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4. 17:13ㆍ백두산
농암집 제11권 / 서(書)
자익에게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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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에 지난 24일과 28일날 보낸 두 통의 편지를 받고 부모님을 모시면서 한편으로는 또 여러 가지 공부를 한다는 소식을 모두 듣게 되어 어찌나 흐뭇하고 마음이 놓이며 가슴이 활짝 펴지는지 마치 직접 마주 대한 것 같았다네. 요즘 들어 비로소 가을 날씨로 접어들고 있는데, 부모님을 모시는 자네의 근황이 어떠한지 궁금해지네. 편지를 줄곧 받기는 했지만 이어지는 그리움은 그칠 때가 없다네.
나는 여러 진(鎭)을 두루 다니며 순찰하고 저 끄트머리에 있는 서수라(西水羅)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곳 서수라는 우리나라의 영토가 끝나는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큰 바다와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바라보고 있다네. 천하에 이보다 더한 장관이 없을 것이니 박망후(博望侯 한(漢)나라 장건(張騫))가 저 용문(龍門)에 여행했던 것이 과연 이보다 나았을지 모르겠네. 다만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서 한두 시구로 실제 경관을 기록해 두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네. 가는 곳마다 경치를 시로 옮겨 놓았다는 소릉옹(少陵翁 두보(杜甫))이 매번 생각났다네.
시 짓기를 탐닉하던 자네의 버릇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하니 이는 정말 좋은 소식이네. 나는 시에 소질이 없기 때문에 게을러져서 근래 몇 달 동안은 10여 수도 짓지 못했네. 경치 좋은 곳에 갈 때마다 애써 시를 짓느라 괴로움을 면치 못하면서도, 시 짓기를 떨쳐버리지 못하니 한탄스럽네. 여행의 피로가 마구 몰려와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네.
어우집 제1권 / 시(詩)○서수록(西繡錄)
벽단으로 가는 도중에〔碧團途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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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의 제일 봉우리에 말을 세우니 / 立馬關山第一峯
아래로 오랑캐 땅에 접하여 황룡까지 이어졌네 / 平臨胡地接黃龍
광활한 사막은 삼천 리에 펼쳐졌고 / 茫茫沙磧三千里
높고 높은 산맥은 백이관이라네 / 嵲嵲岡巒百二重
삭북의 살벌한 바람에 큰 깃발 나부끼는데 / 朔北陰風隨大旆
남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찬 봉화에 보내네 / 終南歸思送寒烽
어느 때에 큰 칼로 청해를 평정하고 / 何時尺劍澄靑海
오랑캐 땅 만호후 되어 베개 높이 베려나 / 高枕戎荒萬戶封
[주-C001] 서수록(西繡錄) :
유몽인이 평안도 순변 어사(巡邊御史)에 제수되었을 때 지은 시이다.
[주-D001] 황룡 :
황룡새(黃龍塞) 또는 황룡부(黃龍府)라 부르며 길림성(吉林省) 농안현(農安縣)에 있다. 본래 발해(渤海)의 부여부(扶餘府)였는데 요(遼) 태조가 발해를 정벌하고 오다가 이곳에서 황룡을 만났다 하여 이렇게 이름을 고쳤다.
어우집 후집 제1권 / 시(詩)○조천록(朝天錄)
산촌에서 밤에 앉아〔山村夜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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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자산 앞에서 잠시 안장 풀었는데 / 狼子山前暫解鞍
마침 산에서 뜨는 싸늘한 달을 만났네 / 正逢凉月吐林巒
고향은 이미 넓은 바다 너머에 있고 / 鄕關已越滄溟闊
나그네 길 여전히 헤매는데 강물은 차네 / 客路猶迷潞水寒
북쪽 사막에는 유월에도 서리 내리는데 / 六月風霜來北漠
한 구역 강산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네 / 一區流峙似東韓
하늘이 나를 연릉계자로 삼으리니 / 天將使我延陵季
주나라 관광하러 먼 길 가는 고생도 상관없네 / 莫憚觀周遠役酸
동문선 제13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이미수와 함께 담지의 집에 모여서[與李眉叟會湛之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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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林椿)
오래도록 유락하여 서울을 떠나서 / 久因流落去長安
초나라 관을 쓰고 남방 음곡썼네 / 空學南音戴楚冠
세월은 꿈깨고 나니 양의 어깻살 익는다 / 歲月屢驚羊胛熟
시와 술로 다시 모이니 추운 때로구나 / 風騷重會鶴天寒
10년 동안 살아온 일을 등돋우고 이야기하세 / 十年計活挑燈話
반 세상 허튼 공명을 거울 당겨 들여다 보네 / 半世功名抱鏡看
늙어 후배들 따라다니는 것 스스로 우스워라 / 自笑老來追後輩
글 생각 벼슬할 뜻이 둘 다 쇠한 주제에 / 文思宦意一時闌
[주-D001] 세월은 …… 어깻살[胛] 익는다 :
시간이 짧고 빠름. 골리알부(骨利斡部)는 한해(瀚海) 북쪽에 있는데, 거기서 또 북으로 바다를 건너면 낮이 길고 밤이 짧아, 해가 지자 양의 어깻살[羊胛]을 삶아 익을 동안에 동쪽이 벌써 밝는다.
