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貞陵)양주(楊州)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으니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정릉
貞陵사적 제208호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1396)의 능으로 29만 9,573제곱미터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고향의 부인), 경처(개경의 부인)를 두었는데 강 씨는 경처로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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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10권 / 계(啓)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곡산 본궁(谷山本宮)의 시말(始末)에 대한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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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산부(谷山府)에서 동쪽으로 5리쯤에 당저(塘底)란 곳이 있어 이를 궁허(宮墟)라고도 하는데, 돌 기둥 한 쌍 하나는 넘어졌고 하나만 서 있다. 이 있습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덕왕후의 본궁이라고 합니다. 뒷편에는 용봉(龍峯)이 있고 앞쪽에 용연(龍淵) 작은 시내가 굽어돌아 못이 되었는데 깊어 헤아릴 수 없다. 이 있는데, 지리(地理)가 특이합니다. 노인들이 말하기를,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영흥(永興)에서 송경(松京 개성)에 왕래할 때 이 시내에 이르러 매우 갈증을 느꼈는데, 그 때 후(后)가 마침 시냇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태조가 물을 청하니 후가 물을 떠서 버들잎을 띄워 드리자, 태조가 그를 노여워하였다. 후가 ‘급히 마시면 물에 체할까 염려해서입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을 가상히 여겨 드디어 예(禮)를 갖추어 아내로 맞이했다.”
하였습니다. 또 곡산에서 북쪽으로 80리쯤에 있는 가람산(岢嵐山)의 남쪽에 치도(馳道)가 몇 리에 걸쳐 산꼭대기에 뻗쳐 있는데, 주민들이 ‘치마곡(馳馬谷)’이라고 합니다. 그 북쪽에는 ‘태조성(太祖城)’이 있는데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태조가 일찍이 이 산에서 말을 달리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다고 합니다.
신(臣)은 삼가 살피건대, 신덕왕후의 본적은 곡산이고,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는 바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인데, 상산은 곧 곡산의 별칭입니다. 또 함흥(咸興)ㆍ영흥(永興)에서 송도(松都)에 가려 하면 곡산이 실로 직통길이요 지름길입니다. 대개 고원(高原)에서 서쪽으로 양덕(陽德)을 거치고 남쪽으로 곡산(谷山)을 거치면 도정(道程)이 매우 가까우니, 노인들의 말이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또 그 돌기둥은 분명히 궁가(宮家)의 물건입니다. 고(故) 감사(監司) 이의준(李義駿)도 직접 그 모양새를 살펴보고는,
“유적(遺跡)은 분명한데 문헌(文獻)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연주(筵奏 임금의 연전에서 아룀)는 가하나 계문(啓聞 글로 써서 상주함)은 불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버들잎’ 고사는 야사(野史)에 두루 실려 있지만 두메 산골 백성들이 야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니 그것은 전래하는 옛말인 것입니다. 정릉(貞陵 신덕왕후의 능)의 일에 마침 추모함이 있는 것이 마치 온릉(溫陵 중종의 폐비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능)의 일과 흡사합니다. 여기는 또 태조(太祖)가 왕업(王業)을 일으킨 사적과 연관이 있는 곳이니, 돌기둥의 곁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서 택리(宅里)였음을 표시하는 것이 태평 성대의 훌륭한 일인 듯합니다. 정릉의 탄일(誕日)은 바로 6월 14일이고, 기일(忌日)은 바로 8월 13일인데, 이때에 하문하신 것은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돌을 나를 때 강화(江華)에서부터는 물길로 운반하여 평산(平山) 기탄(岐灘)까지 이르고, 기탄에서부터는 육로로 곡산까지 이르면 백여 리에 불과하여 곡식이 상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D001] 신덕왕후(神德王后) :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조선(朝鮮) 태조(太祖)의 둘째 비(妃)이다. 태조의 즉위 전에 들어갔다가 즉위 후 현비(顯妃)에 책봉되었고, 태조 5년에 승하하였다.[주-D002] 정릉(貞陵)의……흡사합니다 : 신덕왕후는 왕위 다툼으로 희생된 세자(世子) 방석(芳碩)의 생모이므로, 태종이 미워하여 존호를 폐하였는데, 그 후 2백여 년 만인 현종(顯宗) 때에 회복시켰다. 온릉(溫陵) 즉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중종(中宗)의 조강지처로서 즉위 후 폐위되어 오랜 세월 동안 복위의 논의가 분분해오다가, 마침내 영조 15년에야 추복되었다.
조선왕조실록 > 현종개수실록 > 현종 > 2월 5일 > 최종정보
현종(개수실록) 10년 기유(1669) 2월 5일(무진)
10-02-05[05] 부제학 이민적 등이 상차하여 신덕 왕후의 능묘를 태묘에 배향하라고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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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천하의 일이란 전일에 폐지되었다가 뒷날에 거행되는 경우도 있으며 한때는 굴하였으나 만세에 펼쳐지는 경우도 있으니, 그 일의 옳으냐 그르냐의 여부만을 살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정에 편안하지 못한 것이라면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내버려두어서도 안 되며, 빠트릴 수 없는 천리라면 조종(祖宗)이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여 어렵게 여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한 사리이며 역대의 공통된 논리입니다.
이번 신덕 왕후(神德王后) 능묘에 관한 논의는 대신이 이미 그 단서를 발론하였고 성명께서도 그 말에 감동하셨습니다. 원릉(園陵)의 제도에 있어서 관리의 설치 및 사물의 비치를 여러 능묘에 견주게 하니, 성인의 넓으신 효성을 누구인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종묘 제사에 관한 절차를 아직도 어렵게 여기는 뜻을 경연에서 보이셨다 합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신덕 왕후는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별세한 후 성조(聖祖)께서 건국할 때 천자(天子)의 고명(誥命)을 받고 일국의 국모(國母)가 되어 중곤(中壼)의 자리에 있은 지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선유 이색(李穡)이 찬한 정릉비(定陵碑)를 상고하면 역시 ‘먼저 모씨에게 장가들고 후에 모씨에게 장가들었다.’ 하여 원(元)과 차(次)의 분별이 없으며, 권근(權近)이 찬한 흥천사비(興天寺碑)에도 역시 봉함을 받아 곤위에 있었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용비어천가》는 세종조에 만들어진 것인데도 역시 신덕 왕후라고 쓰여져 있으니, 위호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이것이 또한 분명한 증거인데 어찌 다시 증거를 상고한 후에야 알 수 있겠습니까. 승하한 후에 존호와 시호를 올리는 일을 예관(禮官)들이 폐지하지 않았고 제사를 모시던 의식과 축판이 아직도 향실(香室)에 있으며 태종 대왕이 친히 향축(香祝)을 전하였으니, 그 위호와 축식의 존융함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으며 원릉 석물(石物)의 설비 역시 극히 높여 거행했습니다. 살아서는 정비(正妃)가 되었고 죽어서는 존호를 받았으며 중국으로부터 고명을 받아 성조와 짝하였으니, 유독 태묘(太廟)에 배향되지 못한 것이 어찌 인정에 거역되고 천리에 괴리되어서 성조의 궐전(闕典)이 되고 천고의 유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선조조(宣祖朝) 14년 신사 연간에 대신과 삼사가 역시 건의하였으나 성대한 예를 거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언젠가는 거행해야 할 일이니, 이는 실로 오늘날 성조의 책임인 것입니다.
소릉(昭陵)의 복위 문제는 여러 조정을 지나 중종 때 비로소 거행하였으니, 조종이 거행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여 일찍이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며 또한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내버려두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고사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한ㆍ당 이래로 송나라의 가법(家法)이 가장 순정(純正)하다고 하는데 원우 황후(元祐皇后)의 복호는 정자(程子)도 옳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신덕 왕후는 존호가 바뀌지 않았고 정릉의 의물(儀物)도 아직까지 왕후의 법제로 되어 있으니, 소릉의 개봉(改封)이나 원우의 복위처럼 중대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빠뜨린 전례를 소급하여 거행하고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세하게 정문(情文)을 마련하면 될 뿐이니, 이렇게 한 다음에야 천리에 합하고 인정이 순응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의 전례는 관계됨이 매우 중하고 논의가 이미 발론되어 여론을 막기가 어려우니, 의리로 헤아려 결단하여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원전】 37 집 650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궁관(宮官) / 왕실-비빈(妃嬪)
[주-D001] 소릉(昭陵) : 단종(端宗)의 생모인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 본래 안산(安山)에 있었는데, 단종이 죽은 후 세조(世祖)가 물가로 이장하였다. 그 후 영남 유생들을 중심으로 처음 복위의 논의가 일어났으나 실행하지 않다가 현릉(顯陵)으로 이장되어 복위되었다.[주-D002] 원우 황후(元祐皇后) : 송 철종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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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14권 / 발(跋)
신덕기적비첩(神德紀蹟碑帖)에 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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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신덕기적비(神德紀蹟碑)는 우리 건릉(健陵 정조의 능호로 정조를 가리킴)께서 친히 짓고 손수 전액(篆額)을 쓴 것이다. 내가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있을 적에 향인(鄕人)의 말을 들어 보니,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太祖)의 계비(繼妃)) 강씨(康氏)의 옛 집터가 용연(龍淵) 위, 용봉(龍峯) 아래에 있는데, 돌 기둥이 우뚝 서 있다고 하므로, 가 보았더니 사실이었다. 야사(野史)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옛날 우리 태조(太祖)께서 여름철에 말을 달려 계곡을 지나다가 매우 갈증이 나므로 개울 에서 빨래하는 한 여자를 보고 물을 떠오게 하였다. 그 여자는 일어나서 즉시 물을 떠오는 데 버들잎 한 움큼을 물에 띄워가지고 바쳤다. 태조가 노하여 ‘왜 버들잎을 섞었는가?’ 하니, 그 여자가 ‘더울 적에 물을 급하게 마시면 몸에 해로우므로, 그것을 불면서 천천히 마시게 하려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말에 태워가지고 함께 돌아왔는데, 그가 바로 신덕왕후였다.”
기미년(1799, 정조 23) 여름에 내가 곡산에서 돌아왔는데, 마침 청연(淸燕)을 맞이하여 그 사실을 아뢰었다. 그 후 8월 16일이 마침 신덕왕후의 기일(忌日)이었다. 그러자 상(上)께서 감회(感懷)가 있어, 용연(龍淵)의 돌 기둥 옆에 비각(碑閣)을 짓고 비를 세워서 그 사적(事蹟)을 기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탑본(搨本)이다. 이 일을 할 때에 내가 자주 자문을 받고 그 한두 가지를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비가 이미 고적(古跡)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를 꾸며서 첩(帖)을 만들고 눈물을 흘리며 그 전말을 기록한다.
그리고 곡산(谷山)에서 북으로 80리쯤 되는 곳에 치마골[馳馬谷]과 태조성(太祖城) 등의 고적(古跡)이 있다. 향인(鄕人)의 전하는 말에는 ‘태조(太祖)가 이 치마골에서 말을 달리며 칼 쓰는 법을 연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골짜기는 가람산(岢嵐山)의 꼭대기에 있으니, 거기에서 말을 달렸다는 것은 아마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듯하다. 어떤 이는, ‘산의 형태가 치마[裙]와 같은데, 방언(方言)에 ‘裙’을 ‘치마’라고 하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골짜기에 ‘수라천(水刺泉)’이라는 우물이 하나 있으니, 그렇다면 성조(聖祖)의 어가(御駕)가 이 산에서 머무른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상께서 거기에도 비(碑)를 세우고자 하여 비를 이미 마련하였었다. 그러나 꼭 믿을 수 있는 일이 못 된다 하여 중지하고 말았다.
