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에서 산으로 90여 리를 올라가 또 2백여리 올라가 백두산 꼭대기 못 가에 이르러서 돌에 갂아 비를 세웠다.

2023. 6. 15. 20:06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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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 변어전고(邊圉典故)

북쪽 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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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는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서 고려 때에는 ‘동북면(東北面)’이라 하였다. 그 뒤 함주(咸州)로부터 비스듬히 북쪽을 동여진(東女眞)에게 빼앗겼다. 예종(睿宗) 2년(1107)에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을 보내어 동여진을 쳐부수어 쫓아버리고, 함주로부터 공험진(公嶮鎭)까지 9군데 성을 쌓아서 경계로 삼고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웠다.고종(高宗) 45년(1258)에 원(元) 나라의 군사가 와서 침범하자,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배반하여 병마사(兵馬使) 신집평(愼執平)을 죽임으로써 화주(和州)에서 비스듬히 뻗은 북쪽 땅이 원 나라에 붙으니, 원 나라에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화주(和州)에 설치하여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았다. 공민왕(恭愍王)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柳仁雨)와 우리 환조(桓祖)를 보내어 쌍성(雙城)을 쳐부수고, 화주(和州)ㆍ등주(登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ㆍ예주(預州)ㆍ고주(高州)ㆍ문주(文州)ㆍ의주(宜州)와 선덕(宣德)ㆍ원흥(元興)ㆍ영인(寧仁)ㆍ요덕(耀德)ㆍ정변(靜邊) 등 여러 진(鎭)을 수복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삭방도(朔方道)의 도연포(都連浦)를 경계로 삼아 장성(長城)을 쌓아서 정주ㆍ선덕ㆍ원흥 세 관문(關門)을 설치하였는데, 모두 원 나라에 빼앗긴 지 무릇 99년 만인 이때에 와서 비로소 회복하였다.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을 보내어 국경을 정하고 다시 동북면이라고 불렀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고종 때에 정평(定平) 이남에서 등주까지의 여러 성이 몽고(蒙古) 군사의 침략을 당하니, 그 지방을 강릉도(江陵道) 양주(襄州)로 옮겨 붙였다가 다시 간성(杆城)으로 옮긴 지 거의 40년이 되는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각각 본성(本城)으로 되돌아 갔다. 《여지승람》

○ 경원성(慶源城) 북쪽 90리 거리의 산 위에 돌로 쌓은 성이 있으니, 그 성 이름을 어라손참(於羅孫站)이라고 한다. 그 북쪽 30리 거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이 있고, 그 북쪽 60리 거리에 유선참(留善站)이 있고, 그 동북쪽 70리 거리에 토성(土城)의 옛터가 있으니, 바로 거양성(巨陽城)이다. 그 안에 두 돌기둥에 종(鐘)을 높이 매달았던 곳이 있으니, 종의 높이는 3자요, 원경(圓徑)은 4자 남짓이다. 일찍이 경원(慶源) 사람 유성(庾誠)이 그 성에 가서 그 종을 깨부수고 말 9바리[駄]에 나누어 싣고 오다가 겨우 10분의 1쯤 와서 따라간 사람 30여 명이 모두 죽었다. 그때 내버린 쇠가 풀 가운데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가져가지 못하였다. 세상에서 이 성을 윤관(尹瓘)이 쌓은 것이라고 전한다. 서쪽으로 선춘령(先春嶺)과 60리 가량 떨어져 있다. 《여지승람》

○ 태조(太祖) 때 두만강(豆滿江)까지 땅을 개척해서 공주(孔州)ㆍ경성(鏡城)ㆍ길주(吉州)ㆍ단천(端川)ㆍ북청(北靑)ㆍ홍원(洪原)ㆍ함흥(咸興) 70주(州)를 설치하였다. 《여지승람》

