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14. 09:22ㆍ일본관련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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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7년 갑오(1594) 6월 2일(기유)
27-06-02[04] 봉공의 반대하는 예부 주객 청리사 제독 회동관 주사 홍계준의 주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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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 주객 청리사 제독 회동관 주사 홍계준의 주본에,
“우유 부단한 신하가 나라를 그르쳐 남모르는 근심이 깊으므로 건단(乾斷)을 내려서 전비(戰備)에 대한 지칙(旨勑)을 신명(申明)하여 치안을 견고히 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신은 전객(典客)의 직을 맡고서 모든 사이(四夷)의 공헌(貢獻)에 대하여 과거의 문서에 따라 일을 시행함으로써 황상(皇上)의 덕의(德意)를 베풀고 만리 밖에 위엄을 떨쳐왔습니다. 그런데 저 우둔한 왜노만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바다의 거북이와 물고기 족속 속에 던져버리고 문고(文告)의 반열에 포함시키지 않아 그 훈계하심이 삼엄했었습니다. 우리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 때에 왜노가 애걸 복걸하여 비로소 봉공해주었으나 당시 조공의 시기와 사신의 숫자를 한정시키면서 우리의 방비를 더욱 닦았습니다. 그후 변태와 거짓이 갖가지로 나오고 배반과 복종함이 일정치 않아 선덕(宣德)ㆍ정통(正統) 때부터 가정(嘉靖) 말엽까지 내지(內地)를 침략하여 그들이 지나간 곳은 폐허가 되었으므로 강남(江南)에서는 지금도 그들을 호랑이라고 말하니, 대체로 봉공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것입니다.
앞서 동정(東征)의 역사 때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이 경략(經略)의 직임을 띠고 갔으나, 그는 과장이 심하고 인색한 데다 지략이 적은 자로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심유경(沈惟敬)같은 무뢰배인 무부(武夫)이고, 참모로 거느린 자들은 원황(袁黃)ㆍ유황상(劉黃裳)ㆍ정문빈(鄭文彬)ㆍ조여매(越汝梅) 등이었습니다. 처음에 그가 요망한 사람을 쓰고 일자진(一字陣)을 치고 나갈 때, 식자들은 그 군대가 상대하기 쉬우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1년이 넘도록 국력만 낭비하고 한 가지 지략도 전개하지 못한 채 봉공설(封貢說)을 꾸며 폐하를 속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신모(神謀)가 이조(二祖)와 같으시면서도 우선 응창을 용서하여 후일의 공을 이룰 수 있게 하고자 명지(明旨)를 여러 번 내렸는데 주안점은 가볍게 봉공을 허락할 수 없다는 한 마디에 있는 것으로 그 말씀이 중외(中外)에 퍼져 일월(日月)처럼 빛났습니다. 응창은 중신(重臣)으로 적을 토벌하는 입장이니 의리로 보아 마땅히 만 번 죽더라도 돌아보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겨우 봉공으로 일을 마치려고 한단말입니까. 대체로 봉공이 옳지 않다는 것은 신이 지난해에 연달아 상소하여 말하였고, 지난번에 담당 제신(諸臣)들이 상소로 간쟁한 것이 분명하고 확고하니 신이 또한 무엇을 덧붙이겠습니까.
다만 신이 한스러워하는 것을 아뢰겠습니다. 오늘날의 일을 빚어낸 이유는, 평양(平壤)에 들어갈 때 적의 세력은 이미 궁지에 몰렸고 아군은 처음으로 지칠 때인데도 북병(北兵)들이 왜구를 얕잡아보고 섣불리 들어갔기 때문에 처음 꺾여서 벽제(碧蹄)의 패배와 파주(坡州)의 퇴각이 있었으며, 아군이 비록 치졸하긴 하지만 적의 간담이 서늘해 있는데도 경략(經略)은 왜적을 지나치게 무서워하였기 때문에 두 번째 꺾여서 진영을 철수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들 왜적은 우리가 겁이 많고 대군(大軍)이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정탐하고는 당당하게 한성(漢城)을 점거하고서 철수하라는 명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을 설정하여 응창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응창은 그 처리를 유경(惟敬)에게 맡겨 요행히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황해도 개성(開城)의 승첩을 구실로 삼아 공으로 승진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앞장서서 재물을 써가며 화친을 하자고 비굴한 말로 굽실거리니, 동정(東征)한 여러 장수가 일시에 용기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오히려 드러내 놓고 봉공하자고는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강상(江上)을 배회하고 항간(行間)에 머뭇거리고 있으면서 정신은 저상되고 입으로는 할말이 없다가, 무신(撫臣) 조(趙)의 소장이 올라가 결점이 드러나고 재주가 궁지에 몰려 수습할 길이 없게 되자 낯빛을 고치고 무릎을 굽혀 적과의 화친할 생각을 굳히고 크게 떠벌여 폐하를 속여서 이리 치고 저리 쳐서 마치 이매(魑魅)처럼 하였습니다.
