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저우(Киа-Чжоу, 膠州)만으로부터 일본해(Японское море)에 이르는 가장 최단거리의 통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히트 호펜 독일 탐사단 : 1868-1872년에 걸쳐 산동반도에서 원산만까지 이어지는 지질학적 자원 의 연결고리와 청나라의 진령산맥과 일본 남부의 연결고리에 관한 자원 조사를 마쳤다.
1897년 독일 선교사 2명이 산동에서 살해되자 독일은 상기 자료를 근거로 교주만을 조차지로 할양할 것을 청에 요구, 1898년부터 99년간 교주만은 독일의 조차지가 되었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5. РГАВМФ, ф.9, оп.1, д.26, лл.1~14об.
1899년 5월 26일
서울-1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두바소프(Федор Васильевич Дубасов) 각하
아쉽게도 이번에 저는 각하께 어떠한 기쁜 소식도 전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본인이 예측했던 것처럼, ‘만주철도기선회사(Пароходство Маньчжурской железной дороги)’라는 명칭으로 변경됨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최근에도 여느 때처럼 문제를 오래 끄는 전통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드미트렙스키(П.А. Дмитревский)는 외국인들에게 토지 판매를 허용하는 것에 대해 백성들에게 포고할 것을 요청하는 첫 번째 상신을 올렸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관련된 관리들이 국제조약들을 매우 잘 알고 있어 어떤 이렇다 할 명령 없이도 그들 스스로 필요로 하는 것을 할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이 일과 관련된 그 다음 상신에 대해 한국인들은 전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각하께서 원하시는 만큼 한국에서 우리의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어, 현재 어떤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군대의 도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마산포와 관련된 일은 파블로프(А.И. Павлов)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때 까지, 그리고 한국에서 우리의 이후의 정책 방향이 보다 분명해질 때 까지 연기하는 것이 좋으리라 사료됩니다. 그 이외에도 마산포와 관련된 일이 이미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을 반드시 언급해야합니다. 서울 발 최신 일본 전보(영국신문에 재인쇄 되어 실린)에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마산포를 조차하는 것과 돈을 뿌리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곳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는 것에 관해 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블라디보스톡의 신문은 어디에서 정보를 입수했는지 모르지만 마산포를 마치 러시아의 항구로 점령한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내일 모레인, 새로운 달력으로 6월 9일에 헨리 왕자가 이곳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성대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정중함으로 봤을 때, 이 만남이 일회적인 화려한 행사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곳 사정에 다소 익숙해지면서, 감히 본인이 판단하기로는 왕자의 방문이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서울~원산 구간의 철도 부설 사업과 관련된 독일의 이권 문제가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파블로프가 떠난 후, 독일인들은 개인적인 이윤목적으로 철도사업이권을 획득한 미국 기술자 콜브란(Кольбран)에게서 이 이권을 새로이 얻어내고자 합니다. 게다가 한국의 외채 문제를 다루기 위해 독일 영사가 한국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가장 확실하면서도 폭넓은 정치적 보증과 같은 것이 없이는 차관을 빌릴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 3일간 다양한 의전 행사들을 치른 후, 왕자는 60명의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서울과 원산 중간에 있는 마을인 당고개(Танкогай)로 갈 예정입니다. 그곳은 독일이 금광채굴권을 획득한 곳입니다. 이곳은 한국에서 보다 세력을 넓히기 위해 독일의 계획이 집중된 중심 지점입니다. 현지 주재 영사는 이미 당고개를 통과하는 독일의 전신선(그곳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독일 국민들을 위해!) 가설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아마도 미래의 철도 역시 바로 이 마을을 통과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만약 이 모든 계획이 실행된다면, 독일인들은 이 나라에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자오저우(Киа-Чжоу, 膠州)만으로부터 일본해(Японское море)에 이르는 가장 최단거리의 통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독일인들은 원산에서 공고한 지위를 확보한 뒤, 남만주에서 바로 일본해로 연결되는 유일한 우리의 통로을 차단할 것입니다.