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 세조 10년 갑신 > 5월 10일 > 최종정보
세조 10년 갑신(1464) 5월 10일(임술)
10-05-10[02] 강효문이 골간 올적합의 동향에 대해서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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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 강효문(康孝文)이 경흥진 절제사(慶興鎭節制使) 정산휘(鄭山彙)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이달 4월 16일에 올량합(兀良哈) 종장아(從將阿)가 고하기를, ‘지난 봄에 내가 동복(同服) 아우 아양아(阿陽阿)를 만나보는 일로 인하여 몽고(蒙古)에 도착하였더니, 골간 올적합(骨看兀狄哈)이 배 3백여 척을 가지고 이달 17, 8일 사이에 조산보(造山堡)를 몰래 습격(襲擊)할 것을 의논하고, 인하여 우리와 같이 하려고 하였으나, 우리가 임시 핑계로써 대답하고 즉시 본 곳을 떠나서 길을 배나 빨리 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적(賊)의 음모(陰謀)는 예측할 수 없으므로, 신이 즉시 정산휘로 하여금 말을 달려 조산보에 가서 군사를 숨겨 적변(賊變)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하니,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신숙주 등이 의논하기를,
“이것은 확실한 것이 못됩니다. 가령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변장(邊將)이 이미 기회에 따라 적변(賊變)에 대응(對應)하고 있으니, 다시 포치(布置)할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원전】 7 집 625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통신(通信)
[주-D001] 몽고(蒙古) :
몽구(Mongu) 하반(河畔).
태종 6년 병술(1406) 9월 1일(정사)
06-09-01[03] 명의 왕벌응지가 올적합 만호 등 25명을 회유해 경사로 데리고 가다
선조 27년 갑오(1594) 7월 19일(을미)
27-07-19[06] 비변사가 골간이 침범한 서수라 권관 김대항을 나추할 것을 아뢰다
>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16년 기묘 > 5월 28일 > 최종정보
고종 16년 기묘(1879) 5월 28일(신축) 맑음
16-05-28[20] 중희당에서 소대할 때 참찬관 박정양 등이 입시하여 《통감》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니, 이호익이 아뢰기를,
“그 나라는 동해 밖 먼 변방에 있는 땅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낮이 길고 밤이 짧다는 것이 옳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 동쪽에도 다른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에 우리나라 동쪽에는 다른 나라가 없다고 했는데, 지금 보면 여러 오랑캐 나라가 비일비재한 것 같다.”
하니, 이호익이 아뢰기를,
“그런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고,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고전번역서 > 오주연문장전산고 >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1 > 논사 > 최종정보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1 / 논사(論史) -
웅도(熊島)의 사실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60) 인조17년 16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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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인조(仁祖) 17년(기묘)은 명 의종(明毅宗) 숭정(崇禎) 12년이고, 후금 태종(後金太宗) 숭덕(崇德) 4년이다. 이해에 만주(滿州) 병부(兵部)에서 웅도(熊島)의 정벌을 도와달라는 자문(咨文)을 우리나라에 보내왔다.
후금(後金) 만주 병부의 자문에,
“조선(朝鮮)이 짐(朕)과의 맹약(盟約)을 어길 적에 극동(極東)에서 피장(皮張 육축(六畜)의 가죽을 말함)을 진공(進貢)하던 거민(居民) 경하창(慶河昌) 일당이 우리나라를 배반하고 늑복(勒伏)에 이르러 한(漢 명(明) 나라를 가리킴)과 통하면서 그곳을 웅도(熊島)라 이름하고 조선과 서로 왕래하였다. 조선이 우리나라에 신복(臣服)한 이후로, 그 안상(岸上)에 거주하는 반수(半數)의 백성들은 모두 지금도 예전과 같이 피장(皮張)을 진송(進送)하는데, 그 하창(河昌) 본인과 그의 아들, 그리고 기라라지둔아(其羅羅只屯阿) 등은 그대로 웅도에 거주하면서 우리나라에 진공(進貢)하기를 꺼리고 항상 조선 지방인 경흥(慶興)의 아오지보(阿吾地堡)ㆍ무이보(撫夷堡)ㆍ서수라보(西水羅堡)ㆍ조산보성(造山堡城) 등지와 왕래하면서 교역(交易)하고 있으니, 조선왕(朝鮮王)은 주사(舟師) 1천 명을 징발하여 웅도를 공취(攻取)하고, 하창ㆍ기라라지둔아(其羅羅只屯阿) 등 일당 중 두목을 모두 잡아올 것이요, 그 나머지 백성들에게는 그대로 안상(岸上)에 거주하면서 피장을 진송하도록 하고, 다시는 왕래하면서 문신(問訊)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 그 자문(咨文)에 답하기를,
“소방(小邦)은 전부터 후라도(厚羅島)가 있는 줄은 알지만 웅도라는 것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근래에 지로인(指路人 길을 인도하는 사람)에게 자세히 물어본 결과, 그곳을 가려면 수십 일이 걸릴 만큼 먼 거리에 있는데, 풍랑이 아주 거세다고 하므로 그것이 염려였습니다. 그런데 이어 들으니, 지로인이 말하기를 ‘군사 5백 명만 징발하여도 충분히 이곳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하므로, 그의 말대로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목장흠(睦長欽)ㆍ북병사(北兵使) 이현달(李顯達)에게 통문(通文)하여 궁포(弓砲 활과 포)를 선택하고 배를 모은 다음, 별도로 북우후(北虞候) 유찬선(劉讚先)을 영장(領將)으로 임명하여 진발(進發)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후에 또 올린 자문에는,
“웅도를 토벌하러 간 군사로 말하자면, 포수(砲手)가 4백 명, 사수(射手)가 1백 명에다 병선(兵船)과 양선(糧船)을 합해서 모두 1백 20척으로 영장(領將) 유찬선(劉讚先)이 두 차인(差人)과 함께 3월 22일 서수라(西水羅) 앞 포구(浦口)에서 항해(航海)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유찬선의 장계(狀啓)에 따르면, 항해한 지 반 달 남짓 되었을 때,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 위급했던 상황을 말로 다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배가 떠날 때 좌영장(左營將) 관하(管下)인 길주(吉州) 출신 한희룡(韓希龍) 등을 별도로 명하여, 먼저 쾌속정(快速艇)을 몰고 가서 요해처(要害處)에 잠복해 있으면서 비상사태를 살피게 하였습니다.
