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8. 10:41ㆍ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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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1년 정사(1797) 9월 18일(갑신) 양력 1797-11-06
21-09-18[08] 헌납 정지원이 상소하여 북도 군오의 퇴폐함과 그 개선책에 대해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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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납 정지원(丁志元)이 상소하기를,
“신이 북쪽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때 오랜 시간 재직하여 보고 들은 것이 꽤 상세하였으므로 함경도 관방(關防)의 허실과 도리(道里)의 형편에 대해 대략 생각한 것이 있어 감히 이렇게 덧붙여 진달합니다.
우리나라의 갑병(甲兵)은 북쪽이 강하고, 우리나라의 관방은 북도(北道)가 견고합니다. 그런데 북도 중에서도 육진(六鎭)과 삼수(三水), 갑산(甲山)은 가는 강줄기 하나만을 외적과의 경계로 삼고 있는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의 최일선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갑병으로 말하면 오랫동안 맡아 지키면서 방어하는 군졸이 한 명도 없고, 관방으로 말하면 공지(空地)에 지름길이 되는 사잇길이 있으니, 국가에서 뒷날을 위해 염려하는 것이 어찌 이처럼 소홀하단 말입니까.
북쪽의 10개 주(州)가 가장 중요하게 믿는 것은 바로 친기위(親騎衛) 1000인(人)입니다. 그런데 큰 고을은 100여 인, 작은 고을은 50여 인씩 남북으로 거리가 1000리(里)나 떨어져 있는 지역에 흩어져 있습니다.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미친 듯이 질주하여 일제히 약속된 기일 안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른바 친기위로는 불시의 쓰임에 힘이 된다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 밖에 군오(軍伍)의 피폐함은 삼남(三南)보다 심하고 무학(武學)의 변변찮음은 거의 꼴이 말이 아닙니다. 10개 주든 삼수, 갑산이든 할 것 없이 아침저녁으로 관부(官府)를 지키고 있는 자라고는 약간의 이례(吏隷)와 몇 명의 장교(將校)에 불과할 뿐입니다. 만일 홀온(忽溫)이 저돌적으로 공격해 오고 탕개(湯介)가 벌 떼처럼 밀려와 백주에 텅 빈 성(城)을 멋대로 돌아다니며 마구 짓밟는다면, 누가 성첩(城堞)을 의지하여 막아 내며 누가 대오를 벌여 놓고 적에 저항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백두산(白頭山) 아래에 천평(天坪)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니, 이는 곧 옛날의 이른바 대막(大漠)입니다. 이곳은 동쪽으로는 갑산의 허항령(虛項嶺)과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무산(茂山)의 장파(長坡)와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다(寶多)의 완항령(緩項嶺)과 통합니다. 완항령 아래가 바로 감평(甘坪)이고, 감평의 동남쪽이 바로 배성포(排星浦)인데, 장파는 무산의 공지이며, 완항령과 감평은 길주와 갑산 사이의 공지이고, 배성포는 북청(北靑)과 함흥(咸興) 사이의 공지입니다.
장파에서 감평까지의 거리는 겨우 100여 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천평에서 영탑(寧塔)이나 오라(烏喇)까지의 거리는 모두 4, 5일 거리가 채 되지 않고, 선성(船城)과 애원(艾源)과는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의 거리이며, 장파와 천평은 또한 서로 지척에 붙어 있습니다. 배성포에서부터 왕왕 인가(人家)가 있고 한 줄기 사잇길이 곧장 안변(安邊)까지 뻗어 있는데 그 길은 지름길이고 험준한 요새 같은 곳도 아니어서 저들이 만약 영탑에서 출발하여 천평에서 쉬고 사람들마다 두서너 되의 마른 양식을 가지고 3일 정도 말의 힘을 빌린다면 안변을 곧장 공격할 수 있습니다. 안변 이북에 강한 군사가 있고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지(城池)가 있다 하더라도 승패를 결정짓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신은 북관 10개 주와 삼수, 갑산, 장진(長津)에 각각 부기위(附騎衛) 10개 번(番)을 설치하고 번에는 1명의 장수를 배치하며, 또 별장(別將) 1인을 두어서 10개 번을 모두 통솔하게 하고 날짜를 안배하여 돌아가며 지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봄가을 도시(都試)의 시사(試射)와 시방(試放)에서 합격한 출신(出身)을 겨울과 여름의 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구근과(久勤窠)로 녹용(錄用)한다면 벼슬이 아주 귀한 지방에서 공명(功名)을 몹시 부러워하는 무리들이 반드시 아래옷을 찢어 바지를 동여매고서 기꺼이 서둘러 행장을 꾸려 민첩하게 영(令)을 따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열흘이나 달포 사이에 1만 3000명의 정예병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뒷날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성에 오르면 침범하는 적을 충분히 막을 수 있고 진을 치고 대치하면 위세를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잇길을 차단하는 요체로 말하자면, 장파에 반드시 방어 시설을 설치해야만 합니다. 