○ 고려 때에는 안변(安邊) 이북을 거의 여진이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정령(政令)이 미치지 못하였다. 예종이 장수를 보내 깊이 쳐들어가 싸움에 이겨 공을 세우고 성읍(城邑)을 설치하였으나, 얼마 후에 다시 빼앗겨 기미()할 뿐이었다. 태조가 천명을 받으니, 동북 한 도(道)는 본래 기초를 세운 곳이라,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한 지가 오래였다. 야인(野人)의 추장 원지(遠至)ㆍ이란(移闌)ㆍ두만(豆漫)이 모두 와서 섬기며 항상 활과 칼을 차고 들어와 잠저(潛邸)를 호위하며 친근하게 좌우에서 모시며 여러 곳을 정벌할 적에 따라다니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여진에서는 알타(斡朶)ㆍ두만(豆漫)ㆍ협온(夾溫)ㆍ맹가(孟哥)ㆍ첩목아(帖木兒) 등이요, 올랑흡(兀郞哈)에서는 토문(土門)ㆍ괄아(括兒)ㆍ아팔아(牙八兒)ㆍ속혐진(速嫌眞)이요, 올적흡(兀狄哈)에서는 속평(速平)ㆍ강남(江南)ㆍ돌아(突阿)ㆍ자흡(刺哈)ㆍ백안(伯顔)ㆍ활아간(闊兒看) 등이다.태조가 즉위하자 그 자질을 헤아려 천호(千戶)ㆍ만호(萬戶)의 벼슬을 주었다. 이두란(李豆蘭)을 시켜 여진을 불러서 위안하니, 머리를 풀어 헤치던 오랑캐의 풍속을 고쳐 다 갓을 쓰고 띠를 띠었으며 금수(禽獸)의 행동을 고쳐 예의(禮義)의 가르침을 익히고, 우리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하며 부역하고 구실[賦]바치는 것이 서민과 다름이 없었으며, 또 그 추장에게 부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모두 국민이 되기를 원하였다.공주(孔州)에서부터 갑산(甲山)까지 읍(邑)과 진(鎭)을 두어 백성의 일을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시키며 또 학교도 세웠다. 멀리 천 리를 뻗은 땅이 모두 우리 판적(版籍)에 들어와서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으니, 강 밖에 풍속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구주(九州)에 이르기까지 소문을 듣고 의(義)를 사모하여 혹은 친히 와서 조회하기도 하고, 혹 자제들을 보내기도 하고, 혹은 인질을 맡겨 따라 모시기도 하고, 혹은 작명(爵命)을 받기를 청하기도 하고, 혹은 내지(內地)로 옮겨오기도 하고, 혹은 토산물을 바치기도 하며, 만약 좋은 말이 나면 다투어 와서 바치기도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동북면에 거둥하여 선릉(先陵)을 뵈올 적에 강 밖에 사는 야인들이 앞을 다투어 와서 뵈었는데, 길이 멀어 미처 못 뵌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다. 야인들이 지금까지도 덕을 사모하여 매양 변방에 나가 있는 장수들과 술을 마시다가 취하여 태조 때의 일에 이야기가 미치면 반드시 감동하여 울기를 마지 않았다. 폐사군고사(廢四郡故事)

○ 태종 10년(1410)에 여진이 쳐들어왔으므로 경원(慶源)의 백성들을 옮겨 경성(鏡城)에 합하고 드디어 그 땅을 비워버렸다. 《여지승람》

○ 세종 때에 육진(六鎭)을 창설하였다. 세종기(世宗記)에 들어 있다.

○ 세조(世祖) 때에 건주 추장(建州酋長) 동산(董山)에게 벼슬을 주었다. 조사(詔使) 조에 들어 있다.

○ 동북면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여진에게 빼앗겼다가 뒤에 또 원(元) 나라로 들어 갔는데, 99년 만에 비로소 수복되었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풍패()의 고향이 되니, 태조는 땅을 개척하여 두만강까지 이르렀고, 세종은 육진(六鎭)을 설치하여, 그 벌려 놓은 규모가 원대하였다. 그러나 그 땅이 산융(山戎)과 가까워서 막아내기가 몹시 어려웠으니, 국가의 위령(威靈)이 아니었으면 어찌 수백 년 동안 무사할 수 있었겠는가. 《지봉유설(芝峯類說)》