그런 결과 과연 저들 네 사람이 몰래 조그마한 배 세 척을 몰고 활과 화살을 허리에 꽂은 채 숲 속에 숨어 있다가 우리 복병(伏兵)에게 체포되어 군전(軍前)에 붙들려 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은 곧 하창의 아들 길라내(吉羅乃)였고, 또 한 사람은 곧 하창의 조카인 아두(牙豆)였고, 또 한 사람은 곧 하창의 족속인 매개(梅介)였고, 또 한 사람은 하창의 종자(從者)인 고랑아(古郞阿)였습니다. 이 네 사람에게 돌아가면서 심문(審問)한 결과, 웅도에서 얼마 되지 않은 장도(獐島)에 하창이 옮겨가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는 4월 초 9일 밤에 우리 군대가 장도를 포위하였더니, 하창 등이 우리 배를 바라보고 달아나다가 산택(山澤) 사이에서 복병(伏兵)을 만나 도저히 탈출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문득 되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김명길(金命吉) 등을 시켜 설득시키는 한편, 그의 아들 길라내(吉羅乃)를 시켜 그 아버지를 설득시키기를 ‘항복하면 죽이지 않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하면서 잇달아 군사를 재촉하여 일제히 대포(大砲)를 발사하였더니, 하창의 형제(兄弟)들이 남녀 15명을 거느리고 군전(軍前)에 와서 신복(臣服)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네가 어찌 감히 황조(皇朝)를 배반하였느냐?’고 힐책하였더니, ‘감히 배반한 것이 아니옵고, 미처 때에 맞춰 진공(進貢)하지 못했을 뿐입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臣)이 그 집을 찾아가 점검해 보니, 활과 화살, 갑옷과 투구 등이 있었는데, 화살촉에는 모두 독약(毒藥)을 발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무리들의 도피한 자와 은닉시켜 놓은 가산(家産) 등에 대해서는, 도망간 자는 불러 모으고 은닉시켜 둔 가산은 본 위치로 운반해 놓은 다음 안심하고 농사지으면서 황조(皇朝)의 처분만을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되돌아온 남녀는 모두 43인이었고 신등(臣等)은 거기서 머무른 지 3일 만에 환군하여 서수라포(西水羅浦)에 돌아와 정박하였습니다. 포획한 웅도의 남녀 등에 대해서는 다시 거기에 머물거나 따라오거나 간에 이 문제는 일체 차인(差人)에게 맡기었고, 처음부터 대행(帶行)했던 하창(河昌) 및 그의 형 차오라내(車吾羅乃)에게는 끝까지 따라올 것을 분부하였으나, 차오라내는 노병(老病)으로 인해 먼 길을 떠날 수 없었으므로, 그의 조카인 아두(阿豆)가 대신 따라왔으며, 여인(女人) 두 명도 데려왔습니다.”
하였다. 또 경진년(1640)에 만주(滿州) 호부(戶部)에서 보낸 자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에서 하창 등을 보내왔으나 아직도 그 여당(餘黨)이 남아 있으므로, 우리 군사 1백 명을 보내어 그들 남녀 5백 명을 포획하였는데, 포획된 자들 및 우리 군사와 전번에 포획된 하창 등이 모두 식량이 떨어진 채 저곳에 있으니, 국왕에게 자품(咨稟)하여 빨리 사람 수효대로 식량을 판출해서 우리 차관(差官)에게 부치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다른 해에 진상할 공물에서 그 액수를 따져 감(減)해 주겠다. 지금 그 식량은 봉황성(鳳凰城)으로 송진(送進)하라.”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군사를 보내 웅도를 정벌한 사실이다. 뒤에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와 같이 변증하였다.
다산시문집 제11권 / 논(論)
온성론(穩城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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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성(穩城)은 매우 북쪽에 위치한 서늘한 지역이고 탐라(耽羅 제주도(濟州島)의 옛이름)는 바다 남쪽에 위치한 무더운 지역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온성의 여름날이 도리어 탐라의 여름날보다 길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가.”
그렇다. 이 또한 이치에 맞는 일이다. 《당서(唐書)》 회흘전(回紇傳)에 이런 말이 있다.
“몽고(蒙古)의 사막(沙漠) 북쪽에 골리간(骨利幹)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해가 지고 나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해서 고기가 익을 때쯤이면 해가 뜬다.”
여기에서는 시기를 말하지 않았으나 이때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의 전후(前後)였을 것이다. 북쪽 끝의 지역에는 여름날이 이렇게 긴데, 온성의 여름날이 탐라보다 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고의 북극(北極)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時期)는 춘분 전과 추분 후로 이때에는 순전히 낮만 계속된다. 때문에 《주비경(周髀經)》에 이런 말이 있다.
“북극의 땅에는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죽는 풀이 있다.”
이는 1년이 1주야임을 명시한 말이다. 이러니 온성의 여름날이 탐라의 여름날보다 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은 틀림없이 그러한데, 어떤 이치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탐라는 비록 우리나라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지만 적도(赤道)를 기준으로 보면 북쪽이다. 어찌 적도의 북쪽이기만 할 뿐이겠는가. 하지(夏至) 때 해의 궤도의 북쪽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탐라의 여름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기까지 하늘의 중앙을 거치지 않는다. 따라서 동쪽에서 떠서 남요(南繞)를 비스듬히 돌아 서쪽으로 지게 마련이다. 땅 속으로 들어간 해는 또 북요(北繞)를 비스듬히 돌아 동쪽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탐라 사람들은, 해가 뜨는 것을 늦게 보고 해가 지는 것은 일찍 보게 되니, 해가 짧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온성은 탐라보다 훨씬 북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해가 높이 떠오르지 않은 채 남요(南繞)를 비스듬히 돌아 서쪽으로 진다. 따라서 해가 뜨는 것은 일찍 보고 해가 지는 것은 늦게 보게 되니, 해가 길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북쪽에서 더 북쪽으로 가 북극점에 이르게 되면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해가 땅과 떨어진 거리가 수장(數丈) 정도이다. 그리고 진방(震方)에서 뜬 해는 손방(巽方)ㆍ이방(離方)ㆍ곤방(坤方)ㆍ태방(兌方)ㆍ건방(乾方)ㆍ감방(坎方)ㆍ간방(艮方)을 거쳐 다시 진방으로 되돌아오게 되니, 6개월이 1주(晝)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적도 아래 사는 사람들은 적도를 이고 있는 것이 흡사 긴 무지개 아래 서 있는 것과 같고, 북극에 사는 사람들은 적도를 띠고 있는 것이 흡사 둘러친 울타리 가운데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이런데다가 태양의 운행은 항상 적도의 왼쪽이나 오른쪽을 따라 돌게 되니, 이것이 태양을 일찍 보게도 되고 늦게 보게도 되는 원인인 것이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온성의 여름날이 탐라의 여름날보다 긴 것에 대해 의심할 것이 없다.
