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9. 17:01ㆍ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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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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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4월.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두목들을 보내어 상세한 것은 강항(姜沆)의 장계(狀啓)에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침입해 들어오다. 평행장(平行長)이 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선봉이 되어 병선 4만여 척과 군사 1백만으로 바다를 덮고 와서는, 13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기회를 타서 곧장 부산(釜山)으로 쳐들어 왔다. 그때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로 사냥을 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조공(朝貢) 오는 왜인이라고만 생각하고 걱정거리로 여기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 병선이 무수히 몰려오는 것을 보고야 급히 돌아와 성으로 들어갔다. 성문이 겨우 닫히자 왜적들은 이미 상륙하여 성을 백 겹으로 포위하였으며, 얼마 안 가서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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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립(申砬)이 용인(龍仁)을 지나다가 왜적의 기세가 창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밀계(密啓)를 올려, “왜적의 기세가 무척 성해서 정말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세가 답답하고 절박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운운.” 하니, 도성에서는 신립을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었는데 답답하고 절박하다고 한 밀계의 소식을 듣고, 사민(士民)들이 들끓고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도망쳐 흩어지다.
○ 신립이 달려 충주(忠州)를 지나서는 조령(鳥嶺)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타고 활쏘기가 불편하겠기로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李鎰)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년(1570, 선조 3)과 을묘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경오년의 왜적은 겨우 웅천(熊川) 두어 고을을 함락시키고는 패하여 돌아갔고, 을묘년의 왜적은 달량(達梁)을 함락시켜 병사(兵使) 원적(元迪)을 죽이고는 잇달아 강진(康津) 등의 고을을 함락하여 영암(靈巖)에까지 왔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또 북쪽 오랑캐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하니, 신립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패군(敗軍)한 데다 또 군졸들을 경동(驚動)시키니 군법으로는 목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하고, 마침내 달천(㺚川)충주의 땅이다. 에 주둔하다.
27일.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과 조방장(助防長) 이지시(李之詩)가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남원(南原) 운봉(雲峯)으로부터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영남을 구원하러 가다.
○ 흉악한 왜적이 조령을 넘어 달천으로 달려 들어오니 신립은 패전하여 죽었다. 당초 적병은 두 재[嶺]의 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당도하자 산길은 고요하고 사람의 발자취도 전연 없는지라 마침내 크게 기뻐하여 날뛰면서 곧장 충주를 범했다. 한편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종사 김여물(金汝岉)이 이일(李鎰)의 말에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ㆍ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하고 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중을 놀라게 한 일에 노하여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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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병이 충주(忠州)로부터 곧장 경기로 향하다. 임금은 신립(申砬)이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이어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서쪽으로 명 나라에 긴급한 사정을 고하기로 계획을 정하고 우선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元)을 보내어 평안도ㆍ황해도를 순찰하게 하고, 또 대신에게 명해서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립하여 군사와 국무의 중대한 일을 감무(監撫)하도록 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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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왜적이 장안성(長安城) 안으로 들어오다. 하루 전날, 왜적이 성문 밖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성 안의 반도(叛徒)들이 나와서 맞이하면서, “나라는 비었고 임금이 없으며, 성은 버려져 지키지 않는다.” 하자, 왜적이 그제서야 성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앞서 경상도 양산(梁山)의 관노(官奴) 황응정(黃應禎)이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너의 나라는 방어는 해서 무엇할 거냐. 불과 20일이면 틀림없이 서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왜적들이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는 모두 두목[酋]을 남겨두어 원[宰]이라 칭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아서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주었으며 겸하여 명패(名牌)를 만들어서 그들이 항복하여 내부(來府)하였음을 표시하게 하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고식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부산(釜山)으로부터 서울과 개성(開城)에 이르는 세 길의 상하 30리마다 진(陣) 하나씩을 설치해서, 깊이 들어가다가 길이 막히게 될 우려에 대비하였다. 서울에 입성한 후에는 먼저 궁궐과 종묘를 불태우고 연달아 공사(公私)의 가옥을 태우며, 숨겨 둔 재물을 뒤져내어 매일같이 본토(즉 일본)에 보내고, 군사들을 휴식시켜 관서(關西)와 북쪽 길로 향할 계획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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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적의 장수 평청정(平淸正)ㆍ평행장(平行長) 등이 서울에서부터 길을 나누어 출발하다. 애초엔 왜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군사를 8부(部)로 나누었는데, 1부의 무리가 거의 10여만 명에 달했고 총대장(總大將)은 각각 4,5 명으로 해서 우리나라 8도를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북방은 군사의 비결에 꺼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 장수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사나운 자를 택하여 함경도로 보냈던 바 평청정이 그를 맡은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수길 등은 서울에 머물러 주둔한 채 남별궁(南別宮)에 들어가 있었고 평청정 등은 서울에서 동쪽 길을 잡아 강원도를 지나 함경도로 향했는데, 이들이 지나 가는 곳은 적지(赤地)가 되어 천 리를 가도 사람 사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평행장ㆍ평의지(平義智) 등은 서울에서 서쪽 길을 잡아 해서(海西)로 향했는데,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신길(申硈)을 중군(中軍)의 장군으로 삼고 이빈(李薲)과 이천(李薦)을 좌우의 장군으로 삼아 임진(臨津)에서 방어하다.