○ 북평관(北平館)은 동부(東部) 흥성방(興盛坊)에 있는데 야인이 와서 조회하는 것을 대접하였다. 《여지승람》

○ 야인이 평안도와 경계를 서로 접한 곳이 건주위(建州衛)이고 영안도(永安道 지금의 함경도)와 경계를 서로 접한 곳이 모린위(毛麟衛)이다. 또 우리 성 밑에 의지하여 사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다. 매년 겨울에 여러 패로 나뉘어 싣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그들이 바치는 것은 돈피(貂皮) 두어 벌뿐이었으나 조정에서는 또한 붉고 검은 무명으로 보상하였다. 그들에게 벼슬 주는 것은 사맹(司猛)ㆍ사정(司正)ㆍ사과(司果)ㆍ사직(司直)ㆍ호군(護軍)에서부터 통정(通政)ㆍ가정(嘉靖)ㆍ자헌(資憲)에 이르러 그치고, 새로 당상관(堂上官)에 임명된 자에게는 옥관자(玉貫子)ㆍ품대(品帶)ㆍ승상(繩牀)을 주고 또 규례에 의하여 녹(祿)을 주었는데, 조금이라도 혹 비위에 맞지 않으면 고신(告身 직첩(職牒))을 찢어 뜰에 던져버렸다. 벼슬은 비록 높고 낮은 차이가 있으나 위아래의 분수가 없어서 취하기만 하면 서로 싸우고 욕하며 주먹으로 서로 때렸다.그들이 본 고장에 있을 때 명색이 둔장(屯長)이었던 자도 서로 존경하지 않고 다만 원수 갚기만을 일삼아 비록 두어 세대가 지나도 잊지 않고 보복하기를 맹세하여 서로 전해 가며 군사를 일으켜서 싸우는데, 그 군사들도 값을 주고 불러오기 때문에 만일 죽는 사람이 생기면 모두 재물로써 보상했다. 그들은 겉으로만 사모하였지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고 항상 도적질할 마음을 품고 있어서 만일 우리나라 백성들이 들에서 농사 짓는 것을 보면 강제로 붙잡아 가서 이러저리 사고 팔아 생업의 밑천으로 삼았다.

○ 건주(建州)의 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갔으므로 물도 서쪽으로 흘렀다. 노성(奴城 누르하치의 성)은 두 물 사이에 있어서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노성의 물은 자편성(者片城)을 거쳐서 삼차하(三叉河)요하(遼河) 와 야로강(也老江)으로 들어가 파제강(婆提江)과 합쳐져 압록강(鴨綠江)초산(楚山)에 있다. 으로 들어간다. 창성(昌城)에서부터 노성까지가 4백여 리인데, 그 사이에 만차령(萬遮嶺)과 파제강이 있다. 회령(會寧)에서 노성까지의 도로는 백두산 밖을 지나서 무려 수천여 리가 되는데, 심양(瀋陽)까지는 1백여 리이고, 요동까지는 2백 20리라고 한다. 《건주문견록(建州聞見錄)》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이민환(李民寏)이 강홍립(姜弘立)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포로가 되어 노성에 있을 때에 군졸들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말을 잘하는 한 늙은 오랑캐(胡人)이 말하기를, ‘나는 서울에 살던 정씨(鄭氏) 성의 사족(士族)의 아들로서, 기축년 정여립 옥사(鄭汝立獄事) 때에 이곳으로 도망쳐 와서 아들 넷을 낳았는데 모두 군병(軍兵)이 되었다.’ 하였다.” 하고, 또 “회령(會寧) 사람 김범(金凡) 등 2명이 도적질을 하다가 도망쳐 오랑캐 땅에 들어 와서 산다.”고 하였다. 《건주문견록》

○ 성종 갑진년(1484)에 부호(富豪), 양민(良民)을 뽑아 평안도와 함경도에 들어가 살게 하였다. 《고사촬요(故事撮要)》

○ 성종 신해년(1491)에 야인이 함경도에 쳐들어와서 진장(鎭將)을 죽이자, 허종(許琮)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쳐부수게 하였다. 《고사촬요》

