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일반

저쪽 언어가 남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어(譯語)도 구본(舊本)과 신본(新本)이 따로 있어 신본은 그쪽 방어(方語)이고, 구본은 정음(正音)이다.

믿음을갖자 2023. 11. 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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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1권 / 서인(序引) 4

익정공주고전례류서(翼靖公奏藁典禮類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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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개인(使价引) 자문(咨文), 별성(別星), 지칙(支勅)을 덧붙임

내가 주고(奏藁)를 보다가 사개편(使价篇)에다 자문(咨文), 별성(別星), 지칙(支勅)을 붙여 놓은 것을 보고는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옛날 천계(天啓) 이전에는 조사(詔使)가 왔을 때 빈상(儐相)들이 시를 서로 주고받고, 경례(經禮)를 문답하고 하던 그 정제엄숙한 위의와 고상한 운치가 지금까지 이 강산(江山) 문묵(文墨) 사이에 남아 있는데도 녹명(鹿鳴)과 황화(皇華)를 연주하던 성대한 접빈 의식을 지금은 다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홍무(洪武) 갑술년(1394, 태조3) 이후부터 중국에 사신 가는 일이 네 종류로 되어 있는데, 즉 동지(冬至), 정조(正朝), 성절(聖節), 천추사(千秋使)가 그것이고, 사은(謝恩), 주청(奏請), 진하(進賀), 진위(陳慰), 진향사(進香使) 같은 것은 그 일이 있을 때만 보냈던 것이다. 인조 정축년(1637, 인조15)부터는 천추는 없어지고 대신 세폐사(歲幣使)가 있었으며, 을유년(1645, 인조23)에는 그들 나라 말에 따라 삼절사(三節使)를 세폐사에 합쳐서 한꺼번에 가기도 하였다. 공이 사신 보내는 일에 관해서도 많은 건의를 했었는데, 그 하나는 사신 가는 절차이고, 두 번째가 비포(比包)이고, 세 번째가 관모(官帽)이고, 네 번째가 상역(象譯)이었다. 내가 정미년(1787, 정조11)에 사행의 절차에 대해 중국의 회전(會典)에 의거하여 우리나라 통편(通編)을 대조해서 상호 참작하여 없앨 것은 없앴다. 가령 명(明) 나라 말기와 청(淸) 나라 초기의 문집(文集)들, 그리고 세도(世道)에 해를 끼치는 패관(稗官)의 총사(叢史)나 잡설(雜說) 따위는 다른 잡술 문자(雜術文字)들과 함께 그 모두를 별도 법조항을 두어 금지하고, 이어 금문절목(禁紋節目)을 인쇄해서 사행(使行)과 역행(曆行)에게 나누어 주고, 만약 그것을 휴대하지 않았을 경우 만부(灣府)에서 죄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폐단이 되고 있는 이른바 쇄마(刷馬)니 구인(驅人)이니 하는 것은 강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쇄마가 줄면 구인도 그만큼 줄 것이고 구인이 줄면 폐단도 그만큼 고쳐질 것이기에 82필(匹)에서 그 절반을 줄이고 그 대신 은자 750여 냥을 주도록 했으며, 책문(柵門)에서부터 수레를 세내서 싣고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계축년(1793, 정조17)에는 잠상(潛商) 금지법을 강화하고 비포의 법도 거듭 밝히었다. 잠상들이 취급하는 금, 담비 가죽, 삼, 진주 같은 것들을 싣고 몰래 강을 건너갔다가 중국 물품을 사 올 때는 비포 책자에다 물품 이름을 바꿔서 그 정해진 값을 낮게 조작하여 그들이 몰래 국경을 넘은 흔적을 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묘당(廟堂)에 명하여 그에 관한 규정들을 말끔히 재정비하도록 하였고, 또 신축년(1781, 정조5)에는 모전(帽廛)의 실업(失業)으로 인하여 세금 없는 모자 200척(隻)을 떼 주었다가, 갑인년(1794, 정조18)에 와서 역원(譯院)의 공용(公用)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에 해마다 기영(箕營)에서 은화(銀貨)를 받아오면서 200척에서 그것을 1천 척으로 늘리고 그 범위 내외를 기준으로 하여 통역관들 책화(柵貨)를 반드시 1천 척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기준이 다 차야지만 비로소 다른 물건을 살 수 있고 단 1척이라도 기준 미달일 경우는 세금을 그에 준해 징수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옛날에는 사행(使行) 때의 모든 비용을 통역관들이 다 변통했기 때문이다. 