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至正) 신묘년(1351, 충정왕 3) 2월 23일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 왔을 때 공이 수양성(首陽城)을 지키고 있었다.
고려 침입
홍건적은 고려를 2번 침입했다. 첫번째는 1359년(공민왕 8) 12월에 있었다. 11월에 3,000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북변을 약탈하더니 12월에 모거경이 이끄는 4만 병력이 침입하여 의주·정주·인주·철주 등지를 함락시켰다. 이어서 서경을 함락시키고 용강·함종까지 진출했다. 이에 고려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 이듬해 정월에 2만의 병력으로 서경을 공격하여 찾고, 다음달에 함종의 전투에서 2만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도망가는 적을 추격, 섬멸하여 침입한 적 가운데 수백 명만 돌아갔다. 2번째는 1361년 10월에 있었다.
홍건적은 첫번째 침입 뒤 배를 타고 황해도·평안도의 연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다가 1361년 10월에 이르러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10여 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다. 이들은 서북면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의 방어선인 절령을 무너뜨리고 11월 하순에 개경을 점령했다. 이에 앞서 공민왕과 고려 정부는 남쪽으로 피난하여 12월 중순에 복주(지금의 안동)에 이르렀다. 홍건적은 2개월 정도 개경에 있으면서 갖은 만행을 저질렀고 각지의 고려 군민은 홍건적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공민왕은 복주에서 교서를 내려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물리치게 했다. 그리하여 다음해 1월 고려는 20만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여 홍건적을 크게 무찔러, 사유·관선생을 비롯한 홍건적을 10여 만 명이나 죽이고 물리쳤다. 그후 고려는 유탁(柳濯)을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로 삼아 재침에 대비했으나 큰 침입은 다시 없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가 입은 피해는 컸다. 먼저 개경을 비롯해 서북면 여러 지역이 많이 파괴되었고, 남방 지역도 왕의 파천과 군사 징발 등으로 사회가 혼란해졌다. 또 전공을 세운 무장세력이 득세하게 되어 김용(金鏞)의 반란이나 흥왕사의 변 등이 발생했다. 1356년 이래 공민왕이 적극 추진해오던 반원 개혁정치가 홍건적의 침입을 계기로 퇴색함에 따라 1361년에는 원의 기관인 정동행성이 다시 설치되고 다음해에는 관제가 원나라 간섭기의 것으로 복구되는 등의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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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재집 제8권 / 기(記)
해주 타충각기 남을 대신해서 짓다〔海州妥忠閣記 代人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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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민한 내가 외람되이 해주(海州) 수령으로 있은 지 몇 해째 되던 해에 부(府)의 아전 아무개 등이 서로 이끌고 와서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고(故) 목사(牧使) 최공 영유(崔公永濡)가 홍건적의 난에 순절한 뒤로 해주성(海州城) 사당에서 향사를 받은 것이 3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다만 온 고을 백성과 아전들이 그분의 유풍을 그리워하고 공렬을 사모하여 해마다 사시(四時)에 향사하여 혹시라도 정성스럽지 못함이 없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설만하다고 하여 학궁(學宮) 옆으로 사당을 옮기고 선비들로 하여금 이 향사를 주관하게 한 것은 이후 희조(李侯喜朝)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소인들은 오랜 세월 받들어 모시다가 갑자기 훼철하는 것을 끝내 차마 볼 수 없어 곧 다시 사사로이 위패를 받들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다만 여사(閭舍)가 좁고 지저분하여 존귀한 신을 지극히 높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이제 이를 신축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감히 아룁니다.”
그리고 이어 말하였다.
“공은 고려 충정왕(忠定王) 3년(1351)에 본주(本州)의 목사(牧使)로 있으면서 홍건적의 난을 만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켰습니다. 성이 함락되자 공은 의리상 욕을 당하지 않겠다고 하여 곧바로 말을 달려 성의 서쪽에 있는 부엉이바위[鵂巖]에 이르러 손가락에 피를 내어 죽게 된 실상을 쓰고, 먼저 차고 있던 관인(官印)을 풀어 바위 아래 못에 던지고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공을 따르던 공생(貢生 관아의 종) 하나와 공이 기르던 개가 모두 따라 죽었습니다. 《읍지(邑志)》의 기록에 근거하면 이와 같습니다.”
나는 ‘공이 죽음으로 나랏일에 힘쓴 행적은 제사하는 법에 해당하지만, 아전 등속이 주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이공(李公 이희조)이 조처하기를 잘한 것이다. 그리고 공은 이미 사당이 있으니 또 어떻게 중복되게 할 수 있겠는가. 허락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생각하였다.
