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총설

중원의 지형이 당송(唐宋) 이래로 서남쪽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믿음을갖자 2023. 11. 1. 03:09

패관잡기 4

함경도 육진(六鎭)에 한 종류의 나무가 있어 그 잎이 전나무 같은데, 그 지방 사람들은 이깔나무(伊叱檟木)라고 한다. 그 기름을 취하여 종기에 붙이면 곧바로 낫는데, 등창이 처음 생길 때에 더욱 효과가 있다. 정덕(正德) 연간에 비로소 해마다 서울에 바치도록 명하고, 가정 계사년에 그 나무 가지를 갑 속에 넣어서 의관(醫官)을 시켜 중국에 가서 질문하게 하였는데, 어의(御醫)에게 일일이 물어도 모두 무슨 나무인지 모른다 하였다. 그 나무가 중국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본초(本草)》 등 방서에 빠져서 사람들이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방서 밖에 따로 이 나무가 있는데 이름은 있어도 쓰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시험하지 않은 것인가. 혹은 중국에서 이미 알고 있는데 갑 속에 넣어 간 가지가 말라서 분변하기 어렵기 때문인가. 종기를 치료하는 데에 이미 신묘하다면 방서에 실리고 실리지 않은 것과 중국에서 알고 알지 못하는 것은 따질 필요도 없다.

 

홍재전서 제175권 / 일득록(日得錄) 15

훈어(訓語)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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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北齊)의 문선제(文宣帝)가 3천여 리의 장성(長城)을 축조하고 거기에 더하여 고락(庫洛)에서 오흘(烏紇)에 이르는 4만여 리의 중성(重城)을 축조하였는데 축성의 장대함이 진시황(秦始皇)의 그것보다 더하였으니, 참으로 호(胡)로 호(胡)를 막자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운반 등의 일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이 완성되자마자 민심이 이반하고, 민심이 이반하면서 국가도 따라서 망하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인가.


종묘에서 고니[天鵝]를 제수로 올리는데 만일 제때에 맞추지 못하면 고니 한 마리의 값이 백 금이나 된다. 그래서 더러 대신 다른 것으로 올리자는 논의가 있기도 하나 고니를 올리는 것은 바로 제사에 칠수(漆水)와 저수(沮水)의 물고기를 올리는 의미이기 때문에 감히 논의할 일이 못 된다. 또한 창포 김치[昌歜]와 양조(羊棗)는 즐겨 드시던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옛사람의 지극한 효성이었으니, 비용 따위는 고려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제주도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노인성(老人星)이 그곳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상수(上壽)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 7, 80세 된 노인은 노인 대접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별이 비춘다고 사람이 장수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섬은 음습하고 장기(瘴氣)가 많아 요절할 우려가 많을 터인데 이제 그렇지 않으니, 성상(星象)의 증험일지도 모르겠다.

춘당대(春塘臺)의 연지(蓮池)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그래서 전해 오는 말에, 연못 가운데에 진흙물의 웅덩이가 있으니 긴 막대기를 밀어 넣어 봐도 막힘이 없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데, 이것은 바다와 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우 황당한 말이기는 하지만 원리에 의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강희(康煕)는 그 자체로 성군이니, 이적(夷狄)과 똑같이 일률화할 수는 없다.

. 중원의 지형이 당송(唐宋) 이래로 서남쪽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그래서 우공(禹貢) 때에는 기주(冀州) 이남이 천하의 중심이었는데 진한(秦漢) 때에는 낙양(洛陽)이 중심지가 되었고 지금은 서주(徐州)가 거의 중원의 중심지가 되었으니, 덕화가 대대로 점차 넓게 펼쳐지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사치 풍조의 극성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다. 비록 지극히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이라도 온갖 살림살이며 음식, 의복 등을 모두 제 모습을 갖추려 한다. 또 저들 밭 갈지도 않고 베를 짜지도 않는 이들의 재물은 어디에서 나겠는가. 이 때문에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 반드시 하나의 이권을 꿰차려 하며 수령이 되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간악함을 일삼고 법을 어기는 등 못하는 것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날에는 예컨대 조참(朝參)이나 진하(陳賀)나 대제(大祭) 때에 신료 가운데 해진 조복(朝服)을 입은 이도 있었고, 제복과 관복에 있어서는 비록 재상이라도 종종 제용감(濟用監)에서 제공하는 옷을 입기도 했는데, 근래에 와서는 조복의 색이 바랜 것이 매우 드물뿐더러 제복에 있어서도 제공되는 옷을 입은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러한 것에서 풍속이 지나치게 사치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어찌 재력이 옛날보다 나아져서이겠는가. 다만 세상에 식견 있는 사람이 적은 까닭에 일시의 벼슬아치들이 모두 이처럼 하지 않으면 수치라고 여겨 온 힘을 다해 본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지난날 황희(黃喜)가 거친 베옷과 해진 도포를 입고 정부에 나와 공무를 보자 이튿날 비단옷을 입은 자들이 모두 바꿔 입고 나왔다는 말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재상 중에 어느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개탄스러울 뿐이다.

