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劉海)는 진주인(晉州人)이다. 그의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었는데, 번번이 도독에게 아버지를 만나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였으므로 도독이 허락하였다.

2023. 10. 31. 06:57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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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5년 정묘(1627) 8월 13일(병오)

05-08-13[01] 청나라의 유흥조가 청과 조선이 화친하는 방법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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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조(劉興祚)가 글을 올리기를,

“한인(漢人)이면서 금나라 관원인 유흥조는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대현왕 전하(大賢王殿下)께 아룁니다. 생각건대, 흥조는 예의의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몸으로 영락해서 오랑캐의 나라로 들어왔으나, 순역(順逆)의 분수와 종위(從違)의 이치는 약간 압니다. 지난날 금나라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거느리고서 귀국을 잠식할 때 백성이 유린되고 참살 당한 시체의 간과 뇌가 땅에 흩어진 것을 목도하고서 흥조는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분골 쇄신토록 귀국의 군신을 위하여 난리를 물리치고 분쟁을 풀어줄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이 한 몸의 부질없는 정성을 대왕께서는 살펴주소서.

이 나라는 풍속이 교만스럽고 탐욕스러운데, 흥조가 이미 권도로 그들의 관직을 받은 이상 어찌 감히 그들이 좋아하는 바를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은 실로 겸손하지만 행적은 거만하였고 안에는 결백을 보존하였지만 겉은 더러움에 젖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권도(權道)에 따라 일을 하는 이 모두가 다 귀국을 위해서 주선하는 것인데, 고명하고 활달하신 전하께서 어찌 저를 밖으로 드러난 형상만 보고 판단하시겠습니까.

누차 전하의 은근하신 예우를 받았으므로 흥조는 감사한 생각 마음속 깊이 새겼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온 나라가 나에게 귀국의 동정을 묻기에 귀국 군신의 영원히 화호(和好)하려는 뜻을 간곡히 전하고, 또 방비하고 있는 금나라 군사가 소란을 부리는 것을 금하기 어려운 실정을 구체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믿지 않는 이가 없어 영원히 화호하기를 구하는 것은 우선 목전의 일만을 보아도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철병한 뒤에 수확하지 못한 의주의 벼는 묘(畝)를 계산해서 양곡으로 요구할 것과, 모수(毛帥)와는 원한이 깊으니 상륙을 용인하지 말 것과, 두 나라의 물화를 서로 무역할 것을 상의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세 가지를 따르면 화호가 이루어지고 병마도 철수할 것입니다마는, 귀국 군신이 뜻을 굽혀 따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진실로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인데, 더구나 기한(飢寒)의 핍박을 당하는 데이겠습니까. 후일 반드시 방자히 병탄(倂呑)하려 할 것이니, 부디 화가 닥쳐오는 것도 모르고 편안히 지내다가 범과 동행하는 화란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귀국도 매우 다행이고 흥조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흥조는 바로 유해(劉海)이다.

【원전】 34 집 221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1989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 인조 6년 무진 > 10월 15일 > 최종정보

인조 6년 무진(1628) 10월 15일(임인)

06-10-15[02] 회답사 정문익ㆍ박난영이 후금의 사정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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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답사 정문익(鄭文翼)과 박난영(朴蘭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정이 어떠한가?”

하니, 문익이 아뢰기를,

“그쪽의 정상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사색을 보건대 호의를 많이 보였습니다. 매양 우리 나라가 약속을 어긴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처음 맹약대로 한다면 몇 해 사이는 출병할 형세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난영이 아뢰기를,

“한(汗)이 이르기를 ‘그대 나라가 중국과 2백 년 동안이나 수호하였으니 하루아침에 단절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재신(宰臣)을 파견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를 정성과 신의가 있다고 여겨 다시는 사단을 야기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劉海)는 과연 죽었는가?”

하니, 난영이 아뢰기를,

“장작더미 위에 유해를 눕히고 불을 질렀는데, 유해가 지필을 찾아 자기 뜻을 쓴 다음 죽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대거 거용관(居庸關)으로 향했다고 하는데, 거용은 심양(瀋陽)과의 거리가 얼마이며 몽고 종족은 또 얼마나 되는가?”

하니, 문익이 아뢰기를,

“거용은 멀지 않다고 합니다. 몽고는 그 무리가 매우 많습니다.”

하고, 난영이 아뢰기를,

“노한(老汗)이 살았을 때 몽고를 한 집안처럼 대우했고, 군사는 70만이라고 일컬으나 기실은 40만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가 이란(李灤)의 죽음을 어떻게 여기는가?”

하니, 문익이 아뢰기를,

“용호(龍胡) 등이 이란의 죽음을 듣고 서로 돌아보며 웃었으니, 시원히 여기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곡호(曲虎)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난영이 아뢰기를,

“한이 아끼는 장수인데 중국인을 많이 거느렸습니다.”

하였다. 문익이 이어서 의주 부윤 황집(黃緝)이 제대로 진정시키지 못한 잘못을 말하자, 상이 이르기를,

“비국에 말하여 치죄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34 집 298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사법-탄핵(彈劾)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8년 경오 > 8월 17일 > 최종정보

인조 8년 경오(1630) 8월 17일(갑자) 맑음

08-08-17[22] 숭정전에서 도사 이매를 접견할 때 도승지 강석기 등이 입시하여 한인의 쇄환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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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午時)에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도사(都司) 이매(李梅)를 접견하였다. 정문(正門)을 통하여 들어가 - 2행 원문 빠짐 - 차관과 전(殿)의 중앙에 나누어 섰다. 차관이 배례(拜禮)를 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례를 행하지 마시오.”

하였다. 차관이 두 번 세 번 굳이 청하였으나, 상이 사양하였다. 서로 북면(北面)을 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읍(揖)하기를 세 차례 하였다. 상은 서쪽에 있고 차관은 동쪽에 있으면서 교의(交倚)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상이 이르기를,

“유 대인(劉大人)은 평안하신지요?”

하니, 답하기를,

“평안하십니다.”

하였다. 상이 또 위로하여 말하기를,

“먼 길을 오느라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하니, 차관이 답하기를,

“오는 길에 필요한 물품과 마필(馬匹)을 모두 넉넉하게 대 주었으니, 무슨 고생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상(床)에서 내려와 예단첩(禮單帖)을 올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주장(主將)이 도중(島中)에서 새로 얻은 것인데, 통호(通好)에 있어서는 보잘것없는 예물입니다.”

하고, 또 올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소인이 바치는 정성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사신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먼저 와 주시니,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후한 뜻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하였다. 차관이 또 게첩(揭帖)을 올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유 병부(劉兵部)의 문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열어 본 뒤에 윤지(尹墀)에게 그 조건(條件)을 상세히 보고서 아뢰도록 명하였다. 이에 다(茶)를 올리니, 상이 다종(茶鍾)을 잡았다. 상에서 내려와 서로 읍하고 앉아 다종을 들어 권하였다. 차 마시기가 끝나자 상이 역관 장예충(張禮忠)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기를,

“몸에 마침 병이 있어 즉시 접견하지 못해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하니, 차관이 답하기를,

“평안하지 못한 체후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장예충으로 하여금 주례(酒禮)를 청하게 하니, 차관이 아뢰기를,

“명을 받겠습니다.”

하였다. 사옹원이 양쪽 기둥 안쪽에 준조(尊俎)를 나열하고는 1작(勺)을 올렸다. 중악(衆樂)이 연주되자 무동(舞童)이 앞에서 춤을 추었다. 상이 작(爵)을 들어 읍하고 권유하니, 차관이 답읍(答揖)하였다. 과반(果盤)이 나오자 상이 또 젓가락을 들어 권하니 차관도 젓가락을 들고 답례하였다. 강석기(姜碩期)가 나와 아뢰기를,

“이 게첩 가운데의 조건은 모두 한인(漢人)을 쇄환하는 것과 군대를 일으킨 한 가지 일입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에 대탁(大卓)을 올려 재작(再爵)을 행하였다. 권의(勸儀) 및 무악(舞樂)을 위의 의식대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머무는 곳이 미비하여 너무도 소박하니, 미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차관이 아뢰기를,

“누차 성상의 보살핌을 입어 관우(館寓)가 매우 좋습니다. 그리고 연례(宴禮)를 여러 번 베풀어 주시니 실로 많이 감격하고 있는데, 무슨 소박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강석기가 나와 아뢰기를,

“가정(家丁)에게 술을 보내도록 차관에게 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차관이 말하기를,

“연회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소인에게 미치고 또 가정에게까지 미치니, 너무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상이 장예충으로 하여금 술을 권하도록 하니, 차관이 답하기를,

“주량(酒量)이 본래 많지 않은 데다 어전(御前)에서 과음한다면 - 2행 원문 빠짐 -

상이 이르기를,

“꽃을 바치는 일이 비록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는 반드시 벼슬이 낮아서 베풀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니, 꽃을 바치는 것도 해 될 것은 없다.”

하였다. 차관이 아뢰기를,

“주장이 소관(小官)을 차송한 뜻은 본래 이런 작은 의식을 보이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허다한 말들이 있었으나 황공하여 감히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도중(島中)의 요망한 말들은 뜻밖에 나온 것이고 이후로는 모두 형제지간이 되니, 소인들의 말을 듣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은 모두 천조를 위한 것이었으니,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만약 피차간에 이간하는 말을 믿지 말도록 한다면 마음을 같이하고 일을 함께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차관이 아뢰기를,

“주병(主兵)이 바라는 바도 이와 같은 데 불과합니다. 6월 사이에 두 번째로 글을 올렸는데, 전하께서 보셨는지요? 연변(沿邊)의 각 고을에서 한인을 많이 살해했지만 지금 남아 있는 자도 많으니, 속히 쇄송(刷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린 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초 와언(訛言)이 성행하자 한인이 이런 때를 틈타 난을 일으켜 백성들을 쳐죽이기까지 하였으나 금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류시킨 한인은 유 대인이 나온 뒤에 모두 다 풀어 보냈습니다. 이후의 요망한 말을 어찌 믿어서야 되겠습니까. 먼저의 총병(摠兵) 유해(劉海)가 정묘년 때에 나와 우리나라에서 은덕을 입었고 그 후 중국에 들어가서는 끝내 전장(戰場)에서 죽지 않았으니, 더욱 가탄(嘉歎)합니다. 유 대인이라면 본국(本國)에서 은혜를 입은 일이 있으니, 어찌 서운해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천조에서도 이미 용서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또 의심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한인은 권세가에게 구류당하는 일이 많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미 풀어 보냈습니다. 차관이 그쪽에 도착하면 자연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윤지가 나와 아뢰기를,

“차관이 들어올 때 가정 중에 궁시(弓矢)를 휴대한 자가 있어 금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만, 방금 그 궁시를 버리고서 들어와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차관이 아뢰기를,

“자상하고 지성스런 전하의 뜻을 돌아가 주장께 아뢸 것이니, 어찌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의 통정(通情)은 오직 문서(文書)만을 믿을 수 있는데 지금 두 번째 문서가 없어지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후의 일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해주(海州)에 사는 한인을 붙잡아 묶어 달자(㺚子)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변방을 지키는 신하의 소행이야말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서가 없어진 것은 노차(虜差)가 나올 때에 두 번 세 번 미리 통고하였으나 파발(擺撥)이 잘 피하지를 못하여 빼앗기게 된 것이니, 이 어찌 수령의 잘못이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다시 통고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모사(毛師) 이후로는 호령(號令)이 분명하지 않아 한졸(漢卒)들이 난을 일으키는 - 2행 원문 빠짐 -

□□□가 나와 아뢰기를,

“역관의 말을 전부 상세히 전할 수는 없으니, 차관이 돌아가려 했던 뜻을 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차관이 아뢰기를,

“주장(主將)이 4월에 거사(擧事)하였는데 군법이 매우 엄격했으므로 4월 이후로는 귀국에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대사(大事)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찌 아랫사람 단속하는 일을 어렵게 여기겠습니까. 그리고 선천(宣川), 철산(鐵山) 등 네다섯 고을 근처에서 땔감을 베어 내오고자 하는데 그곳의 관읍(官邑)이 매우 허술하니 양리(良吏)를 택하여 보내고 민가(民家)를 많이 지어 두 나라가 서로 보호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일의 살해는 지금 주장의 행위가 아닙니다.”

하였다. 어전 통사(御前通事) 윤이지(尹履之)가 나와 아뢰기를,

“차관의 말은 연변의 시초(柴草)에 뜻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답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일은 응답할 필요 없다.”

하였다. 상이 차관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다시 두 나라가 서로 돕고 보호하여 살해하는 폐단이 없게 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금지하여 해를 끼치지 말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차관이 아뢰기를,

“두 번 세 번 외람되이 번독스럽게 하여 황공합니다. 그렇지만 하운증(夏雲蒸)과 이성룡(李成龍) 등은 반드시 쇄환하고자 하기에 이런 뜻을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모두 이미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성룡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차관이 아뢰기를,

“풀어 보냈다고 답하시니, 섬에 돌아가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룡은 현재 충청도에서 한인 300여 인을 거느리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쇄환하도록 해 주지 않는다면 사람을 보내어 데려오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전혀 모릅니다. 당초 한인을 살해한 것은 엄격한 한법(漢法)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은 금지시키지 못한 관리를 이미 나추(拿推)하였으니, 당신 쪽에서도 마땅히 금지시켜 이전의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생령(生靈)들이 우리나라 지방에서 많이 죽었으니, 매우 불쌍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차관이 아뢰기를,

“전후에 걸친 전교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일이 돌아가 주장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올 적에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완(李浣)이 분명히 한인을 수금(囚禁)해 놓고도 도리어 기만하였으니, 이런 관리가 한 일은 잘못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자, 차관이 아뢰기를,

“저는 바로 천조의 관리이고 도사(都司)인데 숙천 부사가 시생첩(侍生帖)을 발급해 주었으니, 매우 박한 대우는 너무도 잘못된 처사입니다.”

하니,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지금 이후로는 당인(唐人)이 왕래할 때에 수령 등은 그들을 억압하지 말고 각별히 잘 대접하도록 비국으로 하여금 공문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차관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이후의 접대에서는 이와 같이 하지 말도록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차관이 5작(勺)을 마시고는 사양하고 이어 공인(工人) 등에게 상 줄 것을 청하였다. - 2행 원문 빠짐 - 상이 또 1작을 권하니, 차관이 아뢰기를,

“삼가 명을 받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장예충으로 하여금 술을 권하도록 하자, 차관이 아뢰기를,

“이 술잔 이외는 더 마실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요청한 한인을 데리고 갑니까? 전교를 듣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한인은 전부터 쇄환한 전례가 없고 비록 혹 쇄환한다 하더라도 중도에서 도망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후로는 계속 들여보낼 것입니다.”

하였다. 차관이 아뢰기를,

“이성룡이 남쪽 지방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니, 전하께서 조사하여 캐물어 보신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짜로 있다면 붙잡아 보내겠습니다.”

하였다. 술이 6작에 이르자, 차관이 사양하고 물러났다. 인하여 교의(交倚)에서 내려와서는 절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전후로 의심해 온 것에 대해 오늘 전부 얘기를 들었으니, 반드시 절하여 사례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례할 만한 일이 없으니 절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승지가 예단첩을 올리자, 상이 열어 본 뒤에 승지로 하여금 차관에게 전해 주도록 하였다. 차관이 열어 보고 기뻐하면서 아뢰기를,

“이미 후한 대접을 입었으니, 이런 예물은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약소한 예물을 어찌 굳이 사양한단 말입니까.”

하니, 차관이 아뢰기를,

“은혜로이 주시는 물건은 의리상 감히 사양해서는 안 되지만 후한 예물은 결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는 두 번 세 번 고사(固辭)하다가 받았다. 이어 절하자, 상이 답배(答拜)하였다. 전송하여 전문(殿門) 밖에 이르자 차관이 멀리서 읍하고 상에게 대내로 돌아가도록 청하니, 상도 답읍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다섯 차례 하였다. 차관이 정문(正門)을 나와 계단을 다 내려간 연후에 상이 여(輿)를 타고 도로 대내로 들어갔다. 윤지가 아뢰기를,

“차관이 나갔으니, 규례대로 문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신여본에 의거함 -

 

고전번역서 > 송자대전 > 송자대전 제156권 > 신도비명 > 최종정보

송자대전 제156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계곡(谿谷) 장공(張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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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조의 문헌(文獻)은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 완비되었고 혼조(昏朝)에 침체되었다가 인조조(仁祖朝)에 다시 신장되었다. 그러나 일대의 우두머리로 고려ㆍ신라를 능가하고 조송(趙宋)의 세대까지 젖어든 이를 논한다면, 오직 계곡 문충공(文忠公)이 바로 그 사람이다.
공의 휘는 유(維), 자는 지국(持國)이다. 덕수 장씨(德水張氏)는 본시 중국 원(元) 나라 때 순룡(舜龍)이 고려에 와서 벼슬하여 찬성사(賛成事)에 이르고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수봉된 때부터 비롯되었다.
고조 옥(玉)은 장원으로 급제하고 증조 임중(任重)은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이고 조부 일(逸)은 현감이고 부친 운익(雲翼)은 형조 판서인데, 고조로부터 판서공에 이르기까지 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판서공이 판윤(判尹) 박숭원(朴崇元)의 딸을 맞았는데, 박 부인이, 아침 해가 몸을 비추다가 이윽고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공이 만력(萬曆) 정해년 12월 25일에 선천부(宣川府) 내아(內衙)에서 출생하였다. 판서공이 장공(長公 장유의 형)을 가르칠 때 공이 겨우 5세의 나이로 옆에서 듣고도 뜻을 해득하였고 10세에 경서(經書)를 죄다 외었으며, 15세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에게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고 또 문원공 김 선생 장생을 따라 배웠다. 김 선생이 일찍이 공에 대하여,

“총예 역학(聰睿力學)하고 견해가 뛰어나니, 그 성취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고 말하면서 사문(斯文)의 책임으로 기대 권면하였다.

.....................

정묘년에 청 나라 오랑캐가 들어오므로 대가(大駕)를 따라 강도(江都 강화도)로 들어갔다. 때에 국력이 부진하여 오랑캐에게 화친 체결을 강요받았는데, 오랑캐 사신 유해(劉海)는 본시 중국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또 교활한 위인이었다. 그가 진현(進見)할 때에 상이 용탑(龍榻) 위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유해가 노기 띤 표정으로 꿋꿋이 서서 앞으로 나아오지 않자 좌우가 해괴하게 여겼다. 공이 나아가서,

“저 자가 너무 무례하니, 바라건대 밖으로 내쫓으소서.”

하므로, 유해가 그제야 풀이 꺾인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예식을 갖추고 물러갔다.
이어 화친 체결이 약정된 뒤에 유해가 상에게 맹약 장소에 친림하기를 청하자 의논하는 이들이, 당 태종(唐太宗)이 위수(渭水)의 편교(便橋)에 나가서 힐리(頡利)와 맹약하던 일을 인용하여 그대로 수락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이 상에게 수락하지 말기를 청하고 나서 유해를 만나 극력 투쟁하여 마침내 대신(大臣)이 대신 나가 주관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해가 조약을 체결할 때 명 나라와 단절할 것을 제1조로 내세우므로 공이 큰소리로 단호히 배격하자, 유해가 《논어(論語)》의, 관중(管仲)이 자규(子糾)를 위해 죽지 않은 것을 공자(孔子)가 관중더러, 인(仁)한 사람이라고 일컬은 말을 들어 달래고 위협하였다. 통역(通譯)이 이를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공이 그 자음(字音)과 어맥(語脈)을 살펴 그 뜻을 체득하고 즉시 《논어》의 ‘사람이란 누구나 다 한 번은 죽게 마련이지만, 사람에게 신(信)이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된다.’는 말을 들어 꺾어 버렸다.
뒤에 유해가 다시 바른 데로 돌아서서, 매번 본국더러 사체(事體)를 얻었다고 말하였고, 도독(都督) 원숭환(袁崇煥)도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매번 본국의 사신을 만날 적마다 맨 먼저 당시의 일부터 말하면서, 으레 장 시랑(張侍郞)은 지금 어느 직책에 있으며, 안부는 어떠냐고 물었다.
오랑캐가 물러간 뒤에 다시 본국에게 명 나라의 연호를 쓰지 못하도록 하므로, 조정에서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공이 개연히 나서서,

“저들과 화의(和議)를 체결하던 첫날에, 명 나라에 관련되는 일에 대해 죽어도 따를 수 없다고 한 사실은, 온 국민이 다 알았고 또 성의(聖意)도 그대로 확정하신 바인데, 어찌 경솔히 스스로 서둘러서 그 소수(所守)를 상실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사대(事大)하는 도리에는 연호를 받드는 것이 가장 중대하므로 이를 한 번 실수하면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자, 상이 마침내 공의 말에 따랐다. 상이 환궁하여 특별히 이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공이 사퇴하는 차자를 세 번이나 올렸으나 상이 이르기를,

“경(卿)에게는 재(才)와 학(學)이 있고 또 덕(德)과 행(行)이 있으니, 참으로 여정(輿情)에 부합되는 자이다.”

하고 비답을 내리므로 공이 드디어 세도(世道)로써 자임(自任)하여 공도(公道)를 확장하고 사로(仕路)를 숙청시켰다. 명 나라 조사(詔使)가 온다 하여, 특별히 공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문형(文衡)이 아닌 사람으로서 이 임무를 맡은 예는 이전에 없었던 바인데, 결국 조사가 오지 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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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25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정묘년의 노란(虜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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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갑자년(1624) 가을에 도원수 장만(張晩)과 한명련(韓明璉)을 체직하고 이홍주(李弘冑)를 대신 임명하였다.

○ 기익헌(奇益獻)이 이괄(李适)과 한명련의 목을 베었다. 이때에 명련의 아들 윤(潤)은 탈출하여 귀성(龜城)에 숨었는데 한 해가 지나서야 부사 조시준(趙時俊)이 비로소 듣고 잡으려고 하니, 한윤이 기미를 알아채고 후금(後金)으로 망명해 들어가 강홍립(姜弘立) 등에게 말하기를, “본국에서 변란이 일어나 당신들의 처자식을 모두 죽였습니다. 나와 함께 만주(滿州) 군사를 빌려 복수하십시오.” 하니, 홍립과 난영(蘭英) 등이 그 말을 믿고, 드디어 오랑캐 군사가 병인년(1626) 봄에 동침(東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월록(日月錄)》에는 기축년 여름이라 하였다.

○ 평안 감사가 조정에 아뢰어 홍립의 첩의 아들 숙(璹)에게 당상의 벼슬을 주어 예법을 갖추고 오랑캐 땅에 들여 보냄으로써 홍립을 후하게 대접하는 뜻을 보이고 아울러 적의 사정을 정탐하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담록(荷潭錄)》 《 속잡록(續雜錄)》 ○ 《하담록》에 “강숙과 박난영의 아들 박립(朴雴)을 들여 보냈다.” 하였다.