○ 명종 을묘년(1555)에 성 밑에 사는 오랑캐가 깊은 곳에 사는 오랑캐 항사위(抗沙衛) 등을 꾀어 장성문(長城門) 안으로 들어오니, 온성 판관(穩城判官) 장필무(張弼武)가 곧 각 아병(牙兵) 8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달려가는데, 군사가 단촐한 것을 보고 적이 마구 달려 바로 앞까지 닥쳐오자 장필무가 화살 세 발을 연달아 쏘니 시위 소리가 나는 대로 거꾸러지자, 적이 조금 물러나 좌우익(左右翼)을 만들어 진격하였다. 장필무가 8명의 군사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부디 쏘지 말고 가지고 있는 화살을 차례차례 내게 달라.” 하였다. 이에 먼저 좌익을 쏘고 또 우익을 쏘니, 거꾸러져 죽은 적이 몹시 많았다. 얼마 후에 부(府)의 군사가 뒤쫓아 오니,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적군의 머리 25급(級)을 베었다. 부사(府使) 신경여(辛敬輿)가 말하기를, “오늘의 공은 당신 혼자서 이룬 것이다.” 하니, 장필무가 말하기를, “하관(下官)이 주장(主將)의 명령을 받아서 한 일인데, 어찌 감히 공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신경여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과연 자네 말과 같다.” 하였다. 조정에서, 신경여는 공을 보고한 것이 사실과 같지 않고 장필무는 변방의 분쟁의 실마리를 크게 만들었다 하여, 신경여의 죄만 다스리고 결국 장필무의 공은 상주지 않았다. 어사(御使) 조광언(趙光彦)이 장필무의 공을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특별히 옷의 겉감과 안감을 하사하였다. 항사위 등에게는 각각 장전(長箭) 지속(枝束)과 초피(貂皮) 3벌을 주니, 심복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명신록(名臣錄)》

○ 선조 때에 이탕개(尼湯介)가 난리를 일으켰다. 선조기(宣祖紀)에 들어 있다.

○ 선조 병술년(1586)에 둔전(屯田)을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 설치하였다. 정해년 가을에 시전번(時錢藩)의 오랑캐가 적호(賊胡)를 불러 모아 그곳에 사는 사람과 가축을 죽였다. 무자년 정월에 병사(兵使) 이일(李鎰)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시전번의 소굴을 소탕해 뒤집고 적의 머리 4백여 급을 베었다. 《고사촬요》

○ 그때 녹둔도에 오랑캐가 크게 들어와 사람을 거의 다 살육하니, 임금이 상심하여 친히 녹둔도에서 싸우다가 죽은 장사(將士)들을 애도하는 율시(律詩)란 제목을 내어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지으라고 하니, 한준겸(韓浚謙)이 한림(翰林)으로서 1등을 했다. 그 끝 구절에,

“변방의 보고가 예로부터 모두 사실이기 어려운데/邊奏由來難盡實

구중 궁궐에서 어찌 그 사이 억울함을 모두 알겠는가/九重寧悉此間寃

하였으니, 그 말에 슬며시 풍자하는 의사가 포함되었다. 《지봉유설》

○ 갑오년(1594)에 종성(鍾城) 경계에 있는 역수부(易水部)의 야인이 깊은 곳에 있는 여러 종족들을 끌고 와서 사람과 가축을 약탈해 가고, 또 영건보(永建堡)를 포위하였다. 9월에 병사 정현룡(鄭見龍)을 시켜 군사 2천 명을 거느리도록 하니, 본적(本賊)의 석채(石寨)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머리 3백 급을 베었다. 《지봉유설》

○ 을미년(1595)에 건주(建州) 오랑캐 퉁누르하치의 부락이 점점 성대해지니, 중조의 장관(將官) 여희윤(余希允)이 우리나라 무관 신충일(申忠一)과 함께 가서 정탐하고, 이어 조정의 뜻을 효유(曉諭)하였다. 《지봉유설》

○ 을사년(1605) 3월에 홀자온(忽刺溫)의 야인들이 쳐들어와서 동관보(潼關堡)종성(鍾城) 를 함락시키니, 첨사 김백옥(金伯玉)이 죽었다. 북우후(北虞侯) 성우길(成祐吉)이 유방군(留防軍)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밤에 강을 건너 곧장 오랑캐 □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서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쳐부수니, 오랑캐 무리가 마침내 흩어져 달아났으므로, 사로잡혀간 우리나라의 남자와 여자를 거두워 돌아왔다. 성우길은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 《고사촬요》 《조야첨재(朝野僉載) 합록(合錄)》

○ 5월에 북병사(北兵使) 김종득(金宗得)이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건가퇴(件加退)를 쳤다가 패하고 돌아오니, 김종득을 잡아오고 동시에 종성 부사도□ 동관을 구원하지 않은 죄로 잡아왔다. 《조야첨재》

○ 하삼도(下三道)로 하여금 군사를 뽑아 북도에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조야첨재》

