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1. 22:25ㆍ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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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6년 계사(1593) 6월 29일(임자)
26-06-29[09] 경략 접반사 윤근수가 경략이 병부에 올린 게첩을 보고하다
[DCI]ITKC_JT_N0_A26_06A_29A_00090_2005_008_XML DCI복사 URL복사
경략 접반사 윤근수(尹根壽)가 치계하기를,
“이달 26일에 경략이 대청에 앉아서 신들에게 이르기를 ‘조령(鳥嶺) 등 세 곳에 관(關)을 설치하여 지키면 나는 오유충(吳惟忠)ㆍ낙상지(駱尙志)ㆍ심무(沈茂)의 군사를 주둔시킬 것이다. 내 처음 뜻은 본래 이와 같은 것이 아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처음의 뜻은 적을 향하여 진격하는 데 있었으나 중국 조정에서 철병하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진격을 주장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허굉강(許宏綱)이란 자가 주본을 올려 철병을 청하여 성지의 인준을 받았다고 하자, 경략이 병부에 게첩을 보내어 황제께 전주(轉奏)하도록 하였다 했으므로 그 게첩을 등서하여 올려 보냅니다.”
하였는데, 게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올린 게표(揭票)에 의하면 ‘왜(倭)가 경성을 버리고 도망해 갔다. 왜는 처음에 16만 병사를 파견하였고 다음에는 20여 만의 병사를 파견했으며 다시 30여 만의 병사를 증파(增派)하고 또 다음에는 40여 만의 병사를 증발(增發)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부산 해구에 이르러 전대(前隊)는 바다에 떠 있고, 후대는 험지를 장악하여 조선 강토에 주둔하고 있다. 관병(官兵)이 왕경을 떠나 적을 추격하여 1천여 리를 전진하자 왜적이 소굴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부 병사를 계속 주둔시켜 협조하여 조선을 지키고 대병은 철수하여 내지(內地)를 지키어 만전을 도모하기를 청한다.’고 했습니다. 근래의 군병 철수에 대한 논의를 보건대, 대략 이르기를 ‘왜노의 병마가 많은데 조선은 군량이 부족하고 도로는 멀며, 병마(兵馬)는 모두 병이 들었으니 대병을 모두 철수시켜 각 진영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런 사연이 당직에게 도착했습니다.
당직이 세밀히 관찰해 보니, 갑자기 철수할 수 없고 조금 시일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우선 왜노가 왕경을 떠난 이유를 말하고, 다음으로 부산에 주둔한 실정을 언급하며, 마지막으로 조선은 중국에 있어 필요한 위치에 있으니 요새지를 방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진술하겠습니다. 왜적이 평양과 개성에서 패전한 이후로 모두 왕성 안에 집결하여 성을 수축하였는데, 채(寨) 안에 또 채를 설치하고 책(柵) 안에 책을 설치하여, 그 방어하는 범주가 너무도 주밀하여 평양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매번 이여송 및 유황상 등과 공방술을 논의하였는데 중과 부적은 물론이고 우리는 피로한데 왜노는 안정되었으며, 천시(天時)와 지리(地理) 또한 우리에게 불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대병을 휴식시켰다가 다시 군의 위세를 널리 선포하고 마초와 군량을 운반하여 오래 주둔할 뜻을 보여주었으며, 반드시 왜노를 공격할 것이라는 뜻을 보여주었더니, 왕경으로부터 도피해 나오는 조선의 남녀가 날마다 천여 명에 이르렀고, 왜노도 두려워하여 왕경에서 도망할 뜻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뒤에 있는 것이 염려되고 또 관백(關白)에게 보고할 말이 없으므로 마침내는 공물과 봉작의 명목을 내세우고 애걸하여 떠났습니다. 내가 이렇게 장기취계(將機就計)로써 들어준 것은 사실 왕경을 힘으로 공격할 수가 없기에 지혜로써 취한 것으로, 왕경을 취하고 나니 한강 이남의 천여 리에 이르는 조선의 고토가 삽시간에 회복되었습니다. 생각건대, 이 왜노는 4월 19일부터 도망하여 동쪽으로 도망가되 곳곳마다 진영을 설치하고, 험지를 만들며 번을 나누어 교대(交代)하여 휴식하는 방법을 쓰면서 물러갔을 것입니다.