일단 장파를 지나도 감평을 거치지 않으면 달리 지름길이 없고, 또 감평을 지나면 곧바로 배성포로 내달아 안변에 도달할 수 있으니, 감평과 배성포에도 방어 시설을 설치해야 합니다. 이 세 곳에 모두 진보(鎭堡)를 설치하되 몇 년간 공을 좀 들여 견고한 성을 쌓고 부근의 각 고을에서 공천(公賤)을 옮겨 소속시켜서 토병(土兵)으로 바꾸어 정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농사를 짓게 하되 10년 동안 부세(賦稅)를 감면하여 주면, 토지가 없는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모여들어 3, 4년이 채 지나지 않아 어엿한 거진(巨鎭)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폐사군(廢四郡)에 백성을 모집하여 살게 하라는 명이 새로 내렸는데, 만약 또다시 장파의 역사(役事)를 일으킨다면 일시에 모두 거행하는 셈이 되니 문제될 소지가 있는 듯하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후주(厚州) 등 4개 군(郡)은 본디 토지가 비옥하고 인삼과 초피(貂皮)로 얻는 이득이 있습니다. 만약 그 일대를 한 도(道)의 관방으로 삼아 적들이 사잇길로 엿보는 우환을 차단하고자 하면 오직 이 장파 등 몇 곳이 가장 긴요할 뿐만 아니라 겸하여 4개 군의 이익에 의거하여 거듭 온 도의 관방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을 등한시하고 버려두어서 뒷날에 염려를 끼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입니다.”
하니, 주상이 묘당에 명하여 자신에게 물어 처리하게 하였는데, 묘당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은 관계로 그만두었다.
【원전】 47 집 43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과학-지학(地學)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신분(身分) /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정(軍政) / 인사(人事)
[주-D001] 신이 …… 때 :
정지원은 정조 14년(1790) 4월 30일에 함경도의 홍원 현감(洪源縣監)에 제수되어 정조 16년(1792) 12월 18일에 장령으로 새로 제수되기 전까지 재임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14年 4月 30日, 16年 12月 18日》
[주-D002] 가는 강줄기 하나 :
두만강을 가리킨다.
[주-D003] 오랫동안 맡아 지키면서 :
저본에는 ‘長在’로 되어 있는데, 《승정원일기》 같은 날 기사에 근거하여 ‘在’를 ‘直’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21年 9月 18日》
[주-D004] 홀온(忽溫) :
홀라온(忽剌溫)을 가리킨다. 두만강 이북에 근거지를 둔 야인 여진(野人女眞)으로, 어피달자(魚皮㺚子)라고도 한다. 선조 때 종성(鍾城)을 침범하는 등 육진의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나중에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建州女眞)에 병합되었다. 《宣祖實錄 40年 2月 6日》 《光海君日記 5年 2月 30日》 《仁祖實錄 1年 4月 23日》
[주-D005] 탕개(湯介) :
이탕개(尼湯介)를 가리킨다. 선조 초에 조선에 귀화한 여진 사람으로, 육진 지역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厚待)를 받았는데, 선조 16년(1583)에 경원(慶源)에 사는 여진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경원 부사 김수(金璲)가 이들에게 패하여 한때 여진 사람들이 경원부의 모든 진보를 점령하여 기세를 떨치기도 하였으나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에 의해 평정되었다. 《宣祖實錄 16年 2月 13日》 《宣祖修正實錄 16年 5月 1日》
[주-D006] 영탑(寧塔)이나 오라(烏喇) :
영탑은 영고탑(寧古塔)을 가리킨다. 영고탑은 청(淸)나라를 세운 건주 여진의 본거지이다. 숙종 때부터 명(明)나라와 함께 청나라를 물리쳐 청나라가 중원에서 쫓겨날 경우 청나라는 심양(瀋陽)에서 오라로, 오라에서 다시 옛 본거지인 영고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지름길이 되는 조선의 서북 변경을 이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변경 지방 운영책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오라는 현재 중국 길림(吉林) 지역이고, 영고탑은 흑룡강(黑龍江) 일대이다. 《承政院日記 顯宗 8年 10月 3日》 《肅宗實錄 23年 5月 18日》 《景宗實錄 2年 12月 1日》 《英祖實錄 11年 5月 26日》