[주-D001] 청연(淸燕) : 풍류(風流)가 넘치는 고상한 연회(燕會). 전하여 궁중(宮中)의 연회를 가리킨 듯하나 자세하지 않음.[주-D002] 8월 …… 기일(忌日)이었다 : 여기서는 태조(太祖)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기일(忌日)이 8월 16일로 되었으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선원계보(璿源系譜)》에는 13일로 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84
백호전서 제12권 / 소차(疏箚)
노릉을 복위시킬 것을 청한 의소[擬請復魯陵疏] 기미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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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천시(天時)의 운행은 변동하는 것이고 인사(人事)는 상도(常道)를 회복하는 도리가 있기 때문에 천하의 사변이 일정하지 않으나 성인(聖人)이 대처하는 데 있어 상도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 지난날 경태(景泰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 1450~1456) 연간에 우리 문종 대왕(文宗大王)은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적자(嫡子)로서 보위(寶位)를 계승하셨고, 노산군(魯山君) 또한 문종 대왕의 세자로서 즉위하였으니 이는 천하의 상도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천운(天運)이 어려워지고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난(亂)을 평정하고 권도를 행하시어 구사(九四)의 지위에서 구오(九五)의 지위에 오르시어 천시(天時)ㆍ인사(人事)의 기회에 부응하시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는 천운의 변동인 것으로서 인력(人力)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리하여 노산군이 처음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전위(傳位)하고 상왕(上王)의 지위에 있다가 중간에 변고에 연루되어 영월(寧越)로 갔었는데 귀신이 화액을 조장하여 끝내 위호(位號)를 삭제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사의 지극한 변고인 것으로서 천심(天心)이 이에 대해 불평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일에 있어 귀신이 오열하고 송백(松柏)이 울창한 노릉(魯陵)을 지나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으며 천년 후에 이야기하는 자들 중에도 비난하고 탄식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전하께서 보위를 계승하신 초기에 대례(大禮)를 바로잡으시고 사설(邪說)을 하는 자들을 멀리 배척하시어 종묘(宗廟)를 높이고 선왕(先王 현종을 이름)의 뜻을 따르신 것은 지극한 효성이었습니다. 지금 노산군의 위호(位號) 및 휘칭(徽稱)을 회복하고 영녕전(永寧殿) 조종(祖宗)의 조묘(祧廟)에 부묘(祔廟)하여 신민(臣民)의 영원한 제향을 받을 수 있게 하시고, 황폐된 분묘도 수리하고 능호(陵號)를 정하여 부로(父老)들이 바라보고 공경하게 하시어 조종의 영령(英靈)을 위로하시고 황천(皇天)의 마음을 받드시며 만백성의 기대에 부응하신다면 이 또한 떳떳한 도리를 바로하고 변고에 대처하며, 하늘에 순응하고 민심에 화합하며, 조종을 빛내고 자손을 보전하는 큰 효도와 지극한 덕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날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왕비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태조 대왕의 큰 부인으로서 첫 번째로 중조(中朝)의 책봉 고명(冊封誥命)을 받으시어 중전(中殿)의 자리에 계시며 주상의 배필이 되셨는데, 당시의 신하들이 승부(陞祔)의 대례(大禮)를 거행하지 못한 것이 근 3백 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 때에 이르러 만인(萬人)의 일구동성(一口同聲)의 공론에 따라 선왕(先王)들이 미처 시행하지 못한 큰 전례(典禮)를 거행하셨으니, 이것이 실로 우리 현고(顯考)의 성대하신 덕업이 백세(百世)에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상전하께서 선왕의 지위에 오르시고 선왕의 예를 행하시어 2백 년이 지난 지금에 이 예를 거행하신다면 이것이 어찌 자손이 선왕의 뜻을 잘 계승하여 선왕과 같이 훌륭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봉집 제8권 / 부록(附錄)
사실(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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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도전(道傳), 자는 종지(宗之), 봉화현(奉化縣) 사람으로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 운경(云敬)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이색(李穡)에게 배웠으니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ㆍ이존오(李存吾)ㆍ김구용(金九容)ㆍ김제안(金齊顔)ㆍ박의중(朴宜中)ㆍ윤소종(尹紹宗) 등과 더불어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서, 쉬지 않고 강론(講論)하여 문견을 더욱 넓혔다. 문장은 왕양혼후(汪洋渾厚 크고 넓은 모습)하여 제공(諸公)들이 모두 추어올리고 양보하였다. 《고려사》 본전ㆍ본집 및 이존오전(李存吾傳)을 통해 엮었다.
공민왕(恭愍王) 임인년(1362) 10월, 박실(朴實)이 장원 급제한 과거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
이해에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지었다. 본집. 아래도 같다.
정축년(1397, 태조6) 5월에 칙위(勅慰)한 성지(聖旨)의 발어(跋語)를 지어 올렸다. 이보다 먼저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승하(昇遐)하여 사신을 보내어 고부(告訃)하니, 황제는 칙서(勅書)를 내려 위로했는데 은례(恩禮)가 전에 없이 융숭하였다. 그래서 상이 명령하여 그 전문(全文)을 비석에 새기게 하고, 공으로 하여금 그 발어(跋語)를 지어 올리게 하고 특별히 백은 50냥, 내구마(內廐馬) 1필, 단자 1필, 채초 1필을 하사하였다.
이해에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였다.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사한천(紗澣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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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배(李克培)의 시에,
한북의 산은 동으로 태모원과 연했는데 / 漢北東連太母原
시냇물은 사한천 호신촌으로 흘러가네 / 波流紗澣護神村
하였으니, 태모원이라는 것은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정릉(貞陵)이요, 사한천은 정릉 동북쪽 산 밖에 있으니, 옛날에 선녀(仙女)가 한양(漢陽) 북곡(北谷)에 살며 이곳에서 비단을 빨았다 하는데, 비단을 빨았다는 말은 중[僧] 무학(無學)의 지리지(地理志)에서 나왔다고 한다.
지금 정릉동(貞陵洞)에 크고 작은 두 골짜기가 있는데 정릉은 그 두 골짜기 사이에 있고 그 왼쪽 산이 사한천을 막고 있으니 곧 지금의 삼청동(三淸洞) 하류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역력히 다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 제1권 /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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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은, 휘는 단(旦)이며, 자는 군진(君晉)이다. 초휘는 성계(成桂)이고, 자는 중결(仲潔)이며, 호는 송헌(松軒)이다. 환조(桓祖)의 맏아들로 의비(懿妃)가 지원(至元) 원년 을해 고려 충숙왕 후4년 10월 11일 기미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사저에서 낳았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고, 홍무(洪武) 25년 임신 7월 16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8세 갑술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춘추 60세 무인 홍무 31년 9월에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었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었다. 경진 정종 2년 에 계운 신무(啓運神武)의 존호를 올렸다. 영락(永樂) 6년 무자 태종 8년 5월 24일 임신에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상왕위에 있은 지 10년이요, 수는 7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강헌(康獻) 온량호락(溫良好樂)을 강(康)이라 하고, 총명예지(聰明睿知)를 헌(獻)이라 한다. 이라고 하였다. 숙종(肅宗) 9년 계해에 시호를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 더 올렸다. 화상(畵像)이 두 벌 전주 경기전(全州慶基殿)에 한 벌 있고, 영흥 선원전(永興璿源殿)에 한 벌 있다. 있다.
숙종 14년 무진에 또 한 벌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다. 을 모사(摸寫)하였다. 능은 건원릉(健元陵)양주 남쪽 검암산(儉巖山)에 있으니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무자년(1408) 9월 9일에 장사지냈으며, 신도비(神道碑)와 지(誌)가 있는데 권근(權近)이 지었고, 비음기(碑陰記)는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이다.
○ 비(妃) 승인순성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안변(安邊)이니, 밀직사 부사 증 영문하부사(密直司副使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지원 3년 정축 충숙왕 후 6년 에 났다.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하였고,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恭讓王) 3년 9월 23일에 승하하였으니 나이 55세였다. 태조 즉위 초에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올렸다. 능은 제릉(齊陵)풍덕(豐德) 북쪽 속촌(粟村)에 있으니 갑좌경향(甲坐庚向)이다. 신도비가 있는데 권근이 지었다. 이다.
○ 계비(繼妃) 순원현경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은 곡산(谷山)이니, 판삼사사 증 상산부원군(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딸이다. □□ 6월 14일에 났으며,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홍무 병자년(1396) 태조 5년 8월 13일에 이어소(移御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 에서 승하하였다.
현종(顯宗) 10년 기유에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 능은 정릉(貞陵)양주(楊州)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으니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정축년(1397) 정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쪽에 장사 지냈다가, 태종(太宗) 9년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여기로 옮겼다. 이다.
고전번역서 > 연암집 > 연암집 제8권 별집 > 방경각외전 > 최종정보
연암집 제8권 별집 /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김신선전(金神仙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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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신선의 이름은 홍기(弘基)이다. 나이 16세에 장가를 들어 아내와 한 번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서는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았다. 화식(火食)을 물리치고 벽을 향하여 앉아서, 그렇게 하기를 여러 해 만에 몸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국내의 명산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항상 수백 리 길을 걷고서야 때가 얼마나 되었나 해를 살폈으며, 5년에 신을 한 번 바꿔 신고, 험한 곳을 만나게 되면 걸음이 오히려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도 그는,
“물을 만나 바지를 걷고 건너기도 하고, 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느라 이렇게 늦어진 것이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신선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듣자니 신선의 방술(方術)이 더러 특이한 효험이 있다 하므로 더욱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윤생(尹生)과 신생(申生)을 시켜서 가만히 찾아보게 하여, 한양 안을 열흘 동안 뒤졌으나 만나지 못했다. 윤생이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홍기가 서학동(西學洞)에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라 바로 그 사촌 형제의 집으로 거기다 처자를 맡겨 두었습디다. 아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저의 부친은 한 해에 대략 서너 번 찾아올 뿐이지요. 부친의 친구 분이 체부동(體府洞)에 살고 있는데 그분은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는 김 봉사(金奉事)라 하더군요. 누각동(樓閣洞) 김 첨지(金僉知)는 바둑을 좋아하고, 그 뒷집 이 만호(李萬戶)는 거문고를 좋아하고, 삼청동(三淸洞) 사는 이 만호는 손님을 좋아하고, 미원동(美垣洞) 사는 서 초관(徐哨官)과 모교(毛橋) 사는 장 첨사(張僉使)와 사복천(司僕川) 가에 사는 지 승(池丞)은 모두 손님을 좋아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이문안〔里門內〕 조 봉사(趙奉事)라는 분도 역시 부친의 친구 분인데 그 집엔 이름난 화초가 가득 심겨져 있고, 계동(桂洞) 유 판관(劉判官)은 기서(奇書)와 고검(古劍)을 가지고 있어, 부친이 늘 그분들 집에서 놀며 지내고 있으니, 그대가 만나 뵙고 싶으면 이 몇 집을 찾아보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집을 다니며 일일이 물어보았으나 어느 집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저물녘에 한 집에 들렀더니, 주인은 거문고를 타고 있고 두 손은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허연 머리에 관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는 김홍기를 만났구나 생각하고 한참 동안 서서 기다렸습니다. 거문고 가락이 끝나 가기에 나아가, ‘어느 분이 김 장인(金丈人 장인은 노인에 대한 경칭이다. )이신지 감히 여쭙습니다.’ 했지요. 주인이 거문고를 밀쳐 놓고 대답하기를, ‘좌중에 김씨 성 가진 사람은 없소. 그대는 왜 묻는가?’ 하기에, ‘저는 목욕재계하고서 감히 찾아와 뵙는 것이오니 노인께서는 숨기지 마소서.’ 하였더니, 주인이 웃으며, ‘그대가 아마 김홍기를 찾는가 보오. 홍기는 오지 않았소.’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오시는지 감히 여쭙습니다.’ 하였더니, ‘홍기란 사람은 묵어도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놀아도 일정한 곳이 없으며, 와도 온다고 예고하지 않고 가도 다시 오겠다는 약조를 하지 않으며, 하루에 두세 번 올 때도 있는 반면 안 올 때는 해가 지나도 오지 않소. 듣자니 홍기가 창동(倉洞)이나 회현방(會賢坊)에 주로 있고, 또 동관(董關)ㆍ배오개ㆍ구리개ㆍ자수교(慈壽橋)ㆍ사동(社洞)ㆍ장동(壯洞)ㆍ대릉(大陵)ㆍ소릉(小陵) 등지에도 오락가락하며 놀고 자곤 한다는데, 내가 그 주인의 이름은 거의 다 모르고 유독 창동만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서 물어보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그가 오지 않은 것이 벌써 두어 달 되었소. 내 들으니 장창교(長暢橋)에 사는 임 동지(林同知)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홍기와 더불어 술 겨루기를 한다는데, 지금 임씨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집을 찾아갔더니, 임 동지라는 이는 나이 80여 세여서 자못 귀가 먹었는데, 하는 말이, ‘쯧쯧, 어젯밤에 나와 술을 잔뜩 마시고 오늘 아침에 취기가 남은 채로 강릉(江陵)에 간다고 떠났소.’ 하였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있다 묻기를, ‘김홍기란 이에게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하니,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단지 밥 먹는 것을 못 보았소.’ 하였고, ‘생김생김이 어떠합니까?’ 하였더니, ‘키는 7척이 넘고 몸집은 여위고 수염이 좋으며, 눈동자는 파랗고 귀는 길고 누렇지요.’ 하였으며, ‘술은 얼마나 마시오?’ 하였더니,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데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소. 예전에 취하여 길에 누워버린 적이 있었는데, 포리(捕吏)가 잡아다가 이레 동안 구속했으나 그 술이 깨지 않으므로 마침내 놓아주었다오.’ 하였습니다. ‘말할 때는 어떱습디까?’ 하였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앉아서 졸고 있다가, 그 말이 끝나면 계속해서 웃기만 한다오.’ 하였으며, ‘몸가짐은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조용한 품은 참선(參禪)하는 중 같고, 꾸밀 줄 모르기는 수절하는 과부 같았지요.’ 하였습니다.”
나는 한때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나 의심을 했었다. 그러나 신생 역시 수십 집을 찾아다녔어도 다 못 만났고, 그의 말도 윤생과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홍기는 나이가 백여 살이고, 더불어 노는 사람들도 모두 노인이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홍기가 나이 열아홉에 장가들어 곧바로 아들을 낳았고 지금 그 아들이 겨우 스물 전후이니, 홍기의 나이 지금 쉰 남짓쯤 될 것이다.”
하였으며, 어떤 이는
“김 신선이 지리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벼랑에서 떨어져서 돌아오지 못한 지 지금 하마 수십 년이 되었다.”
하고, 어떤 이는
“지금도 컴컴한 바위굴에 번쩍번쩍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게 바로 노인의 눈빛이다. 산골짜기에서 이따금 기지개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홍기는 단지 술을 잘 마실 뿐이요, 딴 방술(方術)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직 그 이름을 빌려서 행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동자 복(福)을 시켜서 가서 찾아보라 했으나 끝내 만나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때는 계미년(1763, 영조 39)이었다.
