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장군전 중국에 갔을 때에 명 나라 황제가 붉은 비단을 하사하였는데,

2023. 7. 6. 22:16대륙조선 일반

 

곽월

1570년(선조 3)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1573년(선조 6)에 지평, 장령, 사간에 제수되었고, 1576년에는 의주목사, 그뒤 호조참의를 거쳐 1578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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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장군 생년1552년

 

기언 별집 16 / 구묘문(丘墓文)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 신도비명(神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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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재우(再祐)이고, 자는 계유(季綏)이다. 성은 곽씨(郭氏)이며, 관향은 현풍(玄風)이다. 성균관 사성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요,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모친은 진양 강씨(晉陽姜氏)인데, 가정(嘉靖) 31년(1552, 명종7) 8월 21일에 공이 출생하였다. 공은 기량과 식견이 남보다 뛰어나고 독서를 즐겼다. 27세에 부친을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왔는데, 관상 보는 사람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

하였다. 34세에 정시(庭試) 문과 을과(文科乙科)에 발탁되었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전부 파방(罷榜)되었다. 다음해 부친이 돌아가자, 상사(喪事)를 마친 뒤에는 과거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강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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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본 아정유고 3 / () - ()

홍의장군전(紅衣將軍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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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郭再祐)의 자는 계수(季綏)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황해 감사(黃海監司) 월(越)의 아들이다. 월이 일찍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었는데 재우가 곁에서 3년 동안을 모시고 있으면서 한 번도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때 나이가 20여 세로, 사람들은 모두 그의 확고한 지조에 탄복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니,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특이하게 여기며 ‘천하에 이름이 가득할 것이다.’ 하였다. 《춘추(春秋)》를 통달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여러 가지 사무에 관하여 두루 알고 병가(兵家)의 서적을 널리 읽었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집상(執喪 부모상에 예절을 다하는 것)에 슬픔을 다하였다. 이때 애첩(愛妾)이 병이 심하여 곧 죽게 되었는데 울면서 한 번 만나 보기를 청하니 재우는 사람을 시켜 영결(永訣)하기를,

“죽은 후의 부고는 받을 수 있지만 만나볼 수는 없다.”

하였다. 아버지의 복(服)을 마치자 과거 공부를 버리고 의령(宜寧)의 기강(岐江)에 정자를 짓고는 농사꾼 차림으로 한가히 노닐면서 고기잡이와 낚시질로 스스로 즐거워하여 장차 그대로 살다가 늙을 듯이 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20년(1592) 여름 4월에 왜놈들이 대거 침략해 오니 여러 고을들이 모두 지키지 못하고 패하였다. 재우는 이에 슬퍼하여 집의 사당(祠堂)에 고하고 가산(家産)을 털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중국에 갔을 때에 명 나라 황제가 붉은 비단을 하사하였는데, 이 비단을 재단하여 전포(戰袍)를 만들어 입고 흰 말을 타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하늘에서 내려 온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이라고 호하였다. 왜장 안국사(安國司)가 전라도(全羅道)로 향한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정진(鼎津)에 이르렀으나 진창 때문에 행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먼저 포로들을 시켜 높고 건조한 곳에 기를 세우게 하고 다음날 아침에 건너려 하였다. 재우는 이것을 염탐하여 알고는 한밤중에 왜놈들의 기를 뽑아다가 바꾸어 진창 속에 꽂아 놓은 다음에 복병(伏兵)하고 기다렸더니, 과연 적이 진창 속에 빠졌다. 이때 복병이 나와서 거의 전멸시켰다. 이윽고 적이 크게 쳐들어오니 재우는 우리 편 군사가 적어 맞설 수 없음을 헤아리고는 힘이 세고 키가 큰 사람 10여 명을 뽑아서 모두 흰 말을 타고 붉은 전포를 입히고는 기에다 ‘천강홍의장군’이라고 쓴 다음 나누어 산골짜기 깊은 곳에 지키고 있게 하고는 재우가 먼저 적진(敵陣)을 습격하여 유인하니, 적은 온 무리를 총동원하여 추격하는데 납으로 만든 총알이 비오듯 쏟아졌지만 끝내 맞히지 못하였다. 재우가 수목(樹木) 사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니 적이 바야흐로 놀라고 의심하던 차에 다시 보니 붉은 전포를 입고 흰 말을 탄 사람이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서 나와 빙 둘러서서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적은 더욱 놀라고 의심하여 천신(天神)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니 재우가 드디어 숲 속에서 나와 어지럽게 활을 쏘아 곧 전멸시켰다.

