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관련기록

을사년(1905)부터 임신년(1932)까지 약 30년 동안 국난에 순국한 사람이 수백만 명 이상이고

믿음을갖자 2022. 11. 1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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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집(遺芳集) 독립운동가 82인의 열전 / 서문

유방집 서 [조소앙(趙素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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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1. 옛날 마한(馬韓)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고국이 망한 것을 분하게 여겨 우곡성(牛谷城)에서 군사를 일으켜 백제(百濟)의 군사 5000명과 전투를 하였다가 패하였다. 주근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는데, 백제 사람이 그 시신의 허리를 잘랐고 아울러 그의 처자식을 죽였다. 이것이 한인(韓人) 고대 독립 전쟁의 한 모범이다.

 

2. 옛날에 신라(新羅)의 의사(義士) 박제상(朴堤上) - 당시의 외교관 - 이 사신이 되어 고구려(高句麗)로 떠나려 할 때에 임금에게 고하기를 “신이 듣건대 충신은 일에 있어서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고, 의리에 있어서 위태로움을 사양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운지 쉬운지를 따진 뒤에 행한다면 충성스럽지 않다는 것이며, 죽을지 살지를 헤아린 뒤에 움직인다면 용맹이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떠났다. 또 왜국(倭國)에 사신으로 갔는데, 왜왕(倭王)이 그가 신라에 충성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신문하며 말하기를 “계림(鷄林)의 신하라고 일컬으면 반드시 온갖 형벌을 가할 것이고, 왜국의 신하라고 일컬으면 반드시 후한 복록을 상으로 내리겠다.”라고 하였다. 박제상이 말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복록을 받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왜왕이 크게 노하여 목도(木島) - 지금 일본의 히젠슈(肥前州) 하카타츠(博多津) 시치리나다(七里灘)이다. - 에서 박제상을 불태워 죽였다. 이것은 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고대 외교사의 한 비극이다.

 

3. 백제의 장군 계백(階伯)이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서 10만의 나당(羅唐) 연합군과 황산벌(黃山伐)에서 전투를 벌이려 하였다. 계백이 먼저 자신의 처자식을 죽이며 말하기를 “내가 한 나라의 일부 군사를 가지고 두 나라의 병력에 대항해야 하니 존망을 알 수 없다. 필시 처자식에게 누가 될 것이니, 살아 욕을 당하느니보다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과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句踐)이 5000명으로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너희가 각각 용맹을 떨쳐 적을 죽여서 국가에 보답하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피를 흘리며 싸워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 냈다. 이것은 한인이 자신을 잊고 나라에 보답한 유풍(遺風)이다.

 

4. 신라 중엽 화랑(花郞) 제도를 힘써 행하였는데, 화랑도(花郞徒)를 국선(國仙)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라인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郞世記)》를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낭도는 서로 도덕과 의리를 수행하고 서로 노래와 음악으로 즐겼으며, 산수에서 노닐며 아무리 멀어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진 신하와 훌륭한 재상, 이름난 장수와 용맹한 군졸이 여기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대개 화랑은 젊은 남녀로 구성된 조직인데, 국가가 양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였다. 화랑도는 절의를 우러러 받들고 충성과 용맹을 숭상하였으며, 공(公)을 무겁게 여기고 사(私)를 가벼이 여겨 몸을 바쳐 나라를 지켰다. 화랑도의 유풍은 수천 년을 거듭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고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식이 되었다. 무력으로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동화시키고자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았으니, 대대로 큰 혼란이 닥쳐도 굴하지 않았던 것은 참으로 화랑 전통의 원기(元氣)일 뿐이다.

 

5. 고려의 장수 강조(康兆)가 거란의 40만 군대와 한국 북쪽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거란의 임금이 강조를 붙잡아 꾸짖으며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묻자 강조가 화를 내며 “나는 고려인이거늘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답하였다. 다시 물어도 대답은 처음과 같았고, 살을 발라내는 고문을 하며 물어도 대답은 처음과 같았다. 이후 박서(朴犀)가 몽고(蒙古)의 황제와 구주(龜州)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성을 지키며 굴하지 않았다. 몽고의 늙은 장수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다니면서 이러한 공격을 받고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자는 본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인이 강대한 이웃나라에 저항하는 유전적 근간이다.

 

6. 조선 중엽 만주족인 청나라가 많은 병사를 이끌고 강화(江華)를 침범했는데, 강화의 부녀자 중 분한 마음에 자살한 사람이 70명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는데 부녀자가 절의를 지키며 죽은 것은 두문동(杜門洞)의 70인 현인(賢人)과 비교해 볼 때에도 더욱 공경할 만하다. 이것은 한인 부녀자가 치욕을 알았던 실제이다.

