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화북진(禾北鎭)에서 소안도까지는 9백여 리이고, 소안도에서 이진(梨津)까지는 70리입니다.”

믿음을갖자 2023. 11. 10.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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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전집 제2권 / 서독(書牘)

사중 명희 에게 주다[與舍仲 命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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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배(旋)에 오를 때에 대략 몇 자를 써서 봉(鳳 하인의 이름임)이에게 부쳐 먼저 돌아가도록 했었는데, 과연 즉시 돌아가서 지금까지 이둔(梨芚)의 사이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가 없네. 서신을 전한 뒤로 벌써 7~8일이나 지나서 어느덧 가을이 다하고 초겨울이 되었는데도 남쪽 끝의 기후가 마치 육지의 8월 기후와 같아서 추워질 기미가 전혀 없으니, 금년 절서(節序)의 몹시 늦은 상황이 또한 이러한 것인가?

요즈음에 온 집안이 별고 없고, 종씨(從氏)의 기도(氣度) 또한 만안하시며, 경향(京鄕)의 제반 상황이 한결같이 평온하고, 여러 자매(姊妹)와 서모(庶母)까지도 모두 편안한가? 사중(舍仲 가운데 동생을 이름)과 사계(舍季 막내 동생을 이름)는 얼굴이 검고 바짝 야위어서 반드시 병이 날 염려가 있으니, 간혹 조금 나은 때가 있더라도 노력하여 밥도 더 먹고 약도 늘 써서, 이 바다 밖에서 오직 일념으로 걱정하는 나로 하여금 마음이 조금 놓이게 해주기를 천만번 축수하는 바이로세.

사계(舍季)는 요즘에 추사(楸舍)로 와서 모이고자 한다고 했었는데, 과연 휴가를 내서 단합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 나는 눈이 아득하고 애가 끊어질 듯한데, 해천(海天)은 아득하기만 하여 아마 서로 연접할 수가 없을 듯하네.

나의 행차는 그날 행장을 점검하여 배에 오르고 나니 해가 벌써 떠올랐었네. 그리고 배의 행로에 대해서는 북풍(北風)으로 들어갔다가 남풍(南風)으로 나오곤 하다가 동풍(東風) 또한 나고 들고 하는 데에 모두 유리하므로 이에 동풍으로 들어갔는데, 풍세(風勢)가 잇달아 순조로워서 정오(正午) 사이에 바다를 거의 삼분의 일이나 건너버렸었네.

그런데 오후에는 풍세가 꽤나 사납고 날카로워서 파도가 거세게 일어 배가 파도를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므로 금오랑(金吾郞)으로부터 이하로 우리 일행에 이르기까지 그 배에 탄 여러 초행인(初行人)들이 모두가 여기에서 현기증이 일어나 엎드러지고 낯빛이 변하였네. 그러나 나는 다행히 현기증이 나지 않아서 진종일 뱃머리에 있으면서 혼자 밥을 먹고, 타공(舵工)ㆍ수사(水師) 등과 고락(苦樂)을 같이하면서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쳐가려는 뜻이 있었다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억압된 죄인이 어찌 감히 스스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실상은 오직 선왕(先王)의 영령이 미친 곳에 저 푸른 하늘 또한 나를 불쌍히 여겨 도와 주신 듯하였네.

석양 무렵에 곧바로 제주성(濟州城)의 화북진(禾北鎭) 아래 당도하였는데, 여기가 바로 하선(下船)하는 곳이었네. 그런데 그곳에 구경나온 제주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북쪽의 배가 날아서 건너왔도다. 해뜰 무렵에 출발하여 석양에 당도한 것은 61일 동안에 보기 드문 일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의 풍세가 배를 이토록 빨리 몰아칠 줄은 또 생각지도 못했다.”

고 하였네. 그래서 내 또한 스스로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이것은 나도 모르는 가운데 또 하나의 험난함과 평탄함을 경험한 것이 아니겠는가.