얼마 뒤에 아무개 등이 더욱 간절하게 청하기에, 나는 또 옛날 주현(州縣)의 관리가 죽은 뒤에 그 지역에서 제사를 받는 사례를 더 상고해보았다. 그러자 주읍(朱邑)이 동향(桐鄕)에서 제사를 받고, 유종원(柳宗元)이 나지(羅池)에서 제사를 받은 것과 같이 굳이 모두 사전(祀典)에 나열할 필요도 없이 백성들이 사사로이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는 데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공이 한 고을을 다스리면서 큰 난을 막다가 드러나게 그 자리에서 곧장 죽었던 일은 그 분명한 일시의 의기(義氣)의 감화가 종과 짐승으로 하여금 앞에서 다투어 죽게까지 만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단지 구구하게 남긴 은혜와 같겠는가. 바로 해주 온 경내가 집집마다 제사를 올려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군자가 공에게 제사하는 것은 예(禮)로써 하는 것이고 소인이 공에게 제사하는 것은 정성으로 하는 것이니, 예는 높이 여김을 지극히 하는 것이고 정성은 사랑을 지극히 하는 것이어서 또한 각각 할 말이 있는 것이다.
이에 허락하고, 이어서 봉급의 여분을 내놓아 그 일을 돕게 하였다. 몇 달이 지나 공사가 끝났다고 하기에 마침내 위패를 이안(移安)한 뒤 ‘타충지각(妥忠之閣)’이라 명명하고 매년 공이 순절한 날 처음과 같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아, 이 고을이 생겨난 이래로 훌륭한 수령이 의당 하나둘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나 모두 일컬어짐이 없고, 유독 창졸간에 목숨을 바친 공만이 적을 물리치고 성을 온전히 보존한 공이 있지 않은데도 세대가 아득히 멀리 떨어진 지금까지 백성들이 공을 높이 받드는 것이 쇠하지 않으니, 비록 제사 지내는 것을 금지하여 그만두게 하고 싶어도 막을 수 없다. 이것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러하겠는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무릇 충의(忠義)라는 것은 공만이 홀로 가진 본성이 아니다. 공을 뒤이어 이 고을에 수령으로 부임한 사람이라면 비록 백세 먼 뒤에라도 어느 누가 이에 감발하여 크게 탄식하고 공과 같이 되기를 기약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저 아전과 백성들 역시 그저 공경히 제사하고 눈물 흘리며 슬퍼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공을 섬긴다고 여기지 말고, 반드시 그 당시 공생(貢生)처럼 행하여 혹시라도 공이 기르던 개의 죄인이 되지 말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또 오늘날 사당을 건립하는 의미일 것이다.
[주-D001] 해주 타충각기 : ‘타충각’은 황해도 해주 목사(海州牧使)였던 최영유(崔永濡, ?~1361?)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757년(영조33) 해주의 아전들이 관아 서쪽에 건립한 것으로, 〈타충각기〉 본문에 근거하면 타충각이라는 이름은 당시의 해주 목사가 지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55년(영조31) 11월 14일 계미일에 홍력(洪櫟, 1708~1767)이 해주 목사에 임명되고, 1757년 12월 1일 기미일에 이광회(李匡會)가 해주 목사에 임명되었는데, 이에 근거하면 당시의 해주 목사는 홍력으로 추정된다. 홍력은 홍억(洪檍, 1722~1809)의 형으로, 저자의 어머니 홍씨(洪氏)의 작은아버지인 홍용조(洪龍祚, 1686~1741)의 장남이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아버지이자 저자와는 5촌 동갑이다. 최영유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자와 호는 자세하지 않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8년(1321)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해주 목사로 있을 때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키며 항전하였으나 적의 화공(火攻)에 성이 함락되자, 빠져나와 부엉이바위[鵂巖]에 이르러 차고 있던 관인(官印)을 풀어서 바위 아래 못에 던지고 바위에 혈서를 쓴 뒤 투신하여 자진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바위 북쪽 1리 되는 곳에 장례하고 충절묘(忠節墓)라고 불렀으며, 최영유가 투신한 못을 투인담(投印潭)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향일루(向日樓) 북쪽에 충절사(忠節祠)를 세워 매년 기일(忌日)과 절일(節日)에 아전들 주관으로 제사를 지내다가, 1700년(숙종26)에 이희조(李喜朝, 1655~1724)가 해주 목사로 있으면서 해주 서북쪽 20리에 있는 최충(崔沖)을 모시는 문헌서원(文獻書院) 서쪽으로 옮겨 선비들 주관으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編者未詳, 和順崔氏世譜, 木活字本, 英祖49(1773)刊》 《崔鳳信編, 和順崔氏世德編, 木活字本, 1930刊》 《冠巖全書 冊18 忠節祠記》[주-D002] 공은 …… 지켰습니다 : 《세보》 및 《화순최씨세덕편》 〈묘갈(墓碣)〉과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모두 최영유가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 신묘년(1351, 충정왕3) 2월 23일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화순최씨세덕편》 〈해주고지(海州古誌)〉에는 공민왕 경인년 겨울에 홍건적이 쳐들어와서 개경을 유린했을 때의 최영유의 행적을 언급하고 있는데, 공민왕 때에는 경인년이 없으며, 가장 가까운 경인년은 1350년(충정왕2)이다. 