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나라 장수와 신 장군( 신립(申砬))과 모의하여 쌍령에 군사를 잠깐 쉬게 하였다고 하니

2022. 12. 18. 13:40역사적 사실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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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10권 / 발(跋)

의사의 유사에 붙이는 후서〔權義士遺事後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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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올라 병자호란 때 대패했던 쌍령(雙嶺)의 전장을 바라보며 당시의 조악(粗惡)한 전략을 다시금 한탄한 적이 있다. 우리 영남의 충직하고 근실한 선비들이 이 전투에서 모두 죽었다. 그러나 삼가 듣건대 임진왜란 때 당(唐)나라 장수가 탄금대(彈琴臺)를 지나가다가 ‘지형이  회음후(韓淮陰侯) 배수진을 보다 훨씬 낫다.’라고 생각하여, 신 장군(申將軍 신립(申砬))과 모의하여 쌍령에 군사를 잠깐 쉬게 하였다고 하니, 이는 또한 회음후가 ()나라 군대를 격파했던 고사를 본받으려 것이다. 그러나 모여서 밥을 먹고 패배하였다. 위의 두 사례는 꼭 사람의 계책이 허술해서 그리된 것은 아니니 천운에 책임을 돌려도 된다.

하루는 상사(上舍) 권두영(權斗泳)이 자신의 7대조의 유사(遺事)를 소매에서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곧 쌍령 전투에서 절의에 죽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권 상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7대조는 권숭립(權崇立)이고, 자가 정보(禎甫)입니다. 그분의 아우는 첨정 권중립(權中立)이며, 아들은 통사랑(通仕郞) 권식(權湜)이니, 모두 쌍령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처음에 공께서 종군하려 하였는데, 노모가 계신 까닭에 약속하기를 ‘아비와 자식이 모두 군중에 있을 경우 아비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형과 아우가 모두 군중에 있을 경우 형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집안의 재산을 출연하여 군량을 도우니, 온 군진(軍陣)이 의롭게 여겨 다음과 같이 비석을 세워 주었습니다.

 

식량을 마련하여 군대에 공급하고 / 備糧給軍
금고 털어 굶주린 백성 진휼했네 / 傾帑賑荒
고을과 나라에 공덕이 미쳐 / 賴及鄕邦
충량한 사람들 감격시켰네 / 感激忠良

 

자식과 아우가 전투에 패해 사망하자 대명동(大明洞)에 은둔하여 종신토록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논평하는 자들이 모두 자제의 순절(殉節)을 부형이 열어 주었다고 하니, 학사께서 한마디 해 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수휘(徐壽輝) 에 이보(李黼) 조카 이병소(李秉昭) 함께 동시에 순절하였다. 이병소의 부친 이면(李冕)은 영(穎)에 살았는데, 역시 적의 손에 죽었다. 첨정 권중립과 통사랑 권식은 곧 이보와 이병소라 할 수 있고, 권숭립은 유독 대명동에 은거할 때는 마침 영(潁)에서와 같은 적도(賊徒)가 없어 천수(天壽)를 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펴보건대 이름과 자를 바꾸어 숭정(崇禎) 의미를 담았으니, 그 고심과 비통함은 창졸간에 목숨을 빼앗긴 이면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 쌍령 전투의 군사 중에는 실로 세족(世族)과 호걸들로서 의병에 자원하여 그 전투에 참여한 자들이 많았다. 뒷사람들이 그중 혁혁한 조정 관료만을 들고, 그 외에는 대오의 보정(保正)으로 인식하여 소홀하게 여겼다. 이것이 바로 상양(商陽) 진기질(陳棄疾)이 초(楚)나라의 충신이 될 수 없었던 까닭이고, 우인(禺人) 왕기()가 노(魯)나라의 역사에서 누락된 이유이다. 어찌 말이 되겠는가.

돌아보건대 충직하고 용감한 3천의 의병이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유사(遺事)에 기재된, 첨정이 영결할 남긴 말씀이 어찌 그리도 담담한가. 이를 후세에 전할 자가 누구인가? 시험 삼아 우리 고장의 도정(都正) 금해룡(琴海龍) 그의 아우 금막룡(琴漠龍)에게 의수(衣袖) 을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천군만마가 내달릴 때라도 오히려 발을 멈출 때가 있는 법이니 그때 그들이 한 말은 또한 믿을 수가 있다.

화산(花山 안동)에 세워진 한 조각 비석이 쪼개져 빨랫돌이 되어 이지러지고 말아서 그럴 뿐, 비석의 시구가 필시 두 구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식량을 마련하여 군대에 공급하고’라고 한 것은 분명히 그 당시의 일이겠지만, ‘금고 털어 굶주린 백성 진휼했네’라고 한 것은 문리로 헤아려 보건대 흉년을 만나 기민을 널리 구휼한 별도의 일인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증명할 만한 기록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안동의 풍속은 고을 수령의 선정(善政) 비석에 새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인데, 그럼에도 고장 사람들이 공의 덕을 기린 비석을 세워 주었으니 또한 거룩하지 않은가.

아아! 추증의 성은을 받는 것은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비석에 공로를 새겨 옛터에다 세워 두느니만 못하다. 그 비석의 전면에는 ‘권씨의적비(權氏義蹟碑)’라고 새기고, 옆면에는 옛 비석에 있던 명(銘)을 새겼다. 다시 대문장가를 얻어 서문을 쓰고, 첨정과 통사랑의 일을 함께 새겨 넣었으니, 영구히 전할 계책이 되기에 충분하다.

