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성은 서울에서 30리 거리에 있는데, 형세가 극히 험하고 앞서 몇 해를 두고 성을 수축하고 양식도 저장하여 강도(江都)의 성원(聲援)이 되게 한 것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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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잡록 4(續雜錄四)
무인년 숭정(崇禎) 11년, 청(淸) 숭덕(崇德) 3년, 인조 16년(16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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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전라도의 처벌 받은 군인들이 서울로 향해서 떠났는데, 도계(道界)에 이르니 포(布)를 거두기로 정하였다는 공문(公文)이 내려와서 군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포는 한 집에서 11필씩 바치기로 되었다. 본부(本府)에는 해당되는 군졸이 80여 명이었다. 우영군(右營軍)은 처음부터 광교(廣敎)의 역(役)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또 경상(境上)의 점고(點考)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먼저 서울에서 두 달 동안 벌역(罰役)을 시키기로 정하여 군졸이 서울에 가서 부역하게 되자, 시골 백성들이 그 고생을 견뎌내지 못하여 대가(代價)를 내기로 하고 내려왔더니, 두 번째로 남한산성 수축공사에 부역하도록 정하였고, 또 포(布) 11필을 바치기로 하였다.
○ 청국에서 조총(鳥銃) 천 자루와 염초와 화약 천 근과 검은 각궁(角弓)과 편전(片箭)ㆍ장창(長鎗)ㆍ대검(大釼) 등 각 천 자루를 바치기를 기한을 정하여 왔으므로 이것을 준비하느라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하였다.
16일 밤 2경에 천둥 소리가 오래도록 공중에서 울렸다. 유성(流星) 같은 것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갔다.
○ 일본(日本)에서 말 5필과 백로(白鷺) 4마리를 그린 그림을 보내왔다. 그러나 우리 조야(朝野)에서는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때에 명 나라에서 일본에 구원병을 청한다는 말이 있었다. 왜사(倭使)가 부산(釜山)에 도착하여 서계(書契)도 내놓지 않고 서울로 바로 가기를 원하였다. 변장(邊將)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가지고 온 서계를 보자고 청하였으나 끝내 내놓지 아니하고 도로 들어갔다.
○ 명 나라에서 왜인(倭人)에게 청병(請兵)한 칙서(勅書)에 이르기를, “대명황제는 일본 국왕에게 칙유(勅諭)하노라. 지성으로 사대(事大)하던 조선이 지금 호적(胡賊)의 침략을 받아서 형세가 궁하고 힘이 꺾여 국왕이 나가서 항복하고 왕자와 비빈(妃嬪)이 다 붙잡혀 갔으니, 이것은 대국의 수치이다. 너희 나라는 비록 우리 번국(藩國)의 이름에 들지는 않았으나 15만의 병력으로 서해(西海)로부터 협공(挾攻)하면 산동(山東)의 군량을 보내서 먹일 것이고, 또 제후(諸侯)의 반열에 올리게 하리라.” 이때 이 글이 나왔으나 명 나라에서 온 것이 아니고 호서(湖西)내포(內浦) 사람이 만들어 호남 지방으로 전해 보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자료로 한 것이라 한다. 또 왜병은 우리나라를 경유하여 갈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29일 천둥 소리가 공중을 울렸다. 전라도내의 전세(田稅)는 지난해의 절반을 기준으로 하여 포목(布木)으로 바치게 하였다.
○ 옥과현(玉果縣) 사람이 향교(鄕校)에 들어가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위패 2좌를 훔쳐내어 여러 조각으로 쪼개서 아문 밖에다 꽂아 놓았다. 현감 민여찬(閔汝粲)이 보고하여 왔으므로 그때 당번인 유생들을 강정(降定)하였다.
○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강원도 처자(處子) 단자가 이달 20일까지 기한을 정하여 올리기로 되었으나 아직까지 한 장도 올리지 아니하니 극히 부당합니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감사를 추고(推考)하여 빨리 독촉하여 올려 보내도록 하소서.”하였다. 또 아뢰기를, “충청감사 관문(關文)에 의하면 병사(兵使)ㆍ수사(水使)와 우후(虞侯)ㆍ수령(守令)ㆍ찰방(察訪)ㆍ첨사(僉使)ㆍ만호(萬戶)와 각기 그 고을 안에 사는 사대부 집의 처자를 조사하였으나 한 사람도 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하니, 지극히 부당한 말입니다. 다시 엄중히 조사하여 이달 안으로 올려 보내도록 하게 하고, 그중에 처자의 나이를 가감하거나 끝까지 숨기고 있는 자는 그 가장 (家長)을 적발하여 중한 법으로 다스리도록 공문을 보내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 청국 사람들이 처음으로 담배를 아주 좋아하여 사절들이 갈 때마다 사상(私商)들이 무수히 싣고 갔는데, 이후에 담배로 화재가 나서 집 천여 호의 부락이 일시에 불탔다. 한(汗)이 크게 성내어 일체 담배 수입을 금지하고 범하는 자는 목을 베기로 하고, 이어 우리나라에 글을 보내어 문책하였다.
2월 초 1일 2경에 달무리가 지다. 3일 밤 1ㆍ2ㆍ3경에는 간방(艮方)ㆍ진방(震方)ㆍ손방(巽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나타났고, 4경에는 간방(艮方)에 화광이 있었고, 5경에는 곤방(坤方)에 기운이 화광 같았다. 4일 밤에는 달이 태백(太白)을 범하였고, 1ㆍ2경에는 간방(艮方)에 화광이 있었다. 9일은 달무리가 지다.
○ 전라도의 광교전사(廣敎戰士)들에 대해 김준룡(金浚龍)의 말에 의해서 앞장서서 힘써 싸운 자는 상직(賞職)을 주었다. 그중에는 속여서 받은 자가 많았다.
○ 서울 안에 익명시(匿名詩)가 있었다. 그 글에,
동풍 부는 3월 풀은 방석 같을 제 / 東風三月草如茵
버들꽃은 철마(鐵馬) 티끌에 다 시들어졌네 / 柳花凋殘鐵馬塵
한 조각 복주(福州)의 깨끗한 땅에 / 一片福州乾淨地
어느 누가 꽃을 심을 사람인지 알지 못하네 / 不知誰是種花人
하였다.
○ 삼남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수축에 조력하도록 하였다.
○ 우상(右相) 신경진(申景禛)으로 사은사(謝恩使)를 삼아서 심양(審陽)에 보냈다. 신경진이 그곳에 가서 보내온 장계(狀啓)에, “황제가 지금 멀리 여행 중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일의 경과를 장계로 올리려 합니다. 이번 길에는 모든 일을 다 오왕(五王)에게 여쭈라고 하였는데, 구왕(九王)도 역시 축성공사(築城工事)로 나갔습니다. 여기는 출정(出征)과 둔전(屯田) 등 여러 가지 사무가 번다하여 응접할 여가가 없으므로 그간 사정을 잘 알 수 없으나, 대개는 이쪽의 형편을 비밀리 살펴보니 모두 분주한 기색이 많이 보입니다. 영(英)ㆍ마(馬) 두 장수는 이동(迤東) 등지에 나가서 순시하고 있습니다. 방물(方物)은 그들이 돌아오면 진정(進呈)하겠으나, 시기가 빠를지 늦을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잡혀간 포로를 속(贖)으로 귀환 시키려는 일은 그 값을 의론하는 데 온갖 방법으로 조종하고 수단을 부려서 역시 쉽게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황제가 서쪽으로 간 후에 소식이 묘연하여 아직 들을 수 없고, 행군하는 속도가 심히 빨라서 말들이 피로하여 병든 것이 많으며, 군졸도 화살에 맞아서 돌아오는 자가 이르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하였다.
○ 의주 부윤(義州府尹)의 장계는 아래와 같다. “정탐이 보고하기를,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하루 3백 리씩 가니, 사람과 말이 다 피로하여 중도에서 엎어지는 자가 심히 많았다.’합니다. 한인(漢人) 3명이 석성도(石城島)에서 심양(瀋陽)에 항복해 와서 말하기를, ‘심지상(沈志尙)과 여벽(呂碧) 등이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해주위(海州衛)에서 육지에 올랐다.’하니, 즉시 영호군(領護軍) 1천여 기(騎)를 출동시켜 나가게 하였다 합니다. 명년 봄에는 또 구련성(九連城)에 창고를 세워서 우리나라에서 바치는 세미(稅米)를 받아 둘 장소로 한다 합니다. 또 선철(宣鐵) 둥지에도 한선(漢船)이 정박하고 있는데 전에 비하여 다른 것이 있으므로, 본부의 전 판관(判官) 최효일(崔孝一)을 시켜 물어보게 하니, 한인(漢人)장수기(張壽旗)가 말하기를, ‘황제[明帝]가 크게 성을 내어 일본(日本)과 유구(琉球)ㆍ월남ㆍ서양(西洋) 등 여러 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장차 세력을 합쳐서 청국을 섬멸하려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알고 있는가? 병력 출동할 기한이 이미 정하여져 있으니, 만약 4ㆍ5월에 가면 너희들도 이곳에 있기가 어려울 것이다.’하였습니다. 최효일이 말하기를, ‘여벽(呂碧)은 지금 어디 있는가?’하니, 답하기를, ‘지금 등주(登州)에 있고, 진 도독(陳都督)도 수군 3백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석성도에 와서 정박하고 있는데, 3월 초순에는 장자도(獐子島)로 나가려 한다. 국왕에 보내는 자문(咨文)과 괘포(掛袍) 등물을 방어사(防禦使)에게 보내서, 반약 받아서 전달하지 않는다면 여벽(呂碧)을 시켜 수로로 바로 경기도해읍(海邑)으로 가서 전달하기로 한다.’하였습니다. 3일에는 한(汗)이 군사를 거느리고 선부대동(宣府大同)으로 범해 들어갔으나, 이것은 명 나라가 유인해서 가는 것이라 합니다.”하였다.
○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멀리 있는 여러 도에서 올리는 처자(處子)단자는 6월 20일 까지 기한을 정하였으니, 만약 단자를 다 받은 뒤에 또 다시 공문을 보내어 그 처자들을 올려보내도록 하면 왕복하는 사이에 날짜가 많이 허비되어 간택이 자연 지체되어 불편합니다. 지금부터 한편으로는 단자를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처자를 서울로 올려보내게 할 것을 원도(遠道)와 중도(中道)에 통지하고, 서울에 있는 처자들은 먼 지방 처자가 오기를 기다릴 것 없이 이달 안으로 먼저 들어오게 하여 간택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으니, 이 뜻으로 한성부(漢城府)에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먼 지방의 처자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일시에 같이 간택하라.”하였다.
○ 양사(兩司)와 옥당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윤방(尹昉)과 김류(金瑬)를 위리안치(圍籬安置)하기를 청합니다.”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리기를, “합계로 청한 것을 쾌히 좇아주소서. 또 지금 남방에서도 근심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비할 방책을 강구하지 않음이 없으나 다만 사율(師律)에 대하여 엄격히 하지 못하여 적을 놓아주어 임금을 저버린 원수가 아직 목을 보존하고 있으니, 각 도의 조그마한 장수들은 혹 사율을 받은 자가 있다면 죽은 자가 도리어 원통하게 되었습니다. 이러고서 어찌 인심을 복종케 하겠습니까?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사율을 바르게 시행하지 못하면 뒤에 장수가 되는 자는 모두 살아날 길이 있는 것만 알고서 마침내 죽도록 싸우겠다는 마음은 없을 것이니, 비록 예리한 무기와 견고한 성지(城池)가 있다 할지라도 어디에 그것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김자점(金自點)의 죄는 먼저 사율대로 죽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외에 군사를 잃고 부로(俘虜)가 되어 구차스럽게 살아난 무리들을 차례로 처단하면 허물어진 기강이 스스로 떨쳐져 사기가 백배가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채납(採納)하시어 쾌히 결단하소서.”하였다.
○ 또 다음과 같이 합계(合啓)하다.
