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탐라(耽羅)와 제주(濟州)는 동시대에 존재하는 별도의 지역이었다

믿음을갖자 2022. 10. 2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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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14 / 세기(世紀) 14

고려(高麗) 3

○ 9년 원종 13 정월에 왕식이 별장 백거() 파견하여 장탁(張鐸) 12명과 함께 표문을 받들고 들어가서 알현하게 하였다. 세자 왕심이 고려의 상서 우승 송분() 그의 아버지인 상장군 송완례(宋完禮) 임유무(林惟茂) 토벌한 실상을 들어 중서성에 그들의 공을 말하였다. 낭중(郞中) 불화(不花) 마린(馬璘)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전선(戰船) 공급과 군량을 수송하는 일에 대해 유시하였다.

신사에 봉주(鳳州) 둔전(屯田) 염주(鹽州) 백주(白州) 주로 옮겼다.

○ 2 초하루 경진에 일본에 사신으로 조양필이 서장관(書狀官) 장탁(張鐸) 일본 사람 26명과 함께 경사(京師) 보내었는데, 이들이 경사에 이르러서 알현하기를 청하였다.

왕식이 일본에 서신을 보내어 일본으로 하여금 원나라와 통호하게 하였다.

○ 3 을축에 중서성에 칙지를 내려 일본 사신을 속히 되돌려 보내는 일을 의논하라고 하였다. 이에 안동(安童) 말하기를,

조양필이 금주(金州) 있는 군사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일본으로 여금 망녕되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생각에는 금주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은 저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로, 다시 이들을 옮겨 주둔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 다만 일본에서 온 사신에게 ‘금주에 주둔하 있는 것은 탐라(耽羅) 때문에 잠시 동안 설치한 것이니 일본에서는 의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개유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황제가 좋다고 하였다.

○ 5월에 고려 왕 왕식이 또 서신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으로 하여금 원나라와 통호하게 하였는데, 모두 회보하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서 탐라(耽羅)와 제주(濟州)를 빼앗는 일을 의논하라고 하였다.

..................................

원종14년

○ 6월 무신에 경략사 흔도 등의 군사가 탐라 이르러서 그곳의 백성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조서를 내려서 질리백(迭里伯)을 탐라 초토사(耽羅國招討使)로 삼고, 윤방보(尹邦寶)를 부초토사로 삼았다.

○ 탐라 토평한 다음,  지역에 탐라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세우고, 진변군(鎭邊軍) 1천 7백 명을 주둔시켰으며, 공부(貢賦)로 해마다 모시포(毛施布) 1백 필을 바치게 하였다. 초토사(招討司)는 뒤에 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로 바꾸고, 다시  군민안무사(軍民安撫使)로 바꾸었다.

왕식이 고려의 대장군 김흔(金忻)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제주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음을 아뢰었다.

 

고려사절요 19 / 원종 순효대왕 2(元宗順孝大王二)

계유 14(1273),  함순 9년ㆍ원 지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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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방경이 아들 수()와 지후(祗候) 김감(),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와서 승전을 보고하였다. 왕이 수를 대장군으로, 감을 공부 낭중으로, 보를 중랑장으로 삼고 대정 고세화는 앞장 서 나가 적진을 함락하였으므로 낭장으로 임명하고, 그밖의 다른 사람들도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적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6월에 대장군 김수를 보내어 원 나라에 가서 탐라의 적을 평정한 것을 보고하였다.

 

제주도(동정호부근)와 탐라(운남.광동.광서지역)는 엄연히 다른 땅이네요. 아울러 유구도 현 위치가 아닌 적도 이남에 위치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광동성은 현재 위치와 아주 다른 듯합니다. 진광이란 잡지에서 일본열도에 고려왕비석이 있다는 기록을 보아 명치유신전까지도 고려 또는 조선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윤치호 영문일기에서 아이누족을 정벌한 것도 한반도에서 건너가 열도 중앙에 살던鮮人이라 했습니다.일본은 결국 인종세탁과 지명세탁을 한 것이 아닌가합니다.

 

포저집 제28권 / 교서(敎書) 8수(八首) 경상 감사 윤방(尹昉)에게 내린 교서....그런데 방면 중에서도 서북(西北 관서(關西)와 관북(關北) )과 양남(兩南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의 경우는 지역적으로 서융(西戎) 및 남만(南蠻)과 인접하고 있다.


성근보선생집(成謹甫先生集) 제2권 / 명(銘) 팔준도명(八駿圖銘) 병인(幷引)...활과 화살을 활집에 거둬들이고 신음하는 소리를 노래로 변하게 하였으며, 산과 물길로 남만(南蠻)까지 통하고 북쪽 풍속에 관대(冠帶)를 쓰게 하였습니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5년 기미 > 6월 1일 > 최종정보 영조 15년 기미(1739) 6월 1일(병자) 큰비가 옴 15-06-01[26] 관방의 요새인 영남을 잘 방비하고 왕화를 펼치라는 내용으로 경상 감사 조명겸에게 내린 교서..북쪽으로 조령(鳥嶺)이 가로막혀 관방(關防)을 견고한 요새에 충분히 의지할 수 있고, 남쪽으로 오랑캐 나라와 접해 있어 모든 토산물을 계곡을 통해 운반할 수 있다.
다산시문집 제20권 / 서(書) 중씨께 올림 신미(1811, 순조 11년, 선생 50세) 겨울...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호)께서 손수 베꼈던 일본지도(日本地圖) 1부를 보면 그 나라는 동서로 5천 리이고 남북으로는 통산 1천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동기유(日東記游) 제3권 / 정법(政法) 22칙...일본 땅은 중국의 강절(江浙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과 한 홍수(泓水)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강절은 오(吳)ㆍ월(越)의 유지(遺地)인 것이다. 그 자손(子孫 태백과 중옹의 자손)이 저쪽에 있는 것은 오 나라가 되고, 이쪽에 있는 것은 일본이 되었던 것이다.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19년 임오 > 11월 28일 > 최종정보 고종 19년 임오(1882) 11월 28일(경술) 맑음...“왕래하는 데에 모두 며칠이나 소요되었는가?“ 하니, 박영효가 아뢰기를, “모두 9일이 소요되었습니다. 배를 탄 시간은 실제로 만 4일 19시간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천 화도(花島)에서 동경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박영효가 아뢰기를, “9700리쯤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선(輪船)이 과연 빠르도다. 만 4일 19시간 만에 왔다면 하루에 2천 리를 달린 셈이다.” 하였다...“일본 국왕의 자품은 과연 어떠하던가?” 하니, 박영효가 아뢰기를, “신이 본 바로는 성품이 너그러운 것 같았고, 키가 크고 얼굴이 검었습니다.”

임하필기 제32권 / 순일편(旬一編) 청령국(蜻蛉國)...일본 사람들은 잠자리[蜻蛉]를 추진(秋津)이라고 하는데, 그 지형이 잠자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나라 광무제(光武帝) 때 처음 중국과 교통하였다.

