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17. 10:19ㆍ이성계의 명조선
공민왕(恭愍王) 16년 13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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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차기(柳川箚記)
유천차기(柳川箚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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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겸(韓浚謙) 찬(撰)
이천선생((伊川先生)이 〈주식도설(主式圖說)〉에 이르기를,
“증직(贈職)이 더해지거나 대(代)가 바뀌면, 신주를 붓으로 지우고 고쳐 쓰되, 분면(粉面)만 고치고 함중(陷中)은 고치지 않는다.”
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고추증조(告追贈條)에 이르기를,
“함중은 고치지 않는다.”
하였다. 증직이 가증됨은 곧 죽은 후 한때의 증전(贈典)이므로 이미 합친 신주를 함증까지 전부 고칠 것은 없다. 대가 바뀌는 것도 함중에 쓴 것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분면만 고치고 함중은 고치지 않으니, 이 또한 기필하지 않아도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벼슬을 하다가, 삭직을 당하고 죽었다 하면, 그 처음 함중에는 당시의 칭호를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후에 은전이 베풀어져서 옛날의 관작이 회복되었다면 처음은 어디까지나 변례(變禮)였기 때문에, 마땅히 함중까지 모두 고쳐서 평생에 부르던 칭호를 회복해 주어야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천과 주자의 학설에 얽매어 분면만 고치고 함중은 고치지 아니하니, 심한 착각인 것이다.
이 일은 증직이 가중되고 대가 바뀐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데 오히려 그 문구를 적용시켜 당연히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이 불행해서 억울한 죄명을 썼을 경우, 백 대가 지나가도 신원(伸寃)되지 않을 것이니, 과연 옳겠는가? 세상에는 이렇게 될 염려가 현인과 군자들에게 많으므로 나는 이 점을 두려워해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장사 지내기 전에 증직이 내린다면 함중에 쓰지 않을 수 없으며, 장사 지낸 후에 삭직이 된다면 구태여 함중까지 추개(追改)할 것은 없으리라고 본다.
세종 3년 영락(永樂) 신축(1421)에 예조가 아뢰기를,
“송(宋) 소희(紹熙) 5년에 황명으로 태묘(太廟)의 서쪽에 사조전(四祖殿)을 세워 조천(祧遷)한 희조(僖祖)ㆍ순조(順祖)ㆍ익조(翼祖)ㆍ선조(宣祖)의 네 신주를 받들고 해마다 예관(禮官)이 제사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목조 대왕(穆祖大王)도 조천해야 하오니 바라옵건대, 이 예에 의하여 종묘의 서쪽에 별묘(別廟)를 짓고 그 이름을 영녕전(永寧殿)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전교를 받들어 별묘를 세웠다. 이것이 영녕전을 건립하게 된 처음의 일인 것이다.
이때에 공정 대왕(恭靖大王)을 태묘에 모시게 되니 오실(五室)이 넘게 되어 장차 목조(穆祖)를 조천하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계(啓)가 있게 된 것이다. 영락(永樂) 갑진(세종 6년)에 태종을 종묘에 모시는데, 소목(昭穆)을 공정(恭靖)과 함께 하여 한 위(位)게 같이 모시는 법을 썼기 때문에 익조(翼祖)를 조천하지 않았다가,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 비로소 익조를 조천하였으며, 노산조(魯山朝) 때에 이르러 도조(度祖)를 조천하고, 성종(成宗)이 위를 이은 뒤에 환조(桓祖)를 조천하여 사조(四祖)를 모두 조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태조가 비로소 태실(太室)에 거하고, 공정ㆍ태종 2위(位)와 세종 1위와 문종ㆍ세조 2위와 예종ㆍ덕종 2위를 모시게 되었는데, 종묘를 처음 건립한 것이 7실(室) 뿐이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서는 남아 있는 실(室)이 없었다. 그리하여 성종을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조정에서는 1실을 증축하려 했으나 마침내 못하고, 문종을 서쪽 협실(夾室)로 옮긴 뒤에 성종을 제 7실에 모시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의신(議臣)과 예관(禮官)들이 결정지은 것이었다. 삼가 참고해 조건대, 성종조에게 태종이 고조(高祖)가 되니 정종 역시 조천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마땅히 8실이 되어야 하는데 당시에 실(室)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마땅히 재고 되어야 한다.
