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봄에서 가을까지 양강(楊江)과 고도(姑島)와 고을 남문의 남당포(南堂浦)에서 연전연승하여 전후로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 온 것이 매우 많았으며

믿음을갖자 2022. 9. 10.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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剛齋集 卷八 / 碑 

 

일옹 최공 신도비명〔逸翁崔公神道碑銘

우리나라가 겪은 전쟁의 참화는 임진년과 정유년 섬나라 오랑캐의 변란보다 혹심했던 것은 없었다.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삼도(三道) 수군을 통솔하면서 중흥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그 휘하 병사 중에는 참으로 뛰어나 칭찬할 만한 사람이 많았다. 적이 물러난 후에 그 공로를 자처하지 않고 사직하고 강호로 돌아와 그 행적을 감춘 사람이 일옹 최공이 있다. 공은 이름이 희량(希亮), 자는 경명(景明), 스스로 일옹(逸翁)이라 호를 지었으며, 또 와룡(臥龍)이라 불렀다. 수원 최씨로 수성백(隋城伯) 영규(永奎)가 그 시조이며 대대로 높은 벼슬을 이어왔다. 고조 순(淳)은 경차관(敬差官), 증조 귀당(貴溏)은 첨사(僉使), 조부 영(瀛)은 영릉 참봉(英陵參奉)을 지냈다. 아버지 낙궁(樂窮)은 참된 본성을 잘 보존하여 자신의 분수를 지켰고 후한 덕으로 칭송 받았으며, 제용감 정(濟用監正)을 지냈고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어머니 광산 김씨는 부장 반(攀)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39년 경신년(1560, 명종15)에 공을 낳았다.

모습이 헌걸차고 기상이 원대하였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대의(大義)를 대략 통하였으며 부친의 명으로 무예를 익혔다. 경인년(1590, 선조23) 5월에 부친 승지공의 상을 당하여 예법대로 장례를 치뤘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란이 났으나 상중이라 여막에 있었으며, 갑오년(1594, 선조27)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이해 겨울에 충청 수사로 있는 장인 이계정(李繼鄭)의 좌막(佐幕 비장(裨將))이 되어 장인과 함께 수군을 통솔하여 한산도로 방비하러 갔다가 도중에 실수로 배에 불이나 배와 함께 모두가 타 죽거나 빠져 죽었다. 공은 두 개의 혁고(革鼓 북의 일종)를 옆구리에 끼고 바다에 뛰어 들어 여러 날 떠다니다가 운 좋게 다른 배를 만나 살았다. 이듬 해에 추천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구가 재차 쳐들어오자 선조가 왜적 우두머리 풍신수길의 초상을 걸어두고 여러 무신에게 활을 쏘라고 명했다. 공이 그 이마를 적중시키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면서 특별히 흥양 현감(興陽縣監)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연해(沿海) 수령에게 명을 내려 모두 수군에 소속시키자 공은 즉시 이충무공 통제사 휘하로 들어갔다. 충무공은 공의 용기와 지략을 알고서 공을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 전투 마다 용맹을 뽐내면서 선봉이 되어, 8척의 수군으로 바다를 뒤덮은 적과 맞닥뜨렸는데 명도(鳴島)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고, 첨산(尖山)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고, 예교(曳橋)에서 세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또 기이한 계책을 내어 밤에 적진을 습격하니 적이 놀라 달아나서 그들의 곡식 6백여 섬을 취하여 군량미로 사용하여 먹었다.

당시 충무공이 참소를 당해 직위 해제 되었으므로 공이 고을에 있으면서 상처투성이의 병졸을 앞장서서 이끌고 전함을 만들고 무기를 수선하고 직접 나무도 끌어 오면서 동고동락하였다. 이듬해 무술년(1598, 선조31)에 충무공이 다시 수군을 거느릴 때 특별히 공의 공로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봄에서 가을까지 양강(楊江)과 고도(姑島)와 고을 남문의 남당포(南堂浦)에서 연전연승하여 전후로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 온 것이 매우 많았으며 또 포로로 잡힌 우리나라 사람 7백여 명을 적을 회유하여 귀환토록 하였으니, 공로를 상신한 서첩이 지금도 전해진다.