中國史書 高麗·渤海遺民 記事 > 宋史 > 『宋史』卷491 列傳250 > 일본에 대한 개요와 고려악 『宋史』卷491 列傳250 外國7 日本國 宋 太宗 雍熙 元年 984년 미상(음) 일본에 대한 개요와 고려악...가축으로는 물소(水牛), 나귀(驢), 양(羊)이 있고, 코뿔소(犀)와 코끼리(象)가 많다. 누에를 쳐서 견직물이 많고, 얇고 섬세하여 〈품질이〉 매우 좋다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1년 신묘 > 2월 22일 > 최종정보 태종 11년 신묘(1411) 2월 22일(계축)11-02-22[02] 일본 국왕이 우리 나라에 없는 코끼리를 바치니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다

왕환일기(往還日記) / 무자년(1828, 순조 28) 6월 29일(정유)....그전 명 나라 때에는 왜국(倭國)이었다가 본조에서 군현으로 귀속시켜 복건성에 속하는데 대만부로서 6개의 현과 2개의 청(廳)을 관할하고 있습니다

잡지명 동광 제39호 발행일 1932년 11월 01일 기사제목 完譯 三民主義(1), 民族主義 第1講 필자 孫文 原著............ 日本도 維新 前에는 역시 國勢가 매우 衰微하엿섯다. 領土는 겨우 四川省 一省만밖에 못하고 人口도 四川省 一省에 및지 못하야 역시 外國의 壓制의 耻辱을 받앗섯다.

연산군 7년 신유(1501) 1월 30일(기묘)
예조에서 제주도 내섬시의 종 장회이가 일본에 표류하여 보고 겪은 일을 아뢰..소로 논을 갈아서 볍씨를 물에 담갔다가 싹이 트면 4월에 씨를 뿌려서 싹이 자란 뒤에 5월에 모내기를 하고, 제초(除草)는 하지 않으며, 7월에 수확합니다. 그 곡초(穀草)의 길이는 두 줌쯤 되고, 그 뿌리에 싹이 나서 익으면 9월에 수확하고, 또 그 뿌리에 싹이 나서 익지 않으면 사람은 먹지 않고 베어 들여서 마소를 먹였습니다.

기언 제47권 속집 / 사방(四方) 1 영남 관찰사를 보내는 서...그 바깥의 700리 너머에 대마도(對馬島)가 있는데 일본과 한 나라로서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창칼로 싸우는 것을 좋아한다. 대마도의 왜가 가장 간교하고 변덕이 심하다.

1870년(고종 7년) 4월 15일 > 일본 외무성, 조선과의 외교관계 모색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함 기사제목 일본 외무성, 조선과의 외교관계 모색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함 연월일 고종 7년(1870년, 淸 穆宗 同治 9年, 日本 明治 3年) 4월 15일 ..군함이 조선으로 향할 때 대주(對州)의 이즈하라(嚴原)는 대함이 정박할 장소가 아닙니다. 섬 안의 아소만(淺茅灣)이라 부르는 장소를 일람했는데, 조선 땅으로 향하는 큰 강으로 그 중에 이모자키(芋崎)라 부르는 장소는 군함 정박과 석탄 적립 등을 위한 굴지의 장소로 생각하므로 서양 측량도 일엽(一葉)을 제출함.

사료 고종시대사5 > 1871년(고종 8년) 3월 15일 > 이홍장, 미국 함대의 동향을 총리아문에 보고함(이홍장→총리아문) 기사제목 이홍장, 미국 함대의 동향을 총리아문에 보고함(이홍장→총리아문) 연월일 고종 8년(1871년, 淸 穆宗 同治 10年, 日本 明治 4年) 3월 15일 발신 이홍장 수신 총리아문...다만 듣건대 일본과 고려의 경계 지역에 새롭게 생긴 퇴적지가 한 군데 있는데 일본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그곳으로 가서 조세를 거두게 하였으나 고려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혹은 이 때문에 한을 품고 음으로 미국을 도와 고려와 난리를 일으키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역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7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 > 1920년(경신년) > 3월 > 23일 《화요일》 어둑어둑하고 추움. 23일 《화요일》 어둑어둑하고 추움...아이누(Ainu)註 053족은 유럽의 백인종이 나중에 동쪽으로 이주해온 종이다. (7) 아이누 족은 일본 중부와 조선에 살았던 황인종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23rd. Tuesday. Gloomy-chilly.
Lunch at Y.M.C.A. Dr. Hardlicker's remarks continued. (6) The Ainu race is a later emigration to the East from the common white race in Europe. (7) The Ainu race was conquered by the yellow brown people who peopled central Japan from Korea.

『震光』 4 · 5 합간(중국어본)(1935 11월호
일본의 東京 · 武藏은 고대 백제 · 신라 · 가락인들이 처음 개척한 곳이다. 오늘날까지도 이곳에는 高麗村 · 聖天院 · 高麗王碑 · 狹山勝樂寺 · 山口觀音鐘 · 白鬚神社 등 우리의 선인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이 적지 않다. 백수신사는 고대 이 지역을 개척했던 우리 선인들의 신앙의 상징으로 向島 · 西介原 등 고려촌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백 수십 곳에 산재해 있다. 志木 · 白子와 같은 지명 역시 우리의 선인들이 명명한 것이다.

삼천리 7 2 발행일 1935 02 01 烏居龍藏씨의 硏究에 의하면「 日本民族은 아이누族 以外에 1. 朝鮮滿洲沿海州東蒙古  지방으로 渡來한 固有民族과 2. 쓰마토라 보르네오세레베쓰比率賓臺灣 등으로부터 渡來한 印度네지안系의 것과 3. 南支那에 예로부터 居住한 苗族 系統  印度 支那民族이라고」하얏거니와(有史以前의 日本)


충청병영계록(忠淸兵營啓錄)○순조(純祖) / 순조(純祖) 19(1819)

문:살마주(薩摩州) 일도(一島)의 둘레는 얼마나 되는가?

답:3천 리 정도 됩니다.

일고여일우위문의병(日高與一尤衛門義柄) 25.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천상언십랑친결(川上彦十郞親訣) 28.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안전희등태의방(安田喜藤太義方) 30.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즙공(楫公) 송원감우위문(松元勘右衛門) 40.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강한집 제26권 / 발미(跋尾) 조제고(詔制考)

[주-D020] 김응남(金應南)을 …… 전달하고 : 

1591(선조24)에 김응남이 성절사(聖節使)로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그때 풍신수길(豐臣秀吉)이 군주를 죽이고 스스로 군주가 된 후 명(明)나라를 침략하고자 조선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라고 협박하였다. 조정에서 부득이 보내기는 하였으나 차마 명나라에 보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응남이 사행을 떠나기에 앞서 상소를 올려 “일본은 안남(安南), 유구(琉球)와 지경을 접하였고 또 복건성(福建省)과 가까워 상선(商船)이 줄을 잇고 있으니, 우리나라가 통신사를 보냈다는 것을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명나라가 이 일을 물어보면 신이 무슨 말로 대답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선조도 그렇게 생각하여 대신(大臣)과 의논한 다음 사유를 갖추어 명나라에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성종 16 을사(1485) 10 11(무자)

수우(水牛)도 유구(琉球)로부터 우리 나라에 왔건만 잘 번식되고 잘 자라니, 후추라고 해서 반드시 잘 자라지 않을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태종 12 임진(1412) 4 21(을해)

자바국[爪蛙] 아열(亞列) 진언상(陳彦祥)이 사자를 보내어 토물을 바쳤으니, 유구(琉球)의 별종(別種)이었다. 