중종(中宗)을 종묘에 모시게 되어서는 예관 윤개(尹漑) 등이 이 문종을 협실(夾室)에 모신 일이 실례임을 알고 청하여 4실을 증축한 다음 문종을 받들어다가 도로 모셨다. 그래서 중종이 제 9실에 들게 되고 인종(仁宗)이 제 10실에 들게 되었으며, 명종(明宗)을 종묘에 모시려 할 때에 문종이 조천되었고, 선조(宣祖)를 종묘에 모시려 할 때에 예종과 덕종이 조천되어 종묘의 실(室)이 부족한 염려는 없었다. 태조가 건국한 뒤에 종묘를 세우고 또 계성전(啓聖殿)을 세워서 선왕을 받들었다. 그 뒤 태조가 승하하니, 그 혼전(魂殿)을 인소전(仁昭殿)이라 부르다가 다시 문소전(文昭殿)이라 하였고, 태종의 혼전은 광효전(廣孝殿)이라 하여, 각기 도성 안에 있었는데, 그 뒤 세종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궁성 안에다 터를 잡아 침전(寢殿)을 합쳐서 건립하고 그대로 문소전이라 불렀다. 선덕(宣德) 계축(세종 15년) 5월에 먼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양전(兩殿)에 올리고 의물(儀物)을 갖춘 다음 신위판을 만들어서 채여(彩輿)에 모셨다. 그리고 상이 광화문(光化門) 밖에 나가 지영(祗迎)하여 태조와 태종의 신위판을 차례로 새 침전에 모셨다. 그 다음 상은 친히 안신제(安神祭)를 지내고 궁중으로 돌아와 하례를 받았으며 중외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역대의 제왕이 종묘를 세워서, 예를 태고와 같이 하는 것은 신으로 모시려는 것이고, 또 원묘(原廟)를 지어서 섬기기기를 생시와 같이 하는 것은 친하게 하려는 것이다. 원묘의 설치는 역대마다 같지가 않다. 그러나 송 나라의 관신궁(觀神宮)과 어안궁(御安宮)을 경령궁(景靈宮)에 합친 것은 정례(情禮)에 꼭 알맞은 일이었다. 지금 우리의 태조와 태종의 원묘가 따로따로 있는 것은 옛날 제도에 합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후세의 자손들이 각각 원묘를 세울 것이므로 백세 뒤엔 신묘(神廟)가 많아서 그 번거로움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예관을 명하여 1대의 법규를 창립하여 만세의 법전을 삼게 하노라.” 위는《동각잡기(東閣雜記)》에 보임.
이로써 보건대, 태조와 태종의 원묘가 각각 따로 있었는데, 세종대왕이 성스러운 지혜를 처음 내어 비로소 문소전을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침(後寢)ㆍ전전(前殿)ㆍ오실(五室)ㆍ소목(昭穆)의 제도가 아주 잘 완비되었는데도 공정왕은 참여되지 못하였으며, 또 태조가 건국한 처음에 계성전을 지어서 선왕을 받들었다고 하니, 이 계성전도 원묘와 같은 것이다. 신전(新殿)에 봉안한 분이 태조와 태종 양위 뿐이라면 오실(五室)의 제도에도 차지 못하는데, 사조(四祖) 가운데서 도조(度祖)ㆍ환조(桓祖)는 고조와 증조인데도 같이 모셨다는 말을 들을 수 없으니, 그것은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공정이 문소전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문종 역시 이러한 이유였으리라.
성종 때에 이르러 덕종을 추봉(追封)해서 종묘에 모셨으나, 예종을 이미 문소전에 모셨으므로 덕종을 별전(別殿)에 모시고 연은전(延恩殿)이라 불렀으니, 연은전의 칭호가 이때에 시작된 것이다. 공정과 문종이 모두 문소전에 들지를 못했는데 덕종만을 위하여 연은전을 별도로 세운 것은, 아마도 생부이기 때문에 융숭함을 가한 것인가 한다.
정미년(1547, 명종 2)에 이르러 인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장차 문소전에 모시려 하는데 세조를 조천해야 하므로, 2품 참의 이상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인종을 모시기 위해서는 세조를 조천해야 한다고 했다.
상은 발[簾] 안에서 문정왕후가 섭정하고 있었다 답하기를,
“세조께서는 지금 사조(四祖)의 주(主)일 뿐 아니라, 공로가 또한 막대하여 조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연은전에 별도로 인종을 모시려 하는데 그게 어떠하오?”
하였다. 그러자 영부사 홍언필(洪彦弼) 등이 그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네 번이나 계를 올려, 비로소 윤허를 하였는데, 수일이 지나 다시 대신 등을 불러서 세조를 조천할 수 없으니, 인종을 연은전에 모시도록 하라는 뜻으로 효유하였다. 이 말에 윤인경(尹仁鏡) 등은 곧 회계(回啓)하기를,
“상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하였다. 그러자 대사헌 안현(安玹)ㆍ대사간 이명(李蓂)ㆍ부제학 주세붕(周世鵬) 등이 궐문에 엎드려 이를 논하였고, 태학생 정거(鄭琚) 등이 소를 올려 논쟁을 하였으나, 결국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그뒤 선조 초년에, 명종을 문소전에 모실 때에 인종도 연은전에 같이 모셨다. 이 때문에 인종과 명종 2대가 1실에 있게 된 것이니, 그 상세한 것은 《퇴계집(退溪集)》 안에 있다.