Здешний консул просил уже о разрешении провести в Танкогай немецкую телеграфную линию (для нужды нескольких живущих там ныне немецких подданных!), через это же селение, вероятно, пройдет и будущ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 Таким образом, если бы все эти планы осуществились, то немцы, помимо большого политического влияния в стране, получат самый прямой выход из Киау-Чжоу в Японское море и с другой стороны, укрепившись в Гензане, закроют нам наиболее прямой и наиболее естественный выход к тому же морю со стороны южной Маньчжурии.
비로소 본인은 드미트렙스키의 건강상태에 따라서 야기될 수 있는 이러한 우려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 보고서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의 건강 상태는 최근 들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지내고 있으며, 겨우 집을 나서도 어느 정도 긴 대화를 하면 곧바로 완전히 지치곤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만약 제물포에 훌륭한 의사를 동반한 우리의 정박함이 도착했더라면, 치료비가 지나치게 비싼 미국인 의사에게 치료받지 않았을 겁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프렐리안(Прелиан)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항구의 개항이 하루하루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항구의 개항을 포고한 한국 사람들은, 이제 외국인들에게 도시 중심의 땅을 판매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강 아래도시 주변 12 베르스타註 013 거리의 토지 판매를 허용한다고 공고했습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일본인들과 유럽인들이 거꾸로 자신들의 입장에서 동의하지 않고 있어, 이 문제가 언제 해결 될지는 신만이 알 것입니다.
각하의 종인 저의 진실한 충성심과 마음 속 깊이 우러난 존경 어린 충언을 받아 들여 주시어, 부디 거절치 않기를 바라며, 이 보고서를 마치는 바입니다.
이반 스트렐비츠키(Ив. Стрельбицкий) 올림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6월 9일 양력 1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독일의 헨리 친왕을 접견하다
독일〔德國〕의 헨리〔顯利〕 친왕(親王)을 함녕전(咸寧殿)에서 접견하였다. 황태자가 시좌(侍坐)하였다. 【독일의 친왕은 강원도(江原道) 금성 금광(金城金鑛)을 가 보았다. 대개 독일인 워트〔華爾〕가 이 금광을 경영하였기 때문이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21.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61/69∼76об.
1895년 8월 7일
블라디보스톡
№ 470
수신:태평양연합함대 사령관 각하
탐사보고서
저는 제물포와 서울을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일본은 자국의 영향력으로 조선을 복속시키려 합니다. 조선을 위해서 청국과 전쟁을 일으켰다고 밝혔지만 사실 일본은 정치적인 계산속에서 자신의 진짜 목적을 숨기고 있습니다. 즉 상당한 인구와 노동력을 갖고 있는 일본은 항상 조선을 태평양에서 자신의 식민지와 영토 확장의 목적으로 보았습니다.
현재 조선을 점유하려는 자국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서 일본은 상공업의 진흥 등 간접적인 지배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조선내각에서 고문관으로 활동하는 50명의 청국인 관료를 교체하려고 합니다. 또한 일본은 모든 조선의 개항지에서 자국의 이주민을 보호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8,000명 이상 입니다. 최근 정보에 따르면 일본인이 원산에는 대략 1500명, 부산에는 4,395명, 제물포에는 2,504명, 서울에는 대략 200명, 평양에는 대략 50~60명 정도입니다. 또한 일본은 4,000명의 군대까지 보유하고 있어 조선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충분합니다. 일본 정부는 전략적 요충지인 제물포에서 호텔, 석탄저장소, 군대 교통로 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제물포와 서울에서 청국인들을 추방시키면서 일본 상인들로 채우고 있으며 부산과 원산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은 평양 인근의 강가에 전쟁을 대비한 상륙 장소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평양은 아직 외국인에게 개항이 되지 않는 장소입니다. 군대와 상업 강화를 위한 포석의 일환으로 일본군대는 평양 인근에 2,000명의 군대를 집결시키려고 합니다. 일본 이주민과 일본 군대를 평양 인근에 배치하려는 계획이 실현된다면 일본 정부는 유사시 평양에서 제물포와 서울에 신속히 군대를 파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일본은 군사와 상업 목적을 위해서 조선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조선에 대한 모든 열강의 간섭은 일본과의 마찰을 불러올 것입니다. 현재 유럽은 선교를 제외하고 조선에서 커다란 상업적인 이익이 없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유럽 열강의 모든 외교적인 행동은 적당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울과 제물포에서의 저의 짧은 체류는 조선의 국내 질서 및 조선 백성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선이 근본적으로 가난하고 배타적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구체제인 조선의 질서에 대해서 덧붙인다면, 조선은 주변 강대국과의 복잡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군대와 상공업 등이 취약합니다. 조선이 여전히 구체제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속에서 일본은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쟁을 결심했습니다.
