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첩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황공(黃公)의 행장
고전번역서 > 포저집 > 포저집 제35권 > 행장 > 최종정보
포저집 제35권 / 행장(行狀) 3수(三首)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황공(黃公)의 행장
[DCI]ITKC_BT_0321A_0350_010_0020_2007_006_XML DCI복사 URL복사
공의 휘(諱)는 진(進)이요, 자(字)는 명보(明甫)이다. 그 선조는 장수현(長水縣) 사람이다. 시조 경(瓊)은 신라(新羅) 시중(侍中)으로서 경순왕(敬順王)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고려조에 공직(公直)이라는 분이 명종(明宗)을 섬기며 관직이 전중감(殿中監)에 이르렀는데, 권간(權姦)인 이의방(李義方)과 틈이 벌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런데 읍재(邑宰)가 또 이의방의 뜻에 영합하여 그를 해치려고 하자 남원(南原)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뒤에 감평(鑒平)이라는 분이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면서 두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응시하지 않고 서재를 지어 일재(逸齋)라고 이름한 뒤에 문적(文籍)을 혼자서 즐겼는데 학자들이 많이 따랐다. 일재의 증손인 석부(石富)는 시조로부터 18세에 해당하고 공에게는 8세조가 되는데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추증받았다.
참의의 아들 균비(均庇)는 참찬(參贊)을 추증받았다. 참찬의 아들 군서(君瑞)는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를 지내고 영의정을 추증받았는데, 당시의 명신(名臣)이었다. 그 아들인 영의정 희(喜)는 세묘(世廟)를 보좌하여 태평 시대를 이루었다. 익성공(翼成公)의 시호(諡號)를 받고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는데, 국인(國人)이 지금까지 일컬으며 당(唐)나라의 방두(房杜)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익성의 아들 치신(致身)은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인데, 다섯 아들이 등과(登科)했기 때문에 우의정을 추증받았다. 그가 충청 병사로 있을 적에 기율(紀律)을 엄히 하고 사졸을 사랑하며 옛 명장의 풍도를 보였는데, 어느 날 군대 훈련차 사냥을 나가서 나무에 활을 쏘자 화살이 나무를 관통하여 뺄 수가 없었으므로 이사(吏士)가 모두 탄복하며 바위에 화살이 박혔던 이광(李廣)의 고사에 비유하였다. 그러고 보면 공의 활 솜씨 역시 유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증조 휘 사효(事孝)는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이고, 조부 휘 개(塏)는 부사직(副司直)으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추증받았다. 고(考) 휘 윤공(允恭)은 참의의 종제(從弟)인 진사 원(愿)의 아들로 태어나서 참의의 후사가 되었다. 학문에 힘쓰고 정밀하게 닦다가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좌의정을 추증받았다. 비(妣) 남양 방씨(南陽房氏)는 봉사(奉事) 응성(應星)의 딸인데,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 5) 10월 1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보통 아이와는 달랐으며, 성품이 효성스럽고 온순하였다. 장성해서는 기절(氣節)을 숭상하고 도량(度量)이 있었으며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았다. 체구가 장대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모습이 기위(奇偉)하였고 손을 내리면 무릎까지 닿았다. 그래서 왜적과 누차 교전(交戰)하는 동안에 왜적들도 공의 얼굴을 알고는 공을 만날 때마다 번번이 피하곤 하였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는데 한 시대의 동배(同輩)들이 모두 따라오지 못하였으며, 활쏘기를 배우는 자들이 공의 기예를 많이 법도로 삼았다.
공이 도랑이나 밭두둑 사이를 건너뛰면서 민첩하고 날쌔게 달리는 것을 보면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공의 외족숙(外族叔)인 방덕린(房德獜)이 물만밥을 먹고 있다가 공에게 활을 보여 주면서 “내가 이 밥을 다 먹기 전에 용두산(龍頭山) 위까지 갔다 올 수 있으면 이 활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용두산은 거리가 3, 4리나 되었고 그 사이에 큰 내가 있었으며 길 또한 험하였다. 그런데 공이 날랜 걸음으로 그곳까지 갔다가 돌아왔을 때 아직도 먹던 밥이 남아 있었으므로 모두가 기이하게 여겼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모화관(慕華館)에 모였을 때 꿩이 놀라서 달아나자 나이 젊은 거자(擧子)들이 다투어 그 뒤를 쫓아갔는데, 공이 유독 뒤늦게 알아채고 뒤처져 출발했는데도 그들보다 앞서서 꿩을 붙잡자 시험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경복(驚伏)하였다. 이때 무용(武勇)으로 이름을 떨치던 이종인(李宗仁)이 공이 날래고 민첩한 것을 보고는 벗이 되기를 청하여 생사를 같이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는데, 나중에 결국 그 약속대로 되고 말았다.
병자년(1576, 선조 9)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축년(1577, 선조 10)에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의 신분으로, 종계(宗系) 개정을 주청(奏請)하러 가는 상사(上使) 황림(黃琳)을 따라 군관(軍官)이 되어 연경(燕京)에 갔다. 기묘년(1579) 봄의 도시(都試)에서 일등을 하여 가자(加資)되었으며, 가을의 도시에서 또 일등을 하였다. 경진년(1580)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그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공이 어렸을 때 의정공(議政公)이 작고하여 방씨(房氏)의 산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풍산(楓山)의 선영(先塋)으로 이장하여 함께 부장(附葬)하였으니, 이는 대개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었다. 여묘(廬墓)하는 3년 동안 정례(情禮)를 모두 극진히 하고, 임오년(1582)에 거상(居喪)을 마쳤다. 형과 재산을 나눌 적에 토지 중에 척박한 곳을 택하고 노비 중에 늙은 자를 취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일컬었다.
