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3. 15:30ㆍ일본관련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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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7년 정묘(1807) 8월 10일(기묘)
07-08-10[02] 제주 목사 한정운이 표류인을 송환시켜 달라는 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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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목사(濟州牧使) 한정운(韓鼎運)이 치계(馳啓)하기를,
“지난 신유년 8월에 이국인(異國人) 5명이 본주(本州)에 표류해 왔는데, 글과 말이 모두 능히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같은 해 10월에 비국(備局)의 행회(行會)로 인해 저들 5명을 이자(移咨)하여 성경(盛京)에 입송(入送)하였는데, 5명 중 1명은 도중에 병사하였고, 대국(大國)에서 도로 출송(出送)하였으므로, 저 네 사람은 도로 본주로 돌아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을축년에 병으로 죽었고, 남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조금 지각이 있으나 그 통하는 말이란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로 이해하기 곤란하고 그 배운 글은 어로(魚魯)를 분별하지 못할 판입니다. 그 나라에 대해 말을 하고 그 나라를 그려 보이는데, 언제나 ‘막가외(莫可外)’라 일컬으며 멀리 동남쪽을 가리켜 보입니다만, ‘막가외’란 나라 이름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유구(琉球)에서 표류해 온 사람에게 사정을 물을 적에 그 사람들이 유구의 표류인을 보고서 발광을 하며 소리를 질러대었으므로, 유구 사람이 모여 앉아 있는 곳에 불러들여 얼굴을 맞대게 했더니, 한참 동안 서로 보고도 처음에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조금 있다가 유구 사람 중에 궁평(宮平)이라 이름하는 자가 드러나게 알아차리는 기색이 있어 두서너 마디 말을 나누며 흔연히 서로 대면했는데, 이른바 막가외란 말에 그 사람이 넓적다리를 치고 뛰쳐나가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눈물을 비처럼 흘렸습니다. 유구 사람 통사(通事) 경필진(慶必進)이 그 사정을 궁평에게 물었더니, ‘임술년 경에 중국인 32명과 조선 사람 6명이 폐국(弊國)에 표류해 왔기에, 폐국에서 배를 정하여 양국의 표류인을 중국 복건성(福建省)으로 호송하였으나, 바다 가운데서 큰 바람을 만나 여송국(呂宋國)으로 표류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수초(水梢)로 같이 표류하여 그 나라에 다섯 달을 머물렀으므로, 그 나라의 사람을 대개 알게 되었고, 수로(水路)를 좇아 복건성으로 돌아가 복건성에서 각각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이 사람을 보고 이 말을 들었으니, 아마도 여송국의 사람인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듣고 보니 심히 기이하였습니다. 또 그 막가외의 국호(國號)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이 또한 여송국의 관음(官音)으로 말한 것인즉, 아마도 그가 여송국의 사람임은 정녕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같이 실어 나라로 돌아가서 여송국에 전송(轉送)하라는 뜻으로써 여러 가지로 글을 써서 달랬으나, 다른 나라의 표류인은 싣고 가기 어렵다며 계속 거절하였습니다. 이제 유구 표류인의 문답으로 보건대, 여송에서 복건까지는 배가 서로 통하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가 있고, 이미 그 국호를 안 뒤라면 본국으로 돌려보낼 방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유치해 두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이번에 이치를 논하여 치계하니, 청컨대 머물러 있는 저 세 사람을 다시 이런 뜻으로 성경에 이자(移咨)하고 입송(入送)하여 본국으로 전송하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 유구 사람의 말하는 바로 말미암아 비로소 여송국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뜻밖이니, 기이하다 하겠다. 여송은 복건성과 대개 배가 서로 통하나 제주는 성경(盛京)으로 이미 곧장 부탁하는 전례가 없으니, 본국에 전송하는 등의 절차를 묘당(廟堂)에서 품지(稟旨)하여 분부토록 하라. 그리고 길에 올랐을 때의 고휼(顧恤)하고 양식을 주는 방도와 거느려 보낼 때 주접(住接)하고 간검(看檢)하는 절차를 혹시 털끝만큼도 소홀히 하지 말아서, 이방(異邦)에 기우(寄寓)한 종적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의 회유(懷柔)하는 뜻을 알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이른바 여송에 관한 사실을 여러 글에서 상고해 보았더니, 민장(閩漳)과 멀지 아니한데, 지금은 불랑기(佛郞機)에 병합된 바 되었습니다. 