이때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가 왕을 호가하려고 용인(龍仁)에 당도하였다가 패하여 산음(山陰)으로 돌아오니 민심이 울분하였다. 재우는 격문(檄文)을 전하여 김수의 8가지 죄를 말하고 장차 군사를 이동하여 공격하려 하니, 김수가 크게 노하여 반역죄(叛逆罪)로서 행조(行朝 임금이 순행 중에 임시 머무는 곳, 즉 행재소(行在所))에 논계(論啓)하였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처음 거창(居昌)에 도착하여 재우의 격문을 보고는 한동안 놀라다가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에게 묻기를,

“순찰사는 조정에서 명한 관리인데 재우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렇게까지 욕한단 말인가?”

하였다. 사제는,

“재우는 나의 벗입니다. 사람이 충성스럽고 효도하며, 《사기(史記)》를 읽다가 세상이 어지럽고 시기가 위태로운 때에 의사(義士)가 절의를 지킨 것을 보면 반드시 목메어 눈물을 흘리며 언제나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나라에 만일 환난(患難)이 있게 되면 나는 마땅히 목숨을 바쳐 보답하겠다.’ 하였습니다. 오늘의 사건은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순찰사가 경내(境內)를 탈출한 지 오래며 지금 갑자기 군사를 패하고 돌아오므로 대중의 마음이 화합치 못하니, 어쩔 수가 없어서 부득이 이런 일을 했을 것이요, 결코 딴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성일은 낯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

“조정의 조처에 대해서는 꼭 알 수 없으나 나는 시험삼아 재우를 위하여 조정(調整)해 보겠다.”

하고는, 김수와 재우에게 편지를 보내어 두 편을 말리고 급히 계(啓)를 올려 재우를 구원하면서 그가 장수의 재질이 있음을 극구 칭찬하였으며, 재우도 상소하여 스스로 사실을 밝히니 상이 가상히 여겨 유곡찰방 겸형조정랑(幽谷察訪兼刑曹正郞)을 제수하였다.

창원(昌原)에 있는 왜적이 진해(鎭海)에 있는 왜적들과 고성(固城)ㆍ사천(泗川)에 진영(陣營)을 연하고는 진주성(晉州城)을 대거 침략하는데, 군대의 기세가 대단하였다. 왜적들이 촉석루(矗石樓) 아래에 주둔하고 있으니 성일이 모든 장수들을 지휘하여 갑자기 쳐들어가 적을 무수히 살상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수만 명의 왜적이 다시 진주를 10겹으로 포위하고는 7주야 동안을 공격하니 재우가 선봉장(先鋒將) 심대승(沈大承)에게 밤을 틈타 진주의 북쪽에 있는 산에 올라가 횃불을 죽 늘어 놓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큰 소리로 ‘홍의장군이 호남(湖南)의 의병들과 함께 내일 왜적을 무찌를 것이다.’ 하게 하였는데, 그 다음날 호남의 의병장(義兵將) 최경회(崔慶會)가 살천(薩川)에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오니 적들은 이것을 바라보고는 놀라 주둔하고 있던 막사를 불사르고 도망쳤다. 상은 재우가 공을 자처하지 않음을 가상히 여겨 절충장군 조방장(折衝將軍助防將)을 제수하였다.