거산 찰방(居山察訪)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에 시전(時錢) 부락을 토벌할 적에 공이 참획(斬獲)한 수급(首級)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친구 하나가 죄를 짓고 충군(充軍)되어 반드시 공을 세워야만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이에 공이 즉시 참획한 수급을 모두 주어서 그 친구가 사면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이때 공에게도 두 개의 자급이 가해졌다. 갑신년(1584)에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의 편비(偏裨 군영의 부장(副將) )가 되어 막하(幕下)에 있었는데, 이공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을유년(1585)에 안원보(安原堡)의 권관(權管)을 거쳐 무자년(1588)에 다시 선전관을 제수받았다. 그러고 보면 임오년에 북방으로 들어간 뒤로 모두 7년 만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셈이다.
경인년(1590) 봄에 공의 당숙(堂叔)인 황공 윤길(黃公允吉)이 통신 상사(通信上使)로 일본에 갈 적에 공이 그 군관(軍官)이 되어 수행하였다. 이때 관백(關白) 평수길(平秀吉)이 난리를 일으킬 목적으로 먼저 평의지(平義智)와 현소(玄蘇) 등을 파견하였는데, 통신(通信)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로는 정탐하여 중국을 침범할 계획을 세우려고 하면서 회보(回報)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일행에 대해서 왜인들이 속박(束縛)하고 위협하는 등 못할 짓이 없었는데, 공이 침착하게 변고에 대응하면서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공의 행동에 탄복하였다.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에 왜인들이 길가에 과녁을 세워 놓고 활을 쏘면서 우리나라 사인(使人)들에게 보도록 하였는데, 그 과녁의 거리가 겨우 50여 보(步)에 불과하였다. 이에 공이 즉시 그 과녁 옆에 조그마한 표적을 설치해 놓고 활을 쏘았는데 적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왜인들이 몰려와서 담장을 둘러치듯 에워싸고 구경하다가 공이 쏜 활을 얻어서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 보려고 하자 공이 즉시 내주었는데, 왜인들이 그 활을 돌려보고는 서로 돌아보면서 안색이 변하였다. 배가 해구(海口)에 이르렀을 때 해조(海鳥) 한 쌍이 바다 위에 떠 있었는데, 공이 활을 쏘아 한 마리를 명중시키고 나서 미처 날아가지 못한 한 마리를 또 명중시키니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일행 모두가 탄복하였다.
돌아올 무렵에 일행이 다투어 보화(寶貨)를 사들였는데, 공은 유독 많은 돈을 주고 보검(寶劍) 한 쌍을 구매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이 왜적이 머지않아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내가 그때 가서 이 검을 쓰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당초에 일본과의 통신을 거론하게 된 것은 당시의 권신(權臣)이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이 어느 날 배 안에서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그 노래의 내용은 대개 화의(和議)를 주창하여 성립시킴으로써 나랏일을 그르친 것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공은 크든 작든 어떤 행동을 할 적에 종사관에게 일절 품(稟)하지 않았으므로 종사관인 허성(許筬)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는데, 공이 사절(死節)한 뒤에야 비로소 공을 칭찬했다고 한다.
신묘년(1591) 2월에 사행(使行)에서 돌아왔다. 이때 조정에서는 사변(事變)이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각 도(道)로 하여금 방비할 기구를 정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사행에서 돌아온 뒤에 일행으로 참여한 상하의 사람 모두가 왜적이 반드시 대거 군대를 동원하여 침입할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유독 부사(副使)인 김성일(金誠一)이 탑전(榻前)에서 왜적이 침범해 올 리가 절대로 없다고 호언장담하자, 묘당(廟堂)이 그 말을 전적으로 믿고는 전쟁에 대한 방비를 모두 중단하고 말았다. 이에 공이 분개하여 마지않으면서 “우리는 비록 입이 있어도 쇠꼬리나 다름없는 신세이다.”라고 한탄하고는, 장차 상소하여 김성일의 목을 베라고 청하고 이와 함께 왜적의 침략을 막을 방책을 진달하려고 하였는데, 종족이 예측할 수 없는 화를 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극력 저지하였으므로 끝내 상소하지 못하였다. 당시 선무 공신(宣武功臣)을 녹훈(錄勳)할 적에 공의 이름이 정훈(正勳)에 포함되는 것이 당연했는데도 삭감되고 말았는데, 이는 대개 공에게 혐의를 두고 유감스럽게 생각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에 가자되고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와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제수받았다. 장차 부임하려 할 적에 어떤 말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파리하게 야위어서 뼈가 드러났으나 그 말이 양마(良馬)임을 알고는 고가(高價)로 매입한 뒤에 관아에 도착해서 살지게 먹여 길렀다. 그리고는 관청 일을 끝내고 나면 갑옷을 입고서 이 말을 타고 10여 리 정도 치달리는 일을 익힌 뒤에야 그만두곤 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는 반드시 협선루(挾仙樓) 위로 달려 올라가곤 하였다. 이는 대개 왜적이 반드시 침입하리라는 것을 알고는 환란을 당했을 때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서였는데, 나중에 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왜적을 격퇴할 적에 항상 이 말을 타고 다녔다. 고을에 언젠가 큰물이 져서 민가(民家)가 잠기고 떠내려가는가 하면 늙은이와 아이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었다. 