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7. 10:26ㆍ이성계의 명조선
박엽
朴燁숙야(叔夜), 약창(葯窓)조선 |
1570년(선조 3) |
1623년(인조 1) |
병조정란, 해남현감, 황해도병마절도사 |
인물 |
문신 |
남 |
역사/조선시대사 |
반남(潘南: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 |
요약 조선시대 병조정란, 해남현감, 황해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숙야(叔夜), 호는 약창(葯窓). 증 영의정 박소(朴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응천(朴應川)이고, 아버지는 참봉(參奉) 박동호(朴東豪)이며, 어머니는 이주국(李柱國)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7년(선조 3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병조정랑·직강(直講)을 역임하고 해남현감 등을 지냈다. 그 뒤 광해군 때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광해군의 뜻에 따라 성지(城池)를 수축해 북변의 방비를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6년 동안 규율을 확립하고 여진족의 동정을 잘 살펴 국방을 튼튼히 해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
당시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모욕하고도 무사하리만큼 명망이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 뒤, 광해군 아래에서 심하(深河)의 역(役)에 협력하고, 부인이 세자빈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박엽을 두려워하는 훈신들에 의해 학정의 죄로 평양 임지에서 처형되었다.
『응천일록(凝川日錄)』에는 1613년(광해군 5)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형장(刑杖)을 남용해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작상(爵賞: 관작이나 포상)을 받으려 했다고 한다. 또한 사사로이 부(府)의 여자종을 범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마음대로 했다고 기록되었다.
『속잡록(續雜錄)』에는 같은 해 겨울 호조판서 황신(黃愼)의 계청(啓請)에 의해 양전(量田: 토지 측량)의 관서를 설치하고 8도의 좌우균전사(左右均田使)를 정했는데, 박엽이 호남우도의 균전사가 되어 혹독한 형벌을 적용해 폐해가 컸다고 되어 있다.
또한 평안감사 재임 때에는 음탕하고 포학하며 방자해 거리낌이 없어 새로 익랑(翼廊) 70여 칸을 지어 연달아 장방을 만들고 도내 명창 100여 명을 모아 날마다 함께 거처하며 주야로 오락과 음탕을 일삼았으며, 수를 배로 늘려 결미(結米)를 독촉해 이행하지 않으면 참혹한 형을 가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박엽이 처형을 당하자 군중이 모여들어 관을 부수고 시체를 끌어내어 마디마디 끊었다고 한다.
광해군 15년 계해(1623) 3월 13일(계묘)
15-03-13[10] 사신을 보내어 박엽ㆍ정준을 베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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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보내어 박엽(朴燁) 【평안 감사.】 ㆍ정준(鄭遵) 【의주 부윤.】 을 베게 하였다. 【박엽은 6년 간 관서 지방에 방백으로 있으면서 탐학한 짓으로 재물을 수탈하고 끝없이 사치와 욕심을 부려 개인이 지니고 있는 재물이 내탕고의 재물보다 더 많았으며, 일로(一路)에 해독을 끼쳐 마을이 폐허가 되었다. 정준은 정조(鄭造)의 아우로서 제일 먼저 폐모론을 주장하였고, 의주에 있을 때 탐학한 짓을 한 것이 박엽에게 다음갔었는데, 허정식(許廷式)ㆍ남이흥(南以興)ㆍ윤수겸(尹守謙)과 함께 오적(五賊)이라고 칭하였다. 제장들은 이 두 사람이 서쪽 변방에 있으면서 스스로 의심하여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제일 먼저 참형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도원수 한준겸에게 비밀히 유시하여 베게 하였다. 박엽이 죽은 뒤에 평양 백성들이 관을 꺼내어 시체를 가루로 만들고 그가 타고 다니던 말까지 죽였는데, 그의 처자식은 겨우 모면하였다.】
【원전】 33 집 498 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사법-행형(行刑)
ⓒ 한국고전번역원 | 오규근 (역) | 1993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 인조 1년 계해 > 3월 13일 > 최종정보
인조 1년 계해(1623) 3월 13일(계묘)
01-03-13[01] 의병을 일으켜 즉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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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켜 강화(江華)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상은 선조 대왕의 손자이며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정원군(定遠君)으로 휘는 이부(李琈)인데, 추존되어 원종이 되었다.】 장자이다. 모후는 인헌 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로 【연주 군부인(連珠郡夫人)이다. 추존되어 왕후가 되었다.】 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만력 을미년 11월 7일 해주부(海州府) 관사에서 탄생하였으니, 당시 왜변이 계속되어 왕자 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 선묘(宣廟)께서는 이것이 한 고조(漢高祖)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하면서 크게 애중하여 궁중에서 길렀고, 친히 소자(小字)와 휘(諱)를 명하고 깊이 정을 붙였으므로 광해가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어질고 효성스럽고 너그럽고 굳건하여 큰 도량이 있었다. 여러 번 자급이 올라가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져서는 더욱 겸양하면서 덕을 길렀다.
.............