그 이듬해 가을에 나는 동으로 바닷가를 여행하다가 저녁나절 단발령(斷髮嶺)에 올라서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그 봉우리가 만이천 개나 된다고 하는데 흰빛을 띠고 있었다. 산에 들어가 보니 단풍나무가 많아서 한창 탈 듯이 붉었으며, 싸리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예장(豫章)나무는 다 서리를 맞아 노랗고, 삼나무, 노송나무는 더욱 푸르르며, 사철나무가 특히나 많았다. 산중의 갖가지 기이한 나무들은 다 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둘러보고 즐거워했다. 가마를 멘 중에게 묻기를,
“이 산중에 도승이 있느냐? 있다면 그 도승과 더불어 놀 수 있느냐?”
하니,
“그런 중은 없고, 선암(船菴)에 벽곡(辟穀)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소. 누구는 말하기를 영남 선비라고 하는데, 꼭 알 수는 없습니다. 선암은 길이 험하여 당도하는 자가 없습니다.”
했다. 내가 밤에 장안사(長安寺)에 앉아서 여러 중들에게 물으니, 모두 처음의 대답과 같았으며, 벽곡하는 자가 100일을 채우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지금 거의 90일 남짓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몹시 기뻐서 ‘아마 그 사람이 선인(仙人)인가 보다.’ 생각하고 당장에 밤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그 이튿날 아침을 기다려서 진주담(眞珠潭) 아래에 앉아 같이 갈 사람을 기다렸다. 거기서 한참 동안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모두 약조를 어기고 오지 않았다. 게다가 관찰사가 군읍(郡邑)을 순행하다가 마침내 산에 들어와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쉬고 있었으므로, 각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모여들어 잔치를 벌이고 음식과 거마(車馬)를 제공했으며, 매양 구경 나갈 때는 따라다니는 중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선암은 길이 끊기고 험준하여 도저히 혼자 도달할 수는 없으므로 영원(靈源)과 백탑(白塔) 사이를 스스로 오가며 애만 태운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날이 오랫동안 비가 내려 산중에 엿새 동안을 묵고서야 선암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선암은 수미봉(須彌峯) 아래에 있었으므로 내원통(內圓通)으로부터 20여 리를 들어갔는데, 큰 바위가 깎아질러 천 길이나 되었으며 길이 끊어질 때마다 쇠줄을 부여잡고 공중에 매달려서 가야만 했다. 당도하고 보니 뜨락은 텅 비어 우는 새 한 마리도 없고, 탑(榻) 위에는 조그마한 구리부처가 놓여 있고 신 두 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 이리저리 서성이며 우두커니 바라만 보다가, 마침내 암벽 아래에다 이름을 써 놓고 탄식하며 떠나왔다. 그런데 거기에는 노상 구름 기운이 감돌고 바람이 쓸쓸하게 불었다.
어떤 책에는 “신선〔仙〕이란 산사람〔山人〕을 의미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책에는 “ ‘산에 들어가 있는 사람〔入山〕’을 신선〔屳〕이라고 한다.” 하기도 한다. 또한 신선〔僊〕이란 너울너울〔僊僊〕 가볍게 날아오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벽곡하는 사람이 꼭 신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뜻을 얻지 못해 울적하게 살다 간 사람일 것이다.
[주-D001] 홍기(弘基) : 김홍기는 당시의 실존 인물로,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권3에는 ‘金洪器’로 소개되어 있다.[주-D002] 윤생(尹生)과 신생(申生) : ‘광문전 뒤에 쓰다〔書廣文傳後〕’에서 연암은 예전부터 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에게 여염에서 일어난 얘깃거리가 될 만한 일들을 물었다고 했는데, 윤생과 신생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던 듯하다.[주-D003] 서학동(西學洞) : 한양의 사학(四學)의 하나인 서학(西學)이 있던 동네로, 현재 태평로 1가 조선일보사 부근이다.[주-D004] 누각동(樓閣洞) : 누각골이라고도 한다.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體府洞)에 걸쳐 있었던 마을이다. 서리(胥吏)들의 거주지로 인왕산 아래 누각이 있었으므로 누각동이라고 했다고 한다.[주-D005] 미원동(美垣洞) : 미동(美洞)을 가리키는 듯하다. 미동은 현재 을지로 1가 소공동 북쪽에 해당한다.[주-D006] 서 초관(徐哨官) : 초관(哨官)은 군대의 편제인 초(哨)의 우두머리로 종 9 품의 벼슬이다.[주-D007] 모교(毛橋) : 청계천에 놓인 다리의 하나로, 모전교(毛廛橋)라고도 한다. 현재의 무교동과 서린동의 사거리 지점에 있었다.[주-D008] 사복천(司僕川) : 한양 중부 수진방(壽進坊 현재 수송동 일대)에 있던 사복시(司僕寺) 앞의 계천(溪川)이다.[주-D009] 지 승(池丞) : 승(丞)은 서(署)ㆍ시(寺)ㆍ감(監) 등 중앙의 각 관청에 있었던, 종 5 품에서 종 9 품에 걸친 벼슬이다.[주-D010] 이문안〔里門內〕 : 한양 중부에 있던 동네로, 이문동(里門洞)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종로구 공평동 삼성타워(예전 화신백화점 자리) 뒤편에서 태화빌딩(옛날 順化宮과 태화관 자리)에 이르는 골목 일대에 해당한다.[주-D011] 창동(倉洞) : 남대문 안 선혜청(宣惠廳)의 창고 부근에 있었던 동네로, 현재 남대문 시장이 있는 남창동 일대이다.[주-D012] 동관(董關) …… 소릉(小陵) : 동관은 미상(未詳)이다. 배오개는 현재 종로 4가 인의동에 있었던 고개이고, 구리개는 현재 을지로 입구, 롯데백화점 맞은편에 있었던 고개이다. 자수교는 현재 옥인동과 효자동ㆍ궁정동이 만나는 곳에 있던 다리로, 조선 시대에 후궁들의 거처로 쓰인 자수궁(慈壽宮)이 있었던 곳이어서 자수궁교라고도 하였다. 사동은 사직단(社稷壇 : 현재 사직공원) 부근의 동네이다. 장동은 장의동(壯義洞)이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효자동ㆍ궁정동ㆍ청운동 일대이다. 대릉과 소릉은 각각 대정동(大貞洞)과 소정동(小貞洞)을 가리킨다. 원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중구 정동 일대이다.[주-D013] 장창교(長暢橋) :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의 하나로 한양 중부 장통방(長通坊 : 현재 장교동, 관철동 일대)에 있었다. 장창교(長倉橋), 장통교(長通橋), 장교(長橋)라고도 불렸다.[주-D014] 홍기가 …… 것이다 : 약간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작품의 서두에서는 김홍기가 16세에 장가들었다고 하였다. 설령 그가 열아홉에 장가들었다고 해도 그때 낳은 아들이 스무 살 전후가 되었다면 홍기의 현재 나이는 마흔 살쯤이라야 한다.[주-D015] 그 이듬해 …… 바라보았다 : 박종채의 《과정록》에는 연암이 금강산을 유람한 것은 2년 뒤인 을유년(1765, 영조 41) 가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주-D016] 선암(船菴) : 내금강(內金剛) 표훈사(表訓寺)에 딸린 암자이다.[주-D017] 진주담(眞珠潭) : 금강산 입구 만폭동(萬瀑洞)의 팔담(八潭) 중 가장 장대한 명승지이다.[주-D018] 영원(靈源)과 백탑(白塔) : 골짜기의 이름으로, 내금강 명경대(明鏡臺) 구역에 있는 명승지들이다.[주-D019] 신 …… 뿐이었다 : 신선이 득도하여 승천(昇天)한 증거로 흔히 신발만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든다.[주-D020] 나는 : 원문은 ‘余’인데, 이본에는 ‘除’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자면 ‘除’는 섬돌의 뜻으로 앞 구에 연결되어 “신 두 짝만 섬돌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로 해석된다.[주-D021] 어떤 …… 의미한다 : 《석명(釋名)》이나 《자휘(字彙)》 등의 사전류에서 ‘仙’ 자를 풀이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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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차기(柳川箚記)
유천차기(柳川箚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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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겸(韓浚謙) 찬(撰)
이천선생((伊川先生)이 〈주식도설(主式圖說)〉에 이르기를,
“증직(贈職)이 더해지거나 대(代)가 바뀌면, 신주를 붓으로 지우고 고쳐 쓰되, 분면(粉面)만 고치고 함중(陷中)은 고치지 않는다.”
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고추증조(告追贈條)에 이르기를,
“함중은 고치지 않는다.”
하였다. 증직이 가증됨은 곧 죽은 후 한때의 증전(贈典)이므로 이미 합친 신주를 함증까지 전부 고칠 것은 없다. 대가 바뀌는 것도 함중에 쓴 것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분면만 고치고 함중은 고치지 않으니, 이 또한 기필하지 않아도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벼슬을 하다가, 삭직을 당하고 죽었다 하면, 그 처음 함중에는 당시의 칭호를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후에 은전이 베풀어져서 옛날의 관작이 회복되었다면 처음은 어디까지나 변례(變禮)였기 때문에, 마땅히 함중까지 모두 고쳐서 평생에 부르던 칭호를 회복해 주어야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천과 주자의 학설에 얽매어 분면만 고치고 함중은 고치지 아니하니, 심한 착각인 것이다.
이 일은 증직이 가중되고 대가 바뀐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데 오히려 그 문구를 적용시켜 당연히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이 불행해서 억울한 죄명을 썼을 경우, 백 대가 지나가도 신원(伸寃)되지 않을 것이니, 과연 옳겠는가? 세상에는 이렇게 될 염려가 현인과 군자들에게 많으므로 나는 이 점을 두려워해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장사 지내기 전에 증직이 내린다면 함중에 쓰지 않을 수 없으며, 장사 지낸 후에 삭직이 된다면 구태여 함중까지 추개(追改)할 것은 없으리라고 본다.
세종 3년 영락(永樂) 신축(1421)에 예조가 아뢰기를,
“송(宋) 소희(紹熙) 5년에 황명으로 태묘(太廟)의 서쪽에 사조전(四祖殿)을 세워 조천(祧遷)한 희조(僖祖)ㆍ순조(順祖)ㆍ익조(翼祖)ㆍ선조(宣祖)의 네 신주를 받들고 해마다 예관(禮官)이 제사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목조 대왕(穆祖大王)도 조천해야 하오니 바라옵건대, 이 예에 의하여 종묘의 서쪽에 별묘(別廟)를 짓고 그 이름을 영녕전(永寧殿)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전교를 받들어 별묘를 세웠다. 이것이 영녕전을 건립하게 된 처음의 일인 것이다.
이때에 공정 대왕(恭靖大王)을 태묘에 모시게 되니 오실(五室)이 넘게 되어 장차 목조(穆祖)를 조천하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계(啓)가 있게 된 것이다. 영락(永樂) 갑진(세종 6년)에 태종을 종묘에 모시는데, 소목(昭穆)을 공정(恭靖)과 함께 하여 한 위(位)게 같이 모시는 법을 썼기 때문에 익조(翼祖)를 조천하지 않았다가,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 비로소 익조를 조천하였으며, 노산조(魯山朝) 때에 이르러 도조(度祖)를 조천하고, 성종(成宗)이 위를 이은 뒤에 환조(桓祖)를 조천하여 사조(四祖)를 모두 조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태조가 비로소 태실(太室)에 거하고, 공정ㆍ태종 2위(位)와 세종 1위와 문종ㆍ세조 2위와 예종ㆍ덕종 2위를 모시게 되었는데, 종묘를 처음 건립한 것이 7실(室) 뿐이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서는 남아 있는 실(室)이 없었다. 그리하여 성종을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조정에서는 1실을 증축하려 했으나 마침내 못하고, 문종을 서쪽 협실(夾室)로 옮긴 뒤에 성종을 제 7실에 모시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의신(議臣)과 예관(禮官)들이 결정지은 것이었다. 삼가 참고해 조건대, 성종조에게 태종이 고조(高祖)가 되니 정종 역시 조천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마땅히 8실이 되어야 하는데 당시에 실(室)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마땅히 재고 되어야 한다.
중종(中宗)을 종묘에 모시게 되어서는 예관 윤개(尹漑) 등이 이 문종을 협실(夾室)에 모신 일이 실례임을 알고 청하여 4실을 증축한 다음 문종을 받들어다가 도로 모셨다. 그래서 중종이 제 9실에 들게 되고 인종(仁宗)이 제 10실에 들게 되었으며, 명종(明宗)을 종묘에 모시려 할 때에 문종이 조천되었고, 선조(宣祖)를 종묘에 모시려 할 때에 예종과 덕종이 조천되어 종묘의 실(室)이 부족한 염려는 없었다. 태조가 건국한 뒤에 종묘를 세우고 또 계성전(啓聖殿)을 세워서 선왕을 받들었다. 그 뒤 태조가 승하하니, 그 혼전(魂殿)을 인소전(仁昭殿)이라 부르다가 다시 문소전(文昭殿)이라 하였고, 태종의 혼전은 광효전(廣孝殿)이라 하여, 각기 도성 안에 있었는데, 그 뒤 세종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궁성 안에다 터를 잡아 침전(寢殿)을 합쳐서 건립하고 그대로 문소전이라 불렀다. 선덕(宣德) 계축(세종 15년) 5월에 먼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양전(兩殿)에 올리고 의물(儀物)을 갖춘 다음 신위판을 만들어서 채여(彩輿)에 모셨다. 그리고 상이 광화문(光化門) 밖에 나가 지영(祗迎)하여 태조와 태종의 신위판을 차례로 새 침전에 모셨다. 그 다음 상은 친히 안신제(安神祭)를 지내고 궁중으로 돌아와 하례를 받았으며 중외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역대의 제왕이 종묘를 세워서, 예를 태고와 같이 하는 것은 신으로 모시려는 것이고, 또 원묘(原廟)를 지어서 섬기기기를 생시와 같이 하는 것은 친하게 하려는 것이다. 원묘의 설치는 역대마다 같지가 않다. 그러나 송 나라의 관신궁(觀神宮)과 어안궁(御安宮)을 경령궁(景靈宮)에 합친 것은 정례(情禮)에 꼭 알맞은 일이었다. 지금 우리의 태조와 태종의 원묘가 따로따로 있는 것은 옛날 제도에 합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후세의 자손들이 각각 원묘를 세울 것이므로 백세 뒤엔 신묘(神廟)가 많아서 그 번거로움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예관을 명하여 1대의 법규를 창립하여 만세의 법전을 삼게 하노라.” 위는《동각잡기(東閣雜記)》에 보임.