이에 공이 직접 물속에 뛰어들어 구해 내고 각종 생활 물품도 건져 주었는데, 어떤 노파가 물에 빠졌다가 구원을 받고 나서는 다시 공을 부르며 “내 광주리가 떠내려가니 건져 달라.”고 청한 일도 있었다. 온 경내가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지금도 미담(美談)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공이 얼마나 지성으로 사람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임진년(1592, 선조 25) 4월에 왜적이 군대를 동원하여 침략해 왔는데, 변경의 성곽이 잇따라 함락되는 가운데 국중(國中)에서 왜적을 막으러 나간 대장들도 모두 무너져 패했다. 그리하여 열흘도 채 안 되는 사이에 경성(京城)까지 육박했으므로 대가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기에 이르렀고 흉악한 왜적의 칼날이 나라 전역에 번득이게 되었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과 병사(兵使) 최원(崔遠), 그리고 경상 감사 김수(金晬)가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근왕(勤王)하였는데, 용인(龍仁)에 이르러 왜적을 만나자 접전을 해 보지도 못한 채 제군(諸軍)이 모두 무너지면서 기계(器械)와 전마(戰馬)와 치중(輜重)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공은 주장(主將)의 명에 따라 수원(水原) 사교(沙橋)에 군대를 매복시키고는, 대군이 이미 흩어져 달아난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사졸을 격려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적병이 뒤쫓아 오는 것을 보고서야 대장이 이미 퇴각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고는 군대를 거두어 후퇴하였는데, 화살촉 하나 남겨 두지 않고 말 한 필도 잃지 않았음은 물론, 제장(諸將)이 버리고 간 병기까지 모두 수습해서 돌아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의 담력과 용기에 탄복하였다.
윤공 안성(尹公安性)이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군대가 모두 흩어진 상황에서 공의 군진(軍陣)이 엄격하게 정돈되고 항오(行伍)가 매우 엄숙한 것을 보고는 도보로 공을 찾아와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소연하였다. 공이 즉시 편비(偏裨)로 하여금 도망쳐 숨은 제군에게 두루 유시(諭示)하게 하고는 나발〔角〕을 불어서 모이게 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집결하였다. 이에 윤공이 손을 잡고 탄복해 마지않으면서 말하기를 “오늘에 와서야 공이 참다운 장군이라는 것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수재(守宰)가 모두 수하(手下)의 친병(親兵)을 잃었다가 공 덕분에 군사를 되찾은 자들이 또한 많았다.
본도(本道)의 금산(錦山)과 진안(鎭安)이 왜적에게 점거되었다. 왜적이 진안에 처음 이르렀을 적에 도내의 장수들 모두가 웅치(熊峙)에 진을 치고 수비하였는데, 공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군사를 이끌고 진안으로 왜적의 정세를 탐지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길에서 적병을 만나자 공이 말을 치달려 나아가서 선봉(先鋒)을 쏘아 죽이니 적이 바로 퇴각하였다. 그 뒤에 적이 남원(南原)을 침범할 기미가 보인다는 첩보를 듣고는 남원의 지경(地境)으로 옮겨 수비하였으며, 또 적이 전주(全州)를 침범하려 한다는 말이 들리자 웅치로 돌아왔다가 급히 전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때는 적병이 이미 안덕원(安德院)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제장(諸將)이 모두 피하여 퇴각하였는데, 공이 곧장 안덕원으로 달려가서 적병을 요격(邀擊)하고 대파하여 거의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장(敵將)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졸개들이 시체를 싣고 갈 틈도 없어서 길옆에 묻어 두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7월 초의 일이었다.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다. 그 뒤에 일본의 승려 화안(和安)이 부산(釜山)에 왔을 때 이상 성구(李相聖求)가 영위사(迎慰使)로 가서 그를 만났는데, 그 승려가 우리나라에서 일본 군대가 대패한 것이 모두 세 번이었다고 셈하면서 웅치 전투를 첫 번째로 꼽았다고 하니, 이는 대개 자기네 명장(名將)이 패하여 죽었기 때문에 대패했다고 한 것이었다.
그달 10일에 금산(錦山)의 왜적이 호남을 유린할 계책을 세워 장차 전주로 향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즉시 이현(梨峴)에 가서 진을 쳤는데, 공의 진영은 후미에 해당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적의 공격을 받을 위치에 있었다. 공이 휘하의 공시억(孔時億), 위대기(魏大奇), 황박(黃璞) 등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같이 죽자고 맹서하고는 밤마다 잠을 자지 않고 경계하며 지켰다. 이에 앞서 감사 이광(李洸)이 여러 장수들에게 적의 동태를 탐지하고 오라고 할 때마다 모두 중도에서 소문만 듣고 되돌아오곤 하였는데, 공은 반드시 금산성(錦山城) 아래까지 곧바로 다가가서 적의 형세를 확실히 탐지하였으므로 이광이 항상 칭탄(稱歎)하곤 했다. 그러다가 이광이 이때 공을 불러 상의하기를 “장수들 중에 믿을 만한 자가 없어서 그대가 누차 다녀오는 수고를 하였는데, 이번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자, 공이 즉시 가겠다고 자청하고는 보졸(步卒) 30여 인을 이끌고 출발하려 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망을 보던 자가 병마(兵馬)의 진군 소리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고 보고하였다. 공이 그때 머리를 빗고 있었는데, 적보(敵報)가 더욱 급해지는 상황에서도 머리를 다 빗고 또 식사를 다 마쳤다. 그리고는 궁인(弓人)에게 활을 바로 쏠 수 있게 준비하라고 하였는데, 미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적이 과연 이르렀다.