참조:원문

自春徂秋,連獲捷勝於楊江姑島及縣南門南堂浦,前後斬獲甚衆,又誘還我人被虜者七百餘名,其上功文帖,至今尙在。

당시 병사(兵使)는 통제사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이 오직 충무공의 지휘를 받는 것을 미워하여 거짓을 보고해서 파직을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여섯 차례나 보고하자 비로소 교체를 허락하면서 전교하기를 “현재의 정세는 아침저녁으로 위급하여 교체할 때 반드시 큰 일이 생길 것이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임금이 공을 알아주었을 볼 수 있다. 얼마 후 새로 부임한 수령 고덕장(高德蔣)이 과연 적에게 패하여 사망하였다. 공은 관직을 그만 둔 뒤에도 통제사 막하에 머물면서 군사 작전을 도왔다. 11월에 충무공이 수군을 대규모로 모아 노량에서 격전을 벌여 적선 수백 척을 불태우고 남해까지 추격하였다. 적은 크게 기세가 꺾여 달아났으나 충무공은 적의 탄환을 맞고 사망하였다.

공은 이미 무고를 당하여 관직을 그만두었고 또 원수(元帥)를 잃어 더 이상 세상에 뜻이 없었다. 마침내 통곡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행적을 숨기면서 노년을 보낼 계획을 하였다. 다음과 같이 지은 시가 있다.

 

난리 속에 세상사가 변하여 / 亂中人事變
고향으로 돌아와 이름을 숨기려 하네 / 歸臥欲藏名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인데 / 依然舊時物
바위 위에 백구가 나를 맞이하는구나 / 磯上白鷗迎

 

계묘년(1603, 선조36)에 모부인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부친상처럼 장례를 치루었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조정에서 논공행상할 때 공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다. 공은 평소 겸손함을 지켜서 스스로 자부하거나 자랑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얼마 후 혼조(昏朝 광해군)를 만나서, 벼슬에서 버려지는 것도 스스로 달게 받아들였다. 공론이 더욱 암울해지자 고을의 진사 오정남(吳挺男) 등 2백여 명이 소를 올렸으나 거절되어 답을 받지 못하였다. 공은 금강(錦江) 가에 작은 정자를 지어 어부와 벗하고 시와 술을 즐기면서 세상사를 잊은 듯하였다. 그러면서도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빈번이 시로 표현되었다. 함께 교유하며 시를 주고받은 사람은 모두 당시의 명사였지만, 백호(白湖) 임제(林悌), 한호(閑好) 임련(),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은 그중에서도 저명한 사람이었다.

인조 병자년(1636, 인조14)에 청나라 군대가 갑자기 쳐들어 와서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는데, 당시 공의 나이 77세였다. 밖에 나가 서서 북쪽을 향하여 밤낮으로 외치고 통곡하며 여러 아들에게 “남한산성이 무너지면 나 또한 자결할 것이다.”고 하면서 셋째 아들 감찰 최결(崔結)을 보내어 임금을 모시도록 하였다.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비탄과 울분을 감당하지 못하고서 직접 글을 지어, 자신이 늙어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하지 못하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간절한 마음을 서술하였으며 결말에는 정권을 잡은 자들을 역사의 죄인이라고 책망하였다.

90세에 《중용》을 읽고 글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매일 열심히 노력하다가 죽은 후에 그치겠다.”고 하였다. 대질(大耋 80세)이라 하여 가선대부에 올랐다. 신묘년(1652, 효종2) 12월 29일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92세이며, 대박산(大朴山) 아래 유좌(酉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전배(前配)는 원주 이씨로 수사(水使) 계정(繼鄭)의 따님이며, 계배(繼配)는 제주 양씨로 주부 달수(達洙)의 따님이다. 전배 사이에 9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서(緖)는 군자감(軍資監)과 참봉을 지냈으며, 차남은 치(緻), 삼남이 바로 감찰 결(結)이고, 사남은 규(糾), 오남은 회(繪), 육남은 급(級), 칠남은 온(蘊), 팔남은 수(綬), 구남은 현(絢)이며, 장녀는 민승윤(閔承胤)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문재상(文載尙)에게 시집갔다. 이씨 묘는 시랑면(侍郞面) 목동(木洞) 조상 무덤에 있고, 양씨는 공과 합장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후 124년이 되는 영조 갑오년(1774, 영조50)에 대신이 연석에서 주청하여 자헌대부 병조 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정조 경신년(1800, 정조24)에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충무공을 제향할 때 공을 배향하였다.