홍건적의 제1차 침입이 1359년(공민왕8)에 있었고 제2차 침입이 1361년 신축년에 있었던 역사 사실에 근거하면 저본에서 《읍지》를 근거로 “충정왕 3년(1351)에 홍건적의 난을 만났다.”라고 한 내용 및 《세보》와 《화순최씨세덕편》의 기록은 오류인 듯하다. 최영유는 1361년에 별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編者未詳, 和順崔氏世譜, 木活字本, 英祖49(1773)刊》 《崔鳳信編, 和順崔氏世德編, 木活字本, 1930刊》 《冠巖全書 冊18 忠節祠記》[주-D003] 죽음으로 …… 해당하지만 : 《예기》 〈제법(祭法)〉에 “성왕이 제사를 제정할 적에, 법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졌으면 제사하고, 죽음으로써 나랏일에 수고하였으면 제사하고, 공로로써 나라를 안정시켰으면 제사하고, 큰 재앙을 막았으면 제사하고, 큰 환란을 막았으면 제사한다.[夫聖王之制祭祀也, 法施於民則祀之, 以死勤事則祀之, 以勞定國則祀之, 能禦大菑則祀之, 能捍大患則祀之.]”라는 내용이 보인다.[주-D004] 주읍(朱邑)이 …… 받고 : 주읍은 서한(西漢)의 관리로, 자는 중경(仲卿)이며 여강(廬江) 서현(舒縣) 사람이다. 젊을 때 동향(桐鄕)에 색부(嗇夫)로 부임하여 소송과 세금 등을 담당하였는데,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관리와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한 소제(漢昭帝) 때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대사농승(大司農丞)을 역임하고, 선제(宣帝) 때 북해 태수(北海太守)로 승진하였다. 선제 지절(地節) 4년(기원전 66)에 그동안의 업무 성과와 품행으로 대사농에 임명되어 전국의 조세와 전곡(錢穀), 염철(鹽鐵) 등 재정을 관장하였다. 죽은 뒤 동향에 장례하였는데, 백성들이 주읍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주-D005] 유종원(柳宗元)이 …… 것 : 유종원(773~819)은 당나라 때의 문장가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자는 자후(子厚), 하동(河東) 사람이며, 유하동(柳河東), 유유주(柳柳州)로도 불린다. 헌종(憲宗) 원화(元和) 10년(815)에 유주 자사(柳州刺史)로 폄직되었는데, 그곳을 오지라고 여겨 무시하지 않고 모든 일을 예법대로 처리하자 3년 만에 백성들이 긍지를 갖고 교화되었으며, 유종원이 그곳에서 죽자 백성들이 나지(羅池)에 유종원을 위한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유(韓愈)의 〈유주나지묘비(柳州羅池廟碑)〉라는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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耳溪集卷四 / 詩○海西錄 庚寅春。除黃海道觀察使。
投印潭 高麗牧使崔永濡。遭紅巾亂。血書於巖。投印於潭而死。所畜犬亦隨死。後人立碑。紀其事。 a241_06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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想像崔知州。丹心赴碧流。犬隨人共烈。身與印俱投。怒瀑英魂在。陰崖血字留。殘碑堪墮淚。志士况悲秋。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0
投印潭。 本州牧使崔永濡, 當紅巾之亂, 避兵而不出封疆。 到鵂巖, 知不免, 投印于潭水, 咋指血書于石上以記, 仍投水死。 後人名之, 曰投印潭。 通引一人及畜狗同死, 州人葬于巖北洞。 一原三墳, 狗墳在最下, 往來人指爲忠犬塚。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 황해도(黃海道)
해주목(海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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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환】 고려 김한충(金漢忠) 선종(宣宗)조에 수안서도호부(守安西都護府)가 되었다. 이백겸(李伯謙) 충선왕(忠宣王)조의 목사였는데 정치 잘하기로 알려졌다. 조돈(趙暾) 목사가 되었다. 김흥조(金興祖) 목사가 되었다. 최영유(崔永濡) 목사로서 관사에서 죽었다. 고을 사람들이 고을 북쪽에 장사지내고 묘지기를 두어, 나무 베고 소ㆍ말 먹이는 것을 금하며, 죽은 날짜를 목판에 써서 고을 관청 벽 위에 걸어 두고, 죽은 날이나 명절을 당하면 제사드린다.