공이 공시억 등 3인 및 가노(家奴) 수이(壽伊)와 함께 결사전을 벌였는데, 적의 탄환을 맞고 다리에 부상을 입어 유혈이 신발에 가득하였지만 이를 깨닫지도 못한 채 더욱 급격하게 용전분투(勇戰奮鬪)하였다. 평일에는 잘 당겨지지 않던 강한 활도 이때에는 약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는 화살을 앞뒤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날렸으므로 화살을 나르는 사람이 3, 4인이나 되었건만 오히려 제때에 운반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당시에 화살에 맞아 죽은 왜적이 몇 백 명인지 몰랐다. 엄지손가락이 다쳐서 부러지기까지 하였는데도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잠시도 쉬지 않고 활을 쏘았는데, 화살 한 발로 몇 명의 왜적을 꿰뚫을 수가 있어서 화살에 맞기만 하면 왜적들 모두가 즉사하였다. 왜적이 대패하여 달아나면서 엎어져 죽은 시체가 몇 리에 이어졌는데 아군은 한 사람도 죽거나 다친 자가 없었다.
최후에 잔적(殘賊) 약간 명이 아직도 물러가지 않자 공이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려고 활을 쏘았는데 그 즉시 적중하여 번번이 거꾸러지곤 하였다. 그런데 왜적 하나가 잠복해 있다가 발사한 탄환이 공의 이마 위에 맞았으므로 땅에 쓰러지며 기절하였다. 그러자 왜적이 그 틈을 타고 다시 돌진해 왔으나 공시억 등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휘하 군사들이 공을 들것에 싣고 동복(同福)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주를 경유하였는데, 사녀(士女)들이 마실 것을 다투어 가지고 나와 환영하며 말 앞에서 절을 하고는 말하기를 “만약 우리 공이 역전 분투하여 왜적을 쳐부수지 않았던들 이 땅의 생령들은 끔찍하게 죽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언성(郾城)에서 향분(香盆)을 머리에 이고 환영했던 고사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논하는 이들은 모두 말하기를, 창의사(倡義使) 김공(金公 김천일(金千鎰) )이 강도(江都)에 들어가 웅거(雄據)하며 호남에 조정의 명을 통하게 함으로써 호남 사람들이 군부(君父)의 소재를 알 수 있게 한 것은 당나라의 설경선(薛景仙)과 같고, 공이 이현(梨峴)을 지키며 왜적을 막아 호남 일도(一道)가 보전되게 함으로써 뒷날 중흥의 터전을 마련한 것과 진주(晉州)를 지켜 왜적이 호남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은 당나라의 순원(巡遠)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장(主將)인 이광(李洸)이 적을 격파한 공을 계문(啓聞)하지 않아서 공에게 내린 상이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에 그쳤으므로 이를 듣는 자들마다 모두 한스럽게 여겼다. 그 뒤 체찰사(體察使) 송강(松江 정철(鄭澈) ) 정 상공(鄭相公)이 중의(衆議)를 참작하여 임시로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차임하고 상도(上道)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게 하였는데, 행조(行朝)에 보고하자 그 즉시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겨울에 경성에 있는 왜적을 토벌하기 위해 감사 권율(權慄)이 군대를 거느리고 행주(幸州)로 갈 적에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가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으로 들어갔는데, 공도 군대를 이끌고 그를 따라가서는 매일 앞으로 나아가 경성에 있는 왜적의 동태를 탐지하였다. 하루는 사평(沙平)에 이르러서 왜적과 만나 전투를 벌였는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퇴각하여 돌아왔으나 공만은 혼자 포위당한 채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여러 장수들 모두가 공이 해를 당했으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틀이 지난 뒤에 공이 포위망을 뚫고 나오면서 적진에 있던 우리나라의 전마(戰馬)를 끌고 오기까지 하였다. 공이 포위되었을 때 왜적도 공이 명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생포할 욕심으로 총을 쏘지 못하게 하며 에워싸고 지키기만 하였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공이 갑자기 말에서 내리자 장사(將士)들이 그 이유를 모르고 겁에 질려 떨었는데, 이는 대개 돌격해서 포위망을 뚫기 위해 잠시 말을 쉬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말에 올라타 채찍을 휘두르며 일약 날쌔게 빠져나오면서 장검으로 좌우의 왜적을 치고 베자 뿜어 나오는 선혈이 수염을 적셔 고드름처럼 엉겨 붙었으므로 이 모습을 보는 자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이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즉시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로 뛰어오르면서 충청도 조방장에 임명되었다.
계사년(1593, 선조 26) 3월에 특명으로 충청 병사를 제수받았다. 안성(安城) 지역으로 진영을 옮겨 죽산성(竹山城)을 지키니 왜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급기야 왜적이 패배하여 철수하자 공이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후미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상주(尙州)의 적암(赤巖)에 이르러 또 적과 교전하였는데, 적이 대패하고 그대로 물러나 도망쳤다.