이로써 보건대, 태조와 태종의 원묘가 각각 따로 있었는데, 세종대왕이 성스러운 지혜를 처음 내어 비로소 문소전을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침(後寢)ㆍ전전(前殿)ㆍ오실(五室)ㆍ소목(昭穆)의 제도가 아주 잘 완비되었는데도 공정왕은 참여되지 못하였으며, 또 태조가 건국한 처음에 계성전을 지어서 선왕을 받들었다고 하니, 이 계성전도 원묘와 같은 것이다. 신전(新殿)에 봉안한 분이 태조와 태종 양위 뿐이라면 오실(五室)의 제도에도 차지 못하는데, 사조(四祖) 가운데서 도조(度祖)ㆍ환조(桓祖)는 고조와 증조인데도 같이 모셨다는 말을 들을 수 없으니, 그것은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공정이 문소전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문종 역시 이러한 이유였으리라.
성종 때에 이르러 덕종을 추봉(追封)해서 종묘에 모셨으나, 예종을 이미 문소전에 모셨으므로 덕종을 별전(別殿)에 모시고 연은전(延恩殿)이라 불렀으니, 연은전의 칭호가 이때에 시작된 것이다. 공정과 문종이 모두 문소전에 들지를 못했는데 덕종만을 위하여 연은전을 별도로 세운 것은, 아마도 생부이기 때문에 융숭함을 가한 것인가 한다.
정미년(1547, 명종 2)에 이르러 인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장차 문소전에 모시려 하는데 세조를 조천해야 하므로, 2품 참의 이상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인종을 모시기 위해서는 세조를 조천해야 한다고 했다.
상은 발[簾] 안에서 문정왕후가 섭정하고 있었다 답하기를,
“세조께서는 지금 사조(四祖)의 주(主)일 뿐 아니라, 공로가 또한 막대하여 조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연은전에 별도로 인종을 모시려 하는데 그게 어떠하오?”
하였다. 그러자 영부사 홍언필(洪彦弼) 등이 그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네 번이나 계를 올려, 비로소 윤허를 하였는데, 수일이 지나 다시 대신 등을 불러서 세조를 조천할 수 없으니, 인종을 연은전에 모시도록 하라는 뜻으로 효유하였다. 이 말에 윤인경(尹仁鏡) 등은 곧 회계(回啓)하기를,
“상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하였다. 그러자 대사헌 안현(安玹)ㆍ대사간 이명(李蓂)ㆍ부제학 주세붕(周世鵬) 등이 궐문에 엎드려 이를 논하였고, 태학생 정거(鄭琚) 등이 소를 올려 논쟁을 하였으나, 결국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그뒤 선조 초년에, 명종을 문소전에 모실 때에 인종도 연은전에 같이 모셨다. 이 때문에 인종과 명종 2대가 1실에 있게 된 것이니, 그 상세한 것은 《퇴계집(退溪集)》 안에 있다.
만력(萬曆) 신사년(1501, 선조 14) 11월에 신덕왕후(神德王后)에 대한 의논이 비로소 일어났다. 당초 신덕왕후 강씨(康氏)가 우리 태조를 도와서 집안을 변화시켜 국가를 세웠으므로 중전의 자리에 올라 천조(天朝)의 고명(誥命)까지 받았으며, 돌아간 뒤에도 시호를 신덕(神德), 능호를 정능(貞陵)이라 하는 등 신의왕후(神懿王后)와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는데, 태조가 승하하니 신의왕후만을 종묘에 모시고, 신덕왕후에 대하여는 모든 전례(典禮)를 전부 폐하여 거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월이 오래되자, 산능(山陵)의 소재마저 알지 못한 것이 2백 년이나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덕원(德源)에 사는 강순일(康純一)이란 자가 어가(御駕) 앞에서 소장을 올려 스스로 말하기를,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후손으로서 현재 군역(軍役)에 책정되어 있으니, 국묘 봉사(國墓奉祀)하는 사람들의 예에 의하여 개정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였다. 아마 강윤성은 곧 신덕왕후의 아버지이리라. 그때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조(四祖)의 왕후들의 부모 산소는 관에서 한 사람씩 책정해서 국묘 봉사(國墓奉祀)라는 명칭으로 군역을 면제해 준 예가 있었다. 그러므로 강순일이 이러한 소장을 내게 된 것이다. 이에 율곡 이공(李公)이 앞장서 말하기를,
“신덕왕후는 응당 종묘에 배향해야 할 분으로서 까닭없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윤기(倫紀)에 관계되는 것이니, 마땅히 존숭하는 일을 행하여야 한다.”
하였다. 조정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어 비로소 예관을 명하여 먼저 능침(陵寢)을 찾기로 하였는데, 문관 이창(李昌)이라는 자가 신덕왕후의 외손으로서 조정에 벼슬하고 있어서, 해조(該曹)가 계청해서 합동으로 능소가 있을 만한 곳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차산(峩嵯山) 안팎을 두루 도아 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는데, 마침 《변춘정집(卞春亭集)》 중에 실려 있는 정릉 이조 축문(貞陵移厝祝文)에서 서울 동북쪽에 능이 있다는 글귀를 보았다. 이에 따라 물색하여 산 아래 마을에서 찾은 결과, 과연 국장(國葬)으로 지낸 능실(陵室)이 산골짜기에 몹시 퇴폐되어 있었다. 조정의 의논이 처음에는 종묘에 신의왕후의 예와 똑같이 모시자고 하였는데 또 이론(異論)이 생겼다. 이는 예경(禮經)의 말을 인용하여 ‘제후(諸侯)는 두 번 장가들 수 없다.’는 말과 ‘예에는 두 적실(嫡室)을 둘 수 없다.’는 등의 말을 듣고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의논이 서로 엇갈려서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자 조정의 의논은 또 하책(下策)이 나왔는데, 그것은 다만 제각(祭閣)의 건립과 관원의 설치만을 딴 능침(陵寢)의 제도와 똑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의견마저 시행되지 못하고, 다만 조천한 신묘(神廟)의 예에 따라서 매년 한식(寒食)날 제사를 올리는데 그쳤다.
신의왕후와 신덕왕후는 태조가 잠저(潛邸)에 계실 때 서울과 지방의 두 아내였으므로 신의왕후가 작고한 뒤에 신덕왕후가 계실(繼室)이 되었던 것이다. 정총(鄭摠)이 지은 정릉비(定陵碑)의 서문을 참고하더라도 신덕왕후에 대해서 역대로 나쁘게 말한 것이 없었음을 볼 수 있으며,〈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도 또한 볼 수 있다. 본조의 가법(家法)이 이미 정한 바 있어 열성조의 전후비(前後妃)가 모두 종묘에 배향되었으니, ‘제후는 두 적실을 둘 수 없다.’는 설을 태조에게만 적용시키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의 한때의 의논이 경서를 들이대고 예를 인용하면서까지 신덕왕후를 깍아내리고 말았으니,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강순일이 당초 하소연한 것은 다만 신역(身役)을 면제받기 위해서였는데, 사론(士論)이 분연히 일어났다. 이로 인해서 천도가 좋게 돌아와 하늘이 은연중에 복을 내리는 일대 기회가 될가 하였더니, 발단만 하고 도로 그쳐서 논쟁을 벌인 지 3년 만에 겨우 한식날 제사 한 번 지내게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하겠다.
을해년(1575, 선조 8),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초상이 이미 졸곡(卒哭)을 지나자, 지평 민순(閔純)이 상소하기를,
“송효종(宋孝宗)의 백모(白帽)ㆍ백대(白帶)로 삼년상을 마친 제도를 채택하여 쓰소서.”
라고 했는데, 중론은, 옛날 제도를 변경하는 것이라고 하여 어렵게 여겼다. 그러자 선조(宣祖)는 정승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좌상 박순(朴淳)과 우상 노수신(盧守愼)이 의논드리기를,
“삼가 살펴 보건대, 정사를 볼 때 입는 의복이 이미 흰색인데, 갓과 띠만이 검은 것은 비록 권제(權制)라고 하지만 바야흐로 최상(衰喪) 중에 있어서는 참으로 온당치 못한 까닭에 검은 빛을 흰빛으로 고치려 하는 것이니, 이것이 대단한 경장(更張)은 아니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동릉 이실(同陵異室)의 제도는 가장 중대한 것인데도 오히려 준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석실(石室)과 비(碑)를 세우는 일들 또한 중도에서 폐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립(白笠)을 흑립(黑笠)으로 변경한 것은 상례(喪禮)에 위배되는 것인데도 여러 대를 시행하여 왔습니다. 하물며 이 흑색을 백색으로 변경하는 것은 참으로 상제(喪制)에 합당한 것이온데, ‘경솔하게 변경할 수 없다.’고 말하니, 신 등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도라는 것은 오래되어야 갖춰지는 것으로 역대가 모두 그러했습니다. 송 나라 효종(孝宗)은 흰 베옷을 입고 정사를 보았으며, 명 나라 인종(仁宗) 역시 흰 최질(衰絰)을 띠고 조회에 임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군신의 논의에 따르지 않고, 홀로 옛날의 법규 밖의 것을 단행하였으니, 변경을 하였다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의논을 드리는 것은 신하의 직분이오나 제도를 확정하는 것은 임금의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상의 의사에게 결정되어야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그 의견을 옳게 여겨 단행하였으니 참으로 천년 만에 단 한 번 있는 시기라고 하겠다. 그 제도는 상의 익선관(翼善冠)은 흰 생초로 싸고, 각(角)도 같이 쌌으며, 오서대(烏犀帶)는 흰 명주로 쌌다. 종친과 문무 백관의 흑모(黑帽)는 흰 모시베로 싸고, 후수(後垂)도 같았으며, 오각대(烏角帶)는 흰 무명으로 쌌다. 녹을 받지 못하는 관원들의 모자와 띠는 백관과 같았다. 그런데 그 뒤 중론이 많이 불편하다고 하여, 정축년(1577, 선조 10)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초상에는 옛 제도를 따랐다.
갑술년(1574, 선조 7) 여름에, 송도(松都)의 국학(國學)에 모셨던 선성(先聖)과 십철(十哲)의 소상(塑像)을 매안(埋安)하고, 대신 위판(位板)으로 모시라고 명령하였다.
당초 고려 충렬왕 29년(1303) 계묘 윤5월에 국학 학정(學正) 김문정(金文鼎)이 선성ㆍ십철의 소상과 문묘의 제기를 가지고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이것은, 대개 찬성사(贊成事) 안유(安裕)가 건의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또 남은 재물을 김문정에게 주어 소상을 구입해다가 다시 국학을 세워 소상을 봉안하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의 칠십자(七十子)는 위판으로 모시게 했던 것이다. 충선왕(忠宣王)이 국학을 성균관(成均館)이라고 고쳤으며, 공민왕(恭愍王) 16년 7월에는 문선왕(文宣王)의 소상을 숭문관(崇文館)에 옮기고 문무 백관이 관대(冠帶)를 하고서 시위(侍衛)하였다. 그후 고려 왕조가 끝나기까지 90년동안 홍건적(紅巾賊)의 난리도 겪었으나 역시 병화를 모면하였다. 태조가 혁명한 다음,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기고 개성을 유수(留守)가 관장하는 부(府)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성균관이라고 부르던 것을 개성부 사람들은 학당(學堂)이라고 고쳐 불렀으나 묘의 모양은 여전히 고려 시대의 제도를 한결같이 따랐는데, 공정(恭靖)과 태종이 곧 본 위치로 환원시켜서 국학으로 보아 왔으며, 성종ㆍ중중께서도 일찍이 거둥해서 공경히 성묘를 배알하였다. 그 후에도 대대로 높이고 중히 여겨 유상(遺像)이 엄연하게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소상은 부처와 같아서 명궁(明宮)에 제사 시내는 것은 합당하지가 않다.’는 말이 있어서, 수의하여 위판으로 바꾸고, 소상을 모지(某地)에 매안(埋安)하게 하였던 것이다. 개성부의 선비와 노인들이 소를 올려 중지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 매안할 적에 부관(府官)이 소상을 가리는 물건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여, 일에 임해서 전도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 사실이 상에게 들리자 파직을 명하고 죄를 주었다.