○ 을축년(1625) 겨울에 하삼도(下三道 충청ㆍ경상ㆍ전라도)의 병사에게 영을 내려 병마를 이끌고 각각 도계(道界)에서 대기하도록 하였다가 병인년 2월에 파하였다. 《일월록》

○ 병인년에 요동 장수 서고신(徐孤臣)이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주산성(昌洲山城)에 들어와 해를 넘겼는데, 정탐군 편에 우리나라에 보고하기를, “근래에 오랑캐들이 병마를 정돈하고 군량과 무기를 준비하고 있으니 반드시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계책이 있는 것이다. 귀국에서는 미리 방비책을 마련해 두십시오.”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일월록》에 “고신은 그뒤 무진년 2월에 벽동(碧潼) 사람에게 타살되었다.” 하였다. ○ 《조야첨재(朝野僉載)》에 “고신은 곧 모문룡(毛文龍)의 부하 참장(參將)인데 창성(昌城) 서안(西岸)에 토굴을 파고 둔전(屯田)하여 자급자족하면서 수시로 출병하여 오랑캐 땅을 불지르고 약탈하였다. 뒤에 오랑캐의 습격을 받아 잡혀 갔는데, 얼마 안 있어 탈출하여 돌아와 남은 군사들을 모으다가 강도에게 살해 당했다.” 하였다.

○ 그때 모문룡이 보낸 군사가 강을 건넜는데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하였다. 싸움에 패하여 그 부하 장수 시가달(時可達) 등 죽은 이가 많았는데도 싸움에 패한 사실을 숨기고 매번 승전했다고 아뢰고, 군수 물자를 엄하게 줄여서 이로써 권신들과 사귀어 공으로 도독(都督)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하담록》

○ 모문룡이 가도(椵島)에서 군사 5, 6만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교만 방자하여 우리나라를 향해 불측한 단서가 많이 있어, 서관(西關)의 장사(將士) 중에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한 항상 사람을 시켜 오랑캐 땅을 왕래하며 연락한 흔적이 있는 듯하였다. 《조야기문》

○ 병인년 5월에 오랑캐의 추장이 문룡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극진히 꾀고 달래 이윤(伊尹)이 하(夏) 나라를 버리고 태공(太公)이 주(周) 나라로 돌아간 고사를 인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서신에 또 말하기를, “요동은 우리 선왕의 백성이니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남으로 여순(旅順)으로부터 북으로 개원(開原)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진강(鎭江)으로부터 서로 광녕(廣寧)에 이르기까지 모두 어루만져 기르고 있다. 모 장군은 지혜롭고 통달한 분인데 어찌 그리도 어두운가. 지금은 남조(南朝 명(明) 나라)가 멸망하는 때이다. 하늘이 멸망하도록 하는데 장군이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병진년(1616)에는 큰 바람이 불어 방죽이 무너지고 큰 나무가 뽑히고 궁전 누각 위의 마루에 있던 짐승 장식이 떨어졌고, 무오년(1618)과 기미년(1619)에는 옥하(玉河)의 두 줄기가 핏물이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명 나라를 멸망시킬 징조를 보인 것이 아니겠는가. 동부마(佟駙馬)와 요동과 광녕의 제장(諸將)이 모두 싸움터에서 사로잡혀 지금은 모두 현관(顯官)이 되었다. 장군이 만일 온다면 또 다른 장수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였다. 《조야기문》 《일월록》 《속잡록》에도 있다.문룡이 또한 우리나라가 의심하는 것을 알고 말하기를, “오랑캐와 사자(使者)를 서로 통하지 않으면 무엇을 통해 그들의 사정을 알겠는가.” 하였다. 이에, 의주 부윤(義州府尹)과 평안 감사가 장계를 올려 모문룡이 오랑캐와 밀통한 의심할 만한 정상을 보고하였다. 아래에 자세히 나온다.

○ 병인년 5월에 건주(建州)의 오랑캐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등창이 나서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세자 귀영개(貴榮介)다른 본에는 ‘永介’로 되어 있다. 둘째 왕자 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귀영개가 아우 홍타시(弘他時)다른 본에는 ‘弘太始’로 되어 있다. 에게 양보하며 말하기를, “너는 지용(智勇)이 나보다 나으니 너가 모름지기 위(位)를 계승해야 한다.” 하니, 홍타시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즉위하였다. 《병자록(丙子錄)》 혹은 말하기를, “누루하치가 죽을 때를 당해 귀영개에게 이르기를 ‘아홉 번째 왕자를 마땅히 세워야 할텐데 나이가 어리니 너가 섭정하다가 뒤에 아홉 번째 왕자에게 전위(傳位)하라.’ 하였는데, 귀영개는 핍박을 받을까 혐의하여 드디어 홍타시[洪太氏]를 세웠다.” 한다. 《일월록》 외람되이 연호를 천총(天總)이라 하였다.

○ 이때 명 나라의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이 광녕을 진압하였다. 이 때 나이 27세였다고 한다. 지려(智慮)가 밝고 통달하여 용병(用兵)이 귀신과 같아 전략을 많이 꾸미고 화구(火具)를 넉넉히 준비한 후 편안한 군사로써 피로한 오랑캐 군사를 맞아 싸우니, 오랑캐 군사가 한꺼번에 여러 번 쳐들어 왔으나 연달아 패하고 돌아갔다. 《조야기문》

○ 우리나라 역관(譯官) 한원(韓瑗)이 사신을 따라 명 나라에 갔다가 마침 숭환을 만났는데, 숭환이 기뻐하며 사신에게 한원을 빌려 달라고 청하여 자기 진(鎭)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 때문에 한원이 그 전투를 목견하였는데, 숭환이 군사를 지휘하는 것은 비록 알 수 없었으나, 군중(軍中)이 매우 고요하고, 숭환이 두세 명의 막료들과 서로 한담을 나눌 뿐이었다. 적이 습격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숭환이 가마를 타고 망루(望樓)로 가서 한원 등과 함께 옛 역사를 논하고 글을 이야기할 뿐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대포 한 방을 쏘니 포성이 천지를 뒤흔들므로 한원이 무서워서 머리를 들지 못하자, 숭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적이 왔다.” 하였다. 곧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니 적병이 들에 가득히 몰려오는데 성 안에서는 전혀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그날 밤 적이 외성(外城)에 들어왔는데, 대개 숭환이 미리 외성을 비워두고 적을 유인한 것이다. 적이 병력을 합쳐 성을 공격하자 또 대포를 쏘니 성 위에서 일시에 불을 켜 천지를 환히 비추고 화살과 돌을 함께 떨어뜨렸다. 싸움이 바야흐로 치열해지자 성 안에서 성첩(城堞) 사이마다 매우 크고 긴 나무궤를 성 밖으로 밀어 냈는데, 반은 성첩에 걸치고 반은 성 밖으로 내놓으니 궤 속에 실상 갑사(甲士)가 엎드려 있다가 궤 위에 서서 내려다 보면서 화살과 돌을 던졌다. 이렇게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성 위에서 마른 풀과 기름과 솜 화약을 함께 던지니 얼마 후에 땅 속에 묻었던 포(砲)가 크게 폭발하여 성 밖에서 안팎으로 흙과 돌이 두루 날아 흩어졌다. 불빛 속에서 오랑캐들을 바라보니 무수한 인마(人馬)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가 어지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로써 적은 크게 꺾여 물러갔다. 이튿날 아침 적의 대열이 큰 들판 한쪽에 마치 잎사귀처럼 뭉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숭환이 곧 예물을 갖추고 한 사람의 사자를 보내 인사하기를, “노장(老將 누루하치)이 천하를 횡행한 지 오래 되었는데, 오늘 나에게 패전당했으니 아마도 운수인가 보다.” 하였다. 이때 누루하치는 먼저 중상을 입었는데, 이에 이르러 숭환에게 예물과 명마(名馬)를 갖추어 답례하고 다시 한번 싸울 기약을 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분통이 나서 죽었다고 한다. 《일월록》

서경동왕(黍莖董王) 봄에 재앙이 있었다. 《재상전고(災祥典故)》

○ 천계(天啓) 7년 정묘(1627) 1월에 오랑캐 기병 3만여 명이 압록강을 몰래 건너왔다. 《촬요(撮要)》에는 “오랑캐 아미타수(阿彌他水) 등이 수만의 기병으로 몰래 의주(義州)를 습격하였다.”고 하였다. 13일에 의주에 쳐들어 와서 먼저 사람을 시켜 남산(南山)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게 하기를, “대금국(大金國) 이왕(二王)귀영개 이 명을 받들어 정벌하니, 성안의 장수와 군사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나와 항복하고, 남쪽 땅에서 온 군병들은 모두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말 발굽으로 짓밟아 마구 죽여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 하였다. 이날 부윤 이완(李莞)은 마침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었으므로 성중은 흉흉하여 공포에 떨 뿐,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 이완은 이순신의 조카로서 순신이 적의 탄환을 맞았을 때에 나이가 어렸는데도 능히 대신 군사를 통솔하여 적을 격파하여 매우 이름이 높았다. 혹은 말하기를, “이완이 고을 기생 기린(麒麟)에게 미혹되어 그때 마침 기린의 집에서 취해 잠들었는데, 별안간 적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린이 끌어 일으켜 관아에 나아가 북을 치며 군사를 모았으나 적이 이미 쳐들어 온 뒤라 화살에 맞고 죽었다.” 한다. 《일월록》

○ 이에 앞서 이완은 오랫동안 군사들의 마음을 잃어 사람들이 오히려 적을 따를 뜻이 많았으므로 적병이 강을 건너자 군졸들이 흩어져 버렸다. 초저녁에 한윤(韓潤)이 중국 옷으로 변복하고 몰래 사냥꾼을 따라 들어와 적을 성으로 끌어들여 군기(軍器)를 불태우니 온 성 안이 크게 혼란스러웠다. 14일 새벽에 적이 성으로 육박하여 쳐들어오니, 반민들이 성문을 열고 적을 들어오게 하여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고 이완과 판관 최몽량(崔夢良) 등은 사로잡혔다. 적이, “남도 군사와 북도 군사로 각각 나뉘어 서라.”고 명령하자 남과 북의 군사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각각 좌우로 모이니, 적이 첨방군(添防軍)을 모조리 죽였다. 이어 이완을 삶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나서 몽량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몽량이 분노하여 꾸짖기를, “개 짐승들아, 어찌 이렇게까지 하느냐.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런 것이냐.” 하니, 적이 어지럽게 칼질하여 죽였다. 곧장 본토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서 그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항졸(降卒)이 보니, 홍립ㆍ난영ㆍ오신남(吳信男)ㆍ한윤이 적 속에 와 있었다고 한다. 《조야기문》 《일월록》

○ 일찍이 홍립이 한윤과 함께 여러 차례 계책을 꾸며 오랑캐 추장에게 우리나라에 쳐들어 갈 것을 청하였으나, 누루하치는 그들이 제 나라를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꾸짖어 물리쳤다. 홍타시(弘他時)가 대신 위에 오르자 홍립과 한윤이 간청하여 드디어 이런 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월록》

○ 적의 추장이 서신을 보내어 힐책하기를, “너의 나라에는 네 가지 죄가 있다. 천극한[天可汗 오랑캐 황제의 칭호]이 돌아가셨는데도 즉시 조문하지 않았으며, 선천(宣川)의 전투에서는 우리가 하나도 살륙하지 않았는데도 곧장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지 않았으며, 모문룡은 우리의 큰 원수인데도 국내로 맞아들여 먹을 것을 주고 돌보아주었으며, 요(遼)의 백성은 나의 적자(赤子 신하)인데 망명자를 초대하고 반란자를 받아들였으므로 내가 매우 한스럽게 여기노라.” 하였다. 《조야기문》 《일월록》

○ 병조 판서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삼아 종사관 이경필(李景弼) 등과 더불어 평안도로 나가게 하였다. 《일월록》

○ 장만을 파견하여 김기종(金起宗)ㆍ정충신(鄭忠信)ㆍ신경원 등을 인솔하고 가서 적을 막도록 하였다. 《하담록》

○ 각 도에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도록 명하였다. 《일월록》

○ 충신이 평안도로 갈 때 장유(張維)가 교외로 나가 전송하면서 함께 앉아 이야기하였다. 충신이 “이 오랑캐가 지금 침략해 온 것은 그 뜻이 화친을 요구하는 데 있으니, 모름지기 화친만 하면 즉시 돌아갈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이 되었다. 대개 충신이 오랑캐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곡만필》

○ 적의 군사가 승승장구하여 진격해 오자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희건(李希建)이 수천의 군사를 데리고 용골산성(龍骨山城)을 지켰는데, 좌수(座首)가 적과 내응(內應)하는 음모가 있으므로 성을 버리고 탈출하였다. 《조야기문》

○ 이희건이 용골을 지키다가 얼마 안 되어 전사하니, 중군(中軍) 이충걸(李忠傑)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고, 협수장(協守將) 장사준(張士俊)은 자기 처자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성을 바치고서 처자식을 찾아오려는 계략을 꾸몄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전 현감 정봉수(鄭鳳壽)를 추대하여 장수로 삼아 위에 아뢰니, 봉수를 방어사로 삼도록 명하여 김완(金莞) 이하 여러 장수가 모두 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충걸과 사준은 뒤에 김완에게 참수당하였다. 《담운조공집(澹雲曺公集)》 《서학성군유사(書鶴城君遺事)》

○ 17일에 적병이 능한산성(凌漢山城)곽산(郭山) 에 이르러 성을 둘러보고 부르짖기를, “성중의 장수와 군사들이 성을 버리고 나와 항복하면 우리 대군(大軍)은 놔두고 지나가겠다.” 하니, 성중에서 답하기를, “조정의 명을 받아 성을 지키니 마땅히 목숨을 바치겠다.” 하였다. 적이 군사를 휘몰아 진격해 들어오는데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와서 차례로 성에 걸치고 풀로 사람 형상을 많이 만들어 사닥다리 위에 줄지어 세웠다. 성중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막아 이미 비 오듯이 화살을 쏘았으나, 얼마 안 가서 군졸은 힘이 다하고 병기가 떨어지니 적이 성으로 올라와 마구 죽였다. 곽산 군수(郭山郡守) 박유건(朴有建)《촬요(撮要)》에는 유건(由楗)으로 되어 있다. 과 정주 목사(定州牧使) 김진(金搢)은 집안 식구들과 함께 사로잡히자 항복을 애걸하고 머리를 깎았다. 적은 그의 처첩을 간음하고 항상 장막 속에 두고 행군할 때에는 곧 유건과 김진에게 각각 처첩의 말고삐를 잡게 하였다. 유건이 아내의 부정을 책망하니 처첩들은 남편의 불충을 꾸짖었다고 한다. 《조야기문》 《일월록》

○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협(奇協)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 적병이 도처에서 외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전왕(前王 광해군)을 위하여 복수하는 것이다. 일이 이루어진 뒤에는 각 도의 군사들에게 10년 동안 납세와 부역을 면제하여 줄 것이다.”고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역적 한윤(韓潤)이 가르쳐준 바라고 한다. 《조야기문》 《일월록》

○ 호남의 전 좌랑 오섬(吳暹), 검열 김여옥(金汝鈺), 정자 신응망(辛應望), 학유(學諭) 이상형(李尙馨)이 군사를 모집하는 통문을 냈다. 《일월록》

○ 21일에는 적 3만 6천 명의 기병이 먼저 안주성 아래에 이르렀고, 22일에는 청천강(淸川江)에 도착하여 크게 진을 쳤는데,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성에서 수백 보 안에 진을 치고 성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빨리 나와 항복하라.”고 외쳤다. 이에 앞서 성 안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의논하여 성 안의 집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는데, 이에 이르러 적병이 말하기를, “사람의 집이란 지극히 귀중한 것인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불태웠는가.” 하였다. 성 안에서 군관을 시켜 중군(中軍)이라 칭하고, 성문을 나가 적의 사정을 탐문해 오도록 하였다. 가서 보니, 두 추장이 홍립과 함께 의자에 앉아 있고 난영 등은 땅에 앉아 있었다. 적의 추장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무엇 때문에 호패(號牌)를 만들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이웃 나라와 신사(信使)를 통하지 않고 우호를 닦지 않는가. 더욱이 세 리의 성 안에 있는 수만 명의 무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망녕되게 항거하여 어육(魚肉)이 되는 화를 스스로 취하려 하는가. 너희 나라는 어찌하여 천시(天時)를 살피지 못하고 감히 큰 나라와 원수가 되려고 하는가. 어서 빨리 나와 항복하고 화친하기를 약속하라.” 하고는 술 석 잔을 먹이고 돌려 보냈다. 이 보고를 듣고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 떠는데, 목사 김준(金浚)은 팔뚝을 걷어 붙이며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우리들에게 작록(爵祿)을 주시고 간성(干城)의 직책을 맡겨 주셨으니, 마땅히 힘을 다하여 자기 한몸을 내던져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난을 당하여 모두 구차하게 살려는 마음을 갖는가.” 하고서, 곧 통역관을 성 위로 올려 보내어, “우리나라는 다만 싸우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을 알 따름이며 본래 항복과 화친은 모른다.”고 외치게 하니, 적이 말하기를, “내일 너희들을 도륙할테니 후회하지 말라.” 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연기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데, 적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1만의 기병이 한꺼번에 쳐들어 오니 성 안에서 대포와 화살을 함께 쏘아 적병이 말에서 참호로 굴러 떨어져 죽는 자가 산처럼 쌓였다. 앞에서 엎어지면 뒤에서 쳐들어와 좌충우돌, 낙타까지 아울러 달리면서 긴 사닥다리를 운반하여 와서 일시에 성에 올라 칼날로 육박전을 벌이니, 형세가 바람 앞의 불같아 손을 쓸 수 없었다. 적이 마침내 성 안으로 뒤쫓아 올라와 마구 죽였다. 병사 남이흥(南以興)과 김준은 손에 화약 포대를 들고 성루(城樓)에 기대어 서서 어지럽게 화살을 쏘았는데, 적의 무리가 한꺼번에 에워싸고 달려 들었다. 김준 등이 드디어 화약 포대에 불을 지르니 집채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이흥과 김준 부자와 여러 장수가 모두 타 죽고, 적병으로 타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적은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또 수색하여 수백 명을 잡아서 진 앞으로 몰아다가 죽이려고 하는데, 마침 원수부(元帥府)에서 화친했다는 글이 도착하니 풀어 주었다. 풀려 나온 백성들이 백 발자국을 다 가기 전에 추장이 급히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찌 다시 살려준 은혜에 감사하지 않느냐. 각기 고향에 돌아가 안심하고 생활하라.” 하였다

○ 이때 선전관이 명을 받들고 와서 성 안에 있었는데, 이흥이 말하기를, “명을 받든 사람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하고, 이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서계하기를, “외로운 성이 포위를 당하여 장차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만일 주장(主將)이 군사를 독려하여 와서 구원한다면 신 등은 함몰되는 환란을 면할 수 있을 것인데, 감사 윤훤(尹暄)은 군사를 옹위하고 하루면 올 수 있는 거리인데도 좌시한 채 구원해 주지 않으니, 신 등은 죽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일월록》 《조야기문》

○ 우후(虞侯) 박명룡(朴命龍),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상안(李尙安), 자는 정이(靜而), 본관은 광주(廣州)이다.개천 군수(价川郡守) 전상의(全尙毅), 증산 현령(甑山縣令) 장돈(張暾), 정사공신(靖社功臣) 옥산군(玉山君)태천 현감(泰川縣監) 김양언(金良彦), 자는 선익(善益), 평양사람. 본관은 진주(晉州). 진무공신 진흥군(振武功臣晉興君). 이에 이르러 힘껏 싸워 몸에 입은 상처가 10여 군데나 되었는데, 사방을 돌아봐도 구원병이 없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판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맹산 현감(孟山縣監) 송덕영(宋德英), 진무공신 연창군(延昌君), 본관은 죽산(竹山)이다.영유 현령(永柔縣令) 송도남(宋圖南)전 영장 ㆍ박천 군수(博川郡守) 윤혜(尹惠)ㆍ북영장 한덕문(韓德文)훈련원 정에 추증되었다. 등이 함께 죽었다. 충민사(忠愍祠)에 들어감. ○ 《하담록》에는 다만 명룡, 상의, 도남, 돈 네 사람만을 기록하였다.

○ 적진에 보냈던 군관이 돌아오니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음을 두려워하였는데, 한 사람의 수령이 분연히 여러 사람 가운데로 들어와서 말하기를, “신자의 도리가 이와 같은 것인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자리는 이곳이다.” 하니, 김준이 듣고 통곡하고 이로써 군사를 격려하였는데, 그 수령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 시준 등이 이미 죽었으나 살갗은 아직 온전하였는데, 적이 물러가자 고을 백성들이 시체를 거두어 임시로 장사지냈다.

○ 처음에 남이흥은 군사와 백성을 보살피지 않고 자못 형벌을 가하고 죽이기를 일삼고 국방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국방에 소홀하여 패하게 되었다고 꾸짖자, 이흥이 말하기를, “공신들이 나를 시기하여 사람을 시켜 사찰하니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일월록》

○ 이때 남이웅(南以雄)은 바다를 건너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는데, 문득 네거리에 남이흥이란 성명을 쓴 붉은 종이가 높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역관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이것은 너희 나라에서 죽음으로써 성을 지킨 신하 남이흥으로 이름을 써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인데, 바로 중국에서 절의를 포상하는 특전이다.” 하였다. 이웅이 비로소 그 일을 알고 이름 아래에 나아가 곡을 하니, 중국 사람들이 그가 이흥의 친척인 줄 알고 예의를 더 갖추어 대접하였다. 《약천집(藥泉集)》

○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과 구굉(具宏) 등에게 서울 포수와 경기 지방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임진(臨津)을 지키도록 하였다.

○ 심기원(沈器遠)을 도순검사(都巡檢使)로 삼아 종사관 이상급(李尙岌)ㆍ나만갑(羅萬甲)ㆍ이(李) 춘파당(春坡堂)의 아버지 와 더불어 남으로 내려가게 했다. 김장생(金長生)을 전라도 호소사(全羅道號召使)로, 장현광(張顯光)을 경상도 호소사로 삼고, 호조 판서 이서(李曙)에게 남한산성을 지키게 하였다.

○ 호패를 폐지하였다. 《전고(典故)》에 자세함

○ 귀양간 사람을 모두 풀어 주었는데, 오직 광해조의 흉당(凶黨)만은 예외로 하였다. 《조야기문》에도 있다.

○ 적병이 가도(椵島)를 침략하자, 섬에 나와 있던 중국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문룡은 철산 신미도(鐵山身彌島)로 옮겨 들어갔다. 《조야기문》 아래에 자세히 나온다.

○ 장만(張晩)이 평산(平山)에 이르러 대기하였는데, 평안 감사 윤훤(尹暄)은 적병이 이미 가까이 쳐들어 왔는데도 계엄을 선포하지 않아 군민(軍民)이 모두 흩어져 버렸다. 윤훤은 평양을 버리고 달아나고, 황해 병사 정호서(丁好恕)도 이 소식을 듣고 또한 황주(黃州)를 버렸다. 이 소식이 보고되자 조정에서 크게 놀라 김기종(金起宗)을 윤훤 대신 감사에 임명하고, 신경원(申景瑗)을 이흥 대신 병사로 삼고, 이익(李榏)을 호서 대신 황해 병사로 삼고, 도사를 보내어 윤훤과 호서를 잡아 왔다. 정충신을 병사로 삼아 부원수를 겸하게 하였다. 《하담록》 《일월록》

○ 처음에 평양에서 안주(安州)가 도륙되는 참화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리마다 목놓아 슬피 울고, 평양과 안주는 서로 혼인 관계가 얽혀 있다. 적이 이미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군사와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밧줄을 타고 성을 넘어 흩어져 도망갔는데, 아무리 타일러도 막을 수 없었다. 윤훤이 화약 상자를 앞에 놓고 적이 성으로 접근해 오기를 기다려 목숨을 바치려고 하니, 부하들이 극력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종사관 홍명구(洪命耈)가 말하기를, “군사도 없이 텅 빈 성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무익한 짓입니다. 마땅히 잠시 산중에 들어가서 산속의 군사를 모으고, 또 불러 모은 북관(北關)의 병사들이 며칠 안으로 와서 모일 것이니, 적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꼬리를 습격하면 기이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한번 싸우고서 죽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윤훤이 그 말을 따랐다. 22일에 윤훤이 성천(成川)의 남창(南倉)에 이르렀는데, 이날 밤 3경(更)에 큰 별이 서쪽에서 떨어지며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식자(識者)들이 걱정하였는데, 얼마 후에 윤훤이 체포되었다.