14일.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또 근왕병 도합 10여 만을 동원하여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을 수송하는 자가 갑절로 늘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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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대부대의 왜적이 하루는 사람을 죽여서 시위하라는 영을 내리자, 동대문으로부터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반식경에 쓰러진 시체가 길에 가득 차고, 왜적에게 항복하고 부동(附同)한 백성이 채 도망가지 못한지라, 피바다와 살더미의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중지시켜 다시 살육을 엄금하고 각 문에다 방을 내걸기를, “남자는 농사에 힘써 자기 생업에 안정하고, 여인은 누에고치 길쌈을 일삼아라.” 하고, 또 강원도와 경기도에 글로 고시하기를, “대왕(大王)은 이미 도망갔고 중국도 지금 일본에 예속되었으므로 사자[使价]를 보내 각 도를 다스리려 하니, 나라의 선비들 및 촌 백성들이 일본에 복종하기를 전대(前代)에 복종한 것 같이 함에 어찌 이론(異論)이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 군현(郡縣)의 관창(官倉)에 있는 미곡ㆍ옥백(玉帛)ㆍ사마(絲麻) 등은 흩어 없애지 말아야 한다. 또 모(某) 목사[牧主]ㆍ모(某) 현감이며, 백성 남녀들도 역시 아무데나 가지말고 사자를 섬기기를 바란다. 이 점 유의하라. 천정(天正 당시의 일본 연호) 임진년 월 일, 풍신수가(豐臣秀家)ㆍ행정(行貞)ㆍ길성(吉城) 등이 양도(兩道)의 이(吏)ㆍ호(戶)ㆍ예(禮)ㆍ형(刑)ㆍ공(工)의 백(伯 즉 그 관계 책임자를 말함) 등에게 부치노라.” 하였다. 흉악하고 해괴한 말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만 대를 두고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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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이 서경(西京 평양)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駐蹕]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다.
조종이 창업해 놓은 기업(基業)에 자리잡고 편안하게 지내느라 위험이 닥쳐올 일을 잊고 있다가 이미 전쟁의 핍박에 직면해 버린 이때 원량(元良)을 왕세자로 하고 신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노라. 왕위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난시(亂時)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가. 이에 파천길을 옮겨야 하는 날에 즈음하여 널리 고유(告諭)하는 글을 선포하노라. 못난 이 몸이 명철하지 못하여 국가의 다난한 때를 만났다. 25년 동안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억만의 생령이 나를 떠나 버리니 앞으로 닥쳐올 백성의 원망을 어찌하리오. 다행히 이번에 인지(麟趾 세자를 가리킴)의 노래를 널리 폄은 실로 조종의 가호(加護) 있으심에 힘입은 것이로다.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에는 비록 부끄러움이 있지마는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마땅히 일찍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노라. 책봉의 예(禮)는 근엄하게 해야 한다는 한신(漢臣)의 장주(章奏)가 한갓 잦았거니와 날짜를 오래 늦추면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다만 이 야만 오랑캐의 외침(外侵)이 마침 국내(國內)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빚어져, 수도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 여러 성의 장벽이 일제히 무너졌다. 재앙이 내 신변에까지 다가와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이 옮겨졌으니 나라의 운명은 다급하고 인심은 두려워하기만 한다. 내 어찌 양위(讓位)를 부질없이 고집하겠는가. 이때야말로 세자를 정하는[定本] 일을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琿)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철하며, 학문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억조 백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게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하여 왔으니, 그는 선왕의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이 비록 창졸간에 거행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계획은 사실 전에 정해진 것이니 모든 백관(百官)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이란 본래 급작스러이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 와서야 비로소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다만, 전에 서울에서 이미 모든 백관의 축하까지 받았던 것이다. 온 나라 안[關中]에 소해(小海)의 은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의 광휘(光輝)가 바라보인다. 황천(皇天)도 우리 조종을 보우하는데 사직(社稷)인들 어찌 한쪽 구석 땅에서 편안하겠는가. 적의 혼이 이미 가 버리자 한강의 바람과 물결이 맑아지기 시작하였고, 관군이 분발하려 마음먹자 우리 진터가 확청(廓淸)되어 간다. 용루(龍樓)에 문침(問寢)하는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鶴禁)은 구도(舊都)의 위의를 회복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들은 다 나와서 들어 보아라. 아! 큰 강을 건너는 데 그 나루터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구나. 어려움을 구출하기 위해 원자(元子 즉 왕세자)를 공경스러이 보호하라. 현명한 계승자를 택하여 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후일의 승평(昇平)은 실로 오늘의 이 일에 말미 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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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하교하다.