명종의 초상에 공의전(恭懿殿)이 입을 복제가 의심되었다. 퇴계는 말하기를,
“제후의 전례는 참으로 상고할 수가 없다. 다만《의례경전(儀禮經傳)》의〈군위신복도(君爲臣服圖)〉와 〈천자제후절방기복도(天子諸侯絶傍朞服圖)〉를 보고 미루어 생각하면, 제후가 비록 형제의 기복을 끊고 입지 않지만, 아우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에는 반드시 기복을 입어야 한다. 그것은 적손(嫡孫)ㆍ적증손(嫡曾孫)ㆍ적현손(嫡玄孫)이 모두 기복을 입는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아우로 아들을 삼지 않아서 형제의 명칭이 있는 이상, 수숙(嫂叔)의 명칭 역시 말살될 수는 없다. 옛날의 예법에는 수숙의 사이는 복이 없다. 그러므로 옛날의 법식대로 한다면 복을 입지 않아야 할 듯한데, 만약 수숙의 사이라도 왕위를 계승한 의리가 중하여 복을 입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가례(家禮)》의 소공(小功) 복을 입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
하였다. 당시는 퇴계선생의 말을 채택하여 공의전이 명종에게 복이 없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다. 이때 기고봉(奇高峯)이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관서(關西)에 나가 있었는데, 형제가 서로 계승하였을 때 서로 입는 복과 후부인(後夫人) 복제 관계를 하나하나 들어서 퇴계 선생에게 서신으로 질정을 하였다. 그 서신은 대략 다음과 같다.
“송태종이 태조를 계승하여 비록 역월제(易月制)를 시행했으나 실은 참최(斬衰) 3년을 입은 것이며, 휘종(徽宗)이 철종(哲宗)을 위하여 중한 최복을 입었고, 고종(高宗)이 흠종(欽宗)을 위하여 참최 삼년의 복을 입었으니, 이들은 형제가 서로 계승하면서 복은 왕위를 계승하는 복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동진(東晉)의 강제(康帝)가 성제 두황후(成帝杜皇后)를 위하여 1년이 넘도록 소복을 하였으며, 송 고종이 융우 맹태후(隆祐孟太后)를 위하여 중한 복을 입었으니, 이들은 형수와 숙모를 위하여 중복을 입은 것입니다. 《의례(儀禮)》 상복편(喪服篇)을 상고하면,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참최 삼년의 복을 입고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 자최 삼년복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동진의 효무제 태후(孝武帝太后) 이씨(李氏)는 효무제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었으며, 송무제(宋武帝) 소태후(蕭太后)도 역시 삼년복을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태후가 사군(嗣君)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것은 비록 후세라 해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형제가 서로 계승하는데, 이미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중하다 해서 부자의 사이에 입어야 할 복을 입었다면, 형수가 시숙을 위해 하는 것도 또한 어머니가 아들 보는 것 같이 해서 마땅히 중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예기(禮記)》상복소기(喪服小記)를 상고하면, ‘제후와 더불어 형제가 된 자는 참최를 입는다.’ 하였고, 그 소(疏)에, ‘제후와 오속(五屬) 관계가 있는 친족은 참최를 입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였습니다. 어찌 서로 더불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도리어 복이 없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의례(儀禮)》 상복편(喪服篇)을 상고하면, ‘대부와 그 부인이 종자(宗子)의 어머니와 아내를 위해서 참최 3월 복을 입는다.’ 하였으니, 그 사이에 반드시 수숙을 위하는 것도 있을 것이므로 예문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대개 종자를 위해서 복을 입는 것은 조상을 높이고 친족을 공경하는 의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미루어 그 어머니와 아내에게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의(義)가 있는 곳에는 예(禮)도 때로는 변하는 것이므로, 수숙 사이가 본래는 복이 없지만, 종자의 어머니와 아내를 위해서 복을 입는 것이니, 형제가 서로 계승할 때에는 수숙으로써 논란할 수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명종이 이미 인종을 위하여 왕위를 계승하는 복을 입었으니, 공의전도 마땅히 명종을 위하여,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는 것처럼 자최 3년을 입어야 할 것은 너무도 분명한데, 어찌 꼭 복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어떤 이가 힐난하기를, ‘명종이 인종을 위하여 입은 복은 신하가 임금을 위해서 입은 복이고, 왕위를 계승하는 복은 아니므로 공의전이 명종을 위하여 입는 복도 수숙의 복을 입어야 할 것이지 어찌 모자의 복을 입는가.’ 라고 합니다. 그래서 답하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다. 왕위를 계승하는 복은 부자간의 복이므로 이는 정복(正服)이며, 군신간에 입는 복은 의복(義服)이므로 정복에 다음 간다. 이 때문에 전대부터 왕위를 전승할 즈음에는 모두 정복으로 입게 하였으니, 의복이 그 사이에 개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주자가, 영종(英宗)이 즉위하고 적손으로서 승중복(承重服)을 입게 되었을 적에, 어찌 신하가 임금을 위해서 입는 복제로 입으라고 잘라 말하지 않고서, 꼭 정강성(鄭康成)의 말을 들어서 증험을 삼았겠는가. 이것은 변론을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퇴계는 어떤 사람에게 보내는 답장에 이르기를,
“수숙 사이에 복이 없다고 말한 것은, 그때《의례경전(儀禮經傳)》에서 임금이 신하를 위하여 입는 복에 관한 몇 가지 도설(圖說)만을 보고서, 그 유로 미루어 생각할 때 그럴 것이라고 여겼는데, 요사이 《통고(通考)》ㆍ《통전(通典)》 등의 책을 얻어 한가한 틈에 열람하여 보니, 역대로 말한 왕통을 계승하는 복제는 저 기고봉의 말과 같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에 지난날 경솔하게 한 책자만 믿고서 두루 열람해 보지도 않은 채 망령되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데 대해서 송구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문제는 기명언(寄明彦)의 글 가운데 아주 잘 변론되었으므로 마음에 감복하여 마지않습니다.”
하였다. 그 후 공의전의 초상에 선조도 역시 왕통을 계승하는 중한 복으로 자최(齊衰) 3년 복을 입었다.
기사년(1569, 선조 2) 봄에 덕흥군(德興君)을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추존하고 부인 정씨를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봉했다. 그리고 그 자손은 대군의 예에 의하여 습작(襲爵)하였으며, 4대가 지난 뒤에도 봉사(奉祀)하는 사람은 대대로 도정(都正)을 세습제로 주게 했다. 뿐만 아니라, 사시로 유사를 시켜 제사에 쓸 고기를 바치게 하고, 토지와 노복을 내려주어 제수를 장만하게 하고, 신주는 백세가 지나도 조천(祧遷)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덕흥군을 추존할 것을 아뢰니, 예문을 참고하고 널리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그리하여 정신(廷臣)들은 송 나라 복왕(濮王)ㆍ수왕(秀王)의 추존(追尊)한 전례를 인용하여 논의를 거듭해서 추존을 하게 되었다. 이때 퇴계도 마침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추존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올리려고 6조(條)를 갖추어 그 위아래에 논서(論叙)를 붙였으나 올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헌관(獻官)을 차출하는 것과 관에서 제물을 제공하는 하나의 절차를 가지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이리저리 헤아려 생각했는데, 그 대위는 이러했다.
“옛날에 이미 ‘사친(私親)을 강하(降下)하여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한 글이 있다. 또 사친의 사당은 본집에 두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몇 대가 지난 뒤엔 그 자손이 소목(昭穆)에 입참(入參)하지 않을 수 없으니, 헌관을 차출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형세에 구애되는 바가 있을 뿐 아니라, 또 한 사당 안에서 한 제사를 차리는데, 할아버지는 관가에서 제수를 장만하고 손자는 사가에서 장만할 수야 있겠는가. 《대전(大典)》에 왕후의 부모에게도 관가에서 재물을 주는 예가 있으나, 이와는 경우가 같지 않으니, 토지와 노복을 주어서 대대로 전해 가며 잘 보존하여, 나누어 쓰지 못하도록 하고, 사중(四仲)의 시제(時祭)에는 유사가 돼지 한 마리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가에서 장만하게 하여서 사친에게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의(義)에 맞게 해야 한다. 그러면 영구히 전해 갈 수 있고 폐단이 없을 것이니, 참으로 온당하다.”
하였다. 이전에 선조가 왕위를 이어받고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의 초상을 당해 장사지내려 할 때에, 상이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치르게 하였는데, 그 축문에 황백부(皇伯父)라 하고, 자칭은 고질(孤姪)이라 하였다. 고봉(高峯)이 편지로 질문을 하니, 퇴계가 말하기를,
“정이천(程伊川)이, 황백부(皇伯父)라고 한 말은 황제의 백부라는 말이고, 황고(皇考)를 이른 것은 아니다. 《송감(宋鑑)》에서 말한 ‘황종형 아무개의 아들이다.’라는 것과 ‘황백(皇伯)…….’고 한 것은 모두가 황제라는 황(皇) 자를 가리킨 것으로서, 황자(皇子)ㆍ황형(皇兄)ㆍ황질(皇姪)과 같은 유이다. 그런데 지금 황고의 황(皇) 자로 썼으니, 어찌 글 뜻과 크게 어긋나지 않겠는가. 더구나 황고의 황자는 방계(傍系)의 존속에게는 더욱 더 쓸 수가 없다. 인종이 주상에게 황백고(皇伯考)가 되는데, 백부(伯父)라는 칭호를 또 방계의 존속에게 다시 썼으니, 역시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리고 고질(孤姪)이라고 말한 것도 또한 근거할 만한 데가 없는 것 같다. 비록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근거로 글을 썼다 하더라도 마당히 고질자(孤姪子)라고 해야 하고, 고질이라고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뿐만 아니라, 치제(致祭)한 것도 생각하면 타당하지 못하다. 이때는 국상을 당한 지 얼마 안되어 종묘의 제사도 감히 지내지 못하는데, 어찌 사친을 위하여 제문을 짓고 제관을 보내서 제사를 지낼 수 있겠는가. 하물며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라 할지라도 대왕의 참최복을 입고서 경솔하게 사친의 제사에 참여했다는 것이 또한 예에 합당하다고 하겠는가. 비록 정리(情理)는 억제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정리로써 예를 폐하게 되면 앞으로 폐단을 바로잡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에 올릴 물품이나 넉넉히 주어서 그 사자(嗣子)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정축년(1577, 선조 10)에 이르러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삼년상이 끝나자, 선조는 대신을 불러서 정녕하고 간곡한 뜻으로 하유하고 사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옥당에서는 상차(上箚)하여 예문에 위배됨을 논했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원군(河原君)과 하릉군(下陵君)에게 추은(推恩)하여 모두 정1품으로 올리고, 안황(安滉)은 6품직을 주었으며, 정창서(鄭昌瑞)도 당상관으로 올렸다. 모두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여 마음대로 하지 않는 뜻은 보였지만 그래도 언관들은 몇 달 동안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무자년(1588, 선조 21) 6월. 대원군의 방에 불이 나서 모두 탔다. 선공감(繕工監)에게 명하여 옛제도와 똑같이 건립하게 하였더니, 다섯 달 만에 공사가 끝났다. 감독관과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공을 논하여 차등있게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의 묘소는 영월군(寧越君)에 있다. 정덕(正德) 병자년(1516, 중종 11)에 중종이 처음으로 승지 신상(申鏛)을 보내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뒤 오랫동안 폐하고 지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 9)에 이르러 선조가 헌관으로 행호군(行護軍) 유훈(柳塤)을 보내서 제사를 지내고, 신사년(1581, 선조 14) 여름엔 관찰사 정철(鄭澈)의 장계로 인하여 묘를 봉축하고 비석 세우기를 왕자의 묘에 하는 예와 같이 하고, 공사가 끝나던 날, 승지 이해수(李海壽)를 보내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가까운 고을에서 받아들이는 공물을 제수에 쓸 만큼 알맞게 공제해서 매년 한식날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후 참판 김늑(金玏)이 영월 군수로 부임하여 관찰사 정곤수(鄭崑壽)에게 청하여 묘 아래에 재실(齋室)ㆍ제주(祭廚)를 건립하는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시(歲時)로 제사를 올리니 여러 사람들이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지난날 매몰되었을 때와는 달랐다. 이에 앞서, 영월 군수 중에 폭사(暴死)한 자가 많았으므로, 세상에 전하기를, ‘흉한 지방’이라고 하였다. 대개 노산군이 작고한 뒤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무하고 소치는 것도 금하지 않았더니, 요괴(妖怪)한 일이 차마 말할 수 없게 일어났었다. 판서 박충원(朴忠元)이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 영월군수에 제수되었는데, 그는 부임하는 날 깨끗하게 제물을 차려 놓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왕실의 맏아들로 나이 어린 임금이셨는데 / 王室之冑幼沖之辟
때마침 비운을 만나서 궁벽한 고을로 피해 오셨네 / 適丁否運遜于僻邑
한 조각 푸른 산에 만고의 외로운 혼이시여 / 一片靑山萬古孤魂
바라오니 강림하시어 제향을 흠향하옵소서 / 庶幾降臨式歆苾芬
하였다. 그후로는 요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맨 처음 중종이 일찍이 경연에서 《예기(禮記)》를 강하다가 말이 진여공(秦厲公)에 미치자 강관 김굉(金硡)이 슬며시 연산군(燕山君)을 양자로 세울 뜻을 비쳤으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넌지시 깨우쳤다. 그러자, 상은 다른 대신들을 맞아다가 연산군과 노산군의 입후 문제에 대하여 가부를 논의하고, 또 홍문관과 예조에 명하여 널리 옛 제도를 상고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파기되고 말았다. 그후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상소하여, 노산군과 연산군을 입후할 것을 청하고 또, 미(嵋)의 죽음은 죄상이 명확하지 못하니, 뉘우치는 뜻을 보일 것을 말했다. 중종은 그 말을 아름답게 받아들여서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등을 불러 이약빙의 상소를 보이고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대사헌 유인숙(柳仁淑)ㆍ대사간 신거관(愼居寬) 등이 소장을 번갈아 올려서 말하기를,
“이약빙이 노산군과 연산군을 입후하기 위하여 이같은 사론(邪論)을 하게 된 것입니다. 미(嵋)의 죄는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는 것인데, 한무제(漢武帝)가 여태자(戾太子)를 죽인 고사를 이끌어다가 전하의 뉘우침을 바라고 있으니, 지극히 패려하옵니다. 청컨대, 나국(拿鞫)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홍문관이, ‘말을 구한 뒤에 말을 잘못했다 해서, 말한 사람에게 죄를 주면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된다.’고 차자를 올려 논쟁하므로, 이약빙은 곧 사면되었던 것이다. 노산군과 연산군을 위해서 입후(立後)하려는 것은 한 가지 일인데도, 앞뒤 조정의 논의가 이처럼 서로 달랐다.