○ 병오년에 누르하치와 홀자온의 두 추장의 형세를 헤아리기가 어려우므로 유격(遊擊) 유흥한(劉興漢)에게 자문(咨文)을 보내 홀자온 추장에게 사람을 보내어 선유(宣諭)하고, 또 그 자문을 무원총진(撫院總鎭)에게 보내 누르하치 추장에게 선유해 달라고 청하니, 홀자온에게 전하기를, “다시 군사를 움직여 조선을 시끄럽게 하고 해치지 말라.”고 효유하였다. 《고사촬요》

○ 이해 가을에 홀자온이 와서 조공(朝貢)을 바치니, 조정에서 백장(百將)의 직첩(職牒)과 녹봉(祿俸)을 주었다. 《조야첨재》

○ 정미년(1607)에 누르하치가 대군을 몰고 와서 육진(六鎭) 근경(近境)에 있는 번호(藩胡)들을 모두 옮겨 가려고 하였는데, 군사의 형세가 날마다 치성하여 우리나라 종성진을 뚫고 지나가서 오갈암(烏碣巖) 아래에 진을 치고는 홀자온의 대군과 만나 크게 격파하고, 또 경원진(慶源鎭) 동문으로 해서 길을 취하여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그 사유를 자세히 적어 무원(撫院)에 보고하여 중국에 아뢰도록 하였다. 《고사촬요》에, 오갈암(烏碣岩)은 종성부 남쪽 21리에 있다고 하였다.

○ 그때에 누르하치가 홀자온보다 강성하여 홀자온을 병합하려고 그 딸을 홀자온에게 아내로 주었으나, 홀자온이 오히려 복종하지 않고 매양 서로 겨누어 보려는 의사가 있었다. 홀자온이 방원(防垣) 등 여러 곳을 노략질하려고 무리를 거느리고 종성 건너편 문암(門巖)에 이르니, 마침 누르하치도 군사를 일으켜 현성(縣城)을 치고 경원(慶源)을 거쳐 강을 건너 종성의 오갈암(烏碣巖)에 이르렀는데, 건너편에 홀자온이 와서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는 한 부대의 군사로써 맞이하여 치자, 홀자온의 정병(精兵)은 거의 죽고 남은 군사는 그 소굴로 돌아갔다. 누르하치가 다시 무리들을 모두 거느리고 나아가 하질귀(何叱貴)홀자온의 추장 이름 를 치니, 하질귀가 성에서 나와 싸웠다. 누르하치가 산 속에 복병시켰다가 양편의 진영이 어울려 싸우는 틈을 타서 복병으로 성중으로 달려들어가니, 하질귀가 패하고 돌아가 1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여해부락(如海部落)으로 투항했다. 여해부락에서는 하질귀를 지옥(地獄)에 가두어 죽였는데, 여해부락도 누르하치에게 병합되었다. 이에 누르하치는 모든 부락을 다 병합해 버리고 요동을 함락하였다. 《조야첨재》

○ 인조 기묘년(1639)에 병마사(兵馬使)가 자문을 보내오기를, “극동(極東)에 가죽을 바치는 백성인 경하창(慶河昌) 등의 한 무리가 배반하고 웅도(熊島)에 이르러 항상 경흥(慶興)의 여러 성에 있으면서 왕래하며 물건을 교환해 간다.”고 하니, 우리나라로 하여금 수군을 보내어 잡으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북우후(北虞侯) 유찬선(劉纘先)에게 명하여 포수(砲手) 4백 명과 사수(射手) 1백 명, 배 1백 12척(隻)을 거느리고, 길을 가리켜 주는 두 차인(差人)과 같이 서수라(西水羅) 앞 개[浦]에서부터 바다로 내려가 장도(獐島)를 에워싸 경하창의 권속 10명을 사로잡아 관원을 시켜 발송하였다. 《통문관지(通文館志》

○ 효종 갑오년(1654)에 우후 변급(邊岌)이 청(淸) 나라를 도와 나선(羅禪)조사(詔使) 조에 상세하다. 을 치러 갈 때에 초관(哨官) 1원, 포수 1백 명, 소통사(小通事) 2명과 군관(軍官)ㆍ기고수(旗鼓手)ㆍ화정(火丁) 등 모두 48명을 거느리되 북도(北道)가 흉년이 든 까닭으로 겨우 10일 먹을 양식만 가지고서, 영고탑(寧古塔)의 군사를 따라 4월에 왈가지(曰可池)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가다가 후통강(厚通江)에서 적군을 만나 여러 날을 싸우니, 탄환에 맞아 죽은 적군이 많았다.

