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8. 12:45ㆍ역사적 사실 오류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4년 계사 > 5월 28일 > 최종정보
성종 4년 계사(1473) 5월 28일(무오)
04-05-28[03]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이 서계와 토의를 바치다
………
하고 또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지난해에 특별히 사선(使船)을 보내어 누누이 사정(私情)을 진달(陳達)하였고, 겸하여 간교한 자를 죽여서 이미 내리신 명(命)에 보답하였고, 교유(敎諭)를 더욱 정성스럽게 하였더니, 은사(恩賜)가 더하여 항식(恒式)의 배가 넘으므로, 실로 만세(萬世) 양국(兩國)의 화호(和好)하는 큰 근본으로서, 감대(感戴)함이 지극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 명(明)나라 태종(太宗) 때에 잠암(潛巖)이 11세로서 적선(賊船)에게 사로잡히는 바가 되었었는데, 금년에는 42세로서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여 실로 가련합니다. 인하여 귀국(貴國)에 보내니, 전하여서 명(明)나라에 도달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17년 병오 > 10월 6일 > 최종정보
성종 17년 병오(1486) 10월 6일(정축)
일본국의 원번ㆍ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오도(五島) 명도주(鳴島主) 원번(源繁)과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정국(宗貞國)과 국분사 주지(國分寺住持) 숭통(崇統)과 병부 소보(兵部少輔) 종무승(宗茂勝)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쳤는데, 그 숭통의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대명국(大明國)의 백성 잠암(潛巖)은 일찍이 적선(賊船)에 잡혀 이제 30여 년이 되었는데, 노쇠함이 날로 다가오므로 월조(越鳥)ㆍ호마(胡馬)처럼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이에 비통하게 신음함을 차마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보내니, 박애(博愛)하는 어지심으로 돌아보시어 대명국에 보내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그 고향 마을은 이 사람이 입으로 아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17년 병오 > 10월 13일 > 최종정보
성종 17년 병오(1486) 10월 13일(갑신)
정창손 등이 대마도 국분사 주지 숭통이 보낸 중국인 잠암의 처리를 의논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마도(對馬島) 국분사 주지(國分寺住持) 숭통(崇統)이 보낸 중국인 잠암(潛巖)이 공초(供招)하기를, ‘본계(本係)는 대명국(大明國) 사람인데, 나이 10세 때에 적왜(賊倭) 평무속(平茂續) 등에게 사로잡혀 대마도 미녀군(美女郡) 오랑 좌위문(五郞左衛門)의 집에 이르러 종[奴]이 되어 심부름하였고, 뒤에 본도(本島)의 국분사로 옮겨졌는데, 본토(本土)를 그리워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더니, 주지 숭통이 보내 주었습니다. 나이가 어렸을 때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부친의 직역(職役)과 사는 곳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며, 왜말만을 알 뿐이고 중국말을 모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상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
예조에서 아뢰기를,
“잠암을 왜인이 보는 경성(京城) 또는 하삼도(下三道)에서 살게 하여서는 안되겠으니, 경기(京畿) 양주(楊州)에 집 1구(區)와 전지(田地) 3결(結)을 주고 5년 동안 한정하여 관가에서 옷과 양식을 주어 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18년 정미 > 1월 19일 > 최종정보
성종 18년 정미(1487) 1월 19일(경신)
중국 사람 잠암을 서울 안에 장가들고 편히 있도록 전교하다
전교(傳敎)하기를,
“중국 사람 잠암(潛巖)이 나이 열 두살에 일본국에 도착하여 40년을 살았으므로 언어와 지방 풍속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이제 편맹(編氓)이 되고자 하니, 만약 외방(外方)에 살면 고생되는 일이 없지 아니할 것이다. 마땅히 서울 안에 장가들고 편히 있도록 할 것이며, 또 왜역인(倭譯人)으로 하여금 늘 같이 있게 하여 그 말을 익히도록 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중종실록 > 중종 20년 을유 > 6월 26일 > 최종정보
중종 20년 을유(1525) 6월 26일(갑인)
대신들과 일본국 서계 내용을 중국에 주달할 것인지 여부를 의논하다 …………
“지성스럽게 사대를 함은 지당합니다. 그러나 성종조(成宗朝)의 고사를 고찰하건대 병오년 무렵에 잠암(潛巖)이라는 사람이 왜국에 있으면서 중국 사람이라고 자칭(自稱)하므로 왜가 우리 나라로 내보내며 중국에 전주(轉奏)하게 했었는데, 그때 윤필상(尹弼商)ㆍ노사신(盧思愼)ㆍ홍응(洪應) 등이 모여 의논하되, 이구 동성(異口同聲)으로 주달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왜로 되돌려 보냈었습니다. 이 재상들이 어찌 공연히 헤아린 것이겠습니까? 또 왜는 우리 나라가 관섭(管攝)하는 나라가 아니어서 한 번이라도 혹 발단을 열어놓으면 난처한 일이 있을까 싶기 때문에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 중종실록 > 중종 23년 무자 > 7월 7일 > 최종정보
중종 23년 무자(1528) 7월 7일(병자)
신숙주ㆍ조지서가 왜국에 통신사로 갔다가 와서 올린 서계를 고찰하여 아뢰게 하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전일에 왜방의 노정(路程)과 갔다올 날 수를 고찰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모든 등록(謄錄) 및 신숙주(申叔舟)ㆍ조지서(趙之瑞) 등이 갔다올 적에 듣고본 사건을 고찰해 보았는데, 또한 길의 이수를 자세하게 말해놓지 않아 이에 의해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중국 사람들이 왜국에 사로잡히게 되면, 중국이 우리 나라로 하여금 쇄환하게 한 것에 관한 칙서(勅書)는 승문원(承文院)에서도 고찰할 수 없었습니다. 또 중국 사람들이 왜국에 사로잡힌 것을 그 왜국에서 우리 나라로 해서 중국에 들여보내기를 청한 일은, 이전에 잠암(潛巖)의 사실이 있기에 등서(謄書)하여 입계합니다.” 【잠암은 곧 중국 사람인데 왜국에 사로잡혔던 자이다.】
하니, 전교하였다.
“알았다. 신숙주ㆍ조지서가 왜국에 통신사(通信使)로 갔다가 복명할 적에 반드시 서계(書啓)한 것이 있을 것이다. 비록 예조에서는 고찰할 수 없었지만, 반드시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니 고찰하여 아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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