大東地志 卷十七 / 黃海道
海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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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故
高麗成宗、顯宗、文宗俱幸海州。 高宗四年, 安西都護府與丹兵戰, 斬首百餘級。 四十六年, 蒙兵自西京闌入安岳、靑松、豐州、海州, 驅掠人物而去。 忠烈王元年, 元遣蠻子軍一千四百人來分處海、鹽、白三州。 二十七年, 王如元, 次銀川 白州。 遂幸海州而還京。 忠惠王元年, 王畋于海州金剛野。 西三十里。 忠肅王後四年, 王畋于海州。 是歲屢幸。 後五年幸海州。 恭愍王十年, 牧使崔永濡戰亡于紅巾之亂。 二十年倭入海州, 火官廨,
虜牧使妻及女以歸。 二十二年, 倭寇海州, 殺牧使嚴益謙。 辛禑三年, 倭寇海州, 我太祖與諸元帥擊之, 邊安烈、林堅味等奔潰。 我太祖戰于州之東亭子, 卽海雲亭。 縱兵大破之, 餘賊阻險自固, 又擊之, 幾殲。 四年倭寇海州。 十一年倭寇皮串。 十四年禑將獵于海州白沙汀 在康翎。 實欲攻遼之意也。 寧妃及崔瑩從之, 贊成事禹玄寶留守京城。 恭讓王元年, 倭船二十艘來泊海州, 遣柳曼殊、我定宗禦之。 ○本朝太宗十三年, 講武于海州。 宣祖二十五年, 康翎縣監柳蘋領義兵, 與倭戰于海州白峴野死之。 二十六年八月, 上又自
黃州進次海州, 內殿、世子自江西來會, 臨海、順和兩王子自日本亦至。
韓煕墓。 在長壽山城內。 高麗時, 拒紅巾賊于黃州棘城, 全軍敗沒。 賊長驅而進, 太守韓煕登城備禦, 屢挫其鋒。 賊轉向海州, 陷首陽山城, 牧使崔永濡赴水死。 其後韓煕病卒于官, 仍葬山頂。 塋域至今猶存。
> 고전번역서 > 순암집 > 순암선생문집 제13권 > 잡저 > 최종정보
순암선생문집 제13권 / 잡저(雜著)
상헌수필 하(橡軒隨筆下) 호유잡록(戶牖雜錄)을 함께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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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의 최 목사(崔牧使)] 해주목(海州牧)의 홍석기(洪錫箕)가 지은 최 목사의 비문에 이르기를,
“고려 말에 홍건적(紅巾賊)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왔을 때 공이 수양성(首陽城)을 지키고 있었다. 적이 더욱 급박하게 포위하여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았으므로 성이 함락되었다. 공이 탈출하여 나와서 휴암(鵂巖)에 이르러서는 인수(印綬)를 풀어서 바위 아래의 못에 던지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바위 위에 글자를 써서 그 장소를 표한 다음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지니, 곧 지정(至正) 신묘년(1351, 충정왕 3) 2월 23일의 일이었다. 이때 공을 따른 자는 단지 공생(貢生) 한 사람뿐이었으며, 공이 기르던 개가 공의 시체 옆에서 공을 따라 죽었다. 고을 사람들이 공을 바위 북쪽 1리쯤 되는 곳에 장사지내고, 따라 죽은 사람과 개를 모두 그 옆에 묻어 주었으며, 그 못의 이름을 투인담(投印潭)이라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네 철과 기일(忌日)에 관리들이 제사를 지낸다.”
하였다.
이 비문을 보건대, 최 목사의 절의는 숭상할 만하거니와 공생이 따라 죽은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개의 이야기는 육씨(陸氏)를 따라 바다에 빠져 죽은 백한(白鷴)새 이야기와 다름이 없으니, 누가 짐승은 앎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런데 이 이야기가 《고려사(高麗史)》에 보이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국서(河國瑞)] 역관(譯官)인 만포(滿浦) 사람 하국서, 온성(穩城) 사람 황연의(黃連義), 의주(義州) 사람 정태기(丁太奇)가 동시에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는데, 마음은 항상 본국(本國)에 있었다. 노추(奴酋)가 요광(遼廣)을 함락하고 장차 입관(入關)하려 하자, 국서 등이 거짓으로 고하기를 “우리 나라가 군사를 내어 다시 쳐들어와서 요동을 구하려 하오.” 하니 노추가 즉시 회군하였다. 이윽고 속은 줄 알고는 직접 이들의 눈알을 뽑고 혀를 잘라서 죽였는데, 태기는 코만 베었다. 이 덕분에 중국 조정이 관내(關內)를 거두어 보전할 수 있었으니, 그 충성은 지난날 오랑캐에게 항복한 죄를 갚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인몰되어 전하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 사부(師傅) 안응창(安應昌)의 잡록(雜錄)에 보이므로, 이를 표출하는 것이다.