○ 23일 영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듣건대, 평양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신의 아우는 감사의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장수를 보내소서.” 하였다. 병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길에서 들은 소문은 믿을 수 없으니, 의당 우선 결과를 보자.”고 하였으나,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장차 다른 사람들을 징계할 수 없습니다.” 하여, 드디어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 양사가 합계하기를,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는 적이 침범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앞장서서 감히 파천(播遷)할 계책을 주장하고, 임진은 요해지라 막아내기 어렵다는 의견을 힘써 주장하여 임금을 의혹시키고 인심을 놀래켜 도성을 붕괴시키고 종묘 사직을 파천하도록 하였으니, 중앙과 지방에서 분통스러워하여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시백(李時白 이귀의 아들)이 강변을 지키려고 하자 이귀가 제멋대로 막아서 사사로이 자기 자식만을 보호하고, 재신(宰臣)들을 면대하여 욕하였습니다. 양사에서 한창 탄핵하여 합계하고 있는데도 태연히 등대(登對)하니, 이귀를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뒤에 서울을 버리고 피난가자는 청이 이귀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대신들이 또 대죄하니, 즉시 정계(停啓)하였다. 《연평일기(延平日記)》

○ 조정에서 피난하자는 의논이 있어 김상용(金尙容)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여인길(呂䄄吉)을 부장으로 삼아 도성의 일을 맡도록 하였다.

○ 24일에 세자에게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명하였는데, 무군도체찰사(撫軍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 좌의정 신흠(申欽),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 병조 참판 이민구(李敏求), 순무사 심기원(沈器遠), 통어사 유비연(柳斐然),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따랐다.

○ 27일에 인조가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로 피난해 들어가니, 영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오윤겸(吳允謙), 이조 판서 김류(金瑬), 찬성 이귀(李貴),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참판 최명길(崔鳴吉)ㆍ김자점(金自點)ㆍ장유(張維) 등의 조정 신하들이 모두 따라갔다.

○ 죄기(罪己)의 교서를 내려 중앙과 지방의 신하와 군사와 백성에게 유시하였다.

○ 도원수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홍립과 난영의 아들에게 국서(國書)를 가지고 오랑캐의 진중으로 가서 적을 달래 퇴군(退軍)하게 하는 동시에 적의 실정을 탐문하도록 하였다. 홍립의 답서에 말하기를, “저는 끈덕진 목숨이 죽지 않고 다만 화친하기를 기대했었는데, 마침내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군중(軍中)에서 이에 대해 언급되면 한결같이 화친의 의견을 말하여 죽음으로써 다투었습니다. 이제 두 집의 자식들이 국서를 받들어 칼날을 무릅쓰고 나온 것을 보니, 더욱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힘쓰겠다는 결심이 생깁니다.삼가 바라건대 영형(令兄)은 온당하게 힘껏 화친을 찬성함으로써 조정의 근심을 풀도록 하십시오. 군사가 이미 깊이 들어와 군사들의 기운이 심히 날카로우니, 한갓 입으로만 변론을 일삼아서는 안되며, 특별히 진실한 호의를 내려 후히 예물을 보내십시오. 경조(慶吊)의 절차에 관해서는 뒤에 의논하기로 합시다. 차사(差使)가 꼭 어전에 나가 직접 문서를 전달하여 피차가 꼭 같이 화친하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 선처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자식은 한 번 만나 보고 곧 돌려보내니, 사세가 체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쪼개지는 듯하나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연평일기》 ○ 홍립이 자기 집안이 모두 잘 있다는 사실과 반정(反正) 후에 선류(善類)들이 조정에 가득 차 있음을 자세히 알고 비로소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다. 속은 것을 크게 뉘우쳤다. ○ 《하담록》

○ 북병사 윤숙(尹璹)과 남병사 변흡(邊潝)이 군사를 거느리고 관서에 진주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유시하기를, “하삼도(下三道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병사는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내려가 임진(臨津)의 수비를 도우라.” 하니, 제장(諸將)이 모두 명을 듣지 않고, 충청 병사만이 수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동작(銅雀) 나루에 주둔하였으니, 공주(公州) 이상은 적막하게 방비가 없었다. 《일월록》

○ 일찍이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희건(李希建)이 산성에서 나와 근처에 머무르며 적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는데, 김기종(金起宗)이 경내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만났다. 마침 조정에서 희건의 관직을 빼앗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고 명하니, 희건이 항상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며 적의 통로를 출입하면서 틈을 엿보아 쏘아 잡아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맹세하였다. 하루는 취기를 타고 말을 채찍질하여 나가자 기종이 극력 말리니, 희건이 말하기를, “죄는 크고 공은 무너졌으니 마땅히 한 번 죽는 것이 통쾌할 뿐이다.” 하였다. 마침내 숙천(肅川) 경계에 이르러 적의 낙오병에게 살해 당했다. 《일월록》 ○ 희건은 본관은 홍주(洪州)이고, 진무공신 홍양군(振武功臣洪陽君)이다.

○ 2월에 적병이 황주(黃州)에 와서 사신을 보내 화친할 것을 협박하면서 세 가지를 요구하였는데, 첫째는 땅을 떼어주는 것이고, 둘째는 모문룡을 잡는 것이며, 셋째는 군사 1만을 빌려 명 나라를 치는 것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당초에 적은 역적 한윤의 말을 듣고 우선 의주를 침범하여 우리나라의 군사력을 시험하려고 하다가, 와보니, 우리 군사가 놀라서 싸우기도 전에 무너지므로 이 때문에 깊이 들어왔다고 한다. 《조야기문》

○ 적병이 평산(平山)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강물이 넘치자 강을 건너 돌아갈 수 없었다. 비록 승세를 타고 전진해 왔으나 깊이 들어오는 것은 또한 본뜻이 아니므로 드디어 유해(劉海) 등을 파견하여 화친을 의논하였다. 《하담록》

○ 9일에 오랑캐가 유해와 홍립ㆍ난영을 차사(差使)로 보내 개성부(開城府) 풍덕(豐德)을 거쳐 행재소(行在所)에 들어오고, 11일에 강을 건넜다. 다음날 우리 측에서는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오랑캐의 차사를 접견하였는데, 임금이 답례를 하지 않자 오랑캐 차사가 크게 노하니 통역을 시켜 타일렀다.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홍립의 숙부 를 회답사(回答使)로 삼아 적진에 보내 위로하도록 하니, 유해 등이 돌아갔다. 유해는 본래 요동(遼東) 사람인데 후금(後金)에 투항하여 이왕자(二王子)의 사위가 되었다. 《일월록》

○ 일찍이 임금의 행차가 통진(通津)에 머무를 때 오랑캐 차사가 강화를 하고자 오려고 하니, 한창 강화를 하느니 안 하느니 논의가 분분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최명길이, “전쟁이 나면 사신이 그 사이에 왕래하는 법이니 단번에 거절하는 뜻을 보이는 것은 부당하다. 우선 맞아 들여 그 말을 들어보고 처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모든 사람의 뜻도 대체로 그러했으나 아무도 발언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명길이 그 의견을 주장하자 마침내 차사를 진해루(鎭海樓)에서 접견하고 이어 유해가 또 도착하니 강화가 드디어 이루어졌다.이때 오랑캐 군사는 평산(平山)에 주둔하였는데, 강화와의 거리가 백여 리였다. 강화의 수비가 약하여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비록 화친을 배척하는 자들도 겉으로만 큰 소리를 칠 뿐 속으로는 사실 강화의 의논이 이루어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믿을 수 없는 의론을 두려워하여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명길만은 일을 당하여 돌아보거나 피함이 없이 문득 맨먼저 발언하였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탄핵을 받고 물러갔다. 《계곡만필(谿谷漫筆)》

○ 이때 도성에는 적병이 이미 가까이 들어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자, 유도재신(留都宰臣) 김상용(金尙容)이 급히 어고(御庫)와 병조ㆍ호조ㆍ태창(太倉)ㆍ선혜청(宣惠廳)ㆍ경영(京營) 등의 모든 창고에 불을 지르도록 하니, 나라의 저축은 이에 탕진되었다. 상용이 즉시 강화로 달아나니 노량진 나루에 두었던 천여 석의 양곡도 모두 흩어져 잃어버리고 여인길(呂䄄吉)이 수 척의 배를 얻어 겨우 2백여 석을 싣고 갔다. 《조야기문》

○ 이때 세자는 전주(全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서울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좌수영(左水營)으로 향하고자 하니, 이원익(李元翼)이 아뢰기를, “인심이 떠나가고 흩어져 나라가 나라다울 수 없으니, 우선 적이 도성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곳으로 피하는 계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세자가 따랐다. 《일월록》

○ 처음에 창성 부사(昌城府使) 김시약(金時若)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방어할 계책을 세웠는데, 군졸들이 겁을 내어 날마다 점점 흩어져 도망가고 정탐 나간 병졸이 돌아오지 않아 적에 대한 보고가 끊겼다. 이에 이르러 의주의 적 2백여 기병이 불시에 쳐들어와 선언하기를, “너희 나라는 다 함락되고 국왕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너희가 한 구석에 있는 외로운 성을 가지고 감히 큰 군사를 막겠는가.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였다. 이날 밤에 군졸들이 성을 넘어 달아나자 시약이 군사로 하여금 경계를 엄하게 하고 단속하도록 하니, 성중 군졸들이 일시에 창을 거꾸로 들고 반역하자, 시약이 말하기를, “나는 지방관으로서 마땅히 이 땅에서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가든지 머물든지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적이 성을 넘어가는 장수와 군졸을 마구 죽이고 이어 성 안으로 달려들어와 시약 등이 사로잡혔다. 적이 포박을 풀어주면서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자 산 채로 의주로 끌고가 죽이고, 두 아들은 머리를 깎아 노예로 만들었다. 《조야기문》 ○《촬요(撮要)》에는, “오랑캐의 한 부대가 쳐들어 오니 창성 부사 김시약이 달아나다가 붙잡혀 죽었다.”고 하였다.

○ 12일에 큰 비바람이 불어 강화의 선박들이 많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많이 익사하였다.

○ 16일에 윤훤(尹暄)을 강화에서 효수(梟首)하고, 정호서(丁好恕)를 경성(鏡城)에 안치(安置)하였다.

○ 윤훤의 형인 윤방(尹昉)은 이때 영의정이었고 그 일가친척이 대부분 궁중에 연줄이 닿아 있었다. 윤훤은 그 죄가 본시 죽음에 이를 것은 아니었는데, 임금이 그의 일가친척이 강성하기 때문에 반드시 죽여서 여러 사람에게 위엄을 보이려고 하였다. 대간들이 비록 규례에 따라 죽여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속으로는 사실 차마 그럴 수 없어 이튿날 정계(停啓)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임금이 그것을 알고 갑자기 윤허하는 전교를 내렸다. 이때 윤훤은 한창 심명세(沈命世)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윤허의 명령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명세가 통곡을 하니, 윤훤이 천천히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는데 어찌 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형을 받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 김상헌이 그때 북경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돌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의 공론이 밝지 않아 윤차야(尹次野 윤훤의 자)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친구들의 수치이다.” 하였다. 《일월록》

○ 대간이 호서(好恕)를 죽일 것을 아울러 청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였는데, 이는 대개 호서가 예전에 이괄의 사자를 벤 충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담록》

○ 이때 대간들이 윤훤이 지방을 지키지 못한 죄를 처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으므로 대간이 장차 정계하려는데, 마침 정혜옹주(貞惠翁主)가 대궐에 들어가 구명운동을 하였다. 옹주는 윤훤의 조카인 신지(新之)의 아내이며 인조의 고모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의 일은 마땅히 공론에 붙여야지, 내가 어찌 감히 올리고 내리고 하겠는가. 고모가 대궐에 들어온 뒤에 만일 윤훤의 죽음을 용서해 준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나를 사사롭다고 여길 것이다.” 하였다. 다음날 드디어 대간의 계사를 윤허하였는데, 대개 옹주의 말이 임금을 격발시킨 것이다. 《공사견문(公私見聞)》

○ 홍명구(洪命耈)가 윤훤을 조문하기를, “공의 심사는 하늘과 땅의 신령이 실로 굽어보시는 바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으로 하여금 평양에서 무익한 죽음을 맞게 하여 유감이 없게 할 것을, 당시에 내가 잘못 공에게 탈출하게 하였다. 아무리 후회한들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그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명구가 금화(金化)에서 순절하였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에야 윤 체찰을 저버리지 않았노라.” 하였다.

○ 20일에 유해(劉海)가 또 평산에서 강화로 들어와 임금을 뵙고 직접 문서를 전하겠다고 요청하니, 임금이 부득이 따랐다. 서로 읍례를 행하는데, 사신으로 온 오랑캐 한 사람이 바로 경성(鏡城)에서 투항한 백성 박중남(朴仲男)이었다. 오랑캐의 차사(差使)가 천계(天啓 명 나라의 연호) 연호를 쓰지 말라고 협박하고 또 왕자를 볼모로 삼겠다고 요구하니, 조정에서는 왕자가 어리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답하였다. 종실 원창령(原昌令)의신도정(義信都正) 비(備)의 아들 을 왕제(王弟)라 일컫고 군(君)에 봉하고, 이홍망(李弘望)을 통신사로 삼고, 목면(木綿) 3백 필, 흰 모시 3백 필, 호피(虎皮) 백 령(令), 표피(豹皮) 백 령을 예단으로 하고, 우봉 현감(牛峯縣監) 이상룡(李祥龍)을 차원(差員)으로 삼아 적진에 보냈다. 《속잡록》

○ 유해가 글을 써서 보여주었는데, 그 대략에, “나는 한(漢) 나라 사람으로서 잠시 오랑캐 땅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어찌 잠시 동안 유리(流離)해 있다 하여 조선에 대해 위험에서 붙들어주는 도리를 잊겠습니까. 이번에 온 것도 몇 가지 조항을 의논하여 화친을 이룩해서, 옛 사람들이 분란을 종식시켜 주는 의의를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듣건대, 귀국의 왕은 총명함이 만리를 내다보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홀로 결단하신다 하니, 만일 한때 굽히는 수치를 참는다면 반드시 장구한 계책을 펼 것입니다. 이것은 강한 자를 만나면 피한다는 도리입니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지금 농사가 눈앞에 닥쳐, 백성들이 혹은 산속으로 도망가고 혹은 바다 섬에 숨어 들어가고 혹은 가업(家業)이 산실되고 혹은 형제가 사로잡혀 있으므로 날마다 모두 목을 길게 빼고 ‘화(和)’ 한 글자를 바라고 있습니다.지금 귀국의 왕께서 어찌 한 가지 접견의 예(禮) 때문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으니, 이를 유독 어찌 차마 하십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금(金) 나라 사람들은 마음씀이 바르지 못하여 다시 한번 격동하면 형세가 반드시 서울을 함락시킬 것이고, 서울이 한번 떨어지면 위태롭기가 마치 계란을 포개 놓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직 서울 근교만 해를 입을 뿐 아니라 팔도의 백성들이 또한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회가 한번 어그러지면 화가 차마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 이때 유해가 임금을 나와서 뵙기를 굳이 청하니, 허락하였다. 유해가 나와서 뵙는데 임금이 용상에 앉아 움직이지를 않자, 유해도 선 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성난 기색을 마구 드러냈다. 이에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유해가 무례하니, 전하께서 한번 일어나면 국가의 체모가 손상되고 큰일이 틀려질 것입니다. 해를 물리쳐 내보내소서.” 하였고, 여러 사람이 나아가 모두 장유의 말과 같이 아뢰자, 유해는 본시 영악한 사람이어서 문득 그 뜻을 알아채고 앞으로 나와 자리로 나갔다. 뒤에 유해는 오랑캐 속에서 탈출하여 돌아가 피도(皮島)에 머물러 있었는데, 매양 그때의 일을 말하며 우리나라를 체통 있는 나라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계곡만필》

○ 일찍이 원창 령(原昌令)이 갈 때에 오랑캐가 임금의 친동생을 청했으나 조정의 의논이 어렵게 여기자, 유해가 손바닥에 ‘가(假)’ 자를 써서 보여 마침내 원창 령을 보냈다. 《계곡만필》

○ 이때 홍립은 그대로 행재소(行在所)에 머물러 있고 난영은 적에게 돌아갔는데, 적이 선언하기를 “화친은 비록 이루어졌으나 우선 평양에 머물러 있다가 풀이 자라기를 기다린 후에 들어가겠다.”고 하였다.

○ 통영(統營)에 하유하여 병선(兵船)을 보내지 말도록 하는 동시에 각 도의 호소사(號召使)에게 모집한 군사들을 보내지 말도록 하고, 모두 양곡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였다. 《조야기문》

○ 화친의 의논이 정해지자 사람들이 모두 몹시 한탄하였다. 사간 윤황(尹煌)이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적에게 명분 없는 화친을 청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항복이 아닙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황의 발언이 흉악하고 참혹하니 ‘항(降)’ 자의 뜻을 물어 보고 아뢰도록 하라.” 하자, 회계하기를, “신이 실언하였으니, 신의 머리를 베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삭탈 관직하라.” 하였으나, 양사가 간쟁(諫爭)하여 다시 복직되었다. 《일월록》

○ 함경 감사 남이공(南以恭)이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찬(李穳)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도록 하였으나, 이찬이 오지 않았다. 조정에서 이공이 국난(國難)에 달려오지 않았음을 꾸짖으니, 이공이 죄를 이찬에게 전가하자, 이찬을 참형에 처할 것을 논계하였다. 《조야기문》

○ 윤도ㆍ변흡 등이 황해도에 도착하였으나 조정에서 화친을 의논하였기 때문에 감히 싸우지 못하고 황해 병사 이익(李榏), 부원수 정충신(鄭忠信), 황주 판관(黃州判官) 이숙(李䎘), 문화 현령(文化縣令) 경신후(慶信後), 봉산 군수(鳳山郡守) 나덕헌(羅德憲), 신계 현령(新溪縣令) 이이성(李以省)과 함께 수안(遂安)다른 본에는 신계(新溪)로 되어 있다. 에 주둔하였다. 오랑캐가 화친을 맺고 물러가면서 그곳을 지나가는데, 그때 충신 등은 갑옷을 벗어 놓고 군사를 쉬게 하고 있다가 오랑캐의 무리가 갑자기 이르자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다. 윤도는 미처 달아나지 못하여 휘하의 장병들을 거느리고 문루에 올라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계획을 하였는데, 오랑캐가 “화친이 이미 성립되었다.”고 말하여 청하여 서로 만나 보고 떠났다. 이때 장만은 평산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봉 현령(牛峯縣令) 이상절(李尙節)이 도망쳐 와 장만에게 보고하기를, “모든 장수가 모두 오랑캐 군사에게 붙잡혔습니다.” 하니, 장만이 급히 행재소에 아뢰어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기문(記聞)》에는 “이익 이하 모두가 사로잡혔는데 신후는 적에게 화살을 쏘다가 힘이 다하여 해를 입었고, 덕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운운.” 하였다. 이때 김시양(金時讓)이 호소사(號召使) 정경세(鄭經世)와 더불어 함창(咸昌)에 모였는데, 좌중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니, 시양이 말하기를, “이 소식은 반드시 헛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비록 싸우는 데는 능하지 못하나 달아나는 데는 능하니, 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었다면 혹 이런 염려가 있지만 들판에서 오랑캐를 만났는데 어찌 모조리 사로잡혔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다음날 서쪽으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조야기문》 《하담록》

○ 이때 적이 평안도는 이미 점령하였다 하며 자기들에게 항복해 붙는 자들로써 각 고을의 장수로 삼고 유수(留守)하게 하였는데, 곧 평양은 전 만호 강귀룡(姜貴龍)이, 안주(安州)는 첨지 김덕경(金德卿)이, 정주(定州)는 당시의 좌수(座首)가, 선천(宣川)은 장관 정사량(鄭士良)이, 의주(義州)는 천총 최효일(崔孝一)이 홍립의 분부를 받고 홍립한데 기(旗)를 받아 성 위에 달고, 주군(州郡)의 인신(印信)을 마음대로 쓰며, 제멋대로 한인(漢人 명 나라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겁탈하는 것을 일삼으며, 창고를 봉하여 닫고 적의 재물을 지켜 주었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다투어 서로 붙었다. 이에 감사 김기종이 귀룡을 목 베어 효시한 후 치계(馳啓)하였다. 《조야기문》

○ 22일에 유해(劉海)가 다시 와서 퇴군(退軍)한다고 확고하게 말한 후에도 해주(海州)ㆍ연백(延白) 등지에서는 노략질이 날로 심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천계(天啓)란 연호를 없애라고 위협하며 여러 날을 두고 서로 힐책하였는데, 유해가 말하기를, “중국의 게첩(揭帖)과 같이 연호를 쓰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조정에서 부득이 따랐다. 유해가 가지고 온 오랑캐의 서신에, “대금국(大金國) 이왕부(二王府)는 조선 국왕 휘하에 서신을 보내노라. 화친은 두 나라가 원하던 바이나 맹서(盟書)가 없는데 어떻게 그 화친을 믿겠는가. 근일에는 조선에서도 군비가 갖추어지고 군졸들도 단련되어 반드시 서로 싸우려 할 것이니, 한번 승부를 겨루어 보는 것도 대장부의 일이로다. 곧장 왕제(王弟)와 대신들을 돌려 보낼 것이니, 날짜를 정하여 만나 싸우자. 실지로 진실한 화친을 하고자 한다면 속히 맹약을 하라. 두 나라의 휴전은 곧 백성들의 행복이다.” 하였다. 유해가 역관 장예충(張禮忠)을 불러 맹약에 임할 것을 요구하자, 예충이 답하기를, “이미 왕자를 보냈으니 맹약에 참석할 왕자도 없고, 국서(國書)로 화친을 약속했는데 이 밖에 또 무슨 맹약이 있겠는가.” 하니, 오랑캐가 발끈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화친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조정의 의논은 굳게 거부하며 따르지 않자, 오랑캐의 차사가 홍립을 보고자 하므로 허락하였더니, 마침내 홍립과 함께 갔다. 《조야기문》 《일월록》

○ 이때 평산의 적이 먼저 물러갔다. 유해와 홍립이 도중에서 회서(回書)를 보냈는데, 어투가 흉악하고 교활하였다. 오랑캐의 서신이 또 왔는데, 화친이 당초의 뜻과 크게 어긋난다고 하면서 우리나라가 무성의하다고 책망하자, 답서를 보내기를, 우리나라에서는 명 나라를 섬긴 지 2백 년이며 은혜를 받은 바가 깊고 중하다고 하였다. 28일에 홍립과 유해는 오랑캐의 차사 13명과 함께 다시 강화로 와서 맹약하라고 협박하였다. 《조야기문》

○ 이때 유해는 관사에 머물러 있었는데, 장유ㆍ이정귀ㆍ김신국이 명을 받들고 만나 보고 화친의 맹약을 강정(講定)하려 하였으나, 김과 이는 말이 능란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유가 유해를 상대로 담판하였다. 그때 유해가 맹약 조건을 몇 가지 내놓았는데, 그 하나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중국과 절교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장유가 큰 소리로 통렬히 거부하니, 오랫동안 말이 오가다가 유해가 《논어》에 ‘제 환공(齊桓公)이 공자(公子) 규(糾)를 죽였을 때 소홀(召忽)은 순사(殉死)하였지만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는데도 공자가 관중을 어질[仁]다’고 한 것을 들어서 말하였는데, 대개 이 말로 유혹하며 협박한 것이었다. 이에 장유가 즉시 《논어》에 ‘예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사람은 신의가 없으면 행세할 수 없다.’는 말을 들어 반박하니, 유해가 말문이 막혔다.

