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漢拏山)의 높은 곳과 북쪽 골짜기는 눈이 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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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1년 갑술(1874) 8월 13일(계미) 맑음
11-08-13[17] 성정각에서 전 제주 목사 이복희를 소견할 때 동부승지 민창식 등이 입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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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시(午時).
상이 성정각(誠正閣)에 나아갔다. 전 제주 목사가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동부승지 민창식(閔昌植), 가주서 백선행(白璿行), 기사관 김홍집(金弘集)ㆍ심상만(沈相萬), 전 제주 목사 이복희(李宓熙)가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고, 전 제주 목사를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잘 머물렀다가 올라왔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무사히 올라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임 목사는 언제 도착했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7월 10일에 임소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언제 길을 떠났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신이 7월 10일에 인수 인계를 한 뒤에, 즉시 포구(浦口)로 내려가 순풍(順風)을 기다렸는데 23일에 비로소 배가 떠났습니다. 그러나 풍랑에 휩쓸려 추자도(楸子島)에 도착하였고 바람에 길이 막혀 3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추자도는 강진(康津), 제주(濟州), 영암(靈巖)의 사이에 있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영암에 속한 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사이가 몇 리인데 그 땅에 머물러 있었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제주에서 추자도까지 거의 500리가 된다고 하는데, 순풍을 기다려 머문 지 3일만에 다시 배가 출발하였습니다. 바람부는 대로 파도치는 대로 하룻동안 쉬지 않고 달려서 소안도(所安島)에 정박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또다시 출발하여 밤이 깊은 뒤에 겨우 이진(梨津)에 도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올라올 때에 갖은 고생을 했겠구나.”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바람의 기세가 연일 순조롭지 못했지만, 인명(人命)은 애당초부터 상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정(三政)은 폐단이 없지만, 군정(軍政)의 경우는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신이 3년 동안 재임하면서 규례와 풍속을 살펴보니, 백성 중에 청금(靑衿), 교생(校生), 대궐(待闕)의 세 등급이 있었는데, 청금과 교생 이외에 대궐 이하는 거개가 군정(軍丁)이었습니다. 환곡(還穀)의 경우는 받아들일 때에 백성으로 하여금 곡(斛)으로 헤아려 나누어 갚도록 하는 법도 내륙(內陸)의 각읍에서 섬[石]으로 나누어 갚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말[斗]과 되[升]로 나누어 주기 때문에 애당초부터 허류(虛留)와 포흠(逋欠)이 없는 것입니다. 결전(結錢)의 경우는 본도(本島)에 애당초부터 전결(田結)에서 세금을 거두는 법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주의 농사 형편은 어떠하던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잇따른 흉년을 거친 나머지 2, 3년 동안 조금 풍년이 들었습니다. 올해 밀과 보리도 큰 풍년이며, 신이 떠날 때에 기장과 조가 한창 이삭이 패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주에는 어째서 무논[水畓]이 없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석산(石山) 아래에는 수원(水源)이 귀하기 때문에 본래 무논이 없으나, 대정(大靜)과 정의(旌義) 두 고을 사이에 혹 있다고 합니다. 매년 가을 추수를 한 뒤에 해당 목사가 세 고을을 두루 순행하는 규례가 있는데, 신이 그것이 편리한 지의 여부를 물어보니 치도(治道)라고 일컫고 있으나 비록 잔호(殘戶)라도 폐를 끼치는 것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정지시켜 다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주의 기후는 서울과 비교하여 많이 따뜻한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기후는 과연 항상 따뜻합니다. 겨울에 눈이 내려 땅에 닿으면 곧 녹아버립니다. 다만 한라산(漢拏山)의 높은 곳과 북쪽 골짜기는 때때로 눈이 쌓여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주는 한라산의 북쪽에 있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한라산의 북쪽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의와 대정은 향하는 방향이 어떠하며, 세 고을 가운데 어느 고을이 가장 큰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정의는 동쪽 70리 땅에 있고, 대정은 서남쪽 100리 땅에 있는데, 그 가운데 제주(濟州)가 가장 큽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제주 목사가 총괄하고 거느리기 때문에 큰 것이다.”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이름이 영문(營門)이기 때문에 조금 큽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정(馬政)은 어떠한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매년 공물로 바치는 말이 모두 수컷입니다. 때문에 해마다 번식을 하더라도 암컷은 많고 수컷은 적어 매년 군색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큰 말도 있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큰 말은 대부분 한라산 숲속에 있는데, 저절로 낳고 저절로 커서 그 빠르기가 마치 범 같기 때문에 사람이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붙잡더라도 성질이 길들이기가 어려워 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 고을의 수령은 혹시 길들여 말을 타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단지 길들여 기를 뿐이며, 본래 타는 법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말의 숫자를 아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산장(山場)의 말은 원래의 총 숫자가 1032필인데, 비는 대로 숫자를 채웁니다. 그 나머지 각장(各場)의 말도 정해진 총 숫자가 있는데, 태어나고 죽는 것이 해마다 각각 같지 않기 때문에 공물로 바칠 때가 되면 숫자를 채우고 장부를 수정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 전염병이 기승을 부린다는데, 과연 어떠했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겨울부터 지금까지 산우(山牛)와 야우(野牛)가 병들어 죽은 것이 그 숫자를 알지 못할 정도로 많아, 심지어 말을 가지고 대신 논밭을 갈고 있기까지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연 농사에 크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다.”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농사는 다행히 폐기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우와 야우가 다른 점이 있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야우는 집에서 기르는 것이고, 산우는 방목(放牧)한 것입니다. 본도(本島)는 토질이 척박하고 메말라서 매번 땅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는 소와 말을 몰고와서 밭을 두루 밟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곡식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임 목사가 내려갈 때, 어승마(御乘馬)를 좋은 말로 구해서 올리라고 분부하였다. 들었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밖에서 들었습니다. 신이 삼가 관청의 벽에 걸려 있는 현판을 보니, 전 제주 목사 조명집(曺命楫)이 공마(貢馬) 중에 가장 좋은 1필로 어승마를 충당하여 그 당시 말을 조련시킨 무리들이 특별히 상가(賞加)의 은전을 입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연 어느 때의 일인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정묘조(正廟朝) 때의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체임(遞任)되면서 진상한 말은 올라왔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저의 천박한 식견으로는 적대마(赤大馬) 1필이 조금 낫고, 그 나머지 2필은 짐 나르는 말로서 조금 못한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로(沿路)의 농사 형편은 어떠하던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전라도는 풍년이 크게 들었고, 충청도는 그 다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와 충청도에 비하여 보면 경기는 어떠한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기내(畿內)의 농사 형편은 비록 전라도에 미치지 못하지만, 충청도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별로 차등이 없으니, 삼도(三道)의 백성들이 모두 풍년이라고 여기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이 길에 가득합니다. 신은 본래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농사의 이치에 대해서 대략 압니다. 벼의 이삭이 크고 밑으로 드리워져 있으면 크게 풍년이 든 것인데, 전라도의 농사 형편이 과연 이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시골에 살았는가?”
하니, 이복희가 아뢰기를,
“양주(楊州)의 회암(檜巖)인데, 읍(邑)과의 거리가 20리입니다.”
하였다. 목사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가 차례로 물러나왔다.
[주-D001] 허류(虛留) :
창고에 쌓인 환곡은 없고 장부나 문서상으로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거짓 기록만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