[장사(將士)의 순절(殉節)] 예로부터 전횡(田橫)의 5백 의사(義士)를 일컬어왔다. 위(魏) 나라에서는 제갈탄(諸葛誕)의 휘하 수백 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한 사람은 베이고 한 사람이 항복하였으나 나머지는 끝내 굴하지 않고 모두 팔짱을 낀 채 줄지어 나아가 죽임을 당하면서도 변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 나라 광해군 기미년(1619)에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강홍립(姜弘立)의 군관(軍官)인 평산(平山)의 무인(武人) 감찰 최승렬(崔承烈)이 도망와서 군사(軍事)에 관하여 알렸다. 그가 말하기를,
“경상도의 군인 3천 명이 홍립의 항복을 보고 모두들 분개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 시체가 쌓여 물길을 가로막았으며, 항복한 왜인 4백 인도 홍립을 따라갔다가 다들 강개(慷慨)하여 칼을 뽑아 적장(敵將)을 베려 하였으나, 홍립이 적추(賊酋)에게 몰래 알려 이들이 남김없이 유린당했다.”
하였으니, 이 영남 군사와 항복한 왜인이 어찌 이른바 열장부(烈丈夫)가 아니겠는가.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에 격동되어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 것은 실로 전횡이나 제갈탄의 부하들에게 전혀 부끄럽지 않으며, 3천 명이 한마음이 된 것은 더욱 특이한 일이다.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 설총과 최치원을 문묘(文廟)에 종사(從事)한 것이 참람(僭濫)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선유(先儒)의 논의가 있었다. 설총은 원효(元曉)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능히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훈독(訓讀)하여 후생(後生)을 훈도하였으니, 이는 얼룩소[犂牛]의 새끼이지만 색깔이 붉고 뿔이 아름다운 경우라 하겠다. 그러니 어찌 그 아버지를 논하겠는가.
그러나 최치원은 이교(異敎)를 숭상하던 신라 때에 태어나서 오로지 불교에 아첨하였으며, 또 대신(大臣)의 지위에 있으면서 여조(麗祖)가 장차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글을 올려 뜻을 전하였는데, “계림에는 누렇게 낙엽이 지는데, 곡령에는 송백(松柏)이 푸르디 푸르구나[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래서 현종(顯宗)이 조업(祖業)을 은밀히 도운 공이 있다 하여 시호를 내려 포장하였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숨어 지내며 물외(物外)의 경지에 노닐었으니, 만절(晩節)은 조금 볼 만하다 하겠다. 문장이 고상하고 화려하여 그 명성이 중국에 진동하였으며, 당(唐) 나라의 고운(顧雲)과는 과거(科擧)의 동년(同年)이다. 고운의 송별시에,
바다 위에 세 마리의 금오가 있다는데 / 我聞海上三金鰲
금오는 머리에 높은 산을 이었다네 / 金鰲頭戴山高高
산 위에는 진주로 만든 궁궐이 찬란하고 / 山之上兮珠宮貝闕
산 아래엔 끝없는 파도가 넘실댄다 /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곁에 한 점의 계림이 새파란데 / 傍邊一點鷄林碧
금오산이 잉태하여 빼어난 인재 낳았어라 / 鰲山孕秀生奇特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와서 / 十二乘船渡海來
문장으로 온 중국을 감동시켰다네 / 文章感動中華國
열여덟에 사원을 누비며 싸움을 벌여 / 十八橫行戰詞苑
한 화살로 금문의 대책(對策)을 쏘아서 맞혔더라 / 一箭射破金門策
하였다.
일찍이 고변(高駢)의 서기(書記)가 되어 토황소격(討黃巢檄)을 지었는데,
“천하 사람들이 모두 현륙(顯戮)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도 또한 음주(陰誅)를 의논한다.”
는 말이 있었다. 황소가 이 구절을 보고 저도 모르게 평상(平床)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만년에,
인간 세상 벼슬길엔 마음이 가지 않고 / 人間之要路通津眼無開處
물외의 산과 물을 꿈마다 찾아가네 / 物外之靑山綠水夢有歸時
라는 구절을 남겼으니, 대저 문장이 기고(奇高)한 인물일 뿐이요, 유자(儒者)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 사당을 세우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성묘(聖廟)에 배향하는 것은 참람하지 않겠는가.
[바다 속의 큰 섬]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섬들이 많으니, 도적(圖籍)에 올라 있지 않은 것도 필시 많을 것이다. 수십 년 전에 만났던 삼척(三陟) 사람이 말하기를,
“어떤 뱃사람이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나흘만에 일본의 서쪽에 닿았다가 대마도로 보내져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보니 바다 속에 큰 섬이 있었는데, 하루 반 동안 섬을 빙 돌아 거의 배를 댈 뻔 했으나 역풍(逆風)이 쳐서 끝내 배를 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수(里數)를 계산해보면 크기가 우리 나라의 한 지방과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올 임인년(1782, 정조 6)에 도척면(都尺面)에 사는 상한(常漢)을 만났더니, 그가 말하기를,
“영동(嶺東)의 양양(襄陽)에 가서 뱃사람을 따라 바다에 들어갔는데,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며칠 만에 어떤 섬에 닿았습니다. 그 섬은 갈대밭이 질펀하고 수목이 울창하였습니다. 뱃사람 8명이 모두 뭍에 내려서 사방으로 달려가보니 1, 2백 리 되는 곳에 인적이라곤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바람이 잠잠해져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이는 필시 삼척 사는 사람이 보았던 섬일 것이다.