 

. 《여지승람》

서남쪽으로는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이 가깝고, 북쪽으로는 강진(康津)ㆍ해남(海南)과 접하여 세상에서 수로가 9백 리라고 일컫지만 실은 4백여 리라 한다. 토산물로는 감ㆍ귤ㆍ유자와 여러 가지 향목(香木)과 약재(藥材)가 나오는데, 영릉향(零陵香)ㆍ안식향(安息香)ㆍ종유(鍾乳)ㆍ백랍(白蠟)ㆍ석결명(石決明)ㆍ빈주(璸珠)ㆍ앵무라(鸚鵡螺)ㆍ우황(牛黃)총모(騣帽)ㆍ양대(梁臺) 등속이다.

임하필기 제11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탐라(耽羅)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임읍(林邑) 남쪽 해변의 소국(小國)이라 하고, 《위서(魏書)》에는 섭라(涉羅)라 칭하였으며, 《수서(隋書)》에는 담모라(聃牟羅) 또는 담라(儋羅), 탁라(乇羅)라 하였다.

 

해동역사 제16권 / 세기(世紀) 16

탐라(耽羅)

 탐라는 임읍(林邑)의 남쪽 변경 바다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책부원귀》 ○ 《한창려집(韓昌黎集)》에는,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ㆍ유구(流求) 등의 나라는 동남쪽 천지(天池)에 있다.” 하였다.

[주-D001] 임읍(林邑) : 

지금의 안남(安南)ㆍ순화(順化) 등지에 있었던 옛날의 나라 이름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산수[山水]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한라산[漢拏山]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라산은 제주(濟州)의 남쪽에 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가 있다. 세속에서는 이 산을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운급서(雲笈書)》에 이르기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부라악(浮羅岳)에 내려왔다.” 하였고, 한유(韓愈)의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 유구(琉球), 모인(毛人) 등의 나라는 동남쪽으로 천지(天池) 가에 있다.” 하였다. 탐부라는 지금의 제주이니, 부라악은 과연 한라산을 가리키는 것인가?
 

사료 고종시대사6   >   1872년(고종 9년) 7월 1일   >   고종,

 전 제주 목사 조희순을 소견함

.......

상이 이르기를,

“일본(日本)과 안남국(安南國)은 해읍으로부터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조희순이 아뢰기를,

“일본은 5, 6일의 노정이고, 안남국은 7, 8일의 노정입니다.”

 

고전번역서 > 만기요람 > 군정편 4 > 해방 > 최종정보

제주(濟州)섬. 수로로 970리다. 순풍을 이용하면 하룻만에 닿을 수 있다[一日若風利則可以抵州]. 둘레 400여 리인데 온통 석벽으로 빙 둘려있으며, 우뚝한 바위[屹岩]가 늘어서 있으므로 선박이 접근할 수 없고, 다만 하천 어구에 보(堡)를 쌓아서 방어한다.명월포(明月浦)고려의 최영(崔瑩)이 하치[哈赤]를 여기서 토벌하였다 ㆍ우도(牛島)인마(人馬)가 시끄럽게 하면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 그 서남쪽엔 작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굴이 있는데 차츰 들어가면 누선(樓船) 10척을 둘 만하다. 물소가 늘 산다. 

 

기언 48 속집 / 사방(四方) 2

탐라지(耽羅)

탁라, 화탈(火脫), 여서(餘鼠) 사이는 바닷물이 시퍼렇고 심한 바람과 높은 파도가 잦다. 매해 봄과 여름에 남쪽 바다 너머를 바라보면 높은 돛대에 큰 돛을 단 배가 무수히 지나간다. 이곳은 흑치국(黑齒國) 오랑캐가 중국과 교통하는 길목이고 또한 바다 건너 여러 만이(蠻夷)의 물화가 교통하는 곳이다. 서남쪽으로는 백해(白海)가 바라보이는데 최부(崔溥)가 표류하여 동풍을 타고 7일 만에 백해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너머는 대유구(大琉球)가 있다.

 

○ 탐라(耽羅)는 그 풍속이 노(獠 서남지역에 사는 오랑캐)와 같고 그 땅이 멀며, 성주(星主 제주 목사)와 왕자(王子)와 토호의 세력 강한 자들이 평민을 다투어 차지하고, 일을 부리는데 이를 인록(人祿)이라 하며, 백성을 괴롭혀 욕심을 채우므로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컫는다. 〈교은송인서(郊隱送人序)〉

 형주(荊州지방에 살던 만족(蠻族).

 

홍재전서 제38권 / 유서(諭書)

유독 탐라(耽羅) 한 지역은 바다 밖에 따로 떨어져 있어서 뭍길이 몇천여 리나 되고 물길은 그 두 배나 된다.

陸行幾千餘里。水路則倍之。

 

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 세조 8년 임오 > 1월 16일 > 최종정보

08-01-16[05] 하직하고 돌아가는 유구국 사신에게 답서를 주고 홍윤성에게 전송케 하다

.....

지금 찾는 《대장경(大藏經)》 1부(部)와 변변치 못한 토물(土物)을 온 사신에게 나아가 부치니,잘 수령(受領)하면 천만 다행하겠다. 앵무(鸚鵡)와 공작(孔雀)을 후일에 오는 사신을 통하여 보내 와서 여망(輿望)에 부응(副應)하면 더욱 왕(王)의 교린(交隣)을 미덥게 하는 뜻을 보겠도다

 

고전번역서 > 다산시문집 > 다산시문집 제4권 >  > 최종정보

3월 9일 장기(長鬐)에 도착하여 그 이튿날 마산리(馬山里)에 있는 늙은 장교(莊校) 성선봉(成善封)의 집을 정하여 있게 됐다. 

........

서남해 바다 물빛 금릉과 맞닿아서 / 西南海色接金陵
장사배가 며칠이면 이곳까지 닿는다네 / 商舶東來數日能
경뢰가 바라보인다 그 말 믿지 못했더니 / 未信瓊雷解相望
빽빽하게 모인 섬들 푸르르고 험하구나 / 叢攢島嶼碧崚嶒

경뢰(瓊雷) : 

해협(海峽) 이름. 중국 광동성 뇌주반도(雷州半島)와 남해도(南海島) 사이에 위치한 경주해협(瓊州海峽). 일명 뇌주해협(雷州海峽)이라고도 하는데 홍콩[香港] 등지나 원남해협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임.

 

운양집 제1권 / 시(詩)○승평관집(昇平館集)   (참고 ;  횡간도 전남 여수)

전복 따는 아이〔採鰒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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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간도에서 전복 따는 아이 / 橫干島裏採鰒兒
노란 눈동자 붉은 머리털 그 모습 괴이해라 / 黃瞳赤髮形怪奇

 

> 고전번역서 > 운양집 > 운양집 제5 >  > 최종정보

운양집 제5 / ()○영도고(瀛島稿) 정유년(1897, 광무1) 12월부터 신축년(1901, 광무5) 5월까지이다.