윤방과 김유는 모두 나라를 그르친 심히 간악한 자인데, 전일에 시행한 벌이 그 죄를 징계하기에 부족한데도 곧 그것을 중지시키니, 이에 공론이 격발(激發)하여 다시 죄를 청하는 의론이 일어난 것입니다. 양사에서 전후로 여러 번 논의하여 이미 다 갖추어 진술하였으니, 성상께서 반드시 다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김유가 장수와 정승이 되어 10여 년을 지나오면서 전하께서 그에게 위이하심이 이보다 더할 자가 없었는데, 적에 왕래하면서 틈을 만들어 난 이후로 싸우기로 하든지 혹 화친하기로 하든지 마땅히 우리 묘당(廟堂)의 일정한 방침이 있어야 했는데 그의 호령하고 조치한 것이 한결같이 그럭저럭 하여 성상께서 경계하는 비답까지 내리시게 하였습니다. 적병이 깊이 쳐들어 왔을 적에는 성상을 받들어 피란하는 계책조차 망연히 정하지 못하여 임금을 거의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지경에까지 빠지게 하였습니다. 남한산성에서 군을 지휘할 때에도 한 가지도 볼 만한 공적이 없었고, 북문에서 자기가 친히 독전(督戰)하다가 우리의 정예부대를 다 죽게 하였으니, 성을 지킨 공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강도(江都) 검찰의 책임을 그 아들에게 주도록 하였으니 나라를 망친 죄는 깊습니다. 마침내 당당한 우리나라를 이러한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그 허물은 이 사람을 놓아 두고 누가 지겠습니까? 윤방으로 말하면, 전하께서 선왕조의 늙은 신하라 하여 종묘사직의 중한 책임을 부탁하였으니, 그 책임이 어떠한 것인데 차마 말할 수 없는 통분한 지경이 이와 같이 심하게 되었으니, 윤방도 또한 신하인데 진실로 어떤 마음을 가진 것입니까? 강도(江都)가 함락되었을 때에 제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면 종묘의 신주와 빈궁(嬪宮)을 먼저 피하도록 모실 일인데, 배에 먼저 받들어 올릴 생각은 하지 않고 적진 중에 뛰어들어가서 포로가 되어 구차스럽게 살아났으며, 종묘와 사직의 신주는 어찌하여 빈궁(嬪宮)의 행차보다 뒤로 돌려서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더럽히고 욕보이고 산실한 정상은 참혹하여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진중(陣中)에서 창황할 때를 당해서 자유가 없었다고 핑계하고 있으나, 도성 안에 들어와서는 종묘와 공해(公廨)가 많이 있으니 어디라도 봉안할 데가 없길래 감히 신주를 진중에서 싸가지고 온 그대로 사가(私家)에 두고 태연히 밤을 지냈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 당시 도성에 찾아들어온 사람들은 일반 남녀라도 각기 제 집을 찾아가 처소에 있었는데, 홀로 묘사(廟社)의 신위(神位)는 둘 곳이 없어서 못 둘 곳에다 두었으니, 조종(祖宗)의 신령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인신(人臣)이 이 같은 큰 불경한 죄를 지고서 어찌 감히 낯을 들고서 상소를 올려 변명이 있겠습니까? 김유는 전하의 죄인이고, 윤방은 종사(宗社)의 죄인이니, 전하의 죄인도 오히려 사정을 둘 수 없겠거늘 하물며 종사의 죄인이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수천 리 안에 무릇 조종(祖宗)의 생령(生靈)인 자는 모두 마음을 아파하고 골수에 사무쳐서 전하의 이들에 대한 처치에 대해 깊이 부족하게 여겨 원망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오늘에 이 죄를 밝게 다스리지 못하신다면 어찌 신령과 사람들의 분통함을 풀어서 후세에 할 말이 있겠습니까? 윤방과 김유에게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명하시기를 청합니다.
○ 황해도감사에게 해주산성을 수축하라고 명하였다.
○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심집(沈諿)을 아주 먼 지방으로 정배(定配)하소서.”하였다.
3월 19일 밤에 달무리가 지고, 25일 밤에도 달무리가 지다.
○ 각 도에 명령하여 춘추대제(春秋大祭)에 큰 소를 제물로 못 쓰게 하였다.
4월 큰 가뭄이 들어 양호(兩湖)의 우도(右道)에는 마실 물이 없어서 베 한 필에 물 5ㆍ6동이로 매매되었다.
초 4일 진시(辰時)와 사시(巳時)에 햇무리가 지다. 이때에 서울이나 시골이나 인심이 소요(騷擾)되어 유언비어가 길가는 사람에게서 일어나, 혹은 왜적이 이미 우리 지경에 침범하였다고도 하고, 혹은 이미 새재[鳥嶺]를 넘어섰다기도 하니, 서울 안에는 하루 3번씩이나 놀라서 걸머지고 메고 달아나는 자들이 많았다.
11일 밤에 달무리가 지다. 승군(僧軍)을 징발하여 무주(茂朱)적상산성(赤裳山城)을 수축케 하고, 영남에서는 문경어류산성(御留山城)을 수축케 하였다. 이 성은 삼국시대에 임금이 주가(駐駕)하였던 곳이라 한다. 향(香)과 축문(祝文)을 각 도의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보내어 기우제를 지내게 하고, 임금은 사직(社稷)에서 친히 기우제를 지냈다.
5월 초순부터 손방(巽方)에서 혜성이 나타나서 빛이 심히 빨갛게 퍼져 살기가 하늘에 덮혔다가 한 달이 지나서 그쳤다. 가뭄이 날로 심하여 동서(東西)가 절망이었다.
○ 전 감사 심연(沈演)으로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삼고, 첨지(僉知) 박세중(朴世重)을 위리별장(圍籬別將)으로 삼아서 같이 제주도로 들어가게 하였다.
○ 청 나라 한(汗)이 지난 2월에 군사를 이끌고 선부대동(宣府大同)으로 범해 들어갔다가 전군이 패몰하여 필마(匹馬)로 밤을 타서 몰래 빠져 나왔다한다. 배신(陪臣) 등은 한 번도 그의 면목을 보지 못하였다. 동궁(東宮)도 한(汗)을 문안하려 하였으나 그 휘하(麾下)들이 물리쳐서 못 뵜다. 신경진(申景禛)이 오래도록 머무르고 있었으나 한을 접견하지 못하니, 그가 살아 돌아왔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다만 용골대와 마부대의 전하는 말을 들을 뿐이었다. 또 의주에서 비밀리 올린 보고에, “군관 최효일(崔孝一)이 바닷가에서 배를 만났는데, 도사(都司)라는 칭호를 가진 두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는 진도독(陳都督)의 표하(票下)인데 도독의 편지 2통을 가지고 왔다. 하나는 조선 국왕(國王)에게 가는 것이고, 하나는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보내는 것이다.’하니, 최효일이 말하기를, ‘우리 조정의 분부가 없으면 이 편지를 받을 수 없다.’하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 편지에는 별로 대단한 곡절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너희 나라가 명 나라를 길이 끊어버린 것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니, 네가 지금 받지 아니한다면 의주 부윤에게 보낼 것이고, 부윤도 받지 아니하면 포정아문(布政衙門 조선의 관찰사에 해당됨)에 보낼 것이고, 거기서도 받지 아니하면 바로 경기 근해의 관원에게 보내어 국왕에게 전할 것이고, 국왕도 받지 아니하면 명 나라를 영구히 끊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하고,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적의 포악한 위엄에 겁내어 명 나라를 끊었는데,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에서는 아직도 그대로 숭정(崇禎) 연호를 쓰고 있으며, 경기 지방의 선비들은 그냥 무인(戊寅)이라고만 쓰고 있고, 서울에 있는 각사 아문(各司衙門)에서는 의례히 숭덕(崇德) 연호를 쓰고 있다 한다. 이 말은 참으로 사실인데, 저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앞으로는 그다지 큰 근심은 없을 것이며, 하물며 일본병이 오래되지 않아 출병할 것이니, 도독 앞으로 서로 믿는 문서를 공손히 왕복하면 일본병이 비록 너희 나라에 온다 하여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반드시 침해하지 아니할 것이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난해 겨울에 심지상(沈志祥)이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너희 나라에 나가서 가도(椵島)의 복수를 하려 했더니, 그 관하에 백등용(白登庸) 등 12인이 극력 말하기를, ‘조선에서 저 오랑캐에게 신(臣)이라고 칭한 것은 아주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이고, 가도에서 조전(助戰)한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들이 10년이나 섬 가운데 있으면서 먹고 입고 한 것이 모두 조선의 은혜인데 어찌 함부로 치겠는가.’하니, 심지상이 성을 내면서 듣지 아니하고 백등용 등을 다 죽였다.’하고, 또 말하기를, ‘편장(褊將) 야지회(射之會)는 황상(皇上) 유모의 아들인데, 8천 병사를 거느리고서 오랑캐에게 항복해 갔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도독과 서로 소식을 끊지 말면 칙사도 또 마땅히 나올 것이나, 비밀리 하여 오랑캐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하고, 또, ‘명 나라 군대가 서달(西㺚)과 합세하여 이미 산해관(山海關)을 열었고, 또 진도독(陳都督)의 차관(差官) 2사람이 의주에 상륙하여 임경업(林慶業)과 갈대밭 가운데서 몰래 만나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임경업이 우리나라 사정을 세세히 말하니, 차관이 말하기를, ‘진실로 그런가? 오늘 우리가 온 것은 귀국에서 명 나라를 길이 배반하였는가의 여부를 알아보려고 한 것인데, 이렇게 실상을 알았으니 또 다시 무엇을 의심할 것이 있는가?’하였다. 경업이 왜인(倭人)에 대해 물으니, 그들은 곧 하늘을 가리키고 맹서하면서, ‘지난 가을에 과연 사람을 일본에 보내어 원병을 청했는데, 그들이 장차 귀국을 경유하여 나올 것이니, 귀국에서는 그들을 죽이지 말라.’하였다.’하였습니다.”하였다.
○ 조정에서 내린 명령에, “청국에서 지금 5천의 병마(兵馬)를 요구하니, 마침내는 비록 출병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3남 지방에서는 군대를 내지 않을 것이니, 놀라서 동요하지 말라.”하였다.
○ 진주사(陳奏使) 홍보(洪靌)와 서장관(書狀官) 김중일(金重鎰)이 길을 떠났다.
○ 합계(合啓)하기를, “윤방(尹昉)과 김류(金瑬)를 위리안치(圍籬安置)하소서.”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한성부(漢城府)에서 아뢰기를, “숨기고 누락된 처자(處子)에 대해 널리 듣고 보아 많이 보고하도록 부(部)의 관원(官員)에게 매양 신칙하였더니, 부의 관원들이 비록 보고한 것이 있기는 하나 어떤 자는 연령이 맞지 아니하고, 어떤 자는 사는 고을이 맞지 않고, 혹 부모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간택에 참여될 수 있는 자 이외에는 지금 처치(處置)하고 있으며, 전일에 입계(入啓)한 이외에 또 몇 명을 먼저 해조(該曹)에 이송하였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단자(單子)를 다 받은 뒤에 부의 관원의 근만(勤慢) 성적을 상고한 다음 요량해서 상벌을 내리게 하라.”하였다.
○ 예조에서 처자 재간택(再揀擇)을 29일로 정하여 시행하기로 하였다.
27일 묘시(卯時)와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지고, 미시(未時)와 유시(酉時)에도 연달아 무리가 지다. 충청 감사의 정문(呈文)에, “전 현감 신량(申湸)의 딸이 지난달 10일에 병을 얻어 왼쪽 다리에 큰 종기가 났는데, 처음 간택할 때에 떠나서 올라오다가 겨우 반날 만에 그것이 음종(陰腫)이 되어 매우 위태하여 온 집안이 민망하여 울고 있으므로 형편상 하는 수 없이 물러가게 하였습니다.”하였다. 또 신급제(新及第) 변린(邊麟)이 본읍에다 정문(呈文)하기를, “본읍 온 집안에 전염병으로 사라들이 많이 죽었고, 처자 형제가 전염되어 앓고 있음은 여러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바인데, 간택하는 날짜가 절박하여 부득이 길을 나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인사불성이 되어 죽을지 살지 알 수 없으나, 신자(臣子)의 분의로 감히 핑계하고 물러날 수 없어 서울로 데리고 왔습니다.”하였다.