[주-D001] 분면(粉面) : 신주(神主)는 밤나무에 검은 칠을 해서 두 쪽을 합쳐서 만드는데, 분면은 그 분을 바른 앞쪽을 가리킴. 분면에는 현고 모관 부군 신주(顯考某官府君神主)라 쓰고, 그 옆에 효자 모 봉사(孝子某奉祀)라 쓰는데, 즉 망인이 봉사하는 자의 누구이며 벼슬은 무엇까지 했는가를 밝힘.[주-D002] 함중(陷中) : 망인의 관작ㆍ성명ㆍ자호 등을 기록하기 위하여 뒤쪽의 앞면(분면 쪽과 합치는 부분) 가운데를 가로가 6촌, 세로가 1촌, 깊이 4푼의 장방형으로 우묵하게 파낸 부분을 가리킴. 함중에는 고 모관 모공 휘모 자모(故某官某公諱某字某)라고 씀.[주-D003] 영녕전(永寧殿) : 이조의 임금 및 왕비로서 종묘에 모실 수 없는 분의 신위를 봉안하던 곳으로, 종묘 안에 있는데, 태조의 사대조(四代祖) 및 그 비(妃), 대가 끊어진 임금 및 그 비를 모셨다. 종묘와는 달리 영녕전은 1년에 두 번(1월ㆍ7월)을 원칙으로 대관(代官)을 보내어 간소하게 제사를 지냈으며, 공상(供上)에도 차별이 많았다.[주-D004] 오실(五室) : 옛날 조상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는데 천자는 7묘(廟), 제후는 5묘(廟), 대부(大夫)는 3묘(廟)였으니, 우리 나라는 제후에 해당하므로, 5묘였음. 태조를 중앙에 모시고 2세~3세를 왼쪽인 소(昭)에, 3~4세를 오른쪽인 목(穆)에 모시어 오실(五室)이라 했음.[주-D005] 소목(昭穆) : 종묘 또는 사당(祠堂)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던 차례.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는데, 제1세(世)를 중앙에 모시고, 천자(天子)는 2세ㆍ4세ㆍ6세는 소에, 3세ㆍ5세ㆍ7세는 목에 모시어 삼소삼목(三昭三穆)의 칠묘(七廟), 제후는 이소이목(二昭二穆)의 오묘(五廟), 대부는 일소일목(一昭一穆)의 삼묘(三廟)임.[주-D006] 혼전(魂殿) :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에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궁전.[주-D007] 오속(五屬) : 오복(五服)의 친족을 말하는데, 오복은 참최(斬衰)ㆍ자최(齊衰)ㆍ대공(大功)ㆍ소공(小功)ㆍ시마(緦麻)를 이른다.[주-D008] 한무제(漢武帝)가 …… 고사 : 여태자(戾太子)는 한무제(漢武帝)의 아들 거(據)인데, 성품이 관후하여 억울한 사정을 많이 보아 주었으므로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으나, 대신들은 좋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 강충(江充)이란 자가 용사를 했는데, 후일 여태자에게 죽을까 염려하여, 무제가 병환으로 고생하는 것을 무고(巫蠱) 때문이라고 무고하여 여태자를 급히 잡으려 들자, 여태자는 군사를 일으켜서 강충을 죽이고 도망쳤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그후 무제는 뉘우쳐서 사자궁(思子宮)과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를 호수 가에 세웠다. 《漢書 戾太子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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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14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부묘(祔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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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10년(1659)에 신덕왕후를 태묘의 태조대왕실에 승부(陞祔)하였다. 처음에 신덕왕후를 황화방(皇華坊)에다 장사 지낸 뒤에 그 능호(陵號)를 정릉(貞陵)이라 하고 영정을 인안전(仁安殿)에 모셨다. 그런데 뒤에 태조가 승하하자 신의왕후(神懿王后)만을 여기에 배식(配食)하도록 한 뒤에 태종 9년(1409)에는 정릉을 양주(楊州) 땅으로 옮겼다. 선조 14년(1581)에 이르러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신덕왕후는 당연히 태묘에 배식해야 할 분이므로 응당 이에 대한 존숭(尊崇)의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비로소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먼저 능침(陵寢)을 정하도록 하였는데, 변계량(卞季良)의 문집에 실려 있는 정릉을 이조(移厝)한 축문 중의 ‘국도(國都)의 동북쪽’이라는 말에 의거해서 이를 정하였다. 그리고 조정의 신하들이 처음에 태묘에 승부할 것을 청할 때에 한결같이 신의왕후의 예에 따라서 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에 대한 조정의 의논이 같지 않았다. 건각(建閣)과 설원(設員)을 모두 제릉(諸陵)과 같이 하기를 청하였으나 이 또한 실현을 보지 못하고 다만 그저 조묘(祧廟)의 예에 의거해서 매년 한 번씩 한식(寒食)에 제사를 올리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이때에 송시열(宋時烈)이 아뢰기를, “신덕왕후는 곧 태조의 왕비였습니다. 태조께서 추념(追念)하심이 매우 간절하였으며 매양 정릉의 경쇠 소리를 들은 뒤에야 수라를 드시곤 하였으니, 과연 그 성상(聖上)의 심정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만합니다. 그러니 청컨대 부디 이를 부묘(祔廟)하고 봉릉(封陵)하도록 하소서.” 하니, 명을 내려 정자각(丁字閣), 안향청(安香廳), 전사청(典祀廳), 집사청(執事廳), 재실(齋室) 등을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병조에 영을 내려서 수호군(守護軍)을 정하되 한결같이 조릉(祧陵)의 예에 따라 하도록 하였다. 이에 송시열이 또 권근(權近)의 흥천사 기문(興天寺記文)을 제출하면서 함께 차자를 올려서 아울러 묘향(廟享)을 거행하도록 청하였고, 삼사(三司) 및 유생 조상우(趙相愚) 등이 서로 연이어 소를 올려서 이를 청하였다.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기를, “신의왕후와 신덕왕후는 모두 적배(嫡配)로서, 이는 마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여인이 함께 순(舜) 임금의 배필이 된 것과 같습니다. 신의왕후가 죽은 뒤에 신덕왕후가 그 정위(正位)를 이어받고 천자(天子)의 책명(策命)을 받아서 한 나라의 어머니가 되니, 태조가 은의와 예절로 대하고 태종이 끝까지 변함없이 받들어 모셨습니다. 다만 당시에 이와 같은 의리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못했던 것으로 인하여 전례(典禮)를 논의하는 신하들이 그릇된 의리를 가지고 상을 인도해서 존비(尊卑)를 구별하는 조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늘에 계신 태종의 혼령께서 끝없는 여한을 품고 계신 것이 아닌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또 흥천사의 기문 중에 ‘가을 8월의 무술일’이라는 구절에 의하여 관상감으로 하여금 거슬러 계산해서 8월 13일을 기신(忌辰)으로 정하였다. 바야흐로 그 능을 봉하고 제향을 설행하던 날에 정릉동 마을에 소나기가 내려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제주례(題主禮)를 강녕전(康寧殿)의 악차(幄次)에서 행한 다음 이를 읍취당(挹翠堂)에 봉안하였고, 상이 친히 종묘에 나아가서 고유(告由)하였다. 부묘할 때에 부알례(祔謁禮)는 다만 태조의 제1실에만 하였는데, 실 앞의 당상(堂上)에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이를 행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홍승균 (역) | 1999
종묘의궤 제2책
각 실의 위호(位號)와 차례 즉위한 시기, 승하한 시기, 장례한 시기, 능호, 좌향을 부기(附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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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
○ 제1실
태조 강헌 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이다. 명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시호가 강헌(康獻)이다. - ‘따뜻하고 어질어 좋아할 만하고 즐거워할 만하다〔溫良好樂〕’는 뜻의 강(康)과 ‘총명하고 지혜롭다〔聰明叡智〕’는 뜻의 헌(獻)이다. - 홍무 25년 임신(1392) 7월 16일에 즉위하고, 무인년(1398) 9월에 정종에게 전위하였으며, 영락 무자년(1408, 태종8) 5월 24일 임신에 승하하였다. 건원릉(健元陵)에 장례하니, - 계좌정향이다. 무자년 9월 9일에 장례하였다. - 양주에 있다.
당저 계해년(1683, 숙종9)에 시호 ‘정의광덕(正義光德)’을 가상하였다.
승인순성 신의왕후 한씨(承仁順聖神懿王后韓氏)이다. 본관은 안변(安邊)이다. 홍무 24년 신미(1391, 고려 공양왕3) 9월 23일 정미에 승하하였다. 제릉(齊陵)에 장례하니, 풍덕(豐德)에 있다.
순원현경 신덕왕후 강씨(順元顯敬神德王后康氏)이다.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홍무 29년 병자(1396, 태조5) 8월 13일에 승하하였다. 정릉(貞陵)에 장례하니, -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 양주에 있다. - 처음에는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원(北原)에 장례하였는데, 태종 9년 기축(1409) 2월 23일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
현종 10년 기유(1669) 9월 29일에 위호를 추복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 태조 6년 정축 > 1월 3일 > 최종정보
태조 6년 정축(1397) 1월 3일(병진)
06-01-03[01] 신덕 왕후를 장례지내고 정릉이라 이름하다. 인안전에 반혼하고 혼전 도감을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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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 왕후(神德王后)를 취현방(聚賢坊) 북녘 언덕에 장례하고 정릉(貞陵)이라 이름하였다. 종친과 백관이 복(服)을 벗고,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인안전(仁安殿)으로 반혼(返魂)한 뒤에, 백의(白衣)와 흑대(黑帶)로 정무를 보았다. 왕후의 혼전 도감(魂殿都監)을 설치하였다.
【원전】 1 집 99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행정(行政) / 의생활(衣生活)
[주-D001] 복(服) : 상복.
>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9년 기축 > 2월 23일 > 최종정보
태종 9년 기축(1409) 2월 23일(병신)
09-02-23[01] 정릉을 도성 밖의 사을한산으로 천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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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처음에 의정부에 명하여 정릉(貞陵)을 도성(都城) 밖으로 옮기는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의정부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옛 제왕(帝王)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貞陵)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使臣)이 묵는 관사(館舍)에 가까우니,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각사(各司)에 명하여 반(半)을 나누어 백의(白衣)ㆍ흑각대(黑角帶)ㆍ오사모(烏紗帽) 차림으로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상고하건대, 송(宋)나라 선조(宣祖)의 안릉(安陵)을 하남 공현(河南鞏縣)으로 옮긴 뒤에 조석전(朝夕奠)과 삭망제(朔望祭)는 없었고, 다만 춘추(春秋) 중월(仲月)에 제사를 행하였을 뿐이니, 이제부터 신덕 왕후의 산릉(山陵) 제례(祭禮)도 이러한 예(例)에 의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주공(周公)이 모든 제사에 질서를 지키고 문란하게 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춘추의 두 중월(仲月)과 이름이 있는 날[有名日]에 2품관(品官)을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되, 항식(恒式)을 삼으라.”
【원전】 1 집 476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주-D001] 중월(仲月) : 2월과 8월.
>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 광해군 5년 계축 > 5월 26일 > 최종정보
광해군 5년 계축(1613) 5월 26일(계미)
05-05-26[09] 태종조 방석(芳碩)의 변 때 신덕 왕후를 처치했던 절목을 상고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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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하였다.
“태종조(太宗朝) 방석(芳碩)의 변 때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처치했던 절목을 태조조(太祖朝)부터 태종조까지의 실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고해서 모두 서계(書啓)하라.”
【원전】 32 집 191 면
【분류】 역사-전사(前史)
[주-D001] 신덕 왕후(神德王后) : 태조의 계비로 방석의 생모임.
태종조 방석(芳碩)의 변 때 신덕 왕후를 처치했던 절목을 상고하게 하다
>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 광해군 10년 무오 > 6월 13일 > 최종정보
광해군 10년 무오(1618) 6월 13일(경오)
10-06-13[05] 전라도 진사 이해 등이 상소하여 서궁을 속히 폐출하기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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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진사 이해(李垓)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궁(西宮)의 죄악은 전고(前古)에 비할 바가 없는데 아직도 폐출(廢黜)하는 형전을 마무리짓지 않고 있습니다. 태종조(太宗朝)에 정릉(貞陵)을 아들과 관련된 일 때문에 죽은 뒤에도 오히려 추급해서 폐한 일이 있었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정릉의 옛 예에 따라 속히 폐출하는 일을 마무리짓게 하소서.”
【원전】 33 집 101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주-D001] 서궁(西宮) :
인목 대비(仁穆大妃).
[주-D002] 정릉(貞陵) :
태조의 계비(繼妃)로서 이방석(李芳碩)과 이방번(李芳蕃)의 생모인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능.