본디 통공(通貢)하는 나라가 아니라 마땅히 사신의 왕래가 없으니, 북경(北京)에 입송하여 본국에 전송(轉送)하는 것은 실로 난편(難便)하겠습니다. 또 임술년에 성경 예부(禮部)에서 이자하여 도로 보낸 일이 있었으니, 또 여송이란 이미 없었던 나라를 유구 사람이 우연히 인정한 말에 경솔히 의거하여 자문을 갖추어 성경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 절사(節使)가 가는 길에 역관(譯官)의 무리로 하여금 이 일을 가지고 예부에 상세히 탐지해 보고서, 만약 회송(回送)할 길이 있다고 한다면 그때 다스려 보내어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제주 목사가 보고한 바를 보건대, 같이 실어 나라로 돌아가 여송에 전송하라는 뜻으로써 글로 유구 사람에게 달래자, 저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표류인이라 하여 실어 가기 어렵다며 계속 거절하였다고는 합니다만, 이미 인근에 있는 나라라 또한 왕래하는 길이 있을 것이니, 이번에 만약 조정의 지위(知委)로써 다시 유구의 표류인에게 효유(曉諭)한다면, 마땅히 듣지 않을 수가 없어 일이 심히 편리하고 좋을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만약 아직도 바람을 기다리느라 출발하지 않고 있다면, 이에 의거해 거행할 것을 청컨대 제주 목사에게 분부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곧 유구 사람이 곧장 돌아간 일로 인해 붙여 보내지 못하였다.
【원전】 47 집 585 면
【분류】 외교(外交)
[주-D001] 신유년 : 1801 순조 원년.[주-D002] 행회(行會) : 정부(政府)의 지시ㆍ명령을 각 관사의 장이 그 부하에게 알리고 실행 방법을 논정(論定)하기 위한 모임.[주-D003] 을축년 : 1805 순조 5년.[주-D004] 임술년 : 1802 순조 2년.[주-D005] 지위(知委) : 명령을 내려 알려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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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9년 기사(1809) 6월 26일(을묘)
09-06-26[04] 표류해 온 여송국(呂宋國 필리핀) 사람에 대해 성경(盛京)에 자문(咨文)을 보내 고국으로 돌려보내게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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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의 장계에,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의 등보(謄報)에 ‘신유년(1801, 순조1) 8월에 이국인(異國人) 5명이 본주에 표류해 왔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몰라서 당시 목사가 사유를 갖추어 급히 장계하였습니다. 비국(備局)이 공문을 보내 알린 것으로 인하여 성경에 자문을 보내 그들을 들여보냈습니다. 임술년(1802) 여름에 청나라 사람이 성경예부(盛京禮部)의 자문을 가지고, 그 전해 겨울에 들여보낸 표류인들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그 자문에 「5명 가운데 1명은 도중에 병들어 죽었습니다. 육로로 북경(北京)으로 보내려고 해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확실히 지적할 수가 없습니다. 조선은 원래 이웃 나라와 서로 가까우므로 온 방향을 지시하여 그 나라로 보내는 것이 비교적 순조롭고 편할 것이기에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묘당에서 각별히 제주 목사를 신칙하여 관청 건물을 내주고 양식과 찬을 대 주어 풍토를 익히고 말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중 1명은 을축년(1805)에 죽었습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조금 지각이 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고 글자도 전혀 몰랐으며, 자기 나라 이름을 쓸 때마다 막가외(莫可外)라고 하였습니다. 정묘년(1807) 가을에 유구(琉球) 사람이 표류해 왔을 때 이 3인의 얼굴과 복색을 보고서 여송국 사람이라고 지목하였고, 막가외란 여송국의 공식 발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전 목사 한정운(韓鼎運)이 이런 사유를 가지고 이치를 따져 급히 장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비변사에서, 절사(節使)가 청나라에 갈 때 임역(任譯)들로 하여금 예부에 상세히 알아보게 해서 돌려보낼 길이 있다고 하거든 그때 짐을 꾸려 보내라고 제주목에 분부하였습니다. 그동안에 사행이 두 차례 다녀왔지만 더 이상 묘당의 지시는 없었습니다. 임술년에 나주목 흑산도(黑山島)의 문순득(文順得) 등 6명이 표류하여 여송국에 들어갔습니다. 베껴 전하는 그의 〈표해록(漂海錄)〉을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기에 말을 만들어 나주목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나주 목사의 회답 첩정에 「문순득 등은 신유년 12월에 함께 배를 타고 대흑산도(大黑山島)로 가다가 서북풍을 만나 표류하였습니다. 다음 해 1월에야 한곳에 도착하였는데 곧 유구국 동북쪽에 있는 큰 섬이었습니다. 