배가 정박한 곳으로부터 주성(州城)까지의 거리는 10리였는데, 그대로 화북진 밑의 민가(民家)에서 유숙하였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성(城)을 들어가 아전[吏]인 고한익(高漢益)의 집에 주인 삼아 있었는데, 이 아전은 바로 전등(前等)의 이방(吏房)이었는 바, 배 안에서부터 고생을 함께 하며 왔었네.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인데다 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뜻이 있으니, 이 또한 곤궁한 처지로서 감동할 만한 일일세.

대정(大靜)은 주성의 서쪽으로 80리쯤의 거리에 있는데, 그 다음날에는 큰 바람이 불어서 전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다음날은 바로 그 달 초하루였었네. 그런데 이날은 바람이 불지 않으므로 마침내 금오랑과 함께 길을 나섰는데, 그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인마(人馬)가 발을 붙이기가 어려웠으나, 그 길의 절반을 지난 이후로는 길이 약간 평탄하였네. 그리고 또 밀림(密林)의 그늘 속으로 가게 되어 하늘 빛이 겨우 실낱만큼이나 통하였는데, 모두가 아름다운 수목(樹木)들로서 겨울에도 새파랗게 시들지 않는 것들이었고,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또 내지(內地)의 단풍잎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으로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운취가 있었겠는가.

대체로 고을마다 성(城)의 크기는 고작 말[斗] 만한 정도였네. 정군(鄭君)이 먼저 가서 군교(軍校)인 송계순(宋啓純)의 집을 얻어 여기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집은 과연 읍(邑) 밑에서 약간 나은 집인데다 또한 꽤나 정밀하게 닦아놓았었네. 온돌방은 한 칸인데 남쪽으로 향하여 가느다란 툇마루가 있고, 동쪽으로는 작은 정주(鼎廚)가 있으며, 작은 정주의 북쪽에는 또 두 칸의 정주가 있고, 또 고사(庫舍) 한 칸이 있네. 이것은 외사(外舍)이고 또 내사(內舍)가 이와 같은 것이 있는데, 내사는 주인에게 예전대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네. 다만 이미 외사는 절반으로 갈라서 한계를 나누어놓아 손을 용접(容接)하기에 충분하고, 작은 정주를 장차 온돌방으로 개조한다면 손이나 하인 무리들이 또 거기에 들어가 거처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일은 변통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하였네.

그리고 가시울타리를 둘러치는 일은 이 가옥(家屋) 터의 모양에 따라서 하였는데, 마당과 뜨락 사이에 또한 걸어다니고 밥 먹고 할 수가 있으니, 거처하는 곳은 내 분수에 지나치다 하겠네. 주인 또한 매우 순박하고 근신하여 참 좋으네. 조금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는지라 매우 감탄하는 바이로세. 이 밖의 잗단 일들이야 설령 불편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그것을 감내할 방도가 없겠는가.

금오랑이 방금 회정(回程)에 올랐는데, 또 며칠이나 순풍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네. 집안 하인을 금오랑 편에 같이 내보내면서 대략 이렇게 서신을 부치는데 어느 때나 과연 이 서신을 열어보게 될지 모르겠고, 집의 소식은 막연히 들어볼 방도가 없으므로 바라보며 애만 끊어질 뿐이로세. 아직 다 말하지 못하네.

[주-D001] 바람을 …… 뜻 : 장부의 원대한 뜻을 비유한 말. 남조 송(南朝宋) 때에 소년인 종각(宗慤)에게 그의 숙부인 종병(宗炳)이 그의 의지를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긴 바람을 타고서 만리의 파도를 헤쳐가고 싶습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2] 전등(前等) : 전등내(前等內)의 준말로, 즉 ‘지나간 분기 안’이라는 뜻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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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4년 정축(1877) 3월 19일(을해) 맑음