이때 양남(兩南)의 제장(諸將)이 함안(咸安)에 집결하였는데, 왜적의 무리가 다시 그득 모여서 갈수록 심하게 기승을 부리며 침범하였다. 이에 장수 중에 선거이(宣居怡)와 홍계남(洪季男) 등이 뒤로 물러나 운봉(雲峯)에 진을 치고서 왜적의 예봉(銳鋒)을 피하기도 하였으나, 함안은 워낙 성이 협소해서 지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6월에 공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경상 좌병사 최경회(崔景會),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복수 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공이 창의사에게 말하기를 “제군(諸軍)이 모두 성안으로 들어갔다가 만약 외부의 구원이 없게 되면 그 형세가 매우 고립될 것이다. 따라서 나를 외진(外鎭)으로 삼아 배치하여 내부와 외부에서 서로 구원하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만전(萬全)의 계책이다.”라고 하였는데, 창의사는 유자(儒者)라서 병략(兵略)을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 공의 말을 수긍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즉시 개연(慨然)한 심정으로 먼저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적추(賊酋) 청정(淸正)이 수길(秀吉)에게 보고하면서 다시 진주를 공격하여 호남을 유린할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청하니, 수길이 허락하였다. 6월 14일에 청정이 제추(諸酋)의 병력 수십만 명을 모은 뒤에 동래(東萊)를 출발하여 곧장 진주로 향하였다. 21일에 왜적 20여 기(騎)가 동쪽과 북쪽의 산 위에 출몰하였다. 그 이튿날 왜적 500여 기가 북쪽 산 위로 올라왔으나 성안에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시(巳時)에 왜적이 대거 몰려와서 두 개의 부대로 나눈 뒤에 하나는 개경원(開慶院) 산허리에 진을 치고 하나는 향교(鄕校) 앞길에 진을 쳤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성에 육박하였는데, 성안에서 힘을 다해 막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초저녁에 왜적이 다시 돌진하여 한참 동안 대전(大戰)을 벌이다가 2경(更)에 퇴각하였으며, 3경에 다시 돌진해 왔다가 5경에 퇴각하였다. 진주성은 오직 남쪽의 촉석(矗石) 부근만이 강과 맞닿아 있고 지세가 가장 험준해서 범하기 어려울 뿐 동쪽과 서쪽과 북쪽 삼면은 모두 적의 침입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제군을 나누어 배치해서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공은 수십 인을 거느리고서 위급한 곳마다 왕래하며 구원하곤 하였다.
23일에 왜적이 해자(垓字)의 물을 터서 빼고 구덩이를 흙으로 메워 평지로 만든 뒤에 세 번 공격했다가 세 번 모두 퇴각하였으며, 그날 밤에 또 네 번 공격했다가 네 번 모두 퇴각하였다. 왜적이 야음(夜陰)을 틈타 몰려와서 크게 고함을 치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는데, 성안에서 어지러이 쏘아대자 죽는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왜적이 또 서쪽과 북쪽 모퉁이에서 크게 고함을 치며 육박해 오자 성가퀴를 지키는 자들이 모두 물러나 달아났다. 이에 공이 칼을 빼들고 크게 소리치며 “오늘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라고 하니, 달아났던 자들이 이에 돌아와서 싸웠으므로 적이 퇴각하였다.
25일에 적이 동문(東門)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는 그 위에 토옥(土屋)을 지어 성안을 굽어보면서 총탄을 비 오듯 쏘아 댔다. 그러자 공도 여기에 상대하여 성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갑옷과 전립(戰笠)을 벗고서 직접 돌을 등에 지고 나르자 성안의 남녀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하룻밤 사이에 일을 다 마쳤다. 이에 대포를 발사하여 적의 토옥을 박살내니 적이 퇴각하였다. 적이 또 목궤(木櫃)를 만들어 소의 생가죽을 입히고는 각각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서 화살과 탄환을 막으며 성을 무너뜨리려고 다가왔는데, 공이 큰 돌로 분쇄하는 한편 활과 포를 뒤섞어 쏘자 적이 퇴각하였다. 적이 또 동문 밖에 큰 나무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판옥(板屋)을 지은 뒤 그 안에서 발사하여 불을 지르자 성안의 인가에 불길이 번졌다. 이에 공도 판옥을 지어 한나절 만에 완성하고는 대포를 쏘아 적의 판옥을 명중시키니 적이 또 퇴각하였다. 이때 비가 많이 와서 성의 한 모퉁이가 허물어지자 적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는데, 사천 현감(泗川縣監) 김준민(金俊民)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이 사졸에 앞장서서 직접 흙과 돌을 지어 나르며 쌓은 결과 무너졌던 성이 완전해졌다.
27일에 적이 동문(東門)과 서문(西門) 밖에 다섯 개의 언덕을 쌓고 죽책(竹柵)을 얽어 만들어서 성안을 내려다보며 비 오듯 탄환을 퍼부어 댔는데, 강희맹(姜希孟)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이때 전사하였다. 공이 화전(火箭)으로 그 죽책을 불사르니 적이 또 퇴각하였다. 적이 또 목궤(木櫃)를 만들어 사륜거(四輪車) 위에 올려놓고는 수십 명의 적이 철갑(鐵甲)을 두르고 목궤로 몸을 가리며 전진해서 철추(鐵椎)로 성을 뚫으려고 하였다. 공이 짚단을 묶어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서 목궤에 던지자 적이 모조리 죽으니 왜적이 또 퇴각하였다.