○ 화친의 의논이 결정되자, 유해가 임금이 친히 맹단(盟壇)에 나오기를 청하였다. 신하들 중에, 간혹 당(唐) 나라 태종(太宗)이 위교(渭橋)에서 회흘(回紇)과 맹약한 일을 인용하면서 마땅히 유해의 청을 허락하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장유와 이경직(李景稷)은 오랑캐 차사의 접대를 주관하고 있었는데, 아뢰기를, “이미 전하께서 상중(喪中)에 계시다고 해명하였으니 가벼이 허락하지 마소서.” 하고, 한편으로는 유해에게 극력 쟁론하니, 드디어 유해도 억지를 쓸 수 없어서 마침내 대신(大臣)에게 맹단에 임하도록 하였다. 오랑캐의 뜻이 본래 화친하는 데 있었고, 유해도 조선과 오랑캐 사이에서 또한 화친을 성립시키는 일로 자기의 임무를 삼고 있었기 때문에 무릇 예절(禮節)의 문제로 쟁론할 때에는 많이 우리나라의 주장을 들었다. 《계곡만필(谿谷漫筆)》

○ 유해가 또 우리에게 보낸 답서에서 명 나라 연호를 쓰지 못하게 하니, 조정에서는 장차 그대로 하려 하였다. 장유가 그때 마침 병석에 있었는데, 차자를 올리기를, “전부터 서신을 통할 때에 이런 예(例)를 썼다면 연월을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방편으로 이 예를 시작해 낸다면 사리에 어떠하겠습니까. 설령 이 말을 따르지 않아 화친하는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방(大防)을 결코 가벼이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그들의 군사가 지치고 피로하니, 이와 같은 한 가지 일을 다투느라 마침내 화친하는 일을 그르칠 리도 없을 듯한데 어찌 경솔하게 스스로 겁내어 우리가 지켜야 할 바를 잃기에 이르겠습니까. 사대(事大)의 도리는 연호가 제일 중요한 것이니, 한번 그르치면 후회 막급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에 의논하게 하여 마침내 장유의 말을 채택하였다. 《백헌집(白軒集)》

○ 3월 3일에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오랑캐와 맹약을 강정하게 하였는데, 단(壇)을 강화 서문 밖에 쌓고 밤중에 단 위에서 회합하여, 흰 말과 검은 소를 죽여 하늘에 제사지내고 서약하였다. 금 나라의 서약문에는, “조선 국왕과 대금국의 두 왕자는 서약하노라. 우리 두 나라는 이미 강화하였으니 이제부터 한 마음으로 뜻을 같이 할 것이다. 조선국에서 만일 금 나라와 원수를 맺어 병마(兵馬)를 정비하고 새로 성을 쌓아 그 마음가짐이 좋지 못하면 황천(皇天)이 화를 내릴 것이고, 만일 두 왕자가 불량한 마음을 먹어도 황천이 화를 내릴 것이다. 만일 두 나라의 두 왕이 동심동덕(同心同德)하여 공평한 도리로 같이 처하면 용천(龍天)이 보우하여 반드시 복을 얻으리라.” 하였고, 우리나라의 서약문에는, “조선국은 이제 정묘년 갑진월 경오일에 금국과 서약하노라. 우리 두 나라는 이미 강화를 강정하였으니 이제부터 두 나라가 각각 서약을 준수하여 각각 국경을 보전할 것이다.만일 우리나라가 금국과 원한을 맺어 화친을 배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곧 황천이 화를 내릴 것이요, 만일 금국에서 불량한 마음을 일으켜 화친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또한 황천이 화를 내릴 것이다. 두 나라의 임금이 각각 착한 마음을 지키면 함께 태평을 누리리라.” 하였다. 빈청에 지어 바쳤음. 또 대신들이 금 나라의 여덟 대신들과 사사로이 글을 만들어 서약하였다. 이날 유해 등이 기뻐하며 돌아갔고 홍립도 따라갔는데, 포로가 된 남녀를 돌려보내면서 지나가는 길에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야기문》

○ 병조 판서 이정귀, 호조 판서 김신국, 이조 판서 장유가 연미정(燕尾亭)으로 가서 오랑캐의 차사를 보고 화친의 약조(約條)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평산을 한 발자국도 넘지 않겠다고 맹약하였다. 다음날 철병하여 돌아가면서 형제의 나라로 칭하고, 철병한 뒤에는 다시 압록강 기슭을 넘지 않기로 하였다. 또 우리나라에서, “명 나라는 바로 우리와 부자의 나라로서 2백 년 동안 정성껏 복종하고 섬겼으니, 이제 너희 나라와 화친하였다고 해서 배반할 수는 없다.” 하여, 유해와 용골대(龍骨大) 등이 연일 극력 다투었는데, 유해가 문득 두 손을 마주잡고 말하기를, “조선국은 예의뿐만 아니라 충신(忠信)이 천하에 으뜸이다.외로운 섬(강화도)으로 달아나 숨어 나라의 위태로움이 마치 한 올의 머리카락과 같아, 우리 군사가 만일 한번 걷어차면 개성(開城)과 서울이 문득 잿더미로 화하고 군사의 칼날이 온 나라에 번득일 것이니 나라의 존망이 지척에 있는데도 오히려 신의를 지켜 끝내 명 나라를 배반하지 않으니 진실로 공경할 만하다. 내가 마땅히 이런 뜻을 두 왕자에게 고하겠다.” 하고, 즉시 글을 써서 밤중에 두 왕자에게 한 기병(騎兵)을 달려 보내 물으니, 두 왕자가 답하기를, “조선이 명 나라를 배반하지 않음은 또한 좋은 생각이니 그대로 맡겨두고, 단지 우리와 화친하는 맹약을 굳게 결정만 하고 오라.” 하였다. 유해가 세폐(歲幣)를 글로 써서 보이는데 너무 많았다. 이에 정귀 등 세 사람이 힘써 다투어 세폐를 모두 그만두게 하고, 다만 송례(送禮)라고 일컫고 약간의 물건으로 호군(犒軍)하겠다 하니, 오랑캐의 차사가 그대로 따랐다. 적이 회맹(會盟)하려고 할 때에 흰 말을 죽이고 조선 임금이 또한 맹약에 임하여 삽혈(歃血)하기를 요구하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 인심과 병력(兵力)과 군율(軍律)로써 과연 이 적을 대항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그렇지 못하여 적과 화친을 하고 하늘에 맹서할 때 어찌 직접 나가지 않겠는가. 비록 지금 세상이 그르다 하고 후세가 비평한다 하더라도 내 마땅히 맹약에 임하겠다.” 하니, 정귀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의 전교가 이에 이르시니, 이것은 참으로 회복의 기틀이 되겠습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또한 상중에 계시어 친히 삽혈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오랑캐 차사에게 역설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담당하겠습니다.” 하였다.

○ 임금은 다만 본부(本府 강화부)의 대청(大廳)에서 분향(焚香)만 하고 승지를 시켜 서약문(誓約文)을 읽게 하고, 정귀와 오윤겸(吳允謙)ㆍ김류(金瑬)ㆍ이귀(李貴)ㆍ신경진(申景禛)이 서교(西郊)의 단소(壇所)에 모여 맹약하였다. 그후 유해가 명 나라에 도로 들어가 우리나라가 명 나라를 배반하지 않은 상태를 극론하였다. 《월사집(月沙集)》 ○ 《하담록》에는, “윤방(尹昉)ㆍ오윤겸(吳允謙)ㆍ이성구(李聖求)ㆍ최명길(崔鳴吉) 등이 회맹하였다.” 하였다.

○ 적병이 물러가 안주로 향하는데 정충신(鄭忠信)ㆍ윤숙(尹璹) 등이 진을 치고 시위하니, 적이 먼저 돌격 기병으로 우리 진을 빙 둘러 달리면서 윤숙 등을 깃발 아래에 불러 놓고 묻기를, “화친을 약정하고 물러가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를 상대하느냐?” 하자 윤숙이 답하기를, “국토를 지키는 장수는 지키는 자리를 떠날 수 없으므로 우선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찌 감히 싸움을 하겠는가.” 하니, 오랑캐 추장이 말하기를, “비록 화친이 정해졌다고는 하지만 너희 군사가 매우 성대하니, 두 진이 한번 교전하여 자웅을 결정하여 봄이 어떨까?” 하자, 윤숙이 답하기를, “감히 그럴 수 없다.” 하니, 오랑캐 추장이 놓아 주고 갔다. 《조야기문》

○ 처음에 적이 서흥(瑞興)과 평산에 주둔할 때, 유격 기병대가 잠깐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서 소와 말과 곡식과 여자를 탈취하여 묶어 몰아가고, 어린아이는 활줄로 손바닥을 꿰어 끌어갔다. 이에 평안도 한 도는 보전된 땅이 전혀 없었는데, 다만 성천부(成川府) 한 지방만은 적과의 거리가 매우 먼 까닭에 수령과 대소의 장사(將士)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적은 화친하는 일이 비록 성립되었다 하나 대동강 서쪽은 돌려줄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황해도에서는 노략질이 끊이지 않았으나 관서(關西)에서는 노략질이 심하지 않아 백성들로 하여금 안도(安堵)하도록 하였다. 평양에 잔류한 적 3만 1천 5백 명이 각각 여자를 서넛을 거느리고 농사를 크게 지었는데, 이 달 20일 후에 이르러 관사(官舍)를 불태워 헐고 안주로 철수하여 돌아갔다. 《일월록》

○ 의주에 머무른 적은 그 주민 중에서 독농관(督農官)을 정하여 다섯 가구에 소 한 마리를 주어 농사짓게 하였다. 《일월록》

○ 대마도(對馬島)에서는 우리나라에 오랑캐의 난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총(鳥銃) 3백 자루, 장검(長劍) 3백 자루, 화약 3백 근을 공물로 바치고, 이어 구원하러 나올 것을 청하였다. 《조야기문》 《국조전모(國朝典謨)》

○ 이때 영남 사람 이척연(李惕然)이란 자가 행재(行在)에 들어가 통곡하면서 주화(主和)한 간신을 벨 것을 청하는 소를 세 번 올렸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일월록》

○ 13일에 세자가 전주(全州)를 출발하여 강화로 향하였고, 21일에는 임진(臨津)의 방위군을 해산하였다. 《조야기문》

○ 4월에 강화로 온 각도의 근왕병(勤王兵)을 돌려보내는 한편, 10일에 임금의 행차가 강화를 출발하여 통진(通津)에서 머무르고, 11일에 김포에 머물러 장릉(章陵)에 제사지내고, 12일에 환도하였다. 《일월록》

○ 강화를 승격시켜 유수부로 삼았다.

○ 처음에 모든 성이 무너지고 군사들이 물결처럼 흩어졌는데, 철산(鐵山) 사람 전 현감 정봉수(鄭鳳壽)가 흩어진 병졸을 불러모아 복수하기를 선언하자 사람들이 모두 즐거이 따랐다. 드디어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쳐서 잡았는데, 전후로 목베어 죽인 적의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정봉수를 당상관으로 승격시키고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제수하였다. 응모자들이 더욱 많아져 군사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 있었는데, 의주에 있는 모든 진영의 적이 여러 번 쳐들어 왔다가는 물러가고 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다.여러 적이 합세하여 크게 진격해 들어와 포위하고 공격하여도 여러 날 동안 결말이 나지 않자, 적장 세 사람이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만히 산 뒤로부터 험준한 곳을 점거하고 쳐들어 오려고 하니, 봉수가 깨닫고 미리 명령, 정포(精砲) 30명으로 하여금 풀숲 사이에 매복하게 하여 적의 세 장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각각 열 방의 대포를 쏘게 하니, 세 추장이 과연 말을 타고 바위 위에서 서서 군사를 독려하였다. 30명의 정포가 동시에 모두 쏘자 세 추장이 말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군졸은 크게 무너졌다. 봉수는 적이 다시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군사를 움직이지 말도록 하였는데, 적의 구원병 수천이 5리 밖에 있으므로 봉수가 밤에 경기병(輕騎兵)을 거느리고 습격하니, 적이 놀라 달아났다. 다음날 비로소 영을 내려 목벤 적의 머리를 모으니 수백을 넘었다. 이 수급(首級)을 막하(幕下)의 갑사(甲士) 장초(張超)를 보내 바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봉수에게 가선대부의 작위를 하사하고, 용천 부사(龍川府使)로 승진시켜 본도(本道)의 방어사를 겸하게 하고, 김완(金完) 이하 모든 장수에게 그의 절제(節制)를 받게 하는 동시에 특별히 장초에게 당상관의 계급을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 김경서(金景瑞)가 오랑캐의 진중에 있으면서 여러 추장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가고자 하나, 정봉수란 사람이 있는 한 범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대체로 경서가 용강(龍岡) 사람이므로 봉수를 알고 있었던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일월록》

○ 일찍이 의주 사람 장사준(張士俊)이 용골성을 점거하고 있다가 오랑캐에게 항복하니, 행 부사 정봉수가 그 아우 기수(麒壽)와 김종민(金宗敏) 등과 함께 사준을 유인하여 베어 죽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지키는 한편, 이 소식을 모문룡(毛文龍)의 병영에 알리니, 문룡이 차관(差官)을 보내어 봉수에게 수비도사(守備都司)의 직을 제수하였다.

○ 봉수는 난이 평정된 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임명되었다가 뒤에 벼슬이 경상 병사에 이르렀고, 기수는 강서 현령(江西縣令)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정려(旌閭)되었다.

○ 이에 이르러 오랑캐의 군사가 용골산성을 포위하니, 봉수가 격파하여 쫓아버리고 또 의주까지 추격하여 1백여 명의 머리를 베고 말 50필을 얻었는데, 싸움에 이긴 것을 보고하는 글을 오랑캐 군사에게 빼앗겨서 상달되지 못하였다.

○ 조정에서 봉수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봉수로 하여금 잠깐 피해 적의 대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도록 하니, 봉수가 아뢰기를, “군사를 보충하고 군량만 지속된다면 염려 없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김기종(金起宗)이 계청하기를, “그의 청을 들어주어 군세를 더욱 강화하소서.” 하였다. 《일월록》

○ 의주에 머무른 적병이 수만이나 되었는데, 선천과 곽산 사이를 횡행하며 힘을 합하여 용골산성을 공격하여 여러 번 쳐들어 왔다가 패하면서도 오히려 득실거리면서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용골은 서남쪽으로 20리의 거리에 바다가 있는데, 봉수가 사람을 시켜 모문룡의 병영에 위급함을 고하니, 모문룡이 전후로 끊임없이 배로 몰래 양식과 무기를 원조해 주어 성 안에서는 이에 힘입어 지탱할 수 있었다. 《일월록》

○ 오랑캐가 우리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용병(用兵)한 것을 책망하니 답하기를, “금 나라 군사가 즉시 강을 건너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잔류하여 노략질하므로 본도의 백성들이 분노하여 복수할 것을 생각한 것이니, 이미 명령한 것이 아니고 또한 금지하기도 어렵소.” 하자, 오랑캐가 호송관(護送官) 이홍망(李弘望)과 상의하고 남여 2천여 명을 돌려보내 주었는데, 김진(金搢)ㆍ박유건(朴有建) 등의 부처(夫妻)가 모두 왔다. 김진 등은 머리를 깎아 죄를 논하여 육진(六鎭)에 군사로 충원하였다. 한편 오랑캐 차사는 왜도(倭刀) 5백 자루를 요구하여 가지고 갔다. 《일월록》

○ 적의 군사가 강을 건너갈 때 홍립과 난영(蘭英)은 각기 아들을 인질로 오랑캐에게 두고 본국에 머물러 있게 되었는데, 두 사람의 어머니가 모두 수년 전에 죽었으므로 애통하며 추복(追服)하였다. 이때 오신남(吳信男)은 아들이 없어서 볼모를 보낼 수 없어서 마침내 적을 따라갔다. 우리나라에서 한윤(韓潤)을 본국에 머물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적이 듣지 않았다. 《일월록》

○ 4월에 삼사가 합계하기를, “적이 수일의 도정(道程)에 있는데, 장만(張晩)은 원수(元帥)로 있으면서 먼저 스스로 도망하여 부녀자가 난을 피하듯 깊은 산골에 들어가 숨었으니, 청컨대 관직을 삭탈하고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다. 거듭 아뢰니, “부여(扶餘)에 중도부처(中途付處)하라.”고 명하였다. 《일월록》

○ 기자헌(奇自獻) 등 갑자년에 죽은 사람들을 신원(伸寃)하여 직첩(職牒)을 주고 연루된 집안 사람들도 풀어주었다. 《일월록》

○ 대간이 아뢰기를, “적병이 우리 강토에 깊이 쳐들어와서 화친하는 일로 협박하여 우롱하고 공갈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이것은 홍립 등이 주관하여 꾸미고 적의 흉계에 찬성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또 홍립은 이미 5도도원수(五道都元帥)라 칭하고 적장의 명령을 받들어 방(榜)을 내어 백성들을 꾀었으니, 그 반역의 죄상이 명백히 드러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홍립 등을 목 베어 거리에 효시하여 교만한 오랑캐의 기를 꺾어야만 합니다. 홍립은 바로 적에게 항복한 반신(叛臣)인데도 전하께서는 자리까지 주며 접견하셨으니 국가의 수치와 욕됨이 지극합니다. 나라가 비록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어찌 차마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반신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진창군(晉昌君) 강인(姜䄄)은 품계가 높은 재신(宰臣)으로서 명을 받고 오랑캐에 사신으로 가자 겁이 나 어찌할 바를 몰라 절도 없이 절하고 꿇어앉았을 뿐만 아니라 양식과 말 먹이를 나누어 부담하려 하고 적이 주는 뇌물을 당연한 것처럼 받고 말 앞에 무릎을 꿇고 적의 명령을 듣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 절개를 잃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상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벼슬 명부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다. 송교(松郊) 이공무(李公楘)의 행장

○ 4월에 명 나라 태감(太監) 호량보(胡良輔) 등 네 사람이 혹은 제독이라 일컫고 혹은 총독(摠督)이라 일컬으며 나와서 우리나라가 침략을 당한 실상을 탐문하고, 겸하여 오랑캐의 실정도 캐냈다. 이에 이상길(李尙吉)을 영위사(迎慰使)로 삼아 가도(椵島)로 보냈다.

○ 5월에 권호(權怙)를 명 나라에 보내어 오랑캐가 침입한 전말과 우리나라가 파천하여 위태하고 급박해서 임시 방편으로 화친한 것 등의 실정을 황제에게 아뢰니, 무진년에 회답하는 조서(詔書)를 보내왔는데, 그 대략에, “왕이 아뢴 병란을 당한 실정을 보고 짐은 마음에 심히 측은하게 여긴다. 오랑캐와 통문(通問)을 내왕한 것은 임시 방편으로 싸움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일 뿐 왕의 본뜻은 아닐 것이며, 군신간의 대의(大義)로 말하면 해와 별처럼 밝으니 왕의 충성을 짐이 명백하게 살피고 있다. 더욱 힘써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엄중히 방비하라.” 하였다.

○ 5월에 유해(劉海)가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에 이르러 서울로 가는 길에 군사를 벌려 두고 원창군(原昌君)ㆍ오신남(吳信男)과 함께 가정(家丁) 수백 명을 이끌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에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성문 밖에서 영접케 하였는데, 유해가 임금이 친히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노하자 상이 부득이 접견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유해가 취기를 틈타 오만해져 오랑캐의 예법을 시행하려고 하므로 임금의 얼굴에 입맞추기를 하였다. 임금이 홍립에게 물으니, 홍립이 대답하기를, “오랑캐는 큰 맹약을 한 번 허락하면 평생 배신하지 않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입맞추는 것은 그대로 따를 수 없다.” 하고, 홍립을 시켜서 타이르니, 유해가 그 다음 예법을 청하였다임금과 서로 등을 두드리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다시 홍립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것 또한 하나의 서약입니다.” 하자, 임금이 따랐다.

○ 홍립과 난영이 오랑캐 땅에 있을 때에 유해의 처제를 아내로 삼았는데, 곧 귀영개(貴永介)의 양딸이다. 오랑캐의 추장이 홍립과 난영에게 각각 요동 백성 5백여 명을 주어 부리도록 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유해가 귀국하면서 두 여인을 데리고 오고 부리던 요동 사람들도 모두 따라왔는데, 조정에서 각 도(道)로 나누어 보내니 홍립이 부끄러움과 분노로 병이 나고 심화가 더쳐 드디어 운명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7월 혹은 말하기를, “홍립이 울면서 선묘(先墓)를 하직하고 자결하였다.”고도 한다. 모문룡이 듣고 그 여자를 찾아갔다. 《일월록》 ○ 《병자록》에는 “혹은 홍립의 여러 친족들이 몰래 죽여버렸다고 하기도 한다.” 하였다.

