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관련기록

일본은 自北岸去拘邪韓國七千里 거리에 있다.

믿음을갖자 2023. 11. 14. 08:54

慶星大 김해(金海) 대성(大成)동 고분群 3차 조사에서 (부산(釜山) = 연합(聯合)) 金官가야(伽倻)의 국가 형성 이전 단계로 알려져 있는 拘邪國의 집단취락지로 추정되는 기원전 2-1세기께의 環濠유적이 경남(慶南) 김해(金海)시 대성(大成)동 고분群에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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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2하

무신년 신라 실성왕 7년, 고구려 광개토왕 17년, 백제 전지왕 4년(진 안제 의희 4,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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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정월 백제가 여신(餘信)으로 상좌평(上佐平)을 삼았다.

백제가 6좌평 위에 다시 상좌평을 두어 지금의 총재(冢宰)와 같다 여신을 임명하고 군국의 일을 위임하였다.

 

2월 왜가 대마도에 군영(軍營)을 설치하였다.

섬은 옛날의 대해국(對海國)인데 신라의 동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 땅이 험조하고 숲이 우거졌으며 길은 새나 사슴이 다니는 길 같고, 토지가 메말라 좋은 밭이 없어서 주민들이 해물(海物)을 먹고 살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면서 곡식을 사들였다.

옛날에는 신라에 소속되었었으나, 그곳이 바다로 멀리 떨어져 지키기 어려우므로 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왜인으로 신라에 오는 자는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하게 되니, 참으로 두 나라의 요충(要衝) 지대이다. 《통고(通考)》에서 보충

이때에 와서 왜인이 군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양식을 저장하여, 신라를 엄습할 계획을 하였다.

신라 사람이 이를 염탐하여 알고서 왕은 그들이 출발하기에 앞질러 먼저 공격하려 하니,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기를,

“신은 들으니, 전쟁이란 위험한 것이라 합니다. 더구나 큰 바다를 건너가서 남을 치는 것이겠습니까? 만일 불리(不利)하다면 후회한들 어찌할 수 없으리니 험준한 데에 관문(關門)을 설치하였다가 저들이 오면 방어하면서 형편을 보아 나가 치는 것만 같지 못할 듯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을 이르게 하는 것이요, 남에게 부름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계책의 최상입니다.”

하니, 왕이 그 말을 좇았다.

【안】 대마도가 여기에 처음 보인다.

 

3월 고구려가 사신을 북연(北燕 나라 이름. 5호 16국 가운데 하나다)에 보내니, 북연왕 고운(高雲)이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고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고구려에서 갈려간 서파(庶派)이다. 연에 벼슬하면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고 말하여, 고(高)로 성을 삼았다.

고운이 연왕 모용보(慕容寶)의 양자(養子)가 되었을 적에 풍발(馮跋)이 기특히 여기어 벗으로 상종하더니, 연왕 모용희가 무도(無道)하매 풍발이 고운을 강요하여 왕이 되게 하였다. 고운이 천왕의 위에 오르자 다시 성을 고씨라 하였다.

고구려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연에 보내서 종족(宗族)의 우의를 펴게 하니, 고운도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고운은 얼마 있지 않아 그 부하에게 시해(弑害)를 당하니 풍발이 다시 연왕이라 일컬었다. 《진서(晉書)》에서 참고하여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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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제10권 / 동사문답(東史問答)

성호 선생에게 올린 편지. 무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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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 하교에서 “‘대마도가 속국이다.’는 것은 이미 믿을 만한 증거가 없으니, 괜히 허세부려 공갈치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셨으니,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다만, 《여지승람》에서 “옛날 우리 계림에 예속되었다.”하고 태종조에서 대마도를 치는 교서에 “대마도는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었는데, 다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왜노(倭奴)에게 점거 당했을 뿐이다.” 하고, 그 대마도를 유시한 글에 “대마도는 우리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되었으니 본래 우리 나라의 강역이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문적에 실려 있으니, 밝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여러 설들은 무슨 책을 따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전략상의 모사는 권세를 숭상하므로 그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또한 어떻게 그것이 옛일임을 알겠습니까?

대마도가 우리 나라의 역사에 나타난 것으로 말하면, 신라 실성왕(實聖王) 7년에 비로소 보이는데, 이 때는 아마 이미 일본에 소속된 뒤였을 것입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는 “대방(帶方)으로부터 한수(韓水)를 거쳐 가서 약간 동쪽으로 향하다가 약간 남쪽으로 향하여 대해국(對海國)에 이르면 사방이 4백 리쯤 되는데, 토지는 산이 험하여 깊은 숲이 많아 마치 새나 사슴의 길과 같고 좋은 전토가 없으므로 해산물을 먹으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가서 교역을 한다. 또 남쪽으로 한해(瀚海)라는 이름을 가진 한 바다를 건너면서 한 큰 나라에 이른다.……” 하였습니다. 이 두 나라는 틀림없이 대마도와 일기도(一歧島)일 것인데, 옛적의 이름이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또 《북사(北史)》에, “수(隋) 나라가 배세청(裵世淸)을 왜국(倭國)으로 사신보내니, 배세청은 백제를 지나가서 죽도(竹島)에 이르고 남쪽으로 탐라국(耽羅國)을 바라보며, 도사마국(都斯麻國)을 거쳐 갔는데, 멀리 큰 바다 속에 있었다. 또 동쪽으로 일지국(一支國)에 이르렀다.” 하였습니다. 상고하건대, 이 책의 도사마국도 아마 대마도였을 것입니다. 무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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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 雜纂集 一 / 文獻備考刊誤