29일 큰 범이 서울 인경궁(仁慶宮)남문(南門) 안에까지 들어와서 함부로 돌아다니다가 갔다. 도감 포수를 동원하여 자취를 따라 쫓았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 전라도에 배정된 처녀 시종비(處女侍從婢)는 6명인데, 전라도에서는 전부 기생으로 충당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본주(本州)에서는 배정된 한 명을 기생 애당춘(愛堂春)을 정하여 보내기로 하고, 행자(行資)로 관(官)에서 면포 한 동(同)을 주기로 하였다. 떠나갈 때 가는 기생은 물론이고 친족들이 창황히 통곡하니, 보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주(全州)에 가서 자색이 못났다고 점퇴를 받고 나왔는데, 담양(潭陽) 여자로서 사촌 오빠와 몰래 간통하다가 방금 잡혀서 옥에 갇혀 있는 자를 대신 보냈다.
6월 초 1일 묘시ㆍ진시ㆍ사시에 햇무리가 지다. 이날 밤에 큰 범이 또 서울에 들어와서 거리에 돌아다니다가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명(李溟)의 집에서 기르던 개를 물고 갔다.
초 5일 사시(巳時)에 햇무리가 지다. 이날 밤에 붉은 기운이 진방(震方)에 나타나서 성변(星變)을 측량할 수 없었다가 한참 뒤에 붉은 기운이 그쳤다.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내서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을 잡아다가 하옥하여 가두었으니, 청국과 서로 잘못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 지난 임진 계사년과 정유년의 왜란(倭亂) 때에 각 도 여러 고을의 사대부의 처로서 잡혀서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자의 남편들이 예부(禮部)에 정문(呈文)을 올려 그 처와 이혼(離婚)하고 다시 장가들게 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었다. 조정의 의론이 혹은 그렇게 허가하는 것이 옳다 하고, 혹은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여 서로 시끄럽게 다투었는데, 선조(宣祖)는 허가할 수 없다고 하는 의론을 윤허하며, 이르기를, “이것은 음란하여 절개를 잃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 처자를 버릴 수는 없다.”하여, 이혼하고 다시 장가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병자년과 정축년 호란(胡亂)에도 각 도의 부인들이 잡혀갔다가 살아 돌아온 자가 많았는데, 역시 이혼하고 다시 장가 들어야 한다는 의론이 조정에서 일어나 허가하자, 허가하지 말자 하는 의론이 있었다. 성상이 선왕조에서 정한 전례대로 시행하도록 하여 이혼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 것으로 명을 내렸다.
○ 동지(同知) 박로(朴𥶇)가 심양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박로가 춘신사(春信使)로 떠나서 안주(安州)까지 갔다가 졸지에 적에게 잡혀 이때까지 적진중에 있다가 청병이 철수하여 돌아가는데도 놓아주지 아니하고 그대로 잡아가서 청국 서울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번에 청국 수상(首相)의 이름으로 4가지 사건을 독촉하는 사명을 가지고서 나왔다. 첫째는 5천의 병마를 출동하도록 독려하라는 일이고, 둘째는 한(汗)의 딸을 내보내라는 일이고, 셋째는 모든 방물(方物)의 수량이 정한 수에 차지 않는다는 것이고, 넷째는 처녀를 급히 들여보내라는 것이었다. 또 왕세자께서 비밀리 소식을 전하기를, “소신(小臣)의 일은 끝났으니 성상께서는 마음을 너무 상하지 마소서. 따르기 어려운 요구와 한없는 욕심은 대응하기 극히 어려우니, 만약 그것을 끊어버릴 형세가 있다면 다시 진작하시어 병력을 준비하고 병기를 마련하여 2백 년을 내려온 조종조의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소신의 바라는 바입니다.”하였다.
25일 비바람이 크게 있었다.
7월 16일신시와 유시에 해무리가 지다. 21일 사시와 미시에도 햇무리가 지다.
○ 진도독(陳都督)에게 주상이 자문(咨文)을 다음과 같이 보냈다.
“조선 국왕은 우리 나라의 패망한 사정과 곡절을 자세히 진술하여 대감께 아뢰니 불쌍히 살펴주기를 바랍니다. 먼저 지난해 봄에 심양(瀋陽)에서 보내온 사람 용골대(龍骨大)가 여러 왕자와 몽고 왕자(蒙古王子)의 서간(書柬)을 가지고 와서 두 나라 사이의 칭호에 관하여 의논하자고 함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의리에 의거하여 거절하였던 일들은 이미 앞서 자문으로 보고하였습니다. 가도 (椵島 모문룡(毛文龍)이 주둔한 곳)에서 황상(皇上)에게 전주하여 칙서를 내려 포상하는 유시(諭示)까지도 받았으니, 당직(當職)은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 사은사신(謝恩使臣)을 정하여 다음해 봄에 얼음이 풀리기를 기다려 보내기로 하고, 변방 신하들에게 신칙하여 성을 수선하고 병정을 더 모아 밤낮으로 대비하고 있게 하였습니다. 과연 금년 9월 9일에 의주 부윤이 올린 보고에 달병(㺚兵) 약 3만여 기가 압록강 건너편에 도착하여 세 곳에 주둔하고 있다 하고, 또 그날 12일에 평안도절도사가 올린 보고서에는 달병의 수는 얼마인지 알 수 없는데 밤에 얼음 위로 건너서 지나오는 여러 성을 공격도 하지 않고 바로 큰 길로만 향하는데, 그 형세가 불길같이 빨라 본주에서 성을 지키는 군사는 모두 보졸이므로 성 밖에 나가서 싸울 수 없어서 추격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샛길로 쫓아와서 급히 보고한다 하였습니다. 당직은 여러 신하와 상의하기를 우리나라 서로(西路)에는 오직 안주성(安州城)이 제1 중진(重鎭)인데 저들이 그것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오면서 하루 수백 리씩 행군하니, 이것은 반드시 허한 것을 타서 바로 서울을 습격할 계획이라고 단정하고, 즉시 급히 역전(驛傳)으로 수륙의 병마를 징발하도록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세가 미처 당도하지 못하므로 당직은 급히 강화(江華)로 피란하기로 정하고, 14일 아침에 대신 한 사람에게 묘사(廟社)의 신주와 궁인ㆍ왕자ㆍ문서ㆍ복용(服用) 등 물건만 가지고 우선 앞서 떠나가게 하고, 당직은 세자와 종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병(親兵) 수천을 영솔하여 뒤를 따라 떠났는데, 겨우 남쪽 성문에 나섰을 때 탐정하던 기병이 보고하기를, ‘적의 선봉 부대가 벌써 서울 서쪽 7ㆍ8리 지경에 왔는데, 일지병(一枝兵)은 양천강변(陽川江邊)으로 둘러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우리가 필시 강화도로 갈 것을 미리 알고서 앞질러 차단할 계획으로 나간 것입니다. 당직은 묘사(廟社) 일행과 더불어 거리가 떨어져 있으므로 하는 수 없이 황망히 동쪽 광주(廣州)로 달려가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웅거하였습니다.
이 산성은 서울에서 30리 거리에 있는데, 형세가 극히 험하고 앞서 몇 해를 두고 성을 수축하고 양식도 저장하여 강도(江都)의 성원(聲援)이 되게 한 것이나, 가서 보니 성첩이 대략만 서 있고 물자의 저장이 충분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졸간에 갈 곳이 없으므로 우선 몸을 의지할 요새로 삼고, 밤에 그 이웃 고을에 있는 병력을 모집하여 또 수천 명의 군사를 얻어가지고 따라간 문무백관과 아전들과 노복들까지 동원하여 성첩의 각처를 나누어 파수하도록 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5일 아침에는 적의 선봉이 벌써 성 밑에 와서 먼저 날랜 병사로 사면 요로에 배치하여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고서, 16일에 적의 대병이 서울에 난입하여 인물과 재물과 가축을 모두 차지한 후에 그날로 본 산성에 와서 포위하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여 방자하게 날뛰었습니다. 당직이 성중에 있는 식량을 점검하니, 겨우 40여 일 밖에 지탱할 수 없고, 땔나무와 말 먹일 사료는 한 달을 겨우 지낼 수 있고, 그 외에 싸울 병기같은 것은 보잘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직이 성안을 순시하면서 충의로 격려하였더니, 장사들은 임금의 위급함을 보고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죽기로 맹서하고 분발하여 지키면서 밖에서 구원병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월 20일에 또 대병사가 북쪽에서 와서 산을 둘러싸고 들에 깔려서 끝난 곳을 모를 만큼 몰려 왔습니다. 1월 2일에 차인(差人) 용골대(龍骨大)가 성밑에 와서 언문으로 쓴 격문을 던져 보였는데, 거기에 쓰기를, “대청국(大淸國) 관온 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서로 유시하노라. 우리 병대가 동쪽으로 올량합(兀良哈)을 정벌할 때에, 그대 나라에서는 군사를 일으켜서 우리를 요격(邀擊)하였고, 뒤에는 또 명 나라를 도와 우리나라를 쳤다. 그러나 나는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내기를 생각하여 끝내 조금도 개의하지 않고 있었는데, 요(遼)의 지역을 얻었을 때에 그대가 다시 우리 백성을 불러서 명 나라 조정에 바쳤으므로 짐은 이에 대노하였다.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그대를 토벌한 것은 이 때문이지, 일찍이 강한 힘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근자에는 어찌하여 도리어 그대의 변방 신하에 유시하여 이르기를, 부득이한 사정으로 우선 권도로 화친하였으나 지금에는 정의로 결단할 것이니, 경은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의 선비들로 각기 책략을 바치고 용감한 사람은 자원하여 군에 따라나서게 하라는 등의 말을 하더니, 짐이 대병 (大兵)을 통솔하고 그대를 치러왔는데 어찌하여 지모(智謀) 있는 자로 하여금 계책을 내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종군을 자원하도록 하여, 몸소 한 번 싸우지 않는가? 짐은 이미 강한 힘을 뽐내지 않고 털끝만치도 서로 범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약소한 나라로 도리어 우리 변방 지역을 교란하고, 산삼(山蔘)을 캐고 사냥하는 자들을 못하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짐의 도망간 백성이 있으면 그대는 번번이 잡아다가 명 나라에 바쳤고, 명 나라의 공(孔)과 경(耿) 두 장수가 우리에게 항복하여 올 때에 짐의 군사가 그들에게 가서 응접하는데 그대의 군사들이 포를 쏘면서 가로 막고서 싸운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공격하고 농간한 단서는 또 그대 나라에서 일으킨 것이다. 짐의 아우와 조카인 여러 왕들이 그대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에 그대는 무엇 때문에 종래에는 글을 통한 예(例)가 없었다고 이르렀는가? 또 외번(外蕃)의 여러 왕들이 그대에게 글을 보냈을 때에도 끝내 거부하여 받지 않았으니, 저들은 모두 대원황제(大元皇帝)의 후손인데 어찌 그대만 못한가? 대원(大元) 때는 그대 조선에서 공물을 끊임없이 바쳐 왔는데, 지금와서는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스스로 이렇게 높은 체하는가? 그들이 보내 온 글을 받지 않은 것은 그대의 어리석고 교만한 것이 이에 이르러 지극한 것이다.