근래 들어 사대부들의 풍습이 매우 괴상하여 반드시 우리나라의 틀에서 벗어나 멀리 중국인들이 하는 것을 배우려 한다. 서책은 물론이요 일상의 집기까지도 모두 중국산 제품을 사용하여 이것으로 고상함을 뽐내려 한다. 먹, 병풍, 붓걸이, 의자, 탁자, 정이(鼎彝), 준함(樽榼) 등 갖가지 기괴한 물건들을 좌우에 펼쳐 두고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며 고아한 태를 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구중 깊이 앉아 있는 나로서도 그러한 풍문을 들었으니 낭자하게 이루어졌을 그 폐해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옛사람의 말에 “오늘날 사람은 마땅히 오늘날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이는 절실하게 되새겨야 할 말이다. 이들이 이미 우리 동방에 태어났다면 마땅히 우리 동방의 본색을 지켜야지 어찌 굳이 중국 사람을 본받으려 애쓸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사치 풍조의 일단으로 마지막에 가서의 폐해는 말할 수도 없고 구제할 수도 없을 것이니, 실로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다.

 

 

새로 천봉(遷奉)한 현륭원(顯隆園)이 최상의 길지(吉地)라는 것이 옥룡자(玉龍子) 도선(道詵)의 비기(祕記)에서 전해 온 지 몇백 년이 되었으니, 오늘을 기다리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다. 영릉(寧陵)을 천봉(遷奉)할 때에 윤선도(尹善道)뿐만 아니라 당시 지사(地師)들이 모두 극구 찬양했지만 마침내 다른 의견으로 인해 홍제동(弘濟洞)으로 이정(移定)하게 되었으니 하늘의 뜻이었다. 내가 일찍이 이 땅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듣는 순간 마음에 곧 와 닿았고, 수십 년간 조석으로 간직한 일념이 오직 천봉하는 대례(大禮)에 있었기에 논의가 결정되는 날에 단연코 의심이 없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의 마음을 이끈 것이다.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혈(正血)과 진토(眞土)가 자연히 드러났으니, 이 어찌 나의 성효(誠孝)의 감응에 의한 것이랴. 참으로 하늘이 종묘사직을 도와 우리에게 억만년 무궁한 터전을 내려 주신 것이다. 지난해 알성시(謁聖試)에서 ‘천작고산(天作高山)’으로 제목을 정한 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 이미 있었던 것인데 다만 신하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영남의 풍속이 옛것에 가장 가깝다. 그래서 방음(方音)이 가장 정확하니 예컨대 언해(諺解)나 이두(吏讀)도 다른 도에 비해 가장 착오가 없다.

청(淸) 나라 황제의 나에 대한 대우는 참으로 일반의 격식을 뛰어넘는다. 지난날 손수 복(福) 자를 써서 만 리 밖에서 기원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정중하며 감동스럽지 않은가. 내가 그에게 대응함도 십분 후중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이는 존주대의(尊周大義)와도 원래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또 들으니 그 규모와 기상은 일대 영웅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두터운 복력(福力)은 천고에 드물다고 한다.


한(漢)ㆍ위(魏) 때 서역(西域) 지방에 있었던 계빈국(罽賓國)에 조세배(照世盃)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잔의 모양이 맑고 투명해 이를 비추면 세상일을 알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 올리는 표문(表文)에 이르기를, “삼가 성심(聖心)이 조세(照世)의 잔과 같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한 것이다. 잔은 작은 기물이다. 임금의 덕이 중천에 뜬 태양처럼 온 누리를 비춘다면 그 맑고 영롱함이 어찌 하나의 잔의 빛에 견줄 것이겠는가.


우리나라의 인삼(人葠)은 천하에 으뜸인데 근래에 생산량이 적어 심한 품귀 현상을 보이고 있으니, 이는 산이 경작되면서 인삼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 나라 덕종(德宗) 때에 신라(新羅)의 원성왕(元聖王)이 9척 길이의 인삼을 바쳤으나 인삼이 아니라고 물리친 일이 있었다. 일찍이 《현람(玄覽)》을 보니, 인삼이 천 년을 묵으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했다. 이것이 이른바 동자삼(童子葠)이다. 요즘은 산중턱 이상은 모두 화전(火田)으로 사용되어 천 년 된 나무도 없는데 하물며 인삼이 있겠는가. 이제 인삼을 기르는 방법은 화전을 금하는 것밖에 없다.

