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5. 21:18ㆍ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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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4년 정축(1877) 3월 19일(을해) 맑음
14-03-19[23] 북원에서 망배례를 친히 행할 때 행 도승지 민겸호 등이 입시하였다
전교하기를,
“전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입시시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전 제주 목사 이희충(李熙忠)이 앞으로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잘 있다가 올라왔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탈없이 잘 올라왔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농사는 어떠한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다른 도에 비해 조금 낫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이 몹시 황급하지는 않던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황급해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쌀 값이 뛰지는 않았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아주 높이 뛰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정(三政) 가운데 혹 대단히 폐해가 되는 것은 없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군정(軍政)은 호구마다 배정해서 고르게 받아들이고, 환정(還政)은 아전들과 민간이 모두 조금도 축난 것이 없으며, 결총(結摠)은 역(役)을 고르게 해 받아들였으므로 모두 폐단이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다른 폐단은 없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비록 대단한 폐단은 없었으나 거지들이 다른 해에 비해 아주 많으니, 이것이 걱정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거지들이 큰 폐단은 없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별로 폐단을 끼치는 일은 없습니다만, 그 숫자가 몹시 많으므로 백성들에게 신칙해서 보살펴 주게 하였으며, 각 마을 향도(鄕徒)들의 공사(公舍)에 들어가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염려가 있기에 또다시 움막을 지어 몸을 가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향도는 다른 곳에도 있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제주에만 있습니다. 향도라고 말하는 것은 방언(方言)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라올 때 연도의 농사 형편은 어떠하던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씨를 뿌린 곳이 반이 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보리 농사는 어떻던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흉년이 든 뒤이므로 파종한 곳이 전에 비해 배나 많았고, 지금 막 이삭이 패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민정(民情)이 조금 평안한 곳이 있던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하도(下道)의 열읍(列邑)은 백성들의 얼굴이 누렇게 떠서 잔뜩 찌푸리고 있는 사람이 많았으며, 경기 지방은 조금 나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비가 자주 내렸는데, 과연 부족한 곳은 없던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2월 25, 6일에 내린 비가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는 과연 흡족하였고, 충청도의 여러 고을에는 부족한 염려가 있는 듯하였는데, 일전에 내린 비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출발한 지 며칠 만에 육지에 도착하였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하루 밤낮 만에 소안도(小安島)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출발한 곳에서부터 소안도까지는 몇 리나 되며, 소안도에서 육지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화북진(禾北鎭)에서 소안도까지는 9백여 리이고, 소안도에서 이진(梨津)까지는 70리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배를 탄 지 며칠 만에 이진에 도착하였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소안도에서 하루 만에 이진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배를 탔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화북진 포구에서 배에 올라타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출발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느 곳에서 바람을 기다렸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화북진의 관사(官舍)가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며, 또 추자도(楸子島)를 경유해서 왔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추자도는 어느 편에 있으며, 바람을 만날 경우 며칠이면 이 섬에 도착할 수 있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소안도와 화북진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바람을 만날 경우 하루면 이 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추자도와 이진의 거리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추자도에서 북쪽으로 이진과의 거리는 5백여 리쯤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희충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의춘문에 이르렀다. 김병시가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은 반열에 참가한 무신들을 시취(試取)하는 일로 중일각(中日閣)으로 나가겠습니다. 유엽전(柳葉箭) 한 가지 기예로만 시취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민겸호가 표신(標信)을 내어 엄(嚴)을 해제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안으로 들어갔다. 신하들이 차례대로 물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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