짐은 이미 그대 나라를 아우로 대접하였는데, 그대는 더욱 배반하고 거역하여 스스로 원수가 되어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성곽을 버리고 궁전을 버리고 처자와 분리되어도 돌아보지 않고 겨우 한 몸으로 산성에 도망쳐 들어갔으니, 가령 천년을 연명(延命)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정묘년의 치욕을 씻고자 하여 눈앞의 안락(安樂)을 파괴하고 스스로 화에 들어가 후세에 손실을 끼치게 하였으니, 이러한 치욕은 또 장차 무엇으로 씻으려 하는가? 이미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고 한다면 어찌하여 목을 움츠리고 나오지도 아니하고, 부녀자가 안방 속에 들어 있음을 본뜨려 하는가? 그대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감추고 있어 목숨을 이으려 한들 짐이 어찌 그대를 놓아주겠는가? 짐의 내외(內外) 여러 왕과 문무(文武) 여러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 칭호를 권하여 받들었는데, 그대는 듣고 이것이 어찌 우리나라 군신들이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황제 칭호를 하고 안하는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와 주면 평민도 천자가 되는 것이고, 하늘이 화를 주면 천자도 곧 독부(獨夫)가 되는 것인데, 그대가 이따위 말을 하는 것은 또한 너무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또 맹약을 배반하고 성을 수축하고 우리의 대신을 대접하는 예절도 아주 전만 못하며, 또 지금 그대를 만나려고 간 사신을 재신(宰臣)들이 꾀를 써서 사로잡으려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명 나라 조정은 아비처럼 섬기면서 나를 해치려고 도모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특히 그대의 큰 죄만 추려 수죄하는 것이고, 그 외에 작은 혐의는 다시 모두 낱낱이 들어 말하기도 어렵다. 지금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그대의 팔도강산을 소탕해 보리라. 그대가 아비처럼 섬기는 명 나라가 장차 어떻게 그대를 구원해 주는지를 시험해 보겠다. 어찌 자식이 거꾸로 매달리듯 급한 지경에 있는데, 아비가 달려와 구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은 그대가 스스로 제 백성들을 수화 속에 떠밀어 넣는 것이니, 억조의 백성이 어찌 그대에게 원한을 품지 않겠는가? 그대가 만약 할 말이 있다면 명백히 말해도 좋다.”하였습니다.
또 지난해 본국에서 변신(邊臣)들에게 유시한 문서 한 통을 가지고 우리에게 도로 보이며 아울러 언문으로 써 왔는데, “나라 운수가 불행하여 졸지에 정묘(丁卯)의 변을 당하였다. 하는 수 없이 권도로 그들과 화친을 허락하였더니, 10년 동안에 계학(溪壑) 같은 욕심이 만족함이 없어 공갈이 날로 심하니, 이는 참으로 전고(前古)에 없는 수치다. 욕을 머금고 아픔을 참아서 한 번 분발하여 이 욕을 씻기를 생각한다면 어찌 다함이 있으랴? 지금 이 오랑캐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호(僭號)를 가지고 의논한다고 칭탁하고 갑자기 글을 보내왔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나라 군신(君臣)으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말이랴. 강하고 약하고, 존(存)하고 망하는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오로지 정의로 결단하여 그 글을 물리쳐서 받지 않고, 그들의 하는 말을 엄중히 배척하였다. 호차(胡差)가 여러 날을 두고 요청하였으나 끝내 응답하는 말을 받지 못하니, 성을 내어 인사도 하지 않고, 도망쳐 가버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도성 안의 사녀(士女)들이 비록 곧 병란의 화가 조석에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그들을 거절한 것을 유쾌하게 여긴다. 하물며 팔도(八道)에서 만약 조정에서 이와 같은 정의에 의한 조치와 위급한 사태가 있음을 듣게 되면, 역시 반드시 일제히 격동하고 분발하여 죽기로 맹세하고 함께 원수 갚으려 함이 어찌 거리의 원근과 지위의 귀천에 차별이 있겠는가? 경은 이것을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있는 선비들은 각기 좋은 책략을 바치게 하고, 용감한 사람은 싸움터로 자원해서 나가게 하여 기필코 함께 국난을 구하여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게 하라는 일로 전지(傳旨)를 내리노라.”하였습니다. 끝에는“이 문서는 숭정 (崇禎) 9년 3월 2일에 좌승지(左承旨) 정(鄭)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홍성(洪姓)에게 준 글을 우리 청 나라 사신이 얻은 것이다.”하였습니다. 이에 의하여 당직(當職)은 즉시 글을 보내서 그들의 맹약을 저버린 것을 힐책하고 사실을 열거하였습니다.
그 후 본월 17일에 용골대(龍骨大)가 또 와서 격문(檄文)을 언문으로 쓰여진 글로 가져왔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문책을 너무 엄하게 하면 도리어 형제의 의리에 어긋날 것이니, 어찌 하늘에 괴이하게 여기는 바가 되지 않겠는가? 짐은 정묘(丁卯) 맹약을 중하게 여기고 일찍이 그대 나라가 맹약을 배반하는 일로 여러 번 신칙하여 유시하였다. 그러나, 그대는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맹약을 먼저 저버리고 그대의 변신(邊臣)에게 내린 유서(諭書)를 짐의 사신 영알대[英兒代] 등이 얻어 온 것을 보고 비로소 그대 나라가 전쟁을 하려는 뜻이 있음을 알았다. 짐은 그대의 신사(信使)와 여러 상인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너희 나라가 이와 같이 버릇이 없으므로 지금부터 내가 가서 정벌할 것이니, 너희는 돌아가서 너희 왕 이하 백성에게까지 말하라.’하였다. 이와 같이 명백히 알려서 보내는 것은 궤휼(詭譎)한 방법으로 군사를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며, 또 그대의 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흔단(釁端)을 먼저 일으킨 사실을 갖추어 써서 하늘에 고한 뒤에 군사를 출동한 것이다. 짐이 만약 그대와 맹서한 것을 저버렸다면 스스로 하늘의 견책을 두려워하겠으나, 그대가 실로 맹약을 배반한 것이므로 하늘이 큰 재앙을 내리는 것이니, 그대는 어찌 도리어 전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오히려 하늘이라는 한 글자로서 억지로 말을 만드는가? 그대는 또 이르기를, ‘임진년(壬辰年) 병란에 우리나라가 조석으로 망해 가는데 신종황제(神宗皇帝)가 명 나라의 병력을 동원하여 백성을 수화 속에서 건져 주었다.’하였으나, 천하는 크고 천하의 나라도 또한 많은데, 그대의 병란을 구원하여 준 나라는 명 나라 하나뿐이다. 천하의 모든 나라의 군사가 어찌 다 와서 구하겠는가? 명 나라와 그대의 나라는 허황한 거짓말로 꺼림없이 끝내 그칠 줄을 모른다. 지금 그대가 힘들게 산성(山城)을 지키어 목숨이 조석에 있는데, 오히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러한 빈말만 하고 있는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가 우리와 형제의 우의를 끊고 전쟁을 도모하여 성을 쌓고, 길을 닦고, 수레를 만들고, 무기를 준비해서 오직 짐이 명 나라를 토벌할 날을 기다려서 틈을 타 가만히 발동하여 우리나라를 해롭게 하려 하니, 짐이 어찌 무고히 군사를 일으켜 그대의 나라를 망하게 하고, 그대의 백성들을 해롭게 하려는 것인가? 짐이 군사를 일으키려 하는 이유는 시비와 곡직을 바르게 가려보려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와 적이 되므로 나는 짐짓 군사를 일으켜 이에 이른 것이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나의 판도(版圖) 안에 다 들어온다면 짐이 어찌 그대들을 안전하게 하고 길러주지 않겠는가? 또 그대의 하는 말과 그대의 하는 행동이 매우 서로 같지 같으니, 나의 전후로 왕래한 문서를 우리 군사들이 얻어 온 것으로 보면, 그대들은 우리 군사를 노적(奴賊)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이것은 그대의 군신들이 평소부터 우리 병대를 적이라 하여 왔으므로 입을 열다가 무심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내가 듣건대, 적이란 몸을 숨기고 남의 재물을 훔치는 자를 이르는 것인데, 우리가 과연 적이라면 어찌 잡아 묶어서 다스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두는가? 그대가 입으로 우리를 꾸짖는 말에 이른바 염소 바탕에 호랑이 가죽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그대를 두고서 이른 말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양 행동이 말보다 미치지 못할까’혹은 말하기가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경계하고 있는데, 어찌 그대의 나라와 같이 남을 속이고 교활하고 간사하게 거짓과 허망한 것만 일삼아 날이 갈수록 더 심하게 굴면서도 염연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같이 망령된 말을 거리낌 없이 한단 말인가? 그대가 살고 싶으면 성 밖에 나와서 목숨을 빌 것이고, 죽으려면 급히 나와서 한 번 싸워 보라.”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이것을 의거하여 살펴보면, 본국이 피도(皮島 가도(椵島))와 더불어 서로 의지하고 호응하고 있으므로, 저들은 항상 뒤를 돌아보는 염려를 해서 우리를 등에 박힌 가시처럼 미워하여, 전후로 본국에서 문서를 움직이면 빼앗아 가서 분노를 축적하고 감정을 머금고서 때를 기다려 폭발하였는데, 이번에는 친히 여러 왕자와 몽고 왕자(蒙古王子)까지 거느리어 온 나라힘을 기울여 가지고 멀리 와서 우리나라와 틈을 만들어서 일찍이 추운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不恤寒衛率島鎭哉或曉或救之勢者 진실로 처음에 생각도 못한 것입니다. 저들의 강성한 병력으로써 이 탄환 만한 작은 성을 보기를 어찌 태산으로 새알을 누르는 것으로 알 뿐이겠습니까? 다만 이쪽에서 먼저 지세(地勢)를 점거하여 주야로 버티고 싸우며, 때로는 정예한 병력으로 험한 데 의지하여 포를 쏴서 살상한 것도 매우 많았습니다. 저들이 이 산성은 쉽게 쳐부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성 밖에 포탄과 돌이 미치지 못할 먼 곳에 목책을 설치하고 참호를 파 나무를 걸쳐서 집을 짓고 앞으로 오랫동안 지구전을 할 형상을 보이고, 밤낮으로 산성 주위를 경계하고 지켜서 안과 밖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 갑기(甲騎)를 나누어 보내서 구원병을 맞이하여 공격하였으니,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䂓)의 군사가 본성 남쪽 30리에 이르러 전군이 전멸을 당했고, 정세규는 겨우 몸만 빠져서 죽기를 면하였으며, 강원도 관찰사 조정호(趙廷虎)의 군사는 본성 동쪽 20리 산 위에 와서 하루 동안 싸우다가 패하였고, 충청도 절도사 이의배(李義培)와 경상도 좌절도사(左節度使) 허완(許完)과 우절도사(右節度使) 민영(閔𢫕)이 병력을 합쳐서 성 동남쪽 30리 지경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두 장수가 다 죽었고, 전라도 절도사 김준룡(金浚龍)은 성 남쪽 40리 지점에 와서 험준한 곳을 확보하여 싸우다가 마침내 지탱하지 못하고 밤중에 달아났습니다. 전라도 관찰사 이시방(李時芳)과 경상도 관찰사 심연(沈演) 등의 군사가 계속하여 왔으나 이상의 네 장수들이 패전했다는 것을 듣고 모두 스스로 무너졌으며, 부원수(副元帥) 신경원(申景瑗)은 영변(寧邊)에서 구원하러 들어오다가 중도에서 사로잡혔고,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은 황해도에서 구원하러 들어오면서 싸우며 전진하다가 병졸이 다 흩어져 도망가서 다만 친병 수백 명만 거느리고 성 동쪽 70리 지점인 양근(陽根)땅 산협속에 들어가서 험한 산속에서 스스로 보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함경도 관찰사 민성징(閔聖徵)과 함경남도 절도사 서우신(徐佑申)과 북도 절도사 이항(李沆)은 구원하러 천리 길을 올라와서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해서 다 양근 산협 속에 들어갔는데, 청군의 대병이 가로막아서 움츠러져서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洪命耈)와 절도사(節度使) 유림(柳琳)은 샛길로 구원하러 오다가 강원도금화땅에 와서 저들 군사의 공격을 받아 홍명구는 전사하고, 유림은 남은 병졸을 거두어서 싸우다가 형세가 대적이 되지 않으므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본성의 밖은 개미새끼나 하루살이 한 마리의 구원도 없고, 장사들은 주야로 성 위에 올라가서 잠시도 쉴 수 없으며, 날씨는 추워서 큰 눈이 쌓여 얼어 죽는 자가 잇달아 나고, 나무 뿌리를 파서 밥을 지어 먹고, 초가집 덮은 짚을 걷어서 말을 먹여 왔는데, 양식이 장차 다 떨어지므로 이틀에 하루 먹을 것을 주어 목숨을 더 연장 하려하나 군졸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굶주리고 지쳐 갔습니다.