만력(萬曆) 신사년(1501, 선조 14) 11월에 신덕왕후(神德王后)에 대한 의논이 비로소 일어났다. 당초 신덕왕후 강씨(康氏)가 우리 태조를 도와서 집안을 변화시켜 국가를 세웠으므로 중전의 자리에 올라 천조(天朝)의 고명(誥命)까지 받았으며, 돌아간 뒤에도 시호를 신덕(神德), 능호를 정능(貞陵)이라 하는 등 신의왕후(神懿王后)와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는데, 태조가 승하하니 신의왕후만을 종묘에 모시고, 신덕왕후에 대하여는 모든 전례(典禮)를 전부 폐하여 거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월이 오래되자, 산능(山陵)의 소재마저 알지 못한 것이 2백 년이나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덕원(德源)에 사는 강순일(康純一)이란 자가 어가(御駕) 앞에서 소장을 올려 스스로 말하기를,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후손으로서 현재 군역(軍役)에 책정되어 있으니, 국묘 봉사(國墓奉祀)하는 사람들의 예에 의하여 개정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였다. 아마 강윤성은 곧 신덕왕후의 아버지이리라. 그때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조(四祖)의 왕후들의 부모 산소는 관에서 한 사람씩 책정해서 국묘 봉사(國墓奉祀)라는 명칭으로 군역을 면제해 준 예가 있었다. 그러므로 강순일이 이러한 소장을 내게 된 것이다. 이에 율곡 이공(李公)이 앞장서 말하기를,
“신덕왕후는 응당 종묘에 배향해야 할 분으로서 까닭없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윤기(倫紀)에 관계되는 것이니, 마땅히 존숭하는 일을 행하여야 한다.”
하였다. 조정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어 비로소 예관을 명하여 먼저 능침(陵寢)을 찾기로 하였는데, 문관 이창(李昌)이라는 자가 신덕왕후의 외손으로서 조정에 벼슬하고 있어서, 해조(該曹)가 계청해서 합동으로 능소가 있을 만한 곳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차산(峩嵯山) 안팎을 두루 도아 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는데, 마침 《변춘정집(卞春亭集)》 중에 실려 있는 정릉 이조 축문(貞陵移厝祝文)에서 서울 동북쪽에 능이 있다는 글귀를 보았다. 이에 따라 물색하여 산 아래 마을에서 찾은 결과, 과연 국장(國葬)으로 지낸 능실(陵室)이 산골짜기에 몹시 퇴폐되어 있었다. 조정의 의논이 처음에는 종묘에 신의왕후의 예와 똑같이 모시자고 하였는데 또 이론(異論)이 생겼다. 이는 예경(禮經)의 말을 인용하여 ‘제후(諸侯)는 두 번 장가들 수 없다.’는 말과 ‘예에는 두 적실(嫡室)을 둘 수 없다.’는 등의 말을 듣고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의논이 서로 엇갈려서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자 조정의 의논은 또 하책(下策)이 나왔는데, 그것은 다만 제각(祭閣)의 건립과 관원의 설치만을 딴 능침(陵寢)의 제도와 똑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의견마저 시행되지 못하고, 다만 조천한 신묘(神廟)의 예에 따라서 매년 한식(寒食)날 제사를 올리는데 그쳤다.
신의왕후와 신덕왕후는 태조가 잠저(潛邸)에 계실 때 서울과 지방의 두 아내였으므로 신의왕후가 작고한 뒤에 신덕왕후가 계실(繼室)이 되었던 것이다. 정총(鄭摠)이 지은 정릉비(定陵碑)의 서문을 참고하더라도 신덕왕후에 대해서 역대로 나쁘게 말한 것이 없었음을 볼 수 있으며,〈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도 또한 볼 수 있다. 본조의 가법(家法)이 이미 정한 바 있어 열성조의 전후비(前後妃)가 모두 종묘에 배향되었으니, ‘제후는 두 적실을 둘 수 없다.’는 설을 태조에게만 적용시키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의 한때의 의논이 경서를 들이대고 예를 인용하면서까지 신덕왕후를 깍아내리고 말았으니,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강순일이 당초 하소연한 것은 다만 신역(身役)을 면제받기 위해서였는데, 사론(士論)이 분연히 일어났다. 이로 인해서 천도가 좋게 돌아와 하늘이 은연중에 복을 내리는 일대 기회가 될가 하였더니, 발단만 하고 도로 그쳐서 논쟁을 벌인 지 3년 만에 겨우 한식날 제사 한 번 지내게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하겠다.