선묘(宣廟) 때 왜관(倭館)에서 개시(開市)하고부터는 중국 물품이 본국을 거쳐 왜관으로 유통되어 서로 교역했었는데, 왜인들은 장기도(長碕島)에서 직접 남경(南京)으로 거래하게 되어서는 관시(館市)에 왜은(倭銀)은 오지 않고 오는 것은 염채(鹽菜)뿐이어서 통역관들이 비포(比包)를 채울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왕 무인년(1758, 영조34)에 비로소 관모(官帽) 제도를 만들어 안으로는 호조(戶曹)와 각 감영, 밖으로는 관서(關西)의 감영과 병영 그리고 선천(宣川)과 의주(義州)에서 관은(官銀) 4만 냥을 출자하고 매 사행 때마다 모자 1000척을 사다가 모전과 기영(箕營), 송도(松都), 만부(灣府)의 장사치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남기고 산매(散賣)하게 하여 다시 은전으로 환납하되 모자 매 척당 은화 18냥을 더 바치게 하여 그것을 역원에 주고 그것으로 경비를 충당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호조에서는, 사행 때마다 사 온 모자가 경외에 널려 있어 모두 묵고 버리게 되었다 하여 묘당에 보고하고 별도 사행 때는 모자 사 오는 것을 금하도록 청하였다. 이때 공이 판단하기를, 별도 사행 때 더 나오는 것이 비록 군더더기 같기는 해도 그들 살아갈 계책도 전혀 막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니 절행(節行) 때는 600척, 역행(曆行) 때는 200척, 별도 사행 때는 역행 때와 같이하고 자행(咨行) 때는 100척을 넘지 않도록 하자고 하여 그렇게 정했던 것인데 그것이 이 주고(奏藁)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후로 은화가 점점 뛰기 시작하여 환납할 때 은화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심지어 돈으로 은을 대신하기도 했는데, 국가에서는 은으로 주고 돈으로 받는 것이 재정이 점점 줄어들 염려가 있다 하여 을미년(1775, 영조51)에 와서는 관모 제도를 없애 버렸고, 그 제도가 없어지자 경비를 충당할 길도 없어진 것이다.
내가 그리하여 정유년(1777, 정조1)에 처음으로 세모(稅帽) 제도를 두어 사행 때마다 관은(官銀)을 주지 않고 사적으로 장사해서 벌어 쓰게 하고, 모자는 역시 1000척을 기준으로 하여 척마다 세금 40냥씩 도합 4만 냥을 만부에서 받아 역원(譯院)에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어 묘당에 명해 칙수(勑需) 조례를 개정하게 하고 경기도 내의 각읍에는 칙수곡(勑需穀)을 비치하도록 했는데, 이 역시 공이 일찍 계획해 놓은 것을 약간 손질한 것뿐이다. 그리고 사행이 연경(燕京)을 꼭 섣달 스무사흗날까지 도착해야 하는 것과 연경에서의 공용(公用)을 은화 6천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도 새로 정한 법이고, 정사년(1797, 정조21) 연경 사행 때 8포(包)의 인삼을 쓴 것은 옛날부터 내려온 예였지만, 인삼 값이 뛰면 은으로 대신하고 은 값이 뛰면 인삼으로 대신하면 국가 체면도 서고 사체도 매우 정대하여 지금부터는 인삼과 은을 통용하도록 규정을 고쳐 그렇게 하도록 했으며 인삼은 150근을 기준으로 하였다.
그리고 저쪽 언어가 남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어(譯語)도 구본(舊本)과 신본(新本)이 따로 있어 신본은 그쪽 방어(方語)이고, 구본은 정음(正音)이다. 그래서 과시(科試)로 사람을 뽑을 때는 신본을 기준으로 하고, 장어(長語)로 사람을 뽑을 때는 구본을 기준하도록 했고, 또 문신(文臣)에게 명해 중국어 전강 때 관심을 기울여 익히도록 했으며, 조석으로 보는 서적에도 글자마다 곁에다 중국음을 달아보도록 했는데, 그 이면에는 중국을 사모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교린인(交隣引)

