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 28년은 도전이 주살(誅殺)되기 겨우 6년 전인데 그가 편집 교열한 글을 인쇄 반포하게 되었다니

2023. 11. 1. 04:29이성계의 명조선

정도전

삼봉, 鄭道傳

 

출생사망
1342년
13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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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집 제4권 / 잡저(雜著) 선수(瑄壽)가 고찰하건대, 선형의 유고는 경전을 보좌할 수 있으므로 대단치 않은 작품으로 여겨선 안 된다. 그 중에 종류별로 모을 수 없거나 한두 편에 불과하여 권(卷)으로 묶을 수 없는 편명들이 있으므로 《한창려집(韓昌黎集)》과 《방정학집(方正學集)》의 예에 따라 잡저(雜著)로 엮어서 문(文)의 첫머리에 싣는다.

진주 관고에 소장된 《대명률》의 뒤에 쓰다〔題晉州官庫所藏大明律卷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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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주에서 안핵사(按覈使)로 있을 때에《대명률》을 찾은 일이 있었다. 서리가 2부를 가져왔는데, 1부는 활자로 인쇄되었고 다른 1부는 목판본이었는데, 종이의 빛깔이 매우 바랬으며 글자가 이지러지고 먹빛이 어둡기에 활자본을 취하여 살펴보았다.

하루는 여가가 있어 목판본을 살펴보니, 말미에 짧은 발문이 붙었는데, 홍무(洪武) 을해년(1395) 2월 상우재(尙友齋) 김씨(金氏)가 지은 것이었다. 그 이름자가 이미 닳아 없어져 남은 획이 ‘철(哲)’ 같기도 하고 ‘초(樵)’ 같기도 하여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널리 조사해 보면 혹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발문은 다음과 같다.

형벌이란 다스림을 보좌하는 방도이니 소홀히 여겨선 안 됨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여러 형가(刑家)들이 법률을 제정한 것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있어 유사(有司)들이 결함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대명률》은 과조(科條)의 경중(輕重)이 각각 마땅한 바가 있으니, 참으로 법을 집행하는 자들의 기준이 된다. 성상(聖上)께서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서로 전하여 외우고 익혀서 모두 법으로 취하게 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대명률》의 문장이 일정하지 않아 사람들마다 쉽게 이해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는 삼한(三韓) 시대에 설총(薛聰)이 만든 방언문자인 이두(吏道)를 민간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알아 익숙히 쓰고 있으니 갑자기 바꿀 수가 없었다. 어찌 집집마다 다니며 깨우쳐주어 모든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이 책을 가지고 이두로써 읽고, 본래부터 아는 능력으로써 인도해야 한다.

정승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이 이에 검교중추원(檢校中樞院) 고사경(高士褧)과 나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겼다. 우리들은 반복해 상세히 연구하고 글자를 따라 직해(直解)하였다. 아! 우리 두 사람이 앞에서 초고를 작성하면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선생과 공조 전서(工曹典書) 당성(唐誠)이 뒤에서 윤색하였으니, 절차탁마(切磋琢磨)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일이 완성되어 서적원(書籍院)에 넘겨 백주 지사(白州知事) 서찬(徐賛)이 제조한 활자를 가지고 인쇄하니 무려 1백여 본이었다. 이에 반포하고자 하니, 아마도 흠휼(欽卹)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때는 홍무 을해년 2월 초길(初吉), 상우재(尙友齋) 김철(金哲)이 삼가 쓰다.

이는 처음에는 활자로 인쇄하였다가, 이후에 어떤 사람이 목판에 새긴 것인 듯하다. 매 조목 아래쪽에 주석과 같은 두 줄의 글이 있으니, 이것이 곧 이두로 읽는다는 것이다. 모두 우리나라의 이두 방언을 사용하여 그 문장을 해석하였는데, 때때로 원문이 언급하지 못한 사안에 대해 그 뜻을 추론하고 연역하여 넓힌 곳이 있었다. 가령 ‘입적자위법(立嫡子違法)’ 조항에 그 원문이 “버려진 아이가 세 살 이하면 비록 성이 다르더라도 거두어 기르고, 곧 그의 성을 따른다.〔其遺棄兒年三歲以下雖異姓仍聽收養卽從其姓〕”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두로 풀어 쓰고 그 뜻을 추론하고 넓혀 말하기를 “부모도 어린 아이를 버리기를 어렵게 여기는데, 남의 부유한 재산을 보고 이익을 탐하는 것을 편안히 여겨 자기 자식을 억지로 다른 사람의 호적에 집어 넣어, 버려진 아이라고 칭하여 풍속을 해치고 어지럽힌 자들은 이 규율에 해당하지 않는다.〔父母亦難便棄小兒而見人財產富饒貪利爲安自己子息强置他人戶中冐稱遺棄小兒毁亂風俗者不在此限〕”라고 하였으니, 이는 본문이 언급하지 않은 사안이다. 이와 같은 것이 응당 이 한 단락뿐만이 아닐 것인데 내가 한창 안핵하는 일로 바빠서 모두 살피지는 못했다.