상이 일어나 절하고 물러나와 별당에서 즉위하여 일을 보며 밤을 새웠는데, 시신 및 장사들이 칼을 차고 숙위하였다. 광해는 약방(藥房)에, 폐세자는 도총부(都摠府)에 안치하고 군사로 지키며 사옹원으로 하여금 음식을 공급하게 하였다. 영건(營建)ㆍ나례(儺禮)ㆍ화기(火器) 등 12개의 도감(都監)을 폐지하고 의금부와 전옥서를 열어 죄인들을 모두 방면하였다. 당시 이이첨의 무리 중에 도망쳐 숨은 자가 많아 군인을 풀어 수색해 체포하였다. 또 그 죄를 면제받을 마음으로 앞을 다투어 진알(進謁)하였는데 모두 결박하여 구속하였다.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에게 하유하여 평안 감사 박엽(朴燁)과 의주 부윤(義州府尹) 정준(鄭遵)을 경상(境上)에서 처형하게 하였으며, 또 여러 도(道)의 조도사(調度使) 김순(金純)ㆍ지응곤(池應鯤)ㆍ김충보(金忠輔)ㆍ왕명회(王明恢)ㆍ권충남(權忠男)ㆍ이문빈(李文賓) 등을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박엽은 성품이 혹독하고 처사가 패려하였다. 유덕신(柳德新)의 사위로서 궁중과 결탁하였다. 일찍이 수령이 되어 사사로이 헌상하여 아첨하였고, 평안 감사가 되어서는 영합하여 총애를 굳히기 위해 못하는 짓이 없었다. 기이한 완호품을 날로 궁중으로 실어들였으며, 의복과 음식을 법도에 지나치게 사치하게 하고 징세를 혹독하게 하며 사람 죽이기를 초개처럼 쉽게 하여 한 도가 텅 비게 됨으로써 그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그가 효시되는 날에 이르러서는 한 도의 백성들로서 서로 경하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심지어 그의 관을 쪼개고 시신을 난도질하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준은 정조(鄭造)의 아우로서 그 위인이 흉험하고 간교하였다. 이이첨의 심복이 되어 흉역의 논의를 주장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급기야 본주(本州)에 건너뛰어 제수되어서는 오로지 뇌물을 바쳐 아첨하는 것을 일삼고 탐욕을 부리며 토색질하니 온 경내가 원망하고 괴로워하였다. 그리고 노적(奴賊)과 사사로이 서로 내통함으로써 중국 조정의 의심을 샀었다. 이에 이르러 효시되자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김순은 본래 미천한 서얼인데 윤휘(尹暉)와 임취정(任就正)의 심복으로 궁중과 결탁하여 동지중추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취정 등이 김순을 해서 조도(海西調度)에 차임하자, 그는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고 사족을 능욕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온 도내가 구란(寇亂)을 만난 것보다 더 쓸쓸하였다. 당시 감사였던 정립(鄭岦)이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였고, 영건 도청(營建都廳) 권첩(權怗)이 상소하여 극력 개진하였으나 광해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조야가 모두 분개하였다. 급기야 금부(禁府)가 처형을 청하자 상이 본도에서 참할 것을 명하여 한 도내의 민심을 통쾌하게 하였다. 응곤 등의 죄악도 김순과 같으므로 함께 참형을 명하였다.
당시 제주 목사 양호(粱濩)가 흉당을 아첨하여 섬기면서 탐욕과 학정이 특히 심하여 한 섬의 백성들이 물과 불 속에 든 것 같았으므로 역시 잡아다가 처형할 것을 명하였다.
【원전】 33 집 502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주-D001] 만력 을미년 : 1595 선조 28년.[주-D002] 경신년 : 1620 광해군 12년.[주-D003] 임술년 : 1622 광해군 14년.[주-D004] 노적(奴賊) : 누르하치(奴兒哈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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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집 제22권 / 서(序) 25수
평양으로 부임하는 서윤 박엽을 전송하는 서[送朴庶尹燁赴平壤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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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을 받으면 빚이라도 진듯이 서둘고, 정의를 구현하고서도 공로를 계산하지 않으며, 혜택이 와도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하고, 풍속이 개혁되어 서로서로 흥행(興行) 쪽으로 나가게 만드는 자는 관리로서 유자[儒]인 것이고, 근검과 경근을 실천하고, 후퇴하고 양보할 줄 알며, 어루만져 주고 따뜻하게 타이르면서 윗사람에게 손해가 가더라도 아랫사람을 이롭게 하는 자는 관리로서 법을 잘 지키는[循]자이며, 낡은 것을 보강하고 침체된 것을 일으키며 일을 잘 해치우는 것을 현명하게 여겨 소문이 나고 명망이 대단한데도 남이 모를까를 두려워하는 자는 관리로서 능력자이고, 부하 단속을 젖은 섶나무 묶듯이 하고, 백성 제압하기를 새끼 가진 호랑이 다루듯하며, 명령이 떨어졌다 하면 꼭 실천을 보아, 무섭기만 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자는 관리로서 잔혹한 자이며, 앉아서 봉전(俸錢)이나 축내고 겨우 장부 정리나 하면서 머뭇머뭇 시일을 끌고 자기 과실 돌보기에도 여유가 없는 자는 관리로서 속된 자이고, 속사정은 숨겨두고 명예나 바라며, 속은 텅 빈 채 겉치레만 하여 분바르고 환치고 남이 모르도록 꾸미는 자는 관리로서 간사한 자이며, 공입(公入)을 몽땅 털어 자기 측근을 섬기고, 가난한 백성에게서 거두어 제 처자를 살찌우다가 금방 화가 닥쳐 이름이 절단나고 몸이 욕을 당하는 자는 관리로서 좀[蠧]에 해당하는 자인 것이다.
