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1. 23:57ㆍ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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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이때에 이르러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모였다. 이때에 지방의 장수들이 매양 의병의 활동을 저지하려 들고 적은 더욱 성하게 몰려들자 김천일은 보좌관들과 상의하여 강화(江華)로 들어갔다. 마침 전라 병사 최원(崔遠)도 본도의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중로(中路)에 이르렀는데, 군의 정세가 갑자기 크게 변하여 하루에 50명을 참수(斬首)하여 필사의 뜻을 보여도 오히려 중지시키지를 못하니 김천일(金千鎰)과 합군(合軍)하여 강화도에 들어가서 사졸로 하여금 건너가지 못하게 하고 해를 넘겨 애써 지키니,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으나 그 뜻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신하로서 절개를 잃지 않은 사람은 오직 최원(崔遠)뿐이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金千鎰)이 먼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창의사(倡義使)라는 호를 내려 가상히 여겼다. 도망을 갔던 관리들도 김천일이 왔다는 말을 듣고 점점 모여들었으며, 경기의 백성들은 있는 곳마다 단결하여 모두 의병이라 칭하고 호응하였다. 김천일은 이에 군과 약속하고 강변에 목책을 만들어 세우고 전수(戰守)의 차비를 하였다. 이때에 왜적은 경성을 점거한 지 이미 오래이므로, 백성들이 피란을 했다가 서울에 많이 돌아와서 적과 섞여 살고 있었다. 김천일은 이에 결사대를 모집하여 성중에 잠입하여 순역(順逆)과 이해를 들어 효유하니, 사람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여 김천일에게 경비(經費)를 보내는 자가 수만이었고, 혹은 몰래 적을 죽여서 그 목을 바치기도 하며 자진하여 돌아오는 자가 또한 하루도 수백 명이나 되었고, 임시 막사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김천일이 때때로 출병하여 공격하니 강의 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병이 잇달아 도망하였다. 김천일은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전선 4백 척으로 강을 거슬러 직상하여 양화도(楊花渡) 나루에서 북을 치면서 군사의 위세를 보이며 수길(秀吉)의 죄상을 들어 강위에 방을 써서 걸고 성안의 도적에게 도전하였으나, 적은 끝내 발동하지 않았다
………..
○ 이순신(李舜臣)도 가리포(加里浦)에서 전라도 좌수영(左水營)에 달려가서 군사를 훈련하고 병선을 정돈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적병이 이미 육지에 내려 여러 군(郡)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별다른 계책이 나지 않으므로 노량(露梁) 어귀에 배를 배열하여 적의 오는 길목을 막고 성을 수축하여 지키고자 하다가 또 본도를 굳게 지켜 한산(閑山) 어귀를 엿보지 못하게 하려고도 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글을 띄워 일어나고, 또 자신이 달려와서 바다로 내려갈 계획을 힘껏 찬동하였다.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이순신의 군관(軍官) 송희립(宋希立)이 발분하여 죽음을 걸고 힘을 다할 것을 자원하며 강개한 언사로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영남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니 그 기세가 반드시 수륙으로 닥쳐올 것인데, 공은 어찌 이다지 신중하기만 하십니까? 공이 출전하시면 정운(鄭運) 등이 선봉으로 나가겠습니다.”
하였다. 이순신은 정운(鄭運) 등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5월 초 4일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려면서도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적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서 감히 출격하지 못하고, 전선 백여 척 및 화포(火砲)와 군기를 바다 속에 다 던지고 수하의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ㆍ이운룡(李雲龍) 등을 거느리고 네 척의 배에 타고 곤양(昆陽) 해구(海口)로 가서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고자 하니, 수군 만여 명이 모두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었다. 이영남(李英男)이 간언하기를,
“공이 왕명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나갔다가 후일 조정에서 죄를 내릴 때 어떻게 해명하겠습니까? 전라도에 청병하여 적과 한번 싸워 이기지 못한 뒤에 도망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원균이 옳게 여기고 이영남(李英男)을 시켜 이순신에게 가서 청병을 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각기 분계가 있는데 만약 조정의 명령이 없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월경(越境)할 수 있겠는가.”