큰 물을 건너는 데 나루터 없어 바야흐로 배와 노로 건널 바를 계획하고, 넘어진 나무에 싹이 돋은 것 같아서 오직 나랏일을 부탁하는 데 마땅한 사람 얻은 것을 다행하게 여겨, 이에 군사와 군정의 권한을 맡겨 부흥의 대업을 이룩하기 바란다.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엷은 몸으로 외람되이 나라의 큰 기틀을 지켜, 음우(陰雨)가 내리기에 앞서 뽕나무 껍질을 거두는 데 경계함이 있어서 매양 깊은 밤중에 썩은 새끼줄로 말을 모는 것같이 조심하였으니 어찌 백성의 병폐를 소홀하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바다 섬의 추악한 오랑캐가 사람과 짐승이 본성을 달리함을 생각지 않고, 처음에는 상국(上國 명(明) 나라)에 유감을 품고 하늘을 향해 활을 당겨 쏘려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하여 감히 사람을 씹는 입을 움직여서, 모든 백성들을 거의 남김없이 유린하고 서울에까지 급히 충돌해 온 것이다. 칠묘(七廟)가 불타 소진되었으니 폐허가 된 데 개탄함을 견디지 못하겠고 삼궁(三宮)이 별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파천하는 어려움을 함께 하였으니, 이미 사람과 귀신의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고 섶에 누워 쓸개를 핥으면서라도 그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비록 나라의 운이 불행해서라고는 하지마는, 진실로 내가 덕이 적고 어리석어 그렇게 된 것이로다. 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이 이미 심하나 백성들은 그 덕을 알지 못하고, 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이 한갓 간절하나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어디로 돌아갈 건가’ 하는 원한은 바야흐로 깊고 깊은 물에 임하는 것 같은 두려움은 점차로 극심해지니, 제사를 주관하여 신주를 받들 중대한 자 아니면 나라를 일으키고자 하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음을 생각하노라. 세자 혼(琿 광해군)은 훤칠하고 숙성하며 그의 인효(仁孝)는 본래부터 알려져 뭇 아래 사람들이 아껴 추대하니 넉넉히 중흥의 운을 족히 찬할 수 있는지라, 사방의 사람들이 그를 구가(謳歌)하여 다들 이르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시로다.” 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 전에 결정하였고, 군국의 대권을 총수(總帥)하는 명령을 의논할 수 있도다. 이에 혼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섭리하게 하노니, 무릇 관작을 제배(除拜)하고 상벌을 시행하는 등의 일을 편의에 따라 스스로 결단하게 하노라. 아! 영무(靈武)의 의기(義旗)를 돌려와 이 나라의 건곤(乾坤)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라거니와, 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를 놓고 부자가 다시 만나 기뻐할 때가 속히 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노라. 나라 사람들은 각각 세자를 돕고 추대하는 마음을 격려하여 함께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이룩하라. 너희들 정부는 중외에 뚜렷이 일러주어 다들 이 일을 들어서 알게 하라. 그 때문으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잘 알리라 생각하노라.