추격하여 호통급골지(好通及骨地)에 이르니, 적이 물을 거슬러서 멀리 도망갔다. 6월에 변급(邊岌)의 전군(全軍)이 돌아오자, 사정(司正) 조동립(趙東立)을 보내 승전을 알렸다. 《통문관지》

○ 무술년(1658)에 북우후 신유(申瀏)가 청 나라를 도와 나선 조사 조에 상세하다. 을 칠 때, 초관 2원, 조창수(鳥槍手) 2백 명, 기고수ㆍ화정 모두 60명을 거느리고서 석 달 먹을 양식을 가지고 대국[淸國]의 군사를 따라갔다. 6월 5일에 배를 띄워 10일에 흑룡강(黑龍江)에 이르러 적군을 만나 온종일 싸워서 적의 배 10척을 불사르니, 적이 배 한 척을 가지고 밤을 틈타 달아났다. 우리 군사는 탄환에 맞아 죽은 사람이 8명이요 부상자가 25명이었다. 13일에 중국 군사와 함께 배를 타고 송가라강(宋加羅江)에 이르러 머무르면서 얼음이 얼기만을 기다렸다. 기해년에 조서를 내려 싸우다가 죽은 병정 8명에게 은(銀) 30냥을 주고, 부상당한 병정은 5등으로 나누어 은 10냥에서 5냥까지 주었다. 《통문관지》

○ 숙종 갑오년(1714)에 청인(淸人)이 경원(慶源) 건너편 2리쯤 떨어진 곳과 훈융(訓戎) 건너편 3리쯤 떨어진 곳에 집을 지으니, 통역관 김경문(金慶門)을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북쪽으로 비스듬히 뻗은 경계는 단지 강 하나가 격(隔)해 있을 뿐이라, 비워 두었을 때에도 오히려 간악한 백성이 금법을 무릅쓰고 뚫고 건너다닐까봐 걱정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서로 경계를 접하고 있으므로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이 생기기 쉽다.”는 뜻으로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니, 조서(詔書)를 내려 봉천장군(奉天將軍)ㆍ부윤ㆍ영고탑장군(寧古塔將軍)을 시켜 조사하여 마침내 장군 안도립(安都立) 타목노(他木奴)의 둔(屯)과 영고탑 나거관병(那去官兵)의 둔에 가서 집들을 헐라고 하였다. 《통문관지》

○ 갑자년(1684)에 무산부(茂山府)를 삼봉평(三峯坪)에 설치하고, 부령(富寧)의 북쪽과 회령(會寧)의 서쪽을 떼어 무산부에 붙였다.

○ 숙종 임진년 38년(1712) 에 오자총관(烏刺總管)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백두산에 경계를 정하니, 우리나라에서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 이선부(李善溥)를 보내어 목극등을 삼수부(三水府)의 연연(蓮囦)에서 만나게 하였다. 목극등이 다만 통역관 김응헌(金應瀗)ㆍ김경문(金慶門)만을 데리고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 분수령(分水嶺)에 이르러 마침내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 그때에 조정에서 참판 권상유(權尙游)를 보내어 목극등을 서도(西道)에서 접반(接伴)하게 하였으나, 목극등이 북도로 해서 중화(中和)에 도착했다가 바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쳐 참판 박권을 접반사로 삼아 함경 감사 이선부와 같이 후주(厚州)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목극등이 흥경(興京) 변계도(邊開道)로 해서, 작은 배 10척을 만들어 가지고 두도구(頭道溝)로 나가 압록강에 들어가 물길[水路]과 육로(陸路)로 아울러 나가 올라가서 10일 만에 후주에서 서로 만나고, 4일 만에 혜산(惠山)에 이르러 배에서 내려 산으로 90여 리를 올라가니, 길이 점점 험준하므로 부시위(副侍衛) 포소륜(布蘇倫) 등과 접반사ㆍ감사 이하로 하여금 지름길로 해서 무산(茂山)에서 만나기로 기약하게 하고, 목극등은 통역관과 하인 20명, 조선 관원 6원, 길 아는 사람 2명과 함께 15일 동안 먹을 양식을 싸가지고 2백여 리를 가서 강의 근원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 백두산 꼭대기 못 가에 이르러서 돌에 갂아 비를 세웠다.그 비에, “오자총관 목극동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변방을 조사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토문강(土門江)이 되었으므로 분수령(分水嶺) 산의 돌에 새겨 기록한다.”고 하였다. 이어 토문(土門)으로 흐르는 물길 아래를 따라 약 3백 리를 가 무산에 도착하니, 또 작은 배 4척을 만들어 물과 육지로 물줄기를 따라 내려와 경흥 바다 어귀에 이르자, 도로 경원으로 가서 강을 건너 후춘(厚春)을 경유하여 갔다. 《통문관지》