아, 공은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성품을 타고 났으며 나라를 지킬 재주를 겸비했는데 어린 나이에 투필(投筆)하였다. 당시 나라는 매우 혼란하였으니 임금도 공의 재주를 남다르게 여겼고, 장군도 그의 용맹에 의지하였다. 노량(露梁)과 한산도 등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다. 호남 바닷가의 사악한 기운을 깨끗이 쓸어 중흥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마침내 1등으로 공훈이 기록되었다.

아, 장하다. 원수(元帥 이순신)가 사망하자, 죄에 빠뜨리려고 하는 자가 헛점을 노렸지만 낌새를 알아채고 초연하게 호남 바닷가에 자취를 숨기고 종신토록 실의에 찬 생활을 하였지만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현명하지 않은가? 병정(丙丁 1636년, 1637년의 병자호란을 말함)의 해에 공은 이미 나이가 들었지만 아들을 보내어 나랏일에 힘쓰게 하고 충성을 다 바칠 것을 맹세토록 하였다. 천지가 뒤집힌 후에는《춘추》의 대의를 펼칠 수 없음을 개탄하였으며 격앙된 충성심과 울분을 자주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나이 90에도 여전히 독서하고 자신을 경계하였으니 어찌 무관(武官)과 같은 부류로 공을 볼 수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공로가 있으나 상을 받지 못하였고 충성하였으나 시기를 받아 끝내 불우한 날을 보내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하늘의 도가 매우 밝아 장수하고 많은 아들을 두는 복을 누렸다. 여론 또한 1백 년 지난 뒤에 크게 정해져 조정은 정경(正卿)으로 추증하고, 사림은 고을 사당에 배향하였으니 공은 이에 유감이 없을 것이다. 공의 5대손 제동(齊東)이 늙은 나이에 발이 부르트며 찾아와서 묘소에 세워 둘 글을 청하기에, 나는 글을 잘 짓지 못한다고 사양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쓴다. 이에 그의 행장에 근거하여 대략 서술하며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성품이요 / 忠義之性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 文武之才
분개하여 붓을 던지고 군문에 투신하였는데 / 慨然投筆
시국의 어려움을 만났다 / 遭時艱虞
활을 쏘아 적의 우두머리 초상을 명중시키어 / 射中賊像
특별히 임금 은혜 입었다 / 特荷聖眷
남쪽에서 사악한 기운이 거듭 일어나자 / 南氛再漲
바닷가 마을 수령으로 임명되었다 / 分符海縣
당시 충무공이 / 惟時忠武
수군을 통솔하였는데 / 統率舟師
공이 충성과 용맹을 떨쳐 / 公奮忠勇
가장 인정을 받았다 / 最被其知
활을 들고 앞장서서 / 蝥弧登先
거북선이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 龜艦著前
남해에는 피가 넘쳐흐르자 / 血漲南海
한산도의 사악한 기운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 氛廓閑山
중흥의 위대한 업적은 / 中興偉績
공이 실로 남보다 앞서는데 / 公實先後
비방을 당해 벼슬을 그만 두었고 / 遭間解紱
또 원수이신 충무공이 돌아가셨다 / 又喪元帥
강해는 쓸쓸하기만 한데 / 蕭然江海
흔적을 감추고 이름을 숨겼다 / 斂跡藏名
인각에서 공로가 으뜸이지만 / 功最麟閣
갈매기와 약속한 뜻은 견고하였다 / 志堅鷗盟
사림의 여론은 우울하여 / 士論有鬱
소를 올려 진탕과 같다고 하소연하였다 / 疏訟陳湯
저 미워하고 질시하는 사람들은 / 彼哉媢疾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 於公何傷
나이는 서산에 지는 해와 같은데 / 桑楡暮景
또 병자호란을 만나 / 又値丙丁
자식을 대신 보내어 나라위해 힘쓰라고 하였으니 / 替子勤王
더욱 충성과 진실을 볼 수 있다 / 愈見忠貞
《춘추》의 의리는 / 春秋之義
읊을 때마다 반드시 드러내었으며 / 有吟必形
공론이 정해지기 까지는 / 公議之定
백 년을 기다려야 했다네 / 必待百年
관작을 추증하여 공훈에 보답하였으며 / 貤爵酬勳
사당을 세워 경건히 모셨다 / 立祠揭虔
내가 그의 공적을 모아 / 我撮其蹟
큰 비석에 새겼으니 / 以篆穹石
천만년 지나도록 / 有來千億
지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경의를 표하리라 / 過者必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