[주-D001] 진방(震方) …… 간방(艮方) : 진방은 정동(正東), 손방(巽方)은 동남(東南), 이방(離方)은 정남(正南), 곤방(坤方)은 서남(西南), 태방(兌方)은 정서(正西), 건방(乾方)은 서북(西北), 감방(坎方)은 정북(正北), 간방은 북동(北東)이다.
임하필기 제39권 /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아라사국(俄羅斯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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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적의 견곤과 정령이요 당나라 적의 힐알사이며 / 漢代丁令唐戛斯
원나라 때의 길리길사와 아라사였네 / 吉斯元世阿羅思
명나라 삼백 년 후 강희 때에 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 明三百後康煕貢
대사과와 소사과가 북쪽 맨 끝에 나열되어 있도다 / 大小斯科極北陲
아라사국(俄羅斯國 러시아)은 북쪽 맨 끝에 위치해 있는데, 한(漢)나라 때의 견곤(堅昆) 부족과 정령(丁令) 부족이었고, 당(唐)나라 때의 힐알사(黠戛斯) 부족 또는 골리간(骨利幹) 부족이었으며, 원(元)나라 때의 아라사(阿羅思) 및 길리길사(吉利吉斯) 등의 부족이었다. 명(明)나라 300년 동안은 중국과 통하지 못하다가 청(淸)나라 강희(康煕) 때에 이르러 중국에 들어와 조공을 바쳤다. 8도(道)를 두어 ‘사과(斯科)’라고 칭하고, 사과마다 또 각각 소사과(小斯科)로 나누었다.
제가역상집 제4권 / 귀루〔晷漏〕
《옥해(玉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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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송(宋)나라 원가(元嘉) 연간에 남쪽으로 임읍(林邑)을 정벌하고, 5월에 표(表)를 세우고 관찰하였더니 해는 표의 북쪽에 있었습니다. 교주(交州)는 그림자가 표의 남쪽 3촌에 있었고, 임읍은 9촌 1분에 있었습니다. 교주는 낙(洛 낙양(洛陽))에서 거리가 수로와 육로로 9천 리인데, 산과 강으로 막혀서 에돌아 그런 것이지, 표를 이용하여 현(弦)을 구하면 5천 리에 해당됩니다. 개원(開元) 12년(724)에 - 4월 임자(壬子) - 교주에서 관측하였는데, 하지에 해는 표의 남쪽 3촌 3분에 있어서, 원가 연간에 측정한 것과 대체로 같았습니다. 사자(使者)였던 대상원태(大相元太)는 말하기를, ‘교주에서 극을 바라보면 높이가 20여 도(度)에 지나지 않는다. - 《당회요(唐會要)》에는 이르기를, ‘출지(出地)가 겨우 30여 도’라고 하였다. - 8월에 바다에서 노인성(老人星) 아래에 별이 빛나는 것을 바라보았더니, 밝고 큰 것이 무척 많았는데, 예전에는 미처 모르던 것이었다. 바로 혼천설(渾天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해는 항상 지중에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철륵(鐵勒) 북쪽에 있는 골리간(骨利幹 바이칼 호 남쪽에 있었던 고대 부족의 이름)은 낮은 길고 밤은 짧아서, 밤이 되어도 하늘은 노을이 든 것처럼 어스름하고, 저녁에 양의 넓적다리를 삶아 겨우 익을 정도이면 동이 트니, 해가 뜨고 지는 곳과 가깝습니다. - 《당회요》에 따르면, 개원 12년 4월 23일 임자에 태사감(太史監) 남궁설(南宮說)과 태사관(太史官) 대상원태(大相元太) 등에게 명하여, 안남(安南)ㆍ무릉(武陵)ㆍ채울(蔡蔚) 등의 주(州)로 가서 수년 동안 측후(測候)하고 경사로 돌아오게 하여서, 일행(一行)과 함께 교정(校正)하게 하였다.