28일에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야간에 경계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적이 몰래 다가와 성을 뚫었다. 공이 이를 알아채고는 결사전을 벌인 결과 적장(賊將) 한 사람이 탄환에 맞아 죽고 졸개들은 죽은 자가 1000여 명이나 되었다. 공이 성 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하기를 “오늘의 전투에서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대첩이라고 말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때 왜적 하나가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올려다보고 총을 쏘았는데, 그만 공의 왼쪽 이마에 맞아서 마침내 운명하고 말았다. 이종인(李宗仁)이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마전(麻田)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이때 공과 장윤(張潤), 이종인, 김준민 등이 모두 역전(力戰)의 용장(勇將)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공의 충렬과 지용(智勇)이 특히 장수들 중에서 으뜸이었으므로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공을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는데, 공이 죽자 성안이 온통 눈물을 흘리며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29일에 공을 대신하여 서예원을 순성장(巡城將)으로 삼았는데, 적이 성을 타고 올라오자 제군(諸軍)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이에 적이 성을 허물어 평지로 만들었는데, 이때 성안에서 죽은 사람이 6만 인이나 되었다. 성안에서 빠져나온 사람들 모두가 말하기를 “황공(黃公)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성이 분명히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비록 죽고 성이 비록 함락되기는 하였지만, 왜적의 정예 병력이 여기에서 크게 꺾였으므로 호남으로 향하려고 하다가 석주(石柱)에 이르러 철수하고 말았으니, 호남의 길목을 가로막아 다시 보전될 수 있게 한 것은 모두 공의 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뒤에 순찰사(巡察使) 이상신(李尙信)이 공을 제사 드리면서 올린 글에 “공이 살아 계실 때는 성이 보존되었고, 공이 세상을 떠나시자 성이 함락되었다. 죽는 일을 조금만 늦추셨더라면 진주성이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 이 상공(李相公)이 공을 포숭(褒崇)하며 수의(收議)한 내용 중에도 “성을 지키는 일은 황모(黃某)가 으뜸이다.”라는 말이 있었으니, 이것이 실로 공론(公論)이었다.
공이 당초 진주로 들어갈 적에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가 창원(昌原)에서 공에게 말하기를 “진주성은 앞으로 강물을 마주하고 뒤로 산을 등지고 있으니, 적이 만약 산허리를 점거한 상황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는다면 형세가 매우 위태로울 것이다. 그리고 공은 바로 충청 병사의 신분인 만큼 조정의 명령에 따라 꼭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니, 진주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공처럼 국가를 위해 심신을 다 바치며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아는 사람은 없으니, 굳이 위험한 성안으로 스스로 뛰어들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와 서로 약속을 하였는데, 어떻게 환란을 당해서 신의를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배신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곽공이 공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술잔을 나누며 이별하였는데, 뒤에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애통해하며 슬퍼해 마지않았다.
7월 10일에 어떤 사람이 알려 준 덕택에 공이 묻혀 있는 곳을 알게 되어 영구(靈柩)를 모시고 돌아와서 선영의 옆에 안장하였다. 그 뒤 병인년(1626, 인조 4)에 부인이 죽어서 장차 부장(附葬)하려고 보니 광중(壙中)에 물이 차 있었으므로, 다시 다른 곳에 장지를 택한 결과 신향(辛向)의 언덕을 얻어서 부인과 합장하였다.
선묘조에 공에게 의정부 우찬성을 추증하고, 또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예를 적용하여 좌찬성으로 추가하여 추증하였으며, 삼세(三世)의 선조에게 추증하였다. 그리고 관원을 보내 사제(賜祭)하는 한편 그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그 집안의 부역을 면제해 주며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그 뒤에 경상 감사가 진주에 공의 사당을 세울 것을 계청(啓請)하자, 창렬(彰烈)이라고 사액(賜額)하고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를 함께 향사(享祀)하게 하였다. 남원 사람들이 또 공의 의열(義烈)을 추모하여 공의 고향 마을인 용계(龍谿) 가에 사당을 세우고 정충사(貞忠祠)라고 칭하였는데, 뒤에 또 정충(旌忠)이라고 사호(賜號)하고 관원을 보내 사제하게 하였다.
공의 부인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 추가로 봉해지고 해마다 주찬(酒饌)이 내려졌다. 공보다 몇 년 뒤에 죽었으니 향년 78세였다. 부인은 현숙하여 부도(婦道)가 있었다. 자제를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도리에 입각하였으며, 비복(婢僕)을 부리고 이웃을 대할 때에도 인후(仁厚)했다고 일컬어진다.
공에게는 한 명의 형이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공이 동복(同福)에 있을 적에 형이 도주(道主)의 막하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주장(主將)의 견책을 받은 나머지 화가 조석 간에 박두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공이 도보로 저녁에 출발하여 새벽이 되기 전에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무려 200여 리나 되는 길을 급히 달려와서 때에 맞춰 형의 환란을 구해 주었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아름답게 여기며 탄복하였다.
국가를 위한 공의 충성심은 천성(天性)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군대에서 계속 고달픈 생활을 하며 작전을 세우고 열심히 행하느라 낮이고 밤이고 조금도 쉴 사이가 없었다. 공의 두 아들이 부인을 모시고 피난해 있다가 이따금씩 부대로 찾아가서 문안을 올리면 한마디도 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항상 탄식하고 분개하는 것은 오직 나라를 걱정하고 왜적을 막는 일뿐이었다.