이아석을 초청하여 술 마시다 함께 읊었다. ‘옥 호 매 춘 상 우 모 옥’을 운자로 나누었는데, 나는 ‘춘’ 자를 얻어 칠언 절구를 지었다 2월 보름 〔李我石邀飮共賦分韻玉壺買春賞雨茅屋余得春字七絶 二月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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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추위 가벼운 온기 꽃 시절에 가깝고 / 嫩寒輕暖近花辰
고을 누각에 동풍 불어 버들 빛이 새롭네 / 郡閣東風柳色新
꽃가지 위의 사다새 잘 알고 있겠지 / 枝上提壺應解事
그대 집에서 갓 익은 술 처음 맛보는 줄을 / 君家初試甕頭春

 

운양집 제5 / ()○영도고(瀛島稿) 정유년(1897, 광무1) 12월부터 신축년(1901, 광무5) 5월까지이다.

새벽에 일어나 사다새 소리를 듣다〔曉起聞提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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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새 우는 소리 나무 너머 들리고 / 欵欵啼壺隔樹鳴
귤원 깊은 곳에 새벽바람 맑구나 / 橘園深處曉風淸
주민은 모양과 소리 차이를 모른 채 / 居人不識形聲異
가지 끝 일찍 온 꾀꼬리 소린 줄 아네 / 錯認枝頭聽早鶯

 

사다새는 사다새과에 딸린 새로, 펠리컨이라고도 한다. 호수나 바닷가 등에서 생활하며, 작은 물고기나 새우류 등을 잡아먹는다. 호반 또는 습지의 갈대밭이나 갯벌에 나뭇가지나 풀로 둥지를 만든다. 3~7월에 한배에 2~3개의 알을 낳는다. 우리 나라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새로, 중국 · 일본 · 타이완 및 유럽 등지에 분포한다.국내에서는 1914년 11월 3일 인천에서 1개체가 채집된 기록만 있는 미조다.

운양 김윤식 

1896년에는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참여하고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김홍집 내각에서 갑오개혁에 관여하였으나, 같은 해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 일어남과 동시에 김홍집 일파 역시 실패하면서 이들의 뒤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위정척사 계열의 공세에 시달리고, 제주목으로 종신 유배된다

기언 별집 제15권 / 기행(記行)

범해록(泛海錄

...

저녁에 다시 배에 올라 남해의 제암(梯嵒)에 정박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배를 집 삼아 살고 잠수를 잘하여 조개를 잡아 생활하는데, 누더기 옷에다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이들은 《나충지(臝蟲誌)》에서 이른 단만(蜒蠻)에 해당되는 미개인들로서 그 성질이 변덕스럽고 간사하다.

...........

바다에는 섬이 많고 그 가운데 거제도(巨濟島), 한산도(閑山島), 사량도(蛇梁島), 적량도(赤梁島), 검매도, 나라도(娜羅島) 등에는 연대(烟臺)와 수루(戍壘)가 있다. 그 섬들 바깥은 외양(外洋)에 해당하는데, 연하도(烟霞島)와 욕지도(蓐芝島)가 외양에 있으며 오랑캐들은 이곳에 와서 정박한다. 동남쪽으로 멀리 일본(日本)이 있고, 서쪽으로는 탐라(耽羅)가 있다. 바다 멀리 있어 보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고 1년에 고작 두세 번 보이는데, 보이게 되면 큰 비가 내린다.

그 남쪽에는 해외의 오랑캐 국가들이 있는데, 그 나라들을 살펴보면 우민(羽民), 사화(沙華), 과와(瓜蛙), 유구(琉球), 마라노(麻羅奴) 등이며, 《외이지(外夷誌)》에는 이들 나라가 모두 바다 가운데 있으며 천하의 동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남해중감회시(南海中感懷詩)〉 2수를 지었다. - 시는 습유(拾遺)에 보인다. -

[-D004] 단만() :

중국 광동(廣東)과 복건(福建) 지방에 살던 부족을 이른다. 남해기(南海記)》에 의하면, 그들은 배 안에다 방을 만들어 생활하는데, 그물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종족, 바닷속에 들어가 진주조개를 잡는 종족, 나무를 베어서 생활하는 종족 등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오잡조》(五雜組)에, “영남(嶺南)에서는 개란(螘卵)과 이무기[蚺蛇]를 모두 진귀한 반찬으로 여기며, 비오리[水鷄]와 두꺼비는 사실 비슷한 종류인데, 비오리를 즐겨 먹는다.”고 하였으며, 이 밖에도 후세 사람들이 먹는 곤충은 많다. 흙번데기[土蛹]ㆍ누에 번데기[蠶蛹]ㆍ우렁이[田螺]ㆍ가재[石蟹]ㆍ계수나무굼벵이[桂蠹]를 먹었고, 또 밀즉[蜜喞]은 털이 나지 않은 쥐새끼인데, 꿀[蜜]에 담갔다가 먹었고, 좌어(坐魚)는 바로 비오리이며, 천하(川鰕)는 세속에서 사홍(沙虹 새우의 별칭)의 종류라 칭하는데, 모두 곤충에 속하는 것들로서 중원 사람들은 보통으로 먹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먹는 사람이 있으니, 옛날에 지해(蚳醢)를 썼다는 것을 어찌 이상하게 여기겠는가.” 라고 했으므로, 이에 대충 증정하는 바이다.

 

다산시문집 제4권 / 시(詩)

추회(秋懷) 8수. 신유년 가을 장기(長鬐)에 있으면서

개구리알도 밀즉도 먹으라고 서로 권하면서 / 䵷蛇蜜喞猶相餉
남쪽 요리와 북쪽 요리가 다르다고 말을 말게 / 休說南烹異北烹

밀즉 : 쥐새끼를 꿀에 넣어둔 것. 중국 서남지방 벽지 계곡에 사는 만족(蠻族)들이 즐겨 먹는다고 함. 《升庵外集》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헌종(憲宗) / 헌종(憲宗) 13(1847)

지난달 30일에 이양선(異樣船) 2척이 표류해 만경(萬頃)ㆍ부안(扶安) 두 읍의 경계에 도착하였는데,.........

 

문:광동성은 여기와의 거리가 몇 리나 되는가? 원수의 벼슬은 무슨 품계이고 성명은 무엇이며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가?

답:광동성은 여기에서 3천여 리이다. 원수는 1품관이고 성명은 슬서이이며 나이는 60세 이상이다.

문:여기에서 광성성과의 거리가 이처럼 서로 가까운가?

답:그렇다. 수로(水路)의 거리는 3천여 리이다.

 

사료 고종시대사2   >   1866년(고종 3년) 12월 20일   >   슈펠트(Shufeldt), 제너럴셔먼호 사건 처리에 대한 견해를 밝힘

...

