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명조선

천자(天子)의 분노가 극도에 달했을 뿐 아니라 왜적(倭賊)도 3면으로 침입하고 있어 실상 자전(自全)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믿음을갖자 2023. 7. 6. 00:47

성호사설 제22권 / 경사문(經史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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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ㆍ염(林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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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武成)은 주(周) 나라 글이고 맹자(孟子)도 주 나라 사람이었는데, “서적(書籍)에 쓰인 것을 다 믿으면 서적이 없기만 못하다.” 하였다. 세상운수는 시대를 따라 돌고, 사람의 마음은 보는 데에 따라 변하므로 사실 그대로 적는 붓도 혹 사실에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이 군자(君子)의 공론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여조(麗朝)의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은 제멋대로 재물을 탐내고 방종하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그의 무리에 달관 서요(達官庶僚)로서 죽임을 당한 자가 50명이 넘었고, 자손 중 강보 유아(襁褓幼兒)까지도 모두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으며, 가신(家臣)ㆍ악노(惡奴)도 연좌(連坐)되어 죽은 자가 1천 명이 넘었다.” 하니, 저 탐종 불법(貪縱不法)의 죄가 어찌 이토록 심한 데까지 이르렀을까?
이 때를 당하여 아태조(我太祖)가 임금을 놀라게 하는 위명(威名)이 있자 공을 시기하는 자 또한 많았으니 형세가 둘이 설 수 없게 되었다. 임견미와 염흥방의 화가 조반(趙胖)에서 시작되었는데 조반은 개국 원훈(開國元勳)이 되었으니, 견미와 흥방이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우(禑)가 믿고 중하게 여긴 자는 오직 이인임(李仁任)이었는데, 견미는 “광평(廣平 이인임(李仁任)의 봉호(封號))이 나를 그르게 여긴다.”고 하였다.
또 북원(北元 원(元) 나라를 가리킴)과 교통을 끊고 명조(明朝 명 나라 조정)를 오로지 생각한 자는 최영(崔瑩)이었는데, 인임이 귀양가게 되자 영은 오히려 이르기를, “인임은 결국 사대(事大)를 도모하고 국가를 진정시켰으니, 그 공이 허물을 가릴 수 있다.” 하였다. 그러면서도 발꿈치도 돌리기 전에 요(遼)를 쳐야 한다는 계책을 굳게 결정하였다.
이때는 천자(天子)의 분노가 극도에 달했을 뿐 아니라 왜적(倭賊)도 3면으로 침입하고 있어 실상 자전(自全)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저 보잘것없는 피폐한 군사로써 침략을 막고 변경(邊境)을 방어하였던들 영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겠는가? 이는 다만 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고 천자의 꾸짖음을 막는 데 불과했던 까닭에, 요(遼)를 친다는 계획도 실에 있어서는 태조(太祖)에게 화를 전가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당장 그때의 계획이 좋았느냐 나빴느냐는 논하지 않더라도 견미와 흥방을 살해한 것은 영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것이 명확하다. 대개 천하의 큰 운수란 하루아침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유래된 바가 오래라는 것이다. 원 세조(元世祖)도 반드시 왜적을 치려고 했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갓 소방(小邦)의 혼란만 불러일으킨 셈이다.
원 나라 말엽에 미쳐서는 남쪽의 환란이 유래없이 참혹하였으니 태조의 신용(神勇)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힘입었겠는가? 까닭에 그의 위명이 나타나게 됨은 태조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위엄이 나타남에 따라 꺼리는 자가 이르고, 꺼리는 자가 이름에 따라 몸이 위태하게 되는 법이다. 흔드는 이가 사방으로 모이고 틈이 여러 갈래로 벌어지게 되었으니, 비록 가국(家國)을 안전하게 하고자 한들 마음대로 될 수 있었겠는가?
요를 치러 나갈 때도 태조가 먼저 강을 건너 갔었으나 영과 우(禑)는 뒤따라 가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이유였을까? 진실로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일이 없었더라면 그때에 존망(存亡)의 기틀이 갈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미 신창(辛昌)을 임금으로 세워서 친히 상국(上國)에 조현(朝見)하도록 재촉한 것은 또한 목로(牧老)의 계획이었다.
장차 길을 떠나려 할 때 그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그의 어림을 민망히 여기고 못 가도록 하였으니, 이도 역시 하늘이 시킨 일이었다. 나중에 대관(臺官)이 이숭인(李崇仁)등의 죄를 논하면서, “이색(李穡)의 간계(奸計)에 따라 창(昌)을 조현하라고 독촉하고 신우(辛禑)를 임금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했으니, 그 당시의 일로 미루어 본다면 계획이 아주 주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벌써 나쁜 덕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씨(李氏)가 그에게 악마로 되었다. 세상 사변을 묵묵히 살펴보면 모두 하는 수 없어 하게 되었고, 인력으로는 편케 할 수 없으니, 어찌 하늘이 시킨 일이 아니겠는가?
ⓒ 한국고전번역원 | 김철희 (역) | 1977
林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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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成周書也孟子周人也亦曰盡信書不如無書世運斡旋人情改觀載事之茟容或過實此君子之公議也世傳麗朝林堅味廉興邦貪縦被誅其黨逹官庶僚被殺者五十餘人子孫襁褓皆不得免家臣惡奴坐死千餘人彼貪縦不法之罪何至若是之甚耶當是時我太祖有震主之威名忌功者亦多勢有不可兩立也林廉之禍始扵趙胖而趙為開國元勲林廉烏得免㢤禑之所倚以為重者李仁任而堅味謂廣平誤我也斥絶北元專意明朝者崔瑩也及仁任之竄瑩猶曰仁任决謀事大鎭㝎國家功可掩過然而不旋踵牢决攻遼之䇿方是時天子盛怒倭寇三邉實自全之不暇以蕞爾疲卒侵擾塞障扵瑩何益此不過歸罪一人以塞天子之厚責故攻遼者其實將欲嫁禍扵太祖也即無論計之善惡踈宻林廉之戕非瑩之本心明矣夫天下之大運非一朝之故所由来逺矣元世祖必欲攻倭意不遂而徒媒亂扵小邦及其衰末南憂之酷慘無古非太祖神勇國將何頼故其威名之著非太祖也時也威著而忌至忌至而身危摇撼四集釁罅百道雖欲家國全安得乎攻遼之役太祖先渡江而瑩與禑無意継之是又何也苟非威化一着其存亾之機判矣既立辛昌促其親朝上國者亦牧老之計也將行其母李氏悶其幼而抳之此又天也後㙜官之論李崇仁䓁罪曰徇穡奸計督昌朝見而欲立辛禑以當時推之計亦密矣天既厭徳李氏冝其作魔嘿觀事變皆莫之為而為不容人力之安排豈非天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