응창은 왜노가 위력이 무서워 도망갔다고 말하지만 11성에 결집하고 있는 것이 지난날 그대로이고 진주(晉州)에서 도륙한 숫자는 대체로 6만 명이 넘습니다. 이는 화친한 뒤의 일이 아닙니까? 요즘 또 성을 쌓고 전선을 만든다는 것이 배신(陪臣) 김수(金睟)의 급한 상황을 고하는 내용에 보입니다. 응창은, 왜노가 애걸하면서 공손하다고 말하지만 소서행장(小西行長)의 횡포와 노략질은 마냥 그대로이고 표문(表文)을 거짓으로 꾸며 걸핏하면 시간을 끌려고 하니, 어찌 진정으로 통관(通款)하길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지난번에 또 화친을 맺자고 요구한 말이 유정(劉綎)의 품게(稟揭)에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동쪽을 돌아보는 걱정을 많이 하여 상자에 가득 찬 비방의 글을 아랑곳하지 않고 삼 년의 전쟁에다 백만 금의 국고를 지출하고도 오늘에 이르러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 응창을 어떤 사람으로 여기겠으며 봉공을 어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위학증(魏學曾)은 충심으로 임무를 수행하였지만 특별한 공이 보이지 않자 폐하가 크게 노하니, 발역(哱逆)이 머리를 바쳤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폐하가 지난날 학증을 엄중히 견책하였기 때문에 영하(寧夏)가 평정된 공적을 이루었고, 오늘날 응창을 후하게 용서하였기 때문에 총독이 경략의 방안을 그대로 따라 군사를 잃고 나라를 그르쳤으며 치욕을 초래하고 흔단을 열었다고 봅니다. 신은 동쪽의 일이 완결되지 못할 것으로 압니다.
흔히 말하는 자는 ‘우리는 군사가 적고 군량이 부족하니 우선 봉공을 허락하고 천천히 대비하자.’ 하지만, 군대를 출동한 이후 정선(征繕)에 관한 격문을 두세 번 하달한 것이 아닌데도 끝내 위아래 사람들이 회피하고 따르지 않아 재정이 파탄에 이르므로, 군대를 훈련시키고 식량을 조달하라는 명이 그때마다 허문(虛文)으로 돌아갑니다. 이를테면 과신(科臣) 유홍보(劉弘寶)가 지원한 천진(天津)의 전함이 한두 척에 지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경황 없이 다급하면 일을 서둘고 조용하고 편하면 해이해지는 것이 인정(人情)입니다. 그러므로 가려움이 심하면 살을 긁게 마련이고, 편하면 진(秦)나라 사람이 월(越)나라 사람의 살찌고 여윈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 노(虜)와 통관(通款)하자는 논의를 응창이 과신으로 있으면서 그 일을 주장하였는데 통관이 이루어지자 방비가 점점 소홀해져서 변방의 관리는 어쩔 수 없이 군실(軍實)을 축내어 교만한 놈을 상으로 달래야 하는 재정 손실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는 신이 받들어 시행하면서 화가 치밀어 눈꼬리가 찢어졌던 일인데 오늘날 왜의 상황이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신은 태만하여 일을 수행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게 만든 것은 봉공의 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왜는 노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노는 허약한데 왜는 날쌔고 노는 탐욕을 부리지만 왜는 교활하며, 노는 기미(羈縻)하면 흩어지고 왜는 기미하면 들어옵니다. 오늘날의 왜는 또 옛날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지난날 민ㆍ절(閩浙)의 난리 때, 왜는 한판 승부를 낼 목적으로 육지에 올라와 아예 돌아가려 하지 않았는데 불지르고 약탈하는 등 그 피해가 너무도 참혹하였습니다. 지금은 관백(關白)이 36주(州)의 튼튼한 발판 위에 부여(扶餘)를 기대어 소굴로 삼고서 비늘을 곤두세우고 꼬리를 휘저으며 천리 거리를 순식간에 분탕쳤으니, 그들이 통관한 사이를 틈타 요충지를 점유하게 된다면 장차 눈에 우리 나라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산을 품고 있다는 것은 추측으로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대체로 병을 잘 치료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병에 걸린 사람에게 묻는 것이니 오늘의 조선은 바로 병에 걸린 나라입니다. 