저들이 성중의 형세가 급한 것을 알고서 깃발을 세우고서 항복하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 사람을 보내서 꼬이고 협박도 하였으나 성 안에서는 전혀 회답을 하지 않았고, 그들이 조금만 앞으로 다가오면 포탄과 화살이 요란하게 날아가니, 저들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 죽기를 무릅쓰고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은 종묘와 사직의 신주와 왕자 두 사람과 백관의 가족과 공사 (公私)의 저축이 강화도에 있어서이니, 믿고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유독 강화도가 있기 때문이다.’고 생각하고, 이에 9왕자(九王子)와 공(孔)ㆍ경(耿)ㆍ상(尙) 여러 장수를 시켜서 강화도를 습격하게 하였습니다. 저들의 군중에 원래 토공과 목공을 데리고 왔고, 우리나라 동서(東西) 강(江)에 배 만드는 목공도 많이 포로가 되었으므로, 강상(江上)의 집재목 등을 많이 가져다가 가벼운 배 80여 척을 급히 만들어서 육지로 끌고 가서 갑곶[甲串]에 감춰 두었습니다. 이 때에 강도(江都)에도 우리 수군(水軍)들이 지키고 있었으나, 그들은 생각하기를, “적이 온다면 반드시 상류에서 떠내려 올 것인데, 강에 얼음이 다 풀리지 않았으니, 아직은 다른 근심이 없으리라.”하고, 믿고 조금도 다른 염려를 하지 않았는데, 저들이 1월 22일에 이쪽의 방비가 없음을 타서 먼저 강을 건너면서 대포를 일시에 함께 쏘니 10리 안에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수군과 언덕 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저들은 준비한 작은 배를 운전하여 노를 저어 급히 건너 왔으니, 빠르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충청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강진흔(姜晉昕)과 강화 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과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은 다 배를 타고 달아나고, 원임 좌의정(原任左議政) 김상용(金尙容)은 변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섬 가운데가 크게 요란하여 묘사(廟社)의 신주와 당직의 첩 장씨(張氏)와 세자의 처 강씨(姜氏)와 둘째 아들 봉림군(鳳林君) 호(淏)와 광평군(廣平君) 요(㴭)와 그 처도 같이 잡혀 갔고, 따라간 여러 신하들과 백관의 가속들도 아울러 살해와 약탈을 당하고, 성곽ㆍ궁실ㆍ양곡ㆍ자재ㆍ기계 등은 일시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또 23일에는 적의 대병력이 구름다리를 타고 3면으로 다가와서 산성이 거의 함락돌 뻔하였으나, 의군(義軍)의 혈투로 천여 명의 적을 살상한 뒤에야 물러갔습니다. 본 산성 동남쪽에는 지세가 조금 준험하지 않으므로 종전에 별도로 포루(砲樓)를 두고서 병정을 나누어서 파수하게 하여 적병이 가까이 못오게 하였는데, 24일에는 적병이 힘을 합쳐서 급히 쳐들어와 동쪽 포루를 불사르고 나니, 이제까지 우리의 웅거한 험준한 지세를 도리어 저들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적은 성첩에 붙어 서서 몸을 숨기고 횡이대포(橫珥大砲)로 성을 향하여 바로 쏴 오다가 또 포루를 짓고 올라 앉아서 동쪽 성을 들어 쳐오니 더욱 지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6일에 이르러 강도에서 잡아 온 종실과 내관들을 데리고 성 밑에 와서 우리에게 보이니, 장사들의 사기가 더욱 떨어졌습니다. 성 안에 있는 양식은 아직도 10일간은 지탱할 것 같으므로 당직은 몸소 장사들을 격려하여 양식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라도 견디어 나가기로 하였으나, 성중이 물 끓듯 하여 다시는 싸울 수도 없고, 본월 30일에는 동쪽 성이 또 대포로 파괴되었습니다. 이제는 대세가 다 틀렸으며 다시는 어찌할 수가 없으므로 당직은 바로 제 손으로 자결하여 황은(皇恩)에 사례하려 하였으나, 종족과 백관들이 모두 이르기를, ‘강도가 이미 함락되었고 이 산성이 또 도륙을 당하게 되면 이씨(李氏) 조선의 혈속은 다시 남지 않을 것이니 조금만 참고 견디어 형세를 보고서 도모함이 옳습니다.’ 하니, 당직도 능히 변명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생을 겪고 지내다가 필경 한가지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본 산성이 포위당한 지가 무릇 46일째인데, 각 도의 구원병이 다 패전한 뒤에도 저들은 멀고 가까운 지방을 유린하여 충청도로부터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첫머리의 각 고을들은 병화를 더욱 혹심하게 입었고, 호남 지방에서는 패전한 군사들이 때를 타서 난을 일으켜 수재(守宰)를 몰아 쫓아내고 관부(官府)를 불태워서 공사간이 물결처럼 저축한 재물은 다 없어졌으며, 오직 완전한 곳은 경상도 한 도뿐이었습니다. 2일에 가서 비로소 군사를 거두고, 15일에는 모두 한강을 다시 건너서 서울로 돌아왔으니, 포로된 인구가 무려 50여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네 갈래 길로 나누어 돌아가는데, 그것은 군량과 말 먹이를 제공하는 데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며, 도처에 머무르면서 약탈을 자행하여 심산 궁곡에까지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어 약탈한 화(禍)는 올 때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한 부대는 세자와 차자(次子) 등 내외를 붙잡아 가지고 그들의 요속(僚屬)들까지도 저이들 군중에 대동하여 큰길로 돌아가고, 또 한 부대는 철령(鐵嶺)을 넘어서 함경도로 나가서 두만강을 건너서 돌아가고, 또 한 부대는 경기우도 산길을 타고 평안도창성(昌城)과 벽동(碧潼) 등지로 압록강 상류를 향하여 갔습니다. 또 한 부대는 한강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서 바닷가에 있는 배를 모조리 거두어 가지고 그중 진달(眞㺚) 병정과 공(孔)과 경(耿)의 영솔하는 요병(遼兵)을 섞어 배에 싣고 우리나라 서로(西路)의 패병을 위협하여 그 병세를 떨치고서 피도(皮島)를 덮쳐 보려고 하여 먼저 전방 항구로 들어가다가 불리(不利)하여 가만히 작은 배를 가지고 밤을 타서 육지로 끌고 가서 사포(蛇浦) 뒷고개를 거쳐 바다로 내려가서 섬으로 달려들어 섬이 함락되고, 여러 장수들이 혈전하였습니다. 군사와 인민이 어육이 된 참혹함은 더욱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직(當職)이 황조(皇朝)를 위하여 충의의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던 것이 도리어 강한 이웃을 도발(挑發)케 하여 본국이 화를 당하고 피도(皮島)에까지 미치게 하여 우리 황상(皇上)이 동으로 보살펴 주던 의리를 저버렸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저희 나라가 황조(皇朝)를 섬겨 온 지 2백 년이 되었습니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처음으로 나라를 봉해서 정하여 주시고, 그 후 여러 황제들이 그 뜻을 이어 받들어 은전(恩典)이 더욱 융숭하였으며, 만력(萬曆) 연간에 왜란에서 구해주신 은혜는 사람의 살과 뼈에 깊이 스며들어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신민들과 아비나 자식들은 대대로 내려오면서 감복하고서 우러러 받들고, 죽기로써 그 공덕을 갚으려 하였던 것인데, 불초(不肖)의 몸에 이르러 액회(厄會)를 만나서 일을 일으켜 크게 그르치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정묘년부터 화친하게 되어 화(禍)를 완화시켜 구차스럽게 시일을 지나온 지 10년이나 되었습니다. 급기야 병세(兵勢)가 더욱 치성하여 핍박을 더욱 심하게 받게 되니 곧고 좁은 성품이 오랫동안 감당할 수 없었으나, 저들이 사람을 보내서 저이들 임금에 대한 칭호를 의논하자고 요청한 사건에 대해서는 전연 한 마디 말도 수응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뒤로는 더욱 난처했으나 힘이 강하고 약한 것도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더욱 군사의 기밀이 누설되어 스스로 화를 가져오게 하여 온 나라가 다 망하였고, 만백성이 도탄 속에 들게 되고, 자식과 며느리와 신하들이 이국 지역에 잡혀하게 되었습니다. 제 몸만 빈성에 머물러 있으나, 목숨을 호랑이 입에 걸어 놓은 것 같아서 숨쉬는 호흡까지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어서, 넋이 빠지고 몸이 깎아져서 겨우 살면서 날을 보내고 있으니, 비록 다시 사람의 서열에 들어가서 종묘의 제사를 폐하지 않으려 해도 자못 바랄 수가 없습니다.
달병(㺚兵)으로 동쪽에 나온 것이 말로는 20만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대략 십수만 이하는 아니었으며, 서달(西㺚) 몽고(蒙古) 사람으로 먹기 위하여 따라온 자는 이 수에 넣지 않았으며, 그들이 수천 리 지방에 쫙 퍼져서 산을 누르고, 바다라도 기울게 할 듯한 기세이니, 참으로 이 작은 나라로써 대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 몸을 죽여 충의를 바쳐 큰 은혜를 갚는 것이 내가 스스로 힘쓸 일이라 하겠으나, 위로는 선조의 제사가 길이 끊어지는 것이 두렵고, 아래로는 백성이 다 죽는 것이 민망하여 일찍이 스스로 목숨을 자결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금에까지 이르렀으니, 장님이 비록 눈뜨기를 잊지 않았으나 환히 밝음을 논할 수 있겠으며, 절름발이가 비록 걷기를 잊지 않았으나 누가 그를 위하여 발꿈치를 들어주겠습니까? 천지가 넓게 감싸주건만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되었고, 일월이 높이 비치었건만 스스로 침침한 움 속에 가리우고 있으니, 슬픔을 머금고 아픔을 참고 고백하고 호소할 곳이 없으므로 언제나 한 번 바다를 건너가서 이 나라의 정상을 자세히 진술하여 죽여 주시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만, 위기(危機)는 겨우 벗어났으나 화의 실마리는 아직도 다하지 않으니, 마음으로는 반드시 동쪽으로 꺾으려 하는 데 있으나 사세가 스스로 빠져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구름과 우레같이 쳐다보고 눈물로 목이 메어서 울먹이고 있으니, 우러러 생각하건대, 도독(都督)께서는 어진 마음과 의로운 기개로서 혹 어여삐 생각하고 민망하게 여겨서 행동을 양해하고 마음을 살펴주시는 것이 구구한 나의 소원이오. 정은 넘치고 말은 오그라져서 이를 바를 모르겠소.”하였다.
○ 삼사(三司)에서 합계하기를, “김류(金瑬)와 윤방(尹昉)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소서.”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또 합계하기를, “전(前) 판서 조익(趙翼)은 나라의 중신으로서 처음부터 대가(大駕)에 호종(扈從)하지도 않고 해도(海島) 가운데 피해 들어가 있으면서 군부(君父)의 위급한 것을 보고도 길 가는 사람처럼 여겼으며, 섬에 출입하면서 스스로 자기 몸만 위하였습니다. 또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은 성을 나오던 날에 대가를 따라 말고삐를 잡지 않고 멀리 달아나서 영남좌도(嶺南左道) 지방에 가서 스스로 안전하기를 가만히 도모하였으니 그 죄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청컨대, 아울러 먼 곳으로 귀양보내소서.”하였다.
○ 유림(柳琳)으로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삼고 5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심양(瀋陽)에 들여보냈으니, 이 병졸은 양서군(兩西軍)으로 초정(抄定)하였다.
○ 나주 목사(羅州牧使) 구봉서(具鳳瑞)로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삼았다.
○ 예관(禮官)을 각처에 나누어 보내서 전쟁에 죽은 장사들을 그 본가에 가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때에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허완(許完)의 가속들이 광양(光陽) 땅에서 유랑하고 있었는데, 예조 낭관 김위(金瑋)가 명을 받들고 와서 제사를 지냈다.
○ 신구 출신(新舊出身)으로 심양 가는 파발(擺撥)을 세웠다. 전라도 출신은 15일에 여산(礪山)에서 호군(犒軍)하였는데, 다른 도에서도 다 그렇게 하였다.