을해년(1575, 선조 8),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초상이 이미 졸곡(卒哭)을 지나자, 지평 민순(閔純)이 상소하기를,
“송효종(宋孝宗)의 백모(白帽)ㆍ백대(白帶)로 삼년상을 마친 제도를 채택하여 쓰소서.”
라고 했는데, 중론은, 옛날 제도를 변경하는 것이라고 하여 어렵게 여겼다. 그러자 선조(宣祖)는 정승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좌상 박순(朴淳)과 우상 노수신(盧守愼)이 의논드리기를,
“삼가 살펴 보건대, 정사를 볼 때 입는 의복이 이미 흰색인데, 갓과 띠만이 검은 것은 비록 권제(權制)라고 하지만 바야흐로 최상(衰喪) 중에 있어서는 참으로 온당치 못한 까닭에 검은 빛을 흰빛으로 고치려 하는 것이니, 이것이 대단한 경장(更張)은 아니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동릉 이실(同陵異室)의 제도는 가장 중대한 것인데도 오히려 준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석실(石室)과 비(碑)를 세우는 일들 또한 중도에서 폐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립(白笠)을 흑립(黑笠)으로 변경한 것은 상례(喪禮)에 위배되는 것인데도 여러 대를 시행하여 왔습니다. 하물며 이 흑색을 백색으로 변경하는 것은 참으로 상제(喪制)에 합당한 것이온데, ‘경솔하게 변경할 수 없다.’고 말하니, 신 등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도라는 것은 오래되어야 갖춰지는 것으로 역대가 모두 그러했습니다. 송 나라 효종(孝宗)은 흰 베옷을 입고 정사를 보았으며, 명 나라 인종(仁宗) 역시 흰 최질(衰絰)을 띠고 조회에 임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군신의 논의에 따르지 않고, 홀로 옛날의 법규 밖의 것을 단행하였으니, 변경을 하였다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의논을 드리는 것은 신하의 직분이오나 제도를 확정하는 것은 임금의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상의 의사에게 결정되어야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그 의견을 옳게 여겨 단행하였으니 참으로 천년 만에 단 한 번 있는 시기라고 하겠다. 그 제도는 상의 익선관(翼善冠)은 흰 생초로 싸고, 각(角)도 같이 쌌으며, 오서대(烏犀帶)는 흰 명주로 쌌다. 종친과 문무 백관의 흑모(黑帽)는 흰 모시베로 싸고, 후수(後垂)도 같았으며, 오각대(烏角帶)는 흰 무명으로 쌌다. 녹을 받지 못하는 관원들의 모자와 띠는 백관과 같았다. 그런데 그 뒤 중론이 많이 불편하다고 하여, 정축년(1577, 선조 10)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초상에는 옛 제도를 따랐다.
갑술년(1574, 선조 7) 여름에, 송도(松都)의 국학(國學)에 모셨던 선성(先聖)과 십철(十哲)의 소상(塑像)을 매안(埋安)하고, 대신 위판(位板)으로 모시라고 명령하였다.
당초 고려 충렬왕 29년(1303) 계묘 윤5월에 국학 학정(學正) 김문정(金文鼎)이 선성ㆍ십철의 소상과 문묘의 제기를 가지고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이것은, 대개 찬성사(贊成事) 안유(安裕)가 건의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또 남은 재물을 김문정에게 주어 소상을 구입해다가 다시 국학을 세워 소상을 봉안하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의 칠십자(七十子)는 위판으로 모시게 했던 것이다. 충선왕(忠宣王)이 국학을 성균관(成均館)이라고 고쳤으며, 공민왕(恭愍王) 16년 7월에는 문선왕(文宣王)의 소상을 숭문관(崇文館)에 옮기고 문무 백관이 관대(冠帶)를 하고서 시위(侍衛)하였다. 그후 고려 왕조가 끝나기까지 90년동안 홍건적(紅巾賊)의 난리도 겪었으나 역시 병화를 모면하였다. 태조가 혁명한 다음,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기고 개성을 유수(留守)가 관장하는 부(府)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성균관이라고 부르던 것을 개성부 사람들은 학당(學堂)이라고 고쳐 불렀으나 묘의 모양은 여전히 고려 시대의 제도를 한결같이 따랐는데, 공정(恭靖)과 태종이 곧 본 위치로 환원시켜서 국학으로 보아 왔으며, 성종ㆍ중중께서도 일찍이 거둥해서 공경히 성묘를 배알하였다. 그 후에도 대대로 높이고 중히 여겨 유상(遺像)이 엄연하게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소상은 부처와 같아서 명궁(明宮)에 제사 시내는 것은 합당하지가 않다.’는 말이 있어서, 수의하여 위판으로 바꾸고, 소상을 모지(某地)에 매안(埋安)하게 하였던 것이다. 개성부의 선비와 노인들이 소를 올려 중지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 매안할 적에 부관(府官)이 소상을 가리는 물건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여, 일에 임해서 전도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 사실이 상에게 들리자 파직을 명하고 죄를 주었다.