卷十九【輿地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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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號。對馬島若係倭地,則其置營不必載羅史也。案 對馬島,後漢之末,稱對海國一岐島稱一大國,見《文獻通考》。

 

仝號。太祖五年,遣金士衡ㆍ南在征一岐ㆍ對馬等島。案 太祖乙亥十一月,倭寇蔚州,遣金士衡ㆍ南在等討逐之,知蔚州事李殷被俘,拘囚至對馬島而還。此云征一岐ㆍ對 馬者,全非實事。嘗見《南氏家乘》有此說,蓋其子孫之夸語也。

 

四號。大渚浦。案 ‘大渚’當作火者。

 

仝號。大渚浦。【在南四十里】 案 ‘浦’當作島。

 

十五號。古今島。【在南周一百五里】 案 古今島疊載,【見十四號】 周皆一百五里,似非二島也。古今島本臯夷島,省文作古尒島,臯夷與古尒聲相近,尒又轉爲今,遂作古今島。

 

仝號。甫吉島。【在一百二十里】 案 注似落南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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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猶堂全書補遺○日本考 / 日本考 卷之一 洌水 丁鏞 輯

大明一統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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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國,故倭奴國。其地東西南北各數千里,西南至海,東北隔以大山。國王以王爲姓,歷世不易。文武僚吏皆世官。其地有五畿七道,以州統郡,附庸國凡百餘。自北岸去拘邪韓國七千里,曰對海國,又南渡一海千餘里,曰瀚海國,又渡一海千餘里,曰末盧國。東南陸行五百里,曰尹都國,又東南五百里曰奴國,又東百里,曰不彌國,又南水行二十日,曰投馬國,又南水行十日,陸行一月,曰邪馬一國,其次曰斯馬國,曰已百支國,曰伊邪國,曰羣支國,曰彌奴國,曰好古都國,曰不呼國,曰姐奴國,曰對蘓國,曰蘓奴國,曰呼邑國,曰華奴蘓奴國,曰鬼國,曰爲吾國,曰鬼奴國,曰邪馬國,曰躬臣國,曰巴利國,曰支惟國,曰烏奴國,皆倭王境界所盡。其國小者百里,大不過五百里,戶小者千餘,多不過一二萬。自漢武帝滅朝鮮,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皆稱王。其大倭王居邪馬臺國,卽邪馬堆是已。光武中元二年始來朝貢,後國乱,國人立其女子曰卑彌呼爲王,其宗女壹與繼之,後復立男王,並受中國爵命,厯魏ㆍ晋ㆍ宋ㆍ隋皆來貢,稍習夏音。唐咸亨初,惡倭名,更號日本,自以其國近日所出,故名。或云:“日本乃小國,爲倭所并,故冒其號。” 開元ㆍ貞元中,其使有願留中國授經肄業者,久乃請還。宋雍熙後,累來朝貢,熙寧以後,來者皆僧也。元世祖遣使招喩之,不至,命范文虎等率兵十萬征之,至五龍山,暴風破舟,敗績。終元之世,使竟不至。

本朝洪武四年,國王良懷遣使臣僧祖朝貢,其後數歲一來,至今不絶。自永樂以來,其國王嗣立,皆受朝廷冊封。

東西南北皆際於海,去遼東甚遠,去閩浙甚邇。其朝貢,由浙之寧波以達於京師。

山有壽安鎭國山,國之鎭山,本朝永樂初御製文賜之,刻碑立其地。

土産有金 【東奧州出】 ㆍ銀 【西別島出】 ㆍ水晶 【有靑ㆍ紅ㆍ白三色】 ㆍ琥珀ㆍ硫黃ㆍ水銀ㆍ銅鐵ㆍ丹土ㆍ白珠ㆍ靑玉ㆍ冬靑木ㆍ多羅木ㆍ杉木ㆍ水牛ㆍ馿羊ㆍ黑雉ㆍ細絹ㆍ花布ㆍ硯螺ㆍ鈿扇ㆍ㓒。【以漆製器,甚工緻】

《寰宇記》云:“男子黥面文身,衣裙襦,橫幅,結束相連,不施縫綴。女人衣如單被,穿其中以貫頭,皆被髮徒跣。其王至隋時始製冠,以練綵爲之,而餙以金玉。人不盜竊,少爭訟。婚嫁不取同姓,父母兄弟異處,惟會同男女無別。飮食以手,而用籩豆,以蹲跪爲恭敬。死有棺無椁,封土作塚。初喪,哭泣,不食肉飮酒,親戚就屍歌舞爲樂。旣葬,擧家入水浴潔,以祓不祥。兵有矛盾ㆍ木弓ㆍ竹矢,以骨爲鏃。灼骨以卜吉凶,信巫覡,好棊簙ㆍ握槊ㆍ樗蒲之戱。初無文字,唯刻木結繩,後頗重儒書,有好學能属文者。尤信佛法,有《五經》書及佛經ㆍ唐《白居易集》,皆得自中國云。”

《宋史》云:“土宜五穀而少麥,交易用錢,文曰‘乾文大寶’。樂有中國ㆍ高麗二部。四時寒暑大類中國。婦人皆被髮,一衣用二三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