○ 비변사에서 각 도에 장실(壯實)한 복마(卜馬)를 정하였는데, 전라도는 3백 필이고, 본부에는 18필이 복정(卜定)되었다. 크고 작은 여러 고을에 차례대로 나누어 정하였으니, 이는 5천 명의 병졸에 대한 군량과 기계를 실어서 운반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평양(平壤)까지 몰아 주고, 말 몰고 간 사람은 본고장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었다. 말 몰고 가는 사람을 심양까지 보내지 않고 다만 평양까지 가서 말을 교부하고 오게 한 것은 역시 삼남 지방의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특히 진념(軫念)하시는 뜻이라 한다. 복정한 이 수량은 각 고을에서 내놓을 도리가 없으므로, 향교의 유생들에게 자원하여 바치라 하고, 각 고을에서는 자원하여 바치라고 모집도 하였으나 하나도 자원자를 얻지 못하였다. 마침내 백성들의 토지 결수(結數)로 포목(布木)을 배정하여 거두어들이기로 하고 그 돈으로 지경 안에 합당한 말을 구할 수 있는 데 가서 보내기로 하였다.
○ 사과(司果) 유후성(柳後聖)이 심양에서 들어왔고, 사과 남현(南俔)은 그 아들이 볼모로 잡혀가 있으므로 심양에 들어갔다.
○ 함경 감사(咸鏡監司)의 정문(呈文)에, “도내에 여역(癘疫)이 크게 퍼져서 주민으로 사망한 자는 그 수를 알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더욱이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백성이 많아서 죽은 시체가 서로 베고 있듯이 깔려있습니다.”하였다. 이때 동지(同知) 목장흠(睦長欽)이 감사가 되었다.
○ 정랑(正郞)유영(柳穎)을 여제관(癘祭官)으로 정하고 함경도에 가서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8월 12일 진주사(陳奏使) 김영조(金榮祖)와 서장관(書狀官) 유염(柳淰)이 출발하였다.
○ 조정의 편당(偏黨)이 날로 심하여 헐뜯고, 모략하는 것이 못할 짓이 없으니 지금이 정말 어느 때인데 국가에 화를 끼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15일 전주 지방에 우박이 눈 내리는 듯하였다. 20일에는 밤이 지새도록 달무리가 지다. 25일에는 사시(巳時)와 오시(午時)에 햇무리가 지다. 양서 지방(兩西地方)의 5천 명 병졸이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흩어지고 어떤 자는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자도 있었다. 유림(柳琳)이 다만 무과 출신(武科出身) 수천 명만 거느리고 의주에서 장계(狀啓)하기를, “군졸들은 심양으로 들어갈 리가 만무하고, 신도 역시 우리 땅에서 죽고 싶습니다.”하였다. 용골대(龍骨大)가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병마를 속히 들여보내라고 독촉이 심하니, 유림이 하는 수 없이 남은 병졸을 이끌고서 강을 건너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또 전(前) 병사(兵使) 이시영(李時英)으로 장수를 삼아서 국내에 남아 있는 무관 출신을 초발(抄發)하여 앞서 도망간 병졸의 수를 보충하고, 아직 차지 못한 수는 기한을 정하여 더 보내기로 하였다.
○ 이번에 청국 사람들이 서쪽으로 명 나라를 침범하였는데, 여러 나라에서 볼모로 잡아온 사람을 뽑아서 장수로 삼았다. 우리나라 봉림대군(鳳林大君)도 역시 참여하게 되었다 한다.
○ 경기 지방과 호남 지방의 유민(流民)들이 거지가 되어 각 시골 촌락에 돌아다니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마치 지나간 계해(癸亥)년과 갑자(甲子)년의 기색과 같았다. 전라우도(全羅右道)에서는 3백여 명이 소와 말을 몰고 전주 부자 이도길(李道吉)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저렇게 죽으나 이렇게 죽으나 죽기는 같으니, 그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하는 것이다.”하고, 창고문을 열어젖뜨리고 쌀과 곡식을 퍼내서 싣고 가면서 말하기를, “풍년이 오기를 기다려 갚겠다.”하니, 주인 이도길이 금하지 못하였다.
○ 큰비가 내려서 남한산성의 행영(行營)전우(殿宇)에 우레가 때렸다.
○ 박로(朴𥶇)가 심양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그를 불러 접견하였다.
○ 진주사(陳奏使) 홍보(洪靌) 등이 들어왔다.
○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공은(公銀)으로 속전(贖錢)을 주고 돌아온 자로부터 일일이 은을 받아들이는데, 사람 수효가 2천 3백여 명에 그중에서 이미 받아들인 것이 2천 7백여 냥인데, 유림과 박로가 전후에 가지고 갔고, 그 외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6백 9냥이요, 아직 받지 못한 것이 9백 70여 명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는 혹 간 곳을 몰라서 그 이웃에게 해가 미치고, 어떤 자는 본인 자신이 비록 있다 해도 혈혈단신으로 의지할 곳도 없어서 그 돈을 바쳐 낼 도리가 없고, 어떤 자는 그 사이에 죽어 없어진 것도 있고, 혹은 그의 이름을 잘못 기록한 것도 있어서 그 이름만 가지고서 돈을 받는다면 폐단이 많습니다. 대간(臺諫)의 아뢰는 바에 의하여 모두 탕감해 버리고, 지금 남아 있는 은을 양서(兩西) 지방에 나누어 보내 그것으로 동(銅)ㆍ석(錫)ㆍ기치(旗幟) 등 잡물을 조비하는 자금으로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하였다.
27일 사시(巳時)와 오시에 햇무리가 지다. 감사가 전주에 이르니, 굶주린 백성들이 길에 가득 찼으므로 감영(監營) 창고에 쌓아놓은 포(布)를 내어 차례대로 나누어 주어 식량을 사들일 자본으로 하고, 풍년이 오거든 갚으라 하였다.
○ 본도 감사가 나가서 북촌을 순시하면서 재해를 입은 곳과 작물을 심지 못한 전토(田土)를 둘러봤다. 이 마을은 신산(神山) 밑에 위치하여 작황은 전과 같으나 서리가 일찍 내려 벼가 말라 죽어서 추수할 곡식이 아주 전과 같지 못하니, 이것이 흉년이 된 것이다.
29일 묘시(卯時)에 천둥과 번개가 치다.
○ 합계에 의하여 김류(金瑬)를 도성 밖으로 출송(黜送)하였다.
9월 이시영(李時英) 등이 심양에 도착하니, 한(汗)이 군병의 수가 모자란다고 해서 성을 내며 물리치고, 사관(査官)을 보내어 자기들이 직접 군사를 초발(抄發)하기로 하였다.
○ 우승지(右承旨) 홍득일(洪得一)이 아뢰기를, “금년에 흉년이 든 것에 대해 팔도 감사의 장계가 하나하나 다 올라왔으니, 성상께서 깊이 민망히 아시고 측은히 여기셔서 진휼하고 구제할 방책을 조정에서 반드시 이미 강구하고 있겠으므로, 신은 다시 진달할 것도 없겠으나, 신의 보고 온 바도 역시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영남으로부터 올라왔는데, 들으니, 우도(右道)는 전부 흉년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좌도는 재해를 입은 정도가 매우 심하다고 합니다. 지나온 곳마다 어디나 다 적지(赤地)가 되어 참혹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으니, 백성들의 일이 극히 민망하고 염려가 됩니다. 경관(京官)을 보내 오로지 진휼과 구조에 대한 일을 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농사가 어떠하더냐?”하니, 홍득일이 아뢰기를, “모심기 할 때에 4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전혀 이종을 못하였는데, 안동(安東)과 영천(榮川)이 더욱 심하다 합니다. 신이 지나온 하양(河陽)ㆍ영산(靈山)ㆍ비안(比安)ㆍ예천(醴泉) 등지는 보기에 참혹하였습니다. 가을을 당하여 백성들이 초식만 하고 소금이 없다고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서울에서 구황(救荒)하러 경관을 보내면 도리어 민폐가 있다는 말을 내가 일찍이 들었다.”하니, 홍득일이 아뢰기를, “경관을 내려 보내면 백성들은 조정의 은혜로 온 뜻을 알 것입니다. 그 도의 감사가 비록 구황(救荒)에 마음을 다한다 해도 서울서 관원을 보내서 오로지 그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또 병수영(兵水營)에도 쌓아둔 곡식이 없지 않고, 또 생선과 소금의 소득도 있으니 그것을 취하여 구황하는 데 쓰게 되면 백성이 약간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지방에서 보니, 진휼 어사(賑恤御史)가 백성에게 유익함이 없지 않으니, 접대하는 폐해는 염려할 것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정부에서 참작해서 처리하겠다.”하였다.
○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금년 가뭄은 어디나 다 같으나 그중에서도 영남과 호남의 상도(上道) 지방과 호서(湖西)의 백마강(白馬江) 일대가 더욱 혹독하게 재해를 입었으니, 앞으로 연분(年分)을 답험(踏驗)할 때에는 마땅히 충분히 자세히 살펴 일일이 면세하여 원통하다는 백성이 없게 하소서. 병화를 겪은 다음에 겹쳐서 거듭 우역(牛疫)이 퍼져서 소 한 마리가 갈던 것을 열 사람 힘으로 대신하였고, 겨우 파종과 모내기를 끝내고 나서 즉시 가뭄이 닥쳐와서 김매기가 전보다 십 배나 더 어렵게 되었으니, 농민들의 고생이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한 달이 넘도록 가뭄이 계속되어 비가 내리지 않으니, 비옥한 들판이 다 타버렸고, 그중에서 혹 다행으로 모가 자라난 것도 가을이 되어서는 이삭이 나오지 않으니, 이것은 뿌리가 이미 상하여 피어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갈지도 못한 논밭은 이미 노력을 들이지 않았으니 비록 수확이 없다 해도 재력은 손해가 없겠지만, 종자를 넣고도 전부 손해만 보고 있는 것은 이미 많은 재력을 넣고 한 됫박의 수입도 없으니, 농민의 원통함이 황무지로 버려둔 것보다도 더욱 심합니다. 이른바 ‘급재(給災)’라는 것은 세납만 면제하는 것이고, 전결(田結)에 대한 부역은 다 면제가 되지 못하니, 그것은 성상의 백성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덕에 손상됨이 적지 않습니다. 청컨대, 손실이 더욱 심한 곳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도록 하여 아울러 진황지(陳荒地)와 같은 처리를 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계주(啓奏)대로 하라.”하였다.
○ 우부빈객(右副賓客)신득연(申得淵)이 심양으로 가는데, 임금이 불러 보았다.
초 2일 천둥이 치다. 당학(唐瘧)이 많이 퍼져서 지나간 병신년(丙申年)과 같았다.
초 6일 미시부터 유시까지 햇무리가 지다. 7일에는 초혼에 우레가 울고 번개가 치다. 밤 1경에는 우레가 울고 번개가 치다.
○ 비변사에서 계하기를, “병란을 지난 지 오래지 않아 또 흉년을 당했습니다. 백성들은 실업(失業)한 자가 많아서 서로 모여서 도적이 되어 하삼도(下三道)와 경기지방에는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변고가 도처에서 일어나며, 경강(京江)에서도 역시 이런 변고가 있으니, 만약 지금에 미처 막지 못하고 점차로 더 커져가면 장래에 오는 근심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항상 외방에서 이런 것을 꾸짖어 잡아들이는 책임은 오로지 병사(兵使)에게 있으나 전례대로 공문만 보내서는 도적들을 그치게 하지 못할 것 같으니, 각 도 감병사(監兵使)에게 특별한 방안을 생각하여 꾀를 내어 체포하는 데에 힘을 다하여 다시는 이러한 도적의 근심이 없게 함이 마땅합니다. 이 뜻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 평안도용강(龍岡)ㆍ순안(順安)ㆍ맹산(孟山)ㆍ덕천(德川)ㆍ운산(雲山)ㆍ귀성(龜城)ㆍ창성(昌城)ㆍ철산(鐵山)ㆍ용천(龍川)ㆍ증산(甑山) 등 여러 고을에는 우박이 내려 재해로 피해입은 곳이 많았고, 짐승들도 많이 맞아 죽었다.