명종의 초상에 공의전(恭懿殿)이 입을 복제가 의심되었다. 퇴계는 말하기를,
“제후의 전례는 참으로 상고할 수가 없다. 다만《의례경전(儀禮經傳)》의〈군위신복도(君爲臣服圖)〉와 〈천자제후절방기복도(天子諸侯絶傍朞服圖)〉를 보고 미루어 생각하면, 제후가 비록 형제의 기복을 끊고 입지 않지만, 아우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에는 반드시 기복을 입어야 한다. 그것은 적손(嫡孫)ㆍ적증손(嫡曾孫)ㆍ적현손(嫡玄孫)이 모두 기복을 입는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아우로 아들을 삼지 않아서 형제의 명칭이 있는 이상, 수숙(嫂叔)의 명칭 역시 말살될 수는 없다. 옛날의 예법에는 수숙의 사이는 복이 없다. 그러므로 옛날의 법식대로 한다면 복을 입지 않아야 할 듯한데, 만약 수숙의 사이라도 왕위를 계승한 의리가 중하여 복을 입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가례(家禮)》의 소공(小功) 복을 입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
하였다. 당시는 퇴계선생의 말을 채택하여 공의전이 명종에게 복이 없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다. 이때 기고봉(奇高峯)이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관서(關西)에 나가 있었는데, 형제가 서로 계승하였을 때 서로 입는 복과 후부인(後夫人) 복제 관계를 하나하나 들어서 퇴계 선생에게 서신으로 질정을 하였다. 그 서신은 대략 다음과 같다.
“송태종이 태조를 계승하여 비록 역월제(易月制)를 시행했으나 실은 참최(斬衰) 3년을 입은 것이며, 휘종(徽宗)이 철종(哲宗)을 위하여 중한 최복을 입었고, 고종(高宗)이 흠종(欽宗)을 위하여 참최 삼년의 복을 입었으니, 이들은 형제가 서로 계승하면서 복은 왕위를 계승하는 복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동진(東晉)의 강제(康帝)가 성제 두황후(成帝杜皇后)를 위하여 1년이 넘도록 소복을 하였으며, 송 고종이 융우 맹태후(隆祐孟太后)를 위하여 중한 복을 입었으니, 이들은 형수와 숙모를 위하여 중복을 입은 것입니다. 《의례(儀禮)》 상복편(喪服篇)을 상고하면,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참최 삼년의 복을 입고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 자최 삼년복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동진의 효무제 태후(孝武帝太后) 이씨(李氏)는 효무제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었으며, 송무제(宋武帝) 소태후(蕭太后)도 역시 삼년복을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태후가 사군(嗣君)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것은 비록 후세라 해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형제가 서로 계승하는데, 이미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중하다 해서 부자의 사이에 입어야 할 복을 입었다면, 형수가 시숙을 위해 하는 것도 또한 어머니가 아들 보는 것 같이 해서 마땅히 중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예기(禮記)》상복소기(喪服小記)를 상고하면, ‘제후와 더불어 형제가 된 자는 참최를 입는다.’ 하였고, 그 소(疏)에, ‘제후와 오속(五屬) 관계가 있는 친족은 참최를 입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였습니다. 어찌 서로 더불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도리어 복이 없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의례(儀禮)》 상복편(喪服篇)을 상고하면, ‘대부와 그 부인이 종자(宗子)의 어머니와 아내를 위해서 참최 3월 복을 입는다.’ 하였으니, 그 사이에 반드시 수숙을 위하는 것도 있을 것이므로 예문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대개 종자를 위해서 복을 입는 것은 조상을 높이고 친족을 공경하는 의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미루어 그 어머니와 아내에게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의(義)가 있는 곳에는 예(禮)도 때로는 변하는 것이므로, 수숙 사이가 본래는 복이 없지만, 종자의 어머니와 아내를 위해서 복을 입는 것이니, 형제가 서로 계승할 때에는 수숙으로써 논란할 수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명종이 이미 인종을 위하여 왕위를 계승하는 복을 입었으니, 공의전도 마땅히 명종을 위하여,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는 것처럼 자최 3년을 입어야 할 것은 너무도 분명한데, 어찌 꼭 복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어떤 이가 힐난하기를, ‘명종이 인종을 위하여 입은 복은 신하가 임금을 위해서 입은 복이고, 왕위를 계승하는 복은 아니므로 공의전이 명종을 위하여 입는 복도 수숙의 복을 입어야 할 것이지 어찌 모자의 복을 입는가.’ 