고전번역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1권 > 태조 신성대왕 > 최종정보
고려사절요 제1권 /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병신 19년(936), 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원년ㆍ거란 천현 11년
○ 가을 9월에 왕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이르러 군사를 합쳐 일선군(一善郡)으로 나아가 머물렀는데, 신검(神劒)이 군사를 이끌고 이에 대항하여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왕이 견훤과 함께 군사를 사열하고 견훤과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述熙)ㆍ황보금산(皇甫金山)과 원윤(元尹) 강유영(康柔英)이 마군(馬軍) 1만 명을 거느리고, 지천군 대장군(支天軍大將軍) 원윤(元尹) 능달(能達)ㆍ기언(奇言)ㆍ한순명(韓順明)ㆍ흔악(昕岳)과 정조(正朝) 영직(英直)ㆍ광세(廣世) 등이 보군 1만 명을 거느려 좌강(左綱)이 되었다. 대상(大相)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박수경(朴守卿)과 원보(元甫) 연주(連珠)ㆍ원윤 훤량(萱良) 등이 마군(馬軍) 1만 명을 거느리고, 보천군 대장군(補天軍大將軍) 원윤 삼순(三順)ㆍ준량(俊良)과 정조 영유(英儒)ㆍ길강충(吉康忠)ㆍ흔계(昕繼) 등이 보군(步軍) 1만 명을 거느리어 우강(右綱)이 되었다. 명주(溟州) 대광(大匡) 왕순식(王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렴(王廉)ㆍ왕예(王乂)와 원보 인일(仁一) 등이 마군(馬軍) 2만 명을 거느리고, 대상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ㆍ관헌(官憲) 등이 흑수(黑水)ㆍ달고(達姑)ㆍ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 9천 5백 명을 거느리며, 우천군 대장군(祐天軍大將軍) 원윤 정순(貞順)과 정조 애진(哀珍) 등이 보군(步軍) 1천 명을 거느리고, 천무군 대장군(天武軍大將軍) 원윤 종희(宗熙)와 정조 견훤(見萱) 등이 보군 1천 명을 거느리며, 한천군 대장군(扞天軍大將軍) 김극종(金克宗)과 원보 조간(助杆) 등이 보군 1천 명을 거느려서 중군(中軍)이 되었다.
해동역사 제12권 / 세기(世紀) 12
고려(高麗) 1
○ 진(晉) 고조 천복(天福) 원년에 태조 19년 고려 왕 왕건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ㆍ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가 모두 내부하였다. 2경(京), 6부(府), 9절도(節度), 1백 20군(郡)이 있다. 《자치통감》 ○ 《남당서(南唐書)》에는, “오(吳) 천조(天祚) 2년(936)은 진(晉) 천복(天福) 원년에 해당하는데, 고려 왕 왕건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려에 내부하였다. 승원(昇元) 2년(938)에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리면서 ‘전(牋)’이라 칭하여 격식을 표(表)와 같이 갖추면서, 신(臣)이라 칭하지 않았다. 열조(烈祖)가 무공전(武功殿)에 나아가 사신을 알현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 뒤에는 사책에 빠져 있어서 사신이 왔는지의 여부를 상고할 수가 없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태조 18년(935) 을미에 신라 왕 김부(金溥)와 후백제 견훤(甄萱)이 모두 와서 항복하여 드디어 삼한의 땅을 통합하였다.
각주정보
골리간은 옛날 부족의 이름이다. 한해(瀚海)에서 활동하였는데, 지금의 바이칼호 북쪽이다. 바이칼호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남쪽에 위치하며, 북위 53.30도이다. 이 정도의 위치이면 대략 위에서 언급한 8700리를 북쪽으로 올라간 것이다.
동광 제30호 > 東光 圓卓會議
잡지명 | 동광 제30호 |
발행일 | 1932년 01월 25일 |
기사제목 | 東光 圓卓會議 |
기사형태 | 논설 |
東光 圓卓會議
民族問題에 관하야
獨逸 都宥浩
(이것은 獨逸留學중인 都君이 본사로 보낸 書信의 一節이다.)
나는 「國家의 起源」이라는 곤란한 문제에 逢着하엿습니다. 「굼풀로이츠」, 「와드」와 그밖의 부루주아교수들은 말하기를 國家는 투쟁을 調節하기 위하야, 그리고 國家形成의 과정으로서 소위 種族鬪爭의 결과 생기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와드」는 헤겔 辯證法과 비슷한 그의 「協力說」을 적용하지 마는 그러나 이것은 맑시스트로 보아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엥겔스, 맑스, 레닌등은 다 말하기를 國家는 階級鬪爭의 결과 생긴 것인데 階級鬪爭을 조화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도리어 他階級을 압박하는 기관으로서 생겻다고 합니다. 나는 民族이라는 것은 항상 여러 種族 혹은 準種族(Sub-races)의 혼합체이며 국가는 民族-民族은 항상 歷史的生産物이다-을 형성하는 근본요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굼풀로위츠(Gmpnlowiz)와디안說에도 幾分이 眞理가 없는 것은 아니지마는 맑시스트의 견해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곤란은 모든 社會現象은 단순한 과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것이며 그러고 根本原理는 모든 특수현상에 전부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잇다고 생각합니다. 「아돌프·히다」는 그의 최근의 著書 「나의 鬪爭」에서 아리안族, 게루만族 그리고 게루만國民(Nationality)에 대하야 論한 바 잇습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게루만즈」는 즉 「아리안즈」이고 「아리안」즈는 「게르마네르」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일보 더 나아가서 民族은 種族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참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아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게르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켈트, 슬라부즈, 게루마네르딕(알레메인)의 혼합한 것이니 純노르(게루마네르)族은 獨逸全人口의 25%도 되지 안 습니다. 東洋으로 말할 것 같으면 日本國民은 日本에 잇는 民族 또는 그밖에 朝鮮人, 南部支那, 마레이안즈등의 혼합체라고 볼 수 잇습니다. 그러고 朝鮮人으로 말하여도 우리 朝鮮사람은 단순한 종족이 아닙니다. 북부 朝鮮에는 「몽골리안」型이 아닌 파란 또는 누런 눈이던가, 빨간 또는 노란 머리털을 가지고 잇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속에는 슬라빅, 또는 「게루만즈」의 피가 섞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북부 朝鮮에서 산 일이 잇은 말갈족은 彷浪하는 가운데 西洋의 피를 가저다 거기에 두고 간 것입니다. 그들은 東에서 西로 이동하엿으나 그 移動은 直線的이 아니라 西方을 헤매인 것인가 합니다. 그들은 朝鮮오기전에 이미 西洋 피를 가지고 잇엇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Magyards는 현재한 가리안 人口의 주요한 種族이나 그러나 그것은 말갈족에서 온 것이니 지금 순 말갈족하고는 다릇습니다.