○ 이때 김세렴(金世濂)이 체찰사의 종사관으로 호남에 가 있다가 진중(陣中)에서 어버이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는데, 김육(金堉)이 “분상(奔喪)에 역마를 탄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고 하며 벼슬 추천을 막으니, 사람들이, “세렴이 애당초 자기 말을 가지고 가지 않았으니, 역마를 이용하지 않으면 분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하담록》

○ 계해년(1623) 8월에 수찬 김시양(金時讓)이 의주 부윤에 임명되자, 비변사에 말하기를, “나는 오랫동안 변방에서 귀양살이를 해서 변방의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다. 변방의 성문 밖은 바로 적의 국경이므로 적이 왔음을 알려줄 척후(斥候)와 봉화(烽火)가 없으면 적이 낮에 쳐들어올 경우에는 성문을 미처 닫을 사이가 없고, 밤에 쳐들어올 경우 성위에서 화살 하나도 쏠 사이가 없다. 군졸들을 격려하여 성위에 올라가 밤을 경비하는 것은 곧 변란을 듣고 나서의 일이다. 만일 군졸들에게 항상 성을 경비시킨다면 군졸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 안주(安州)를 지키게 한다면 적이 의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서 성을 지키는 방비를 하여 충분히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조정이 나를 그곳에 보내는 것은 지키게 하려는 것인데, 번연히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부임하였다가 국가가 패망하는 화가 나 때문에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조정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니, 오윤겸(吳允謙)은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그때 최명길이 소를 올리기를, “김시양은 폐조(廢朝) 때에 죄를 얻고 12년 동안 북으로 옮겨갔다가 남으로 이동하며 귀양살이를 하다가 조정에 돌아온 지 겨우 2, 3개월도 안 되었으니, 다시 변방으로 내보내는 것은 합당치 못합니다. 게다가 김은 비록 재주는 있으나 본시 백면서생(白面書生)이니, 변방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을 명하였다. 이민구(李敏求)가 시양에게 말하기를, “만일 허락하였더라도 사실 지킬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뜻은 김을 겁쟁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오랑캐의 군사가 의주에 쳐들어와 수문(水門)을 통해 들어와서 성위로 올라와 군졸들을 죽인 뒤에야 온 성중이 비로소 시양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담록》

○ 이때 홍립의 종 언복(彦卜)이 진중으로부터 강화도로 와서 아뢰기를, “원컨대 포수 1만 명을 시켜 적을 치도록 하면 1진(陣)을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화친을 하면 오랑캐가 다시 침략할 마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싸우지도 않고 화친을 한다면 10년 뒤에 오랑캐가 반드시 다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 말을 들어주지 못하였다. 《병자록》

○ 이때 김상헌(金尙憲) 등은 사신으로 명 나라 서울에 있었는데, 본국이 병란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부(兵部)에 글을 올려 본국을 구원해 줄 것을 청하니, 병부에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가 순무(巡撫)에게 명하여 날랜 병사로 오랑캐의 배후를 곧바로 치도록 하니, 군문(軍門)에서 수병(水兵) 수천 명을 보내 압록강에 이르고 태감(太監) 네 사람이 계속해서 왔다가 얼마 안 되어 패하고 돌아갔다. 《촬요(撮要)》

○ 장수 모문룡이 또 우리나라를 무고하여 아뢰었는데, 그 가운데 두 마음을 먹고 오랑캐를 끌어들였다는 말이 있었다. 사신들이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변명하니, 예부에서는 황제에게 아뢰어 억울함을 씻어주고 자문(咨文)으로 본국에 알렸다.

○ 금 나라가 화친을 의논할 때에 생원 윤형지(尹衡志)자는 경가(景可)이고,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기사년에 별시에 급제하여 승문박사가 되었다. 는 이때 나이 24세였는데, 소를 올려 화친을 배척하면서 화친의 주창자들을 공격하고, 계속해서 윤황(尹煌)과 윤지경(尹知敬)도 또한 간쟁하니, 그들의 말을 모두 시행하지는 못하였으나 성을 버린 자들이 이로 말미암아 법의 처단을 받아, 공론이 통쾌하게 여기고 이들을 지목하여 삼윤(三尹)의 정기(正氣)라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이때 외구는 한창 강한데 우리나라는 군비가 매우 소홀하였다. 이에 김신국이 헌의하기를, “바야흐로 지금 방비하는 방도는 크게 조처하여 착실하게 원대한 계책을 세우지 않고서는 모두 재물과 힘을 낭비하는 것뿐이며 또한 구차스러울 뿐입니다. 병법(兵法)에 말하기를, ‘주인으로서 손객[客]을 대적하고, 편안한 군사로써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라.’ 하였는데, 이제 변방에서 적의 침입을 알리는 보고가 한 번 이르자 격문을 띄워 남도의 군사를 부르니, 남도의 군사가 미처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은 이미 내지(內地)에 깊숙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하물며 시일은 급박하고 사태는 위급한데, 군사들은 피로하고 말은 병드니 무너지고 흩어지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형세입니다.신의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대장 한 사람에게 명하여 해서(海西 황해도) 지방에 나아가 진을 치고 수초(水草)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곳을 택하여 형편따라 주둔케 하되 굳이 성을 쌓고 책(柵)을 설치할 것은 없습니다. 각도의 군사 5, 6만명을 10번(番)으로 나누어 항상 5, 6천 명에게 3개월씩 지키도록 하면 30개월에 한바퀴 돌게 될 것이고, 2월부터 7월까지는 2, 3천 명을 더 들여보내 농사를 보조하게 하면, 무릇 농가에서 한 사람이 농사지어도 충분히 2, 3인의 식량은 될 수 있으니, 7, 8천명이 기름진 땅에서 농사지으면 2만 명의 1년 식량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봄에는 농사 일을 시키고 여가에는 전쟁을 가르쳐, 5, 6천 명을 늘 주둔지에 있게 하여 오직 무술을 연습하고 무기를 수선하는 것을 일로 삼아 교대로 훈련시키면, 3년 안으로 5, 6만 명이 모두 쓸 만한 군사가 될 것입니다. 또 그 식량이 2만 명의 양식을 충분히 댈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서 힘을 헤아려 군사를 늘여서 옛 천경(踐更) 제도를 본뜬다면, 이는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앉아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급박한 때를 당해서 군사를 출동하고 창황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과는 득실이 천양지차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군사는 평소에 어루만져 기를 수 있고, 양식은 운반하여 오는 수고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험한 산천과 굽은 도로로 군사를 매복시킬 만한 장소와 적을 칠 만한 곳에 이르러서는 장수는 스스로 헤아릴 수 있고 군사들은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니, 또한 병가(兵家)에서 이른바, ‘지세를 이용해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따르지 못하였다. 《염헌집》

○ 무진년(1628)에 오랑캐의 차사 박중남(朴仲男)ㆍ박경룡(朴敬龍)과 따라온 오랑캐 7명이 오랑캐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의 대략에, “달아나 돌아간 사람을 찾아서 돌려보낼 것이며, 회령(會寧)에 시장을 개설할지의 여부와 홍립과 난영이 데리고 간 한녀(漢女)를 찾아보고 유무를 상세히 알릴 것이며, 오신남ㆍ김진ㆍ박유건 등을 또한 찾으라.” 하였다. 중남은 바로 종성(鍾城)의 토병(土兵)으로서 오랑캐에 투항한 자이고, 경룡도 우리나라 사람이다.중남 등이 금 나라 서울에 들어가 고하였는데, 3월 26일 진강(鎭江)을 떠나서 4월 3일에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국서(國書)를 바치니, 한(汗 만주 황제의 칭호)이 말하기를, “시장을 개설하는 물화(物貨)는 두 나라가 유무를 교역하는 것이니 빈 손으로 돌아온 것을 어찌 탓하겠는가. 다만 달아나 돌아간 사람들을 찾아 돌려보내는 한 가지 일은 당초에 너희 나라에서 청해서 초출(抄出)한 남녀를 호송한 것인데, 다만 70여 인만 속(贖)바치고 그 나머지는 그냥 돌아가다가 도중에 도망가 잃어버리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찾아간다는 것을 빙자하고 유인하여 도주케 하려는 계책이다. 의주에서 철병한 이후에 도주한 사람을 일일이 돌려보내라고 하였는데, 한 사람도 잡아서 보내지 않았다.따라서 너희 나라가 화친을 맺은 지 몇년 안되어 맹약을 이와 같이 어긴 것이지, 내가 어찌 너희 나라와의 맹약을 어겼겠는가. 예전에 남조(南朝 명 나라)가 우리나라와 더불어 소와 말을 잡아 천지에 제사지내고 돌을 세워 맹약의 글을 새겨두었더니,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불화의 실마리를 만들었으므로 우리 선한(先汗 전 황제)이 하늘에 고하고 군사를 발동하여 광녕(廣寧) 등지의 24위(衛)를 모두 우리 수중에 넣었는데, 이것은 하늘이 우리를 그르다 하지 않고 남조를 그르게 여긴 까닭이다. 남조와 너희 나라가 대국이라는 이름을 믿고 우리를 초개(草芥)와 같이 대접하여 강상(江上)에서 시장을 개설한 날에 관원이 직접 곤장을 잡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쳤다고 하니, 이것이 무슨 일이냐.” 하니, 중남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인민들이 어렵고 가난한 상황은 대인(大人)들이 눈으로 보신 바입니다.하물며 싸움통에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남은 인생들이 어찌 남은 물건이 있겠습니까. 부모 처자를 잃은 자들이 대인께서 속바치는 것을 허락한다는 명을 듣고, 명주와 무명과 종이 등의 물건을 근근히 준비하여 짊어지고 강가에 이르러 속바치고자 하니, 금 나라 사람이 너무 많은 값을 요구하여 한 사람의 몸값으로 소나 말로는 10마리를 요구하고, 명주와 포목과 수은(水銀)과 종이의 값으로는 거의 1천 냥 상당을 요구하므로 속을 바치고자 하던 자들이 낙담 통곡하고 마련할 방책이 없었습니다. 당초에 우리나라에서 백성의 불행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이 일을 추진하였고, 한(汗)께서 속바치는 것을 허락한 것은 또한 인자(仁慈)한 데서 나왔는데, 어찌 우리나라에서 유인하여 도망치게 하였을 리가 있겠습니까 운운.” 하였으나, 한이 끝내 믿지 않고, “너희 나라는 모문룡과 통하여 우리를 침범할 계책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미 강 가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을 허락하고서 무엇 때문에 회령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을 주저하는가.” 하였다.

○ 임금이 가만히 비변사에 물으니, 우의정 김류(金瑬)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이와 같은 큰 논의에 영상 신흠(申欽)과 좌상 오윤겸(吳允謙)이 병으로 나오지 못하므로 이경직(李景稷)을 시켜 가서 물어보게 하였더니, 영상은 병이 중하고, 좌상은 말하기를, ‘우리 백성이 불행하게도 잡혀갔다가 죽음을 무릎쓰고 도망쳐 돌아온 것인데, 이제 또 잡아 보냈다가 만일 죽음을 당한다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차마 할 수 없는 바일 뿐만 아니라 후세가 장차 또한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따라서 이는 비록 큰 화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행할 수 없다. 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보낼 사람들이 혹 죽지 않을 수도 있고, 오랑캐들은 이익을 중히 여기니 우리가 만일 많은 재물로써 속바치기를 요구하면 저 포로를 분배받은 자들이 그 재물을 탐내 반드시 죽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과연 죽이지 않는다면 화를 누그러뜨리고 사람도 보전할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무방하고 그 수치와 욕됨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신은 늙고 병들어 아침 저녁으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포로가 된 사람을 찾아 오는 일에 대하여 갑자기 질문을 받으니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다른 사람의 의논대로 정문익(鄭文翼)이 한(汗)과 약정(約定)을 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것을 기다려서 조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 이조 판서 장유(張維)가 상차하여 간쟁(諫爭)하기를, “나라가 나라가 되는 것은 백성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니, 백성을 버리고 나라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평원군(平原君)은 일개 공자(公子)로되 위제(魏齊)를 자기 집에 숨겨두고 진(秦) 나라에 붙들려 가서도 오히려 진왕의 말에 따르지 않고 위제를 내보내지 않았는데, 하물며 당당한 국가로서 어찌 차마 저 추한 오랑캐의 한 마디 말에 가벼이 우리 백성들을 호랑이 입에 갖다 바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다만 한두 사람을 보낸다 하더라도 천백 명을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이로써 민심을 잃게 되면 국가의 패망이 어찌 오랑캐 군사의 침범을 기다리겠습니까. 운운.” 하였다.

○ 이때에 오신남(吳信男)은 옥에 갇혀 있었는데 옥에서 나와 박중남 등 오랑캐의 차사를 만나보게 하였더니, 중남은 인사말 이외에 따로 다른 말이 없었고 신남은 집이 먼 시골에 있어서 곧바로 와서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중남이 은 20냥을 주면서 한(汗)이 보낸 것이라고 말하였다.

○ 이란(李灤)을 잡아 왕명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과 오랑캐 나라에 사신을 갔을 때, 행동이 비루하고 어그러져 저들에게 수모를 받은 것과 또 사사로이 당녀(唐女)를 산 죄를 국문하였다. 금부에서 아뢰기를, “이란의 죄는 우리나라에서 따르기 어려운 오랑캐의 청을 제 멋대로 허락하여 막대한 불화의 실마리를 열어 나라를 욕되게 하고 일을 그르친 것입니다.” 하니, 그날로 형을 집행하였다.

○ 이때에 이귀(李貴)가 비밀리 아뢰기를, “조속히 도망한 사람을 돌려보내라는 청을 따라 눈 앞에 닥친 화를 늦추소서.” 하니, 장유가 상차하여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되는 여섯 가지 사유를 논하고, 주서 강유(姜瑜)가 소를 올려 이귀가 망녕되게 말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아 말을 못하게 한 죄를 물리치기를 청하였다. 오윤겸의 상차의 대략에, “병들어 혼미하던 중에 경솔하게 대답하였는데, 장유의 상차를 보니 명백하고 바르며, 또 강유의 상소를 보니 놀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신이 거의 나라 일을 그르칠 뻔했으니,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전후에 상하로 지은 죄는 모두 나라를 위해서요, 사사로움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근심하지 않는 바를 근심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 바를 말하여 매양 눈 앞의 일만 우선 해결하려는 자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아 왔습니다. 따라서 시배(時輩)들은 곧 공신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공을 세우는 미끼를 삼고 있어, 늙은 이 몸은 실로 요즘 사람들이 출세하는 기화(奇貨)가 되니, 죽은 중[僧]으로 매질을 연습한다는 속담이 바로 지금의 저의 처지라 하겠습니다. 강유는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시론(時論)에 영합하여 붙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교할 것이 없고, 이목(李楘)은 신을 배척하여 효시(梟示)하자고 한 것이 두 번이고 귀양보내자고 한 것이 한 번인데, 이제 또 강유의 의논을 칭찬하고 신이 일을 그르친다고 말하는데, 전하의 유시(諭示)가 비록 간절하나 어찌 감히 출사(出仕)하여 벼슬자리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 정경세(鄭經世)가 올린 차자의 대략에, “붙잡혔다가 도망온 사람을 돌려보내는 데 대한 의견이 조정에 가득 찼는데, 그 말들이 서로 득실은 있으나 끝내 일정하여 믿을 만한 계책은 없습니다. 조정의 의논은 임시 방편으로 우선 눈 앞의 화를 누그러뜨리려고 하나 천리(天理)를 어기고 인정(人情)을 거스르는 것이니, 눈 앞의 화를 반드시 누그러뜨릴 수 없을 것이며,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른 것을 지키자는 의논에 이르러서는 이치는 곧고 기운은 씩씩하여, 장유가 말한 바 여섯 가지의 난점 같은 것은 사정을 극진히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또한 어떠한 계책을 써서 뒷수습을 잘 하느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귀가 겁을 내어 부르짖으며 그만 두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군사도 없고 양식도 없고 군비도 비어, 해서(海西 황해도)와 관서(關西 평안도)가 한결같이 공허한데, 불행히도 적이 침입하여 온다면 전혀 방비할 도리가 없으니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겁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무진년 8월에 회답사(回答使) 정문익(鄭文翼)과 박난영(朴蘭英)을 오랑캐에게 보냈다. 한(汗)이 잔치를 베풀어 예물 목록을 받고는 예물로 가져온 장검[長劍]을 취하여 칼집에서 뽑아보고 자못 아끼고 좋아하는 빛이 있었다. 서로 돌려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번 예물 목록은 전날과는 다르니 조선의 진실한 뜻을 가히 알겠다.” 하였다. 문익 등이 도망해 왔던 사람 5명을 바치며 아뢰기를, “새나 짐승도 또한 그 둥지를 그리워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고향 땅을 생각하여 연연하지 않겠습니까.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쳐 돌아온 것은 실로 인정과 도리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웃 나라와 친선하는 대의(大義)로 용단을 내려 돌려보내니 측은히 여기고 가슴아픈 생각을 스스로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한이 이르기를, “서로 친선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다시 속바치고 돌아갈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드디어 청포(靑布) 3백 필로 속바치고, 9월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은 우선 그만두도록 허락하였다.

○ 원(元)의 예물 목록은 인삼 1백 근ㆍ초피(貂皮) 20벌이요, 별도의 예물 목록은 인삼 3백 근ㆍ초피 40벌이었다. 별도의 예물 목록은 돌려보내는 인구가 적은 까닭에 그 뜻에 사례한 것이다.

○ 10월에 문익 등이 돌아오자 품계를 뛰어 올려 공홍 감사(公洪監司)에 제수하였다.

○ 한(汗)은 사람됨이 사나운 기색이 용모에 나타났지만 침착하고 신중하며 말이 적고 행동이 또한 무게가 있었다. 두 눈은 내리떠서 보통 때에는 작고 가는 듯하였으나 간혹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볼 때에는 광채가 번쩍거렸다. 한은 무엇보다도 뜻 밖에 사람을 달래고 어루만지는 것을 능사로 삼아 위 아래가 간격이 없었으며, 하늘을 섬기는 것을 가장 삼가서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정사도 반드시 하늘을 가리켜 증명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매양 누루하치를 추모하여 항상 말하기를, “전한(前汗), 전한.” 하고, 간혹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전한이 만일 살아 계셨다면 너희 나라 사람을 대하는 것도 반드시 이와 같이 구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달아나온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위 아래가 서로 버티고 조야가 어지럽게 다투고 힐난하여 오래도록 결정하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한이 두세 명의 왕과 더불어 한두 마디 말로 결정을 보았다. 비록 문질(文質)이 같지 않고 청탁(淸濁)이 서로 현격하다 하더라도 번쇄(煩瑣)하고 간략함이 이와 같이 달랐다.

○ 무진년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를 위하여 요(遼)를 쳐서 치욕을 씻을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오랑캐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이에 김신국이 그것이 옳지 못함을 굳게 간하기를, “무릇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다른 사람을 협박하는 것은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하물며 오랑캐는 본성이 사납고 억세니, 왜를 두려워하여 우리 말을 순순히 듣고만 있겠습니까. 반드시 장차 우리에게 왜를 치러가는 길을 빌려 그 분을 풀고자 할 것이니, 우리가 장차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남쪽의 왜와 북쪽의 오랑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아무 상관도 없는데 이제 확실하지도 않은 말로 말미암아 경솔히 그 노여움을 돋우어 두 오랑캐로 하여금 서로 싸우도록 하면 우리가 곧 그 사이에 끼어 있게 될 것이니, 신은 국가가 장차 어찌 될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깊이 그렇겠다고 여겨 드디어 그 의논을 중지하였다. 《염헌집》

○ 경오년(1630) 1월에 의주에서 보고하기를, “오랑캐가 12월에 심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계주(薊州) 등의 지방을 함락하고 통주(通州)를 포위하였다 운운.” 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명 나라에 대하여 위문하는 예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신들은 청하기를, “먼저 선전관과 역관을 가도(椵島)에 보내어 급속히 탐문하여 본 뒤에 분문사(奔問使)를 차출하소서.” 하였다. 심기원(沈器遠)이 소를 올려 “풍정례(豐呈禮)를 빨리 중지하고, 또 분위사(奔慰使)를 보내고 정전(正殿)에 거처하는 것을 피하고 음악을 철폐하소서.” 하였고, 병조 판서 이귀가 군사를 달려 보내 난을 구원할 것을 계청하였다. 얼마 있다가 서쪽에서 들어온 보고에 “한(汗)이 통주에 깊이 쳐들어갔는데 명 나라의 대군이 앞을 차단하고 뒤를 끊었으며 서달(西㺚)이 명 나라와 마음을 합하여 적을 속여 희봉(喜峰) 어귀 아래로 유인하여 수문(水門)에 반쯤 들어왔을 때에 협격(挾擊)하여 크게 무찌르고 남은 군졸들을 포위하였다.” 하였다.

○ 3월에 접반사(接伴使) 진계성(陳繼盛)이 급히 아뢰기를, “황제가 친히 성위에 임하여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적의 육왕자(六王子)와 이름난 장수 한 사람을 사로잡고 수만 명을 베고 사로잡으니, 적이 삼태영(三台營)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고 하였다.

○ 박중남 등이 청포(靑布) 1만 8천여 통(桶)을 무역하여 가지고 가다가 의주에 이르러 유흥치(劉興治)에게 빼앗겨 빈 손으로 돌아갔다. 6월에 용골대(龍骨大)가 청포를 운반해 가는 일로 3천 수백 명을 인솔하고 왔는데, 그 중 3천 명은 의주에 건너편에 머물게 하고, 용골대가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병사 유비(柳斐)와 서로 접견하였다. 유비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뜻을 말하니, 용골대가 성을 내며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병사를 찌르는 시늉을 하고 이내 땅을 서너 차례 치자 따라온 오랑캐가 별안간 튀어나와 병사를 결박하였다. 이어서 중군 군관(中軍軍官)이 즉시 글을 써서 의주에 있는 오랑캐의 처소에 보내는 한편 병사에게, “서울에 가서 청포를 찾아가려고 하니 당장 쇄마(刷馬) 5백여 필을 준비하라.” 하였다. 이에 병사가 치계(馳啓)하니, 전교하기를,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耈)는 금 나라 사람의 삼 값과 청포를 미리 준비하지 못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는 데 이르렀으니 일이 지극히 괘씸하다. 금의 차사가 돌아간 뒤에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시켰다. 《응천일기(凝川日記)》

[주-D001] 첨방군(添防軍) :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남도와 북도 출신의 군사로 나누어 세웠는데, 남도의 군사를 첨방군(添防軍)이라 한다. 즉 첨가하기 위하여 남도에서 온 군사라는 뜻이다.[주-D002] 간성(干城) : 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성으로 나라를 방비하는 직책이라는 뜻인데, 장군은 곧 나라의 간성과 같다는 것이다.[주-D003] 죄기(罪己)의 교서 : 나라가 위급한 때에 임금이 자기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온 국민에게 사과함으로써 민심을 한층 더 분발시키는 교서.[주-D004] 관중(管仲)은 …… 어질다 : 제(齊) 나라에 난이 있어 공자(公子)들이 망명할 때에 관중이 공자 규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도망갔다가 뒷날 입국하였는데, 환공과 공자 규가 서로 먼저 들어오기를 다투다가 규가 패하여 죽었는데도 관중이 따라 죽지 않고 뒤에 환공에게 벼슬하였다. 그러나 관중은 후일 천하를 안정시킨 공이 있으므로 공자가 그를 칭찬하였다.[주-D005] 천경(踐更) : 옛날 병역 제도의 일종인데, 기간을 정하여 윤번제로 하는 것이다.[주-D006] 평원군(平原君)은 …… 않았는데 : 진(秦) 나라 재상 범수(范睢)가 위(魏) 나라 재상 위제에게 전날에 당한 곤욕을 복수하려고 위 나라에 협박하여 위제의 머리를 베어 오라고 하자, 위제가 도망쳐 조(趙) 나라로 가서 평원군에게 의탁하였으므로 진 나라에서 평원군을 오라고 청해 협박하였다.[주-D007] 문질(文質)이 …… 현격하다 : 우리나라는 문(文)을 숭상하고, 청 나라는 질박(質朴)을 숭상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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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 제17권 / 묘지(墓誌)

계곡 장 상공의 묘지〔谿谷張相公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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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崇禎) 무인년(1638, 인조16) 3월 17일에 우상(右相) 장공(張公)이 졸하였다. 그해 5월에 안산(安山) 월곡촌(月谷村)에 있는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갑오년(1654, 효종5)에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김씨(金氏)가 졸하여 공의 묘소 오른쪽에 장사 지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뒤인 갑진년(1664, 현종5)에 또다시 안산(安山) 신산리(新山里)에 새로이 유향(酉向)의 언덕을 묏자리로 잡아 두 분을 천장(遷葬)하였는데, 맏아들인 선징(善澂)이 나 두경(斗卿)에게 묘지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은 덕수인(德水人)으로, 휘는 유(維)이고, 자는 지국(持國)이며, 호는 계곡(谿谷)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시조인 순룡(舜龍)은 원(元)나라 때 선무장군(宣武將軍) 진변 총관(鎭邊摠管)으로서 제국공주(齊國公主)를 따라 고려로 나왔다가 그대로 벼슬하여 관직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으며, 덕수현(德水縣)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분이 있는데, 휘가 핵(翮)이다. 또 문장에 능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분이 있는데, 휘가 옥(玉)이다. 이분이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임중(任重)은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휘 일(逸)은 목천 현감(木川縣監)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운익(雲翼)은 문장에 능하고 큰 재주가 있어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순충적덕보조 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영의정(領議政)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박숭원(朴崇元)의 딸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

정묘년(1627) 봄에 후금(後金)의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 상께서 강도(江都)로 행행하였는데, 공은 대사성으로서 어가를 수행하였다. 후금의 차인(差人) 유해(劉海)가 나와서 강화를 요청하였는데, 유해는 본시 중국 사람으로서 오랑캐에 투항한 자로, 사람됨이 교활하고 또 글을 알았다. 이에 상께서는 공 및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김신국(金藎國), 이경직(李景稷)에게 명하여 함께 연미정(燕尾亭)으로 가서 접빈(接賓)하게 하였다.