라고 합니다. 그래서 답하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다. 왕위를 계승하는 복은 부자간의 복이므로 이는 정복(正服)이며, 군신간에 입는 복은 의복(義服)이므로 정복에 다음 간다. 이 때문에 전대부터 왕위를 전승할 즈음에는 모두 정복으로 입게 하였으니, 의복이 그 사이에 개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주자가, 영종(英宗)이 즉위하고 적손으로서 승중복(承重服)을 입게 되었을 적에, 어찌 신하가 임금을 위해서 입는 복제로 입으라고 잘라 말하지 않고서, 꼭 정강성(鄭康成)의 말을 들어서 증험을 삼았겠는가. 이것은 변론을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퇴계는 어떤 사람에게 보내는 답장에 이르기를,
“수숙 사이에 복이 없다고 말한 것은, 그때《의례경전(儀禮經傳)》에서 임금이 신하를 위하여 입는 복에 관한 몇 가지 도설(圖說)만을 보고서, 그 유로 미루어 생각할 때 그럴 것이라고 여겼는데, 요사이 《통고(通考)》ㆍ《통전(通典)》 등의 책을 얻어 한가한 틈에 열람하여 보니, 역대로 말한 왕통을 계승하는 복제는 저 기고봉의 말과 같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에 지난날 경솔하게 한 책자만 믿고서 두루 열람해 보지도 않은 채 망령되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데 대해서 송구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문제는 기명언(寄明彦)의 글 가운데 아주 잘 변론되었으므로 마음에 감복하여 마지않습니다.”
하였다. 그 후 공의전의 초상에 선조도 역시 왕통을 계승하는 중한 복으로 자최(齊衰) 3년 복을 입었다.
기사년(1569, 선조 2) 봄에 덕흥군(德興君)을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추존하고 부인 정씨를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봉했다. 그리고 그 자손은 대군의 예에 의하여 습작(襲爵)하였으며, 4대가 지난 뒤에도 봉사(奉祀)하는 사람은 대대로 도정(都正)을 세습제로 주게 했다. 뿐만 아니라, 사시로 유사를 시켜 제사에 쓸 고기를 바치게 하고, 토지와 노복을 내려주어 제수를 장만하게 하고, 신주는 백세가 지나도 조천(祧遷)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덕흥군을 추존할 것을 아뢰니, 예문을 참고하고 널리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그리하여 정신(廷臣)들은 송 나라 복왕(濮王)ㆍ수왕(秀王)의 추존(追尊)한 전례를 인용하여 논의를 거듭해서 추존을 하게 되었다. 이때 퇴계도 마침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추존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올리려고 6조(條)를 갖추어 그 위아래에 논서(論叙)를 붙였으나 올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헌관(獻官)을 차출하는 것과 관에서 제물을 제공하는 하나의 절차를 가지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이리저리 헤아려 생각했는데, 그 대위는 이러했다.
“옛날에 이미 ‘사친(私親)을 강하(降下)하여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한 글이 있다. 또 사친의 사당은 본집에 두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몇 대가 지난 뒤엔 그 자손이 소목(昭穆)에 입참(入參)하지 않을 수 없으니, 헌관을 차출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형세에 구애되는 바가 있을 뿐 아니라, 또 한 사당 안에서 한 제사를 차리는데, 할아버지는 관가에서 제수를 장만하고 손자는 사가에서 장만할 수야 있겠는가. 《대전(大典)》에 왕후의 부모에게도 관가에서 재물을 주는 예가 있으나, 이와는 경우가 같지 않으니, 토지와 노복을 주어서 대대로 전해 가며 잘 보존하여, 나누어 쓰지 못하도록 하고, 사중(四仲)의 시제(時祭)에는 유사가 돼지 한 마리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가에서 장만하게 하여서 사친에게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의(義)에 맞게 해야 한다. 그러면 영구히 전해 갈 수 있고 폐단이 없을 것이니, 참으로 온당하다.”