하고 사절하였다. 원균이 다시 이영남을 보내어 청하기를 무릇 오륙 차나 왕래를 하였다. 이영남이 다녀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그뒤 이순신은 배 4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閑山島)에 나와서 원균의 군사와 함께 옥포(玉浦)에 이르니 앞바다에 적의 전함 30여 척이 있는데 사면을 장막으로 두르고 백기와 홍기를 세우고 바다 가운데 정박하고 있고, 유격병을 분산시켜 해안에 올라가서 가옥을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산에 가득하였다. 왜적이 우리 군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고 일시에 배에 올라 급히 노를 저어 나와 해양 중에서 이순신의 군사와 교전하게 되었다. 이순신 등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적선에 육박하여 화통(火筒)과 화전(火箭)을 바람을 따라 일시에 쏘아대니 적선 36척이 불타고 바다 물결이 모두 붉었다. 왜적은 패하여 물러갔으나 정운(鄭運)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아군은 징을 쳐서 철수하고, 다음날 다시 싸우기로 약속하였다. 때마침 서쪽에서 온 사람이 왕이 서행(西幸)하였다고 전하므로 이에 각 군은 본진으로 돌아왔다. 승첩한 소식이 행재소에 알려지니 백관이 옷깃을 여미고 서로 축하하며 이순신을 가선대부로 올려 포장하였다. 하루는 이순신의 꿈에 백발의 늙은이가 이순신을 깨워 일으키면서 ‘적이 왔다.’ 하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벌떡 일어나 급히 전함 23척을 거느리고 노량(露梁)에서 원균과 만났는데, 적이 과연 이순신의 배를 엄습해 오므로 이순신이 북을 울려 교전하여 적선 한 척을 불태우고 사천(泗川) 바다 가운데로 쫓아가니 멀리 해상에 산이 하나 보이고 백 명의 왜적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그 밑에 11척의 연안을 따라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에 아침 조수는 이미 밀려가고 항구의 물은 얕아서 배가 전진할 수 없으므로 이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물이 얕고 바다가 좁아서 배를 돌리기 어려우니 거짓 물러나는 척하고 적을 유인하여 바다의 넓은 곳에 이르렀을 때 큰 배로 돌아서서 치면 승전할 수 있다.”
하니, 원균은 분이 나서 바로 쫓아가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을 모릅니다. 그렇게 하여서는 반드시 패합니다.”
하고, 곧 소라를 불고 기를 휘둘러 후퇴하였다. 1리를 못 가서 적이 배를 타고 쫓아왔다. 이윽고 좁고 험한 길목에 다다르자 이순신이 북은 한번 크게 쳐 여러 배가 일제히 돌아서서 바다 가운데에서 늘어서니, 바로 적선과 수십 보의 거리에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순신이 본영에 있을 적에 늘 왜구를 근심하고 새로운 법으로 따로 배를 만들었으니 위에 판으로 덮어 마치 형상이 엎드린 거북과 같고, 노를 젖는 자는 그 안에 있는데 여장(女墻 성위의 얕은 담)이 가로막힌 것 같으며, 좌우 전후로는 화포(火炮)를 많이 싣고 종횡으로 출입하여 베짜는 북과도 같고 물오리 같기도 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돌진시켜 먼저 적진을 시험하고 적선 12척을 불사르니 남은 왜적이 멀리 바라보며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한참 싸우고 있는데 적의 탄환이 이순신의 어깨에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이순신은 여전히 활과 화살을 쥐고 독전하였는데 전쟁이 끝나고서야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철환(鐵丸)을 파내니, 온 군사들이 비로소 알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포(唐浦)까지 추격하였는데 또 적선 20척이 강 언덕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큰 배가 한 척 있는데 위에는 층루를 설치하고 밖으로는 붉은 비단 장막이 드리워졌는데, 적의 괴수 한 사람이 금관을 쓰고 금의(錦衣)를 입고서 모든 적병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제장으로 하여금 노를 저어 바로 돌격하게 하고, 순천 부사 권준(權俊)은 아래서 위를 쳐다보며 화살을 쏘아 그 괴수를 명중시키니, 왜적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온 군사가 환성을 올리고 해가 저물자, 사량(蛇梁) 앞바다로 회진(回陣)하였다. 군중에서는 갑자기 밤에 놀라 소란을 피웠으나 이순신은 꼼짝 않고 누웠다가 한참 뒤에 방울을 흔들게 하니, 군중이 안정되었다. 얼마 아니되어 다시 당항(唐項) 앞바다로 나갔는데 전라 우병사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왔다. 제장들이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간 것을 염려하던 차에 이억기의 군사가 오니, 모두 기운이 더욱 났다. 이튿날 모든 군사가 바깥 바다로 나가니 적은 당항 앞 포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이 먼저 순찰하는 배를 보내어 형세를 탐지하게 하였더니 초선이 겨우 바다 어귀에 나가자마자 곧 신호포를 쏘아 적이 있음을 알리므로 여러 군사가 일시에 노를 급히 저어 고기 꿰미처럼 잇달아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항구에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3층으로 판각(板閣)을 짓고 밖에 검은 비단 장막을 드리웠으며, 앞에는 푸른 일산이 세워졌는데 멀리 장막 안을 보면 은은히 시립(侍立)하고 있는 모양이 보여 그가 두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몇 번 결전도 하지도 않고 이순신이 거짓 패한 체하고 물러나니, 층각 있는 큰 배가 아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돛을 올리고 바로 따라왔다. 모든 군사가 양쪽에서 공격하여 날랜 기운으로 적을 무너뜨리니, 적의 괴수가 화살에 맞아 죽고 왜선 백여 척을 불태우고, 적병 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기별이 행재소에 알려지니, 이순신은 자헌대부로, 이억기(李億祺)는 가선대부로 올렸다.