그러나 이들은 나라의 서해안 전체가 매년 중국인 특히 광동인들의 약탈과 강도질의 활동무대라는 점과 셔먼호에 열 명의 광동인이 승선해있다는 점으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성호사설 9 / 인사문(人事門) 

일본 사람이 말하기를 “본국이 일찍이 조선에 대하여 큰 덕을 끼쳤는데도 조선은 알지 못한다. 지난날에 남만(南蠻)이 조선을 치고자 하여 일본더러 향도(鄕導)가 되어 달라고 청하여 관백(關伯)이 장차 허락하려 하는데, 대사마(大司馬)가 간하기를 ‘일본이 조선과 화친을 맺은 적이 오래인데 어찌하여 허락하려 하는가?’ 하여 마침내 중지했다.”고 하는 것이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4 - 사적류 1 / 사적총설(史籍總說) 

【유구(琉球)】

유구는 본국(本國)에 반드시 사책이 있으련만 중국에 흘러 들어온 것은 보지 못하였고, 다만 중국 사신들이 기록한 것으로 충분히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있으니, 서보광(徐葆光)의 《사유구기(使琉球記)》, 장학례(張學禮)의 《사유구기략(使琉球記畧)》, 청 나라 주황(周煌)의 《유구국지략(琉球國志略)》4권, 청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유구세찬도(琉球世纘圖)》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와 내가 지은 《유구교빙지(琉球交聘志)》가 있다. 대개 유구가 개국(開國)하던 초기에 천손씨(天孫氏)라는 자가 있어 25대를 전해 왔는데, 홍황(洪荒) 을축년에서부터 시작하여, 송(宋) 나라 순희(淳熙) 13년(병오)에 이르러 역신(逆臣) 이용(利勇)이 임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자 순천(舜天)이 그를 토벌하여 죽였다. 이용이 죽고 나자 중의(衆議)에 의해 순천이 왕으로 추대되고 천손씨는 망하였는데, 모두 1만 7천 8백 2년 이었다. 순천은 순천으로부터 의본(義本)에 이르기까지 5대 만에 망하였는데, 모두 73년이다. 이때 천손씨의 후예인 영조(英祖)라는 자가 있어, 송 나라 경정(景定 송 이종(宋理宗)의 연호. 1260~1264) 원년에 의본의 양위(讓位)를 받아 즉위하였으나, 7대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찰도(察度)라는 자가 있어 고려 창왕(昌王) 2년(기사)에 처음으로 고려와 통하면서 표(表)를 올려 신(臣)이라 칭하였고, 국조에 들어와서는 태조 정축년에 유구왕 무령(武寧)이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신하라 칭하였으며, 광해군(光海君) 1년(기유)에도 유구국에서 내빙(來聘)하였으며, 인조(仁祖) 6년(무진)에는 북경(北京)에 가 있는 우리 사신 편에 그들의 자문(咨文)을 체송(遞送)하였다. 세상에서는 ‘선조(宣祖) 때에 유구의 세자(世子)가 제주(濟州)에 유랑(流浪)한 것을 제주목사(濟州牧使) 이기빈(李箕賓)이 쳐 죽이고 물화를 빼앗음으로써 그들과 국교가 끊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말이다.

찰도에서부터 상목(尙穆)에 이르기까지는 24세이고, 찰도에서부터 사소(思紹)에 이르기까지는 성씨를 상고할 수가 없다. 상파지(尙巴志)에서부터 상목에 이르기까지는 상(尙)으로 성을 삼았는데, 상목은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1736~1795) 때에 해당한다.

이종덕(李鍾德)의 《표해록(漂海錄)》에 “우리 순종(純宗) 13년(계유)에 살마도주(薩摩島主)가 유구국의 왕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칭신(稱臣)하게 함으로써, 지금은 일본(日本) ‘살마도주내유구국왕(薩摩島州內琉球國王.’이라는 직함으로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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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65권 / 청령국지 2(蜻蛉國志二)

이국(異國)

 남만(南蠻) 예전부터 천축(天竺 인도의 옛 이름)과 남만(南蠻) 여러 나라의 장삿배가 일본에 왔고, 일본 사람들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에 암액리아(諳厄利亞 포르투갈어의 암그리아, 곧 영국)ㆍ이서파이아(以西巴爾亞 에스파니아, 곧 스페인의 옛 이름)와 아마항(阿媽港 중국 광동(廣東)에 있는 지명)ㆍ여송(呂宋 루손, 곧 필리핀의 북쪽 큰 섬 이름) 등의 남만 사람들이 야소법(耶蘇法 예수교)을 일본에 퍼뜨려서 일본의 서국(西國 기내(畿內) 이서 지방을 가리킴) 사람들이 사술(邪術)에 친근하므로, 그것을 금지하여 그 괴수를 능지(凌遲)하고 당여(黨與)를 참수(斬首)하되,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불법(佛法)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용서하였다. 관영(寬永) 15년(1638) 이래로 남만의 배가 와서 정박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고 일본 사람이 외국에 왕래하는 것도 금지하였으나, 아난타(阿難陀 미상)ㆍ섬라(暹羅 샴, 곧 타이의 옛 이름)ㆍ교지(交趾 인도지나반도의 동북부)ㆍ동경(東京 인도지나반도의 동북부)ㆍ대원(大寃 타이완[臺灣])과 중국에서는 해마다 와서 정박하였으며, 점성(占城 인도지나반도의 동남부)ㆍ간보채(柬埔寨 캄보디아)ㆍ태니(太泥 말레이반도의 중북부)ㆍ육갑(六甲 말레이반도의 중남부)ㆍ교류파(咬𠺕吧 카루파. 지금의 자카르타)ㆍ조와(爪哇 자바)ㆍ번차(番且)ㆍ모라가(母羅伽 말라카. 셀레베즈의 동쪽 섬)ㆍ발니(渤泥 보르네오. 타이의 남부인 바르니라고도 함)ㆍ막와이(莫臥爾 모우르. 옛 인도의 한 지방명)ㆍ방갈랄(傍葛剌 수마트라의 벤쿨렌?)ㆍ파사(波斯 페르시아)ㆍ파우(琶牛 페구. 버마의 남부)ㆍ소문답랄(蘇門答剌 수마트라) 등 무릇 35개국에는 아란타(阿蘭陀 홀랜드) 사람들이들어가서 교역하여 그곳 토산의 화물을 가져와 일본에서 팔았으니, 일본이 나라가 가멸하고 군사가 강해져 바다 가운데에서 세력을 떨치는 까닭은 능히 외국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마가타(摩迦陀) 관영(寬永) 15년 이전에 천축(天竺)에 간 일본 사람이 많았다. 파마(播磨 하리마)의 고사(高砂 다까사고)의 뱃사람이 관영 3년 10월 16일에 장기(長崎 나가사끼)에서 배를 띄워 이듬해 3월 3일에 천축 마가타국(摩迦陀國)에 이르렀다. 장기에서 남으로 6백 40리를 가면 규롱(圭籠)이라는 태원(太寃)의 북쪽 끝에 이르는데, 태원은 대만(臺灣)이다. 거기서 서쪽으로 6백 50리 가면 광동(廣東) 바다에 이르는데, 이곳은 바다가 깊어서 깊이가 천 길쯤 된다. 밤에 남방으로 큰 별 둘을 보고 방위를 정하여 남으로 3백 리 가면 구비(駒鼻)에 이르는데, 이곳은 중국의 동남 모퉁이이다. 거기서 서쪽으로 3백 리 가면 교지(交趾)에 이르고, 또 남으로 4백 리 가면 점성(占城)에 이르고, 또 남으로 4백 리 가면 간보채(柬埔寨) 땅에 이르고 또 남으로 2백 리 가면 섬라(暹羅) 땅에 이르고, 또 서북으로 8백 리 가면 마가타국 유사천(流沙川) 어귀에 이른다. 장기에서 여기까지 3천 7백 리인데, 중국 이수로 계산하면 3만 7천 리가 된다. 칠구월부터 삼사월까지는 무더워서 날마다 서너 번 멱감는다. 옷은 직철(直裰)과 같고, 작은 칼을 차고, 머리털은 꼭대기에 묶어서 비녀를 꽂으며, 여인도 원계(圓䯻 둥글게 틀어올린 머리)하며, 천관(天冠)에 영락(瓔珞)을 단다. 부도(浮屠 승려)의 계법(戒法)이 매우 엄하여, 걸어다닐 때에 여인의 발자취를 밟지 않는다. 정월부터 곡식을 심어 3월ㆍ6월ㆍ10월 세 번 익으며, 그 짚은 두 길이나 된다. 집집이 공작(孔雀)을 기르는데, 봉황(鳳凰)이 하늘을 날면 공작이 두려워서 집안으로 도망해 들어간다.