4월에 그 나라의 왕성(王城)인 백촌(白村)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큰 섬에서 백촌까지는 수로로 1500리였습니다. 그곳에서 5, 6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복건성(福建省) 사람 32명이 또 그 나라에 표류해 왔습니다. 큰 배 하나를 골라 두 나라의 표류한 사람이 한꺼번에 타고 10월에 출발하였지만 역풍을 만나 큰 바다로 들어갔다가 죽을 뻔하였고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큰 마을 앞에 도착하여 앞바다에 떠 있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세히 살펴보고서는 맞아 줄 뜻이 없었습니다. 10여 일 머무는 동안에 수십 년 전에 표류해 와서 머물고 있던 중국 상인이 불쌍히 여겨 와서 구해 주었는데, 비로소 여송국 서남쪽의 마의촌(馬宜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배를 타고 출발하여 여송국의 일로미(一咾𠳿) 지방에 도착하였다가 순풍을 만나지 못해 체류하였습니다. 계해년(1803) 가을에 배를 타고 출발하여 광동성(廣東省) 향산현(香山縣) 오문(澳門 마카오) 지방에 도착한 뒤 북경을 거쳐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송의 풍속은 모두 은전(銀錢)을 사용하고 1년에 두 번 벼를 수확하며 겨울에도 진과(眞苽 참외)와 서과(西苽 수박)가 있고 죽순이 무성하고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있으며 서리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타국 사람을 막지 않으므로 시장에 왕래하며 물건을 사고팔았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얼굴이 검푸른 사람은 자녀도 얼굴이 검푸르고, 얼굴이 새하얀 사람은 자녀도 얼굴이 새하얗습니다. 글자는 모두 동글동글하고 가로로 쓰여 있어서 해석할 길이 없었습니다. 관(冠)의 모양은 우리나라의 평량자(平涼子)와 같지만 가장자리가 좁고 머리 부분은 크며 대부분 갈대나 대나무로 촘촘하게 짰습니다. 위아래 옷은 모두 홑겹이고 단추로 열고 잠갔습니다. 지금 제주에 표류하여 머물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검기도 하고 희기도 하다고 하였으니 여송국 사람인 듯합니다. 그 나라 말로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만한 단서가 있을 것이라고 하기에 그 나라 말의 음(音)을 후록(後錄)하여 공문을 보냅니다. 이것을 근거로 물어서 시행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주 목사의 회답하는 첩정에 의거하여 표류해 머물고 있는 3명을 불러들여 그 나라의 말로 문답해 보니, 구구절절 들어맞았습니다. 그러자 미친 사람이나 바보처럼 울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는 모습이 참으로 매우 불쌍하였습니다. 또 문순득 등이 광동을 거쳐 북경을 통해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만큼, 청나라 사람들이 그 나라에 왕래하고 물건을 교역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상에게 여쭈어 처리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등보로 보건대 표류한 사람을 지금까지 머물러 둔 것은 모두 발음과 문자가 우리와 달라서 어느 나라에서 표류해 왔는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거주지가 어디인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고 노정(路程)도 지정되었습니다. 더구나 또 9년 동안 타향에서 지낸 처지라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날로 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인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여송국 사람 3명을 성경에 들여보내 중국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일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 뜻을 여쭈어 분부하게 해 주소서.”
하여, 전교하기를,
“여송국 사람을 오래 머물러 둔 것은 언어가 통하지 않고 글자를 이해하지 못한 탓에 그런 것이었다. 이제 장계를 보니 앞으로는 필시 길을 분간하여 알려 주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 표류했던 우리나라 사람 중에 여송국에 가 본 사람도 있으니 그들이 여송국 사람인 것은 더욱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9년 동안 정처 없이 살다가 겨우 3인만 남았는데, 전에 유구 사람을 보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한층 절실하였고, 이제 또 언어가 들어맞자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또 이같이 호소하며 울었다. 이것은 당연한 인정이다. 그리고 정상도 매우 가엾고 불쌍하다. 이 일에 대해 말을 만들어 자문을 지은 다음 성경에 보내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공궤하는 일과 호송하는 일 등도 각별히 신칙함으로써 두텁고 따뜻하게 대해 주는 조정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일체 분부하라.”