…..
○ 처음에 박진(朴晋)이 밀양(密陽)에서 돌아와 산골에 들어가 충의군(忠義軍)을 비밀리 규합하여 동서로 출몰하여 가는 곳마다 적을 쳐서 무찌르고 시종 한결같은 절개로 절대로 굽히지 않아, 여러번 위태로운 일이 있었지만 피하지 아니했다. 조정에서는 전 병사(兵使) 이각(李珏)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하여 바로 잡아 죽이고 박진(朴晋)을 대신 병사로 삼았다. 그때에 적병은 사방에 가득하여 행조(行朝)의 소식이 남방에 통하지 않는 지 이미 오래되니, 인심이 동요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박진이 병사(兵使)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흩어졌던 백성이 차차 모여들고, 수령은 이따금 산곡(山谷) 사이에서 나타나 일을 맡으니, 비로소 조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효순(韓孝純)ㆍ이수일(李守一) 등이 선비와 백성을 규합하여 적의 길을 끊은 것도 역시 박진에게 의뢰하였다. 박진은 한편으로 군사를 수습하고 한편으로 급히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이 이로 인해서 적의 정세를 탐지할 수가 있었다. 주상께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박진의 행동을 보면 곧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 같으니 박진이 만약 죽는다면 나라 일이 잘못될 것이다. 그래서 박진같은 사람이 어찌 허무하게 죽을 이치가 있겠는가마는 의당 형세를 관찰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하여,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말하던 중에 넘쳤다. 또 활과 화살을 내리니 박진은 특별한 은혜에 감격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서 마침내 도내의 장사들을 수습하여 점차 진형을 갖추었다. 한 도의 끊어졌던 기맥을 다시 소생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적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은 박진의 공이었다. 박진은 전 봉사 권응수(權應銖)ㆍ정대임(鄭大任) 등을 시켜 향병(鄕兵)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천(永川)에서 적을 포위하였는데, 군사들이 적을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두 사람 모두 담력과 용기가 있어 당장 몇 사람을 베고 몸을 빼어 나가 사졸들의 앞장을 서니 사졸들이 다투어 성을 넘어 들어가 크게 싸웠다. 적은 이기지 못하고 창고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명원루(明遠樓)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아군은 불을 놓아 공격하니 타죽은 자가 매우 많아 냄새가 멀리 밖까지 풍겼으며, 살아남은 왜적은 경주(慶州)로 도망쳤다. 이뒤로부터 신녕(新寧)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안동(安東) 등지의 왜적은 모두 한 지역에 모였으니, 좌도(左道)의 군읍들이 보전하게 된 것은 영천(永川) 싸움의 공이었다. 이에 박진은 좌도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慶州) 성 아래에 육박하였다. 적이 몰래 북문(北門)으로 나와 대비하기도 전에 엄습하니, 박진의 군사는 놀라고 소란해져서 안강(安康)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 다시 결사대 1천여 명을 모집하여 성 밑에 잠복하고 있다가 여러 발의 진천뢰(震天雷)를 성안에 쏘아 여기저기 여러 곳에 떨어뜨렸다. 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다투어 모여들어 서로 밀치면서 구경하다가 갑자기 포가 자연 그 안에서 폭발되니,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철편(鐵片)이 별처럼 부서지면서 맞아 쓰러지는 대로 즉사하였다. 여기저기에서 모두 폭발되니 한 포에 맞아 죽은 자가 거의 3천여 명이나 되었고, 맞지 않은 자라도 한참이나 쓰러졌다가 일어나니 적들은 놀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원인을 알지 못하고 모두 신명(神明)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드디어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은 드디어 경주에 입성하여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었다. 사실이 알려지자 박진을 가선대부, 권응수(權應銖)는 통정대부로, 정대임(鄭大任)은 예천 군수로 올려 포상하였다.