 

유구(琉球) 복건(福建 중국 복건성)의 동남에 해당하며, 일본 살마(薩摩)의 서남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도읍 이름은 나패(那覇)이다건방(乾方) 섬을 팔두산(八頭山)이라 하는데 그 사이의 해로(海路)ㆍ육로(陸路)는 모두 3백 70리이며, 팔두산에서 복건까지는 50리이며, 나패에서 살마까지는 3백 80리인데 그 사이에 작은 섬 일곱이 있다. 그 풍속은 환기(紈綺 비단, 환은 흰 깁 기는 무늬 있는 비단)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磁器)ㆍ철부(鐵釜)를 귀하게 여기며, 귀신을 몹시 믿고 의약(醫藥)을 모른다.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은 부인을 시(尸 신령을 대신하여 제사를 받는 자)로 삼으며 그 우두머리를 여군(女君)이라 부른다. 오경(五經)은 없으나 사서(四書)는 있으며, 《두율우주(杜律虞注)를 경(經)으로 삼는다. 화살은 2백 보까지 갈 수 있다. 풍속이 기한(飢寒)을 잘 견디며, 싸움을 좋아한다. 못 벗어날 것을 알면 칼을 당겨서 스스로 죽는다. 강한 나라라고 일컬으나 유구인 열이 왜인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 일본의 원의조(源義朝 ‘미나모도  요시도모’ 1123~1160) 용맹하고 힘세기가 짝이 없는데이조원(二條院때에 이두(伊豆 이즈) 유배되었다가 유구에 이르러 요괴[魑魅] 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사당을 세웠는데, 순천대명신궁(舜天大明神宮)이라 한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파초포(芭蕉布)ㆍ흑사탕(黑沙糖)ㆍ포성주(泡盛酒)ㆍ번초(番蕉)ㆍ유구연(琉球筵)이 있다.

 

하이(蝦夷) 일명 획복(獲服)이라 하고 일고견국(日高見國)이라고도 하고 모인국(毛人國)이라고도 부르는데, 일본의 동북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 땅은 남북으로 길고, 북으로 숙신(肅愼)과 인접하였으며, 험한 산이 많다. 그 남쪽 바닷가의 포구 송전(松前 마쓰마에)은 송전지마수(松前志摩守 마쓰마에 시마노가미)의 성거(城居)이다. 송전에서 육오(陸奧 쓰무)의 진경(津輕 쓰가루)까지 바다로 15리이고, 송전에서 증우야(曾宇夜 소오야[宗谷])까지 3백 80리인데 증우야는 하이 땅의 북쪽 끝이다. 증우야에서 가량부지(加良不止 가라후도[樺太])까지 43리인데, 가량부지는 섬 이름이며 곧 숙신에 속한 땅이다. 남자나 여자나 피발(被髮)하고 문신(文身)하며 사람됨이 용맹하고 남녀가 섞여 살며 부자의 분별이 없다. 겨울에는 굴에서 자고 여름에는 둥우리에 살며, 털가죽을 입고 짐승의 피를 마신다. 키는 6척이며 피발하고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다. 다닐 때에는 발소리가 나지 않고 높은 데에 오르거나 물에서 헤엄칠 때에는 짐승처럼 빠른데 염장(鹽醬)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말을 들 힘도 없으나 이마에만은 힘이 있어서 짐은 다 이마의 힘을 쓴다. 수명 40~50세를 넘기는 사람이 드문데, 이것은 고기만을 먹고 곡식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군장(君長)의 호칭을 사구사윤(沙具沙允)이라 하고 귀릉(鬼菱)이라고도 부르며, 그 나라에는 글자가 없었다. 은혜를 받고서는 잊으나 원수지면 갚으며, 화살을 묶은 머리 속에 감추고 칼을 옷 안에 찬다. 당 나라 현경(顯慶 656~660) 때에 왜사(倭使석진수길상(石津守吉祥) 따라  나라에 들어갔다. 경행(景行 B.C. 71~A.D. 130) 때에 군사를 내어 하이를 토벌하매, 하이가 일본의 종나라[奴國]가 되었다. 물고기 기름[魚脂]을 마시는데, 지주(脂酒)라 한다. 활을 쏘면 멀리 가지는 않으나, 쏘면 반드시 짐승을 맞힌다. 또 초오두약(草烏頭藥 초오두는 독초(毒草)의 이름)을 만들어 촉에 발라 사람을 쏘면 피부가 썩어 해지는데, 바삐 피부를 도려내고 날마늘을 갈아 붙이면 곧 살아난다. 부모와 지아비의 상(喪)을 당하면 친속(親屬)이 모여 와서 목도(木刀)로 상을 당한 사람의 머리와 등을 두들겨 살이 다 상하여 터지고 거의 죽게 되어야 그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을 효행(孝行)으로 여기며, 이것을 조타(弔打)라 한다. 곁에 있던 사람이 얼른 안아서 바다에 던지고 짠물로 씻으면 헌 데가 나으며, 더는 애모(哀慕)하지 않는다. 남이 잘못하여 죽은 사람의 일을 물으면 분노하여 좋아하지 않는데, 물건으로 보상하면 ‘잊어 가는 슬픔을 어찌하여 다시 권하여 비탄(悲歎)하게 하느냐?’ 한다.

혹 전하기를 ‘원의경(源義經 미나모도 노 요시쓰네)이 육오(陸奧)에 있을 때에 태형(泰衡) ()을 당하여 거짓으로 죽은 체하고 하이로 달아났는데, 백성이 다들 경복(敬服)하였으며, 죽은 뒤에 사당을 세워 남무의경(南無義經)이라 칭한다.’고도 한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녹비(鹿皮)ㆍ웅비(熊皮)ㆍ엽호피(獵虎皮 엽호는 바다짐승의 이름)ㆍ오해서(熬海鼠 마른 해삼)ㆍ올눌제(膃肭臍 물개의 음경(陰莖))ㆍ곤포(昆布 다시마)ㆍ복(鰒 전복ㆍ일본에서는 복어를 뜻하기도 함)이 있다.