국가에서는 방악(方岳)을 두어 성적 평가를 엄히 하고 또 대성(臺省)을 두어 규찰을 담당하게 하는 등 수령(守令)들에 대한 신중도와 감시가 그렇게 주밀하다. 그런데 지금 각 지방 관리라는 자들이 거의 모두 유리(儒吏)ㆍ순리(循吏)의 자격을 갖추고 공리(共理)의 부탁을 제대로 받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잔혹한 자, 간사한 자, 좀인 자가 그 사이에 끼어 우리 성상(聖上)의 지극한 교화에 하자를 남기고 있는 것인가. 또 아니면 능력자 속된 자가 그럴싸하여 구별하기 어렵고 딱 지적하기 어려울만큼 범범하게 굴면서 구차하고 고식적으로 백성들 위에 버티고 있을 뿐인 것인가? 조정에서는 해마다 수의(繡衣)를 내보내 팔도를 돌며 염문 탐방하고 있고 그리하여 정(政)이 최(最)로 알려온 자가, 열이면 일고여덟이나 되고 있으니 그렇다면 수령들이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 있음을 알 만하다, 그런데 나라 꼴을 보면 부세는 날이 갈수록 축이 나고, 민생은 날이 갈수록 병들며, 군오(軍伍)는 날로 엉성해지고, 습속(習俗)은 날로 각박하기만 하니 아! 이게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내 여기에 의심이 없을 수 없고, 인망과 사실과는 다른 점에 대하여 겸연쩍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세상이 옛날같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박후(朴侯)가 평양부의 서윤이 된다면 이는 문옹(文翁)이 촉군(蜀郡)을 다스리고, 차공(次公)이 영천(穎川)을 다스리고, 소경(少卿)이 발해(渤海)를 다스렸듯이 할 것이고, 또 마치 포정(庖丁)이 얇은 칼날로 소를 결따라 분해하여 힘들이지 않고 여유만만하게 한 것과도 같을 것이다. 덕과 혜택이 점점 스며들고 교화가 곁에까지 전달되어 능력자가 그를 들으면 태도를 지성 순일로 바꿀 것이고, 잔혹한 자가 듣고는 너그러움과 화평으로 대체할 것이며, 속된 자가 듣고는 용기와 격려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간사한 자는 기가 꺾이고, 좀인 자는 관직을 내놓을 것이니 박후의 혜택을 입을 곳이 어디 평양부 뿐이겠는가.
혹자가 말하였다.
“평양이 옛날에는 큰 나라였었다. 서쪽으로는 중국과 닿아 있고, 북으로는 말갈(䍪羯)과 얽혀 있으며, 서울과는 거리가 멀어 백성들이 강하고 사나우면서 생각들이 적기 때문에 남자들은 어리석고 인색하여 사리에 통하지 못하고, 여인들은 모양을 부리고 신발을 끌며 질탕하게 노는 것을 숭상하고 있어, 이름하여 다스리기 어려운 곳인데, 게다가 병화(兵火)가 계속되어 저축이라곤 바닥이 났고 오랑캐들이 날마다 쉴새없이 틈을 엿보고 있으니, 박후가 그 큰일을 맡게 되어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군자(君子)가 자신을 믿고 큰 뜻 큰 규모를 가지고 있으면 상대에게 미치는 것이 넓고 넓어 끝이 없는 것이다. 나는 혹자의 그 말을 따라 이렇게 축원해 보련다. 옛날 자장(子張)이 공자(孔子)에게 정(政)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오미(五美)를 존중하고 사악(四惡)을 물리치라고 했다. 이른바 오미란, 백성들 자신이 유리하게 여기는 것을 따라 그들을 유리하게 해주는 것, 노력해야만 할 일을 골라서 노력하게 하는 것, 인(仁)을 하려 하여 인을 성취한 것, 수가 많거나 적거나 상대가 크거나 작거나에 관계 없이 감히 거만하게 굴지 않는 것,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동작을 정중히 하여 그 엄전한 모습을 남이 바라보고 위엄을 느끼게 하는 것이고, 이른바 사악이란, 가르치지도 않고 죽이는 것, 미리 훈계시키지도 않고 잘못된 결과만을 따지는 것, 명령을 느슨하게 해놓고 기한을 대도록 조이는 것, 어차피 줄 물건이면서 출납을 인색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설자도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 남에게 정(政)을 일러줌에 있어 여기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곳은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흠(欽)도 감히 이것을 그대로 써서 주고 박후와 작별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날 새서(璽書)를 내려 양리(良吏)로 부를 때면 틀림없이 겉과 실이 딱 들어맞아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를 보려고 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이 오기를 머리를 쳐들고 기다리련다.
[주-D001] 문옹(文翁) …… 다스리고 : 수령의 훌륭한 치적을 말한 것. 한(漢)의 경제(景帝) 말기에 문옹(文翁)이 촉군(蜀郡)을 맡아 다스리면서 교화(敎化)를 숭상하고 많은 학교를 세워 성도(成都)에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났고, 무제(武帝) 때에는 온 천하의 군국(郡國)에다 모두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이는 문옹을 시작으로하여 일어난 문풍이라고 한다.《漢書 循吏 文翁傳》[주-D002] 차공(次公) : 영천 태수(穎川大守)가 되어 천하 제일의 치적을 남겼던 한(漢)의 황패(黃覇)의 자(字).《漢書 卷89 循吏傳》[주-D003] 소경(少卿) : 한(漢)의 선제(宣帝) 때 순리(循吏)였던 공수(龔遂)의 자(字)임. 그는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을 때 발해 태수(渤海太守)가 되어 여유 있는 유화정책으로 도둑을 진압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농업에 힘쓰게 하여 결국 큰 치적을 남기었음.《漢書 循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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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집 제11권 / 시장(諡狀)
금계군 박공 시장〔錦溪君朴公諡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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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일컫는 삼한(三韓)의 6대 성씨가 있는데 반남 박씨(潘南朴氏)가 그 중 하나이다. 박씨의 세계(世系)는 신라 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에서 나왔다. 신라가 망하자 일가들이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았는데 반남(潘南 나주시 반남면)에 살던 후손들이 제일 번성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 수(秀)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상충(尙衷)을 낳았다. 상충은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기며 사도(師道)를 맡고 직언을 좋아하였는데 명나라를 배반하고 원나라에 붙는 과실에 대해 소리 높여 말했다. 총애받는 권신(權臣)에게 모함을 받아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 가는 중에 길에서 죽었는데 그를 모신 서원이 송도(松都)에 있다. 이분이 은(訔)을 낳았다. 공훈으로 지위가 좌의정(左議政)ㆍ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져 헌릉조(獻陵朝 태종)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몇 대를 내려와 임종(林宗)은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임종이 조년(兆年)을 낳으니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조년이 소(紹)를 낳으니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학행(學行)으로 사림의 신망을 받아 기묘제현(己卯諸賢)이 그를 현량과(賢良科)에 추천하여 명단에 이름을 넣었다. 그러나 박소는 ‘현량’이라는 명목에 자처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정기 시험에 곧장 응시하여 장원을 차지하였다. 대성(臺省)에 들어가 권간(權奸)들을 힘써 배척하다가 결국 이 때문에 쫓겨나 죽었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낸 넷째 아들 응복(應福)은 충후하고 독실하여 세간에서 큰 덕을 지닌 분이라고 칭송하였고, 누차 추증되어 영의정이 되고 반천부원군(潘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선산 임씨(善山林氏)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임구령(林九齡)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 역시 넷째 아들로, 휘는 동량(東亮)이고 자는 자룡(子龍)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과 지혜가 출중하였다. 겨우 3세 되던 해에 천연두에 걸려 목숨이 거의 위태로웠는데도 부모님 곁에서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애써 독한 약을 마셨다. 조금 자라서는 학문을 배웠는데 곧 뛰어나서 막힘이 없었다.
