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16. 16:27ㆍ고대사
성종 12년 신축(1481) 10월 17일(무오)
12-10-17[01] 남원군 양성지가 중국이 개주에 위를 설치한다는 것에 대해 상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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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생각건대, 자고로 천하 국가의 사세(事勢)는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혹 알지 못하기도 하고 비록 이미 알아도 또 〈어떻게〉 하지 못하니, 이것이 모두 잘못된 일중의 큰 것입니다. 일을 먼저 도모한다면 어찌 잘 다스리고 오랫동안 안전하기가 어렵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중국이 장차 개주(開州)에 위(衛)를 설치하려 한다 하는데, 신이 거듭 생각해 보니 크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봉황산(鳳凰山)에 의거하여 성(城)을 이루었는데, 산세가 우뚝하고 가운데에 대천(大川)이 있으며, 3면이 대단히 험하고 1면만이 겨우 인마(人馬)가 통하는 이른바 자연히 이루어진 지역이므로,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1만 명이라고 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주둔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였고, 또 요(遼)나라의 유민(遺民)이 여기에 근거하여 부흥(復興)을 도모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누가 우리 나라와 관계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지금 북쪽으로는 산로(山路)로 심양(瀋陽)ㆍ철령(鐵嶺)ㆍ개원(開元)을 가리켜 야인(野人)과 연접(連接)하였고, 남쪽으로는 해도(海道)로 해개(海蓋)ㆍ금복(金復)을 가리켜서 등주(登州)ㆍ내주(萊州)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요동(遼東)ㆍ광녕(廣寧)ㆍ금주(錦州)ㆍ서주(瑞州)를 가리켜 연주(燕州)ㆍ계주(薊州)로 통하니, 저들에게는 유주(維州)의 이로움이 있고, 우리에게는 한중(漢中)의 세가 있는 실로 동도(東道) 요충(要衝)의 땅입니다. 여름에는 만경(萬頃)의 험로(險路)이면서 오히려 충분히 의거할 수 있고 겨울에는 평평하기가 숫돌 같으면서도 곧기가 화살과 같으니, 비록 형제 부모의 나라라도 이 땅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부당합니다. 평시에는 평안도 백성들 중 부역(賦役)을 피하는 자들의 태반이 이곳으로 가는데, 저들은 가벼운 부역으로 이들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변경 땅의 백성이 모두 그 곳으로 들어간다 하여도 그것은 일시의 해로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영원한 근심꺼리입니다. 신이 고금(古今) 천하의 형세(形勢)로 말씀드리면, 구주(九州) 안은 오직 중국 황제가 다스리는 바이며, 사해(四海)의 밖으로 서역(西域)은 총령(葱嶺)과 사막(沙漠)이 약 3만 리나 되며, 북쪽은 사막(沙漠) 불모(不毛)의 땅이어서 황막(荒漠)하기 끝이 없고, 동이(東夷)는 일본으로써 바다로 둘러쌓인 나라이며, 남만(南蠻)은 점성(占城)과 진랍(眞臘) 땅으로서 계동(溪洞)과 열병(熱病)이 심하여 중국과는 옛부터 통교가 없는 곳이며, 서쪽은 파촉(巴蜀)ㆍ검각(劍閣)으로의 길로서 진(秦)나라 때에 처음으로 개척하였고, 남쪽은 담이(儋耳)ㆍ경애(瓊崖)의 땅으로 한(漢)나라가 비로소 군(郡)을 두었습니다. 동북관(東北關) 밖은 영주(營州)ㆍ요동(遼東)ㆍ요서(遼西)의 땅이고, 서북관(西北關)의 오른쪽은 양주(涼州)ㆍ하서(河西)의 5군(郡)이 그것이며 이후에는 중국과 교통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됩니다. 단군(檀君)이 요(堯)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箕子朝鮮)ㆍ신라(新羅)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前朝)의 왕씨(王氏)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서민(庶民)은 남녀가 농사에 부지런하고 사대부(士大夫)는 문무(文武)가 내외의 일에 이바지하여 집집마다 봉군(封君)의 즐거움이 있고 대대로 사대(事大)의 체제가 있으며, 따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소중화(小中華)하고 부르면서 3천 9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진(黃溍)은 벼슬살이할 만한 나라라고 하였고, 황엄(黃儼) 또한 천당(天堂)이라 하였으며, 원(元)나라의 세조(世祖)는 우리로 하여금 구속(舊俗)을 그대로 따르게 하였고, 명(明)나라의 고황제(高皇帝)는 우리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허가하였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가지게 한 것은 언어가 중국과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습속도 역시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元)나라 말기에 홍군(紅軍) 20만 명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왔을 때 우리가 대병으로써 쳐부수고 군대의 명성을 크게 떨친 사실이 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이며, 또 명나라가 금릉(金陵)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우리 나라가 북원(北元)과 국경을 접한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입니다. 