하였다. 이전에 선조가 왕위를 이어받고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의 초상을 당해 장사지내려 할 때에, 상이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치르게 하였는데, 그 축문에 황백부(皇伯父)라 하고, 자칭은 고질(孤姪)이라 하였다. 고봉(高峯)이 편지로 질문을 하니, 퇴계가 말하기를,
“정이천(程伊川)이, 황백부(皇伯父)라고 한 말은 황제의 백부라는 말이고, 황고(皇考)를 이른 것은 아니다. 《송감(宋鑑)》에서 말한 ‘황종형 아무개의 아들이다.’라는 것과 ‘황백(皇伯)…….’고 한 것은 모두가 황제라는 황(皇) 자를 가리킨 것으로서, 황자(皇子)ㆍ황형(皇兄)ㆍ황질(皇姪)과 같은 유이다. 그런데 지금 황고의 황(皇) 자로 썼으니, 어찌 글 뜻과 크게 어긋나지 않겠는가. 더구나 황고의 황자는 방계(傍系)의 존속에게는 더욱 더 쓸 수가 없다. 인종이 주상에게 황백고(皇伯考)가 되는데, 백부(伯父)라는 칭호를 또 방계의 존속에게 다시 썼으니, 역시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리고 고질(孤姪)이라고 말한 것도 또한 근거할 만한 데가 없는 것 같다. 비록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근거로 글을 썼다 하더라도 마당히 고질자(孤姪子)라고 해야 하고, 고질이라고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뿐만 아니라, 치제(致祭)한 것도 생각하면 타당하지 못하다. 이때는 국상을 당한 지 얼마 안되어 종묘의 제사도 감히 지내지 못하는데, 어찌 사친을 위하여 제문을 짓고 제관을 보내서 제사를 지낼 수 있겠는가. 하물며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라 할지라도 대왕의 참최복을 입고서 경솔하게 사친의 제사에 참여했다는 것이 또한 예에 합당하다고 하겠는가. 비록 정리(情理)는 억제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정리로써 예를 폐하게 되면 앞으로 폐단을 바로잡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에 올릴 물품이나 넉넉히 주어서 그 사자(嗣子)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정축년(1577, 선조 10)에 이르러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삼년상이 끝나자, 선조는 대신을 불러서 정녕하고 간곡한 뜻으로 하유하고 사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옥당에서는 상차(上箚)하여 예문에 위배됨을 논했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원군(河原君)과 하릉군(下陵君)에게 추은(推恩)하여 모두 정1품으로 올리고, 안황(安滉)은 6품직을 주었으며, 정창서(鄭昌瑞)도 당상관으로 올렸다. 모두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여 마음대로 하지 않는 뜻은 보였지만 그래도 언관들은 몇 달 동안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무자년(1588, 선조 21) 6월. 대원군의 방에 불이 나서 모두 탔다. 선공감(繕工監)에게 명하여 옛제도와 똑같이 건립하게 하였더니, 다섯 달 만에 공사가 끝났다. 감독관과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공을 논하여 차등있게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의 묘소는 영월군(寧越君)에 있다. 정덕(正德) 병자년(1516, 중종 11)에 중종이 처음으로 승지 신상(申鏛)을 보내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뒤 오랫동안 폐하고 지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 9)에 이르러 선조가 헌관으로 행호군(行護軍) 유훈(柳塤)을 보내서 제사를 지내고, 신사년(1581, 선조 14) 여름엔 관찰사 정철(鄭澈)의 장계로 인하여 묘를 봉축하고 비석 세우기를 왕자의 묘에 하는 예와 같이 하고, 공사가 끝나던 날, 승지 이해수(李海壽)를 보내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가까운 고을에서 받아들이는 공물을 제수에 쓸 만큼 알맞게 공제해서 매년 한식날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후 참판 김늑(金玏)이 영월 군수로 부임하여 관찰사 정곤수(鄭崑壽)에게 청하여 묘 아래에 재실(齋室)ㆍ제주(祭廚)를 건립하는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시(歲時)로 제사를 올리니 여러 사람들이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지난날 매몰되었을 때와는 달랐다. 이에 앞서, 영월 군수 중에 폭사(暴死)한 자가 많았으므로, 세상에 전하기를, ‘흉한 지방’이라고 하였다. 대개 노산군이 작고한 뒤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무하고 소치는 것도 금하지 않았더니, 요괴(妖怪)한 일이 차마 말할 수 없게 일어났었다. 판서 박충원(朴忠元)이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 영월군수에 제수되었는데, 그는 부임하는 날 깨끗하게 제물을 차려 놓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왕실의 맏아들로 나이 어린 임금이셨는데 / 王室之冑幼沖之辟
때마침 비운을 만나서 궁벽한 고을로 피해 오셨네 / 適丁否運遜于僻邑
한 조각 푸른 산에 만고의 외로운 혼이시여 / 一片靑山萬古孤魂
바라오니 강림하시어 제향을 흠향하옵소서 / 庶幾降臨式歆苾芬
하였다. 그후로는 요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맨 처음 중종이 일찍이 경연에서 《예기(禮記)》를 강하다가 말이 진여공(秦厲公)에 미치자 강관 김굉(金硡)이 슬며시 연산군(燕山君)을 양자로 세울 뜻을 비쳤으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넌지시 깨우쳤다. 그러자, 상은 다른 대신들을 맞아다가 연산군과 노산군의 입후 문제에 대하여 가부를 논의하고, 또 홍문관과 예조에 명하여 널리 옛 제도를 상고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파기되고 말았다. 그후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상소하여, 노산군과 연산군을 입후할 것을 청하고 또, 미(嵋)의 죽음은 죄상이 명확하지 못하니, 뉘우치는 뜻을 보일 것을 말했다. 중종은 그 말을 아름답게 받아들여서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등을 불러 이약빙의 상소를 보이고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대사헌 유인숙(柳仁淑)ㆍ대사간 신거관(愼居寬) 등이 소장을 번갈아 올려서 말하기를,
“이약빙이 노산군과 연산군을 입후하기 위하여 이같은 사론(邪論)을 하게 된 것입니다. 미(嵋)의 죄는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는 것인데, 한무제(漢武帝)가 여태자(戾太子)를 죽인 고사를 이끌어다가 전하의 뉘우침을 바라고 있으니, 지극히 패려하옵니다. 청컨대, 나국(拿鞫)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홍문관이, ‘말을 구한 뒤에 말을 잘못했다 해서, 말한 사람에게 죄를 주면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된다.’고 차자를 올려 논쟁하므로, 이약빙은 곧 사면되었던 것이다. 노산군과 연산군을 위해서 입후(立後)하려는 것은 한 가지 일인데도, 앞뒤 조정의 논의가 이처럼 서로 달랐다.
