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의 날조 순화군.임해군은 왜군포로가 아니었다

2022. 9. 10. 20:04역사적 사실 오류

순화군

 

요약 조선후기 제14대 선조의 여섯째 아들인 왕자.

개설

이름은 이보(李𤣰). 선조의 여섯째 왕자이고, 어머니는 순빈김씨(順嬪金氏)이며, 부인은 승지 황혁(黃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명을 받아 황정욱(黃廷彧)·황혁 등을 인솔하고 근왕병(勤王兵: 왕의 곁에서 호위하던 군인)을 모병하기 위해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5월 왜군이 북상하자 이를 피하여 함경도로 들어가 미리 함경도에 파견되어 있던 이복형인 임해군(臨海君)을 만나 함께 회령(會寧)에서 주둔하였는데, 왕자임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다가 함경도민의 반감을 샀다.

마침 왜군이 함경도에 침입하자 회령에 위배되어 향리로 있던 국경인(鞠景仁)과 그 친족 국세필(鞠世弼) 등 일당에 의해 임해군 및 여러 호종관리들과 함께 체포되어 왜군에게 넘겨져 포로가 되었다.

이 후 안변을 거쳐 이듬해 밀양으로 옮겨지고 부산 다대포(多大浦) 앞바다의 배 안에 구금되어 일본으로 보내지려 할 때, 명나라의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의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1593년(선조 26) 8월 풀려났다.

성격이 나빠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불법을 저질러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고, 1601년에는 순화군의 군호(君號)까지 박탈당하였으나 사후에 복구되었다.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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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집 제6권 / 기(記)

창의당기(彰義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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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당은 관북(關北)의 경성(鏡城)에 있는 용연(龍淵) 위에 있는데, 고(故) 처사(處士) 박공 유일(朴公惟一)의 거처이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 때에 임금이 서쪽으로 몽진을 했었는데, 이때 왕자 임해군(臨海君) 진(珒)과 순화군(順和君) 보(𤣰)가 적병을 피하여 북쪽으로 경성과 회령(會寧)에 이르렀다. 이 때 국경인(鞠景仁)이 그들의 무리 최인수(崔麟壽) 등과 함께 두 왕자 및 이를 따르던 신하들인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서성(徐渻)ㆍ황혁(黃赫) 등을 붙잡아서 왜장 청정(淸正)의 군중(軍中)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에 혜성이 북두성(北斗星)이 있는 자리에 출현하였다. 이에 공이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왕자가 적당(賊黨)에게 잡혀 있는데 내가 어찌 이를 구출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는, 드디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그 무리들을 달래어 결박을 풀게 한 다음, 몸소 왕자를 모시고 험한 길을 헤치고 돌아왔다. 왕자가 그 이름을 물었으나 공은 울면서 대답하지 않고 물러갔으며, 그 뒤에 왕자가 사방으로 수소문을 하여 그를 찾았으나 그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공이 죽은 뒤에 이 곳 북지(北地)의 인사들이 상소를 올려서 공의 충의를 진달(陳達)하여, 여러 번 공을 추증해서 벼슬이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이르고 충렬사(忠烈祠)에 배식(配食)하였으니, 이 사당은 곧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를 타향(妥享)한 곳이다. 그리고 공이 거처하던 곳에 대하여 그 당을 이름하여 ‘감고당(感古堂)’이라고 했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것은 택당(澤堂) 이공(李公 이식(李植))이 지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노봉(老峰) 민공(閔公 민정중(閔鼎重))이 지었다고도 한다.

내가 일찍이 부절(符節)을 안고 관북 지방에 나가서 안찰(按察)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그 문려(門閭)에 이르러 경의를 표하고는 이어 당(堂)으로 올라갔다. 이 때 이 곳의 부로들이 자상하게도 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말하기를, “이 당을 이름하여 감고당이라고 한 것은 그냥 사사로이 붙인 이름입니다. 그리고 서울의 안국방(安國坊)에도 역시 감고당이란 이름이 있으니 응당 이 당의 이름을 고쳐서 이를 구별하여야 하겠습니다만, 감히 저희들이 자의적으로 고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부디 공께서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조처해 주소서.” 하였다. 그래서 내가 조정에 돌아와서 복명한 다음 이에 대하여 정표(旌表)할 것을 청하자, 임금께서 특별히 이에 대해 ‘창의당(彰義堂)’이라고 사액(賜額)을 내리시니, 이에 더욱 빛이 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공의 11세손인 궁부랑(宮府郞) 박하준(朴河駿)이 내가 이 일에 관계한 바가 있다 하여 이에 대한 당기(堂記)를 청하여 왔다.

나는 생각건대, 이 세상에서 공명(功名)과 위세(位勢)로 가문을 일으킨 자는 반드시 대도시의 네거리에다 우람하고 거창하게 집을 짓고는 기필코 그 장원(長遠)함을 다투어 도모하면서 그것이 영구히 전해 가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두 대(代)를 지나거나 또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주인이 바뀌거나 길거리의 전사(傳舍 여관)처럼 낡아서 헐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창의당은 그 처한 곳이 서울로부터 2천 리나 떨어진 황량하고 쓸쓸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그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대대로 자손들이 이를 지켜서 3백여 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사모와 사랑을 받으면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금이 이를 사랑해서 은총의 사액까지 내렸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지나친 것이라고 여기지 않으니, 이것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대저 환란(患難)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서 피하는 법인데도 공은 기꺼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영리(榮利)로 말하면 사람들은 이를 추종하여 몰려드는 법인데도 공은 마치 그것이 자신을 더럽히는 것처럼 여겼다. 그리고 충의가 그 천성에 근본하고 염개(廉介)가 그 지조를 면려(勉勵)해서 저 공명과 위세를 자랑하는 자들을 크게 초월하여 제쳐 버렸으니, 이 때문에 그 멀기를 도모하지 않아도 멀고 전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전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당의 이름은 참으로 장차 저 천리(天理)와 민이(民彝)로 더불어 영구히 끝나는 날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장차 북방의 인사들 가운데 의리를 중히 여기고 이익을 가벼이 여기며 윗사람을 친근히 여기고 관장(官長)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로 세상에 알려지는 사람이 있게 된다면, 이는 반드시 공이 이들을 위하여 선도자(先導者)가 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창의당이 세도(世道)의 교화에 기여하는 바가 또한 어찌 얕고 적다고 하겠는가.

태사(太史) 황공 경원(黃公景源)이 공의 묘표(墓表)에서 이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였기에, 내가 그 글을 따다가 보완해서 이 창의당기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