하였다.
[주-D001] 자기 …… 하였습니다 : 《일성록》 순조 7년 8월 10일 기사에 보인다. 이들이 막가외라고 한 것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면 중국의 막가외, 즉 마카오로 가야 한다는 뜻이었던 듯하다.[주-D002] 예부 : 원문은 ‘禮曹’이다. 《일성록》 순조 7년 8월 11일 기사에 근거하여 ‘曹’를 ‘部’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3] 전 …… 분부하였습니다 : 《일성록》 순조 7년 8월 10일, 11일 기사에 보인다.[주-D004] 표해록(漂海錄) : 전라도 나주목의 우이도(牛耳島)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丁若銓)이 유구국과 여송국에 표류했던 문순득의 일을 대필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을 가리킨다. 《丁若銓ㆍ李綱會, 柳菴叢書, 新安文化院, 2005》 〈표해시말〉에는 ‘文順得’이 ‘文淳得’으로 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하령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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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9년 기사(1809) 6월 26일(을묘)
09-06-26[01] 여송국의 표류인을 송환시키라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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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송국(呂宋國)의 표류인(漂流人)을 성경(盛京)에 이자(移咨)하여 본국(本國)으로 송환(送還)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신유년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막가외(莫可外)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관(移咨官)을 딸려서 성경(盛京)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확실히 지적할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에 머루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를 지급하고 양찬(粮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命)이 있게 된 것이다.
【원전】 47 집 634 면
【분류】 외교-야(野)
[주-D001] 여송국(呂宋國) : 필리핀을 가리킴.[주-D002] 이자(移咨) : 자문(咨文)을 보내어 통보함.[주-D003] 신유년 : 1801 순조 원년.[주-D004] 임술년 : 1802 순조 2년.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계산기정 > 계산기정 제3권 > 관사에 머물다[留館] ○ 갑자년 > 최종정보
계산기정 제3권 / 관사에 머물다[留館] ○ 갑자년(1804, 순조 4) 1월
5일(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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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옥하관에 머물렀다.
한림 홍오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함[訪洪梧翰林不遇]
한림 홍오는 호가 오생(梧生)인데 지원(芝園)과 본래 아는 사이이다. 그래서, 그와 한차례 만나기로 약속했기에, 아침에 이야(李野)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의 집은 유리창(琉璃廠) 이자호통(二子衚衕)에 있고, 집을 지키는 사람 몇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맞이하여 의자에 앉힌 다음 말하기를,
“동생 선생께서는 어제 조령(朝令 조정의 명령)으로 인해 서상관(庶常館)에 갔습니다. 찬수(撰修)하는 일은 시일이 걸려야 할 것이고, 그 일이 끝나야 비로소 집을 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다. 그래서 그를 친히 만나볼 수는 없겠기에 드디어 종이를 찾아서,
“일찍이 뵈옵지 못하였더니, 저희 벗 조지원(趙芝園)을 인해서 훌륭하신 이름을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차례 만나 뵙기를 절실히 약속하고 선생의 관사에 찾아왔더니, 공교롭게도 출타하시어,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바입니다.
다시 저희 벗 조지원을 통해서 만약 선생께서 한가히 계시는 날이 있다는 것을 들으면, 의당 다시 오겠습니다. 이것을 책상에 머물러 두어 선생님께서 보시게 하옵니다.
동화(東華) 모(某)는 동생 선생 기하(丌下 책상 아래)에 절하고 올리나이다.”
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서 집 지키는 사람에게 주고 돌아왔다.
두 짝 문은 바람을 따라 저절로 닫혔다 열렸다 / 雙扇隨風自闔開
봄은 고요한데 뜰 매화 흩어졌네 / 春陰寂寞散庭梅
철사로 된 새장 속의 붉은 앵무새는 / 鐵絲籠裡紅鸚鵡
사람의 말 배워서 손님 옴을 기뻐하네 / 學得人言訢客來
이층루(李層樓)
모든 시장 점포를 두루 돌아본 다음, 도로 정양문 밖에 이르러 ‘이층루(李層樓)’라고 일컬은 한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셨다. 주효(酒肴)ㆍ과이(果餌)의 종류에는 아름다운 품종 아닌 게 없었으니, 이는 연경에서 가장 이름난 것이다.