가령 왜노가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그들이 헐떡거리는 끝에 어찌 잠시나마 구차스레 시간을 끌어 종묘를 부지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들 군신은 행성(行成)의 치욕을 수치로 알고 신포서(申包胥)의 눈물을 뿌리며 차라리 구혼(九閽)에 하소연하고 한 번의 죽음을 택하려고까지 하니, 이는 그들이 사실 행장(行長)과 심유경(沈惟敬)의 계획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당당한 전정(專征)의 권한을 지닌 사마(司馬)로서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신은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지금 소서비(小西飛)가 또 들어와 중외(中外)가 그에 대한 조치에 쩔쩔매고 있는데, 신은 이 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은 일찍이 부도(不道)를 저질렀으니 원컨대 폐하는 그 범순(犯順)의 죄를 묻고 반역자의 피로써 북을 바른 다음 사령(赦令)을 칙명으로 내리되 ‘너희 괴수는 흉악하여 부월(斧鉞) 아래 용서받을 수 없지만 우리 명조(明朝)는 항복해 오는 사람은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노라. 너는 돌아가 평수길(平秀吉)에게 고하여 빨리 조선의 침략한 땅을 돌려주고 너의 소굴로 돌아가 힘써 조약을 따르게 하라.’고 하는 한편, 소서비를 잡아 남겨두고 그의 부하들을 먼저 바다로 돌아가게 하소서.
그들이 가고 오는 날짜를 계산하면 또한 한 해가 넘을 것이니, 제때에 명망 있는 중신(重臣)을 보내 생살권을 쥐고 해변을 두루 순찰하면서 병식(兵食)의 상황과 수륙(水陸)의 형세와 견하(堅瑕)한 곳을 살펴보고,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가 있을 때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여 진중(陣中)에 돌리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무비(武備)가 준비될 것입니다. 각성(各省)의 순무(巡撫)를 맡은 신하가 마땅히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을 한 집안처럼 형세가 서로 연결되게 하여, 적이 산동(山東)에 들어오면 회주(淮州)ㆍ서주(徐州)가 지원하고, 적이 회주ㆍ서주에 들어오면 절강(浙江)ㆍ직례(直隷)가 지원하고, 적이 절강ㆍ직례에 들어오면 민중(閔中)ㆍ양광(兩廣)이 지원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군대의 사기가 진작될 것입니다. 척계광(戚繼光)과 유대유(兪大猷)는 다 왜적을 무찌른 공신으로서 강남(江南)에서는 시축(尸祝)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의 휘하 병사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어찌 왜의 사정을 눈앞에 있듯이 익히 알고 왜적의 머리를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듯 베는 일이 없겠습니까. 마땅히 높이 등용하여 적절히 그들의 힘을 빌리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명장(名將)이 속속 나올 것입니다. 인재를 모집한다는 명을 내려 호협(豪俠)을 수합하고, 유인을 금하는 법을 엄하게 하여 남모르게 움직이는 일을 막고 벼슬을 상으로 내걸어 내응(內應)할 사람을 모집하고, 둔전(屯田)의 이로움을 거행하여 말먹이와 군량을 풍족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온갖 대책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마광(司馬光)은 요인(遼人)의 혼을 빼버렸고 구준(寇準)은 전연(澶淵)의 공을 이루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폐하께서는 꿋꿋이 일에 임하여 책략을 제시하고 장리(將吏)는 목숨을 바쳐야 할 때입니다. 어찌 반드시 왜노를 두려워하여 봉공을 하게 함으로써 조정 가득히 물의를 일으킵니까.