26일. 대군이 다 진위평(振威坪)에 모이니 무릇 13만이다. 깃발이 해를 가리고 군량을 운반하는 대열이 1백여 리에 늘어섰다. 경호(京湖)의 피난민이 양떼를 몰고 가는 위세를 잘못 믿고 혹간 돌아와 모이는 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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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적병이 평양을 함락시키고 조정은 의주(義州)로 향하다. 몇 일 전에 적병이 대동강에 다가들자 그곳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다 무너졌다. 11일에 거가가 숙천(肅川)으로 가서 이덕형(李德馨)을 보내 요동(遼東)에 가서 위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중전(中殿)은 강계(江界)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은 함경도로 각각 나누어 보내고, 세자에게 명해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원도로 가게 하였다. 거가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기성(箕城)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에 치자(馳咨)하여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이어 의주(義州)에 도달했는데 시종하는 관원으로 따라간 자가 단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때 중국 지방에서는, “조선이 왜를 향도한다.”는 헛말까지 나와 수도에까지 전해져서 병부(兵部)에서 차관(差官) 황응향(黃應陽) 등을 보내와 실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임금이 그들을 용만관(龍灣館) 의주의 객사이다. 에서 접견하였는데, 담화하는 동안에 황응양이 왜적의 중[僧]인 현소(玄蘇) 등이 평양에서 본국의 예조에 보낸 글을 보고는 가슴을 두들기고 눈물을 쏟으면서 말하기를, “중국을 위해 대신 병화를 당하면서도 의롭다는 명성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이 악명을 받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억울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황응양이 사정을 퍽 자세하게 회보하여 명 나라 병부에서 강력히 상주(上奏)하여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때 사은사(謝恩使) 신점(申點)이 중국의 수도에서 곡소(哭訴)하고 병ㆍ예부 각 아문(衙門)에서 계속 상주하여 위급을 고하자, 중국 조정에서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 유격장(遊擊將) 사유(史儒) 등으로 하여금 요동병 3천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게 하였다. 고사(考事)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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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星州)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이 사방의 문에 봉명국(奉命國)이라고 써 붙이다.
○ 적장 청정(淸正)이 강원도를 지나 철령(鐵嶺)으로 쇄도하였는데, 철령 이전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함경 체찰사 김귀영(金貴榮)과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남병사(南兵使) 이 영(李榮)과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을 거느리고 도내의 기력이 왕성하거나 약한 남정(男丁) 5만여 명을 다 모아 가지고 철령을 지켰다. 선봉의 왜적이 연일 교전하다가 패하고 물러나자, 청정이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도달해서 당장에 선봉장을 목 베고서는 영을 내리기를, “한 번 북이 울리면 개미같이 달라 붙어라. 감히 뒤지는 자는 죽는다.” 하고는 곧 자신이 말에서 내려 검을 휘두르며 독전하니, 적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나서서 그 기세가 바람에 타오르는 불과 울려나는 우레 같았다. 아군이 크게 무너지고 김귀영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육진(六鎭)으로 향해 달아났다. 청정이 철령에서 이기고 함경도로 들어와 불태워 없애고 도둑질을 하는데, 그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의 참혹함이 다른 도의 몇 갑절이나 되었다.
○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군사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본도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2천과 함께 근왕군으로 서울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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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광(李洸)은 전주에서 본주(本州) 사람 문관(文官) 이정란(李廷鸞)을 주의 수성장(守城將)으로 하여 이웃 읍의 군사를 모아 계엄을 펴고 왜적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고, 또 남원(南原)에 전령하여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 본부(本府)의 선비들이 흩어진 군졸을 모집하여 향병(鄕兵)이라 칭하고 전 목사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로부터 여산(礪山)으로 향발하여 비밀리 장병들과 의논하기를, “금산과 무주의 왜적이 이미 용진(龍鎭)으로 향했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전주와 남원에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군이 본진(本鎭)을 다 떠나가야 할 것이니 노약자만을 남겨서 수비시킬 것이다. 우리 군대가 진산(珍山)으로부터 그 자들이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나가 나머지 무리들을 다 죽여버리고 뒤쫓아 추격하면, 그 왜적들은 전진해도 거점을 얻지 못하고 후퇴해도 돌아갈 곳이 없어 중도에서 낭패하여 스스로 황산(荒山)의 패전을 초래할 것이다.” 하고, 군사를 이끌고 은진(恩津)의 연산(連山)을 향해서 떠났다. 같은 진의 군량색(軍糧色)을 고목(告目 천한 사람이 높은 이에게 올리는 글)하기를, “가지고 있는 군량은 여산군(礪山郡)에서 수납(輸納)하겠나이다.” 하였다. 색리(色吏)는 남원의 색리이고 군량은 남원의 군량이다. 대체로 의병을 돕는 일은 각 읍이 다 그러했다. 대장의 행차가 22일 전주를 떠나 23일 여산에 머물렀다. 당일 도부(到付)한 금산의 전통(傳通)에, 옥천(沃川)의 양산현(陽山縣)을 분탕질한 왜적이 본군을 지향해 와 진을 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24일 동군(同郡)의 전통에는, 10리 거리에 진을 칠 것이라 했고, 서울의 왜적은 신립(申砬)과 윤두수(尹斗壽)가 각각 좌우 대장이 되어 1천여 명을 잡았다는 것이었으며, 여산군수가 구전(口傳)한 내용은 의병이 은진ㆍ연산ㆍ금산으로 지양한 것과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행차와 병사(兵使)가 일시에 직산(稷山)으로부터 진위(振威)로 향한 것이었다.