21년 왜의 관백(關白) 평수길(平秀吉)이 진주의 지도를 보고 임진년(1592, 선조 25)에 두 번이나 패한 것을 분히 여겨 대장 행장(行長)ㆍ청정(淸正)에게 편지를 보내어 꾸짖기를,

“진주를 무찌르지 못하면 바다를 건너오지 말라.”

하니, 이에 왜적들은 다시 진주를 포위하였다.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것을 믿고 기강(岐江)을 건너 맞아 공격하려 하니, 재우가

“적세(敵勢)가 한창 강하고 우리의 군사는 훈련이 되지 못했으니 가벼이 진격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과 종사(從事) 성호선(成好善)은 여러 장수들이 지체하는 것을 꾸짖고 권율과 함께 강을 건너 함안(咸安)으로 진격하다가 적의 대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을 듣고는 되돌아와 정진(鼎津)을 건넜다.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은 권율ㆍ이빈과 함께 전라도로 향하였으며, 흠차 총병(欽差總兵) 유정(劉綎)은 팔거(八莒)에 주둔하고, 흠차 유격(欽差游擊) 오유충(吳惟忠)은 봉계(鳳溪)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바라보기만 하고 구원해 주지 않았다. 적이 진주성을 1백 겹으로 포위하여 8일 만에 함락하니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ㆍ병사 최경회(崔慶會)ㆍ충청 병사 황진(黃進)ㆍ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가 모두 죽었으며, 군사와 민간인으로 죽은 자가 6만 명이었다. 재우가 두 번이나 진주를 구원했었는데 이때에는 가지 않았으니 적을 잘 헤아림이 이와 같았다.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제수하니,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재우로 하여금 삼가(三嘉)에다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쌓고 현풍(玄風)에다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쌓도록 하였다. 이때 흠차 총병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에 군사를 주둔하고 있었다. 원익은 양원에게 군사를 옮겨 영남(嶺南)에 주둔해 줄 것을 청하려 하니, 재우가 원익에게,

“산성을 보수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때를 기다렸다가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계책입니다. 만일 양 총병(楊總兵 양원을 가리킨다)이 영남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는 것은 마치 범이 산의 숲에서 나오고 용이 깊은 못에서 떠나는 것과 같으니 여우와 삵이나 수달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익이 사례하면서,

“이같이 훌륭한 장군이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재우는 얼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는 의병을 거느리고 의령(宜寧)의 가력(嘉力)에 주둔하여 이광악(李光岳)을 부장(副將)으로 삼고 김덕령(金德齡)ㆍ홍계남(洪季男)을 좌우협(左右協)으로 삼아 곧바로 동래(東萊)에 도착하여 연해(沿海)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였다. 덕령과 계남은 뛰어나게 날래고 민첩하여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고 용맹을 자랑하면서 진격하니 적은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재우는 주사(舟師 수군(水軍)을 말한다)를 재촉하여 적진 가까이까지 다가가서 광악과 함께 마주앉아 술을 마시는데 사발만한 적의 대포알이 두 사람이 있는 뱃전을 지나 물속에 떨어져 한참 동안이나 소리가 울리고 물이 끓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소(談笑)하니 적이 더욱 두려워하여 감히 맞아 싸우지 못하였다. 재우는 드디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왔다.

25년, 방어사(防禦使)에 제수되어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청정이 다시 대거 침략해 오자, 재우는 창녕ㆍ밀양(密陽)ㆍ영산(靈山)ㆍ현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오(隊伍)를 엄히 하여 명령을 위반하는 자를 목 베며, 관사(館舍)에 땔나무를 쌓아놓아 사수(死守)할 뜻을 보이니, 온 군사가 두려워하여 재우를 벼락이나 귀신처럼 여겼다. 적은 이미 성 밑까지 쳐들어왔는데도 재우는 여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굳게 지키라.’ 명령하고 이르기를,

“왜놈들 자신이 병법(兵法)을 알고 있는데 어찌 쉽게 진격해 오겠는가?”