11일 밤에 달무리가 지다. 12일에는 묘시부터 오시까지 햇무리가 지다. 밤 1경에는 달무리가 지고, 5경에는 천둥과 번개가 치다. 13일에는 우박이 내리다. 14일에는 밤에 지진이 나고 번개와 천둥이 치다. 오시에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팥알 같았다.
○ 성절사 겸 동지사 박미(朴瀰)와 서장관 유염(柳淰)이 출발했다.
○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이 사관(査官)을 나오지 못하게 막기 위하여 심양에 가는데, 임금이 불러 접견하였다.
16일 밤에 번개치고 우레 소리가 크게 울리며, 우박이 개암알 만한 것이 내리다. 2경에는 번개치고 천둥하다.
17일 밤 5경에는 달무리가 지다. 강화 유수의 서목(書目)에, “이달 16일 밤 1경에 우레와 번개와 우박이 크게 있어 들에 있는 모든 곡식이 도리깨로 두들겨 놓은 것 같아서 한 줄기 한 이삭도 열매를 보전하고 있는 것이 없으니, 백성이 살아갈 일이 망극합니다.”하였다. 경상도성산현(星山縣)에서는 큰 도적떼를 잡았다.
22일 진시부터 오시까지 햇무리가 지다. 23일에는 사시부터 유시까지 햇무리가 지다. 밤 4ㆍ5경에 달무리가 지다. 24일 사시ㆍ오시에는 햇무리가 지다. 25일 진시ㆍ사시에서 미시ㆍ신시까지 햇무리가 지고, 무리 위에 관(冠)같은 것이 있고, 관 위에는 배(背)가 있는데, 빛이 안은 붉고 밖은 푸르며 왼쪽 귀고리에 흰 기운이 주위를 둘러 있어서 북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길이가 한 길 남짓하고, 너비도 한 자 가량이나 되었다. 27일에는 밤 1경에 곤방(坤方)에 기운이 불빛 같은 것이 있었고, 30일 사ㆍ오시에는 햇무리가 지다. 이시영(李時英) 등이 의주에 돌아왔다. 농우(農牛)가 줄어서 조금 큰 것은 값이 베 60여 필이나 되었다.
10월 초 4일 해가 뜰 때에 붉은 빛이 있고, 사시와 오시에는 햇무리가 지다.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보내서 윤황(尹璜)ㆍ이시영(李時英)ㆍ유림(柳琳) 등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 내적(內賊)이 도처에서 몰래 일어나서 장차 많이 번질 기세를 보이고 있으므로 삼남 지방에 모두 토포사(討捕使)를 두어서 진압하게 하였다.
5일 밤 2경에는 이방(离方)ㆍ건방(乾方)ㆍ간방(艮方) 등에서 불 같은 기운이 보이다. 7일에는 붉은 기운이 손방(巽方)에서 보였는데, 삼태성(三台星)의 형상 같았다. 밤 1ㆍ2경에는 달무리가 지고, 3ㆍ4경에는 묘방과 손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보이다.
○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위급할 때를 당하여 임금을 저버리는 것은 신하로서 큰 죄입니다. 진실로 이것을 법대로 다스리지 아니하면 그 폐해가 흘러서 장차 신하가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나라는 나라꼴이 못될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당초 남한산성에서 나오던 날을 당하여 적의 마음을 요량할 수 없고, 사기도 측량할 수 없었으니, 신하된 자로서 누구나 위태로워 두려워하고, 통박한 심정으로 황황 망극히 지내지 않았습니까? 김상헌(金尙憲)은 전하의 중신으로서 죽기를 구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면 의리상 뒤에 있어서는 안되는데, 병들었다고 칭탁하고 들어 누워서 끝내 나와보지도 않고, 북문으로 뛰어나가서 털끝만치도 연연해 하지 않아 진의중(陣宜中)이 벼슬을 버리고 밤에 도망치는 것같이 하였으니, 인신(人臣)의 분의로서 이를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김상헌의 마음이 상하여 실성(失性)하여 정신이 없어 동서를 분별치 못하고 미쳐서 날뛰다가 달아나서 길가에서 엎어져 죽었다면, 그 정상이 불쌍하여 그에게도 취할 것이 있다고 하겠으나, 그가 길을 돌아서 춘천(春川)으로 가서 자기 가족을 찾은 다음 재를 넘어서 편리한 곳을 가려서 토상(土床)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라에서 호종(扈從)한 상을 그에게 내리니 이것은 은전(恩典)인데, 그가 교지(敎旨)를 봉해서 도로 돌리면서 어떤 더러운 것이라도 피하는 것같이 하니, 그 불경함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춘궁(春宮 세자)께서 이역땅에 가시게 된 것은 이미 산성에 있을 때 결정된 것이니, 자기 직책이 세자(世子)빈객(賓客)으로 있으므로, 그 분의(分義)가 더욱 무거운데 처음부터 따라 나서려는 뜻도 없고 마침내 절하며 전송하는 예도 저버렸으니, 옛날 손부(孫傅)가 따라가기를 청하던 일과는 어찌 그리도 서로 반대가 됩니까? 이런 자를 다스리지 않으면 장차 시비곡직을 후세에 밝힐 수가 없으니, 어찌 그대로 버려두고 죄를 논하지 않겠습니까? 일반 여론이 한가지로 분통히 여겨서 갈수록 더욱 간절하니,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소서.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데는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요, 원래 버리고 갈 의리가 없는 것인데, 전(前) 참판(參判) 정온(鄭蘊)이 칼로 제 몸을 찔렀는데도 죽지 않고 옆으로 돌아눕지도 못한다 하여, 출성(出城)하던 날 호가(扈駕)도 못하였으며, 병이 다 나은 뒤에는 의리상 마땅히 와서 성상을 뵈어야 하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금도 임금을 돌아보고 연모하는 뜻이 없고, 자기 이름이나 조촐케 하려 하고, 군신 분의(分義)의 중대함은 생각하지 않으니, 나라의 신하로서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급히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하였다.
○ 사관(査官)이 오는데 정태화(鄭太和)를 접반사(接伴使)로 삼아서 서쪽으로 내려보냈다.
11일 밤 1경ㆍ3경에 달무리가 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심양에 들여보낼 여인 중에 강원도 여자들은 인물이 박색일 뿐 아니라 그중에는 자식까지 낳은 자가 있다 합니다. 당초에 각별히 선택하라고 한 뜻을 신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책임은 오직 수령들에게 있으니, 청컨대, 잡아다가 추국(推鞫)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하였다.
12일 사시ㆍ오시ㆍ미시ㆍ신시에 해무리가 지다. 15일에는 오시에 햇무리가 지다. 동지사(冬至使) 서목(書目)에, “12일에 무사히 압록강을 건넜다.”하였다. 20일 오시ㆍ미시ㆍ신시에 햇무리가 지다. 신득연(申得淵)이 심양에 도착하니, 처음에 갔던 빈객(賓客)박황(朴璜)이 교대하고 돌아왔다.
○ 최명길(崔鳴吉)이 심양에서 나왔다.
○ 청 나라 한(汗)이 30만 병력(兵力)을 거느리고 이미 4일에 떠나서 서쪽으로 갔다 한다.
○ 각 관(各官)의 창곡(倉穀)을 혹 원래대로 받기도 하고, 혹 반으로 줄이고, 혹 3분의 1로 감하여 재해의 정도에 따라서 감하여 받아들이게 하였다.
11월 서울에 살던 인물들이 모두 시골로 내려가서 다시 돌아와 살 의사가 없고, 조정에 벼슬하던 무리들도 다 사직한다는 글을 올리고 고향에 내려가서 하나도 조정에 돌아오지 않으니, 조정에서는 각 도에 공문을 보내서 독촉하여 오게 하였고, 또, “서울에 있지 않은 자는 벼슬길에 후보자로 주의(注擬)하지 않기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이시영(李時英)ㆍ유림(柳琳)을 삭직(削職)하고 석방하였다.
○ 합계에 의하여 김상헌(金尙憲)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14일 밤 2경에 달무리가 지고 천둥이 치고 비가 조금 오다. 9일에는 성첩(成貼)이 왔는데 이르기를, “동지사(冬至使)와 서장관(書狀官) 일행이 무사히 심양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장계로 아룄습니다. 왕세자(王世子)께서 신 등을 인견(引見)할 때에 세자의 말씀을 들으니, ‘이곳의 물정은 모두가 속은(贖銀)을 받고서 내보내기를 허가하고자 한다 하니, 대신이 혹 말을 하여 가만히 그 의사를 탐지하여 보기로 하라.’하였습니다. 물러나서 재신(宰臣)들과 더불어 김돌미(金乭屎)에게 말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지금은 황제가 나가고 없으니 밑에 있는 자들이 제 마음대로 허가하기가 어렵다. 내가 시험삼아 물어는 보겠다.’하고, 또 이르기를, ‘만약 뒤에 본국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서 진정(陳情)이라도 하면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하였습니다. 2일 상마연(上馬宴) 때에 보니, 어떤 무명옷 입은 자가 흰나무로 자루를 만든 군기(軍器)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모양이 조총(鳥銃)같이 생겼고, 그 제도는 우리나라 조총과 대동소이하였습니다. 용만(龍滿) 등이 그 사람과 웃고 이야기하면서 대접을 잘하고 희색이 만면하였고, 또 김돌시로 하여금 신에게 말을 전하여 오기를, ‘이것은 심처(深處)에 있는 부락(部落)에서 전마(戰馬)를 바치러 온 자들인데, 그곳이 여기서 아주 멀어서 3년이나 되어야 거기까지 가게 된다고 한다. 변지(邊地)에서 바치는 말이 3천 필인데 이 사람들 3천명이 먼저 왔고, 그 남은 사람은 아직 변경 지방에 머물고 있다. 이 부락은 활 쏠 줄은 모르고 다만 조총으로 사냥이나 하고 살아간다. 그 부락 이름은 ‘무질귀(無叱鬼)’라고 하는데, 서달(西㺚) 지방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랑하는 태도가 끝내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군(大君) 일행은 무사히 따라갔다 하며, 그 외의 여러 가지 소식을 얻어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깐 들으니, 황제가 금주위(錦州衛) 성 밖에 가서 있다고 하는데, 머지않아 돌아온다고 하나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하였다.
18일 사시에 햇무리가 지다. 정조사(正朝使) 김영조(金榮祖)와 서장관(書狀官) 정태제(鄭泰齊)가 출발했다.
22일 미시에 햇무리가 지다. 필선(弼善) 민응협(閔應協)이 정조문안사(正朝問安使)로 떠나갔고, 동지사 박미(朴瀰)와 서장관 유염(柳淰)은 들어왔다.
12월 초 5일 진시ㆍ사시에 햇무리가 지고 좌우에 고리가 있고,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초 9일에는 말 2ㆍ3경에 달무리가 지다. 14일에는 천둥하고 비가 조금 오다. 공명첩(空名帖)을 만들어 곡식을 거두었는데 실직 6품은 쌀 20섬에 팔았다. 형조판서 윤휘(尹暉)가 문안사로 심양에 가는데, 임금이 인견하였다.
23일 신시에 햇무리가 지고, 두 개의 귀고리가 있었다. 경상 감사로부터 고변(告變)하는 비밀 장계가 서울에 들어왔다. 즉시 대소 신료(臣僚)를 모아서 의논하고서, 금부도사 이상검(李尙儉) 등 네 사람을 보내서 죄인을 잡아 오게 하였다.