우리나라가 사귀는 이웃으로는 일본(日本), 유구(琉球), 야인(野人)이 있는데, 유구와 야인은 공손히 공물(貢物)을 잘 바치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들에게 교로(郊勞)와 관향(館享)의 의식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성묘(成廟) 때는 구변국왕(久邊國王) 이획(李獲)이 표문을 올리고 신(臣)이라고 칭했다가 그후 아무 소식이 없었고, 야인은 만주와 합병되고, 유구는 탐라(耽羅) 때문에 오지 못하는 실정인데, 유독 일본만 지금까지 서계(書契)를 통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사개(使价)가 서울까지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부산관(釜山館)에서 머물도록 하고 있으며, 전산(畠山) 이하 여러 추장들이 사신을 보내던 일은 선조 기유년(1729, 영조5)부터 없어졌다. 왜관(倭館)이 부산진 서쪽 초량(草梁) 마을에 있는데, 그것을 관(館)으로 대우한 것은 영묘 때부터이다. 서로 왕래하고 빙문(聘問)하는 절차로는 계해약조(癸亥約條), 임신약조(壬申約條), 기유약조(己酉約條), 계사정식(癸巳定式), 신묘약조(辛卯約條) 등이 있다. 재판차왜(裁判差倭)가 공무를 띠고 왔다가 그 일이 끝나면 곧 돌아가는 것은 효묘 때부터 시작되었고 관수왜(館守倭)가 금도(禁徒)를 거느리고 왜관에 있는 왜인들의 신변을 보호했던 것은 인묘 때 시작된 일이다. 임진왜란 이후 심유경(沈惟敬)이 화친할 것을 요구했으나 우리나라가 거절하자, 원가강(源家康)이 통호(通好)할 것을 지성으로 청하면서 계속 매달렸던 것이다.
공은 왜료미(倭料米)에 대해 속전(續典)대로 시행할 것을 청했는데, 그게 바로 국가 장래를 위한 좋은 제도였다. 내가 묘당(廟堂)에 명해 왜인 접대 절차를 만들도록 했는데, 첫 번째는 차왜(差倭)가 나오면 시탄(柴炭)을 담당 역관에게 책임 지우는 것을 영원히 혁파하고 제창(濟倉)에서 해마다 돈으로 400냥씩 보내 경비에 충당하도록 할 것, 두 번째는 제멋대로 차왜를 따라온 자들을 담당 역관이 잘 타일러서 도로 보내지 않고 만약 사사로이 그들을 접대한다면 그 역관을 극률(極律)로 다스릴 것, 세 번째는 차왜가 관에 있는 동안의 접대비를 기간에 맞추어 들여보내 줄 것, 네 번째는 왜인들 물품을 개시일(開市日)이 아니면 절대 내놓지 못하게 하고 만약 영곤(營閫)이나 읍진(邑鎭)에서 때 아니게 사 가는 자가 있으면 그를 일절 엄금할 것이며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 감사(監司) 이하를 중죄로 다스릴 것, 다섯 번째는 공목(公木)에 대한 세를 만부(灣府)의 모세(帽稅) 제도와 똑같이 50필(匹)에 세금 10냥을 부과하여 역관의 공비로 쓰게 할 것, 여섯 번째는 장사치들이 약재(藥材)와 해삼(海蔘)을 공미(公米)의 수표(手標)와 환산하여 거래하는 자는 잠상률(潛商律)로 논죄할 것, 일곱 번째는 양 끝을 푸른 실로 짠 공목 여덟 새[八升], 40척(尺)을 3월에서 4월까지는 동래부로 수송할 것, 여덟 번째는 내국(內局)에서 쓰는 황련(黃連)을 털을 제거하지 말아서 봉납하기 어려운 폐단을 없앨 것 등등인데, 이상과 같은 이웃 나라와의 일들을 놓고 공과 상세하게 상의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연신(筵臣)을 대할 때마다 근래 보기 드문 공의 제시(濟時) 역량에 대해 늘 언급하면서 어딘가 한쪽이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 지 오래이다.

[주-D001] 염락관민(濂洛關閩)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閔中)의 주희(朱熹)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