 

7. 신라ㆍ고려 시대 이후 한국 남쪽 해안가에는 수시로 왜구(倭寇)가 출몰하였다. 신라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토벌하자, 왜왕이 백마를 죽여 맹세하면서 항복하였다. 지금 일본 아카시우라(明石浦)에 백마총(白馬塚)이 있는데, 이것이 신라 왕이 항복을 받은 유적이다. 조선 태종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에는 임금의 행차가 절영도(絶影島)에 잠시 머물렀기에, 절영도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다. 고려 말엽에 김방경(金方慶)이 여몽(麗蒙) 연합군을 이끌고 왜의 국경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비록 태풍을 만나 전투를 멈추기는 했으나 왜구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조선 세종이 이종무(李從茂)에게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마도를 쳐서 평정하게 하였고, 선조 때에는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 등이 육군과 해군을 거느리고서 명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7년간 싸우면서 왜구를 평정하였다. 이것은 역대로 왜와 맞서 싸운 역사 중 가장 빛나는 것이다.

 

8. 시대가 내려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군사적 방비가 느슨해지고 정치가 무너져 결국 대마도를 잃었다. 왜구는 크게 달라져 제국주의의 무력 집단이 되어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한국 조정을 위협하고 억눌러 결국 보호를 명목으로 합방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사천 년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크나큰 치욕이다.

 

9. 사천 년 이래로 나라와 백성을 보호했던 성의가 이미 이와 같은데 갑자기 망국의 노예가 되었으니, 마땅히 우리 한민족 남녀는 분연히 일어나 피를 흘리며 치열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 비록 뼈가 다 닳아 없어지고 몸을 불사르더라도 급박한 정세 속에서 의리의 격앙을 멈추어서는 안 되고, 죽음 속에서 사는 길을 찾아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켜야만 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뼈를 쌓아 백두산(白頭山)을 이루고 그 피를 흘려 압록강(鴨綠江)을 이룬다 한들 또한 어찌 많다고 하겠는가.

 

10. 을사년(1905)부터 임신년(1932)까지 약 30년 동안 국난에 순국한 사람이 수백만 명 이상이고 이름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도 수만 명 이상이니, 지금 80여 명을 기록하여 일부의 행장(行狀)을 전하는 것이 실로 누락이 많은 줄은 잘 알지만 이마저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이 지난 뒤에 그 80여 명도 성명마저 전해지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비록 지금 간행하여 전하더라도 천 년 뒤에는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처럼 《유방집》이라는 이름만 알게 될 줄을 어찌 알겠는가. 《화랑세기》가 지금 전해지지 않으니, 《유방집》이 후세에 사라질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참으로 알 수 있다. 《유방집》은 혹시 사라지게 할 수 있더라도 열사의 정신은 참으로 뽑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는 《화랑세기》는 이미 사라졌지만 화랑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 민족에게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나는 《유방집》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그리고 빛나는 명예를 후세에 남긴 열사의 정신은 뽑아 버릴 수 없으며 그것이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맴돌면서 혁명 동지로서 영원히 활약할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하여 나라가 이미 망했거나 장차 망하려 하거나 아직은 망하지 않았을 때와 한 몸이 살거나 죽거나 죽지 않거나를 마주할 때, 그리고 중요한 일에 대해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하여야 할 때에 그 마음을 고동치게 하고 감화시킨다면 이는 《유방집》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아, 내가 힘껏 투쟁한 지 30년이 못 되어 이 80여 명 동지의 유골을 가지게 되었기에 나에게 그들의 삶을 조명하고 그들의 일을 기록하게 한 것인가. 나는 죽은 열사를 곡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지 않은 것을 슬퍼하는 선열을 곡하는 것일 뿐이다.

 

대한민국 14년 가을에, 무림(武林) 공덕림(功德林)에서 조소앙이 서문을 쓰다.

[주-D001] 구천(句踐)이 …… 무찔렀다 :

춘추 시대 월(越)나라 구천이 오(吳)나라 부차(夫差)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말한다.

[주-D002] 무력으로 …… 않았으니 :

《논어(論語)》 〈양화(陽貨)〉에서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다. 희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라고 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3] 고려의 …… 벌였다 :

목종(穆宗)이 즉위한 후 모후(母后)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하였는데 정사가 문란하자, 1009년(목종12)에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顯宗)을 왕위에 올렸는데, 1010년(현종1)에 거란이 목종을 폐위한 죄를 묻겠다는 명분으로 고려를 침입하였다.

[주-D004] 박서(朴犀)가 …… 않았다 :

박서는 1231년(고종18) 몽고가 침입하여 한 달간 갖은 공격을 하였는데도 구주성(龜州城)을 지켜 냈다.

[주-D005] 조선 …… 침범했는데 :

1636년(인조14)의 병자호란을 말한다.

[주-D006] 두문동(杜門洞)의 70인 현인(賢人) :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절의를 지키며 두문동에 은거하여 끝까지 출사하지 않은 72명을 가리킨다. 일부만 이름이 전한다.

[주-D007] 신라가 …… 항복하였다 :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 등에 291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주-D008] 절영도(絶影島) :

현재 부산의 영도를 가리킨다.

[주-D009] 고려 …… 들어갔다 :

1274년(원종15)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 김방경이 도독사(都督使)로서 고려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주-D010] 조선 …… 하였고 :

1419년(세종1) 왜구가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자, 조정에서 이종무에게 명하여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주-D011] 선조 …… 평정하였다 :

1592년(선조25)의 임진왜란을 말한다.

[주-D012] 결국 …… 이르렀다 :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과 강제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해 주권을 침탈한 일을 말한다.

[주-D013] 대한민국 14년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기준으로 계산한 1932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