 

대원(大冤) 하문(厦門 아모이)에서 남쪽(실은 동쪽)으로 1백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중국에서는 손방(巽方 동남방)이 되고 일본에서는 신유방(申酉方 신방과 유방의 간방(間方), 신방은 동남, 유방은 서방)이 된다. 일명 대만(臺灣)이라고도 하고 동녕(東寧)이라고도 하고 또 탑갈사고(塔曷沙古)라고도 부른다. 날씨가 늘 덥고 인품(人品)이 비천(卑賤)하며, 나는 듯이 가볍고 빠르며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한다. 아란타(阿蘭陀) 사람들이 빼앗아 성곽(城郭)을 만들고 일본을 왕래할 때의 여관(旅館)으로 삼았었는데, 지금은 중국의 고을이 되었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백사탕(白沙糖)ㆍ녹비(鹿皮)ㆍ산마피(山馬皮)가 있다. 일본까지 바다로 5백 40리이다.

 

안남(安南) 옛 교지(交趾)이다. 일본에서 바다로 1천 4백 리 떨어져 있으며, 날씨가 따뜻하여 서리와 눈을 보지 못한다. 남녀가 다 염치(染齒 이를 철장(鐵漿)으로 물들임)하며, 남자는 정수리를 삭발한다. 복주(福州)ㆍ장주(漳州)의 상인들이 무역하여 일본으로 온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기남(奇楠)ㆍ침향(沈香)ㆍ철도목(鐵刀木)ㆍ빈랑(檳榔)ㆍ소방(蘇方)ㆍ육계(肉桂)ㆍ곽향(藿香)ㆍ야자주(椰子酒)ㆍ호초(胡椒)ㆍ등황(藤黃)이 있다.

 

동경(東京) 교지(交趾)의 도부(都府)이며, 본디 형제의 나라였는데, 자손에 이르러 서로 다투어서, 교지와 동경이 두 나라로 나뉘었다. 두 나라의 경계에 있는 기야모(岐夜牟)라는 산에 천하에서 제일이라는 육계(肉桂)나무가 있었는데, 병화(兵火) 때문에 산이 타서 육계가 멸종되었다. 이곳의 인물은 교지와 같으나, 정수리를 삭발하지 않고 머리를 묶는다. 일본까지 바다로 1천 6백 리이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천아융(天鵝絨 우단)ㆍ축사(縮砂 나무이름. 축사밀(縮砂蔤))ㆍ아연(亞鉛)ㆍ용안(龍眼)ㆍ도기(陶器)ㆍ칠기(漆器)가 있다.

 

점성(占城) 한(漢) 나라의 임읍(林邑)이었으며, 남천축(南天竺 오천축(五天竺)의 하나. 인도의 남부)에 인접하여 있다. 매우 더워서 벌거벗거나 흰 첩포(氎布 털로 짠 고운 천)를 몸에 두르며, 머리털을 모아서 상투를 틀거나 흩여서 뒤로 늘어뜨린다. 중국 사람이 그곳에 가서 무역하여 일본에 통한다. 일본에서 1천 7백 리 떨어져 있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백단(白檀)ㆍ코끼리ㆍ보살석(菩薩石)ㆍ맹화유(猛火油 석유류(石油類))ㆍ화주(火珠)가 있다.

 

참고 :  탐라는 임읍(林邑)의 남쪽 변경 바다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책부원귀》 ○ 《한창려집(韓昌黎集)》에는,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ㆍ유구(流求) 등의 나라는 동남쪽 천지(天池)에 있다.” 하였다.

[주-D001] 임읍(林邑) : 

지금의 안남(安南)ㆍ순화(順化) 등지에 있었던 옛날의 나라 이름이다.

 

간보채(柬埔寨) 곧 남천축의 소속이며, 사철 덥다. 일본까지 바다로 1천 리이며, 사람들이 다 벌거벗는다. 중국 사람이 가서 무역하여 일본으로 온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녹비(鹿皮)ㆍ상아(象牙)ㆍ서각(犀角)ㆍ혈갈번지화(血竭樊枝花)가 있다.

 

태니(太泥) 남천축 안의 작은 나라이다. 인물은 간보채와 같으나, 언어가 다르다. 중국 사람이 무역하여 일본에 이른다. 일본에서 2천 2백 리 떨어져 있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서국미(西國米)ㆍ빙편(氷片 용뇌(龍腦))ㆍ사향묘(麝香猫)ㆍ앵무(鸚鵡)가 있다.

 

육갑(六甲) 태니의 남쪽에 인접한 나라이며, 태니보다 작은데, 육곤(六昆)이라고도 한다. 일본까지 바다로 2천 2백 리이다. 중국 사람들이 무역하여 일본으로 온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연와(燕窩 해조(海鳥)의 이름)ㆍ빈랑(檳榔)ㆍ소방(蘇方)ㆍ등석(藤席)ㆍ유향(乳香 향목(香木)의 이름)이 있다.

 

섬라(暹羅) 남천축 안에 있는 나라이며, 일본에서 2천 4백 리 떨어져 있다. 매우 더우나 겨울철 밤에는 조금 서늘하다. 벌거벗고 허리에 흰 면포(綿布)를 두르며, 머리털은 짧게 오그라졌다. 이곳의 왕이 해마다 3척의 상선을 일본에 보내어 물건을 파는데, 6~7월에 남풍을 얻으면 배를 띄운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아선약(阿仙藥 설사에 먹는 약의 이름)ㆍ백두구(白荳蔲 약초의 이름)ㆍ화포(花布 짐승ㆍ화초 등의 채색 무늬를 넣어 짠 피륙의 이름)ㆍ교피(鮫皮 상어 가죽)가 있다.

 

여송(呂宋) 대원(大冤) 남쪽에 있으며, 일본에서 8백여 리 떨어져 있다. 야소(耶蘇)의 종문(宗門)을 배우므로, 관영(寬永) 15년(1638) 이래로 그들이 와서 정박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녹비(鹿皮)ㆍ우피(牛皮)ㆍ소방(蘇方)이 있다.

 

아마항(阿媽港) 광동(廣東)의 남도(南島)이다. 예전부터 고약방(膏藥方)과 과자(果子)ㆍ곡종(穀種)을 가져와서 바쳤으며, 여송(呂宋)과 함께 남만(南蠻)에 속하는데, 이곳 사람들이 많이 야소의 종문이 되었으므로, 관영 15년에 왕래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일본까지 9백여 리이다.