공은 평생토록 사람들을 구하는 데에 용감하였다. 곤궁에 처한 사람을 보면 비록 수레나 말이라 할지라도 아낌없이 내주었다. 공이 장수가 되어서는 병사를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 중에 병이 들어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타고 가던 말을 그에게 주고 자기는 걸어갔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감읍(感泣)하였다.
공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글을 배우지 못한 탓으로 무관(武官)의 길로 나서게 된 것을 항상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을 처리할 때를 당해서는 비록 군무(軍務)에 관한 공문이 한꺼번에 몰려들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성색(聲色)을 변치 않았는데, 처치하고 결단하는 것이 대부분 기의(機宜)에 맞아서 문사(文士)라고 하더라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공은 유사(儒士)를 좋아하였다. 같은 고향 사람인 정자(正字) 오정길(吳廷吉)과 외족(外族)인 방호인(房好仁)ㆍ방처인(房處仁)이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났는데, 공을 허여하여 마음을 아는 벗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서로 함께 어울려 노닐었는데, 애호(愛好)하는 감정이나 기미(氣味)가 투합하는 면에서 취향이 다른 점이 조금도 없었다.
공의 뜻은 항직(伉直)을 지향하였다. 그래서 아첨하며 비굴하게 구는 세속의 행동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직하지 못한 자를 보면 그가 명공(名公)이나 거경(鉅卿)이라 할지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당로자(當路者)에게 미움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뛰어난 용맹과 재질을 지녔으면서도 계속 낭패를 당해 하위(下位)에 머물며 범용(凡庸)한 자들에게 추월을 당했는가 하면, 여러 차례나 싸워서 이기고 왜적을 많이 죽인 공로 면에서 당시에 어느 누구도 공을 따라오지 못했지만 공신에 녹훈되지도 못했던 것이다.
공의 부인 진주 소씨(晉州蘇氏)는 부장(部將) 세충(世忠)의 딸이다. 아들 2인을 두었으니, 정직(廷稷)은 무과 출신으로 현재 안동 판관(安東判官)이고, 정열(廷說) 역시 무과 출신으로 현재 거제 현령(巨濟縣令)이다. 손자 중에 적출(嫡出)은 위(暐) 1인이니 문과 출신으로 현재 평양 서윤(平壤庶尹)이고, 서출(庶出)이 4인이니 흔(昕)ㆍ호(暤)ㆍ준(晙)ㆍ시(時)이다. 손녀 중에 적출은 3인이니 사인(士人) 김광옥(金光玉)과 박이혁(朴以赫)과 현령 방원량(房元亮)에게 출가하였고, 서출은 7인이니 방세장(房世長)과 김만리(金萬里)와 참봉 김현(金峴)과 유게(柳垍)와 이억도(李億度)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증손 중에 적출은 5인이니 초귀(俶龜)ㆍ명귀(命龜)ㆍ신귀(信龜)ㆍ임귀(任龜)ㆍ상귀(相龜)이다. 기타 내외의 적출과 서출의 남녀는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위(暐)가 공의 시말(始末)을 기록한 다음 나에게 그 내용을 다듬어서 행장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미 고상(故相)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 )의 글을 얻어서 공의 묘비를 새겼는데 지금 행장을 지으려고 하는 것은 공의 사적(事蹟)을 상세히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려는 목적에서이다. 공의 충의(忠義)와 공적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서 세상에 파다하게 알려져 있고, 수성(守城)할 때의 일에 대해서는 백사(白沙 이항복 )의 일기(日記)와 안방준(安邦俊)의 《진주서사(晉州敍事)》를 비롯해서 기타 명인(名人)의 기록에 또한 많이 수록되어 있다. 공의 시말을 기록한 이 내용은 모두 이들 자료에서 취한 것이니, 그러고 보면 이는 한 집안에 전해 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당시 뭇사람들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고 하겠다.