9세에 할머니 홍 부인(洪夫人)의 침소에서 모시고 있는데 밤에 크게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내리자 공이 일어나 옷을 단정히 입고 앉았다. 홍 부인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이유를 묻자, 공이 “제가 들으니 옛사람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번개가 번쩍이면 반드시 낯빛을 바꾸었다고 합니다.”라고 공경히 대답하니 홍 부인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10세에 홍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대사헌공 형제들이 묘 아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공이 여러 종형제 중에 나이가 가장 어렸는데도 옆에서 열심히 시중들면서 어른들의 뜻을 미리 헤아려 받드는 데 어긋남이 없었다.
13세에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하였는데 여러 대가들에게 크게 칭찬을 받아 명성이 자자하였다. 15세에 형들을 따라 정시(庭試)에 들어가서 붓을 휘둘러 단숨에 대책(對策)을 지었는데 마치 물이 솟아오르고 구름이 이는 듯하였다. 17세에 별시 초시에 입격하였는데 이때로부터 시험만 응하면 연달아 우수한 성적을 차지하였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여흥 민씨(驪興閔氏) 집안에 장가들어 처가에서 지냈는데, 날마다 반드시 부모님을 찾아뵙고, 물러나서는 친하게 지내는 자들과 어울려 놀며 잡극(雜劇)을 벌였다. 그러나 날이 저물면 돌아가 글을 읽었는데 닭이 울고 나서야 잠자리에 드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조차도 그러한 줄 전혀 모르고 있다가 공이 지은 문장의 뛰어난 문사(文思)를 보고 모두들 깜짝 놀라며 공이 신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다.
기축년(1589)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고, 경인년(1590)에 문과에 급제해서 승문원(承文院)에 분속되어 권지정자(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추천으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제수되었으며, 차례로 대교(待敎),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일본(日本)이 상국(上國 명나라)을 함께 침범하자고 우리나라에 요구하는 글을 보내왔는데 말이 너무 패악하였다. 선조(宣祖)가 조강(朝講)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명나라에 주문(奏聞)할지 여부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윤두수(尹斗壽)가 주문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청하자 병조 판서(兵曹判書) 황정욱(黃廷彧)이 윤두수를 편들었고, 좌의정(左議政) 유성룡이 주문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자 부제학(副提學) 김수(金晬)가 유성룡을 지지하니, 나머지 신하들 간에 분분히 논쟁하다가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가 되어서야 파하였다.
일을 기록하는 자가 한마디도 적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주서(注書)가 기록한 것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승지가 공의 초본을 찾아 대신 올렸는데 상세히 모두 기록하여 빠뜨림이 없었다. 임금이 이를 알아보시고는 “이 한림(翰林)의 글은 경연(經筵)의 위차(位次)에 있는 사람의 필체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화기(禍機)가 날로 심해져 선류(善類)가 내쫓겼다. 공이 최기(崔沂)와 함께 가까스로 좌사(左史)ㆍ우사(右史)의 자리를 채우고 있을 때에 월사(月沙) 이 상국(李相國 이정귀(李廷龜))을 천거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하였다. 공이 최기에게 이르기를 “이군(李君)은 권신(權臣)에게 크게 거슬렸고, 또 권신의 아들이 그와 더불어 명성을 다투고 있으니 이군을 추천하면 기필코 탄핵받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네. 어찌 이 일로 우리 벗에게 누를 끼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최기가 말하기를 “마땅히 사관으로 천거하는 여부에 대해 논해야지 어느 겨를에 그 사람에게 이로울지 해로울지를 따진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최기와 함께 이공을 수망(首望)으로 추천하였는데 사헌부에서 과연 논핵하여 그 천거를 삭제함과 동시에 그 화가 천거한 자에게도 미쳤다. 최기는 함사(緘辭)에서 자못 책임을 전가했으나 공은 이공의 재주가 천거에 합당함을 극구 피력하다가 결국 이 때문에 파면되었다. 공은 이에 대해 입을 닫고 남에게 말을 옮기지 않았으며 최기와도 예전처럼 친분을 나누었다. 겨울에 서용(敍用)되어 봉교에 복직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승진했다가 얼마 안 되어 병조(兵曹)로 옮겼다. 4월에 일본 왜적이 대규모로 쳐들어왔는데 공이 출정한 장사(將士)들의 병장기와 갑옷의 수송을 모두 마련하였다.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할 적에 공이 마련한 군영의 말이 오히려 4,000여 필이나 되었는데, 이를 부릴 예졸(隷卒)이 없어 모두 버렸다.