내가 이 때에 격서를 보내어 대병으로 하여금 뒤쫓아 진격하게 한 것은 우선 그들이 번복하여 다시 올 것을 저지하는 한편, 일시적으로 그들이 사방에서 살인과 약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왜노가 행군하면 우리도 행군하고, 왜노가 정지하면 우리도 정지하였습니다. 왜노는 아군이 방비가 되어 있는 줄로 알기 때문에 연로(沿路)에 소란을 피우지 못하고 곧바로 해상으로 물러갔으며,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가 모두 90여 명이었습니다. 제가 또 국왕에게 이문하여 속히 전라도 등의 수병과 거북선을 조발하여 바다를 포위하게 하니, 왜노는 쥐 죽은 듯이 지키기만 하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빠져 나갈 길을 열어 주게 한 것은, 대체로 우리가 은혜를 베푼다는 뜻에서 깊숙이 추격하지 않고 대의를 온전히 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조선 수병으로 하여금 앞길을 끊게 하고 우리는 대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진군하다가, 그들이 극도로 피곤할 때를 기다려 적절한 기회에 앞뒤에서 협격하여 일대 주살을 감행하였을 것입니다. 대체로 저쪽에서 싸움을 일으켰으니 우리도 또한 작은 약속에 구애되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이 한 것은 모두 제가 왜노로 하여금 조선은 중국에 의지하고 있고, 또 중국을 침범하면 반드시 주살당한다는 점을 알게 하여 후일에 외람되이 엿보려는 생각을 예방하면서 국가를 위한 장구지책을 꾀하려 한 것입니다. 지금 왜노는 전행 부대는 비록 물러갔다고 하나 후행 부대는 집결해 있으며, 또 들으니, 그들은 관백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대체로 부산은 비록 남해변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나 여전히 조선의 강역입니다. 지금 왜적을 초토하지 않는 것은 비유하자면 종기를 째서 고름을 뽑았으나 남은 독기는 여전하고, 또한 풀을 베어 제거하였으나 싹은 아직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적의 사절이 했다고 하는 말을 항복한 왜인을 통하여 살펴 보니, 관백은 실로 조선에 도읍을 정하고 내지를 엿볼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하며, 만일 조선을 얻으면 통공(通貢)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면서 평수가(平秀嘉)와 평행장(平行長) 등이 마음대로 왕경을 떠난 죄를 깊이 책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관백의 야심(野心)은 뚜렷이 밝혀졌는데, 어찌하여 신중히 생각하지도 않고 갑자기 철병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왜인이 군사를 늦추는 계책으로 우리를 꾀고 바쁘게 명을 따르는 계책으로 우리를 피곤하게 하며, 겸손한 말로 약속을 청하는 계책으로 우리를 어리석게 해 놓고 우리 군사가 철수(撤收)하여 내지로 깊숙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돌연히 다시 침범한다면 조선은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요, 우리 병졸도 다시 돌이키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왕경ㆍ개성ㆍ평양ㆍ함경ㆍ황해 등 여러 곳은 왜적이 수고로이 힘을 쓰지 않아도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되어, 조선을 다시 잃게 되고, 전공은 모두 헛고생이 될 것이니, 우리들은 장차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금년 봄에 왕경에서 이여송이 일협 장령(一協將領) 양원(楊元) 등과 함께 각각 사세를 상세히 갖추어 저에게 게보(揭報)하였는데, 모두가 일컫기를, 왜노는 수가 많고 아병은 쇠약하니 군사를 철수하여 귀국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소청하는 것은 저만 홀로 불가하다고 하여 강력히 제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군량이 결핍됐다는 말도 있으나, 병사를 나누어 식량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먹게 하면 식량은 자족할 수 있을 것이요, 또 병사들이 질병에 고생하고 있다고 하나, 의원과 약품을 지급하면 질병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며, 만일 음식을 두루 지급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소와 술로써 호군하되 시판(市販)을 이용하면 용도가 넉넉할 것이니, 진실로 저의 계책에 따르면 군졸의 마음도 안정될 것입니다. 지금의 부산은 전일의 왕경과 같은 입장입니다. 왜노가 왕경에 웅거했을 때엔 오랜 세월을 두고 곤궁을 참으면서 그들을 물러가게 했는데, 지금 부산에 있는 왜적은 다소 오랜 시일을 끌더라도 끈기 있게 지켜 그들이 물러갈 것을 기다리지 못하겠습니까?