황제가 만약 기내(畿內)를 거둥할 적에는 이 술집으로 하여금 그 음식의 기구를 챙겨서 어가(御駕)가 이르는 곳으로 먼저 가게 해서, 따르는 벼슬아치들이 모두 돈을 내고 후량(糗糧) 대신 그것을 사 먹도록 한다고 한다.
푸른 채찍 꽃수레 소년의 무리들 / 靑鞭花轂少年流
연경에 모여들어 의기 양양하네 / 都會燕城意氣留
술상 머리서 새로 빚은 술 좋다고들 말하니 / 共說壚頭新釀厚
천금이 산처럼 쌓인다 이층루에 / 千金山積李層樓
표류주자가(漂流舟子歌)
우리나라 흑산도(黑山島) 백성으로서 남해에 표류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곳에 도착하여 관사에 머물고 있는 사람 넷이 있었다. 이날 밤 그들을 불러다가 그 전말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신유년 겨울에 물고기를 사기 위해 곡물(穀物) 약간을 배에 싣고 소흑산도에서 대흑산도로 갔다가 이듬해 정월 돌아오는 길에 바다 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0일 만에 어느 한 항구에 닿으니 마침 어떤 사람이 물 건너편에서 영접을 하였는데 그 사람은 우리나라 말을 약간 알았습니다. 그에게 그 지방을 물었더니, 그곳은 바로 유리국(琉璃國)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관(官)에서 배를 검색하더니 곧 관청에 안접(安接)시키고 의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10월 초에 그들의 연경 진공사(燕京進貢使)를 따라서 배를 출발시켰었는데, 10여 일 만에 또 바람을 만나 표류, 진공사의 배 두 척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던 끝에 어느 한 곳에 정박했더니, 언덕 위에 흰옷 입은 사람이 있다가 멀리 바라보더니 곧 달려왔습니다. 배에 같이 탔던 사람들은, 이제야 살아날 길이 있구나 하고는, 그를 따라간 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한 사람이 바삐 돌아와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무리들 태반이 그들에게 피해를 당했다. 그래서 나는 도망해 왔다.’ 하기에, 드디어 그와 함께 바삐 배를 옮겨, 바다 가운데에 닻을 내렸으니, 정박할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되풀이한 지 4일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바다를 가로질러 달려온 자그마한 배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소주(蘇州) 사람으로서 상업(商業)을 하느라, 여기에 이르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드디어 그들의 힘을 입어 방옥(房屋)에 안접(安接)되고, 또 쌀을 무역하면서 서로 돕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이 어느 지방이냐고 물었더니, 일록국(日鹿國)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또 길을 떠나 15일 만에 사분지(沙分地)에 닿았으니, 이날은 바로 3월 소회(小晦)였습니다.
또 석 달을 가서 소주(蘇州)에 닿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배에서 내려 육지로 갔는데 관가(官家)에서 공궤(供饋)해 준 것이 아주 좋았습니다.
10월 3일 소주에서 출발, 12월 4일 연경에 닿았더니, 예부(禮部)에서 의식을 급여하고 절사(節使)가 올 때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일행 중 두 사람은 다른 배에 탔었는데, 여태껏 이르지 않으니, 그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보면, 그들은 천하를 훌륭히 구경했다고 할 만하건만, 무식한 탓에 그것을 만분의 일도 기록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표류된 사람의 성명은 즉, 문호겸(文好謙)ㆍ문순득(文順得)ㆍ박양신(朴亮信)ㆍ이백근(李百根)ㆍ이중태(李重泰)ㆍ김옥문(金玉文)인데, 문순득ㆍ김옥문은 여태껏 이르지 아니한 자들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을 장하게 여겨, 술 한 잔을 가득히 부어 주었다.