근간에 사부(師傅) 안응창(安應昌)의 《잡록(雜錄)》을 보니,
“인조조(仁祖朝)에 황익(黃瀷)이 통제사로 있던 때에 어떤 배 한 척이 표류해 왔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남방국에 사는 사람인데, 그 나라는 일본의 서남쪽 2천여 리에 있으며, 밀물과 썰물이 없다.’ 하고는, 또 ‘그 나라는 본래 신라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신라가 망하게 되자 태자가 종족 1만여 명을 데리고 고려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나 골짜기는 좁고 사람은 많아 수용할 수가 없어서 민서(民庶) 20여 만 호와 함께 배를 나누어 타고 바다로 들어가서 어떤 섬에 이르러서 살았는데, 나라 이름을 남방국(南方國)이라 하고는 25개 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백성들은 모두 신라의 후예들이며 지금도 건재한다.’ 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이 혹시 영동의 뱃사람이 만났던 섬이 아닐까. 밀물과 썰물이 없다고 한 것은, 우리 나라 영동의 바다 중에서 일본의 서해와 서로 접하는 곳은 하나의 큰 못을 이루어 본래 밀물과 썰물이 없으니, 말이 서로 부합하는 것이 기이하다. 애오라지 이문(異聞)을 기록하여 이를 남겨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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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제1권 / 시(詩)
우리 역사를 보다가 느낌이 있어 악부체를 본떠 읊다[觀東史有感 效樂府體]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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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도 악부(樂府) 옛 노래가 몇 종류 있지만 그 중에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가 지은 것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 성호 선생의 악부가 나오자 비로소 집대성이 되어, 그 동안 분명하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밝힘으로써 사가(史家)들이 빠뜨린 것을 많이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기(成己) 이하 몇 조항이 누락되었기에 감히 선생의 작품을 흉내내어 지으니, 가사는 비록 거칠고 졸렬하나 실려 있는 사실은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 이 작품을 선생께 보여 드렸더니 그냥 물리쳐 버리지 않으셨기에 후일의 참고를 위하여 이렇게 기록해 둔다.
성기가(成己歌) 한서(漢書)에 의하면, 무제(武帝)가 조선을 쳐 조선은 이미 항복을 하였으나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지 않았었는데, 우거(右渠)의 신하 성기(成己)가 다시 반기를 들고 역공해 오므로 순체(荀彘)가 그 곳 백성들을 달래어 성기를 죽였기 때문에 조선을 평정할 수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동국통감(東國通鑑)》에다 그대로 써 놓았다.
전쟁 즐기는 한 무제가 먼 나라를 치려 하자 / 漢皇黷武思遠略
우리 나라엔 살기가 하늘 닿게 등등했다네 / 箕東殺氣彌天黑
누선은 돛을 달고 요좌로 내려오고 / 樓船掛帆下遼海
좌장군은 말을 몰아 갈석산을 지났는데 / 左將躍馬由碣石
고을들이 다 찢기고 서울이 무너져도 / 諸縣幅裂王都傾
여기저기 보이는 건 매국노뿐이었다네 / 但見紛紛賣國賊
나라 책임 짊어진 대신이 하나 있어 / 安危却有大臣在
피눈물을 흘리면서 외로운 성 지키다가 / 沫血飮泣守孤城
다급한 형세가 위기일발 되었으니 / 孤城勢急危如髮
홍모 같은 목숨 하나 아낄 것이 뭐라던가 / 到此一死鴻毛輕
대동강수 질펀히 흐르고 / 浿水流洋洋
왕검성 우뚝 서 있는 곳 / 王儉高嶔嶔
성기의 그 명성 지금까지 전해 오는데 / 成己大名留至今
모반했다 죽였다 그 무슨 당찮은 말 / 書反書誅是何義
붓을 잡은 사신이 서법을 그리 모르다니 / 史臣秉筆迷書法
옹산성장가(甕山城將歌) 신라 태종왕(太宗王) 8년에 백제(百濟)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을 점거하고 있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타일렀으나 항복하지 않아 김유신(金庾信)이 가서 포위를 하고 백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장 항복만 하면 앞으로의 부귀를 약속하겠다.” 하였으나, 성장(城將)이 대답하기를, “성은 비록 작지만 병력도 먹을 것도 다 충분하고 군대들도 다 정의롭고 용감하다.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은 않겠다.” 하니, 유신이 그 성을 함락시키고 그 성장을 잡아 죽였다.