조선왕조실록 > 현종실록 > 현종 10년 기유 > 2월 5일 > 최종정보
현종 10년 기유(1669) 2월 5일(무진)
10-02-05[05] 부제학 이민적 등이 신덕 왕후를 태묘에 배향하자고 상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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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기를,
“천하의 일이란 전일에 폐지되었다가 뒷날에 거행되는 경우도 있으며, 한때는 굴하였으나 만세에 펼쳐지는 경우도 있으니, 그 일의 옳으냐 그르냐의 여부만을 살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정에 편안하지 못한 것이라면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되며, 천리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면 조종(祖宗)이 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여 어렵게 여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한 사리이며 역대의 공통된 논리입니다.
이번 신덕 왕후(神德王后) 능묘에 관한 논의로 대신이 이미 그 단서를 발론하였으므로 성명께서도 그 말에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원릉(園陵)의 제도와 관리의 설치 및 사물의 비치를 여러 능묘에 견주케 하니, 성인의 넓으신 효성을 누구인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삼가 듣건대 경연에서 성상께서 종묘 제사에 관한 절차를 아직도 어렵게 여기는 뜻을 보이셨다 합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신덕황후는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별세한 후 성조(聖祖)께서 건국할 때 천자(天子)의 고명(誥命)을 받고 일국의 국모(國母)가 되어 중곤(中壼)의 위에 있은 지 10여 년이 되었고, 지금 선유 이색(李穡)이 찬한 정릉비(定陵碑)를 상고하면 역시 ‘먼저 모씨에게 장가들고 후에 모씨에게 장가들었다.’ 하였고 원(元)과 차(次)의 분별이 없으며, 권근(權近)이 찬한 흥천사비(興天寺碑)에도 역시 봉함을 받아 곤위에 있었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용비어천가》는 세종조에 만들어진 것인데도 역시 신덕 왕후라고 쓰여져 있으니, 위호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이것이 또한 분명한 증거인데 어찌 다시 증거를 상고한 후에야 안다고 하겠습니까. 승하한 후에 존호와 시호를 올리는 일을 예관(禮官)에서 폐지하지 않았고 제사를 모시던 의식과 축판이 아직도 향실(香室)에 있으며, 태종 대왕이 친히 향축(香祝)을 전하였으니, 그 위호와 축식의 존융함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으며, 원릉 석물(石物)의 설비 역시 극히 높혀 받들었습니다.
살아서는 정비(正妃)가 되었고 죽어서는 존호를 받았으며, 중국으로부터 고명을 받아 성조와 짝하였는데 유독 태묘(太廟)에 배향되지 못한다면 어찌 인정에 거역되고 천리에 괴리되어서 성조의 궐전(闕典)이 되고 천고의 유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선조조 신사 연간에 대신과 삼사가 역시 건의하였으나 욕예를 거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언젠가는 거행해야 할 일이니, 이는 실로 오늘날 성조의 책임인 것입니다.
소릉(昭陵)의 복위 문제는 여러 조정을 지나 중조 때 비로소 거행하였으니, 조종이 거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하여 일찍이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며, 또한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고사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한ㆍ당 이래로 송 나라의 가법(家法)이 가장 순정(純正)하다고 하는데 원우 황후(元祐皇后)의 복호는 정자(程子)도 옳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신덕 왕후는 존호를 고치지 않았고 정릉의 의물(儀物)도 아직까지 왕후의 법제로 되어 있으니, 소릉의 개봉(改封)이나 원우의 복위처럼 중대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빠뜨린 전례를 소급하여 거행하고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세하게 정문(情文)을 마련하면 될 뿐입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천리에 합하고 인정에 순응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의 전례에 관계됨이 매우 중한데다 논의가 이미 발단되어 여론을 막기가 어려우니 의리로 헤아려 결단하여 행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원전】 36 집 612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주-D001] 소릉(昭陵) : 단종(端宗)의 생모인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 본래 안산(安山)에 있었는데, 단종이 죽은 후 세조(世祖)가 물가로 이장하였다. 그 후 영남 유생들을 중심으로 처음 복위의 논의가 일어났으나 실행하지 않다가 현릉(顯陵)으로 이장되어 복위되었다.[주-D002] 원우 황후(元祐皇后) : 송 철종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7년 신해 > 3월 19일 > 최종정보
영조 7년 신해(1731) 3월 19일(임오) 비가 왔다 맑았다 함
07-03-19[33] 진수당에서 인견하는 자리에 우의정 조문명 등이 입시하여 장릉 능소를 봉심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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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申時)에 상이 진수당에 나아갔다. 대신, 예조 판서, 남원군(南原君)이 인견을 위해 입시한 자리이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 남원군 이설(李
), 좌승지 안중필(安重弼), 가주서 정권(鄭權), 기주관 이양(李瀁), 편수관 이인흥(李麟興)이 입시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날씨가 음습한데 성상의 옥체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대왕대비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녕하시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머리가 아프고 기가 오르는 증상은 근래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머리 아픈 증상은 조금 줄어들었고 기가 오르는 증상은 오락가락한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신들이 이제 장릉(長陵) 능소에 나아가기에 감히 이렇게 와서 숙배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하직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이미 상세히 물었는가?”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능속(陵屬)을 불러 물었더니, 그것들은 날씨가 따뜻할 때는 낭자하게 나오고 이처럼 음습한 날은 나오지 않는데 지금은 이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듣고 나서는 봉심하러 가는 것을 잠시도 늦춰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제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바로 능상(陵上)에서 나왔다고 하던가?”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돌 틈 석회를 바른 곳으로부터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분명 그곳으로부터 나왔는가?”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어제 인견이 끝난 뒤 본릉의 참봉을 불러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였는데 오늘 능속의 말을 들어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른 석회도 뚫고 나올 수 있는가?”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비록 마른 회라도 또한 뚫고 나옵니다. 뱀이 나올 때마다 막았는데 또다시 뚫고 나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회(天灰) 위에 사대석(莎臺石)을 설치하였는가?”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물은 것은 천회 위에서 나왔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하였다. 신사철이 아뢰기를,
“땅과 돌이 맞닿은 곳에서 나오는데 괴이한 점이 아주 많다고 들었습니다. 매번 3월 보름 뒤에 모습을 드러내어 4, 5월에 낭자하였다가 더위가 심해지면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찬바람이 불면 곧 되돌아오는데, 사람을 보면 곧 도망가 숨으며 그 굵기는 낫자루만 하고 개개의 대가리는 아주 뾰족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동부승지에게 들었다. 더우면 갔다가 추우면 오는 것은 아마도 남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돌아오는 듯하다. 그런데 돌 틈은 겨울에는 어니 틀림없이 오래 머물 수는 없을 것이다. 남원군은 산을 많이 답사하였는데 장릉도 봉심한 적이 있는가?”
하자, 이설이 아뢰기를,
“신이 작년 5월에 본릉 기신제(忌辰祭)의 제관으로 나아가 봉심하였을 때 수호군이 막대기로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모습을 보고서 신이 괴이하게 여겨 물었더니 처음에는 자못 숨겼으나 재삼 상세히 물어서 그 실물을 알게 되었는데 곧 뱀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풍수를 훤히 알고, 또 민 판부사(閔判府事 민진원(閔鎭遠))와 논의한 것이 있었다 하니 진달하라.”
하자, 이설이 아뢰기를,
“국릉(國陵)은 일의 체모가 특별하여 감히 나침반을 놓아 볼 수 없으니, 신이 어떻게 상세히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나침반을 놓아 보지 않더라도 그중에 짐작한 바가 있을 터이다. 득수(得水)와 수파(水破)는 분명히 알지 못하더라도 산세라면 어찌 헤아리기 어렵겠는가.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원체 숨길 일이 없다. 다 진달하라.”
하자, 이설이 아뢰기를,
“용맥(龍脈)은 반드시 한 번은 음(陰)이 되었다가 한 번은 양(陽)이 되었다가 하면서 서로 갈마들어야 길지(吉地)가 됩니다. 그런데 본릉의 산세는 동쪽으로부터 와서 남쪽으로 가니 양(陽)만 있는 산세입니다. 양만으로는 낳지 못하고 음만으로도 잉태하지 못함은 단지 풍수설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자(朱子)도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형(禹亨)은 이미 숙배하고 나갔는가? 아직 나가지 않았다면 들어오라 하라.”
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
“이미 나갔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원군은 민 판부사와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가?”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민 판부사는 일찍이 고 상신(相臣) 윤지선(尹趾善)을 통해 본릉에 이런 문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기에 신이 능소에 갔다 온 것을 알고서 신에게 물었습니다. 신이 비록 작년에 이 문제를 알았으나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는데 대신이 물었기 때문에 주고받은 말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민 판부사가 한 말을 상세히 진달하라.”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대신은 ‘당초 능을 쓸 때 이미 땅 안이 편안하지 않다는 말이 있었고 그 뒤로 지관들도 많이 그렇게 말하였다. 지금 뱀 문제가 또 이렇게 낭자하니 내가 만약 조정에 있었다면 마땅히 아뢰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청 주서(守廳注書)에게 영릉(寧陵)을 옮길 때의 일기를 가지고 오도록 하라.”
하니, 이양이 나가서 하교를 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원군은 한번 소견으로 논해 보라.”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풍수설을 국릉에 적용하겠습니까마는 옛사람은 오환(五患)을 피하였는데, 이 땅은 실제 오환을 범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풍수설에서는 어떤 형국에 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하는가?”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지리서에 염정(廉貞)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염정이 빌미가 되면 풍기(風氣), 화기(火氣), 벌레, 짐승 등을 만들어 내니, 이 경우는 충렴(蟲廉) 부류입니다. 그러나 염정이 빌미가 되어 생기는 것은 음사(陰邪)가 교묘히 변한 것이기 때문에 양기를 가장 무서워하여 항상 땅속에 있으면서 감히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대개 양기를 만나면 눈이 햇볕을 쬔 것처럼 변합니다. 본릉에는 원래 이러한 염정이 없습니다. 다만 임진강(臨津江)이 좌우로 굽어 돌아가고 그 뒤는 모두 암석입니다. 이놈은 으레 꼭 저습(低濕)하고 험준한 바위틈에서 번식합니다. 따라서 이 경우는 바위틈을 통해 오가다가 그대로 그곳에 알을 낳고 기르게 되었지 결코 염정이 빌미가 되어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염정이 광중(壙中)에서 빌미가 된 경우, 회를 입힌 곳에서도 그런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고, 신사철이 아뢰기를,
“그런 일이 많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직접 보았는가?”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보았습니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신이 천장(遷葬)한 사람에게 널리 물었더니, 여러 곳에 이런 염정의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모두 상한(常漢) 집이었습니다. 사대부는 후장(厚葬)하여 묘를 쓰니 이런 일이 드뭅니다. 하물며 능침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지금 남원군이 한 말을 가지고 이치를 따져 보면, 염정이 빌미가 되어 생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염정에 대한 말은 지금 처음 들어 크게 염려스럽다. 본릉에 과연 이러한 염정이 없으며 염정에 의해 생긴 것은 과연 밖으로 나오지 않는가?”
하자, 이설이 아뢰기를,
“이미 밖으로 나왔으니 결코 염정이 빌미가 되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릉(寧陵)은 능을 만든 지 몇 년 만에 옮겼는가? 그때의 일기에서 찾아보라. 100년도 되지 않아 능침을 옮기는 것이 어찌 중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아직 100년이 안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설이 아뢰기를,
“여염집의 예로 말씀드리면, 만약 후장(厚葬)하였다면 긴 시간이 지나도 달리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또 신의 소견으로 말씀드리면, 본릉은 오환 중에 틀림없이 냉환(冷患)이 있습니다. 냉혈(冷穴)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관(棺) 속이 역시 축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 안이 축나지 않는다면 그 안을 알 만하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냉혈은 100여 년이 흘러도 관과 옷이 초상 때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과 옷이 변하지 않더라도 어찌 그 안이 변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것은 실로 이치에서 벗어난 일이다. 역사 기록에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빗대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닌데 《한서(漢書)》에 그런 말이 있다. 그러나 죽편(竹片) 등의 물건은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우려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진실로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원군이 말한, 대신의 칠포(漆布)에 대한 우려는 지나칩니다. 이 일이 지금에야 위에 보고된 것이 괴이합니다. 윤지선(尹趾善)의 말 이외에도 떠도는 말이 많았습니다. 수호군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하기를 ‘중[僧]이 부른 달구질 돕는 소리 외에도 소문이 있었습니다. 당초 광(壙)을 열고 난 후 하루 지나 큰 놈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총호사(摠護使)가 즉시 제거하게 하고는 이어 역군(役軍)의 성명을 기록하고서 「이에 관한 말을 누설하면 너희들은 죽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신이 며칠 전 인견하고 난 뒤에 당시에도 그 자리를 써서는 안 된다고 논한 차자가 있었다고 처음 들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차자가 일기에 실려 있는가?”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일기에는 없는데, 차자를 올린 사람은 조익(趙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자에서 말한 뜻은 무엇인가?”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처음 능을 잡을 때 지관 중에 이간(李榦)이라는 자가 실로 주관하였는데, 이곳을 다른 지관은 모두 불길하다고 하였으나 이간만은 길하다고 했기 때문에 쓰게 되었습니다. 조익은 차자에서 ‘이간이 전에 구봉서(具鳳瑞) 아비의 묘를 잡았는데 10년도 안 되어 구씨 집안에 후손이 없어졌고 이간이 정해준 대로 묘를 쓴 다른 사람들도 크게 망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지금 이미 시험해 보아 효험을 보지 못한 변변찮은 술수(術數)를 써서 지극히 중대한 묏자리를 잡는 것은 나중에 큰 후회를 불러올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조익은 유신(儒臣)이었는데 이렇게 말하였으니, 당시 의론이 일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굳이 풍수설을 논할 것이 없고, 이러한 것이 어떤 혈(穴)에 해당하는지 알고자 한다. 남원군도 이를 모르는가?”