《대명률직해》의 ‘입적자위법(立嫡子違法)’ 조목. 1686년 평안 감영에서 판각

 

삽화 새창열기

아! 역대 율서(律書) 중에서 오직 이 책이 가장 정밀하고 상세하다. 지금의 《청률례(淸律例)》도 모두 이 책에 의거했으니, 《대명률》 한 부를 지금까지도 준용(遵用)하는 것은 천하가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 건륭(乾隆) 때의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을 살펴보니, 《청률례》만 소개하고 이 책은 〈존목(存目)〉으로 미루어두었다. 생각건대 그 속에 기휘(忌諱)할 내용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인가?

우리 왕조 4, 5백 년 역사에서 형서(刑書)를 처음 만들 때부터 오직 이것을 준용하였으니, 국초(國初)의 명신들이 유용한 서적에 관심을 둠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선비들이 이를 버려두고 강구하지 않으며 단지 서리들에게 맡겨버리니, 헌책더미 속에서 이 책을 펼쳐 본 뒤에 감개를 억누를 수 없다. 이 책이 다른 고을에도 더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처럼 훼손됨이 너무나 가슴아프다.

[주-C001] 선수(瑄壽) : 박선수(朴瑄壽, 1821~1899)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온경(溫卿)이다. 환재의 아우로, 1864년(고종1) 증광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저서로 《설문해자익징(說文解字翼徵)》이 있는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고대 종정(鍾鼎)의 유문(遺文)을 연구하고 문자의 원리와 본뜻을 고증하였다. 《환재집》의 간행에 교정을 맡았는데, 간혹 간략한 논평을 달아놓았다.[주-C002] 한창려집(韓昌黎集) : 당나라 한유(韓愈, 768~824)의 문집을 가리킨다. 앞부분에 운문인 부(賦)와 시(詩)가 먼저 실려 있고, 문장은 〈원도(原道)〉, 〈원성(原性)〉을 필두로 각종 설(說), 해(解), 전(傳), 잠(箴), 찬(贊), 변(辯), 후서(後敘), 송(頌), 기(記) 등을 모아 첫머리에 배치하였다.[주-C003] 방정학집(方正學集) : 명나라 방효유(方孝孺, 1357~1402)의 문집인 《손지재집(遜志齋集)》을 가리킨다. 문집의 첫머리에 잠(箴), 명(銘), 계(誡), 의(儀), 논(論)을 비롯하여 각종 산문을 모아 잡저(雜著)라는 제목으로 실어 놓았다.[주-D001] 진주 …… 쓰다 : 이 글은 환재가 1862년(철종13)에 경상도 안핵사로 있으면서 조선 초에 간행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열람하고 그 내력에 대해 고증한 글이다. 환재는 이 책이 활자본과 목판본 2종이 있음을 알고 목판본에 있는 발문을 근거로 이 책이 처음에 활자본으로 간행되었음을 추정하였고, ‘입적자위법조(立嫡子違法條)의 예를 들어 이 책이 원문을 이두로 풀이하면서 《대명률》의 내용을 보완하기도 했음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환재는 이러한 유용한 서적을 선비들이 독서하고 강구하지 않아 경세제민에 이바지하지 못함을 몹시 안타까워하였다.[주-D002] 내가 …… 때에 : 환재는 1862년(철종13) 2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경상도 안핵사로 나갔다.[주-D003] 대명률 :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그가 즉위하기 1년 전인 1367년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1397년 460조 30권으로 완성한 법률서이다. 명례율(名例律)ㆍ이율(吏律)ㆍ호율(戶律)ㆍ예율(禮律)ㆍ병률(兵律)ㆍ형률(刑律)ㆍ공률(工律)로 모두 7편이다. 조선 태조가 즉위하면서 반포한 교서에 “모든 공사(公私) 범죄의 판결은 《대명률》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발표함에 따라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중요한 참고가 되었고, 조선 시대에 현행 형법전(刑法典)으로 활용되는 등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글에 나오는 《대명률》은 김지(金祗)ㆍ고사경(高士褧)이 이두(吏讀)로 직해하여 간행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가리킨다.