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恭讓王)조에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지냈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함께 상소하여 신돈(辛旽)의 다섯 가지 죄상을 논하였다

2023. 7. 11. 16:34이성계의 명조선

河啓宗(1353-1421). 字 汝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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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15 / 묘갈명(墓碣銘)

청백리 합천 군수 하공 묘갈명 병서 〔淸白吏陜川郡守河公墓碣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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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맹질(孟晊), 자는 조욱(肇旭), 성은 하씨(河氏),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비조(鼻祖) 휘 진(珍)은 고려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7세를 전하여 휘 즙(楫)이 있는데, 지정(至正) 정해년(1347, 충목왕3)에 ()나라의 정치관(整治官)으로서 기삼만(奇三萬) 장살(杖殺)하여 강직하다는 명성이 중국을 흔들었다. 신우(辛禑) 정사년(1377, 우왕3)에 수충좌리 공신(輸忠佐理功臣)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에 봉해졌고 호는 송헌(松軒)이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윤원(允源)은 공민왕(恭愍王)조에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지냈으며,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고 경성(京城)을 수복하여 공신에 책록(策錄)되었다. 신우 초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대각(臺閣)에 나갈 때마다 ‘그른 줄 알면서 잘못 결단하면 황천이 벌을 내린다.〔知非誤斷 皇天降罰〕’라는 구절을 목판에 써서 헌대(憲臺) 위에 걸어 놓은 뒤 일을 보았다.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고헌(苦軒)이다. 조부 휘 계종(啓宗) 공양왕(恭讓王)조에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지냈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함께 상소하여 신돈(辛旽)의 다섯 가지 죄상을 논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이미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마침내 외직을 청하여 문경군 지사(聞慶郡知事)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의리를 편안히 지켰다. 부친 휘 척(滌)은 조선에서 벼슬하였는데, 단종(端宗) 계유년(1453, 단종1) 창녕현(昌寧縣) 다스릴 대신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관직에서 물러나 창녕 현치(縣治) 서쪽 내동(內洞)에 살았다. 창녕에 하씨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모친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목은(牧隱) 선생 색(穡)의 따님인데, 영락(永樂) 계미년(1403, 태종3) 돈의문(敦義門) 밖 주동(鑄洞)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개가 남달랐고 큰 뜻을 지녔다. 부모를 섬김이 효성스러웠으니,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예절부터 상을 치르고 제사 지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정성과 공경을 잘 갖추었다. 음사(蔭仕)로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이르렀는데,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부역을 줄이고 폐단을 제거하여 빙벽(氷蘗) 같다는 명성을 얻었으며, 임기가 끝나 돌아가게 되자 고을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모셨다. 세조 계미년(1463, 세조9) 청백리에 뽑혔다. 홍치(弘治) 신해년(1491, 성종22) 2월 세상을 떠났고 창녕현 서쪽 마연산(馬淵山) 선영 아래에 장사 지냈다. 부인 한산 이씨는 양도공(良度公) 숙묘(叔畝)의 따님이자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의 외손이다. 묘는 동혈(同穴)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주(澍)인데, 세자 우시직(世子右侍直)을 지냈고 부모 봉양을 잘했다는 이유로 복호(復戶)와 노비(奴婢)를 하사받았다.

주의 세 아들은 현감 귀수(龜壽), 전력부위(展力副尉) 귀년(龜年), 귀령(龜齡)이다.

귀수의 세 아들은 진사 부(溥), 별제(別提) 관(灌),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을 지낸 홍(泓)이다. 귀년의 세 아들은 참봉 박(珀), 부사(府事) 정(珽), 내금위(內禁衛) 구(球)이고, 두 딸은 시직(侍直) 노섭(盧

), 사인(士人) 강정숙(姜正叔)에게 출가하였다. 귀령의 두 아들은 호(濩)와 형(泂)이다.

아아, 공의 묘갈은 오랜 시간이 흘러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후손 태현(泰絢)과 대규(大圭)가 역대의 기록에 근거하여 유사(遺事)를 짓고, 대룡(大龍)을 보내 나에게 그 내용을 보충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병이 들어 선영 아래 칩거(蟄居)하고 있는 터라 감히 찾아오는 손님도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오직 유사의 내용에 따라 글을 짓고 사(辭)를 덧붙인다. 사는 다음과 같다.

 

대대로 이어지고 전해지면서 / 代繼代禪
공신이 두 분이요 절신(節臣)이 두 분이네 / 勳二節二
공신과 절신의 가문에 / 勳節之家
다시 청백리가 나왔네 / 又淸白吏
처음 합천 군수에 제수됨은 / 始畀陜川
선왕께서 생각해 주신 덕분이었네 / 聖考注意
한 푼의 돈도 취하지 않으니 / 一錢不取
생사당이 우뚝이 세워졌다네 / 生祠有巋
청백리의 자손이라고 / 淸白子孫
후세까지 칭찬받는데 / 後世亦稱
묘도가 비바람에 시달려 / 風雨墓門
징험할 글이 없어졌네 / 虀韭無徵
이에 새로 비석에 새겼으니 / 爰新顯刻
온갖 복록이 찾아와 이어지리 / 萬祿來膺
어떤 사람들은 / 彼何人者
두통으로 밤새 시달리리라 / 夜過頭疼

[-D001] ()나라의 …… 장살(杖殺)하여 : 

정치관(整治官)은 1347년 충목왕이 원나라 순제(順帝)로부터 고려의 폐정을 개혁하라는 지시를 받고 설치한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관원을 통칭한다. 기삼만(奇三萬, ?~1347)은 원나라 순제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의 족제(族弟)로, 기황후의 세력을 믿고 타인의 전토를 함부로 빼앗는 등 불법을 자행하였다. 이에 정치도감에서 그를 붙잡아 곤장을 쳐서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자 옥사하였다. 《高麗史節要 卷25 忠穆王 丁亥 3年》

[-D002] 단종(端宗) …… 보고 :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의 모반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말한다.

[-D003] 빙벽(氷蘗) 같다는 명성 :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황벽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춥고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굳게 절조를 지키며 청렴하게 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D004] 복호(復戶) : 

충신, 효자, 열녀가 난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

[-D005] 묘도가 …… 없어졌네 : 

오랜 세월을 거치며 비석이 마멸되어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원문의 ‘제구(虀韭)’는 ‘제구(齏臼)’라고도 하며 사(辭), 즉 비석의 글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채옹(蔡邕)이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뜻으로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다.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少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이 글자를 합치면 사(辭)자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D006] 어떤 …… 시달리리라 : 

청백리의 행적을 다시 서술하여 비석을 세웠으므로, 탐관오리들이 밤마다 고통스러워 할 것이라는 말이다. 원문의 ‘피하인(彼何人)’은 참소를 일삼는 사람들을 말한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저 사람 누구인가, 습지에 사는 사람일세. 힘도 없고 용기도 없지만, 난리의 계제를 만들도다.〔彼何人斯 居河之麋 無拳無勇 職爲亂階〕” 한 데서 나왔는데, 주희는 《집전(集傳)》에서 “하인(何人)은 참소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청백리에 대비된 탐관오리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