○ 금산(錦山)ㆍ무주(茂朱)에 있는 왜적의 기세가 매우 거세어서 내지(內地)로 쳐들어오므로 백성들이 공포심에 싸여 있었다. 이때에 정염(丁焰)이 남원(南原)의 향병장(鄕兵將)이 되어 남정(南亭)에 머물고 있었는데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정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의 추물(醜物 첩(妾)을 말한 것임)이 일가집 사람으로 언어를 좀 알아 들을 만한데, 오늘 아침에 전주(全州)에 윤씨의 첩은 전주 기생이다. 와서 왜적의 동향과 그 밖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 내용에,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이 금산(錦山)의 왜적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관군(官軍)은 적의 떼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덮쳐 공격하려 하였다. 이윽고 왜의 복병이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관군은 수가 많지 않아서 감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고산(高山)으로 후퇴하여 전주 감사(全州監司)에게 구원을 청하자, 8백 명을 뽑아 보냈다 하니, 길가에서 패해 무너졌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서울에 있는 적은 크게 패하여 서울 안에는 남은 적이 없기 때문에 병사(兵使)가 군사를 돌이켜 방금 고산으로 향하는 중이라 하고 후군(後軍)인 의병도 역시 고산으로 향한다 하며, 왜적이 옥천(沃川) 경계에 주둔하고 감히 금산(錦山) 지대를 들어오지 못한다 하니 이것으로써 적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컨대 각 진영에 선포하여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도록 하라. 신립(申砬)ㆍ윤두수(尹斗壽) 제군이 적의 무리를 모조리 무찔렀다고 하니 하느님이 우리 종묘 사직을 도와 주려는 것이라 매우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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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군의 백성들이 왜놈의 위력에 겁내지 말고 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가다듬어 한결같이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충의로운 분기가 격동하여 용기가 백 배나 솟을 것이니 저 왜적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적하겠는가. 하물며 지금 왜적이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끌고 깊이 들어와서 그 흉악한 기운이 이미 개성(開城)의 청석(靑石)에서 꺾이었고 서경(西京 평양)의 대동강에 침몰되었으며, 철령(鐵嶺)을 넘어 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에게 빼앗기고 명(明) 나라 병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조(祖)ㆍ곽(郭)ㆍ왕(王) 세 대장이 각기 정병 여러 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달려와 응원하며, 해군 10만 명이 산동성(山東省)으로부터 곧장 왜놈의 소굴을 공격하고 있으니 우리 세력은 저절로 확장되고 적은 망할 날이 머지 않은즉 이야말로 뜻있는 선비가 옷소매를 떨치며 공을 세울 절호의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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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明) 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당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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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 비안(庇安)에 주둔한 적이 방을 써서 붙이기를, “당도자(當途者) 일본국 재상(宰相)이 어명(御命)을 받든 것은 세상을 교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니, 군내(郡內)의 사람이 산중이나 혹은 해외로 피난간 자는 집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편안히 살라. 일본 사람으로 당인(唐人)의 처자를 빼앗은 자는 포박해서 죽이고 있으니, 농업에 종사하는 자는 부지런히 밭을 갈고 물을 대고 풀을 제거하여 가을 수확을 기다리라. 조선(朝鮮)에서 만약 무기를 가지고서 우리 군사의 왕래를 방해한다면 모조리 잡아서 형벌할 것이며, 만약 도망한 백성이 하소연할 일이 있으면 기록해서 개령(開寧) 우리 장군의 진으로 아뢰라. 이상 조목에 대하여 혹시 의심할지 모르나 하느님이 밝게 내려다보니 절대 어기지 않을 것이다. 천정(天正) 20년 7월 일. 안예 재상(安藝宰相) 대리 완호원차 삼보원충(完戶元次三寶元忠).” 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의 장수는 휘원유로(輝元留老)이니, 개령ㆍ비안(庇安)의 적은 필시 휘원의 부하일 것이다. 그 사연을 보니 흉악하고 간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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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錦山)에 진을 친 왜적이 다음과 같은 글월을 고시하다.