또 중국이 동쪽에 있어서 한(漢)나라ㆍ수(隋)나라ㆍ당(唐)나라는 군사를 남용하였으나 지키지 못하였고, 요(遼)나라ㆍ금(金)나라ㆍ원(元)나라는 국경을 접했으면서도 핍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신은 평양(平壤)을 점거하였던 중국 세력들의 흥폐(興廢)는 말할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고구려가 풍씨(馮氏)의 남은 세력을 근거로 강성해져서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1백만 군이 살수(薩水)에서 대패 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여섯 차례나 원정하였지만, 요좌(遼左)에서는 공이 없었으며, 한(漢)나라는 비록 평양을 얻었으나 곧 고구려에 점거당하였고, 당나라는 평정하였으나 역시 신라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약간의 굴곡이 있었습니다만, 삼한(三韓)의 법규를 지킨 것은 옛날과 같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漢)나라ㆍ수(隋)나라ㆍ당(唐)나라 모두 관중(關中)에 도읍하여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遼)나라는 인국(隣國)이며 적국(敵國)이었으므로, 소손녕(蕭遜寧)의 30만 병이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금(金)나라는 본래 우리 나라의 평주(平州) 사람이 세웠으므로 우리 나라를 부모의 나라라 하였고, 윤관(尹灌)이 9성(九城)을 쌓은 선춘령(先春嶺)으로 경계를 삼아 금나라가 망할 때까지 군사력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요와 금의 두나라는 모두 서쪽에 하국(夏國)이 있었고 남쪽에는 대송(大宋)이 있어서 서로 원수 사이였는데, 어느 틈에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후 야율씨(耶律氏)가 서쪽으로 만리를 달렸으나 완안씨(完顔氏)의 남하로 패망하였고, 원나라는 혼인국(婚姻國)이라고 칭하였으나 수십년 동안 침략하였고, 중국과 남북의 오랑캐가 혼합되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서 국경이 없었지만 그 말년에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음산(陰山) 북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신이 다시 생각건대, 국가는 한 시대에 고식(姑息)되지 말고 만세의 계책을 세워야 하며 무사한 것을 요행으로 삼지 말고 만전의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천하에 금 그릇에 비길 만한 것은 잘 보전하여 깨트리지 말며, 산하(山河)가 금에 비길 만한 것은 지켜서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역대의 제왕(帝王)들이 장안(長安)ㆍ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거나 건강(建康)ㆍ임안(臨安)에 도읍하고 혹은 북쪽으로 업(業) 땅에 도읍하거나 동쪽으로 변량(汴梁)에 도읍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북쪽으로 들어간 후부터는 연도(燕都)가 남북의 요관(要關)이 되어, 북으로는 거용관(居庸關)에 의거하여 호원(胡元)의 목을 움켜잡고 앞으로는 중원(中原)에 임하고, 남으로는 사해(四海)를 제압하니, 명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도읍을 정한 후 실로 만세의 제왕이 옮기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연도(燕都)로부터 서남쪽으로 운남 포정사(雲南布政司)까지 1백 60일정(日程)이고, 동남쪽으로는 남경(南京)까지 60일정이며, 동북쪽으로 한도(漢都)까지는 겨우 30일정이고, 더구나 개주(開州)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는 겨우 1일정이니, 집 앞 뜰만큼이나 가까우며 걸상의 한쪽 끝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지금 개주에 성을 쌓으면 개주로써 그치지 않고 반드시 당참(唐站)에 성을 쌓게 될 것이며, 당참에 성을 쌓게 되면 당참에 그치지 않고 성을 쌓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양곡(糧穀)의 운반을 요청하게 되면 양곡 운반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소와 운반구(運搬具)를 요청할 것이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청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이며 농(隴) 땅을 얻으면 촉(蜀) 땅을 바라게 되는 필연의 이치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 바치는 동해의 생선이 주방(廚房)의 쓰임에 충당할 만한데, 어찌 특별히 남만(南蠻)의 구장(枸醬)과 죽장(竹杖)을 쓸 것이며, 우리 나라의 궁시(弓矢)와 포백(布帛) 역시 군수(軍需)로 쓰는데, 어찌 남중(南中)의 금은(金銀)과 단칠(丹漆)만을 쓰겠습니까? 지금 당장에는 무사하다 하여도 5백 년 후에는 무력(武力)를 남용하는 자와 공 세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번 일은 우리 나라에서 중국에 왕래하는 새 길을 열 것을 청한 것을 계기로 병부(兵部)에서 상주(上奏)한 것이지 정동(鄭同)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동을 통해 교섭을 시작하였다면 정동을 통하여 그것을 끝내어야 하며, 그는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뒷날의 이해 관계는 역관(譯官)들에게 달렸습니다. 