14-03-19[23] 북원에서 망배례를 친히 행할 때 행 도승지 민겸호 등이 입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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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시(巽時).
상이 북원(北苑)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친히 행하였다.
입시할 때, 행 도승지 민겸호, 좌승지 조정희, 우승지 이헌직, 좌부승지 김성균, 우부승지 박용대, 동부승지 박주양, 기사관 이만교(李萬敎), 가주서 홍승목(洪承穆), 별겸춘추 김우균(金羽均)ㆍ이호철(李鎬喆), 검교직제학 조영하(趙寧夏), 김병시(金炳始), 검교직각 민영목(閔泳穆)ㆍ김영수(金永壽)ㆍ강찬(姜𧄽)ㆍ윤용구(尹用求), 직각 김흥균(金興均), 검교대교 홍순형(洪淳馨)이 차례대로 시립하였다.
시각이 되자, 통례가 무릎을 꿇고서 외판(外辦)을 계청하였다. 상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 청옥대(靑玉帶), 흑피화(黑皮靴)를 갖추어 입고서 여(輿)를 타고 만팔문(萬八門)으로 나갔다. 약방 제조 김익진(金翊鎭)과 부제조 민겸호가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아침 일찍 수고로이 거둥하셨는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보정문(保定門), 명광문(明光門), 청양문(靑陽門)을 경유하여 강여소(降輿所)로 나아갔다. 민겸호가 아뢰기를,
“금훤 낭청(禁喧郎廳)이 신지(信地)에 있지 아니하고 함부로 합문(閤門) 안으로 들어와서 성상께서 사연을 묻는 일이 생기게 하였으니, 사체에 있어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중하게 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마는, 본원이 추고를 청하는 것 외에는 달리 시행할 만한 벌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다 지난 뒤에 나처하라.”
하였다. - 거조(擧條)를 냄 - 통례가 무릎을 꿇고서 여에서 내리기를 계청하였다. 상이 여에서 내려 소차(小次)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통례가 무릎을 꿇고서 외판을 계청하였다. 상이 익선관에 흑원령포(黑圓領袍), 소옥대(素玉帶), 청정(靑鞓)을 갖추어 입고 소차를 나갔다. 이어 걸어서 북원의 판위(版位)의 장전(帳殿) 앞으로 나아갔다. 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배위(拜位)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섰다. 찬의가 ‘국궁 사배 흥 평신(鞠躬四拜興平身)’을 외치니, 상이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이를 마치자, 찬의가 ‘궤(跪)’를 외치니, 상이 무릎을 꿇었다. 사향관(司香官) 두 사람이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가서 세 번 향을 올린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물러갔다. 찬의가 ‘국궁 사배 흥 평신’을 외치니, 상이 사배례를 행하였다. 이를 마치자, 통례가 무릎을 꿇고서 예가 끝났음을 아뢰었다. 민겸호가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통례원 관원이 여창(臚唱)하는 즈음에 착오난 것이 적지 않으니,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해당 인의를 중하게 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마는, 본원이 추고를 청하는 것 외에는 달리 시행할 만한 벌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처하라.”
하였다. - 거조(擧條)를 냄 - 이어 전교하기를,
“이 뒤로는 다시 이와 같이 하지 말라는 뜻으로 각별히 신칙하라.”
하니, 민겸호가 아뢰기를,
“삼가 마땅히 신칙하겠습니다.”
하였다. 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영돈녕부사 김병학(金炳學),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우의정 김병국(金炳國)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오늘 날씨가 제법 무더운데, 수고하신 나머지에 성상의 체후가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그저께 내린 비는 농사에 충분하다고 할 만한데, 도리어 너무 많이 내린 걱정은 없는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일전에 비가 내린 뒤 백성들이 기뻐하였습니다. 이처럼 물을 가둘 때를 당해서는 비가 충분히 내린 뒤에야 물을 대고 모를 심을 수가 있습니다. 다음 달이 되면 비록 조금 가물어도 보리 농사에는 더욱 좋습니다.”
하였다. 상이 소차로 들어갔다. 전교하기를,
“호방 승지는 예조 당상, 호조 낭청과 함께 정식에 따라 선무사(宣武祠)로 달려가 봉심하고서 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또 전교하기를,
“환궁하는 문은 의춘문(宜春門)으로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조금 뒤에 통례가 무릎을 꿇고서 외판을 계청하였다. 상이 익선관에 곤룡포, 청옥대, 흑피화 차림으로 바꾸어 입고 소차를 나왔다. 통례가 무릎을 꿇고서 여를 타기를 계청하니, 상이 여를 탔다.
이어 전교하기를,