밤 4고(四鼓 새벽 2시)에 어가(御駕)가 출발하는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고 칠흑같이 어두웠다. 공이 어가를 수행하여 저물녘 파주(坡州)에 이르렀는데 거의 백리길을 온 데다 모든 사람들이 굶주려 있었으므로 임금이 잠시 쉬었다. 공이 동료 한 명과 함께 전대를 풀어 말린 밥을 먹고 뒤쫓아 이르니 임금은 이미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배가 북쪽 언덕에 정박했는데, 배의 바닥을 뚫어 침몰시키라는 명령이 있었다. 동쪽 언덕에 단 한 척의 배가 있었는데 뱃사공이 키를 틀어 언덕과 이미 한 길〔丈〕 남짓 떨어져 있었다. 공은 멀리서 사헌부(司憲府) 관원들이 죽 늘어앉아 있는 것을 바라보고는 단번에 뛰어올라 배에 올라타 한 손으로는 뱃사공을 저지하고 다른 손으로는 동료를 끌어 올린 뒤 재촉하여 나아가니, 이미 야심한 시각이었다.
임금이 홀로 한 척의 배 위에 있었는데 호위군사가 뿔뿔이 흩어지자, 임금이 도승지 이공 항복(李公恒福)에게 명령하여 급히 병조의 낭관(郎官)과 함께 짐꾼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공이 직접 임금 앞에서 횃불 하나를 주워들고 다니면서 60여 명을 찾아내어 이를 보고하자 어가가 그제야 출발했다.
공이 말을 잃어버려 동료와 함께 안장도 없는 말 한 필을 타고서 밤중이 돼서야 동파(東坡 장단(長湍)의 속역(屬驛))에 도착했다. 송도(松都)에 이르러 공이 판서 김응남(金應南)과 함께 행궁(行宮)에서 숙직하였는데 호위병들이 갑자기 한밤중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김공 역시 허둥대며 놀라 헛소리를 하면서 문을 밀치고 나가려고 하였는데 공이 힘써 그를 만류하였다. 잠시 뒤에 마침내 진정이 되자, 김공이 공의 담력과 지략에 탄복하였다. 비변사(備邊司)의 낭관(郎官)을 겸임하였고 5월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대신(大臣)이 비변사의 사안이 중하다고 아뢰자 대간직은 체차하고 병조에서 그대로 있게 하였다.
어가가 평양(平壤)에 머문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임진(臨津)에서 군사들이 모두 궤멸되고 왜적들이 패강(浿江 대동강)에 가까이 다가와서 주둔하자 도망가는 신하가 속출했다.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 거취에 대해 의논하니, 모두 함흥(咸興)이 갈 만하다고 하였는데, 공이 힘써 말하기를 “우리가 가면 왜구도 갈 수 있는 것이니, 목숨을 다해 평양을 지키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윤공 두수(尹公斗壽), 이공 유징(李公幼澄)과 더불어 힘껏 쟁론했지만 관철시키지 못했다.
평양 백성들이 어가가 출발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갑자기 듣고서 서로 거느리고 나와서 길을 막고 어지럽게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우리를 버리고 가는 것은 바로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차라리 어가 앞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의 칼날에 더럽혀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들어가 승지를 보고 말하기를 “민심이 이와 같으니 모름지기 행차를 멈추고 위로하여 타이른 다음 출발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승지가 공의 말을 임금에게 아뢰어 ‘정행(停行 행차를 멈춤)’이라는 글자를 써서 게시하니 난민(亂民)들이 그제서야 진정되었다.
어가가 영변(寧邊)에 머물 적에 요동(遼東)을 건너 중국으로 귀부하려는 계획을 결정하고 광해(光海)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분조(分朝)하게 하자, 조정의 신하 가운데 늙고 병든 자는 모두 분조를 따라갔다. 어가를 호종하는 신하는 겨우 십수 명이었는데, 낭속(郎屬)들 가운데에는 공 한 사람뿐이었다. 공이 이윽고 육조(六曹)의 통부(通符)를 꿰차고, 또 춘추관(春秋館)ㆍ한학 교수(漢學敎授)ㆍ내승(內乘) 등의 직책을 겸임하였다. 박천(博川)에 이르러 하늘은 어둡고 길은 험한데 앞에서 호위하는 군사들이 매우 단출하였다. 공이 판서 이공 항복을 따라 임금이 탄 말을 스쳐 지나가 척후병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인도하자, 임금이 누구인지 물어서 알고는 더욱 의지하였다.
임금이 대사헌공이 늙고 병든 것을 가련하게 여겨 분조를 따르도록 명령하였다. 대사헌공이 차마 떠난다고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정주(定州)에 이르러 과로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상소를 올려 머물러 아버지를 간호하게 해 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직접 비답을 써서 윤허하고 조제한 약을 하사하였다. 대사헌공이 이를 듣고 벌떡 일어나 상소하여 “신이 늙고 병들어서 이미 어가를 호종할 수 없는데, 또 차마 신의 아들에게 아비를 우선하고 임금을 뒤로하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니, 공이 마침내 어가를 호종하였다.
7월에 이조 좌랑과 지제교에 제수되었고 10월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공이 비록 낭서(郎署)로 있었지만 실로 긴요한 정무를 참여하여 듣다가 아는 것이 있으면 모두 말하였고 그 말은 어김없이 정곡을 찔렀으니 정승이 채용한 것이 많았다. 이전에 총애받는 간신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를 적에 속이거나 비밀스러운 행위로 명류(名流)들을 배척하여 내쫓고 한결같이 총애만을 견고히 하려고 마음먹으니 인심(人心)이 분하고 답답하게 여겼다. 변란을 당하자 나라가 차츰차츰 흙더미가 무너지듯 해서 그 우두머리만 가볍게 견책하고 나머지는 모두 죄과를 따지지 않았다.