하였는데, 1주야를 경과하자 과연 싸우지 않고 물러가 서쪽으로 황석(黃石)을 무찌르고 남원을 함락하니 여러 고을이 모두 패하였다. 원익은 걱정하여 재우에게 군사를 해체하도록 하니 재우는 즉시 편지를 써서 답하기를,

() 나라 70 즉묵(卽墨)만이 온전하였으며, () 나라 군사 백만 명을 안시성(安市城) 홀로 막아냈다.”

하고는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어머니 상(喪)으로 인하여 집으로 돌아가니 상이 특별히 3번이나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명하였으나 모두 상소하여 진정(陳情)하고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울진(蔚珍)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손수 패랭이[蔽陽子]를 만들어 팔아서 자급(自給)하니 사람들은 그의 여막(廬幕)을 방어점(防禦店)이라 이름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제수되어 섬에 있는 산성(山城)을 수리할 것을 청하여 2번이나 계(啓)를 올렸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드디어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대신(臺臣) 홍여순(洪汝諄)이 ‘직무를 유기하고 태만하였다.’고 탄핵하여 영암(靈巖)으로 귀양갔었는데, 뒤에 풀려 돌아와서 비파산(琵琶山)에 들어가 솔잎을 먹고 벽곡(辟穀 곡식을 먹지 않고 곡식 이외의 것을 조금씩 먹는 것)하였다. 얼마 안 되어 찰리사(察理使)에 임명되니 순행하여 산성의 형세를 살피고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되어 한성 우윤(漢城右尹)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상소하여 임해군 (臨海君珒)을 벨 것을 청하였다. 여러 번 통제사(統制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소하여 중흥(中興)에 대한 세 가지 계책을 말하였으며 부름을 받고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 이때 김수(金睟)가 도총관(都摠管)이었는데 재우에게,

“영공(令公)이 몇 년 동안 벽곡하였으니 어떻게 운검(雲劍 의장(儀仗)에 쓰는 큰 칼)을 메겠는가?”

하고는 언제나 자기가 메었다. 한성 좌윤(漢城左尹)에 임명되어서는 상소하여 ‘전하(殿下)의 나라가 반드시 () 때문에 망할 입니다.’라고 직언하였다.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에 조사(詔使) 염등(冉登)이 탐욕스럽고 독직(瀆職)하며 횡포가 심하니, 재우가 상소하여 통역관과 원접사(遠接使)를 극히 비난하고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전라 병사를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의 신하가 영창대군 (永昌大君) 죽일 을 청하였는데도 사람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재우가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이제 겨우 8세인 아이로서 모역(謀逆)이 무엇인지도 모를 터인데, 그대로 처형하였다가 자전(慈殿)께서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혹시라도 자결(自決)하신다면 전하께서 장차 천하에 무슨 구실로 변명하시겠습니까? 신(臣)은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전하를 큰 불의(不義)에 빠뜨릴까 두려워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창암(滄岩)에 집을 짓고 스스로 망우당(忘憂堂)이라 하고, 거문고와 배 1척으로 세속을 떠나 한가로이 지내면서도 언제나 변보(邊報 일선 지대의 전쟁 소식)를 들으면 곧 초연(愀然)히 기뻐하지 않으면서,

“내가 비록 늙었으나 국난(國難)이 있으면 마땅히 싸움터에 나가야한다.”

하였다.

나이 66에 졸하였다.

재우는 군사를 행함에 있어 상벌(賞罰)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며 기율(紀律)이 정제(整齊)하였다. 군사들을 집안 식구처럼 사랑하여 모든 군사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법을 행할 때에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았다. 말 위에서 손수 북을 치고 사람들에게 젓대와 피리를 불면서 천천히 걷는 것으로 절도(節度)를 삼아 한가한 것이 마치 싸우지 않을 듯이 하고는 곳곳에 군사를 매복(埋伏)시켰다가 왜적들이 오면 곧 활을 쏘며, 왜선을 쫓느라 언덕에 임하여 활을 쏘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적을 토벌하는데, 적의 머리를 베어다 바쳐서 공을 요구하는 것은 의(義)에 맞지 않으며 공을 탐하여 목 베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하고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적의 귀를 베어 오는 이 없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이노(李魯)는,

“공의 본의는 참으로 좋지만 모든 사람이 공(公)을 따라 힘을 다하여 싸우는데 누구인들 공명에 대한 욕심이 없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한다면 끝내는 반드시 싸움에 게을러질 것이오.”