흑산도 민속은 매우 어리석어 / 黑山民俗太蠢蠢
바다에서 이익을 쫓느라니 대부분 곤궁하구려 / 濱海逐利多困窘
석우풍(石尤風)이 어찌 다니는 사람 사랑할 리 있나 / 石尤何曾愛行人
만경의 사나운 물결 한없이 이네 / 萬頃惡浪吹不盡
일엽편주 아득히 가는 대로 놓아두니 / 一葦茫然縱所之
떠가는 배 문득 허루신과 같구나 / 泛泛忽如噓樓蜃
길은 강절의 하늘 아득한 데로 통하였고 / 道通江浙天浩渺
돛대는 오초의 산 높은 데에 떨어졌네 / 帆落吳楚山嶾嶙
일록국 사람 가죽으로 옷해 입고 / 日鹿國人皮爲衣
가을바람에 새 쫓는 매처럼 용맹스럽네 / 猛如逐雀秋風隼
해동의 여아는 공연히 한이 맺혀 / 海東女兒空結恨
누굴 위해 다시 공후인을 짓는고 / 爲誰更作箜篌引
네 만약 문장의 안목 갖추었다면 / 使汝若具文章眼
닿은 곳마다 시로써 번민 잊을 수 있었을걸 / 觸境有詩能排憫
원하노니 네 고향엘 가거들랑 / 願汝鄕山歸去日
농가에 안식해서 농사나 힘쓰게나 / 安息田家服畦畛
[주-D001] 석우풍(石尤風) : 역풍(逆風)으로 어원은 다음과 같다. 석씨(石氏)의 딸이 우랑(尤郞)에게 시집가 정의가 매우 좋았다. 하루는 그 남편이 장사하러 먼 길을 뜨려 하니, 그녀는 만류했다. 우랑은 듣지 않고 떠나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병이 나서 죽게 되었다. 그녀는 죽을 임시에, “내 능히 만류하지 못해 이 지경 된 게 한이니, 이제 장사하러 원행하는 이 있으면, 내 마땅히 큰바람을 일으켜서 천하의 부인들을 위해 저지하리라.” 했다. 이 후로 장사치들은 배를 띄울 적에 역풍을 만나면 ‘석우풍’이라 하고 가지 않았다 한다. 《江湖紀聞》[주-D002] 허루신(噓樓蜃) : 신기루(蜃氣樓)를 말한다. 천기(天氣)가 평온할 때 어른거리는 물체가 더러 사막에 나타나서 물에 반사된다 한다. 그것을 신기루라 하는데, 큰 조개가 토한 기운이라 한다. 여기서는 떠가는 배가 마치 신기루처럼 어른거린다는 뜻이다. 이빈(李頻)의 송허혼시어부윤주시(送許渾侍御赴潤州詩)에도 “祖席離烏府 歸帆轉蜃樓”라 하였다.[주-D003] 공후인(箜篌引) : 노래 이름으로 고려 때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처 여옥(麗玉)이 지었다. 여옥은 그 미친 남편이 물을 마구 건너는 것을 미처 뒤따르지 못하여, 결국 빠져 죽게 되자, 다음과 같이 노래했던 것이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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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연기 권1 / 1804년(순조 4년, 갑자)
26일(경술) 맑고 따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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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리를 가서 책문(柵門)에 머물러 묵었다. 【의주에서부터 책문까지는 120리이다.】
동이 트자 출발하였다. 물줄기는 굽이지고 산은 뻗쳐 있는데, 혈암(穴巖)을 지나자 북쪽으로 드넓은 평원이 놓여 있다. 멀리 보이는 봉황산(鳳皇山)과 그 동남쪽의 짙푸른 산봉우리들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니, 우리나라 한양에서 교외로 나올 때 삼각산(三角山)의 여러 봉우리들이 보이던 풍경과 비슷했다.
