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8. 11:13ㆍ임진왜란
임하필기 제19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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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5년에 이순신(李舜臣)을 전라 좌수사로 삼으니,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왜적을 쳐서 크게 무찔렀다. 이에 앞서 왜와의 문제가 이미 야기되자 이순신은 창을 만들고 쇠사슬을 만들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또 지혜를 짜내어 큰 배를 만들었는데, 모습이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아 거북선이라 하였다. 그 제도는 배 위에 큰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의 작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하고 거기에 모두 뾰족한 송곳을 꽂아 사방 어느 곳에도 발을 들여 놓을 곳이 없게 하며, 앞쪽 용머리와 뒤쪽 거북이 꼬리 부분에는 모두 총구멍이 있고, 전후좌우로 각기 6개씩을 설치하여 큰 탄환을 쏠 수 있게 하며, 병기(兵器)는 바닥에 보관해 두도록 하였다. 또 적을 만나면 띠로 만든 것으로 위를 덮어 뾰족한 송곳을 감추니 적의 선봉(先鋒)이 배에 오르려 하면 뾰족한 송곳에 찔리고, 와서 불의에 공격하려 하면 일시에 총이 발사되어 향하는 바에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이로써 공적을 거두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이수광(李睟光)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전선(戰船)은 제도가 매우 굉장하였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선 수십 척이 우리나라의 전선 한 척을 감당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창조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니, 대개 선박의 이로움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원균(元均)이 이순신을 대신해서는 100여 척의 전선으로도 여지없이 패배하였고, 이순신이 다시 원균을 대신해서는 13척의 전선으로 바다를 뒤덮은 600척의 배를 탄 적을 꺾었으니, 또한 장수에 적임자를 얻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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