저는 조선 국왕을 알현했고 이 자리에서 조선 국왕은 러시아 황제와의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밝혔고 조선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러시아 정부와의 협력을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7월 20일:저희는 즈푸에 정박하였고 여기서 ‘보브르’호와 순양함 ‘자비야카’호를 보았습니다. 저는 ‘자비야카’호의 승무원에게 제물포에서 온 전보를 전달했습니다.
7월 31일:저희는 원산항을 조사하기 위해서 출항했습니다. 하루 반나절이 걸려서야 저희는 원산항 주변의 교주(Киау-Чау) 만에 정박하였습니다. 31-го Июля, в исходе 4-го часа по полудни, оставил рейд бухты Киау-Чау, для следования в порт Генсан, взяв курс на W-ую оконечность острова Кельпарт.
8월 2일:저희는 섬을 살펴보려는 목적으로 거문도 항구에 접근하여 정박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군함도 없었습니다. 단지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가 거문도로부터 일본을 가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일본 기선이 출항할 때 저희는 거문도항 정박 중에 영국함대로부터 받은 예포를 쏘았습니다.
8월 4일:함대 사령관의 순양함이 원산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 기선회사인 ‘니폰 유센 가이샤(Nippon Yusen Kaisha)’에 소속된 상선 단 한척만이 정박하였습니다. 이 상선은 조선과 일본의 항구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사이를 순회합니다.
다음날 저는 원산항에 있는 일본 거주민을 볼 수 있도록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원산항 주변에 있는 지형과 환경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원산항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편리하고 유익합니다.
원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대략 1,500명입니다. 만의 연안을 따라 돌면 거기에는 적지 않는 집들이 있습니다. 원산항은 상업적 항구로서 충분히 수송선박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일본 거주지에는 우체국, 전신국, 일본은행 지부, 150명의 수비대 등이 존재합니다. 일본영사는 정원을 포함한 유럽 건축양식인 2층 집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원산은 조선 행정 구역상 매우 중요한 지방 행정소재지입니다.
저는 원산에서 러시아 해양대신 사무대리 각하에게 도착 전보를 보낼 수 있는가를 문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관리는 7월 6일부터 전신선이 폭풍으로 두절되었다고 밝히면서 저의 제안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일본 관리는 개인적인 전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하였습니다. 조선의 전신선은 일본 정부의 수중에 있으며 러시아로 보내는 유일한 전신도 일본 소유의 전선을 통해서 서울, 부산, 일본,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보내야 합니다. 따라서 포시에트, 원산, 서울을 거치는 러시아의 전신선이 필수적으로 설치되어야 합니다.
8월 6일 오전 8시에 원산을 조사하기 위해서 정박한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Владимир Мономах)’호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출항하였고 12시간 후인 8월 7일 5시에 도착하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톡까지의 항해는 좋은 기후 덕분에 순항하였습니다. 항해 중 2~4발의 북풍이 부는 가운데 잠시 비가 내렸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기 위해서 즈푸로부터 출항한 순양함의 함대사령관을 만났습니다. 또한 ‘보브르’호 소속 감찰관인 대위 리차고프(Рычагов)는 집안일 때문에 2주간 휴가를 떠날 예정입니다.
각하께 이하의 내용을 동봉하여 제출합니다.