서장관은 강을 건넌 이후부터 독교(獨轎) 대신 의주부의 좌거(坐車)를 타고 연경까지 가는 것이 규례이지만, 나는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독교를 타고 책문을 통과하였고, 좌거는 빈 채로 뒤따르게 하였다. 계명(季鳴)이 시험 삼아 좌거를 타 봤는데, 길이 좁고 바위가 많아 울퉁불퉁한 곳을 지날 때에는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이 나서 편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도리어 조랑말〔款段〕 위에 실려 가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봉황산에서 1리쯤 떨어진 곳에 큰 목책이 10여 리에 걸쳐 죽 늘어서 있어서, 내를 가로지르고 산을 이어 빽빽하게 세워져 있고, 높이는 한 길(丈) 남짓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책문(柵門)인데 책문 자체는 그저 하나의 초옥(草屋)이었다. 삼사가 책문 밖의 막차에서 점심을 먹었고, 황력재자관(皇曆齎咨官) 홍처순(洪處純)이 책문 안쪽에서 나와서 인사를 하고, 저들에 관한 소식을 대략 전해 주었다. 그가 인솔해 온 전라도 나주(羅州) 출신의 표류민 문순덕(文順德) 등 2인도 함께 왔기에 어찌 된 일인지 사유를 물었다. 두 사람은 나이가 모두 20여 세로, 신유년(1801, 순조 원년) 정월에 바람에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까지 갔다가 금릉(金陵 남경(南京))을 거쳐서 뭍으로 나왔는데, 여송(呂宋 필리핀)과 광동(廣東), 산동(山東)을 두루 거친 뒤 북경(北京)에 이르렀고, 몇 달 동안 체류한 끝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을 보자 눈물 콧물을 쏟으며 그간의 고생을 말하였으며, 자신의 본명은 순득(順得)이었으나 금릉 사람이 순덕(順德)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순덕이 거칠게나마 문자를 알았으므로, 노정기(路程記) 1본(本)을 써서 주머니 속에 지니고 있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장관(壯觀)들은 참으로 망양지탄(望洋之嘆)을 느끼게 하였다.
봉황성장(鳳皇城將)에게 일이 있어서 가장(假將)과 문어사(門御史), 세관(稅官)들이 아문(衙門)에 나와 앉아 있었다. 우리들은 소주(燒酒)와 약과(藥果), 포육(脯肉), 말린 꿩고기〔乾雉〕 등의 음식으로 상을 차려서 예를 올렸다. 오후에 성문을 열고 맞아들이면서 사람과 말을 점검하여 짐바리를 먼저 들어가게 하니, 어지럽게 굴면서 서로 앞을 다투는 폐단이 없었다. 세 사신이 차례로 들어가고, 원역과 군관, 여러 종인들도 차례로 들어감으로써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문 앞에 이르렀을 때 세 사신은 길 한쪽으로 조금 비켜서 지나갔고, 종인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갔다. 책문 안쪽에는 민가가 30여 가구쯤 되는데 여염의 사람들도 평범치 않고 음식과 술은 구리그릇이나 은그릇을 썼고, 잡화점〔雜貨鋪〕의 크기도 우리나라와는 달랐다.
사신단은 전례에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묵었다. 서장관이 머물 곳도 이미 정해진 집이 있었으니, 주인의 성은 어씨(魚氏)였고, 어씨는 책문 안의 번성한 가문이었다. 그의 숙부와 조카, 형제들은 집을 나란히 연이어 거주하고 있었는데, 매년 사신들을 영접하다 보니 손님을 대하는 예법을 조금은 알았다. 집안의 부녀자들이 얼굴을 드러낸 채로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들의 풍속에 비록 나이 든 노파라 하더라도 귀고리를 하고 꽃을 꽂는데, 과부는 꽃을 꽂지 않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배 자루〔菸袋〕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황량한 변방에 있는 서민의 집인데도 온돌방과 집의 규모가 높고 큰 것이 이러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도읍지와 큰 고을이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방의 좌우에 캉〔炕〕이 있어 앉아 보았다. 캉은 텅 빈 듯했으나 따뜻했고, 바람이 부는 듯했지만 조용했으니 신기했다. 여기서부터는 방장(房帳)을 치고 잤다.