하자, 이설이 아뢰기를,
“그것까지는 신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다만 상세히 간심할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원군과 우형 외에 같이 가는 다른 사람은 없는가?”
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
“임경(林瓊)이 술업(術業)에 자못 정통하기 때문에 데리고 가려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탁(鄭倬)은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남원군은 정탁과 임경 중 누가 낫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정탁은 오래된 사람이니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탁은 10여 년 전에도 늙었으니 지금은 더욱 늙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사람은 본감(本監)의 늙은 신하인데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나이가 틀림없이 70은 넘었을 텐데 정신은 또렷할 것이다.”
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
“정탁과 임경을 숙배하지 말고 나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원군은 우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우형은 남을 속이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남을 속이는 주장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언제나 더 낫다.”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남을 속이는 말을 하는 자와는 함께 일을 꾀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숙달된 사람을 취할 만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술(地術)도 의술과 같아서 남을 속이면 틀림없이 병들어 망칠 것이다. 근래 유생 중에는 이 술업(術業)에 방통한 자가 없는가?”
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
“우형은 나라의 공식적인 지관으로 데려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유생 중에서 식견이 높은 자를 택하여 데려가는데 진사(進士)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남원군도 그 사람을 보았는가?”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아직 못 봤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시골 사람인가?”
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
“시골 사람입니다. 사마(私馬)로 데리고 갈 텐데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이번에 능을 옮기자는 의론은 부득이하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외방 사람은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고 풍수설에 현혹된 것이라고 의심하여 분잡하게 상소를 올릴 게 틀림없습니다. 정원을 신칙하여 이러한 소장은 봉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안후석(安后奭)이 일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여러 신하가 권을 나누어 펼쳐 살펴보았는데, 소략해서 상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상이 이르기를,
“옛 능을 팔 때의 일을 보고 싶은데 일기가 이렇게 소루하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신이 등록을 상고해 보니, 국조(國朝)에서 천릉한 것이 모두 9위(位)였는데, 능을 만들었다가 천릉할 때까지의 기간은 멀어도 24년을 넘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등록을 가지고 왔는가? 그 내용을 아뢰라.”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은 홍무(洪武) 30년 정축년(1397, 태조6)에 처음 한성부 북쪽 언덕 황화방(皇華坊)에 장사 지냈다가 13년 지나 태종 9년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정릉(貞陵)으로 이장하였고, 세종대왕의 능은 경태(景泰) 1년 경오년(1450, 문종 즉위년) 6월에 처음 광주(廣州)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20년 지나 성화(成化) 5년 예종 1년(1469) 3월 6일에 영릉(英陵)으로 이장하였고,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은 정통(正統) 11년 병인년(1446, 세종28)에 처음 광주 헌릉의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24년 지나 기축년(1469, 예종1)에 대왕의 능과 함께 같은 날 영릉으로 이장하였고,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은 정통 6년 신유년(1441, 세종23)에 처음 안산(安山)의 소릉(昭陵)에 장사 지냈다가 13년 지나 단종 1년 계유년(1453)에 양주(楊州)의 대왕 능의 왼쪽 언덕으로 이장하였고, 중종대왕의 능은 가정(嘉靖) 24년 을사년(1545, 인종1)에 처음 고양(高陽)의 희릉(禧陵)에 장사 지냈다가 18년 지나 명종 17년 임술년(1562) 9월 4일에 정릉(靖陵)으로 이장하였고,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은 정덕(正德) 10년 을해년(1515, 중종10)에 처음 광주의 헌릉 오른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23년 지나 중종 32년 정유년(1537)에 희릉(禧陵)으로 이장하였고, 선조대왕의 능은 만력(萬曆) 36년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처음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23년 지나 인조 8년 경오년(1630) 11월 21일에 건원릉 두 번째 언덕의 목릉(穆陵)으로 이장하였고, 원종대왕(元宗大王)의 능은 만력 48년 경신년(1620, 광해군12)에 처음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에 장사 지냈다가 8년 지나 인조 5년 정묘년(1627) 8월 27일에 김포(金浦)의 장릉(章陵)으로 이장하였고, 효종대왕의 능은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에 처음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15년 지나 계축년(1673, 현종14) 10월 7일에 여주(驪州)의 영릉(寧陵)으로 이장하였습니다.”
하였다. 다 읽자 또 아뢰기를,
“신이 장릉(長陵)의 봉분을 올릴 때의 등록을 가져다 살펴보니 지회(地灰)를 진배하였다는 글이 없었는데, 어찌 옛날 문헌에 확인할 곳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어쩌면 지회를 쓰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대부 집에서 지회를 쓰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자, 신사철이 아뢰기를,
“여염집에서는 풍수설에 구애되어 지회를 쓰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국릉은 으레 지회를 4치 쓰는데 장릉은 근거할 만한 기록이 없으니 매우 괴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감의 의궤에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자, 신사철이 아뢰기를,
“단지 이것만이 아닙니다. 재궁(梓宮)의 길이, 너비, 높이에 대한 제도를 기축년(1469, 예종1) 외에는 달리 살펴볼 만한 글이 없습니다. 옛일에 이처럼 소루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염정이 빌미가 된 것은 아닐지라도 지회를 쓰지 않았다면 염려스러운 일이 없지 않다. 재궁(梓宮)은 염려할 것이 없더라도 어찌 그놈이 아주 가까이 접근하는 문제가 없겠는가.”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국릉의 혈(穴)은 깊어서 깊이가 8, 9자에 이르니 어찌 그런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설이 아뢰기를,
“풍수설은 진실로 믿을 게 못 됩니다만 겉으로 드러난 바로 보건대 염정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풍수가들은 광중(壙中)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길흉과 관계된 현상이 거기서 만들어져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광중에서 생긴 것이 어찌 밖으로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돌 틈으로 출입하는 것인 만큼 어찌 땅바닥까지 들어갈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깊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터무니없이 이치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놈은 아주 깊이 들어가는 놈도 있다.”
하자, 이설이 아뢰기를,
“쥐도 회(灰)를 뚫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놈이 어떻게 뚫겠습니까. 국릉은 회를 4자 쓰는데, 그 자는 토척(土尺)이 아니라 목척(木尺)이니, 그놈이 어찌 거기까지 뚫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탄회(炭灰)를 쓰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그놈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염려스럽다.”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등록을 보면 탄회를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탄회는 어떠한가?”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래되어도 색이 바래지 않는가?”
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
“본래 색 이외에 변할 것이 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굳이 풍수설로 논할 것 없이 남원군이 전에 봉심하였을 때 국(局)의 형상과 안계(眼界)가 대체로 어떠하였는가?”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수목이 무성하여 상세히 알기 어려웠습니다만 용호(龍虎)가 뾰족하고 안계는 좋았습니다.”
하고, 신사철이 아뢰기를,
“잎이 떨어지는 때에는 멀리 창파(滄波)가 보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불길한가?”
하자, 이설이 아뢰기를,
“멀리 창파가 보이는 것은 술가(術家)가 크게 꺼리는 것입니다. 당초 능을 만들 때는 틀림없이 땅을 높이 다졌을 것인데 해가 오래되어 점차 낮아졌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 힘으로 땅을 다져 높이 만든 것이 어찌 자연적인 것만 하겠는가. 태묘(太廟)의 문 안쪽의 세 조산(造山)은 인력으로 만든 것인가?”
하자, 이설이 아뢰기를,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사람 힘으로도 간혹 자연의 이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지리서에 땅을 파서 평평하게 하거나 보충해 쌓는 법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릉(長陵)의 국내(局內)에 다른 언덕은 없는가?”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겹산도 있고 홑산도 있는데, 이 산은 어떤 산인가?”
하니, 이설이 아뢰기를,
“홑산은 아닙니다.”
하고, 조문명이 아뢰기를,
“신이 수호군에게 들었는데, 본능의 국내에 길하다고 운운한 땅으로 세 곳이 있는데, 한 곳은 계해년(1683, 숙종9)에 능을 만들 때 나무를 베고 공역을 시작하기까지 하였다가 곧바로 정지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계축년(1673, 현종14) 천릉할 때의 문안이 기록된 일기를 올리라.”
하니, 안중필이 무릎 꿇고 올렸다. 상이 펼쳐 보았다. 다 보자 이르기를,
“10월 보름 이전의 일기를 올리라.”
하였다. 안후석이 올리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올려야 한다.”
하니, 안중필이 무릎 꿇고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천릉 후에 우제(虞祭)를 지내는 절차가 있는가?”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사삿집에서는 천장(遷葬)하였을 때 일우(一虞)를 지내는데, 능침을 옮겼을 때도 이러한 예제(禮制)를 지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곧바로 정자각에서 예를 행하는가?”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당연히 그렇게 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기책을 내가라.”
하니, 안중필이 무릎 꿇고 받아 안후석이 가지고 가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제는 곧바로 능소(陵所)에서 행하되, 예가 끝난 뒤에는 곧바로 새 능에서 돌아오는가?”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왕가(王家)의 전례(典禮)는 사삿집과는 자별하여 칠우(七虞)니 오우(五虞)니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천릉 때의 제사도 사대부 집과 더러 다를 것인데 신이 감히 장담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나가서 상세히 봉심해야 할 것이다. 염정이 있는지 없는지는 참으로 알 수 없으나 남원군은 더더욱 상세히 봉심해야 할 것이다.”
하니, 조문명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감히 십분 잘 살피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객사가 나온 뒤 치제(致祭)할 때의 절목은 과연 찾아냈는가?”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그간의 등록을 두루 상고하였는데 모두 명백히 근거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번은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과 차이가 있으니, 혼전(魂殿)이 아닌 별도의 전각에 허위(虛位)를 마련하고 장막으로 막아서 장막 밖에 상탁(床卓)을 놓고 행해야 하며, 올릴 잡물은 각사로 하여금 진배하게 하더라도 배설 등의 일은 사약(司鑰)들이 전례대로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를기를,
“사약들이 어찌 전례를 알아 거행한단 말인가. 이 일은 도감에서 상세히 찾아내 즉시 초기하게 하라.”
하였다. - 탑전 하교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이번 봉심은 며칠이나 걸리겠는가?”
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
“며칠 걸릴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가는 날 곧바로 봉심하는가?”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
“오늘은 날이 이미 저물어서 내일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가는 날 해가 부족할 테니, 모레 봉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물러 나갔다.
[주-D001] 수파(水破) : 풍수 용어로서 곧 수구(水口)를 가리키는데, 국내(局內)에 흐르는 물이 좌청룡, 우백호가 끝나는 부분에서 서로 만나는 물의 출구 지점이다. 《김두규, 風水學 辭典, 비봉출판사, 2005》[주-D002] 우형(禹亨) : 우형의 ‘亨’이 이달 19일 정사 기사와 19일 예조 낭청의 계사에는 ‘炯’으로 되어 있고, 23일 입시 기사에는 ‘冏’으로 되어 있다.[주-D003] 오환(五患) : 《상변통고》 권15 〈상례(喪禮) 치장(治葬)〉에 인용된 정이(程頤)의 〈장설(葬說)〉에 “오환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모름지기 뒷날 도로가 되지 않아야 하고, 성곽이 되지 않아야 하고, 도랑이나 못이 되지 않아야 하고, 권세가들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하며, 밭갈이의 쟁기가 미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책에는 오환(五患)이란 못, 도랑, 도로, 촌락을 피함, 우물과 그릇 굽는 가마를 멀리함이라고 하였다.[惟五患者不得不愼, 須使異日不爲道路, 不爲城郭, 不爲溝池, 不爲貴勢所奪, 不爲耕犁所及。 一本所謂五患者, 溝渠, 道路, 避村落, 遠井窯。]”라고 하였다.[주-D004] 염정(廉貞) : 북두칠성의 제5성으로 오행은 화(火)이며 형살, 병권, 반역, 패망, 흉폭 등을 관장하며, 이 기운을 받은 산은 뾰족뾰족한 바위가 높이 솟아 불꽃같이 험준하고 살벌하다. 《박인태, 風水事典, 형설 2008, 650쪽》[주-D005] 중[僧]이 …… 소리 : 이해 4월 2일 입시 기사에 의하면, 그 내용은 ‘정혈 옆에 놓아라, 뱀 굴로 점괘가 나왔네.[正穴傍置了 蛇穴是占了]’이다. 《承政院日記 英祖 7年 4月 2日》[주-D006] 구봉서(具鳳瑞) …… 없어졌고 : 구봉서가 그의 아버지 구계(具棨)의 묘를 쓴 뒤 10년도 안 되어 후사 없이 죽은 것을 가리킨다.[주-D007] 30년 : 원문은 ‘十年’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十’ 앞에 ‘三’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8] 단종 1년 : 원문은 ‘中宗八年’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端宗元年’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9] 그 …… 목척(木尺)이니 : 토척(土尺)은 토지를 측량할 때 쓰는 자로 양전척이라고도 하며 주척(周尺)이고, 목척은 목공척(木工尺)이라고도 하며 영조척(營造尺)이다. 주척의 1자는 약 21cm이고 영조척의 1자는 약 31cm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조선왕조실록사전 영조척》[주-D010] 자연의 이치 : 원문은 ‘造’인데, 문맥을 살펴 ‘造’ 뒤에 ‘化’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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