유해가 약조(約條) 몇 건을 내놓았는데, 첫 번째 조항이 우리나라로 하여금 중국 조정과 절교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에 공은 큰소리로 거절하였다. 그러자 유해가 말하기를 “옛날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공자(公子) 규(糾)를 죽이자 소홀(召忽)은 죽고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는데, 공자가 관중에 대해 인(仁)하다고 하였다.” 하면서, 이것으로 꾀고 협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역관(譯官)이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공은 일찍이 《사성통해(四聲通解)》를 보았으며, 또한 말뜻을 추측하여 관중과 소홀의 일을 거론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에 곧바로 응답하기를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지만, 신의가 없으면 발붙일 수가 없다.” 하니, 유해가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유해가 굳이 상을 만나 보고자 하였는데, 상께서 어탑(御榻)에 앉아서 그를 만나 보았다. 그러자 유해가 노하여 그 자리에 서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눈으로 한참 동안 째려보았다. 이에 공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유해가 몹시 무례하게 구니, 밖으로 내쫓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유해가 뭇 신하들이 분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예를 행하고서 나갔다. 유해가 또 우리나라로 하여금 주고받는 글에 명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공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사대(事大)하는 도리는 연호보다 막중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이를 한번 잘못하게 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오랑캐들은 군사들이 늙었고 또 피로한 상태이니 필시 이것을 가지고서 다투어 화의(和議)를 깨뜨릴 리는 없습니다. 설령 성사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큰 예법(禮法)이 있는 바는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드디어 공의 말을 써서 기어이 명나라의 연호를 썼다.

강화의 약조가 이미 정해진 뒤에 유해가 상께서 친히 맹세하는 단에 임하기를 청하였는데, 상께서 바야흐로 계운궁(啓運宮)의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이를 걱정스럽게 여겼다. 이에 공이 이경직과 더불어 유해를 찾아가서 극력 다투자, 유해가 이에 따랐으므로 대신을 보내어 맹세하는 단에 임하게 하였다. 그 뒤에 유해가 돌아가 피도(皮島 가도(椵島))에 있으면서 매번 그 일에 대해 말하면서 체모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또 승지 최유해(崔有海)가 일찍이 군문(軍門) 원숭환(袁崇煥)에게 문안하자, 원숭환 역시 그때의 일을 칭찬하면서 공의 안부를 묻고는 서로 만나 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상께서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자 공은 이조 참판으로서 어가를 호종하였다. 9월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어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세 번 차자를 올려 고사하였으나, 상께서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으며, 덕도 있고 행실도 있기에 이와 같이 장려하고 유시하는 것이다.” 하고는, 친히 청탁하는 것을 막고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억누르는 등의 일을 써 주었는데, 이를 벽 위에 붙여 놓았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8년 경오 > 2월 19일 > 최종정보

인조 8년 경오(1630) 2월 19일(기사) 흐림

08-02-19[08] 진부총 접반사 이석달이 노병이 황성을 포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일 등을 보고하는 장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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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총 접반사(陳副摠接伴使) 이석달(李碩達)이 가도(椵島)에 있으면서 올린 장계는, “오늘 당인(唐人) 최지고(崔志高)가 등주(登州)에서 나와서 부총에게 말하기를, ‘지난 11월에 노병(奴兵)이 황성(皇城)을 포위한 지 40여 일 되었는데, 여러 도(道)의 병마(兵馬)가 다 모여서 12월 29일에 황제가 성 위에 친히 거둥하고 여러 장수들은 노구교(蘆口橋)에서 크게 싸워서 여섯째 왕자와 이름난 장수 한 명을 생포하고 수만 급(級)의 적병을 베거나 사로잡았습니다. 적이 삼소영(三召營)으로 물러가서 주둔하였는데, 서달(西㺚)이 그 뒤를 막고 천병(天兵)은 앞을 막아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1월 1일에 큰 잔치를 베풀어 호궤(犒饋)하고 상을 주었습니다. 이번 싸움에는 총병(摠兵) 만계(滿桂), 조대수(祖大壽)의 공이 제일이고 유흥조(劉興祚)가 그 다음입니다. 원 경략(袁經略)은 오랑캐가 관문 안으로 들어오도록 놓아두었다 하여 나수(拿囚)되어 있고 각로(閣老) 손승종(孫承宗)이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니, 섬에 있는 여러 장수치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신도 아문에 나아가서 하례를 드리고 승전(勝戰)한 문보(文報)를 보자고 청하니, 부총이 답하기를, ‘문보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 사람의 말이 빈말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는 일이었는데, 입계하였다.

- 《난중잡록》에 의거함 -

유흥조는 유해(劉海)의 개명한 이름이다. 가도에서 중원에 들어가서 부총의 직함을 받았다.

- 《난중잡록》에 의거함 -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태 (역) | 2005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7년 기사 > 2월 21일 > 최종정보

인조 7년 기사(1629) 2월 21일(정미) 맑음

07-02-21[34] 자정전에서 주강을 행할 때 동지사 장유 등이 입시하여 《서전》을 진강한 뒤 모문룡의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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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유가 나와 아뢰기를,

“서변(西邊)의 일이 본래 어렵고 위태롭습니다. 게다가 또 사포(蛇浦)에서 뜻밖의 변고를 만났어도 우리나라의 병력이 부족하고 편치 않은 형편이라 도와줄 길이 없어 애석해하면서 그 변고를 그냥 보고만 있으니, 어찌 이처럼 걱정스럽고 절박한 일이 있겠습니까. 적병(賊兵)이 현재 철수하여 돌아가지 않았는데, 일이 지난 뒤에 모 장군(毛將軍)이 혹 평소의 나쁜 마음으로 이것을 트집하여 말하여 혹시 뜻밖의 일을 일으킬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이 오는 것은 알지 못하였지만 제때 통보해 주지 않으면 훗날 트집하여 말할 듯하다. 의주(義州)의 방비가 꼼꼼하지 못하여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이고, 황박(黃珀)의 일과 관련하여 1대(隊)의 병마(兵馬)와 전마(戰馬)를 가지고 간 일을 모 장군이 안다면 필시 트집하여 말할 것이니 불행한 일이다. 이경직(李景稷)을 이미 들여보냈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인사(人事)를 닦아야 할 듯한데 방비하는 일을 묘당에서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악인(惡人)의 마음은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춘신사(春信使)의 행차가 겨우 압록강을 건넜는데 의외의 변고가 생겼으니 평소의 의심하는 마음을 헤아려 보면 이끌고 오리라고 여겨집니다.”

하고, 장유가 아뢰기를,

“말을 해야 모양새가 좋을 듯하니, 침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말〔馬〕에 관한 일이 만약 모 장군의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좋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경기 수영(水營)을 교동(喬桐)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이 편리하고 좋을 듯하지만 호령(號令)은 한곳에서 나와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경기 수사(京畿水使)와 강도 유수(江都留守)가 서로의 병력에게 호령하지 않는 것으로 정탈(定奪)해야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화 유수가 육군(陸軍)을 거느리고 경기 수사가 수군(水軍)을 거느리니 상대방의 병력을 절제(節制)하는 일이 없을 듯하다. 적병이 수로(水路)로 오면 수사가 맡을 것이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수사의 힘이 아주 약하여 강화에서 책응(策應)하지 않는다면 그 형세가 고단하니, 수로로 적이 올 때 전적으로 수사에게 책임지우고 강화 유수가 응원하지 않는다면 힘을 얻기가 어려우니 외부에서도 이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이 쳐들어오면 강화에서 군대를 일으켜 막되, 수사가 수군을 보급하여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예부터 수군의 장수, 육군의 장수가 있는데 유수가 - 몇 자 원문 빠짐 - 어찌 더욱 좋은 일이 있겠는가. 매우 급작스러운 - 몇 자 원문 빠짐 - 조처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사면이 모두 물로 둘러싸여 있는데, 적이 육지에 내린다면 인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만약 수로를 막는다면 적이 반드시 쳐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대가 낮고 습한 곳에서는 육지에 내리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들어오고자 한다면 육지에 내리지 못할 곳이 없지만 힘이 부족해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내리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물살이 사납고 빨라 배를 부리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장유가 아뢰기를,

“물살의 완급(緩急)에 대해 객군(客軍)이 익숙하지 못하니 배를 운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강화에 대포(大砲)를 많이 설치해 두고 기구(器具)를 미리 갖추어 두면 만일 적의 변고가 있을 경우 적의 배를 부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육지에 무리 없이 내린다면 방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장유가 아뢰기를,

“나라의 보장(保障)은 단지 강화뿐인데, 강화도 지금 완전한 지역이 아니니,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 장군이 배에 군병을 많이 실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우리나라 배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을 실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말을 타고 갑옷을 입고서 다른 나라를 도모할 수 있겠지만, 왜(倭)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였다. 원황이 아뢰기를,

“도독의 말이 선천(宣川)에 있는데 적에게 함락되어 빼앗겨서 6, 7필만이 남아 있습니다. 특출한 장관(將官)만이 겨우 말을 가지고 있고 군사들은 말이 없으며 섬 안에서는 말을 기를 수 없으니, 틀림없이 3000필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3000필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항복한 달자(㺚子)의 말이 요사이 들어왔다고 한다.”

하자, 원황이 아뢰기를,

“섬사람들의 말도 사실과 어긋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섬에는 앞을 가로막는 큰 산이 없어서 모두 한눈에 보이는가?”

하니, 원황이 아뢰기를,

“산언덕에서는 말을 달릴 수 있지만 위아래는 남부(南部)의 동구(洞口)만도 못합니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삼문(三門) 바깥만도 못합니까?”

하니, 원황이 아뢰기를,

“모화관 규모의 반만도 못하고 그 산기슭의 반이 무악재만도 못하여 사면에 사람과 말이 들어갈 만한 곳이 없습니다. 소신이 연위사(延慰使)로 갑자년(1624, 인조 2)에 들어갔는데, 이상길(李尙吉)이 신에게 20만 군(軍) 운운(云云)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틀립니다. 세 사람이 함께 들어가서 보았는데, 사포(蛇浦)의 길이는 어의동(於義洞)만 한데 겨우 1000여 가(家)이고 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그 내부의 인구는 2, 3만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남이공(南以恭)이 왕래한 뒤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생각이 맞습니다.’ 하였습니다. 소신의 생각에는 1만 명을 넘지 않고 말은 분명히 없습니다. 사신 중에 신만큼 그곳에 오래 머문 자는 없습니다. 섬 안에서 배를 많이 만들고 있었는데도, 소신이 타고 간 배를 굳이 사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배가 없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여기기 때문에 힘을 다해 배를 마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호 군영(胡軍營)의 군병이 나오면서 - 몇 자 원문 빠짐 - 2, 3백 척이 한 마을에 정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본래 악하여 차□□(車□□)와 심집(沈諿)이 왕래한 뒤에 유독 의심하였습니다. 그가 - 몇 자 원문 빠짐 - 부귀(富貴)해지기를 도모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한다면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 할거(割據)할 수 있는 형세입니까?”

하자, 정경세가 아뢰기를,

“할거는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원황이 아뢰기를,

“깊이 들어온다면 행상(行商)이 중원(中原)과 접촉할 수 없으므로 깊이 들어오는 것을 탄핵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깊이 들어오지는 못한다. 우리나라를 비록 완전히 차지하지는 못하더라도 할거할 수는 있지만, 형세상 깊이 들어오지는 못한다.”

하였다. 원황이 아뢰기를,

“그 사람됨을 살펴보면 매양 속임수만 쓰는데 실제로 웅장하고 훌륭한 일을 하기에는 지혜가 모자랍니다. 선천(宣川)에서는 맹효남(孟孝男)이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지만, 철산(鐵山)과 의주(義州)의 수령들은 형편없어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습니다. 철산 부사(鐵山府使)의 장계(狀啓)에, ‘모 도독에게 애걸하여 우리나라의 굶주린 백성들을 간신히 구제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평안도의 물력은 15개 읍만이 온전하게 왕성하니, 피잡곡(皮雜穀) 6, 7십 석을 나누어 주어서 힘을 다해 경작하게 한다면 국가에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지난해 들여보낸 소가 1필인데 단지 6, 7필만 남아 있고 수척하여 볼품없어서, 올해 농사철에 밭갈이에 쓸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구제책을 쓰지 않는다면 위급한 상황을 구해 낼 수 없습니다. 소신이 김시양(金時讓)을 전송하러 갔다가 그의 집에서 장유(張維)와 장신(張紳)을 만났습니다. 장유가 말하기를, ‘감사(監司)가 청천(淸川) 이북에 머문 뒤에야 일을 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신도 매우 맞다고 생각합니다. 관서를 어쩔 수 없는 지역이라고 방치하고 있는데 청천 이북의 백성들을 모쪼록 돌보아 구휼해 준 뒤에야 거의 다스려질 것입니다. 종사관 남두첨(南斗瞻)이 둔전을 경작하는 일로 내려갔는데, 둔전 경작에는 아랫사람들이 쓰는 비용이 틀림없이 많을 것이니 피잡곡 수만 석을 수합하더라도 장차 어느 곳에 사용하겠습니까. 그들 자신의 힘으로 경작할 수 있게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일 년간 청천 이북의 백성들을 돌보아 구휼해 준다면 아마도 일이 성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올해 농사를 짓지 못한다면 생활할 수 없고 그 지역이 빈 땅으로 되어버리면 국가가 어떻게 지탱하겠습니까. 반드시 이달 내에 구제해야 백성들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둔전의 일은 진휼을 겸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농사지을 동안 먹을 식량과 경작할 때 부리는 소를 체부(體府)에서 마련하도록 해 달라는 그의 말이 좋은 것 같다. 미곡(米穀)을 넉넉히 보내 주도록 비국에 말하라.”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청천 이북의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사용할 곳이 없으니, 반드시 농사 때에 미쳐 진휼하여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 지금 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고, 원황이 아뢰기를,

“올해 농사짓는 것은 3월이 지나면 할 일이 없습니다.”

하고, 정경세가 아뢰기를,

“- 몇 자 원문 빠짐 -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체하다가 시일이 지나가 버리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니, 그 지역의 백성들이 - 몇 자 원문 빠짐 - 곤궁해지면 형세상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둔전에서 농사를 짓는 - 몇 자 원문 빠짐 - 서로 돕고 둔전 이외의 지역에서도 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원황이 아뢰기를,

“둔전의 일과 식량을 지급해 주는 일에 대해 둘 다 알맞게 처리하면 매우 좋을 것입니다.”

하고, 정경세가 아뢰기를,

“원황의 말이 착실합니다. 조정에서 불난 것을 구제해 주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듯이 한다면 기일(期日)에 미칠 수 있고, 본도의 곡식을 옮겨 지급해 준다면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원황이 아뢰기를,

“15개 현(縣)은 남아 있는 원곡(元穀)으로 그 백성들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평안도는 다른 도에 비해 가장 부유하니, 그 나머지 고을을 진휼할 수 있는데, 청천 이북의 백성들 가운데 철산, 용천(龍川), 의주가 가장 절박하고 다급합니다.”

하고, 정경세가 아뢰기를,

“적(敵)을 헤아리는 방도는 반드시 그들이 가진 장단점을 알아야만 임기응변할 수 있습니다. 모 도독의 군병이 배를 타고 나오지 말을 타고 나오지는 않을 것이고, 노(虜)는 배가 없고 말 탄 군병이 장점입니다. 모 장군이 보군(步軍)만을 거느리고 할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다른 사람의 경내(境內)에 들어와서도 할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임진년에 왜(倭)가 평양(平壤)에 이르러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서 패한 다음 경상도에서 7년을 주둔하였는데, 모 장군의 군병은 왜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니 할거할 수 없습니다. 왜적(倭賊)이 말하기를, ‘조선은 감당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어제 비록 패했더라도 오늘 다시 병력이 모이니 가장 어렵다.’ 하였는데, 그 말이 맞습니다. 우리나라의 무략(武略)은 싸우지 않고 - 1자 원문 빠짐 - 거스르고 따르는 이치를 조금 알고 있으므로 고립된 지역에서 할거한다면 반드시 복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유해(劉海)가 섬 안에 있을 때에는 모 장군이 영리하여 반드시 속지 않았는데, 금인(金人)이 유해를 보내고 나서는 유해가 그들을 꺼려서 도망쳤다고 여겼습니다. 이번에 온 한(汗)의 글에 이르기를, ‘유해는 여러 번 속이고 이랬다저랬다 태도를 바꿨는데, 처음에는 중원(中原)을 배반하고서 노중(虜中)으로 왔고 또 배반하고서 모 도독의 군영으로 투항하였으니, 비록 이간하는 말을 하더라도 믿지 마십시오.’ 하였습니다. 비국에서는 ‘유해가 배반하고서 왔다.’라고 말한 것은 우리나라를 속이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모 도독과 도모한 일이란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니, 틀림없이 중원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유해가 비록 이간하는 말을 하더라도 믿지 말라.’고 말한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원황의 말을 듣건대, 병마(兵馬)의 힘이 본래 적고 모가(毛哥)가 일찍이 노를 두렵게 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노가 그를 싫어하는 것은 모가를 돕기 때문에 그럴 것이니, 그를 우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해를 보낸 일은 분명 계획을 행하려는 것이니, 올해가 가기 전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문서를 통하는 것은 먼 외부 지역 사이에서 하는 것이지 가까운 내부 지역에서는 하지 않는다.”

하였다. 원황이 아뢰기를,

“모 군영의 사정은 유해가 난리 이전부터 알려 주었는데 마음이 평안할 때는 ‘귀국은 형세상 기미책(羈縻策)을 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때는 이치를 들어 따지면서 말하기를, ‘김기종(金起宗)의 글에 - 3자 원문 빠짐 - 진달(眞㺚) 1000여 명이 - 몇 자 원문 빠짐 - 9월에 전마(戰馬)를 내주어 조련하였는데 아마도 - 몇 자 원문 빠짐 - 도독(都督)의 말을 훔쳐 달아났는데 호란(胡亂) 때에 모두 죽였고 가차도(加次島)에 있던 것도 내몰아 모두 죽게 하였다. 그를 일찍이 후대하여 중원(中原)으로 보내어 머리를 베어 바친 것이 여러 번이다.’ 하였습니다. 소신이 가차도에 있으면서 군대가 나와 바다를 막고 노략질하여 50여 인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원의 형세에 대하여 허위로 알려 주는 것이 풍조가 되어 버렸는데, 모 군영뿐만 아니라 산해관(山海關)에서도 그러하다.”

하였다. 원황이 아뢰기를,

“방종철(方從哲)이 받든 칙명 족자(簇子)에, ‘40만 군병이 한 지역을 제압하고 있어 적이 감히 관외(關外)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권첩(權怗)과 함께 적의 군대가 바다를 뒤덮었다가 다음날 가도(椵島)에서 다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형편없는 허위 보고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중원에서 지급해 준 은(銀)이 한 번에 수천 냥에 이르고 전(錢)이 10여 바리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보다 심한 허위가 없습니다. 모 장군은 실로 흉모(凶謀)만을 일삼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그는 큰일을 도모할 만한 사람이 아니고 간사(奸詐)하게 남을 속이는 것이 가장 잘하는 바로 털끝만큼도 큰일을 도모한 일이 없습니다. 제가 갑자년에 섬에 들어갔고 또 접반사로 들어갔는데 그 군대의 태반이 살해되어 아문(衙門) 근처에 항상 머무는 자가 3, 4백 명이니, 철산 백성의 숫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가도에 있는 한두 칸짜리 여염집은 1000여 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식(全湜)의 소견만이 작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3, 4만이라고 하였는데, 결코 그 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 여러 섬에 있는 군병을 한곳으로 모아도 1, 2천을 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금수(禽獸)와 같아 바위틈으로 숨어 들어가 버려 군사가 가장 적은 상태이고 마군(馬軍)은 북도(北道)를 지킬 때 보았는데 형편없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의지할 것도 없지만 모문룡의 형세로 살펴보건대 할거에 대한 우려는 없습니다. 다만 노(虜)와 교통(交通)할까 걱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가 현재 침략하여 왔으니 그가 교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원황이 아뢰기를,

“노가 침략한 것은 스스로 한 것이지 어찌 다른 사람을 위해 침략하여 올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윤지가 아뢰기를,

“삼가 평안 감사의 장계를 보건대, 적병이 나온 것은 호송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군대의 수가 얼마인지는 변신(邊臣)도 자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 도독에게 보내는 자문(咨文)에서 호송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야 할 듯합니다. 감사가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혹 군병이 호송하는 것이 아니라면 호송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상황을 모르고서 한 것이니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하자, 장유가 아뢰기를,

“자문에 결코 호송을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주-D001] 1자 원문 빠짐 : 원문은 ‘一字缺 之’인데, ‘之’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주-D002] 몇 자 원문 빠짐 : 원문은 ‘數字缺 之人’인데, ‘之人’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주-D003] 몇 자 원문 빠짐 : 원문은 ‘數字缺 聖意’인데, ‘聖意’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주-D004] 몇 자 원문 빠짐 : 원문은 ‘節制 數字缺’인데, ‘節制’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주-D005] 몇 자 원문 빠짐 : 원문은 ‘數字缺 水軍’인데, ‘水軍’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주-D006] 몇 자 원문 빠짐 : 원문은 ‘依恃 數字缺 國’인데, ‘依恃’와 ‘國’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주-D007] 지난해 …… 1필인데 : 원문은 ‘前年入送之牛一匹’인데, 오자나 탈자가 있는 듯하다.[주-D008] 몇 자 원문 빠짐 : 원문은 ‘在 數字缺 耶’인데, ‘在’와 ‘耶’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주-D009] 몇 자 원문 빠짐 : 원문은 ‘其形 數字缺 人’인데, ‘其形’과 ‘人’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주-D010] 상이 이르기를 독서당(讀書堂) : 원문은 ‘數字缺 堂’인데, 《인조실록》 7년 2월 21일 기사에 ‘上謂張維曰 書堂被選之人’이라 한 것에 근거하여 보충 번역하였다.[주-D011] 엄밀하게 …… 뽑으라 : 원문은 ‘極擇 數字缺’인데, 《인조실록》 7년 2월 21일 기사에 ‘極擇抄選’이라 한 것에 근거하여 보충 번역하였다.[주-D012] 몇 자 원문 빠짐 : 원문은 ‘非開 數字缺 也’인데, ‘非開’와 ‘也’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주-D013] 원문 빠짐 : 원문은 ‘缺 養匡裕’인데, ‘養匡裕’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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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7년 기사(1629) 3월 27일(계미)

07-03-27[01] 상이 조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고 그 내용으로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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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순(舜)이 임금이요 우(禹)가 신하였으면서도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 경계하였으니, 조정의 신하들도 그것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니, 동경연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순임금 조정에서 토론하고 심의하던 정치는 천고에 따라갈 수 없지만, 만약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임금과 신하 모두가 서로 권면한다면 삼대 시절의 정치도 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특진관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신이 막 가도(椵島)에서 왔는데, 모문룡(毛文龍)이 우리 나라를 의심하는 것이 우리가 그를 의심하는 것보다 더하였습니다. 모문룡의 군세(軍勢)가 너무나 피폐해져서 그의 뜻은 다만 섬 안에 편안히 앉아서 부귀나 누리고 싶을 뿐이지 딴 생각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짓도 조금도 볼 만한 것은 없고 군대 수를 과장하였으며, 많은 부녀자를 거느리고 살면서 번번이 거짓 공로나 상신하고 있었습니다. 피란 나온 요민(遼民)들도 달리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와 붙어 있는 것이지 마음속으로는 심복을 않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대를 조련할 때도 호령에 법도가 없어서 사졸들이 혹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그의 얼굴을 때리는데, 그러한 군율(軍律)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이 보기에는 그를 걱정할 것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유걸(毛有傑)이 관(舘)에 앉아서 분육(分肉)할 때 보았더니, 진달(眞㺚)은 그 수가 매우 적어 몇백 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들 병력과 장비를 볼 때 그런대로 쓸 만하던가?”