진천뢰(震天雷)는 예전에 없던 무기인데, 군기시의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새로 창안해 낸 것이다. 마름쇠와 철편(鐵片) 등을 인화(引火) 장치와 함께 하나의 원구(圓球)로 만들어 대완구(大碗口)에 실어서 불을 던져 발사하면 5백~6백 보를 날아서 땅에 떨어진 지 한참만에 불이 그 속에서 일어나 폭발한다. 왜적이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그 제작이 어떠한지 모르니 가탄할 일이다.
….
황응양이 떠난 다음 왕이 평양으로 돌아와서 제독을 접견하고 사례하며 위로하고 효유하였으며, 또 제독에게 나아가서 서울을 회복할 것을 청하니 제독이 허락하였다. 대개 서울은 우리 나라의 도회지로, 왼쪽에는 강원도, 오른쪽에는 황해도, 동쪽은 경상도, 남쪽은 전라도가 있으며 함경도와 충청도가 서로 호응하는 형세로 되어 있어 천연의 요지를 차지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가 잇달아 이겨서 또한 적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니 사람들이 매우 근심하였다. 제독이 먼저 사대수(査大受)를 보내어 앞길을 정찰하고 제독도 자신이 이어 떠나서 25일에 개성부에 들어왔다.
이보다 앞서 적의 추장은 평양에서 패한 것을 분개하고 또 혹시라도 서울 안의 사람들로서 내응이 있는가 의심하여 있는 대로 찾아내어 종루(鍾樓)에서 한강에 이르는 사이에 수만 여명을 늘어앉힌 다음 긴 칼을 빼어들고 남녀를 논할 것 없이 차례로 나가며 베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목을 늘여 칼을 받고 감히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없었다. 한 사람이 함께 앉은 자에게 말하기를,
“아무래도 죽을 것인데 도망해 달아나면 살아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니, 곁에 앉은 자들이 모두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오활한 생각을 하지 말라. 반드시 큰일 날 것이다.”
하였다. 그 중 혹 듣지 않고 일어나서 달아나 살게 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낙지(樂地)에 나가기나 하는 듯하니, 인심이 정상이 아닌 것이 이러하였다. 적은 또 여염집을 거의 다 불태웠으며 여러 곳에 유둔하였던 적이 모두 서울로 모여들어 명 나라 군사에 항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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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집 제2권 / 서(書)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줌〔與明儒胡煥〕
이를테면 원나라 태조와 금나라 군주와 같은 무리들은 비록 이적(夷狄)으로 중국(中國)에 들어와 나라를 차지하였지만, 군주(君主)의 도량이 있었고 자애로운 마음을 쓰고 예교(禮敎)로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일시에 나라를 안정시켜 인심을 얻을 수 있었으며, 백성들을 어루만져 안정시켜서 마치 본래부터 그 나라를 소유했던 것과 같았습니다.
왜노(倭奴)는 그렇지 않아서 침략하여 들어온 지 한 달만에 온 나라에 두루 가득 차서 오직 살생과 노략질을 일삼으며 보호하고 안정시킴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처음 서울에 들어와서 우리 백성들을 불러 모아 출입을 마음대로 하고는 제 무리를 인가에 분산시켜 밤낮으로 침탈하고 포악한 짓을 하니 사람들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이르는 곳의 첫 번째 명령이 양반을 죽이는 것인데, 양반은 곧 사족입니다. 예로부터 남의 나라를 도모하는 자는 처음 왔을 때는 전쟁에 이겨 땅을 차지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이미 땅을 차지하고 나서는 부로(父老)들을 초유(招諭)하고 영웅들을 연람(延攬)하여 오랫동안 산 사람들을 통하여 평정하고 안집(安集)시켰습니다. 어찌 영웅을 죽이고서 그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나라의 풍속이 귀천에 따라 직업을 달리하여 사족(士族)이 아니면 학식이 전혀 없으니, 일시(一時)의 영수(領袖)를 사족을 버려두고서는 달리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다 죽인다면 누구와 함께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왜노는 도적이고, 늑대여서 그들의 세력은 비록 두려울 만하지만 그 이치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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