서 벼농사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東京 · 武藏은 고대 백제 · 신라 · 가락인들이 처음 개척한 곳이다. 오늘날까지도 이곳에는 高麗村 · 聖天院 · 高麗王碑 · 狹山勝樂寺 · 山口觀音鐘 · 白鬚神社 등 우리의 선인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이 적지 않다. 백수신사는 고대 이 지역을 개척했던 우리 선인들의 신앙의 상징으로 向島 · 西介原 등 고려촌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백 수십 곳에 산재해 있다志木 · 白子와 같은 지명 역시 우리의 선인들이 명명한 것이다.

 東京 · 武藏 등지를 개척했던 우리의 선인들은 모두가 당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던 기술자들로 직공 · 피혁공 · 목공 · 화공 · 약사 등등 다양한 방면의 기술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武藏의 원시림을 개발하여 물길을 내고 도로를 내는가하면 여전히 미개한 수준에 있던 토착민들을 개화시켜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낙원을 건설하였다

.............. 武士는 본시 武藏 개척에 나섰던 여러 기술자 가운데 한 부류로 이 지역의 방위와 치안유지에 많은 공헌을 세웠으며, 이들 역시 모두가 우리의 선인들이었다.

 우리의 선인들은 서쪽으로는 중화로, 북쪽으로는 동삼성에, 동쪽으로는 일본에 진출하여 혹은 나라를 세우기도 하면서 앞선 문화를 전파하고 미개한 토착민들을 개화시키는 등 동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와잡설(松窩雜說)

근간에 사부(師傅) 안응창(安應昌)의 《잡록(雜錄)》을 보니,

“인조조(仁祖朝)에 황익(黃瀷)이 통제사로 있던 때에 어떤 배 한 척이 표류해 왔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남방국에 사는 사람인데, 그 나라는 일본의 서남쪽 2천여 리에 있으며, 밀물과 썰물이 없다.’ 하고는, 또 ‘그 나라는 본래 신라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신라가 망하게 되자 태자가 종족 1만여 명을 데리고 고려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나 골짜기는 좁고 사람은 많아 수용할 수가 없어서 민서(民庶) 20여 만 호와 함께 배를 나누어 타고 바다로 들어가서 어떤 섬에 이르러서 살았는데, 나라 이름을 남방국(南方國)이라 하고는 25개 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백성들은 모두 신라의 후예들이며 지금도 건재한다.’ 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이 혹시 영동의 뱃사람이 만났던 섬이 아닐까. 밀물과 썰물이 없다고 한 것은, 우리 나라 영동의 바다 중에서 일본의 서해와 서로 접하는 곳은 하나의 큰 못을 이루어 본래 밀물과 썰물이 없으니, 말이 서로 부합하는 것이 기이하다. 애오라지 이문(異聞)을 기록하여 이를 남겨두는 바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