공의 신묘한 활솜씨와 날렵한 걸음걸이를 보면 그야말로 옛날의 이른바 천하무쌍(天下無雙)의 장군이라고 할 만하였다. 그리고 왜적과 누차 각축할 때마다 모두 사졸의 선두에 서서 소수의 병력으로 많은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왜적의 숫자가 많고 적은 것을 따질 것 없이 만나기만 하면 대파하였고 한 번도 좌절당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사평(沙平)에서 포위되었을 때에는 왜적이 이틀 동안이나 둔수(屯守)하면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는데, 숲처럼 에워싼 흰 칼빛 속을 뚫고 탈출하며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하였으니, 참으로 용맹이 전군(全軍)의 으뜸인 자라고 할 만하였다. 그러다가 포위된 진주성 안에 있을 때에는 왜적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공격했으나 그때마다 적절한 방법으로 방어하며 격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8일 사이에 무려 수십 차례나 교전하는 동안 교전하기만 하면 번번이 격퇴하여 왜적을 무수히 죽였는데, 급기야 공이 운명하면서 성이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으니, 그러고 보면 성이 우뚝 서서 함락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은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기고 패하는 일이 없었으니, 옛날의 명장이라고 할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의 신의(信義)와 정충(精忠)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성으로서,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공이 김성일(金誠一)의 목을 베라고 청하려고 했던 것도 충분(忠憤)의 격정(激情)과 우국(憂國)의 지정(至情)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그 종족이 굳이 만류했던 것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에 김성일의 주장이 이미 대세를 주도하고 있었고 보면, 공이 상소를 올릴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익한 바가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공이 김성일과 함께 일본에 들어갔을 때 왜적이 반드시 침입하리라는 정상에 대해서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일행 모두가 함께 보고 함께 말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상이 일행의 견해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김성일이 기망(欺罔)한 것을 혹시 깨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니, 꼭 무익한 일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왜적이 반드시 침입하리라는 것은 일본에 갔던 사람이면 모두 알았을 뿐 아니라, 현소(玄蘇) 등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날 적에도 명년에는 조선에 길을 빌려 중국을 범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였으며, 현소 등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졸왜(卒倭)가 우리나라의 하인(下人)을 만나서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더구나 그 서계(書契)를 보면 오로지 길을 빌리겠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으니, 김성일이 아무리 우매하기 그지없다고 하더라도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혼자만 왜적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고 판단하고는 감히 이처럼 호언장담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가 기망했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알 수가 있는 일인데, 당시에 한 사람도 과감하게 말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공이 홀로 분연히 일어나서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니, 공의 충성심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하다는 것을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공이 유독 보검(寶劍)을 구매했던 일이나 준마(駿馬)를 길러서 말 달리는 연습을 한 일을 보면, 공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뜻을 평소에 쌓아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물에 빠진 사람을 직접 구해 내기도 하고, 타던 말을 병든 군사에게 내주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비록 하찮은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공의 인애(仁愛)한 성품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공이 장차 진주성으로 들어가려 할 즈음에 성 밖에 있으면서 서로 구원하려고 했던 것이야말로 병가(兵家)의 기묘한 계책이었다고 할 것이다. 장숙야(張叔夜)가 성에 들어간 것은 합당하지 않았다고 주자(朱子)가 평한 것도 바로 이러한 뜻에서였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가 병가의 전략을 알지 못한 나머지 꼭 공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가령 공이 성 밖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제군(諸軍)을 규합한 다음에 혹 기병(奇兵)을 내어 왜적을 교란시키기도 하고 혹 접전을 벌여 격파하기도 하면서 성의 포위를 풀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구할 수 없을 경우에는 반드시 적진에 뛰어들어 죽었을 것이요, 성이 함락되어 동지들 모두가 죽는데 혼자서만 살아남는 꼴은 끝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 공의 직책으로 말하면 창의사에게 소속된 것이 아니었던 만큼, 성안에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그것은 창의사가 명령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성이 위태로운 곳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죽는 것을 겁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창의사가 의심할까 봐, 공이 반드시 위태로워지리라는 것을 알고도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 하늘이 특출하게 비범한 자질의 소유자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드문 일이다. 공처럼 재용(才勇)과 충의(忠義)를 완비한 자는 더더욱 세상에서 거의 볼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공과 같은 인물을 옛사람 중에서 찾아본다면 아마도 악 무목(岳武穆)이 근사하지 않을까 싶다. 아, 이와 같은 용지(勇智)와 충성을 지닌 공으로 하여금 당시에 중하게 쓰일 수 있게 하고, 그리하여 온축(蘊蓄)된 뜻을 제대로 발휘함으로써 비상사태가 터지기 전에 미리 대비할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임진왜란 때에 어찌 왜적의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버려 온 나라가 폐허가 되는 참화를 당하기까지야 했겠는가. 하늘이 이와 같은 인재를 이러한 때에 세상에 나오게 한 것은 어쩌면 그로 하여금 세상의 위급한 환란을 구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말살당한 채 하급 관원으로 억눌려 지내게 하다가, 변란이 일어난 뒤에도 조그만 일개 고을의 관리와 100인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는 지휘자의 신분으로 남의 명령을 받게끔 하였다. 그러다가 전공(戰功)을 세운 뒤에야 비로소 하나의 곤수(閫帥)의 임무를 맡게 하였으나 그로부터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하늘의 뜻이 끝내 어떻게 되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공은 가는 곳마다 승첩을 거두고 적을 무수히 죽여서 일도(一道)를 보전할 수가 있었다. 공이 작게 쓰였어도 그 효과가 이와 같았으니, 가령 공이 크게 쓰였더라면 세운 그 공적이 어찌 크지 않았겠는가. 대개 당시에 충성을 다 바치며 환란 속에서 죽은 자들이 또한 많지만, 공과 같이 무용과 충의를 겸비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내가 변변찮은 유자(儒者)이긴 하지만 그래도 의(義)를 좋아하는 성심(誠心)만은 지니고 있어서, 남보다 뛰어난 선(善)의 소유자를 보면 항상 감탄하며 사모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지금 공의 사적을 보고는 참으로 마음속 깊이 탄복하지 않을 수 없기에,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정리하여 행장을 짓게 되었다. 다만 나의 글 솜씨가 졸렬한 탓으로, 왜적을 격파한 기적(奇蹟)과 나라에 몸 바친 정충(精忠) 등 백세(百世) 뒤까지 사람들이 경모(敬慕)하는 마음을 일으킬 만한 공의 행적을 드러내 밝히지 못할까 두려울 따름이다. 공이 왜적과 교전한 일시(日時) 같은 것은 일을 서술하는 체례(體例)로 볼 때에 생략하는 것이 옳겠지만 여기에서는 모두 그대로 기록하였다. 이는 그 일이 너무도 기이한 만큼 아무리 상세히 기록해도 탓할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풍양(豊壤) 조익(趙翼)은 삼가 행장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