조선은 국토의 넓이가 동서로 2천 리이고 남북으로 4천 리입니다. 대체로 정북쪽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일어나서 남쪽으로 전라도 경계에 이르러 서남쪽을 향하여 멈춰 있습니다. 일본의 대마도 등 여러 섬들은 조선의 동남쪽 모퉁이에 편재(偏在)되어 부산진과 더불어 바로 대치하고 있어서 왜선은 다만 부산진에만 올 수 있고 전라도를 지나 서해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이는 대개 전라도의 지형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다가 서쪽을 둘러 중국의 상진(常鎭) 【남직례(南直隷) 상주(常州)와 진강부(鎭江府)이다.】 과 더불어 동서로 대치하기 때문인데, 동ㆍ보(東保) 【이는 산동(山東)과 보정(保定)이 아닌가 한다.】 ㆍ계(薊)ㆍ요(遼)가 일본과 더불어 격절되어 바닷길을 통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이 조선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이 동ㆍ보ㆍ계ㆍ요를 침범하려면 반드시 전라도 지방의 바닷길을 돌아야만 천진(天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북쪽의 해면은 해양이 넓고 파도가 거세니 어찌 모두 그들의 뜻과 같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일본은 조선을 경유하지 않으면 동ㆍ보ㆍ계ㆍ요 지방을 쉽사리 침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간이 한두 도적떼가 몰래 나타나는 것은 곧 왜선이 절(浙)ㆍ직(直)과 【절강(浙江) 및 남직례 지방을 가리킨다.】 민(閩)ㆍ광(廣) 지방으로 떠났다가 동남풍에 의하여 표류된 것이니, 항상 있는 왜선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하늘이 신경(神京)을 호위하기 위하여 이 조선국을 동남에서 서북 사이로 뻗게 하여 한 흉악한 일본 오랑캐로 하여금 연(燕)ㆍ계(薊) 제로(諸路)에 뜻을 펴지 못하게 한 것으로, 실로 천험(天險)으로써 한계(限界)를 삼은 것인데, 관백은 간웅(奸雄)으로서 이런 연유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조선은 계ㆍ보ㆍ산동 등과 더불어 서남방으로 다만 바다를 격해 있을 뿐인데 조선의 지형은 부산으로부터 의주에 이르게 되면 육로는 단지 요좌(遼左) 한 길이 있어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고 수로(水路)는 천진이나 산동 등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일곱 갈래가 있으니, 만일 순풍만 만난다면 가까운 곳은 하루나 이틀, 먼 곳은 사흘에서 닷새면 도달할 수 있고 그다지 어려운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왜노가 한번 조선을 차지하여 급히 소굴을 만들고 군사를 나누어 중국을 침범하기는 참으로 용이한 일입니다. 우리가 육로에서 방어하면 수로를 지탱하기 어렵고, 수로에서 방어하면 육로를 지키기 어려워 국경 세 곳이 동요되면 경사(京師)가 흔들릴 것이니, 그 환난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백이 조선 침략을 도모하려 하는 것은 사실 중국 침략을 도모하려는 것이고, 우리 군사가 조선을 구제하는 것도 실은 중국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다른 이웃의 싸움을 구제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로써 조선은 왜노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뺏어야 할 땅이고 중국에 있어서는 결코 버리지 못할 외번(外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또 염려하는 것은 여러 장수들이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나의 뜻을 본받지 못하여 어지러이 군사를 조달하느라 동서로 분주하여 안정되지 않는 것이니, 다시 패문(牌文)을 발송하여 장관을 효유하여 단지 유정(劉綎)ㆍ오유충(吳惟忠)ㆍ낙상지(駱尙志) 등만 각기 통솔하고 있는 병마를 거느리고 상주ㆍ조령 등 각 요해지에 주둔하게 하고 나머지 대병은 제독을 따라 철수하여 나누어 주둔하며 휴식하면서 방어하다가 부산에 있는 왜노가 바다를 건너 귀국하기를 기다려 제청(題請)한 다음 철수하게 하소서.