 

입시(入侍)한 대신에게 이르기를, “일전에 자궁(慈宮)께서 종기가 나 전생서(典牲署)에서 나오는 흑소의 분(糞)을 계속 사용하였는데, 채취의 편리를 위해 소 한 마리를 가까이 내구(內廐)에 두어 여러 날에 걸쳐 붙이자 이내 효험을 보았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고, 이어 천신에게 이르기를, “막중한 데에 효험을 본 것을 생각하여 이미 마구 담당자에게 명하여 방목케 했다. 경이 지금 태복시 제거이니 해당 부서에 첩지(牒紙)를 보내 곧바로 주고받을 것을 회계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명(明) 나라 영락제(永樂帝)의 희비(姬妃)는 우리나라에서 뽑혀 간 경우가 많은데, 《명시종(明詩綜)》에서 말한 이른바 공비(碽妃)는 고찰할 수가 없다. 한영정(韓永矴)의 딸이 영락제의 여비(麗妃)였고, 또 다른 딸은 선종(宣宗)의 공신부인(恭愼夫人)이었으니, 그렇다면 공(碽)과 정(矴)이 모두 석(石)을 변으로 하고 있는데, 중국인이 아버지의 이름을 성씨로 삼아 잘못 전한 것이 아닐까. 동국에서 출생한 사람이 중국으로 들어간 것은 신라 때에 시작되었으며 원(元) 나라 때에는 기씨(奇氏)가 황후가 되기도 했다. 명 나라 초에 그대로 따라한 것은 대개 잘못된 것을 인습한 것인데, 곧바로 이를 폐지했으니 명 나라 천자의 성덕(聖德)과 지선(至善)을 엿볼 수 있다.

자고로 촉(蜀) 땅을 취하는 법은 판에 박은 도장처럼 한결같다. 명(明) 나라의 요영충(廖永忠)이 푸른 도롱이를 입어 위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벼랑 사이로 나간 것은 바로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등예(鄧艾)가 이미 시험했던 방법이다. 병법에 상진(常陣)이란 없고 진법에 상법(常法)이란 없지만 법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다.


천신에게 하교하기를, “근래에 연소한 무리들이 중화(中華)를 모방하는 것이 한결같이 명말(明末), 청초(淸初) 때의 세태와 같으니, 내가 이를 매우 싫어한다.” 하기에, 천신이 대답하기를, “신 또한 인재를 무너뜨리고 세도를 해치므로 작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누차 사람들과 이 문제를 말했는데, 그 뒤에 이 문제를 가지고 책려하는 하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이 초망(草莽)에 엎드려 왕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고는 마음속으로 미천한 견해가 성인에 질정하여도 바뀌지 않음에 기뻐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러니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다. 내가 말을 하면 남들이 모두 안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이르기를 ‘방 안에서 한 말이 선하면 천 리 밖에서 호응한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렇도다.” 하였다.

어진(御眞)을 10년마다 새로 그리는 일은 선대의 법을 그대로 계승하지만, 나는 거창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말고 단지 내각(內閣)에서 주관하도록 하고 감독하는 신하들은 나의 마음을 잘 알도록 하라. 열조(列朝)는 모두 휘호(徽號)가 있으나 영릉(英陵)과 효묘(孝廟) 양조(兩朝)만이 휘호를 받지 못했으니, 내가 감히 양조의 성대한 업적을 추술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신축년(1781, 정조5)에 표제를 넣을 때에도 신하들이 휘호가 없는 것에 대해 모두들 말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옛날대로 표제를 휘호 없이 연월(年月)만 넣었으니 이는 역대에 없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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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집 1권 / 항전척독(杭傳尺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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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게 주는 글[與汶軒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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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만리 밖에서 서로 사모하는 처지이므로 1년에 한 번 인편을 얻는 것은 너무나 희활(稀闊)한 감이 없지 않은데, 그 사이에는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것도 또한 매우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존형이 삼하(三河)에 있으면서도 자주 서신을 전할 인편을 얻지 못하였던 것입니까? 인편이 있는데도 서신이 없으면 한 해가 다하도록 서운한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사랑해 주시는 옛 친구로서 어찌 이 마음을 생각해 주지 못하겠습니까? 오직 양찰해 주시기를 천만 번 빕니다. 이만 줄입니다.

진(眞)ㆍ침(侵)은 통운(通韻 통용운(通用韻))이라는 것이 옛적에 있었습니까? 침(侵)ㆍ담(覃)ㆍ염(鹽)ㆍ함(咸)은 통운이고, 진(眞)ㆍ원(元)ㆍ한(寒)ㆍ산(刪)ㆍ선(先)이 통운인데도 보내주신 시문 중에 ‘유거불전빈(幽居不全貧)’이라 하고, 또 ‘장소무요금(長嘯撫瑤琴)’이라고 하였으니 빈(貧)자와 금(琴)자는 통용운이 아닌즉 혹 잘못된 것입니까? 동국에는 별도로 언문글자[諺文]가 있으니, 그 음(音)은 있고 그 뜻은 없으며 글자의 수는 2백 자 미만이지만 자모(子母)가 서로 반절(反切)되어 1만 가지 음이 갖춰지므로 부인 및 서민층의 한자(漢字)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언문 글자를 병용하여 바로 지방말로 글을 만들어, 대개 서찰과 장부 문권(文券)의 내용이 분명하게 드러나 순 한문보다 혹 나으며, 비록 우아한 점은 부족하지만 그 알기 쉽고 쓰는 대로 적용되는 것은 반드시 인문(人文)의 한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경서의 자음(字音)에 모두 언문 해석이 있으므로 이 글자가 경(經)에 있으면 온 나라가 음이 다를 수 없고 누세(累世)를 내려가도 변하는 소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