나는 「民族」에 대하야 한 冊을 著作할려고 하며 「마운하인」(Maun hein)敎授도 그것이 博士論文에 적합한 제목이라고 합니다. 나는 「헤겔」을 공부하고 잇습니다 마는 그의 敎理와 言語의 사용같은 것이 굉장이 어렵습니다. (後略)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2년 병진 > 11월 21일 > 최종정보
영조 12년 병진(1736) 11월 21일(경술) 맑음
12-11-21[25]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병조 판서 이유가 졸서한 일, 조현명의 일, 홍주 읍민이 괘서한 일, 이희보의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어떠한가?”
하니, 송진명이 아뢰기를,
“두 고을은 극변(極邊)에 있기 때문에 5, 6월에도 추위가 겨울철이나 다름없습니다. 4월 초에 신이 순력(巡歷)하느라 들어갔는데 계속 털옷을 입고 왕래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농사는 어떻게 짓는가?”
하니, 송진명이 아뢰기를,
“전부 산골짜기 땅이라 본래 논곡식이 없고 경작하는 것은 다 밤입니다. 그러므로 가을걷이가 다른 곳에 비하여 쉽게 이루어지니, 7월 전에 이미 수확이 다 끝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을의 상태는 어떠한가?”
하니, 송진명이 아뢰기를,
“고을 상태가 형편없습니다만 삼수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또한 그곳에는 원래부터 소금과 장(醬)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평생 소금과 장의 맛을 모르는데, 다른 찬거리도 없기 때문에 돌배를 따다가 푹 삶아서 반찬으로 삼습니다. 숙묘조(肅廟朝)에서 약간의 소금을 실어 보내어 민간에 나누어 준 일이 있었는데, 수량이 많지 않았으므로 장정에게는 겨우 한 되쯤 나누어 주었고 노약자에게는 대여섯 홉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이 일을 지금까지 칭송하면서 조정의 은덕을 잊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털이 났을 것이다. 복색(服色)은 어떠한가? 양반도 있는가?”
하니, 송진명이 아뢰기를,
“복색은 모두 개가죽으로 만드는데 외모와 언어가 외국 사람이나 다름없고 우리나라 사람 같은 모양새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양반은 주표(朱杓)나 우하형(禹夏亨) 같은 무리가 곧 그중 뛰어난 자들입니다.”
하였다.
5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5(한국사료총서 번역서5) > 1904년(조선 개국 513년, 광무 8년, 갑진년) > 5월 > 4일
4일
새벽 두세 시쯤 비. 벌써 장마철로 접어듦.
가난한 백성들에게 힘겨운 시기다. 가난한 조선의 백성들은 부패한 전제군주와 충고하는 일본인 사이에 끼여 전쟁과 기근 없이도 이미 충분히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다! 조선인은 전제군주에게 맹목적이고 비굴하게 굴복한 벌을 가혹하게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잘못된 정부, 이 끔찍하게 파괴적인 전쟁, 이 기근은 한 가지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즉 조선 전역의, 특히 조선 남부지역의 가난한 백성들은 소중한 논밭과 산과 집을 일본인에게 헐값에 팔아넘길 것이다.
전 세계 위대한 열강의 무리에 뛰어든 일본이 ‘국가 사이의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한편으로는 독립 국가로서 조선의 목숨은 실낱같이 유지되고 있다. 또 조선의 북부지방과 서부지방은 전쟁과 기근 때문에 완전히 파괴되었고, 조선의 남부지방은 탄압받는 백성들 때문에 사실상 황폐해졌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왕실은 밤이면 밤마다 점쟁이들에게 점괘를 물어보느라 정신없고, 국가의 대신들은 서로 “물어뜯느라” 바쁘다. 이를테면 궁내부대신은 이하영이 민씨 일가를 외부의 직위에서 해고했다는 이유로 황제에게 가서 이하영을 ‘물어뜯고’ 있다. 친일파인 박의병은 이하영이 홍순욱을 성진감리로 임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하영을 ‘물어뜯고’ 있다. 이렇게 물어뜯으면 상대방도 다시 물어뜯고, 한 사람, 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물어뜯게 된다. 이렇게 유치한 불화와 음모, 뒤에서 헐뜯기와 뒤를 물어뜯기 등을 통해 왕실과 정부가 끊임없이 전쟁과 전쟁 소문에 휩싸여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점점, 그리고 서서히, 조선의 생명줄을 강하게 압박해오고 있다.
5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5(한국사료총서 번역서5) > 1904년(조선 개국 513년, 광무 8년, 갑진년) > 5월 > 27일 간밤에 비.
27일 간밤에 비.
간헐적으로 열이 올라 고생한 뒤 계속 쇠약한 상태다. 내 병의 원인들은 대략 이렇다.
1. P. Kicows註 032의 끝없는 부패. 현영운 박의병 등 일본의 특별한 제자인 부도덕한 악당들이 정부를 운영하고 있다. 민병석 이용태 권중석 박용화 등은 나라를 말아먹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짓은 다 하고 있다.
2. 북부지방과 서부지방에서 어디든 가는 곳마다 잔학 행위를 저지르는 러시아인들. 러시아인들의 저주받은 흔적은 불탄 마을, 살해된 여성과 아이들, 파괴된 들판으로 나타난다. 불과 피는 러시아인이 좋아하는 전쟁 수단이다. 일본인에게 패한 야만인은 절망적인 조선인에게 자신들의 무력한 분노를 발산하고 있다.