어가가 오랫동안 의주(義州)에 머무는 동안 왜적의 세력이 조금 주춤하자 뿔뿔이 흩어졌던 신하들이 차츰차츰 모여들었다. 바른 사람을 헐뜯던 무리들 또한 뒤늦게서야 이르러 혹은 상소로, 혹은 직접 아뢰는 가운데 성상을 떠보는 계책을 섞어 올려서 일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쳤는데, 논의가 격분하여 장차 여파가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김공 응남(金公應南)에게 미치려고 하였다. 공이 전형(銓衡)의 자리에 있으면서 주의(注擬)할 때에 홀로 공평하고 마땅함을 견지하여 진정시키는 데 힘썼다. 의망(擬望)하여 이공(李公)을 대사헌에 제수하자 일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더욱 불쾌히 여기니 공이 마침내 병을 핑계 대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과 약포(藥圃 정탁(鄭琢)) 등 제공(諸公)이 편지를 보내 조정에 나오기를 권하였다. 그 중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이 가장 간절하고 독실하게 편지를 보냈는데 심지어 몸소 찾아가 안부를 묻고 세도(世道)를 바로잡는 책임을 맡으라고 면려하였다.
호종하는 조정 신하들이 오랫동안 번화(繁華)한 지역에 머물다 보니, 혹 가무와 기생에 빠진 자들이 있었는데 공은 이들을 때가 묻은 더러운 사람처럼 싫어했다. 공사(公事)가 아니면 일찍이 찾아가서 만나지 않았으며 날이 저물면 곧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계사년(1593, 선조26) 5월에 체직되어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옮겼다가 7월에 이조 정랑에 복직되었다. 임금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것이 하루에도 십여 차례가 되기도 했는데 공이 평소 중국어를 익혔으므로 번번이 통사(通事)로 입시(入侍)하였다.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임금이 모두 공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친밀하게 은총을 주는 것이 한집안의 부자지간 같았다. 공은 사령(辭令)에 능숙하고 주선에 민첩하니 명나라 장수들이 모두 눈여겨보았다.
10월에 임금이 어가를 되돌려 해주(海州)에 머물 적에 여덟 계급을 뛰어넘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하니 당시 25세였다. 공은 왕명을 듣고 황송하여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에 차서대로 승진하여 좌승지에 올랐다.
갑오년(1594) 4월 체직되어 군함(軍銜 호군(護軍))에 제수되고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7월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고, 8월에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옮겼다. 9월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는데, 지위와 명망이 특별한 자리여서 나이 어린 사람이 마땅히 처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세 번 사양하자 체직을 윤허하였다. 또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참지로 옮겼다.
을미년(1595) 정월에 조정에서 포정사(布政使) 양호(楊鎬)가 장차 본국(本國)에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공을 접반사로 삼아 의주로 가게 하였는데 양 포정(楊布政)이 조선으로 가는 것을 윤허받았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오지 않았다. 10월에 공의 병이 심각해져서 체직되어 돌아왔다가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병신년(1596, 선조29) 2월에 호조(戶曹)로 옮겼다.
갑오년 이후로 조정의 의론이 또 변하여 선류(善類)들이 배척을 받았다. 오랫동안 공이 한가한 관서에 있었지만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직분을 받들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응남이 일찍이 대사헌공을 아버지처럼 섬겼는데 공의 형들이 간관(諫官)으로서 연이어 송강(松江) 정 상국(鄭相國 정철(鄭澈))의 억울함을 극력 간언하자 김응남이 처음으로 유감을 품어 연이어 비루한 관리라고 욕하였다.
김응남이 정승이 되어 공사(公事) 가운데 해결하기 어려운 몇 가지 사안을 만나 처리하지 못하자 부끄러움을 참고 공에게 물었는데 공이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그를 위해 처리한 것이 모두 합당하였다. 김응남이 임금에게 아뢰어 공에게 비변사 부제조(備邊司副提調)를 제수하도록 하니, 이는 공을 위해 특별히 만든 자리였지만, 힘껏 사양하여 면직되었다. 7월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옮겼다. 8월에 동지사 부사(冬至使副使)로 경사(京師 북경(北京))에 조회 갔다가 정유년(1597) 정월에 복명(復命)하였고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9월에 왜적의 경보(警報)가 다시 급박해지자 중전이 대궐을 나가 수안(遂安)에 머무르려고 할 적에 공이 분병조 참의(分兵曹參議)에 충원되어 여러 종실을 규합하여 ‘총관(摠管)’과 ‘선전관(宣傳官)’이라 호칭하며 겨우겨우 대열을 갖추었다. 밤에 마전(麻田 현 경기 연천) 앞 나루를 건너는데 배는 작고 밤은 어두워 궁인(宮人)들이 서로 흩어지자, 공이 막대기로 지휘하고 배의 키를 잡고서 일행이 건너는 것을 호위하였다. 12월에 도승지로 소환되었다.
임금이 제천현(堤川縣)으로 남하하여 명나라 군대에 책응(策應)하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다. 제천은 적진과 멀지 않은 곳인데 혹자가 이르기를 “명나라 장수가 실로 임금을 군영에서 끼고 있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호종하도록 선발된 신하들이 모두 이리저리 돌아보며 두려워하였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따르기를 청하였다. 무술년(1598, 선조31) 정월에 부모를 뵙도록 허락해 주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더해 주도록 명했다. 얼마 뒤 왜적의 기세가 다소 누그러지자 임금이 제천으로 거둥하지 않았다.
대사헌공이 노환이 더욱 심각해지자 공이 어버이 봉양을 청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에 임명되었는데, 7월에 대사헌공이 결국 별세하였다. 공이 두 형과 함께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양주(楊州) 홍 부인의 묘역에 반장(返葬)하였다. 임 부인(林夫人)을 모시고 궤연(几筵)을 받들어 안주(安州)의 촌사(村舍)에 우거했다가 경자년(1600, 선조33)에 연안으로 이주하였다.