○ 대사간(大司諫) 이경석(李景奭)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덕으로써 간(諫)하는 것은 간신(諫臣)의 직분입니다. 그 직분을 직분으로 삼지 않는다면 관직을 두어 무엇하겠습니까? 신 같은 나약한 자를 시험하였으나 본시 풍절(風節)이 없었으니 지난 일은 말할 것 없거니와, 병란 뒤에도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나 일찍이 한 자나 한 치의 공효도 없었고, 더듬는 말씨는 사람들이 웃기만 하고 있어 집채 같은 노여움이 저의 몸에 집중되어 있으니, 아무리 전하께서 살피기를 잘 하신다 하나 또한 무엇으로 4총(四聰)의 들으심을 움직이시겠습니까? 신이 마땅히 다시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음이 이미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하물며 오늘의 나라 형편은 물이 더욱 깊고 불이 더욱 뜨거움과 같아서 병화의 남은 불길이 눈으로 보기에도 참혹하며, 국가의 운명이 또 절박하게 되어 시름하는 백성들이 해마다 떠나가며 원망하는 기운이 날로 불어만 가서 방 속에서 하는 의논들이 한심해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도 어디 일찍이 초야에서 한 사람이라도 종이에 글을 써서 공거(公車)에 던진 자가 있었습니까? 아! 이로써 인심을 분명히 알 수 있겠는데 겹쳐서 천재(天災)의 일어남이 갈수록 더욱 혹독하니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것은 재이(災異)로서 더욱 참혹한 것인데 어찌하여 또 추운 겨울에 일어났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이 전하께 은근히 깨우쳐 주는 것이 또한 지극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마땅히 위에서나 아랫사람이나 놀라고 두려워하여 서로 닦고 경계하여 인심을 감동하게 하도록 하고, 하늘의 뜻을 즐겁게 하여야 될 것인데도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여도 아직 한 사람도 전하께 경계하는 말을 올린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조정 위에 말하는 길이 막혀져서 하늘에 대응하는 일도 역시 따라서 폐하여진 것이니, 초야에서 적적하게 말이 없음이야 괴이할 것도 없겠습니다. 국가의 근심이 이에 더욱 더 커질 것이니, 어리석은 신의 염려하는 것도 이에 이르러서 더욱 간절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자기 몸에 돌려서 반성하고 놀란 듯 마음을 경계하지 않으십니까? 어리석은 신은 삼가 생각하니, 이것은 상례에 따라서 그대로 답습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삼광(三光)이 이변을 보이고 있으니, 선비를 발탁하여 정승을 삼고, 사방의 오랑캐가 침노하고 있으니, 졸개 중에서 장수를 뽑아 낼 때입니다. 어진 사람을 생각하고 유능한 사람을 갈구할 때에 나이나 신분의 격차를 물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같은 난국을 위하는 계책으로서는 당대에 제일 어질고 슬기롭고 방정한 신비를 가려서 임금을 보도(輔導)하는 자리와 언관(言官)의 자리에 두어서 그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고 말을 다해서 극진히 간하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니, 전하의 금도(襟度)를 허(虛)하게 해서 미치지 못한 것을 시행하신다면, 거의 근사하게 될 것입니다. 신 같은 자가 어찌 이 소임을 이 시기에 차지하고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관직을 체직하여 합당한 사람에게 주소서.”하니,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라.”하였다.
○ 집의 권도(權濤)가 아뢰기를, “오늘의 당면한 일은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상란(喪亂)을 겨우 지나자 또 기근(飢饉)이 혹독하게 닥쳐와서 삼남지방의 고을마다 땅이 빨갛게 탄 곳이 반이나 되어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것으로 옮겨가는 참혹한 광경이 안상문(安上問 송 나라 정협(鄭協)이 안상문에서 본 유민도)(流民圖))에서 보는 것보다도 심한데, 군신 상하들은 편안히 초월시(超越視)하고 있을 뿐이고, 아직도 이같이 불에 타는 것을 구해주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 주려는 정사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질고 사랑하는 하늘이 어찌 감응하여 경고를 내리지 않겠습니까? 음기가 탁한 기운을 꿴 것이 감히 태양을 꿰뚫었으며, 저 밤새도록 일어난 안개는 폐색된 계절에 피어나왔으며, 겨울 우레소리가 밤 하늘에 은은히 울리고, 음침한 날씨가 열흘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으니, 만약 이 현상을 〈홍범(洪範)〉에 기록된 것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작은 변괴가 아닙니다. 신과 같은 못난 것이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전혀 한 말로도 도와드리지 못하고 한갓 근심과 탄식만을 헛되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경석(李景奭)이 말한 것은 실로 신 등에게 약석(藥石) 같은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뻔뻔스럽게 관직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침 등록(謄錄)을 수정(修正)하기 위하여 수정도감에 사진(仕進)하고 있었으므로 동료와 같이 피혐(避嫌)을 하지 못하였으니, 실책이 더욱 큽니다. 청컨대, 신의 관직을 체직하여 주소서.”하니,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라.”하였다.
○ 이경석(李景奭)이 또 아뢰기를, “신은 나랏일이 날마다 그르쳐 가고 있음을 삼가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으나 신의 힘이 하늘을 돌릴 수 없으므로 한 마리의 추운 철 매미가 된 지 오래였습니다. 어떤 자그마한 장점이라도 있어서 다른 사람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눈으로 혹심한 재변을 보고 마침 사은숙배할 때를 당하여 약간 품은 생각을 진달하여 혹 경동(驚動)한 데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까 바랐던 것이지, 어찌 남을 오로지 지적해 배척하기 위한 말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장령(掌令) 박계영(朴啓榮)과 지평(持平)이운재(李雲裁) 등이 이것으로 피혐하여 물러가려 하니, 어찌 이다지도 지나칩니까? 어제는 안개가 캄캄하게 끼어서 낮이 저녁 때같이 어두웠으니, 이것도 막중한 변괴입니다. 무지개가 해를 꿰는 것과 낮이 그믐밤같이 어둡다는 일들이 비록 천년이나 백년 사이에 발생하였다 할지라도 그 횟수가 잦으면 또한 참혹한 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수일 동안에 서로 잇달아 일어나니, 아! 두려울 것이 이보다 더 심함이 있겠습니까? 비록 그것이 감히 무슨 일에 어떻게 응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 말로 순순히 명령하는 것과 같을 뿐 아니니, 오늘에 있어서 하늘에 대응하는 길은 바로 밑에 있는 신하들이 각기 가슴속에 있는 생각을 다 기울여서 진달하여 성상께서 채택하시도록 할 것이며, 위에서도 역시 부지런히 좋은 의견을 물어서 착한 것 따르기를 둥근 구슬 굴리듯 순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어찌 시끄럽게 피혐하여 물러가라고 일삼을 것입니까? 그들은 모두 피할 혐의도 없으니, 청컨대, 모두 나와서 일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계주(啓奏)한 대로 하라.”하였다.
○ 금부도사 이상검(李尙儉)은 충청도연산(連山)에 가서 고 김장생(金長生)의 첩의 아들 김영(金榮)을 잡아와서 하옥하고 국청(鞠廳)을 설치하였으며, 금부도사 이대숙(李大淑)은 죄인 김고(金杲)ㆍ변소(卞紹)ㆍ변조(卞組) 등을 잡아다가 하옥하였으며, 금부도사 정언형(丁彦珩)은 고변(告變)한 이명진(李名鎭)을 잡아다가 하옥하였으며, 금부도사 함경상(咸卿詳)과 원대건(元大健)은 죄인 김자건(金自健)과 유성하(柳成夏)를 잡아다가 하옥하였다. 김영(金榮)은 시임참판(時任參判) 김반(金槃)의 서제(庶第)이므로 김반이 궐문 밖에 나가서 대죄하고 있으니, 전교하기를, “참판 김반이 궐문 밖에서 대죄하고 있다 하니, 이같이 추운 겨울에 여러 날 뜰에 서 있으면 병 있는 사람이 반드시 중병을 얻을 터이니 물러가게 하라.”하였다.
○ 청 나라 한(汗)이 지난 10월에 30만 병력을 이끌고 3로(三路)로 쳐들어갔는데, 한 부대를 거느리고, 요면(要冕)이 한 부대를 거느리고, 구왕자(九王子)가 한 부대를 거느렸다. 명 나라 국경까지 가서 요면(要冕) 등 두 장수는 바로 북경으로 향하고, 한(汗)은 금주위(錦州衛)로 갔는데, 지키는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수천 병력으로 맞서 싸우다가 거짓 패전한 것처럼 하면서 물러가서 연대(煙臺)로 달아나 들어가니, 한(汗)이 군사를 독려하여 추격하였다. 공(孔)과 경(耿)두 적이 앞에 있으면서 화구(火具)가 있는 것을 보고 머뭇거리고 있을 무렵에 연대(煙臺) 위에서 빨강 옷 입은 자가 빨강 깃발을 들고서 세 번 휘두르고 또 재촉하는 북을 쳐서 신호로 하니, 졸지에 불이 일어나서 적의 진중 수십 리 안에는 초목이 다 타버리고 적병도 모두 잿더미로 타버렸다. 공(孔)과 경(耿)은 미리 달아나서 탈주하였고, 한(汗)은 뒤에 있어서 겨우 몸만 살아나서 소굴(巢窟)로 도망쳐 돌아왔다. 한다.
○ 회은군(懷恩君)의 딸이 심양에 들어갔는데, 한(汗)이 후궁에 들이니, 마침내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앞서 요면(要冕)이 한(汗)과 서로 의사가 맞지 않고 배반할 뜻이 있어서 일이 서로 어긋남이 많았는데, 그중에 피파각씨(皮巴各氏)라는 오랑캐가 요면의 뜻을 한(汗)에게 몰래 고하니, 한이 기뻐하여 즉시 회은군(懷恩君)의 딸을 피파각씨에게 주었다. 오랑캐 풍속에 공이 많은 자에게는 상으로 그 처를 주는 풍습이 있다. 이 오랑캐가 근일에 장인과 장모를 본다고 우리나라에 나온다는 말이 들려왔다. 오랑캐 나라의 일을 전해 들은 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그것을 다 사실로 볼 수는 없으니 보는 이는 잘 참작할 것이다.
[주-D001] 배신(陪臣) : 신하의 신하를 배신(陪臣)이라 하는데, 조선의 신하가 곧 청국의 배신이 된다는 것이다.[주-D002] 두 나라 사이의 …… 함으로 : 전에는 형제의 나라로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는 군신(君臣)으로 하자는 것이다.[주-D003] 언문 : 여기서는 만주문자(滿洲文字)를 가리킨 것인 듯함.[주-D004] 不恤寒衛率島鎭哉或曉或救之勢者 : 여기는 착오와 빠진 것이 있는 듯하여 번역하지 못함.[주-D005] 달병(㺚兵)으로 …… 아니었으며 : 저본에는 '大抵獺兵東出。號稱二萬。約不下數十萬。'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내용이 맞지 않으므로, 《지천집(遲川集)》 권17 〈이진도독자(移陳都督咨)〉에 근거하여 '2만'을 '20만'으로, '수십만'을 '십수만'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6] 진의중(陣宜中) : 송(宋) 나라 영가(永嘉) 사람. 벼슬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와 우승상(右承相)을 거쳐 좌승상(左承相)에 올랐다. 정오(井澳)에서 패전하고 점성(占城)으로 달아났다가 원병(元兵)이 쳐들어오므로 섬라(暹羅 지금의 태국)로 도망가서 죽었음.[주-D007] 손부(孫傅) : 송(宋) 나라 상서우승(尙書右丞)이었다. 금인(金人)이 침입하여 흠종(欽宗)이 북으로 끌려가게 되자 태자(太子)를 보좌하고 있었는데 금인이 또 와서 태자를 데려가자 손부는 자청하여 태자를 따라 북에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주-D008] 4총(四聰) : 임금의 귀가 사방으로 통하여 밝게 듣는다는 말. 《書經》[주-D009] 공거(公車) : 한(漢) 나라 시대에 지방에서 올라온 선비의 상서(上書)를 받아들이는 곳.[주-D010]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정도 :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문제(文帝)에게 상소(上疏)하기를, “지금의 사세를 본즉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두 가지요, 긴 한숨을 쉴 만한 것이 여섯 가지입니다.”하였다.[주-D011] 초월시(超越視) : 월 나라 사람이 진(秦) 나라 사람의 살찌고 수척한 것을 보듯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여긴다는 말이다.[주-D012] 폐색된 계절 : 깊은 겨울철을 폐색(閉塞)된 계절이라 한다. 그것은 양기(陽氣)가 감추어졌다는 뜻이다.[주-D013] 하늘이 … … 같을 뿐 아니니 : 《맹자》에, “하늘이 사람에게 대하여 순순(諄諄)히 말을 하여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일로써 보여 준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