바라건대 ‘한씨(韓氏) 족친 중에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와 통사(通事)중에 정동(鄭同)과 교제가 있는 자에게 명하여 토산물을 많이 가지고 바로 북경(北京)에 가서, 정동을 인해서 한씨에게 말하고 한씨가 어소(御所)에 말하여 개주위(開州衛) 설치의 정지를 청하게 하소서.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수백리의 땅을 공지(空地)인 채로 버려둔 것은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 혼동(混同)될 수 없다는 것인데, 만일 간사한 무리들이 흔단(釁端)을 일으켜 달자(達子)나 왜인(倭人)을 가장하여 도적질한다면 실로 예측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이제 조공(朝貢)하는 사절(使節)이 옛길로 가다가 침범이 있게 되면 철저히 방비하고, 그대로 주청하면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만약에 윤허를 얻지 못하면 그 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씨가 청을 할 수 없다면 그 뒤는 어찌 하겠습니까? 지금의 사세(事勢)는 바야흐로 병이 크게 도진 것과 같습니다. 7년이나 된 병에 만약 3년 묵은 쑥을 구하지 못하면 이것이 당(堂)에 있으면서 화(禍)를 알지 못하고 섶을 쌓아 놓고 위해(危害)를 알지 못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의주(義州)는 압록강(鴨綠江)의 험함을 배경으로 한 나라의 문호(門戶)입니다만, 듣건대 그 성(城)이 대단히 허술해서 광대들은 몸을 눕히고도 올라갈 수 있고 찬비(餐婢)가 상을 이고도 내려올 만하다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창주(昌洲)ㆍ벽단(碧團)ㆍ대삭주(大朔州)ㆍ소삭주(小朔州) 등의 여러 성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지금 곧 수축(修築)을 한다면 반드시 부역을 피해 유이(流移)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고, 또 수축하지 않으면 방비가 허술해질 것이니, 이것이 바 로 국론(國論)을 결정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그러나 수축을 하지 않으면 의주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으며, 의주가 없어지면 하나의 도(道)가 없어지는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신은 절실히 생각하건대, 지금 8도의 인민으로서 놀고 먹고 조부(租賦)를 내지 않는 자는 승려(僧侶)만한 것이 없습니다. 승려들을 동원하여 수축함으로써 보국(報國)하게 하는 것이 옳으며, 특별한 근로(勤勞)도 없으면서 까닭없이 복호(復戶)된 자와 사복시(司僕寺) 제원(諸員) 등으로 수축하게 하여 보국하게 함도 좋을 것입니다. 또 번(番)을 서고 있는 정병(正兵)과 동원되고 있는 수군(水軍)에게 식량을 지급하여 압록강변 일대 행성(行城)을 쌓게 하고 또 따로 파절(把截)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도내(道內)의 공부(貢賦)도 인삼(人蔘)과 서피(鼠皮) 이외는 일체 면제 하고, 중국에 가는 사신[入朝使臣]도 정조(正朝)와 탄신(誕辰) 이외에는 정상대로 보내되, 쌍성(雙城)의 변(變)과 동녕(東寧) 사건은 마땅히 우려할 일이며, 따라서 감사(監司)ㆍ수령(守令)에게 직책이 없는 자가 따라가지 못하게 하고 가족을 데리고 가는 일도 또한 불가합니다. 삼도(三島)와 대내(大內) 등 왜인(倭人)도 마땅히 불러서 회유하여야 할 것이며, 모련위(毛隣衛)아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도 역시 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일은 신이 감히 입으로 말하지 못하며 글로도 쓰지 못하겠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신의 말이 들어맞지 않게 된다면 국가의 복입니다.’ 하였습니다. 신도 역시 반드시 후세의 근심꺼리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사세(事勢)를 논하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은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고 사신의 출발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구한 견마지성(犬馬之誠)을 다할 것을 밤낮으로 생각하다가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원전】 10 집 265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군사-관방(關防) / 정론-정론(政論)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호구-이동(移動)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교통-육운(陸運) / 재정-역(役)
[주-D001] 총령(葱嶺) :
파미르 고원.
[주-D002] 황진(黃溍) :
원(元)나라 학자.
[주-D003] 고황제(高皇帝) :
태조(太祖).
[주-D004] 성교(聲敎) :
덕화(德化).
[주-D005] 풍씨(馮氏) :
풍홍(馮紅).
[주-D006] 구장(枸醬) :
안남 지방에서 나는 구(枸)를 재료로 담금 장(醬).
[주-D007] 남중(南中) :
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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