또 권일륵(權日玏), 권용휴(權用休), 권극상(權克常), 권효증(權孝曾), 권귀흥(權貴興) 등 다 같은 태사공(太師公)의 후손으로서 첨정 및 통사랑과 함께 죽은 여러 의사 역시 법도로 보아 첨기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현절사(顯節祠)나 충렬사(忠烈祠)와 아름다움을 나란히 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가문의 영광이 함안 조씨(咸安趙氏) 현풍 곽씨(玄風郭氏)의 정려에 크게 못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권 상사가 수긍하기에 위의 말을 써서 후서로 삼는다.

[-D001] 의사(權義士) : 

권숭립(權崇立, 1587~1654)이다. 자는 정보(禎甫), 초휘(初諱)는 종립(宗立), 초자(初字)는 영보(榮父), 호는 낙애(洛厓),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으나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도 재종숙 권경중(權慶中), 종숙 권일암(權日巖)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아들 권식(權湜)도 의병에 참가하여 경상도 좌병사 허완(許完)의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고종 때에 이조참판 겸 성균관좨주에 증직되었다. 저서로 《낙애실기(洛厓實記)》가 있다.

[-D002] 회음후(韓淮陰侯) ……  : 

정형구(井陘口)란 곳이다. 회음후는 한(漢)나라 장수 한신(韓信)이다. 조(趙)나라 군대와 싸울 때 정형구에서 강물을 뒤에 두고 진을 쳐서 이겼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D003] 이는 …… 패배하였다 : 

한신이 조나라 군대와 싸울 때 “오늘 조나라를 격파하고 모여서 밥을 먹자![今日破趙會食]”라고 하였다. 그리고 배수진을 치고 조나라 군대를 기다리자 조나라 군대가 한신의 군대를 얕보고 덤비다가 패배하였다. 여기서는 이 고사를 거꾸로 인용하여 신립의 군대는 모여서 밥을 먹고서 탄금대 앞에 배수진을 쳤다가 왜군에게 패배하였다고 한 것이다.

[-D004] 서수휘(徐壽輝)  : 

원나라 순제(順帝) 11년(1351) 황하가 크게 범람하여 대규모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여기에 반발하여 도처에서 민란에 일어났는데, 그중 서수휘는 호북성에서 난을 일으켜 황제를 칭하였다.

[-D005] 이보(李黼) …… 순절하였다 : 

이보(1298~1352)는 자가 자위(子威)로, 이수충(李守忠)의 아들이다. 30세에 정시에 장원하여 한림 수찬(翰林修撰)에 제수되었고, 강서성 낭중(江西省郞中)을 거쳐 강주로 총관(江州路總官)이 되었다. 당시에 서수휘의 난을 만나 성을 지키다가 조카 이병소(李秉昭)와 함께 전사하였다. 이병소는 이보의 형 이면(李冕)의 셋째 아들이다.

[-D006] 이름과 …… 담았으니 : 

본래 이름이 종립(宗立)이고, 자가 영보(榮父)였는데, ‘숭정(崇禎)’ 연호의 글자를 이름과 자에 각각 넣어 숭립(崇立)과 정보(禎甫)로 바꾼 것을 가리킨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이다.

[-D007] 보정(保正) : 

송대에 창설했던 군사 자치 제도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단지 민간의 자치적인 군사 조직이란 의미로, 의병을 가리킨다.

[-D008] 상양(商陽) 진기질(陳棄疾) : 

춘추 시대 초나라 인물로 상양은 공윤(工尹) 벼슬을 하고 있었고 진기질은 공자(公子) 신분이었다. 이들은 당시 초나라 주류 세력에서 밀려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실려 있다.

[-D009] 우인(禺人) 왕기() : 

노나라 인물로 우인은 공숙(公叔)이었고 왕기는 이웃에 사는 소년이었다. 낭(郞)에서 제(齊)나라와 전투가 벌어졌을 때 함께 전장에서 죽었다. 그런데 공자(孔子)에게 칭찬만 들었을 뿐 정작 《춘추》에는 관련 사실이 실리지 않았다. 역시 《예기》 〈단궁 하〉에 실려 있다. 《洛厓實記 卷2 傳》

[-D010] 첨정이 …… 말씀 : 

경상도 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이 모두 패하자, 권중립이 조카 권식을 돌아보며 “대장부란 모름지기 목숨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옳지 구차히 목숨을 건져 살아서 돌아간다면 어떻게 형님을 뵐 수 있겠느냐.” 하고는 그대로 적진에 돌격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D011] 우리 ……  : 

금한룡(琴漢龍), 금해룡(琴海龍), 금막룡(琴漠龍) 삼형제 역시 쌍룡 전투에 참가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의병을 일으켜 쌍룡에 이르러 보니 전세는 이미 기울었다. 백씨 금한룡이 전장에 뛰어들려고 하자 둘째 금해룡이 그 옷깃을 잡고 말렸다. 그러자 금한룡은 칼로 옷깃을 끊어 내고 돌격하였다. 금해룡이 그 옷깃을 막내인 금막룡에게 주며 “너는 돌아가 가사를 돌보라.”라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형을 따라 적진을 향해 돌격해 죽었다. 이 공로로 금한룡은 훈련원 도정에, 금해룡은 훈련원 첨정에 추증되었다. 《嶠南誌 奉化郡》

[-D012] 안동의 …… 관례인데 : 

안동에는 옛날부터 비석을 세워 고을 수령의 덕을 칭송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황은 “비석을 세우는 일은 수령이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평가하는 데 가깝다. 더구나 한때의 비난과 칭찬이 반드시 다 공정한 평가에서 나온 것은 아님에랴.”라고 하였다고 한다. 《愚川集 卷4 安東無碑》

[-D013] 함안 조씨(咸安趙氏) 현풍 곽씨(玄風郭氏) : 

임진왜란에 의병을 창도하여 정려를 받은 두암(斗巖) 조방(趙垹)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가문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