[주-D001] 분면(粉面) : 신주(神主)는 밤나무에 검은 칠을 해서 두 쪽을 합쳐서 만드는데, 분면은 그 분을 바른 앞쪽을 가리킴. 분면에는 현고 모관 부군 신주(顯考某官府君神主)라 쓰고, 그 옆에 효자 모 봉사(孝子某奉祀)라 쓰는데, 즉 망인이 봉사하는 자의 누구이며 벼슬은 무엇까지 했는가를 밝힘.[주-D002] 함중(陷中) : 망인의 관작ㆍ성명ㆍ자호 등을 기록하기 위하여 뒤쪽의 앞면(분면 쪽과 합치는 부분) 가운데를 가로가 6촌, 세로가 1촌, 깊이 4푼의 장방형으로 우묵하게 파낸 부분을 가리킴. 함중에는 고 모관 모공 휘모 자모(故某官某公諱某字某)라고 씀.[주-D003] 영녕전(永寧殿) : 이조의 임금 및 왕비로서 종묘에 모실 수 없는 분의 신위를 봉안하던 곳으로, 종묘 안에 있는데, 태조의 사대조(四代祖) 및 그 비(妃), 대가 끊어진 임금 및 그 비를 모셨다. 종묘와는 달리 영녕전은 1년에 두 번(1월ㆍ7월)을 원칙으로 대관(代官)을 보내어 간소하게 제사를 지냈으며, 공상(供上)에도 차별이 많았다.[주-D004] 오실(五室) : 옛날 조상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는데 천자는 7묘(廟), 제후는 5묘(廟), 대부(大夫)는 3묘(廟)였으니, 우리 나라는 제후에 해당하므로, 5묘였음. 태조를 중앙에 모시고 2세~3세를 왼쪽인 소(昭)에, 3~4세를 오른쪽인 목(穆)에 모시어 오실(五室)이라 했음.[주-D005] 소목(昭穆) : 종묘 또는 사당(祠堂)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던 차례.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는데, 제1세(世)를 중앙에 모시고, 천자(天子)는 2세ㆍ4세ㆍ6세는 소에, 3세ㆍ5세ㆍ7세는 목에 모시어 삼소삼목(三昭三穆)의 칠묘(七廟), 제후는 이소이목(二昭二穆)의 오묘(五廟), 대부는 일소일목(一昭一穆)의 삼묘(三廟)임.[주-D006] 혼전(魂殿) :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에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궁전.[주-D007] 오속(五屬) : 오복(五服)의 친족을 말하는데, 오복은 참최(斬衰)ㆍ자최(齊衰)ㆍ대공(大功)ㆍ소공(小功)ㆍ시마(緦麻)를 이른다.[주-D008] 한무제(漢武帝)가 …… 고사 : 여태자(戾太子)는 한무제(漢武帝)의 아들 거(據)인데, 성품이 관후하여 억울한 사정을 많이 보아 주었으므로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으나, 대신들은 좋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 강충(江充)이란 자가 용사를 했는데, 후일 여태자에게 죽을까 염려하여, 무제가 병환으로 고생하는 것을 무고(巫蠱) 때문이라고 무고하여 여태자를 급히 잡으려 들자, 여태자는 군사를 일으켜서 강충을 죽이고 도망쳤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그후 무제는 뉘우쳐서 사자궁(思子宮)과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를 호수 가에 세웠다. 《漢書 戾太子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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