하였다. 왜적을 지산(砥山 현재의 의령(宜寧) 지방)에서 무찔러 무수히 사살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목 베는 것을 허락하니 군사들이 다투어 물에 뛰어들어 70여 급(級)을 베었는데도 공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군관(軍官) 조사남(曹士男)이 앞장서서 적선에 올라 칼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찌르다가 마침내 거짓 죽은 체하는 왜적에게 찔림을 당하였다. 재우는 크게 슬퍼하여 통곡하면서,

“내가 목 베는 것을 금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처사(處士) 조식(曹植)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일찍이 재우를 간택하여 외손서(外孫婿)로 삼고는 자제들이 매우 많았는데도 재우에게만 병서(兵書)를 가르쳤다. 재우는 이미 벽곡(辟穀)을 하고는 술을 마셔 크게 취할 때에 문득 문밖에다 귀를 기울이면 귓구멍에서 술이 콸콸 샘물처럼 쏟아져나오니, 대개 한갓 병서만을 안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기이한 술법(術法)을 통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홍의장군은 성품이 뛰어나고 정직 순박하여 다른 사람과 서로 어울리지 않았으니, 조정에 있으면 마땅히 화가 미칠 것이며 싸움터에 있으면 마땅히 패할 것이다. 그러나 공리(功利)에 담박하여 물욕에 벗어났으며 형세를 살펴 승리를 취하였고, 기이한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능히 세상의 재화를 면하여 일찍이 한 번도 패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공리에 담박한 떄문이었다. 선무 공신록(宣武功臣錄 임진왜란을 평정한 공신록)에 조그마한 공로도 모두 기록하였는데, 홍의장군은 도리어 참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의장군의 공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D001] () 나라 …… 온전하였으며 : 

전국 시대 제 나라는 연(燕)에게 크게 패하여 70여 성을 다 빼앗겼는데 오직 거(莒) 땅과 즉묵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 즉묵 사람들은 전단(田單)을 장군으로 삼고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결국 제 나라를 회복하였다.《史記 卷82 單田列傳》

[-D002] () 나라 …… 막아냈다 : 

당 태종(唐太宗)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은 치열한 싸움을 벌여 당군(唐軍)을 물리쳤다.

[-D003] 임해군 (臨海君珒) : 

선조(宣祖)의 서장자(庶長子)였는데 성품이 사나워서 세자(世子)에 책봉되지 못하고 아우 광해군(光海君)이 세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가등 청정(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D004] () 때문에 망할  : 

광해군 5년(1613)에 일어난 계축화옥(癸丑禍獄)을 말한다. 서양갑(徐羊甲) 등의 서류(庶類)들이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금품을 강탈한 죄로 체포되었다.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들이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모함하려고 하던 차에, 서양갑 등이 김제남도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허위 진술하여 사화(士禍)가 일어나 영창대군 등 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하였다.

[-D005] 조정의 …… 죽일  : 

영창대군은 인목대비 소생으로 선조(宣祖)의 적자(嫡子)이다. 선조는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는데, 이를 안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 등이 광해군을 옹위하였다. 이들이 계축화옥(癸丑禍獄) 때에 영창대군이 역모(逆謀)에 가담했다고 무고하여 서인(庶人)으로 폐하였으며, 뒤에 마침내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의 손에 참혹하게 죽었는데 그때 겨우 14세였다.

[-D006] 적의 ……  : 

옛날 전쟁 때에 적의 시체의 왼쪽 귀를 베어 이것으로 공(功)의 신표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