3. 일본인은 부산 철도 운행을 통해 남부지방에서 마치 오래 전에 미국에서 백인이 인디언을 다루듯이, 그리고 아직도 아프리카에서 백인이 흑인들을 다루듯이 조선인을 다루고 있다. 일본인은 명목상으로는 구매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의 논밭 임야 가옥을 강탈한다. 만약 자신들의 뜻대로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마치 개처럼 조선인을 차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한다. 조선인에게는 보호해 달라고 호소할 곳이 전혀 없다. 일본인은 자신들이 조선의 안위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공언하지만, 조선인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잘 알려진 의도와 정책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개벽 제6호 > 庚申年의 거듬(上)
잡지명 | 개벽 제6호 |
발행일 | 1920년 12월 01일 |
기사제목 | 庚申年의 거듬(上) |
필자 | 一記者 |
기사형태 | 소식 |
庚申年의 거듬
一記者
庚申 1年은 이 世界로나 또는 우리 朝鮮으로나 꽤 多事한 年이엇다. 이제 이 해의 絶頂에 立하야 過程을 回想함에 多少의 感이 업지 못하다. 이제 今年 中 每月에 起한 重大事項 뿐을 事實 그대로 抄記하야 聊히 惜別의 情을 表하며 7月 以下의 事件은 別로 覆雜한 바 新年號에 繼續 抄記코저 한다.
一月
庚申年은 歐洲大戰이 終熄을 告하고 온 世間이 平和를 復한 第1年으로서 이 해의 首되는 1月中의 新年氣分은 別로 度가 濃하얏다.
和約效果發生
6日은 獨逸로부터 講和條約附屬議定書에 調印을 行하야 和約이 完全히 效力을 發生하게 되엇스며 同時에 日本은 13日로써 平和克復을 宣言하야 朝鮮 內地에도 平和克復祝賀宴이 有하얏스며
三新聞許可
8일은 旣히 當局에 出願 中이던 東亞日報(發行人 李相協), 朝鮮日報(發行人 芮宗錫), 時事新聞(發行人 李東雨)의 3新聞이 許可되엇스며
今年度 豫筭發表
10日은 總督府 大正 10年度 豫筭이 發布되엇는데 그 豫算總額은 1億 1666萬 2千餘 圓으로 9年度의 豫算總額 7756萬餘 圓에 比하면 實로 3910萬 3千餘 圓의 增加이라 是는 昨年 3月 1日 以來 內外 各地에서 起하는 朝鮮獨立運動 取締에 關한 警務費의 擴張과 笞刑廢止, 敎育擴張 等에 要하는 新經費를 計上하게 된 所以이오. 此 新經費의 補充策으로는 酒稅, 煙草消費稅의 稅率을 引上하얏스며
日米協同關係斷絶
11日부터 西伯利亞 駐屯 米軍 卽 西伯利에 淪落한 捷克民族을 救하고 極東으로 蔓延하는 露西亞 過激派의 勢力을 牽制키 위하야 日英米 3國으로부터 聯合出兵한 그 米軍은 駐屯地로 一齊히 撤兵을 開始하야 於是乎 日米協同關係는 斷絶하얏스며<60>
17일은 佛國大統領 포항카레 任期滿了代에 新大統領으로 同國下議院長 떼샤넬씨가 當選되엇스며
古史硏究會發生
18日은 京城 市內 長春館에 朝鮮古史硏究會의 發會式이 有하얏는데 그 內容은 滿洲에 新高麗國을 建設한다는 것이엇다. 本會의 首腦는 鄭安立氏이며 그 背後에는 日本浪人 末永節씨의 劃策이 有하얏다. 本會의 趣旨西를 見하면 「우리 神祖 檀君끠서 長白山下에 起하야 國號를 定함으로부터 國勢日昌하야 그 疆域은 興安嶺以南, 山海關 以東, 西白利 沿海州를 包有하야 人口 2億을 筭한 바 今日 支那領滿洲及露領沿海의 一部는 우리 先祖의 살림하던 地域인 즉 今에 此의 古史를 硏究하야 朝鮮民族의 復興을 策함이라」 함이엿다. 筭(셈 산): 筭 혤 산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5권 > 1920년 1월 18일 > 朝鮮古史硏究會는 京城 長春舘에서 발
연월일 | 1920년 01월 18일 |
주제분류 | 문화,학술 > 학술,사상 > 학술일반 > 학술단체 |
출전 | 高等警察關係年表 高等警察用語辭典 每日申報 1920.1.20 |
朝鮮古史硏究會는 京城 長春舘에서 발회식을 거행한 바 지방 儒林 漢學者 및 오랫동안 中國 滿洲에 거주한 인사 60여명이 모여 성황을 이룬 가운데 취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출하다. 동 회는 滿洲에 大高麗國을 건설한다는 풍문이 있었다.