6월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자 공이 쇠한 몸을 이끌고 달려가 곡(哭)을 하였다. 9월에 상복을 벗고서 호군 겸 부총관(護軍兼副摠管)으로서 조정에 들어갔다. 산릉(山陵)이 이미 정해졌고 공사도 거의 마쳤는데 대신(大臣)이 요사스러운 말에 흔들려 다른 곳으로 다시 정하였다.5개월의 장례 기한이 이미 지나자 공이 상소하여 극렬하게 이 사안을 논하였다. 얼마 뒤에 대사헌에 임명되자 백관(百官)을 규찰하여 바로잡고, 조금도 아부함이 없으니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관(諫官)들이 숙연해졌다.
신축년(1601)에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 마음가짐이 공평하여 주의(注擬)할 적에 반드시 노성(老成)한 인물을 우선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나이는 젊은데 정사(政事)가 노련하다고 칭찬하였다. 얼마 안 되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와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하고 4월에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 6월에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병이 위중하여 사직하여 체직되자, 임금이 의원과 약을 보냈으며 수라간의 진귀한 음식을 하사하였다. 병이 낫자 전문(箋文)을 올려 은혜에 사례하고 또 걸군(乞郡)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전문을 읽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말의 뜻이 모두 간절하고 합당하다. 이 사람이 오랫동안 병을 앓았지만 정신은 감퇴되지 않았구나.”라고 하고는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몸조리하기를 권하고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임인년(1602, 선조35) 봄에 중국 사신이 와서 태자를 책봉한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뇌물을 요구함이 끝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그 명령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러한 때에 경기도 관찰사는 이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공을 제수하였다. 공은 조처하는 데 방도가 있어 사신의 환심을 사면서도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비장(裨將)이 부정한 도리를 행하려다 저지당하자 말을 만들어 대관(臺官)을 사주해서 공에게 해를 입히려고 하니 공이 마침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가,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어 하인 한 명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민간의 질고(疾苦)를 살피는 여가에는 여러 명승지를 두루 찾아다녔으며, 선비나 친구 한두 명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매우 즐겁게 놀았다. 영월(寧越)에 들러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에 여러 제수품을 갖추어 놓고 제사를 지냈다.
5월에 체직되었다가 형조 참판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공이 경연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노산군 묘역에 벌목을 금하지 않고 제사를 오래도록 폐하였습니다. 중종(中宗)께서 승지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낸 적이 있으니, 폐기된 은전을 다시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즉시 옳게 여겨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가을에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체직하고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병조로 옮겼다.
임금을 호종한 것과 전장(戰場)에서 세운 공을 조정에서 녹훈할 적에 처음에는 ‘익운공신(翊運功臣)’이라고 했다가 얼마 뒤 이를 나누어 ‘호성(扈聖)’, ‘선무(宣武)’라고 하고, 또 이몽학(李夢鶴)을 평정한 공로를 녹훈하여 ‘정난(靖難)’이라고 하여, 한꺼번에 세 공훈을 거행하였다.
공이 공신도감(功臣都監) -제조(提調)- 으로서 여러 공신의 위차(位次)를 의논하여 정할 때 건의하기를 “우리들은 그저 말고삐를 잡고 호종했을 뿐인데 오히려 공(功)이라고 합니다. 화살과 돌이 날아드는 전쟁터 사이에서 생사를 넘나든 사람과 비교하면 공적이 서로 현격하니 어찌 만배의 차이일 뿐이겠습니까. 무장들을 많이 녹훈하여 전사(戰士)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합니다. 정훈(正勳)은 이미 녹훈하였으니, 마땅히 원종(原從)에 수록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호성ㆍ선무 공훈의 원종공신 선발을 겸하여 주관했는데, 종류가 많고 진위가 서로 섞여 있었다. 공이 곡진히 변별하여 선발을 반드시 공정하게 하자 공적도 없이 함부로 끼어들어 간 사람도 없었고 또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도 없었다.
이에 앞서 임금이 친히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항복(李恒福)) 등 두 사람을 원훈(元勳)으로 정하고 문충공에게 그 위차를 논하도록 맡겼는데 유공 근(柳公根)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임금의 공렬(功烈)은 마땅히 명나라의 포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기다리지 않고 신하들의 미미한 공로를 먼저 녹훈하는 것은 잘못입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공로를 녹훈하는 것을 멈추라고 명하였다.
총애받는 정승이 먼저 임금의 존호를 올리는 의론을 내어 문무백관을 데리고 합문(閤門)에 엎드려 청하였으나 임금이 겸양을 고집하며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다. 수상 윤공 승훈(尹公承勳)이 논의를 멈추고자 했지만 함께 의논할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공적인 일로 윤공을 찾아가자 윤공이 이 사안으로 공에게 자문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는 중요한 의리인데, 상공께서는 어찌 이처럼 의심하여 머뭇거리십니까.”라고 하였다. 다음 날 윤공이 조당(朝堂)에 나아가 일일이 여러 재신(宰臣)에게 물었는데 사람마다 말이 다 달랐다. 공이 뒤에 도착하자 윤공이 재촉해서 물었는데 공이 또 말하기를 “의리가 어디에 있는가만을 살펴 행하십시오. 어찌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총애받는 정승이 힘써 그 의론을 배격하여 과연 멈추지 못하게 하고, 곧이어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합문에 엎드려 존호를 올리는 일을 저지하려고 한 것을 윤공의 죄로 삼고 도리어 의리가 있는 곳만 살피라는 공의 말을 증거 삼으니 공이 마침내 인책하고 출근하지 않았다.
7월에 비로소 공신의 봉상(封賞)을 행했는데 공에게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의 칭호를 내렸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으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의정부우참찬 겸 지의금부사(議政府右參贊兼知義禁府事)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호조 판서로 옮기자, 재정의 근본을 파악하고 정미하고 세밀한 것까지 종합하여 고찰했다. 경비(經費)에 정해진 규정이 없음을 늘 개탄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는 제도를 창안하려고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평안도관찰사 겸 도순찰사(平安道觀察使兼都巡察使)에 제수되어 나갔다.