[주-D001] 독교(獨轎) : 독교(獨轎)는 소의 등에 싣거나 혹은 말 한 마리가 끄는 가마를 말한다.[주-D002] 조랑말〔款段〕 : 조랑말 혹은 느리고 둔한 말을 뜻한다.[주-D003] 봉황산에서 …… 초옥(草屋)이었다 : 현재 중국의 변문(邊門) 지역이다. 이덕무(李德懋)의 《입연기(入燕記)》에 “석양(夕陽)에 책문(柵門) 밖에 이르렀다. 북쪽에는 높은 봉우리가 솟았고, 남쪽에는 긴 시내가 흐르고 있었으며, 서쪽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는데, 겨우 한 길 남짓하였다. 목책 가운데에 큰 판자문을 만들고 볏짚으로 덮었다.[夕陽到柵門外. 北峙高峯, 南流長川, 西設木柵, 僅丈許. 中設大板門.]”라고 하였다.[주-D004] 문순덕(文順德) 등 2인 : 《계산기정》 갑자 1월 5일, 표류주자가(漂流舟子歌)를 보면, 흑산도 백성으로 표류한 사람은 6인이다. 이중 4명은 1804년 1월 이미 북경서 조선 사절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배를 탄 문순덕 등 2명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아마 이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주-D005] 두 사람은 …… 이르렀고 : 《실록》에는 문순득이 나주 흑산도 사람으로 여송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왔으며, 여송 사람들의 모습과 방언을 기록해 왔다는 내용만 보인다. 그런데 1804년 7월 당시 표류민 송환을 알리는 청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에는 ‘문순득(文順得) 김옥문(金玉文) 두 명이 풍랑으로 유구(琉球)에 갔다가 다시 여송국(呂松國)까지 가게 되었는데, 여송에서 구조되어 광동(廣東)으로 보내졌고 순천부(順天府)를 거쳐 북경에 이르러 회동관에 머물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국역 순조실록 9년 6월 26일》 《同文彙考 原編續 2 漂民 [甲子] 禮部知會琉球漂人出送咨》[주-D006] 손에서 놓지 않았다 : 원문은 ‘手不擇菸袋’인데, ‘擇’은 ‘釋’의 오기(誤記)로 보고, 수정, 번역하였다.[주-D007] 방장(房帳) : 겨울에 외풍을 막기 위해 방안에서 방문이나 창문에 치는 휘장 등을 말한다.
경세유표 제2권 / 동관 공조(冬官工曹) 제6
전환서(典圜署): 제조 경 1인, 주부 중사 2인, 봉사 하사 2인.
서리 2인, 조례 8인.
전환서란 주전소(鑄錢所)이다. 옛적에 구부환법(九府圜法)이라 한 것은 모두 돈 만드는 것을 이른 것이다. 지금 돈 만드는 일은 모두 영문(營門)에서 하는데, 그 제도가 만에 하나도 같지 않아서, 혹은 크고 혹은 작으며, 혹은 두껍고 혹은 얇다. 글자가 흐릿하고 분명치 못하여, 우둔(愚鈍)한 백성은 사사로 주조한 것과 분별해낼 수가 없다. 하물며 돈 형(型)에 재료를 조합하면서 거칠고 약한 물건을 섞으므로, 손에 닿는 대로 부서져서 능히 10년을 견디어내지 못한다. 이것도 또한 이용감에서 중국의 주전법(鑄錢法)을 배워 모두 전환서에서 주조할 것이다.
환법은 본디 경중이 있는데, 경중은 가벼운 돈과 무거운 돈을 말한다. 만약 한 닢 돈을 약 1만 꿰미 주조할 때에 열 닢 무게를 한 닢으로 할 것 같으면 1천 꿰미만 주조해도 작은 돈 1만 꿰미에 해당하며, 또 백 닢 무게를 한 닢으로 하면 100꿰미만 지어도 중간 돈 1천 꿰미에 해당된다. 그렇게 하면, 주조하는 데에 공비가 줄고 유통하는 데에 계산하기가 편리할 뿐 아니라, 돈 닢이 두꺼워서 오래도록 견딜 것이니 이것이 경중의 본법(本法)이다. 지금 천하 만국에 은전(銀錢)ㆍ금전(金錢)이 있고, 은전ㆍ금전 중에 또 대ㆍ중ㆍ소 3층이 있다.
나주 흑산도 사람 문순득(文淳得)이 가경(嘉慶 : 淸仁宗의 연호, 1796~1820) 신유년 겨울에 서남(西南) 바다에 표류하여, 유구(琉球)ㆍ중산국(中山國)ㆍ영파부(寧波府)ㆍ여송국(呂宋國)ㆍ안남국(安南國)을 두루 구경하고 광동(廣東) 향산(香山) 모퉁이에 이르러 해외 여러 나라 큰 장사치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돈이 대개는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지금의 동전 한 닢 무게로써 은전 한 닢을 주조하여 동전 50을 당하고, 또 은전 한 닢 무게로써 금전 한 닢을 지어서 은전 50을 당하게 하되, 대ㆍ중ㆍ소 3층이 있도록 하면, 3종류의 금속이 총 9종류의 돈으로 되는바 참으로 9부환법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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