[주-D004] 상우재(尙友齋) 김씨(金氏) : 《대명률직해》를 저술한 김지(金祗)를 가리킨다.[주-D005] 형벌이란 …… 방도이니 : 원문은 ‘형자보치지법(刑者輔治之法)’으로, 《논어》 〈위정(爲政)〉에 “인도하기를 덕으로써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예로써 한다.[道之以德 齊之以禮]”라고 되어있다. 주희(朱熹)가 이에 주석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법제는 정치를 하는 도구이고 형벌은 정치를 돕는 법이며, 덕과 예는 정치를 내는 근본이고 덕은 또 예의 근본이다.[愚謂政者爲治之具 刑者輔治之法 德禮則所以出治之本 而德又禮之本也]”라고 하였다.[주-D006] 조준(趙浚) : 1346~1405.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ㆍ송당(松堂),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송당집(松堂集)》이 있다.[주-D007] 고사경(高士褧) : 생몰년 미상.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판도 판서(版圖判書) 영(瑛)의 아들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 상서(尙書)를 지냈고, 조선 개국 후에는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하고, 관직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조선 개국초에 조준(趙浚)의 건의로 김지(金祗) 등과 함께 이두(吏讀)로 직해한 《대명률직해》를 편술하였다.[주-D008] 정도전(鄭道傳) : 1342~1398.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이다. 조선 개국 1등 공신으로 요직을 겸임,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하여 수도를 건설하는 책임을 수행하였고, 궁궐 및 성문과 한성부 각 기구의 이름을 정하였고, 《조선경국전》을 지어 통치규범을 확립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유학의 대가로 군사ㆍ외교ㆍ행정ㆍ역사ㆍ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저서에 《삼봉집》, 《경제육전(經濟六典)》, 《경제문감(經濟文鑑)》 등이 있다.[주-D009] 당성(唐誠) : 1337~1413. 고려에 귀화한 중국인으로 밀양 당씨(密陽唐氏)의 시조이다. 원나라 말기 전란을 피하여 고려에 귀화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연리(掾吏), 사평순위부평사(司平巡衛府評事)를 지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호조ㆍ예조ㆍ병조ㆍ공조의 전서(典書)를 거쳐 공안부윤(恭安府尹)으로 있다가 퇴임하였다.[주-D010] 흠휼(欽卹)의 뜻 : 흠휼은 옥사(獄事)를 다스림에 신중을 기하여 형벌을 남용하지 않고 가엾게 여긴다는 뜻이다. 《서경》 〈순전(舜典)〉에 “항상 공경하고 공경하여 형벌을 신중히 하셨다.[欽哉欽哉 惟刑之卹哉]”라고 하였다.[주-D011] 입적자위법(立嫡子違法) : 적자를 세우면서 법을 어긴다는 의미로 《대명률직해》 권4 호율(戶律)에 보인다.[주-D012] 부모도 …… 않는다 : 원문에서 이두를 빼고 인용한 것인데,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其遺棄小兒乙良 三歲以下是去等 必于異姓是良置 聽許收養 卽從其姓爲乎矣 遺棄小兒叱段 親生父母 亦難便棄置小兒是去有乙 時亦中 父母俱存 民財富足爲在人等亦 貪利爲要 自矣子息乙 他戶良中 强置冒稱遺棄小兒爲臥乎所 毁亂風俗爲臥乎事是良厼 不在此限齊”[주-D013] 청률례(淸律例) : 1646년에 만들어진 청나라 형사법전인 《청률(淸律)》을 수정ㆍ증보한 《청률집해부례(淸律集解附例)》가 1725년에 만들어졌는데, 1740년 다시 기본적인 율과 율의 규정을 수정ㆍ증보ㆍ세목화하여 《청률례》를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형법전이지만 민사로 취급되는 사항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율은 《대명률》을 답습하여 약간의 개정을 가했을 뿐이나 조례는 필요에 따라 제정ㆍ개폐되었다

 

 

청장관전서 제60권 / 앙엽기 7(盎葉記七)