[주-D007] 폐사군(廢四郡)에 …… 내렸는데 :
폐사군과 인접한 후주 지역은 땅이 비옥하여 많은 사람이 들어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정조 19년(1795) 후주에 진(鎭)을 설치하게 하였다. 《正祖實錄 2年 1月 13日》 《承政院日記 正祖 19年 11月 24日》
조선왕조실록 > 정조실록 > 정조 1년 정유 > 4월 7일 > 최종정보
정조 1년 정유(1777) 4월 7일(임인)
01-04-07[01] 감시 어사 심풍지를 소견하고 북관의 재해 상황을 순문하다
[DCI]ITKC_JT_V0_A01_04A_07A_00010_2005_002_XML DCI복사 URL복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감시 어사(監市御史) 심풍지(沈豐之)를 소견하고 북관(北關)의 재해(災害) 상황을 순문(詢問)하였다. 이보다 앞서 함경 남도 병마 절도사 김상옥(金相玉)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북청(北靑) 등 세 고을의 경계에 지명(地名)이 천평(天坪)이라는 곳이 있는데 동서로 널리 뻗어나간 것이 거의 1백 리나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여 사는 유민(流民)이 지금 1백여 호(戶)가 되며 창고를 설치하고 조적(糶糴)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간에 지름길이 있는데 삼수(三水)ㆍ갑산(甲山) 사람이 이 길을 경유하여 왕래하고 있으니, 의당 하나의 진(鎭)을 설치하여 요로(要路)를 차지하고 경보(警報)를 올리게 하면 유사시에 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명하여 그에 대한 편부를 상의하여 아뢰게 하였다. 도신은 첩첩 준령(疊疊峻嶺)이어서 매우 험저(險阻)하다고 하였고 수신은 사잇길은 평탄하다고 하여 말에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그리하여 다시 심풍지에게 감시(監市)하러 가는 길에 형편을 상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심풍지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천평의 지름길은 갑산에서 함흥(咸興)으로 통하여 나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평지(平地) 같습니다. 그러나 4월에 눈이 내리고 7월에 서리가 내리므로 백성들이 조수(鳥獸)처럼 수시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영로(嶺路)가 높고 가파른 데다가 동세(洞勢)는 깊숙하고 험하니, 수신(帥臣)이 이른바 길이 평탄하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긴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 적이 침입해 오는 길인 후치(厚峙)를 버리고 원천(元川)을 취택한다는 것은 이야말로 상리(常理)를 벗어난 것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후치와 천평 안쪽과 장령(長嶺)의 북쪽에 있는 수백 년 동안 기른 나무들을 불태우기도 하고 베어내기도 하여 보기에도 한심스러웠으니, 조정에서 의당 금칙(禁飭)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특별히 진보(鎭堡)를 설치하는 것은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는 곧 남병사(南兵使)의 관할인데, 영로(嶺路)가 막힌 것과 수목(樹木)의 벌채를 금하는 것은 모두 수신(帥臣)의 책임이니, 청컨대 엄히 신칙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심풍지가 또 아뢰기를,
“관북(關北)은 곧 무예(武藝)를 숭상하는 지방인데 남ㆍ북관(南北關)의 무과 출신(武科出身)은 입격한 뒤에 귀속(歸屬)되는 데가 없으니, 청컨대 친기위(親騎衛)의 예(例)에 의거하여 1천 인씩 대(隊)를 만들어 감영(監營)과 남북의 병영(兵營)에 나누어 예속시켜 별친기위(別親騎衛)라고 호칭하고 매년 세 곳의 도시(都試)에서 으뜸을 차지한 사람은 북도 만호(北道萬戶)나 혹은 권관(權管)에 승차(陞差)시킨다면, 1천여 명의 용맹하고 건장한 군졸을 얻을 수 있고 격려 권면하여 수습하는 방도에도 진실로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대신(大臣)이 어사가 논한 것이 진실로 의견이 있다는 것으로 시행하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였다. 여러 장신(將臣)들에게 두루 순문(詢問)하고 이어서 도신ㆍ수신에게 상의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행할 것을 명하였다.
【원전】 44 집 66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군사-관방(關防) / 호구-호구(戶口)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