제가 또 헤아려 보건대, 부산의 많은 왜노가 만일 다른 뜻이 없다면 한 달 안에 정녕 바다를 건너 돌아갈 것입니다. 왜노가 우리를 보는 것이 우리가 왜노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저들은 전라ㆍ경상 간을 삼킬 마음을 두었다가 욕심을 펴지 못하였고 앉아서 우리 군사가 돌아가기를 기다렸으나 뜻과 같이 되지 않아 간교한 술책을 부리기 어려우니 돌아가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려 대병은 내지로 철수시키고 한 부대를 주둔시켜 조선을 방어하는 것이 상책이 될 것 같습니다. 혹자는 ‘왜노가 거짓으로 가는 체하였다가 다시 돌아오면 어찌하나?’ 하는 이도 있는데, 당직이 헤아려 보니, 부산항은 왜노와 접촉한 지 여러 해가 되어 조선인과 더불어 서로 통상하며 오가는 길을 익숙히 알아 지난 해에는 조선의 방비가 없음을 틈타서 급속히 침탈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왜노가 돌아간 뒤에 즉시 이곳에다 본국의 수륙 군병을 배치하고, 군위와 무기를 증설하며 험지를 장악하여 나라를 굳게 지키고 우리 주둔한 군병이 또한 잘 접응(接應)하여야 합니다. 조선이 이미 견고해지면 동ㆍ보ㆍ계ㆍ요는 다시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따라서 경사(京師)는 화산(華山)과 같이 안정될 것입니다. 오늘날 필요한 급선무는, 단지 군사를 징발시켜 조선을 지키는 데 협조하는 것이 제일 상책입니다. 만일 의논만 분분하다가 군사를 사진(四鎭)의 해구(海口)와 여순(旅順)의 여러 섬에 나누어 배치한다면, 지방은 멀고 발해는 아득히 넓어서 비록 수십만의 군사라도 부족할까 염려됩니다. 만일 조선이 우리 나라의 요새지가 됨을 고려하여 군사를 징발하여서 함께 지키면 만 명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니, 군사는 우리가 내고 식량은 조선에서 충당하면 번잡함을 제거하고 간편(簡便)함을 취하게 되어 일은 옛날 사람의 반이지만 효과는 배나 될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당직이 또 생각해 보니, 객병(客兵)을 징발하여 외국에서 오래 수자리하여 추위와 더위를 겪으며 갖은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다시 장사들이 유언(流言)에 두려워하여 지기(志氣)가 저상되었으니, 저도 또한 조속히 철병하여 군정(群情)을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관계가 너무 중대하여 실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므로 이제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니, 병부에 칙하(勅下)하여 제가 말한 바를 다시 상의하게 하소서. 오늘날의 일은 유병(留兵)하느냐 아니면 철병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만약 구병(舊兵)이 오래도록 머무르기가 어렵다면 급히 진린(陳璘)과 심무(沈茂)의 관병을 재촉하여 빨리 와서 협조하게 하소서.”
【원전】 22 집 22 면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
[주-D001] 내지(內地) :
중국을 말함.
[주-D002] 장기취계(將機就計) :
기획을 타서 계책을 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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