물장군만큼이나 작은 옹산성 / 甕山城小如甕
장군의 기상은 어찌 그리 드높았나 / 將軍之氣何崢嶸
성난 눈은 번쩍이고 수염은 빳빳했네 / 怒目煌煌如磔
나당의 연합군도 그 안중엔 이미 없어 / 眠底已無唐羅兵
남아의 의기 앞에 부귀가 다 뭐라더냐 / 男兒義重富貴輕
값진 길을 선택할 이 시기가 아니더냐 / 熊魚取舍此其時
종묘 사직 다 망하고 임금도 무릎 꿇고 / 宗社亡矣國君降
머리 들고 살아간들 장래 할 일 뭐라던가 / 擧頭天地將何爲
망할 나라 부흥시킬 기회 반드시 있나니 / 興衰撥亂會有期
제 나라 온전히 수복한 건 바로 즉묵이라네 / 恢復全齊惟卽墨
진지에서 맹호 같은 호령 한 번 떨어지자 / 臨陣一呼猛如虎
백천의 의용군들 목숨 걸고 싸웠다네 / 百千義勇爭死敵
아 저 태양도 장군의 진심을 몰랐던가 / 嗚呼白日不照將軍之衷誠
억울하게 죽은 피가 지금도 푸르다네 / 至今冤血流爲碧
하늘에 있는 영혼이야 외롭지 않겠지요 / 英魂在天應不孤
계백ㆍ주근 두 장군과 서로 짝이 될 테니까 / 階伯周勤相爲伍
옹산성은 작아 물장군 같아도 / 甕山城小如甕
장군의 그 이름은 천고에 빛나리 / 將軍大名垂千古
천성행(泉城行) 신라 문무왕(文武王) 15년에 당(唐) 나라 설인귀(薛仁貴)가 천성(泉城)을 공격해 왔는데, 이 때 장군 문훈(文訓)이 맞아 싸워 적군 1천 4백 명의 수급을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탈취했으며 인귀가 패배해 도망가자 전마(戰馬)도 1천 필이나 얻었다. 그리고 또 이근행(李謹行)을 매초성(買肖城)에서 쳐부수고 전마 3만 3백 80필을 얻었으며, 병장기(兵仗器)도 그만큼 얻었다.
설인귀는 당 나라 명장으로서 / 薛仁貴唐名將
한 번 싸워 요동을 탈취하고 / 一戰取遼東
두 번 싸워 평양을 공격하여 / 再戰擊平壤
전승공취 그 기세를 당할 자가 없었으니 / 戰勝攻取勢莫當
요하 동쪽 어디에도 온전한 진이 없었는데 / 遼河以東無堅壘
어찌하여 천성 싸움에서는 쥐새끼처럼 도망쳤던가 / 如何泉城一戰走如鼠
문훈의 재주는 비길 데 없었다네 / 文訓之才無與比
문훈의 재주가 비길 데 없었을 뿐만 아니라 / 不特文訓之才無與比
신라는 그 때 운이 일어나는 시기여서 / 此時新羅應運起
임금 신하 다 어질어 이길 수 없었다네 / 主賢臣良無可乘
당 고종은 무슨 일로 군대를 일으켰던가 / 唐皇忿兵胡乃興
예로부터 틈이 있어야 나라가 망하는 법 / 自古亡國必有釁
그래야만 적들이 제 재능을 발휘하지 / 然後敵人奮才能
호해가 실덕하자 항우가 용맹 떨쳤고 / 胡亥失德項籍勇
오왕 부차도 태황했기에 범려의 슬기에 넘어갔지 / 夫差怠荒范蠡智
내 한 말이 노망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한 것 / 我言非耄信如此
아 후세 임금들도 그 점을 명심해야지 / 嗚呼後辟淪當念記
노사행(弩士行)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25년에 수(隋) 나라 왕이 와 정벌하자 왕이 겁이 나서 사신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빌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그 때 어느 한 사람이 비밀리에 작은 활을 가슴에 품고, 표문[表]을 가지고 가는 사신의 뒤를 따라 수 나라 왕이 있는 곳으로 가서 수 나라 왕이 표문을 읽고 있을 때 활을 당겨 그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수제는 군대를 회군하려고 하면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의 왕으로서 친히 이 작은 나라를 정벌하다가 이렇게 불리한 꼴을 당했으니 만세를 두고 비웃음을 받을 일이다. 지금 저 사람을 보니 그는 바로 형가(荊軻)ㆍ섭정(聶政) 같은 사람이다.” 하였다 한다.