우리나라 활자(活字)의 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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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는 태종 3년(1403)에 임금의 명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내부(內府)의 동(銅)을 지출하여 주조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김지(金祗)의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발문(跋文)을 상고해 보면,

“《대명률》은 그 과조(科條)의 경중이 각각 타당하게 되어 있다. 성상(聖上 태조를 말한다)이 이를 온 나라에 반포하려 하였으나 거기에 사용된 문자가 저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삼한(三韓) 시대에 설총(薛聰)이 만든 방언 문자(方言文字)를 이두(吏讀)라 하는데, 거기에 토착된 속습(俗習)을 갑자기 고칠 수 없으므로 이 글도 마땅히 이두로 구두를 떼어 놓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정승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이 검교중추원(檢校中樞院) 고사경(高士褧)과 나에게 그 작업을 맡기고, 자세히 연구하여 글자마다 직해(直解 문구(文句)대로 해석함)하도록 하였다. 이에 맨 먼저 우리 두 사람이 원고를 작성하고 맨 뒤에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선생과 공조 전서(工曹典書) 당성(唐誠)이 원고를 윤문(潤文)하여 작업을 마친 뒤에 서적원(書籍院)에 넘겨 백주 지사(白州知事) 서찬(徐贊)이 조각(造刻)한 글자로 인쇄 반포하였다. 때는 홍무(洪武) 28년(1395)이다.”

하였으니, 이 발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활자가 태종 시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찬이 조각하였다는 글자란 곧 나무로 된 활자이니, 활자는 서찬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고려 시대부터 활자를 만들어 사용해 왔지만 서찬이 만든 활자가 신형(新型)으로 된 것인지, 아니면 동(銅)으로 주조하는 법이 태종 시대에 시작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대명률》을 홍무 28년에 인쇄했다 하였으니, 동으로 주조했다는 태종 3년보다 9년이 더 앞선다.

김지의 호는 상우당(尙友堂)으로 정도전의 문생(門生)인 듯하며, 홍무 28년은 도전이 주살(誅殺)되기 겨우 6년 전인데 그가 편집 교열한 글을 인쇄 반포하게 되었다니, 그 당시에 법망(法網)이 매우 허술하였음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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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률직해 부록

명 태조가 지은 《대명률》 서문〔御製大明律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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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천하를 얻은 후 옛 문물제도를 본받아 다스렸다. 예(禮)를 밝혀 백성들을 인도하고, 율(律)을 정하여 어리석은 자를 바로잡고, 책자를 간행하여 영(令)으로 삼아 시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건만, 어찌하여 범하는 자가 끊임없이 나오는가. 이 때문에 오형(五刑)과 혹법(酷法)을 만들어 다스림으로써 백성들이 두려워 범하지 않기를 바랐고, 《대고(大誥)》를 지어 백성들에게 분명히 보여 주어 따를 것과 피할 것을 알게 한 지 또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나 법은 담당 관원에게 있을 뿐 백성들은 두루 알지 못한다. 이에 특별히 육부(六部)와 도찰원(都察院)의 관원에게 신칙하여 《대고》 안의 조목 중에서 요점을 발췌하여 《대명률》에 싣게 하고, 해마다 잇달아 반포한 일체의 방문(榜文)과 금지 조례를 모두 혁파하여 없애니, 지금부터 법사(法司)는 단지 《대명률》과 《대고》만을 따라 죄를 의의(擬議)하라. 자자형(刺字刑)에 합당한 자라도, 작당하여 반역을 꾀한 자의 가속(家屬)과 율문에 자자형에 처하도록 실려 있는 것을 제외하고, 그 밖의 범죄는 모두 자자하지 말라. 잡범 사죄(雜犯死罪)와 아울러 도형과 유형, 천사(遷徙), 태형과 장형 등의 형벌은 모두 이제 정한 속죄(贖罪)에 대한 조례(條例)에 비추어 과단(科斷)하라. 율문을 편집하여 베껴 책으로 만들어 중앙과 지방에 배포하니 백성들로 하여금 좇아서 지키는 바를 알게 하라.