대체로 천하의 일은 외형을 보고 계획하면 진신(鎭臣)이 먼저 화를 일으킨다고 지목하고 남의 뒤를 따라 동화하면 노성(老成)은 흉내를 낸다고 비웃는 법입니다. 관백(關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먼저 이에 대해 전 제독 주사(提督主事) 장아적(張我積)이 만력 19년에 주문하였는데도 병부에서 덮어두고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만약 문무 겸전한 신하를 일찍 선발하여 경략(經略)을 맡겼더라면 섬놈들이 날뛰는 일이 반드시 이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같이 어리석은 선비의 말일지라도 나라의 방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염려되는 것은 일을 담당한 자가 눈으로만 보아넘기고 깊이 헤아리지 않는다면 그 화를 반드시 구제하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두 소신(小臣)으로 하여금 신의 말이 적중된 것을 불행으로 여기게 한다면 이는 신의 이른바 큰 두려움입니다. 폐하께서는 깊이 헤아리소서.”
하였는데, 성지(聖旨)를 받드니, 병부가 알아서 하라고 하였다.
【원전】 22 집 289 면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주-D001] 건단(乾斷) :
임금의 용단.
[주-D002] 문고(文告) :
시유(示諭).
[주-D003] 선덕(宣德) :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
[주-D004] 정통(正統) :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주-D005] 가정(嘉靖) :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주-D006] 이조(二祖) :
명 태조와 성조.
[주-D007] 강상(江上) :
압록강변.
[주-D008] 항간(行間) :
군중.
[주-D009] 통관(通款) :
화친.
[주-D010] 위학증(魏學曾)은 …… 바쳤습니다. :
발역(哱逆)은 반역자인 발배(哱拜). 명(明)나라 만력(萬曆) 20년(1592)에 서부(西部) 사람인 발배가 배반하여 옥천영(玉泉營)ㆍ중위(中衛)ㆍ광무(廣武)ㆍ하(河) 등 영하위(寧夏尉)의 여러 부(部)를 함락시켰을 때, 명 신종(明神宗)이 위학증에게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고 난을 평정하는 총 책임을 맡겼으나, 적을 회유하느라 날짜를 끌고 적에게 수많은 군사가 살육당했는데도 조정에 아뢰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종이 노하여 위학증을 체포, 북경으로 압송하였다. 그후 1개월이 채 안되어 섭몽웅(葉夢熊)ㆍ이여송(李如松) 등에 의하여 반란이 진압되었다. 《명사(明史)》 권228 위학증 열전(魏學曾列傳).
[주-D011] 정선(征繕) :
거마(車馬)를 징발하고 무기를 정비하는 일.
[주-D012] 군실(軍實) :
군영의 창고.
[주-D013] 민ㆍ절(閩浙) :
민월(閩粤)과 절강(浙江).
[주-D014] 관백(關白) :
풍신수길을 말함.
[주-D015] 행성(行成) :
화친을 맺는 일.
[주-D016] 사마(司馬) :
경략 송응창.
[주-D017] 병식(兵食) :
무기와 식량.
[주-D018] 견하(堅瑕) :
견고하고 허술함.
[주-D019] 양광(兩廣) :
광동(廣東)ㆍ광서(廣西).
[주-D020] 구준(寇準)은 …… 이루었습니다. :
요(遼)의 성종(聖宗)이 1004년 윤9월에 대군을 몰아 송나라를 침공했을 때, 재상 구준이 왕흠약(王欽若)과 진요수(陳堯叟)의 남천(南遷) 주장을 배격하고 진종(眞宗)에게 친정(親征)할 것을 재촉하였다. 진종이 전주(澶州)에 도착하니 전주를 지키던 군사들이 사기를 얻어 요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요의 요구를 받아들여 세공(歲貢)으로 은견(銀絹) 30만 냥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화친을 맺었다. 《송사(宋史)》 권281 구준 열전(寇準列傳).
[주-D021] 진신(鎭臣) :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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