1) 1895년 7월 17일 순양함 ‘크레이세르’호 사령관의 보고서
2) 최근 전투와 관련된 청국의 손실 도표
3)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호 장교가 작성한 제물포 항구 개관
4)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호 항해 지출과 관련된 도표
해군 중장 _____________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10. РГАВМФ, ф.9, оп.1, д.108, лл.117∼118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훈령에 따라 본인이 주관해야 하는 상황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 주둔 중인 부대를 교체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이에 본인은 하바롭스크에서 새로운 해병대를 파송합니다. 본인이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바, 모든 러시아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하듯이 상기 부대는 필요한 경우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장교의 교대에 관하여 말씀드리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해군중위 세메뉴트(Семенют)를 그곳으로 파견한 후, 공사관원 및 귀하 개인과 해병대 지휘관이 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한 본인은 이 문제의 해결을 귀하의 결정에 일임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인이 귀하께 공손히 청하는 바는 세메뉴트 해군중위가 새로운 해병대원들과 서울에 도착하면, 귀하의 결정을 양 장교에게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본인은 예방의 차원에서 부대원 중 선임 해군대령인 로굴랴(Рогуля)에게 병력 교대에 있어 기존의 주둔 병력은 교대 병력이 서울에 도착하고 난 이후에 서울을 출발하도록 하명해 두겠습니다. 이로 인해 하루 정도는 주거 공간 내의 사람들이 작은 불편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면 그것이 보다 편안할 것입니다.
‘그레먀쉬’호의 함장 해군대령 로굴랴에게 새로운 임명이 부여되어, 신임 함장 루드네프(Руднев) 해군대령이 하바롭스크에서 제물포로 향할 것입니다. 본인은 신임 함장이 개인적으로 귀하를 알현하도록 하명해 놓겠습니다.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의 전환 국면에 본인은 매우 애석해하고 있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생각들 즉, 우리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여 한국에서 이미 실행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항간에서는 벌써부터 들려오는 바, 우리정부의 눈에 한국 문제가 후퇴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그런 생각들이 저를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기실 귀하께서 어제 본인에게 발송해 주신 전문이 본인의 경각심을 상당 수준에서 자극했는데, 그 전문의 내용 속에서도 한국 문제와 관련된 일부 증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뤼순과 다롄만 점령 과업에서 우리는 이미 반전이 존재하지 않는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경에서는 상기 항만을 독일이 교주(Киау-Чау)를 점령한 것과 같은 원칙에서 러시아에 양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협상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무력 사용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С другой стороны в деле занятия Порт Артура и Талинвана, мы выступает уже на такой путь, с которого нет поворота – в Пекине уже начаты переговоры об уступке нам этих портов на тех же основаниях как Германия заняла Киау-Чау и наши требования мы решили поддерживать всеми мерами, не исключая и открытой силы
본인은 예언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기의 상황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심대한 곤란에 불가피하게 연루될 수 있으며,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결정적 행보를 취해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손을 옭아맬 수도 있습니다. 또한 중국에서 우리의 과업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본인의 생각처럼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서울을 방문하는 것에 장애가 될 것 같으며, 북경에서 시작된 협상의 결과가 완전히 밝혀지기 전까지는 방문이 불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귀하께서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본인에게 설명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시면, 본인은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귀하에게 요청을 드립니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제물포에 정박 중인 전함 중 한 척은 새로운 전함으로 교대해야 하지만, 본인은 ‘그레먀쉬’호나 ‘만주르(Манджур)’호가 뤼순항에 내항하지 않는 한, 교대해 줄 수 없으므로, 제물포에 정박 중인 전함 중 한 척을 의무해제 해주실 수 있을 경우, 그에 대한 전문을 저에게 발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에 대한 진정한 존경과 헌신을 믿어주시기 바라며, 안나 에라스토브나(Анна Эрастовна)에게 진심어린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두바소프(Ф. Дувасов)
당고개(唐古介) 와 당고개(堂古介)가 동시대인데도 둘이네요.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34년 신축 > 3월 6일 > 최종정보
선조 34년 신축(1601) 3월 6일(갑진)
34-03-06[01] 위관 김명원이 홍호와 희비의 형 시행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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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관 김명원이 아뢰기를,
“홍호와 희비가 모두 승복하였으니 취초(取招)한 대로 결안(結案)하여 조율해서 시행하고, 원고 최왕명(崔王命)과 사간 봉정ㆍ사동 등은 다시 물을 것이 없으니 모두 놓아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죄인 홍호와 희비는 당고개(唐古介)에서 형을 집행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34년 신축 > 10월 1일 > 최종정보
선조 34년 신축(1601) 10월 1일(을축)
34-10-01[03] 주인을 시해한 노비 수이 등이 복주되다
[DCI]ITKC_JT_N0_A34_10A_01A_00030_2005_031_XML DCI복사 URL복사
주인(主人)을 시해한 노(奴) 수이(水伊) 등이 복주되었다. 【승복하였기 때문이다. 운학(雲鶴)ㆍ인회(仁會)ㆍ봉환(奉還) 등과 함께 모두 당고개(堂古介)에서 행형(行刑)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 광해군 7년 을묘 > 8월 21일 > 최종정보
광해군 7년 을묘(1615) 8월 21일(을미)
07-08-21[04] 이창록을 성문 밖 당고개에서 형 집행함을 책하다
[DCI]ITKC_JT_O0_A07_08A_21A_00040_2005_014_XML DCI복사 URL복사
전교하였다.