 

홍무 30년(1397) 5월 일

 

 

[주-D001] 대고(大誥) : 《서경(書經)》에서 유래한 용어로 군주가 신민에게 훈계하는 말이다.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은 원조(元朝) 실패의 원인을 조정의 권위 하락에 따른 탐관오리의 발호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1385년(홍무18) 8월 《어제대고(御制大誥)》(74조), 1386년 3월 《어제대고속편(御制大誥續編)》(87조), 11월 《어제대고삼편(御制大誥三編)》(43조), 1387년 12월 《어제대고무신(御制大誥武臣)》(32조)을 차례로 반포하였다. 모두 236조에 달하고, 그중 무려 150조가 중앙과 지방의 탐관오리를 중형에 처하는 내용이다. 형벌이 너무 가혹하여 1397년 《대명률(大明律)》을 편찬하면서 법을 벗어난 혹형을 상당수 폐지하였다. 《전영진, 大誥를 통해 본 明 太祖의 官吏 對策, 복현사림 14권, 경북사학회, 1991》[주-D002] 방문(榜文)과 금지 조례 : 방문금례(榜文禁例) 혹은 간략히 방례(榜例)라 하기도 한다. 명 초에 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법률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법률 형식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나무판자에 금지하는 행동을 적어 백성들에게 제시하였기에 이와 같은 명칭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주-D003] 잡범 사죄(雜犯死罪) : ‘잡범 사죄’라는 명칭은 당대(唐代)부터 있었으나 명대(明代) 홍무(洪武) 연간에 일단 진범 사죄와 잡범 사죄가 정해졌고 1497년(홍치10)에 정비되었다. 십악, 모살(謀殺), 반역 연좌(反逆緣坐), 감수자도(監守自盜), 창략인구(搶掠人口), 수재왕법(受財枉法) 등 극악한 죄는 진범 사죄이고 나머지는 대개 잡범 사죄이다. 잡범 사죄를 지은 죄인은 실제로 참형이나 교형에 처해지는 경우는 비교적 적고, 일단 참감후(斬監候)나 교감후(絞監候)의 판결을 받은 뒤 추심(秋審)이나 조심(朝審)을 거쳐 정실(情實), 완결(緩決), 가긍(可矜), 유양승사(留養承祀) 네 종류의 정상을 참작하여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받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진범 사죄와 잡범 사죄 각각에 속하는 죄명의 자세한 목록은 《大明律集解附例 89~114쪽》에서 볼 수 있다.[주-D004] 속죄(贖罪)에 대한 조례(條例) : 구체적인 내용은 1조 오형(五刑)에 규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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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중국과 통하는 해로(海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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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로 말하면 우리나라 땅에서 곧장 중국의 사명(四明)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바닷길이 멀고 아득한 데다 중간중간에 섬들이 가로막고 있고 또한 흑풍(黑風 폭풍(暴風))으로 파도가 심한 변고들이 있으니 잘 피해 가야 한다. 그리하여 예성강(禮成江)의 급수문(急水門)을 출발해서 군산도(群山島)에 이르면 비로소 편안히 도달했다고 말을 하는데 수십 일이 걸리지 않고는 이를 수가 없다.

송(宋)나라 고종(高宗) 건염(建炎) 2년(1128, 인종6)에 양응침(楊應忱)이 자청해서 고려에 사신을 왔었는데 그가 돌아갈 때에는 9월 계미일에 우리나라를 출발해서 무자일에 자기 나라 명주(明州)의 창국현(昌國縣)에 이르렀으니 겨우 6일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단공(端拱) 4년에 진청(陳請)이 고려에 사신을 왔었는데 산동반도 등주(登州)의 동모(東牟)에서 출발하여 순풍을 타고 바다에 떠서 이틀 밤을 자는 동안에 벌써 황해도 옹진(甕津)의 어귀에 도착하였다. 육지에 오른 뒤에 160리를 걸어서 해주에 이르렀으며, 다시 백 리를 걸어서 염주(閻州)에 이르고 또다시 40리를 걸어서 백주(白州)에 이르렀으며 여기서 다시 40리를 더 걸어서야 비로소 서울인 개성(開城)에 이를 수 있었다.

[주-D001] 군산도(群山島) : 지금의 전북 김제시 지역인 만경현(萬頃縣)에 있던 섬 이름이다. 고려 때부터 조운(漕運)과 중국 무역선의 기항지(寄港地)로서 번영하였다.[주-D002] 단공(端拱) 4년 : 단공은 북송(北宋) 태종(太宗)의 연호인데 그 기간이 988년에서 989년까지 2년간뿐이므로 4년이란 없다.[주-D003] 염주(閻州)에 …… 백주(白州) : 염주는 지금의 연백군(延白郡) 지역이고, 백주는 지금의 배천군(白川郡)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