하니, 경직이 아뢰기를,

“쓸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劉海)의 정상은 어떠하던가?”

하니, 경직이 아뢰기를,

“유해가 전일 여기 왔을 때 말하기를 ‘내가 오랑캐들 속에 묻혀 있는 것은 늙은 어머니 때문이다.’고 하더니, 이번에 만났을 때는 술을 마시고 나서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을 보면 그가 명 나라로 돌아간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왜사(倭使)가 나왔는데 문서를 보지 않아 사정이 어떠한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가 기어이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한다니 그를 끝까지 막지 못한다면 도리어 국가 체면이 손상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행한 전례가 있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막아야 할 것이다.”

하니, 경직이 아뢰기를,

“이른바 현방(玄方)이란 자는 바로 종방(宗方)입니다. 그가 스스로 서울로 올라오고 싶어하는 것은 무슨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 관백(關白)은 틀림없이 모르는 사실일 것입니다.”

하였다. 시독관 최유해(崔有海)가 아뢰기를,

“남이흥(南以興)ㆍ송도남(宋圖南)이 나랏일로 죽었는데, 그들에게 모두 자손이 있으니 녹용(錄用)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옳은 말이다. 해조에 말하라.”

하였다. 참찬관 유백증이 아뢰기를,

“근래에 인심이 극도로 흉악하고 기강도 풀릴대로 풀려 이대로 가다가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를 것인데도 나랏일을 담당할 자가 없습니다. 공신들은 사류(士類)들에게 미루고 사류들은 공신들에게 미루고만 있으니, 이는 상께서 항상 붕당인가를 의심하시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그 자취가 있다는 오해를 받을까 염려하여 감히 할 말을 다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경연에서 하교하시는 것을 보면 어떠한 각오를 지닌 듯한 기색이 상당히 보이고 있습니다. 나랏일을 담당해야 할 사람은 오직 대신이므로 상께서는 반드시 대신에게 책임을 지워 일을 하도록 하시고 대신들 역시 누가 뭐라든지 현자는 나오게 하고 불초자는 내보내어 풍토를 한번 진작시켜야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전】 34 집 322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인사-관리(管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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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저집 제34권 / 행장(行狀) 1수(一首)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시(諡) 문충(文忠) 이공(李公)의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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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本貫) 연안부(延安府)

증조(曾祖) 혼(渾)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祖) 순장(順長) 가선대부(嘉善大夫) 증 영의정(領議政)

고(考) 계(𡹘) 삼등 현령(三登縣令) 증 영의정

 

공의 휘(諱)는 정귀(廷龜)이고 자(字)는 성징(聖徵)이고 호(號)는 월사(月沙)이다. 소싯적의 호는 추애(秋崖)이고 혹은 습정(習靜), 혹은 치암(癡庵)이라고 하였으며, 만년의 호는 보만정주인(保晩亭主人)이다.

그의 선조는 당(唐)나라 출신이다. 중랑장(中郞將) 무(茂)가 소정방(蘇定邦)을 따라 백제(百濟)를 평정하고는 그대로 신라(新羅)에 머물러 벼슬을 하면서 연안(延安)의 관적(貫籍)을 하사받았다. 고려(高麗) 조에 소부감(少府監) 현려(賢呂)와 문림랑(文林郞) 영군(映君)이 있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판도 판서(版圖判書) 효신(孝臣)과 호조 전서(戶曹典書) 종무(宗茂)가 있었다. 그리고 문강공(文康公)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휘 석형(石亨)은 문학으로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일찍이 세 차례의 과거에서 잇따라 장원을 차지한 바가 있다.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공의 고(考)인 의정공(議政公)은 문장과 기의(氣誼)로 세상에서 중히 여김을 받았다. 모두 21차에 걸쳐 과거에 응시해서 장원을 하기도 하고 둘째, 셋째를 차지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대과(大科)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제술(製述)한 글들 모두가 전송(傳誦)되었다. 그리고 고문(古文)의 표현을 잘 구사하여 한 시대 사대부의 묘도(墓道)에 관한 글을 많이 지었다. 공이 약관의 나이에 고과(高科)에 급제한 것을 보고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상투를 틀고 글을 배운 이래로 사단(詞壇)을 내려다보면서 항상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턱수염을 뽑는 것과 같다고 여겼는데, 지금 녹사(祿仕)에 고달프게 시달리고 있으니 이것은 운명이라고 할 것이다. 너는 반드시 선업(先業)을 크게 빛낼 수 있을 것이니 우리 집안의 구물(舊物)을 너에게 전해 주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저술로 《상제예요(喪祭禮要)》, 《강목집석(綱目輯釋)》, 《문계방원(文溪厖諢)》이 있다.

공의 비(妣)인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는 신라 왕자 흥광(興光)의 후손으로서 현감(縣監)인 표(彪)의 딸이요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첨지(僉知) 이홍간(李弘幹)의 외손인데, 대의(大義)를 알고 고금(古今)의 치란(治亂)과 일의 시비와 사람의 사정(邪正)을 잘 분변하였으므로 첨지공이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손녀가 사내였다면 우리 가문을 크게 빛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계부(季父)인 전한(典翰) 규(虯)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질녀는 여성 중에서 뛰어난 달사(達士)이다.”라고 하였다. 가정(嘉靖) 43년(1564, 명종 19) 10월 8일에 공을 낳았다. 그날 아침부터 범이 문밖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피했는데, 공을 낳자 떠나갔으니 그때가 사시(巳時)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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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년(1627, 인조 5) 정월에 달적(㺚賊)이 의주(義州)를 함락했다는 보고가 이르렀다. 공을 병조 판서로 삼고 찬성의 직책을 여전히 행하게 하였다. 공이 일단 상을 뵙고 고사(固辭)한 뒤에 다시 차자를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경(卿)의 재질과 방략(方略)이라면 이 난국을 충분히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이 아니고서는 이 임무를 감당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호병(胡兵)이 잇따라 여러 성을 함락하고 평양(平壤)에 이르자 대가(大駕)가 강화(江華)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적이 계속 글을 보내어 강화(講和)를 청하였다. 대가가 통진(通津)에 이르렀을 때에 대신을 불러 계책을 하문하였는데, 모두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대진(大鎭)이 차례로 함락되고 있고,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은 아직 이르지 않고 있습니다. 적이 경성을 점거할 경우에는 강화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섬이 되어 보존해 지킬 계책이 전혀 없으니, 그들이 강화를 요청하는 기회에 허락해 주는 것도 상황에 따라 변통하는 계책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강화에 도착했을 때에 적이 이미 평산(平山)까지 와서는 유해(劉海)를 강홍립(姜弘立), 박난영(朴蘭英) 등과 함께 보내 우호 조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하였다. 조정이 빈접(儐接)을 어렵게 여기자, 상이 신하들을 불러 의논하면서 이르기를 “이 일은 병판(兵判)이 맡는 것이 가장 적합하겠다.”라고 하였다. 공이 고사(固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과 수답(酬答)하는 사이에 종사(宗社)의 안위가 걸려 있다. 경에 대해서는 그들 중에서도 필시 이름을 알고서 추중(推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해서는 안 될 것인데, 이러한 때에 어찌 감히 수고하는 일을 꺼리겠습니까. 단지 신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우둔해서 대사를 그르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신이 중국 조정에 몇 차례 다녀왔으니 중국 조정에는 혹시 신의 이름을 아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호인(胡人)이야 어떻게 신의 이름을 알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해(劉海) 같은 사람은 원래 중국인이니 어찌 경의 이름을 듣지 못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동행할 사람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나 재신(宰臣)을 막론하고 경이 직접 천거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과 이조 참판 장유(張維)와 함께 가게 해 줄 것을 청한 뒤에 연미정(燕尾亭)으로 가서 호차(胡差)를 만났다.

약조(約條)를 논하여 정할 적에, 평산(平山)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말 것, 맹약을 정한 다음 날에는 철군하여 돌아갈 것, 앞으로 형제의 나라라고 칭할 것, 철군한 뒤에는 압록강(鴨綠江) 연안을 넘어오지 말 것, 중국은 바로 부자(父子)의 관계를 맺은 나라로서 200년 동안 깍듯이 섬겨 왔으니 지금 너희 나라와 강화를 맺었다고 해서 배반할 수는 없다는 것 등을 제시하자, 유해(劉海)와 용골대(龍骨大) 등이 연일 강력하게 반대하며 다투었다. 그러다가 유해가 홀연히 손을 모으고 경의를 표하면서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고 하더니, 지금 제공(諸公)의 말을 듣고 보니 예의와 충신(忠信)으로 천하에 으뜸이 될 만한 나라일 뿐만이 아니다. 외딴 섬으로 피신하여 국가가 위기일발에 처한 상황에서 우리 군대가 만약 한 발만 앞으로 내딛으면 개성(開城)과 왕경(王京)이 금세 잿더미가 될 것이요, 군사의 칼날이 온 나라 안에 번득일 것이니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를 지키며 시종일관 중국 조정을 배반하지 않으니 참으로 존경스럽기만 하다. 내가 이러한 뜻으로 두 분 왕자에게 보고하겠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글을 써서 밤중에 일기(一騎)를 급히 보내 문의하니, 두 왕자가 답하기를 “조선이 중국 조정을 배반하지 않는 것 역시 그 의사(意思)가 좋으니 그 뜻대로 하도록 허락하고, 단지 우리와 우호를 맺을 것만 굳게 약정하고 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유해가 서면으로 요구한 세폐(歲幣)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공이 두 재신(宰臣)과 강력하게 다투면서 세폐는 모두 취소하고 단지 약간의 물품만 예물로 보내 호군(犒軍)하는 자료로 삼게 할 것을 주장하니, 호차(胡差)가 따랐다. 적이 회맹할 때에 백마(白馬)를 잡고 상이 또 직접 회맹에 참석하여 삽혈(歃血)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이러한 인심과 병력과 군율(軍律)을 가지고 과연 이 적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일단 그들을 토벌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과 우호 조약을 맺고 하늘에 맹서하기로 한 이상 내가 회맹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지금 세상에서 이 일을 비난하고 후세에서 이 일을 기롱한다 하더라도 나는 회맹에 참석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니, 이는 실로 국가를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상께서 바야흐로 거상(居喪) 중에 계신 만큼 친히 삽혈을 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호차에게 극진히 말하였으니, 이 일에 대해서는 신이 목숨을 걸고 감당해 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은 단지 본부(本府)의 대청(大廳)에서 분향(焚香)만 하고 승지로 하여금 맹서하는 글을 읽게 하였으며, 공이 오윤겸(吳允謙), 김류(金瑬), 이귀(李貴), 신경진(申景禛) 등과 함께 서교(西郊)의 맹단(盟壇)이 설치된 곳에 가서 회맹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철군하여 돌아갔는데, 그 뒤 유해가 다시 중국 조정에 귀순하고 나서 본국이 중국 조정을 배반하지 않은 실상을 극력 말했다고 한다.

공이 아뢰기를 “적이 비록 맹약을 간청하고서 물러갔다고는 하나, 우리가 하나도 따끔한 맛을 보여 주지 못했으니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해서 다시 오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군대가 없는 나라입니다. 지금 적이 물러간 것만 믿고서 전철(前轍)을 그대로 따른다면 적이 다시 쳐들어올 경우에 다시 어떻게 해 볼 계책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병조 판서의 직책을 맡고 있을 적에 중국의 각 도(道)와 각 읍(邑)에 참장(參將)이나 유격(遊擊)이나 수비(守備)처럼 군대를 거느리는 장관(將官)을 둔 것에 의거해서, 각 읍에 있는 속오(束伍)의 구안(舊案)을 근거로 늙고 잔약한 자를 쫓아내고 새로 단속하여 장부를 작성한 뒤에 평상시에 조련시킴으로써 유사시에 그들을 거느리고 가서 적과 싸우게 하는 한편, 수령은 각 고을에서 그들을 위한 장비와 물자를 조달하여 지급하게 하도록 청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군사들도 장수를 알게 되고 장수도 군사들을 알게 되어 비상시에 제대로 쓸 수가 있을 것이요, 수령 역시 군사들을 거느리지 않는 만큼 변고를 당했을 때에 고을을 비우게 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이대로 시행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각 도에 영장(營將)을 설치하게 되었다.

환도한 뒤에 유해(劉海)와 용골대(龍骨大) 등이 또 오자, 상이 하교하기를 “적병이 아직도 의주에 있으니, 찬성 이모(李某)는 유해를 만나 보고 속히 철수하도록 타이르라.”라고 하였다. 공이 명한 대로 타이르니, 즉시 철군하겠다고 허락하였다.

명을 받들어 대원군의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니 숙마(熟馬)를 하사하였다. 황제의 등극을 반포하기 위해 조사(詔使)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공을 명하여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무진년(1628, 인조 6) 7월에 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고사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본래 보필하는 직임에 합당하니, 반드시 국가를 잘 다스려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속히 나와서 나를 바르게 보좌함으로써 여망(輿望)에 부응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재차 고사하니, 상이 또 답하기를 “경은 재덕(才德)이 평소에 드러났으니 이 직임에 실로 적합하다. 근력이 비록 쇠했다고는 하나 정신은 아직도 쇠하지 않았으니,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부족한 나를 힘껏 보좌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

 

청성잡기 제4권 / 성언(醒言)

맹렬했던 조선 군대의 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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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劉綎)이 순천(順天)에서 왜구를 막았는데, 그를 따라온 묘병(苗兵)을 귀병(鬼兵)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전투할 때에 반드시 먼저 성에 올라가긴 했지만 왜구를 보면 지레 기가 꺾였다. 중국의 군대는 더 그랬다. 그러나 조선인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으므로 잘만 쓴다면 천하의 막강한 군대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유정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에 데리고 가서 집안 일꾼으로 삼은 자가 매우 많았다. 유해(劉海)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본래 신씨(愼氏)인데 유씨를 가칭하였으며, 실제는 진주(晉州) 사람이었다. 청나라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 조선 사람에게는 값을 더 올려 주었으니 그 맹렬한 기세를 높이 산 것이었다.

대체로 문을 나서면 집안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유독 조선인이 그러한데 지금은 수많은 나라 가운데 가장 나약하니 이는 기가 변한 것이다. 형벌로 죽이는 것은 아무리 공적인 일이라도 마치 더러운 것처럼 여겨 회피하고, 붓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으니 이 또한 잘못 바뀐 것이 아니겠는가.

ⓒ 한국고전번역원 | 김혜경 오윤정 (공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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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25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유해(劉海) 형제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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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명 나라에서 유해가 본래 요인(遼人)으로서 오랑캐에 투항하여 포학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조서를 내려 잡게 하게 하되, 중국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막론하고 유해를 잡는 사람에게는 즉시 형주 자사(荊州刺史)를 제수하고 은(銀) 1만 냥을 주겠다고 하였다. 정묘년에 오랑캐와 모문룡의 여러 장수들이 유해가 나오는 것을 살펴 감시하고 또 우리나라에도 밀첩(密帖)을 보냈다. 《속잡록》

○ 유해는 요동(遼東) 사람으로 오랑캐의 추장에게 항복하여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리더니, 무진년 여름에는 이름을 흥조(興祚)라 고치고, 그 아우 흥기(興基)ㆍ흥치(興治)ㆍ흥량(興良) 등을 이끌고 제 집을 불살라 타 죽은 것처럼 꾸미고 문룡에게 투항하였다. 유해는 인물이 교활한데다 글을 잘하며 이(利)를 좋아하고 재물을 탐냈는데 문룡이 그를 신임하였다. 문룡이 죽자 원숭환이 부총(副摠) 서부주(徐敷奏)ㆍ장빈량(張贇良)을 보내어 섬의 군사를 점검하고 그 가운데서 힘이 세고 씩씩한 자를 뽑아 갔는데, 유흥조ㆍ경중명(耿仲明) 등도 따라갔다. 부총 진계성으로 심세괴(沈世魁)ㆍ유흥치 등을 거느리고 가도를 지키도록 하였다. 《하담록》 《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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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1년 기미(1619) 2월 7일(신유)

11-02-07[02] 도원수 강홍립이 유 도독 휘하의 차인 중 조선인에 대하여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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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 강홍립이 치계하기를,

“유 도독(劉都督)의 차인(差人)들이 창성(昌城)에 머무르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가산인(嘉山人)으로 중국 이름은 유우(劉牛)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갑오년에 도독이 데려가 가정(家丁)으로 삼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도독의 안전(眼前)에 있었다. 작년 윤4월 14일에 병부의 문서가 강서(江西)에 도착하였는데 도독으로 하여금 길을 떠나라는 내용이었다. 도독은 자신이 늙었음을 생각하여 집에서 부귀나 누리기를 바라고 관직에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출정이라는 통보를 받게되자 길게 한숨 쉬며 근심에 젖었다. 재촉하는 격문이 또 이르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속히 떠나기를 권하자 마지못해 길에 올라 집앞에서부터 배를 타고 곧장 통주(通州)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군사들과 기계를 모두 정돈하지 못하였고 오직 【사천(四川)의】 병마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또 함께 진영에 있던 자가 경성(京城)에서 내려와서 후대하는 뜻을 잔뜩 늘어 놓자 도독이 매우 기뻐하였다. 또 유길룡(劉吉龍)이라는 자는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임무를 맡고 있다. 내가 강서에 있던 때에 우연히 절강(浙江)에 가게 되었을 적에 거기에서 【본국의】 상주인(尙州人)을 만났다. 그는 7세에 귀화하여 왕씨(王氏) 성을 가진 집의 양자가 되었고,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재차 북경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했는데 합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문장은 매우 훌륭하여 머지않아 높은 점수로 뽑힐 것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마침 나를 보고는, 「나는 조선인인데 불행하게 타향으로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머지 않아 과거에 합격하면 행인사(行人司)가 될 것이니, 만약 본국으로 가게 되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맹세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서 끝내 고향에서 죽겠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독부(督府)가 동쪽으로 올 때에 함께 온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유길룡(劉吉龍)ㆍ유길수(劉吉壽)ㆍ유조용(劉朝用) 등이 드러나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이고, 이 밖에도 나온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하였다.

유해(劉海)라는 자는 진주인(晉州人)이다. 그의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었는데, 번번이 도독에게 아버지를 만나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였으므로 도독이 허락하였다. 유해가 경사(京師)에 도착하자, 왕이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본도에 명하여 그의 아버지를 올려보내도록 명하니, 여러 읍들이 역마를 번갈이 태워 올려보냈다. 왕이 도감에게 엄히 주의를 주어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하고 한 곳에서만 만나도록 허락하였으며, 역관배들로 하여금 함께 들어가 이야기를 듣게 하였으니, 대개 본국의 일을 누설할까 두려워해서였다. 그리고는 거처를 각자 따로 쓰게 하고 함께 자지 못하게 하니, 유해의 부자가 통곡하며 돌아갔다. 【유해는 즉 거창인(居昌人) 신인(愼諲)의 아들이다.

【원전】 33 집 208 면

【분류】 외교-명(明) / 호구-이동(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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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0년 무오(1618) 11월 18일(계묘)

10-11-18[04] 유 도독의 차관 유해의 상경을 저지하라고 전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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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하였다.

“유 도독(劉都督)의 차관 유해(劉海)가 올라온다고 하는데, 이러한 때 중국인이 왕래하는 것은 지극히 염려스럽다. 게다가 유해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유 도독을 따라가서 원임 천총(原任千摠)이 되기까지 한 만큼 우리 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해 반드시 알지 못하는 게 없을 것이니, 더욱 매우 우려할 만하다. 급히 역관과 선전관을 평양 등처에 보내서 도독이 요구하는 물품을 마땅히 급히 찾아 보내고 우선 올라오지 말게 할 일을 감사 박엽(朴燁)을 시켜 십분 주선하게 해서 기어이 그로 하여금 따르게 만들라. 만약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으면 감사로 하여금 그가 도착한 곳에 가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이를 해조로 하여금 오늘 속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원전】 33 집 191 면

【분류】 외교-명(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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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선생집 제24권 / 첩(帖) 47수(首)

유흥조에게 회답한 첩문[劉興祚回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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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하(足下)가 지난번 병란(兵亂)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성의를 다하여 분란(紛亂)을 해소시킬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었는데, 그 결과 끝내는 양국(兩國)의 생령(生靈)들을 위해 병화(兵禍)를 종식시킬 수 있었으니, 참으로 옛날 책사(策士)의 풍도를 지녔다고 할 것입니다.
과인(寡人)은 그 일만으로도 벌써 족하를 훌륭히 여기며 탄복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야말로 매미가 껍질을 벗고 앵무새가 골짜기에서 높은 나뭇가지로 뛰어오르듯 천 겹 바다 물결을 헤치고 몸을 빼쳐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드높이 조정의 은상(恩賞)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향배(向背)의 분기점을 진실로 알아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가족들과 친척들이 그곳에 얽매인 채 빠져 나오지 못했으니 그 때문에 마음이 울적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폐방(弊邦)은 독부(督府 모문룡(毛文龍)의 군영을 가리킴)와 순치(唇齒)의 의리 관계를 맺어 오면서 털끝만큼도 유감스러운 점이 있지 않았는데, 이제 또 족하와 같은 분이 그 사이에 있게 되었으니, 제대로 조정하고 협조하면서 끝없이 훌륭한 일을 도와 이룰 수 있게 해 줄 것이 분명하기에, 사적으로 기쁘고 위로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는 사람 편에 우선 회답을 드리면서 변변찮은 물건을 보내니 성의를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주-D001] 유흥조(劉興祚) : 요동(遼東) 사람으로 본명(本名)은 유해(劉海)이다. 일찍이 오랑캐 추장에게 투항하여 호감을 얻고 용사(用事)하다가 인조 6년(1628)에 이름을 흥조(興祚)로 고친 뒤 그의 아우 흥기(興基)ㆍ흥치(興治)ㆍ흥랑(興良) 등과 함께 모문룡(毛文龍)에게 투항하였다. 그 뒤 원숭환(袁崇煥)이 모문룡의 목을 베고 나서 유흥조 등을 거느리고 영평부(永平府)로 나아갔는데, 원숭환이 모함에 걸려 베임을 당한 뒤 오랑캐에 의해 계주(薊州)와 영평부가 함락당했을 때 전사하였다. 《燃藜室記述 卷25 仁祖朝故事本末 毛文龍誅死ㆍ劉海兄弟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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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25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유해(劉海) 형제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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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명 나라에서 유해가 본래 요인(遼人)으로서 오랑캐에 투항하여 포학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조서를 내려 잡게 하게 하되, 중국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막론하고 유해를 잡는 사람에게는 즉시 형주 자사(荊州刺史)를 제수하고 은(銀) 1만 냥을 주겠다고 하였다. 정묘년에 오랑캐와 모문룡의 여러 장수들이 유해가 나오는 것을 살펴 감시하고 또 우리나라에도 밀첩(密帖)을 보냈다. 《속잡록》

○ 유해는 요동(遼東) 사람으로 오랑캐의 추장에게 항복하여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리더니, 무진년 여름에는 이름을 흥조(興祚)라 고치고, 그 아우 흥기(興基)ㆍ흥치(興治)ㆍ흥량(興良) 등을 이끌고 제 집을 불살라 타 죽은 것처럼 꾸미고 문룡에게 투항하였다. 유해는 인물이 교활한데다 글을 잘하며 이(利)를 좋아하고 재물을 탐냈는데 문룡이 그를 신임하였다. 문룡이 죽자 원숭환이 부총(副摠) 서부주(徐敷奏)ㆍ장빈량(張贇良)을 보내어 섬의 군사를 점검하고 그 가운데서 힘이 세고 씩씩한 자를 뽑아 갔는데, 유흥조ㆍ경중명(耿仲明) 등도 따라갔다. 부총 진계성으로 심세괴(沈世魁)ㆍ유흥치 등을 거느리고 가도를 지키도록 하였다. 《하담록》 《촬요》

○ 기사년(1629) 8월에 원숭환이 부총 진계성을 □으로 삼으니, 조정에서 이석달(李碩達)을 접반사로 삼아 섬에 보냈다.