“위를 범하는 흉악한 죄 중에 어찌 형을 죽이고 동생을 죽였다는 것으로 임금에게 죄를 돌린 것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이 자는 역적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처럼 인심이 불측하고 극악한 때에는 서울에 있는 유생들이 죽 늘어선 가운데 대낮에 군기시 앞길에서 형을 집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경솔하게 깊은 밤에 성문 밖 당고개에서 형을 집행하였으니 몹시 온당치 않다. 이 조율에 대해 아울러 살펴서 아뢰고, 뒷날에는 살펴서 하라.”
而率爾行刑于堂古介
【원전】 32 집 408 면
【분류】 사법(司法)
>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즉위년 갑진 > 12월 8일 > 최종정보
영조 즉위년 갑진(1724) 12월 8일(정축)
00-12-08[05] 목호룡과 김일경을 당고개에서 부대시 처참하다
[DCI]ITKC_JT_U0_A00_12A_08A_00050_2005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무상 부도 죄인(誣上不道罪人) 목호룡(睦虎龍)과 김일경(金一鏡)을 당일 당고개(唐古介)에서 부대시 처참(不待時處斬)하였다.
【원전】 41 집 442 면
【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6년 경술 > 8월 14일 > 최종정보
영조 6년 경술(1730) 8월 14일(경술)
06-08-14[01] 나계태ㆍ나계옥ㆍ배세익을 참형에 처하고 나계복ㆍ송내성은 참형 후 노적하다
[DCI]ITKC_JT_U0_A06_08A_14A_00010_2005_009_XML DCI복사 URL복사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역적 나홍언(羅弘彦)의 아들 나계태(羅啓泰)와 나숭헌(羅崇獻)의 아들 나계옥(羅啓沃)을 당고개(堂古介)에서 참형(斬刑)에 처하고, 배세익(裵世益)은 정상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며, 나계복(羅啓復)은 참형에 처한 뒤에 노적(孥籍)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정조실록 > 정조 10년 병오 > 5월 23일 > 최종정보
정조 10년 병오(1786) 5월 23일(을축)
10-05-23[04] 묘지에 대해 논의하다
[DCI]ITKC_JT_V0_A10_05A_23A_00040_2005_011_XML DCI복사 URL복사
이에 앞서 대신 및 도감의 신하들이 지사(地師)를 데리고 묘지를 택하였으나, 좋은 곳을 얻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고양(高陽)의 율목동(栗木洞)을 말하였으므로 살피고 돌아와서 여러 신하와 지사들이 모두 길지(吉地)라고 일컬었다. 호조 판서 조시준이 말하기를,
“이 땅이 정말 좋다고 들었으나, 다만 용산(龍山)의 큰길이 묘자리에 너무 가까우며, 조그만 산기슭이 막히기는 했으나 자연히 서로 보이므로 그 흠이 작지 않습니다.” 【용산의 큰길은 즉 당고개(堂古介)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