○ 목극동이 화사(畵師)를 데리고 와서 가는 곳마다 산과 물을 그려 계역도(界域圖) 2본(本)을 만들어서 하나는 황제에게 바치고 하나는 우리나라에 바쳤으며, 또 글로 적어 접반사와 감사에게 보냈는데, 그 글에, “압록ㆍ토문 두 강은 모두 백두산에서 발하여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흐르니, 원래 정하기는 강의 북쪽은 대국[淸國] 땅이 되고 강의 남쪽은 조선 땅이 되었다. 토문의 근원을 따라서 자세히 살펴보면, 그 물이 흐르다가 수십 리에 이르러 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돌 틈으로 몰래 흘러 1백 리를 내려가서야 큰 물이 나타나니, 이 물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국경을 알지 못하여, 이 때문에 국경을 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국경을 설치하고 굳게 지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국경이 있는 것을 알아서 감히 서로 범하지 못하게 하여 너희와 우리 양편 모두 무사히 지내게 할 것이다.” 운운하였다. 접반사와 감사가 혹 흙을 쌓자고도 하고, 혹 들을 모아놓자고도 하고, 혹 나무 울타리를 세우자고도 하였는데, 농한기를 이용해 역사를 시작하겠다는 뜻으로 회답하였다. 《통문관지》

○ 현종 계축(1673)년에 함경 감사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옛날에 세종께서 다시 육진(六鎭)을 개설하였는데, 그때에 번호(藩胡)의 강내(江內)에 살던 사람은 자기가 살던 땅을 떠나 옮겨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그대로 강 안에 거주하면서 영원히 배반하지 않고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형세가 한꺼번에 모두 추방하여 원한을 돋우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조정에서 마지 못해 장성(長城)을 강가에 쌓고, 무릇 강의 안에 있는 우리 땅으로 장성 밖에 있는 것을 떼어 주어 번호로 하여금 살게 하였으니, 이른바 차유령(車踰嶺) 밖입니다. 무산(茂山)에서 북쪽으로 1백 20여 리를 가서 정승(政丞)ㆍ파오(破吾)ㆍ달죽(達竹)ㆍ돈모(頓毛)ㆍ노동(老東)ㆍ양동(良洞)ㆍ노토(老土) 부락 등의 땅을 지나 강가에 이르면 비로소 마을우시배(亇乙于施培)라는 땅이 있으니, 마우(亇于)는 오랑캐 추장의 이름이고, 시배(施培)는 오랑캐 말로 성보(城堡)입니다. 지금까지 성터에 옛 자취가 있으며, 마을우시배에서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면 헐연평(歇然坪)ㆍ가선(加先)ㆍ이시(利施)ㆍ도곤(都昆) 등의 땅을 지나 1백 수십 리를 가야 비로소 회령 농산보(農山堡)로 나옵니다. 이른바 헐연평 등 여러 땅은 모두 옛날 오랑캐(胡人)들이 모여 살던 부락으로 들판이 넓은 것은 마을우시배만 못하나, 토지의 기름진 것은 하늘이 만들어 놓은 곳으로 결코 버려서는 안 되고 지켜야 합니다. 삼수(三水)에서 압록강을 따라 서쪽으로 70리를 내려가면 후주(厚州) 옛땅 옛날 무창(茂昌) 동쪽 1백 33리 거리이다. 이 있습니다. 이른바 후주라고 하는 곳은 어느 해에 설치되고 어느 때에 폐지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들판이 광활한 것과 토지가 기름진 것은 삼수(三水)ㆍ갑산(甲山)과 크게 다르고, 지형이 점차 낮아지고 기후가 자못 따스한 것도 역시 삼수와 갑산과 달라서 서리가 가장 늦게 내리고 오곡이 모두 잘 익으니 참으로 살 만한 땅입니다. 또 함흥에서 별해(別害)와 삼수 경계까지가 거의 4백여 리이고, 삼수에서 별해까지가 또 4백여 리이니, 관부(官府)의 정령(政令)이 4백 리 밖에까지 미치기 어려워 그 사이에 사는 백성들이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 금수가 길들이기 어려운 것과 같은 면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 속에서 서로 침략할 우려가 없지 않으나, 관가가 동떨어지게 멀어서 달려가서 호소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만약 다시 후주를 설치하여 변경을 방비케 하려면, 장진강(長津江) 위아래에 있는 여러 보(堡)는 모두 폐지하고, 함흥(咸興) 황초령(黃草嶺) 서쪽과 삼수 이송령(李松嶺) 남쪽에 있는 땅을 떼어서 합쳐 한 군(郡)으로 만들고, 읍(邑)을 별해에 설치하면 경계를 나누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서 실로 적합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강을 끼고 있는 땅이 저들의 경계와 접근해 있으므로 진(鎭)을 옮기고 백성을 모아 놓은 뒤에는 몰래 국경을 넘어오는 폐단을 막을 수 없으니, 반드시 잇달아 일이 생길 우려가 있다.’고 하나, 이것은 또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지금 회령(會寧)에서 경흥(慶興)까지의 다섯 고을의 치소(治所)와 여러 진보(鎭堡)들이 모두 강가에 있으니, 만일 몰래 넘어오는 것을 근심하여 진보를 설치할 수 없다고 하면, 회령 등 다섯 고을의 치소와 진보를 모두 내지(內地)로 옮겨 들여야지 어찌 유독 이 땅만 진을 설치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그만두겠습니까. 우리 태조(太祖)가 동북면 원수(元帥)로서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함흥의 황초령을 넘어 사군(四郡)과 강계(江界) 등의 땅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서 동녕부(東寧府)의 올자성(兀刺城)을 쳤으니, 여기가 바로 태조가 바람과 서리를 맞아가며 칼날을 무릅쓰고 험한 길을 다니며 공을 세운 땅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밖으로는 어두운 밤중에 도적질해 가는 근심이 없고, 안으로는 떠돌고 옮겨 다니며 내지로 들어와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백성들이 있으니, 아침에 영을 내리면 저녁에 성취할 수 있으므로 우리 경계를 도로 찾는 좋은 일이 있을 뿐 지키기 어려운 근심은 없을 것인데, 무엇을 꺼려 하시지 않습니까.” 하였다. 또 무산(茂山)에 읍(邑)을 설치하자는 상소가 있다