 

교류파(咬𠺕吧) 일본에서 3천 4백 리 떨어져 있고, 조와국(爪哇國)에 속하며, 중국의 정남에 있는 해도(海島)이다. 중고(中古) 이래로 아란타(阿蘭陀) 사람이 빼앗아 성곽을 쌓고 여러 나라로 통상(通商)하는 항구로 삼았다. 북극(北極)에서 1백 도(度) 떨어져 있어 적도(赤道)의 남쪽에 해당하므로 매우 더운데, 겨울철에는 더욱 덥고 5~6월에는 도리어 서늘하다. 뒤에 아란타와 혼인하고 관(館)을 세워 접대하였으며, 화물(貨物)을 거둬서 일본에 왕래하였다. 이곳의 물산(物産)으로는 주사(朱砂)ㆍ몰약(沒藥 약향(藥香)의 원료가 되는 나무의 이름)ㆍ석황(石黃 안료(顔料)의 이름. 석웅황(石雄黃))ㆍ자단(紫檀 가구(家具) 등의 재목으로 하는 나무의 이름)ㆍ공청(空靑 염료(染料)ㆍ약재로 쓰이는 광물의 이름)ㆍ용뇌(龍腦)ㆍ파차(巴且 파초)ㆍ살구[杏]ㆍ아랄길주(阿剌吉酒 양주(洋酒)의 이름 Arak)가 있다.

 

발니(渤泥) 중국 서남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일본에서 3천 9백 리 떨어져 있는데, 인물은 섬라와 같고, 토산물로는 용뇌(龍腦)가 있다.

방갈랄(榜葛剌)은 곧 동인도(東印度)이며 일본까지 3천 3백 리인데, 아란타가 무역하여 일본에 이르며, 토산물로는 나가천침(羅加天綅)ㆍ금건면포(金巾綿布 옥양목. canequine)가 있다.

막와이(莫臥爾)는 남천축 안에 있고, 풍속은 섬라와 같으며, 일본까지 3천 8백 리인데, 토산물로는 화포(花布)ㆍ화모전(花毛氈)이 있다.

성다묵(聖多黙 산토메, 인도 동해안에 있는 지명)은 막와이와 가까운 나라이고, 일본에서 3천 8백여 리 떨어져 있으며, 토산물로는 교록혁(鮫鹿革 상어ㆍ사슴의 가죽)이 있는데, 섬라와 중국 사람들이 그 토산물을 일본에 가져와서 판다.

 

인제아(印第亞 인디아) 천축의 서남 모퉁이이며, 일본에서 4천 리 떨어져 있는데, 중국 사람들과 아란타 사람들도 왕래하지 않으며, 예전에는 일본에 많이 왔으나 지금은 오지 않는다. 이곳의 물산으로는 피혁(皮革)이 가장 좋다.

파우(琶牛)는 남천축 안에 있으며, 일본에서 2천 5백 40리 떨어져 있는데, 풍습은 섬라와 같고, 석가(釋迦)의 구적(舊跡)이 이곳에 있으며, 토산물로는 상아(象牙)ㆍ아연(亞鉛)이 있다.

파사(波斯)는 서양에서 인도로 오는 길목이며, 일본에서 5천 1백 리 떨어져 있는데, 토산물로는 안식향(安息香)ㆍ포도주(葡萄酒)가 있다.

안타만(晏陀蠻)은 사람들의 몸이 옻처럼 검으며, 일본에서 8천여 리 떨어져 있다.

 

[주-D012] 건방(乾方)의 …… 하는데 : 

건방(서북방)은 곤방(坤方 : 서남방)을 잘못 적은 것일 것이다. 팔두산(八頭山)은 팔중산 열도(八重山列島)를 말하는 것이며, 이 섬들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 있는 유구 열도(琉球列島)의 서남단에 있고, 나하[那霸]는 유구 열도의 복판에 있는 가장 큰 섬에 있다.

[주-D015] 하이(蝦夷) : 

‘에미시’ ‘에비스’ ‘에소’ 등 여러 가지로 읽는다. 대개 일본의 중앙 정권이 미치지 않던 무쓰[陸奧]로부터 동북 지방을 말하는 것인데, 동북 지방을 개척해 나아감에 따라 이 이름이 가리키는 지방도 점점 동북 밖으로 옮겨 갔다. 원문에 획복(獲服)이라 한 것은 미상하다. 히다까미 노 구니[日高見國]라 한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상륙풍토기(常陸風土記)》 등 여러 기록에 보이는데, 대개 ‘무쓰’의 남부의 한 지방으로 보이며 그 나라가 옮겨 다녔을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원문에서 지방을 밝힌 것은 지금의 북해도(北海島)인데도 고사(古事)에 언급한 것은 거의 다 ‘무쓰’ 등지의 일이다.

.[주-D019] 안타만(晏陀蠻) : 

버어마와 수마트라 사이의 바다에 있는 섬들로 된 나라인 안다만이라고 하나, 원문에서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등에서나 일본에서 7~8천 리가 된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페르시아보다도 훨씬 멀어야 하나, 반드시 이곳이라 확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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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일기 곤(東槎日記坤) / 강관필담(江關筆談)

강관필담

[DCI]ITKC_BT_1402A_0020_010_0020_2003_009_XML DCI복사 URL복사

신묘년(1711, 숙종 37) 11월 5일 강호(江戶)에 있을 때 신정축후수 원여 군미(新井筑後守源璵君美)가 관(館)에 찾아왔는데, ……

 청평은 말하기를,

“유구(琉球)는 여기서 몇천 리나 되며, 복건(福建)과 장기(長崎)와의 거리는 또 얼마나 됩니까?”

하니, 백석이 대답하기를,

“본국 이법(里法) 일본에선 10리를 1리로 계산함 으로 5백 리쯤 되는데 남해(南海) 속에 있는 땅이고, 태양의 적도(赤道) 아래 있기 때문에 열국(熱國)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복건과 장기와의 거리도 대략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

하였다. 청평이 묻기를,

“복건을 왕래하는 도중에 해적(海賊)이 출몰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상선(商船)들이 또한 겁탈을 당하는 일이 없습니까?”

하니, 백석이 대답하기를,

“해적에 대한 재난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남강이 묻기를,

“듣건대 매년 왕래하는 상선의 수가 정해져 있다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백석이 대답하기를,

“보통 장기항에 모여드는 당산(唐山) 여러 도(道) 선박의 1년간 정수가 1백 60내지 1백 70정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였다. 평천이 묻기를,

“근래 해로(海路)에 방해되는 것이 많아서 당산 지방의 선박들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듯한데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백석이 대답하기를,

“상선들이 작년 이후 그 도착할 시기를 많이 늦추었는데, 뒤에 들으니 해상에 적선(賊船)들이 내왕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금년 봄에 복건군문(福建軍門)에서 해적 괴수를 추격하여 체포했으므로, 해로가 이미 개통되었고, 당산의 상선도 평년과 같이 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였다. 남강이 묻기를,

“해적이란 어떤 적이며, 어떻게 섬멸할 수 있었다 합니까?”

하니, 백석이 그의 품속에서 조그마한 책을 꺼내보고는 대답하기를,

“해적의 괴수는 정진심(鄭盡心)ㆍ진명륭(陳明隆)ㆍ이노류(李老柳)등 인데, 남경총병(南京摠兵)에게 체포되었다 합니다. 노류라는 이름은 참으로 도적놈의 이름답지만, 도적놈의 이름이 진심이라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 아닐까요?”

하였다. 남강이 말하기를,

“정진심은 혹시 정금(鄭錦)의 후예가 아닐까요?”

하니, 백석이 대답하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