會長 李相珪
副會長 權道相
總務 金秉洙
理事 金炳興 외 6명
書記 鄭震錫 외 1명
議員 曹在學 외 12명
趣旨(鄭安立 설명)
朝鮮古史硏究會라는 것은 결단코 정치적 회합은 아니 올시다. 오직 학문적 집합이오니 곧 조선 고대 역사를 연구하자는 목적이올시다. 우리는 사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올시다. 하거늘 이 장구하고 광영있는 역사를 세계적으로 소개하기는 고사하고 우리 민족 간에도 보급치 못하였읍니다. 오히려 아주 우리 민족은 우리의 역사를 모른다 하여도 과한 말이 아니올시다. 그런 고로 우리는 우리의 역사 더욱이 古代史를 연구치 아니치 못할 것이올시다. 그런데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는 세가지 중요한 것이 있읍니다. 그 세가지 중요 조건은 「史蹟」, 「疆土」, 「人種」을 중요하게 연구할 것이라 합니다. 우리의 고대에는 이 세가지가 모두 과연 화려한 역사를 가졌읍니다. 국내 국외에 위대한 「史蹟」과 광대한 토지와 이억만 이상의 인구가 있던 우리 조선이올시다. 그렇게 화려 중대한 역사를 가진 우리 조선민족은 중엽 이래로 강토와 인종이 점점 쇠퇴하여 지금은 십삼도 이천만이라는 민족이 죽을 꼴아지에 있읍니다. 심지어 말류의 폐가 이천만은 고사하고 한 고을 한 면 한 집까지 몰각하고 한 사람의 신명을 유지치 못하게 되었읍니다. 본인은 십여년간 해외에 돌아다니며 실지로 답사하고 목도한 바가 많읍니다. 흥안령 이북으로 시베리아 지방에 과연 우리의 사적상에 참고품이 많이 있고 언어와 풍속까지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 많이 있음을 볼 때에 본인은 우리의 역사를 연구치 아니치 못하리라는 생각이 불일듯 하였읍니다. 고대사를 연구하여 첫재로는 우리가 어떠한 우리인 것을 알어야 하겠고, 둘째에는 동양인 서양인에게 세계적으로 널리 포고하여 우리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생각이 났읍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연구하여야 고대의 역사를 잘 연구할가? 우리들은 대개 지식이 부족하고 더욱이 만주에 있는 우리 민족은 거개 무식계급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니까 이러한 어려운 연구를 함에는 불가불 고명한 학자를 고빙하여 연구치 아니치 못할 것이므로 중국인이던지, 조선인이던지, 일본인이던지, 이것을 연구할만한 자격이 있는 학자를 고빙하여 고대사를 정확히 연구하라고 이번에 고사연구회를 설립한 것이 올시다. ……
……남의 역사가 아니오 나의 역사이다. 이 만주시베리아는 남의 땅이 아니오 나의 땅이다. 하는 생각이 나는 동시에 저 「自我」를 확장하고 생활을 충실케 할 것이 올시다. 그러면 오늘날 고사연구회의 사업은 조선민족의 생명을 부활시키라는 운동이 올시다. 또 정당하게 나아가는 인생의 갈길이올시다.
……우리 목적은 좁은 관념을 넓히고 좁은 생활을 확장하자는 취지에 불과합니다. 그런고로 남의 정신 남의 세력에 지배되여서는 아니됩니다. 어데까지던지 우리의 주의와 주장을 굽히지 말고 나아감이 우리의 할 일이 올시다. 특별히 저 만주 「시베리아」 지방에 있는 우리 민족은 오백만이상에 달하였으나 지식정도가 매우 유치하닛가 될 수 있는대로 그들을 개발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더 한걸음 나아가서 그들이 말함과 같이 만주에 있는 중국인 로국인까지 친목하여 크게 동양주의(東洋主義)를 발휘하기를 바라는 것이 올시다. 그 결과에는 우리의 고대에 위대한 역사 그것을 사실로 실현하여 볼날이 있을는지 몰으는 것이 올시다. 우리 민족의 생명을 방해하는 언론이나 정치가 있으면 이는 우리 민족을 죽이려 하는 자이니까, 우리는 이따위를 우리의 원수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오 또 우리는 이러한 큰 사업을 하라는 우리니까 박지와 악행으로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부정당한 사실이 없는 이상에는 우리는 용맹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高等警察關係年表
高等警察用語辭典
每日申報 1920.1.20
irredentist 1. 미수복지 병합주의자2. 민족 통일주의를 지지하는3. 이레덴타 수복주의자
entertain no irredentist aspirations at the expense of china or siberia
자료대한민국사 제29권 > 1953년 > 정전 이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목표에 관한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
정전협정 이후 한국에서의 미국의 목표 문제 1. 한국 관련 미국의 기본 목표를 결정한다. 전제 2.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논의 3. 배경:정전협정에 명시된 조건에 따라 협정 체결 이후 90일 이내에 정치 회담을 개최하도록 되어 있다. 이 회담은 공산주의자들과 유엔 대표부 사이에 열리는 것으로 한국은 유엔 관련자 자격으로 참가한다. 미국의 전술은 미국의 대(對)한국 기본 목표에 비추어 가능한 조건 하에서 결정된다. 한국의 주도하에 한국을 통일시키며 또 통일된 한국이 미국의 안보 체제에 연계된 군사 동맹국으로 만드는 것은 현재의 여건 하에서는 실질적으로 가능한 선택이 아니다. 이러한 목표는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무력으로 퇴치시켜야 비로소 가능한 일로써, 현재의 정전협정이 수용된다면 사실상 이 안은 폐기될 것이다. 4. 가능한 대안적 목표 ▦a. 미국 안보 체제에 연계되고 군사 동맹국인 한국과의 분계선을 따라 한반도는 불명확한 기간 동안 분단될 것이다. ▦b. 한국이 중립 통일된다면 이는 실질적으로 성격이 변하지 않은 한국의 통치 하에 놓임을 의미한다.(그러한 목표가 달성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로 하여금 미국적 정치 지향을 가진 통일 한국의 설립을 받아들이게 하며, 그 대신 미군과 기지를 철수하고 한국과 상호 안보 조약을 조인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주도하에 통일될 한국의 영토적 정치적 완결성과 유엔 가입을 보장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대한민국 방위군의 성격과 수준에 제한이 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 공산주의자들의 입장:공산주의자들이 현 정전협정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실상 현 상태의 지속을 의미하는 첫 번째 대안에 암묵적으로 동의할 의사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두 번째 대안을 첫 번째 안보다 선호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인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한국인은 전쟁으로 인해 무질서하고 약화된 작은 나라에 살고 있으며 중국이나 시베리아에서 고토회복 운동을 벌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우려는 한국이 미국 혹은 궁극적으로는 일본 군사력의 기지나 교두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을 중립 통일시키는 것이 북한 위성 정권의 희생과 상당한 체면 손상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자들도 이러한 희생을 만주에서 또 중국 북부의 산업, 운송, 항구 설비로부터 불과 수 백 마일 떨어진 곳에 미군 기지가 설립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의 결과 앞으로 상당기간 경제적 부담이 될 북한이라는 짐을 덜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세계적 관점에서 본다면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한국 문제 해결안을 자신들에게 순 불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평화적 “조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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