○ 북쪽 오랑캐가 중국의 근심거리가 된 지 오래되었다고 하는 것은 명(明) 나라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수봉(受封)을 하기 전에는 명 나라 천자가 거의 베개를 편히 베고 눕지를 못하다가, 우리가 봉공(封貢)한 뒤부터 명 나라 말까지는 마침내 아무 일이 없었다. 청인(淸人)이 연경(燕京)에 들어오게 되자, 또 돈과 비단으로 꼬이고 혼인으로 결탁하여 친왕(親王) 이하에서부터 태길(台吉) 등 명색(名色)에 이르기까지 얼기설기 얽어 놓아 두려워 벌벌 떨기를 새끼를 가진 범처럼 하여, 교만한 자식처럼 떠받드니, 이러고서야 그 형세가 또한 어찌 오래도록 일이 없을 수 있으랴.그런데도 갑신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백 년이 되도록 북쪽 오랑캐가 북경(北京)에 들어가서 에워쌌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명 나라의 일로 말하면 하늘의 기수(氣數)가 마침 난리를 싫어하는 때를 만나 그런 것이 아니냐. 북쪽 오랑캐가 과연 창궐하여 제어할 수가 없게 되었으면 관(關) 밖에 있는 몽고도 또 반드시 난리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동과 심양(瀋陽)이 소란하여 동국(東國)도 편안하지 못하였을 터인데, 지금 백 년이 되도록 편안하여 동북 두 변방에 근심이 아주 없으니, 이것은 참으로 우리나라의 지나간 옛날에 없었던 다행한 기회이다. 우재(迂齋)의 글

[-D001] 기미() : 

이적(夷狄)에 대한 외교 정책으로, 관계를 끊지도 않고 친근하게 하지도 않게 하여 반발하지 않도록 얽어 매어 두는 것을 말한다

[-D002] 풍패() : 

한 나라 고조(高祖)의 고향이 풍패이므로, 후세의 임금들이 자기 선대의 고향을 풍패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