“전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입시시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전 제주 목사 이희충(李熙忠)이 앞으로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잘 있다가 올라왔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탈없이 잘 올라왔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농사는 어떠한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다른 도에 비해 조금 낫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이 몹시 황급하지는 않던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황급해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쌀 값이 뛰지는 않았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아주 높이 뛰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정(三政) 가운데 혹 대단히 폐해가 되는 것은 없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군정(軍政)은 호구마다 배정해서 고르게 받아들이고, 환정(還政)은 아전들과 민간이 모두 조금도 축난 것이 없으며, 결총(結摠)은 역(役)을 고르게 해 받아들였으므로 모두 폐단이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다른 폐단은 없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비록 대단한 폐단은 없었으나 거지들이 다른 해에 비해 아주 많으니, 이것이 걱정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거지들이 큰 폐단은 없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별로 폐단을 끼치는 일은 없습니다만, 그 숫자가 몹시 많으므로 백성들에게 신칙해서 보살펴 주게 하였으며, 각 마을 향도(鄕徒)들의 공사(公舍)에 들어가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염려가 있기에 또다시 움막을 지어 몸을 가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향도는 다른 곳에도 있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제주에만 있습니다. 향도라고 말하는 것은 방언(方言)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라올 때 연도의 농사 형편은 어떠하던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씨를 뿌린 곳이 반이 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보리 농사는 어떻던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흉년이 든 뒤이므로 파종한 곳이 전에 비해 배나 많았고, 지금 막 이삭이 패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민정(民情)이 조금 평안한 곳이 있던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하도(下道)의 열읍(列邑)은 백성들의 얼굴이 누렇게 떠서 잔뜩 찌푸리고 있는 사람이 많았으며, 경기 지방은 조금 나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비가 자주 내렸는데, 과연 부족한 곳은 없던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2월 25, 6일에 내린 비가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는 과연 흡족하였고, 충청도의 여러 고을에는 부족한 염려가 있는 듯하였는데, 일전에 내린 비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출발한 지 며칠 만에 육지에 도착하였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하루 밤낮 만에 소안도(小安島)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출발한 곳에서부터 소안도까지는 몇 리나 되며, 소안도에서 육지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화북진(禾北鎭)에서 소안도까지는 9백여 리이고, 소안도에서 이진(梨津)까지는 70리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배를 탄 지 며칠 만에 이진에 도착하였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소안도에서 하루 만에 이진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배를 탔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화북진 포구에서 배에 올라타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출발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느 곳에서 바람을 기다렸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화북진의 관사(官舍)가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며, 또 추자도(楸子島)를 경유해서 왔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추자도는 어느 편에 있으며, 바람을 만날 경우 며칠이면 이 섬에 도착할 수 있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소안도와 화북진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바람을 만날 경우 하루면 이 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추자도와 이진의 거리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이희충이 아뢰기를,
“추자도에서 북쪽으로 이진과의 거리는 5백여 리쯤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희충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의춘문에 이르렀다. 김병시가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은 반열에 참가한 무신들을 시취(試取)하는 일로 중일각(中日閣)으로 나가겠습니다. 유엽전(柳葉箭) 한 가지 기예로만 시취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민겸호가 표신(標信)을 내어 엄(嚴)을 해제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안으로 들어갔다. 신하들이 차례대로 물러나갔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