임 부인이 일찍이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있는 둘째 아들의 임소(任所)에 따라갔는데 셋째 아들이 신천(信川)의 수령이 되어 판여(板輿)를 타고 왕복하니 영예가 길에 가득하였다. 공이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에 황주를 경유하여 임 부인을 모시고 평양 감영에 갔는데 서로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제들이 번갈아 찾아와 헌수(獻壽)를 하였고, 강호의 누대에서는 임 부인을 모시고 유람을 그치지 않았으며, 어헌(魚軒 부인의 수레)이 나갈 때마다 남녀들이 우러러봤으니, 부로(父老)들이 이백 년 이래 이처럼 성대한 일은 없었다며 부러워하고 칭찬하였다.
평안도는 업무가 다른 도에 비해 몇 곱절이나 많고, 중국 장관(將官)과 우리 관리의 행차가 줄 잇는 곳인데 공의 대처가 여유로워 지체되는 일이 없었고 장부가 앞에 쌓여도 눈살을 찌푸린 적이 없었다. 학생들에게 과시(課試)를 보이고, 무사(武士)를 검열하되 두터이 상을 내려 주니 각각 깊은 신망이 가득하였다. 빈객(賓客)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친구들을 두루 도와주는 가운데 정의(情意)가 곡진하였는데 이는 억지로 힘쓴 것이 아니었다. 사사로운 청탁을 배척해 뇌물의 통로를 마침내 차단하였고, 변방을 순찰하면서 백성들의 고충을 물어 두터이 구휼해 주었다. 강 주변의 적이 다니는 요해처에 얼음을 쌓아 성을 만들었는데 일체 중국의 제도와 같이 하였다.
병오년(1606, 선조39) 봄에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이 와서 황태손의 탄생을 알리는 조서를 반포할 적에 공이 영접하고 전송하였는데 두 사신이 존경하고 중히 여겨 잔을 돌릴 때에 반드시 공의 호(號)를 부르며 “내가 아무개를 위하여 이 술잔을 비우노라.”라고 하였다.
당질 박엽(朴燁)이 평양부(平壤府) 서윤(庶尹)이 되었는데 성품이 포악하여 사람 죽이기를 즐겼다. 공이 격문(檄文)을 보내 관청 뜰아래에 불러 세워 놓고서 수리(首吏)를 매질하였는데도, 오히려 잘못을 깨닫지 못하자 마침내 조정에 아뢰어 파직시켰다. 절도사(節度使) 성윤문(成允文)이 총애받는 정승에게 뇌물을 바쳐 결탁하고는 사납고 제멋대로 굴면서 열읍(列邑)에 분정(分定)하여 동전(銅錢)을 독촉해서 징수하는가 하면, 살인을 저지른 첩의 동생을 병영 안에 숨겨 주었다. 공이 관리를 보내어 붙잡아 다른 읍(邑)으로 이송하여 가두고 또 힐문하여 분정한 죄상을 캐낸 뒤 조정에 죄주기를 청하여 파직시켰다. 정미년(1607, 선조40) 가을에 임기를 다 채우고 체직되어 돌아와 훈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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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일고 제6권 / 부록(附錄)
〈존모록〉을 붙임〔尊慕錄附〕 [전만영(田萬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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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충(朴尙衷, 1332~1375)
자는 성부(誠夫), 호는 반남(潘南)이고 관향은 나주(羅州)이다. 공민왕 계사년(1353, 공민왕2)에 급제하였다. 을묘년(1375, 우왕1)에 전교 영(典校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의 잘못)으로서 선생과 함께 수화(首禍)가 되어 운명하니 향년 44세이다. 관직은 판전교시사에 이르렀다. 본조에 들어와 영의정에 추증되고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금상조에 비로소 을묘년(1375, 우왕1) 사건이 “오랑캐를 물리치고 임금을 높이며, 윤리를 밝혀 의(義)를 바루다가 간흉들의 무고를 받아 곤장을 맞고 유배 도중 졸했다.”라고 하여,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며, 개성부에 사당을 세워 어진 이를 높이고 충성을 드러내는 의리를 보였다. 공은 성품이, 말이 없고 강개하며 큰 뜻이 있어, 의롭지 못한 사람을 보면 멸시하였다. 10대손 문순공(文純公) 세채(世采)가 유고를 정리하여 공의 6대손인 사간 소(紹)의 유고, 유사(儒士) 집(緝)의 행적을 합해 간행하여 세상에 전한다. 아들 은(訔)은 좌의정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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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항해록 제1권 / 갑자년 천계(天啓) 4년 (1624, 인조 2) 8월
18일(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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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역풍이 아직도 거세므로 섬에서 머물렀다.
저녁 나절 천총(千摠) 장응태(張應泰), 답응관(答應官) 주지정(周之楨) 등이 명첩(名帖)을 보내 위로하고, 장응태가 말하기를,
“내가 연전에 모 독부(毛督府)의 막하에서 오래 있었으므로 귀국의 사정을 익숙히 알고 있습니다. 박엽(朴燁)이 평안 관찰사(平安觀察使)로 있으면서 사욕(私慾)을 자행하매, 백성이 살 도리가 없고 중진(重鎭)이 거의 버려진 땅이 되었는데, 귀국의 신왕(新王)이 하루아침에 그를 참형에 처하니, 중국 사람들도 오히려 시원히 여기어 그 성명(聖明)을 모두 칭송하거늘, 하물며 귀국 신민(臣民)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광포한 자를 가차없이 참형에 처하였으니, 왕이 평소 영명하다 일컬어짐을 어찌 믿지 않으리까?”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법령을 밝혀 사람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한 것은 다만 세쇄(細鎖)한 일인데 어찌 운운할 것이 되겠소?”
하니, 장응태 등이 한동안 탄복하다가 명일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고 물러갔다.
이날 밤에 풍랑이 크게 일어나 해안 일대가 소란하니, 잠자리가 또한 평온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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