대일본(大日本) 대왕은 정치의 도를 조선에 베풀어 백성들을 구휼하려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바다와 육지의 길을 막아 도리어 원수를 사는가. 이른바 당랑(蟷蜋 사마귀)이 수레바퀴를 항거하고 비부(蚍蜉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든다는 말이 바로 이것인가. 이로 인해 깊은 여항(閭巷)을 찾아 들어가서 기병ㆍ보병이 깃발을 드날리고 칼날을 비껴 드니, 성문은 소실되고 집집마다 포성이 진동하였다. 역당들을 모조리 잡아 목을 잘라 죽이려고 했으나 죄과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기 어렵고, 또 그 부모 처자가 가엾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여 굶주림을 구원해서 생명을 보존하게 했다. 비록 이같이 했으나 싸우려 달겨드는 자는 살해할 것이다. 지난번 무관으로 들[野]에 있었던 사람이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옛집으로 돌아가서 해를 따라 풍속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정리하여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황제가 조선 황제와 더불어 반드시 회합을 갖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어찌 알지 못하느냐. 아무쪼록 이 말을 산중의 무관에게 알리어 활과 칼을 버리고 와서 항복한다면 무슨 죄를 당하겠느냐. 만약 이 뜻을 위반하는 일이 있으면 거듭 이 땅에 주둔하여 수백 명의 병관(兵官)을 거느리고 다시 살륙을 가할 것이다. 장협(長鋏) 오장대왕(吾將大王)이 거듭 안무하여 옛 조정에서 이 나라 천자를 위하니, 또한 천행(天幸)의 은혜가 내리기를. 이만 줄인다. 천정(天正) 20년 부상(扶桑) 신 안국사(安國寺). 이것을 보면 과연 전라 감사라고 칭호한 자이다.
또 투서(投書)를 얻어 보니, ‘야운(野雲)’이라 했다. 고경명(高敬命)이 해석하기를, “넓은 들에 희미한 구름 끊어지고, 빈 산에 조각달이 비끼었구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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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과천 현감(果川縣監)이 전달한 통문 내용에, “적병 한 부대가 개성부(開城府) 청석동(靑石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우리 군사에 패하였고,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서 패전한 뒤로 왜놈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몰래 도성으로 들어와 적 2백여 명을 마구 베었으며, 도원수 윤두수(尹斗壽)의 소속 군사가 또 적 1천여 명을 베어서 서울에 있는 적이 후퇴해 달아났다.” 하다.
○ 영남 초유사(嶺南招諭使)의 공문 내에, “본도 우도(右道) 여러 의병 2만여 기(騎)가 날마다 적을 공격하여 고령(高靈) 이하는 이미 회복되었으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적이 진퇴를 마음대로 못하고 나왔다 도로 들어가는 형편이니, 산중에 피란간 사람들에게 급히 이 기별을 전해서 사람마다 분연히 일어나 적을 치게 할 것이다.” 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도순찰사(都巡察使)가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당일로 병사에게 도부(到付)된 첨지를 보면, “지금 도착한 어지(御旨) 내에, ‘요동(遼東)에서 크게 정병 5만 명을 풀어서 강변에 머물러 성원을 하게 하고,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원(楊元)이 귀순한 오랑캐 5천 명을 친히 거느리고 앞서 와 요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조 총병(祖總兵)ㆍ곽 유격(郭遊擊)ㆍ왕 유격(王遊擊) 세 대장이 각기 수천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이미 압록강을 건넜고, 사 유격(史遊擊)은 정예부대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다. 어제 저녁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등초해 보낸 관전보(寬奠堡) 표첩(票帖) 내에 중국에서 산동도(山東道) 수군 10만으로 하여금 수로를 경유하여 곧장 왜적의 소혈(巢穴)을 두들길 모양이라 했으니, 경(卿)은 아무쪼록 연해 각 읍에 이 연유를 적어 관문이나 길거리에 방(榜)을 걸어 두루 알리라.’ 하셨다. 어지가 협정에 의거하여 이러하기에, 중국의 구원병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와서 군의 형세가 크게 떨쳤으니 왜적을 무찔러 없애고 국토를 회복할 날을 손꼽아 기약한다. 이 역시 민간에 알려 모두 듣게 하라.” 하다. 이상 공문은 각읍에 보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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