○ 경오년(1630) 4월 15일에 흥시(興始)가 그 형 흥조를 위하여 그 집에서 재(齋)를 올렸는데 흥조가 전사한 것은 위에 보인다. 모든 장수가 다 모였다. 흥치가 투항한 달족(㺚族)을 인솔하고 난을 일으켜 진계성 이하 여러 장수를 죽였다. 계성을 죽이려 할 때, 섬 안의 상인 80여 명이 그의 죽음을 면해 달라고 빌었는데, 흥치가 스스로 자기 옷을 벗고 칼을 가지고 목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말하기를, “이 도적놈이 우리 형을 모함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큰 절개가 또한 무함을 당하였으니, 너희들이 계성을 살리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나를 베어라.” 하였다. 또 달병(㺚兵)을 보내 우리나라에서 보낸 접반사의 하인을 모조리 결박하고 접반사를 제 집에 옮겨 놓고 함께 해치고자 하니, 흥기가 극력 말려 중지하였다. 다른 본에는 경오년 3월로도 되어 있다.

○ 이때 흥치가 모반하여 진계성 등을 죽이니, 심세괴는 딸을 흥치에게 바치고 화를 면하였다. 조정에서 총융사 이서(李曙)를 파견하여 육로로 진군하게 하고, 부원수 정충신(鄭忠信), 충청 수사 송영망(宋英望), 경기 수사 유응형(柳應泂) 등은 수로로 진군하게 하여 흥치를 치니, 흥치는 군사를 거느리고 여순(旅順) 어귀로 갔다. 조정에서 의논이 통일되지 않아서 오직 김류만 싸울 것을 주장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화친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수군들이 신중히 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하담록》 《속잡록》

○ 총융사 이서(李曙)와 부원수 정충신 등을 보내어 수군과 육군을 일으켜 흥치를 토벌하였다. 《촬요》

○ 5월 8일에 이서 등이 서쪽으로 서호(西湖)로 내려갔는데 수군이 모두 교동(喬桐)에 모이니, 체부사(體副使) 이경직(李景稷), 좌승지 이경용(李景容)을 보내 간심(看審)하고 군사들을 호궤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군사를 파할 것을 청하니, 비변사가 아뢰기를, “며칠 동안 의논이 통일되지 않다가 비로소 치자고 말하였는데, 다시 이제 와서 쳐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까. 대개 군사의 출병은 기운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병법(兵法)에 말하기를, ‘아침 기운은 날카롭고 낮 기운은 게으르고 저녁 기운은 돌아간다.’ 하였습니다. 오늘의 일은 진실로 게으르고 돌아갈 기운이 될 염려가 있습니다. 《시경(詩經)》에, ‘꾀내는 사람이 조정에 찼으니 이로써 일이 잘 되지 않는다.’ 하였는데, 모두 오늘날의 경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신(儒臣)들의 상차도 깊이 근심하고 멀리 염려하는 데서 나왔으니, 신등이 감히 저희들의 견해를 꼭 고집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시원스레 결정을 내려주소서.” 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계사(啓辭)가 심히 합당하다. 지금 이후로 다시 겁을 내어 군정(軍情)을 동요시키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다스리겠다.” 하였다.

○ 흥치는 말 장사의 행차를 통해 우리나라에 통첩을 보내 말의 양식을 구걸하고, 자기 형제가 전후로 오랑캐에게 함락되어 전사한 실상을 스스로 진술하고 스스로 죄인이라 일컬으면서 말하기를, “제멋대로 한 죄는 진실로 입이 백 개가 있어도 변명하기 어려우니 조용히 토벌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서쪽의 소식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는데 혹은 말하기를, “흥치가 장차 육지로 나와 도적질할 염려가 있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몰래 이매(李梅) 등과 결탁하고서 군량으로 쌀을 바꾼다고 빙자하여 안주(安州)에 서성이니, 반드시 서로 호응하여 함께 일어날 염려가 있다.” 하고, 또는 말하기를, “철산(鐵山)에서 패전하니 달적(㺚賊) 1백여 명이 모두 죽어 인심이 더욱 소란하고, 흥치가 날마다 의심되는 사람을 죽여서 섬 안이 흉흉하다.” 하고, 또는 말하기를, “심양에 군사를 청하여 해주위(海州衛)에서 합세할 것이다.” 하였다.조정의 의논이 또한 통일되지 않으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흥치가 제멋대로 명 나라 관원을 죽였으니, 진실로 왕법(王法)으로 마땅히 베어야 할 바이나, 섬 안의 사정을 지금 자세히 알지 못하고 명 나라 조정의 처치도 헤아리기 어려우니, 당당한 큰 거사가 도리어 중국 조정에 의심을 받게 되어 뒷날 처리하기 어려운 근심을 크게 남길 것이다.” 하자, 대간들도 임금에게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토의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으나 임금의 뜻이 흔들리지 않았고, 또 접반사 이석달(李碩達) 등을 죄 없이 사지에 놓아두는 것을 불쌍하게 여겼다.

○ 평안 감사 김시양이 아뢰기를, “유흥치가 즉시 오랑캐에게 투항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흥치가 믿고서 난을 일으킨 대상은 투항한 서달(西㺚)인데, 투항한 서달 역시 오랑캐에게 죄를 얻고 목숨을 아껴 도망온 것이니, 반드시 다시 오랑캐 땅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흥치가 북쪽으로 달아나려는 계획이 필시 이 때문에 지연되는 것입니다. 명 나라 조정의 병력이 흥치를 토벌하여 제거하기에 부족하면 치지도외(置之度外) 할 뿐이지 반드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여 바다를 건널 리가 없으니, 당 나라 때의 번진(藩鎭)과는 사세가 같지 않습니다. 4, 5개월도 못 되어 흥치는 북쪽으로 달아나지 않으면 동쪽으로 침범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흥치가 만일 조정의 뜻이 접반사한테 있는 것을 안다면 그는 반드시 접반사를 잡고서 기화(奇貨)로 삼아 단연코 내보낼 리가 없고 방비도 더욱 엄하게 할 것이니, 접반사를 아끼려다가 단지 해치게 될 것입니다. 방금 수륙으로 흥치를 토벌하는 거사가 없다면 이정(李靖)이 이른바, ‘예컨대 당검(唐儉)의 무리는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오늘의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육지로 나온 역관의 말은 당(唐)의 양변(楊弁)의 15리의 광명(光明甲)이라는 말과 같음을 면하지 못하니, 조정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곧 큰일을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흥치 형제가 89척의 배를 띄워 등주(登州)로 향하다가, 7월에 도로 가도에 주둔하였다. 다른 본에는 8월에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 흥치가 섬 백성들을 협박하여 달아나 등양도(登洋島)로 들어갔다. 관군이 파하고 돌아오니, 흥치가 황제의 칙명을 받아 섬을 다스린다고 거짓 일컫고 관도(款島)에 자문을 보냈다. 《촬요》

○ 흥치가 섬에 돌아온 뒤 그 부하 장수들이 우리 역관을 불러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힐문하였는데, 공갈 협박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서가 장계를 올리기를, “실로 천자께서 유흥치에 관한 일로 조명(詔命)을 내려 우리나라를 타이른 것이 없으니, 신은 흥치가 반드시 섬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고 또 장차 변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이 뜻을 수군에 통하고 상의하여, 변에 대응하여 헤아리소서.” 하였다.

○ 흥치가 차관(差官) 이매(李梅)를 우리나라에 보냈으므로 정유성(鄭維城)을 회답사(回答使)로 삼아 가도에 보내니, 흥치가 회답하기를, “전개(專价)가 두 차례 편지를 가져오니 선의를 인정할 만하다. 다만 그 말이 너무 지나치게 격노하였으니 아마도 다 풀리지 않은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번에 섬에서 일어난 사건은 실로 듣기에 놀라운데 족하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천자를 위하여 번국(藩國)을 지키는 몸이니 영토 안에 비상 사태가 일어나면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 치는 것은 바로 나의 직무이다. 죄를 용서하고 책무를 맡긴다는 천자의 명을 듣자 즉시 군사를 거두었으니, 애당초 족하에게 사사로이 노한 것이 아니다. 족하가 과연 능히 황조(皇朝)를 위해 시종일관 충절을 다하고 오랑캐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함께 운수를 갚는 의리를 지킨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소홀히 대하겠는가. 서도 지방은 흉년이 들어 곡식을 바꾸기가 쉽지 않으나 섬 안의 군사와 백성이 서로 도와온 지 이미 오래이니, 곡식의 가격을 공평하게 하기를 힘써 피차가 각기 병들지 않도록 힘쓰겠다.” 하였다.

○ 이때 조정에서는 군사를 거두도록 명하였는데, 흥치가 김시양이 싸움을 주장한 것을 가장 미워하므로, 시양을 체차하고 민성휘(閔聖徽)를 대신 감사에 임명했다. 《하담록(荷潭錄)》

○ 신미년(1631) 3월에 흥치가 섬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오량캐에게 투항하려고 하니, 섬 백성들이 따르지 않자 투항한 서달을 묶어 마구 죽이고 남방의 상인 50여 명을 불러들여 전부 쳐죽이고 그 재물을 약탈하니, 유격(遊擊) 장도(張燾), 장관 심세괴(沈世魁) 등이 분노한 백성들을 이끌고서 먼저 투항한 서달을 죽였는데 그 죽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또 흥치 형제와 심복 부하들을 죽였다. 한편 우리나라 역관을 불러 급히 평안 감사에게 알리기를, “흥치가 모반하여 오랑캐에게 투항하고, 오랑캐 군사를 끌고 와서 조선에 화를 끼치려 하므로 우리들이 계책을 내어 먼저 없애버렸다. 항복한 서달 8백 명 가운데 3백여 명이 배를 타고 도주하였는데 반드시 너희 나라 지방에 배를 댈 것이니 기필코 꼭 체포할 것이며, 육지에 나가는 한인(漢人)은 절대로 때를 틈타서 함부로 죽이지 말라.” 하였다.

○ 투항한 서달이 과연 모두 선천(宣川)으로 나와 모두 우리 군사에게 붙들렸는데, 그 가운데 탈출한 자는 강을 건너 달아났다.

○ 중국에서 도독 황룡(黃龍)을 파견하여 가도를 진정시키고 어루만지고, 5월에 권태일(權泰一)을 접반사로 삼고 이필달(李必達)을 문안사(問安使)로 삼아 섬 안으로 들여보냈다. 6월에 오랑캐 군사가 가도를 습격하였는데, 황룡 등이 군대를 동원하여 나가 막아 오랑캐 군사가 크게 패하여 달아나 돌아갔다. 병자란에 상세하다.

○ 일찍이 흥치가 여순(旅順) 어귀에 갔다가 장도(張燾)를 얻어서 왔다. 장도가 계책이 매우 많았으므로 자못 믿고 중용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세괴와 장도가 섬 안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흥치를 베어 섬 안이 다시 평정되니, 오랑캐가 이 소식을 듣고 흥치의 죽음을 분하게 여겨 2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청북(淸北)의 여러 고을로 들어와 장차 가도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마침 황룡이 섬에 이르러 오랑캐 군사를 쳐서 깨치니, 오랑캐 군사가 드디어 물러갔다. 《하담록》 《속잡록》

○ 신미년에 흥치가 죽자 남은 무리들이 오랑캐에 투항하니, 오랑캐 군사가 강을 건너와 곽산(郭山) 서쪽에 꽉 들어찼다. 이에 감사 민성휘가 검산성(劍山城)에 있으면서 이 사실을 보고하니, 조정이 크게 놀라 정충신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공문을 띄워 성휘에게 나가 피하도록 하소서.” 하니, 충신이 아뢰기를, “불가합니다. 성휘가 만일 성을 버리고 나온다면 성안의 군사들이 반드시 울부짖으면서 만류할 것이니, 소문이 나면 좋지 않습니다.” 하였다. 김시양이 말하기를, “오랑캐 군사는 반드시 섬 안의 사람들을 위협하기 위하여 온 것일 터이니, 우리에게는 해가 없을 듯하다.” 하더니, 다음날 서쪽에서 소식이 왔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하담록》

○ 문룡 때부터 호(號)가 마진인(馬眞人)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가도를 왕래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섬라국(暹羅國) 사람으로 나이는 170세이며, 이무기나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 가두고 귀신을 잡고 쫓아서 변화가 헤아릴 수 없다.”고 하니, 섬 안에서 모두 숭배하고 받들어 신으로 여겼다. 임신년에 또 마진인이 가도에 오니 접반사가 치계하기를, “마진인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련성(九連城)으로 가서 장차 오랑캐 군사와 싸우려 합니다.” 하니, 김시양이 말하기를, “이것은 허황한 말이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의주 부윤이 급히 보고하기를, “마진인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련성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이서(李曙)가 시양에게 말하기를, “공이 처음에 허황한 말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시양이 말하기를, “의주 부윤이 허황한 말에 속은 것이다.” 하자, 이서가 말하기를, “공의 스스로 잘난 체함이 이와 같다.” 하였다.며칠 있다가 의주 부윤이 치계하기를, “마진인이 나왔다고 말한 것은 한인(漢人)들의 허황한 말입니다.” 하니, 이서가 비로소 크게 놀라 말하기를, “공은 어떻게 그것이 허황한 말임을 알았는가?” 하자, 시양이 말하기를,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지 못한 것일 뿐이다. 마진인이 스스로 170세라 일컬었는데, 비록 이것이 과장된 말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장차 백 살이 되는 늙은이일 것이니 반드시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없을 것인데, 어찌 스스로 싸움터에 나가 죽으려 하겠는가.” 하니, 정승들이 다 탄복하였다. 《하담록》

○ 유해(劉海)는 우리나라 진주(晉州)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신(愼)이며, 이름은 민(敏)이요, 아버지는 응창(應昌)이다. 만력(萬曆)22년 왜변 때에 한 가족 9명이 노략질당하자, 유해는 11살에 유정(劉綎)의 군사에 들어가 유정의 성을 따르고 이름을 해라고 고쳤다. 차관(差官)으로서 조선에 와서 진주에 내려가 아버지를 찾겠다고 청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 아버지에게 역마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였다. 일찍이 그 아우는 6살 때에 왜국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고 재물을 저축하였는데, 아버지가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백금(百金)을 속바치고 석방시키니, 이해에 돌려보내 오는 우리나라 백성들과 함께 돌아왔다. 임금이 응창에게 6품의 벼슬을 주어 위로하고, 유해는 돌아가 유정과 함께 오랑캐를 정벌하다 전사하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

[주-D001] 당검(唐儉) : 당 나라 때에 당검이 적국에 사신으로 가 있는데, 당 나라에서 적국을 치려다가 당검이 죽음을 당할까 염려하니, 이정이 말하기를, “당검의 무리 때문에 군사를 쓰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안병주 (역) |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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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제3권 / 소(疏)

강화(講和)를 배척한 상소 정묘년(1627, 인조5) 3월에 부사직(副司直)으로 난리 속을 뚫고 강도(江都)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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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룁니다. 오늘날의 위급한 형세로 말하면 급박하기가 경각에 달려 있는데도 전하께서 대응하시는 것은 조금도 분발하거나 강경한 기상이 없고, 묘당이 대처하는 것도 한결같이 나약하고 구차한 계획만을 내놓으니, 마침내 비손(卑遜)한 말과 많은 선물로 추악한 오랑캐를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 열성(列聖)이 200년 동안 가꾸어 온 문물(文物)의 나라를 비린내 나는 오랑캐 땅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까?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수천 년 동안 일구어 놓은 의관(衣冠)을 갖춘 풍습을 장차 오랑캐의 옷을 입는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조종(祖宗)의 종묘사직을 장차 어디에다 두시겠다는 것이며, 조종의 토지(土地)가 날마다 축소되게 내버려 두시겠다는 것입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강화(講和)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금(金)나라 사람이 여태까지 송(宋)나라를 그르친 것이 이 계책이었으며, 송나라가 내내 떨쳐 일어나지 못한 것이 이 말 때문입니다. 지금 또 금나라가 썼던 계책과 수법으로 우리에게 시험하고자 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들의 수법에 넘어가서 오랑캐 자식에게 벼슬을 주고 사로잡았던 오랑캐 족속을 풀어 주면서 오히려 그들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를까 두려워하고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힘씀으로써 한 걸음 물러서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 저 강홍립(姜弘立)이란 자는 오랑캐의 심복이 되어 까닭 없이 저의 부모 나라를 침범하여 우리 백성을 도륙질하고 우리 종묘사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오도 도원수(五道都元帥)라고 자칭하면서 버젓이 방(榜)을 걸어 효유(曉喩)하니, 그의 죄악이 오랑캐의 우두머리보다 훨씬 더 무겁습니다. 그런데도 숨을 죽이고 눈치를 살피면서 잠시 편안하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은 삼척동자도 부끄럽게 여길 일인데 당당한 제후의 나라가 오히려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저 오랑캐들이 강화를 요구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후원군이 없는 군대를 깊이 적지에 들여보내 전술(戰術)의 기휘(忌諱)를 범한 데다, 안주(安州) 전투에서 피차간에 죽이고 죽은 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안전하게 돌아가고자 하여 이것으로 미끼를 주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우리나라의 허(虛)와 실(實)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또다시 남이흥(南以興)처럼 굳게 지켜 힘써 싸우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우리 군사를 나태하게 만들고자 하여 이것으로 유인하는 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다 우리를 우롱하는 계략인데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만에 하나 요행을 바라고 전투에 대비하지 않고 있으니, 아, 이것이 어찌 하늘과 조종이 부탁한 뜻이겠으며, 온 나라의 신민이 처음부터 전하께 기대했던 것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 군병(軍兵)이 비록 다 정예화되지는 않았지만, 그 수효가 아마 10만 명을 밑돌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육로(六路)의 근왕병(勤王兵)이 거의 다 집결하였고, 향병(鄕兵)과 의려(義旅)가 곳곳에서 봉기(蜂起)하고 있습니다. 평안도(平安道)의 성들은 이미 함락되었지만, 황해(黃海) 일로(一路)는 아직 안전합니다. 강원도(江原道)와 함경도(咸鏡道) 군대로 하여금 적의 후미(後尾)를 에워싸게 하고, 황해도의 군졸은 저들의 복부(腹部)를 공격하게 하고, 기전(畿甸) 이하의 사도(四道)의 군사들로 임진강(臨津江)을 막게 한다면, 저 오랑캐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데다 좌우에서 공격을 받으면 세력이 나뉘고 힘이 약하여 수레 한 대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오직 전하께서 확고하게 결정할 뜻이 없고 묘당(廟堂)에는 이 일을 담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대장(四大將)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은 그 수효가 천 명이 넘으며 모두 일국(一國)의 무사(武士) 중에서 선발된 자들입니다. 이미 서쪽 변방의 고달픈 수역(戍役)을 면제해 주었고 또 국가에서 녹을 주어 기른 은혜가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난리에 임하여 임의대로 사병(私兵)을 만들었습니다. 편군(鞭軍)과 포수(炮手) 수백 명은 평소에 교육이 잘 되어 있고 재주가 정밀하여 오랑캐를 방어하기에는 이보다 나은 자들이 없는데 숙위병(宿衛兵)이라고 칭하여 한쪽에다 몰아 놓으셨습니다. 아, 원래 안은 중하고 밖은 가벼운 것이지만, 경중(輕重)을 재는 저울은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이니, 오늘날의 외방을 과연 가볍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어떤 사람이, 도적이 그의 집에 들어오고자 하여 문밖에서 엿보고 있는데, 그는 문도 닫지 아니하고 난입하도록 내버려 둔 채로 활과 무기를 안방에 깊이 감추어 두고 말하기를, “집안의 재물을 모두 쓸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방에 이르거든 사용하겠다.”라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그 사람을 지혜롭다고 하시겠습니까, 지혜롭지 않다고 하시겠습니까. 오늘날의 사세가 이것과 서로 비슷하니, 신은 삼가 괴이하게 여기며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이른바 사대장(四大將) 중에서 김류(金瑬)와 이귀(李貴)는 서생(書生)이므로 진실로 출정(出征)하기가 어렵고, 이서(李曙)는 인심을 많이 잃었으므로 장사(壯士)들이 필시 명에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신경진(申景禛)은 명장(名將)의 가문으로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어찌 목숨을 바칠 마음이 없겠습니까. 편군과 포수를 절반으로 나누고 두 장수의 군관을 한 곳으로 합하여 신경진에게 주어서 한 곳을 지키도록 한다면 군사들이 답답해하던 차에 한번 전투를 벌이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 군대의 의리가 바르고 군사들의 의기가 굳세니 어찌 대적하지 못할까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이는 단지 전하께서 한 번 옥음(玉音)을 내리시는 데에 달려 있는데 무엇이 석연찮아서 하지 않으십니까. 신이 천 리 밖에서 변고를 듣고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는 반열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죄가 내려지기를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마는, 충정과 분한 마음이 북받쳐서 사리에 어두운 말을 감히 올립니다. 전하께서는 사람이 못났다 하여 그 말조차 폐기하지 마소서. 재결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