죄악이 천지에 찬 수 양제 양광이 / 楊廣罪惡盈天地
두 번이나 병력 일으켜 요동 갈석 쳐들어왔는데 / 再興驕兵來遼碣
원래부터 크고 작은 형세 상대가 되질 않아 / 由來大小勢不敵
고구려 군신 모두가 놀라 혀를 내둘렀네 / 句麗君臣皆吐舌
압록강은 그다지 험준한 요새가 못 되어 / 鴨江不能恃其險
을지문덕 그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어 / 乙支無所出其奇
표문 들고 신하노릇 자청할 생각으로 / 奉表稱臣事已急
사신들이 밤낮없이 서북으로 달렸는데 / 使盖日夜西北馳
그 속에 나타난 대단한 남자 하나 / 箇中閃出大男子
소매 속에 숨겨 온 활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 袖裏神弩千石强
진시황이 독항도를 막 펴들고 있을 때 / 秦皇方啓督亢圖
단상에선 조말의 비수가 번뜩였다네 / 曺沫壇上匕首張
토끼처럼 쥐처럼 빠져나간 것만도 다행이지 / 兎脫鼠竄亦幸耳
독부 그놈 갑옷 싸들고 허겁지겁 도망갔다네 / 獨夫捲甲走蒼黃
우리 역사엔 기록이 없고 중국에선 숨겼기에 / 東史斷爛中史諱
천년 동안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다네 / 此事千秋視渺茫
박랑사에서 진시황 철퇴로 친 일 그대 보지 않았나 / 君不見博浪椎秦客
예로부터 의인협객들 동방에서 나왔다네 / 自古義俠出東方
백마총행(白馬塚行)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사상록(槎上錄)에 이르기를, “일본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倭皇)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대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오니 대판(大阪)과의 거리가 겨우 1백 리 정도였다.’라 하였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왜인들이 그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가 바로 백마(白馬)의 무덤인데, 신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일본 사람들이 화의를 청하여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맹약한 후 그 말을 저 곳에 묻었다.’고 한다.” 하였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8년에 해당하고, 중국으로는 진(晉)의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 되는 해인데, 그 사실이 동사(東史)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해동기(海東記)에 의하면, 달민천황(達敏天皇) 계묘년에 신라가 서비(西鄙)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또 원정천황(元正天皇) 경신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이지만 그 사실이 이 동사에는 다 빠지고 없다. 지금 동래(東萊) 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太宗臺)라고 불린다.
일본 지역에 백마총이 있는데 / 白馬塚在日域
왜인들이 대를 이어 그 무덤을 손질하며 하는 말이 / 倭人世世勤封築
옛날에 신라 왕이 쳐들어 올 때 / 謂昔羅王憤侵軼
수만 명 정병이 바다에 떠 밀려오니 / 精兵數萬浮海伐
물귀신도 뒤로 주춤 해신(海神)도 길을 비켜 / 馮夷淪易海若奔
큰 바다 동쪽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네 / 大海以東無涯藩
용 깃발을 휘날리고 타고를 울리면서 / 揚龍旆擊鼉鼓
선발대가 곧바로 명석포를 공격하니 / 前茅直擣明石浦
왜왕이 겁에 질려 화친을 청하고는 / 倭王失色事和親
짐승 잡아 맹세 쓰고 신명께 고하였네 / 刑牲載書告明神
그 후로는 오랜 기간 바다가 조용했고 / 從此鯨波久不涌
천고의 유적으로 저 무덤이 남았다네 / 千古勝蹟留遺塚
그 옛날 진터가 절영도에도 있는데 / 絶影又有古壘寨
이것이 태종대라고 뒷사람들 말을 하지 / 後人說是太宗臺
총알만한 신라 땅 한쪽에 있었으면서 / 彈丸羅地在一隅
장하여라 병력이 어찌 그리 강했던가 / 猗歟兵力何壯哉
어쩌다가 후세 들어 옛날과는 정반대로 / 歸來後世事反古
우리 나라 전역이 적의 침략 늘 당하고 / 大東全地受侵侮
지금도 해상에는 허구 많은 공갈배가 / 至今海上多虛喝
제 욕심 채우려고 해마다 손 벌린다네 / 穀帛年年充其欲
생각하면 그리 된 것 까닭이 왜 없겠는가 / 靜思其故豈無因
서생이 부질없이 국경을 안정시킬 계책 짜본다네 / 書生謾有安邊策
[주-D001] 독항도 : 전국 시대 연(燕) 나라의 기름진 땅인 독항(督亢)의 지도. 형가(荊軻)가 진왕(秦王)을 죽이러 가면서 우선 진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독항의 지도를 그에게 바쳤음. 《史記 刺客列傳》[주-D002] 조말 : 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 사람. 장공(莊公)이 제(齊)와 싸워 지고는 가(柯)에서 맹약을 할 때 조말이 비수를 들고 제 환공(齊桓公)을 위협하면서 의분에 북받치는 말을 하자 환공은 그 동안 노 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그 자리에서 다 되돌려 주었다고 함. 《史記 刺客列傳》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