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윤공(尹公)이 또 온다면, 연추로부터 사막에 이르는 1만여 리의 땅이 다 그 혜택을 입을 것이다

믿음을갖자 2023. 1. 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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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5 무술(1898) 11 12(신유, 양력 12 24) 맑음

35-11-12[12]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을 보살필 것을 청하는 유학 조치룡 등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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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 조치룡(趙致龍)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바닷가 외딴 구석에 살고 있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부터 열성조(列聖朝)께서 교화로 길러 주신 큰 은혜를 입어 그 은혜가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신들이 비록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이곳에 흘러들어와 살고는 있습니다만, 다른 나라에 입적(入籍)하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본국에서 이곳에 관원을 파견해 주기만을 삼가 기다렸으니, 이는 타고난 본성이면서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에 있어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먼 길을 와서 이렇게 오랫동안 돌아갈 줄 모르는 것입니다.
금년 5월에 이 일을 가지고 모여 우러러 성상께 아뢰면서 우리 성상께서 천지(天地)를 본받는 큰 교화를 특별히 행하시고 적자(赤子)를 돌보는 간절한 정성을 잘 생각하실 것이라고 삼가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은혜로운 비지를 내리셨는데, 해와 달보다도 밝고 산과 바다보다도 깊고 후중하셨는바, 조칙을 내려 의정부로 하여금 특별히 품처(稟處)하도록 하셨습니다. 신들이 시골구석의 미천한 몸으로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채 이런 매우 각별한 윤허를 감히 받들게 되었으니, 신들의 행운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상한 어미를 만난 것과 매우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의정부에서 성상의 훌륭하신 분부를 받들어 머지않아 타당한 조처를 취함으로써 기필코 중지된 채 시행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에 경저(京邸)에 물러나 있으면서 공손히 처분을 기다렸는데, 삼가 들으니, 그간 의정부에서 이 일을 가지고 모여 논의한 뒤 외부(外部)에 이부(移付)한 지 지금 이미 5개월이 지났으나 아직껏 시행할 방도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천 리 밖에 사는 빈한한 신분으로 수 개월 동안 체류하는 것도 오히려 하지 못할 일인데, 더군다나 해를 넘겨 가며 오랫동안 체류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근심스럽고 답답한 마음 견딜 길이 없어 이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감히 다시 성상께 아뢰어 번거롭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매우 황송하고 두렵습니다만,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이고, 관원을 파견하여 자국의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떳떳한 법입니다. 지금 이미 명이 내려졌는데도 이처럼 지체하고 있으니, 신들이 비록 잠자코 있고자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의정부에서 지체한 채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비(經費)가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입니까? 아니면 러시아[露國]의 사정을 꺼려서 그런 것입니까? 경비 문제라면 부임할 때의 노자(路資)에 불과할 뿐으로, 기타 여러 가지 새로 책정될 경비는 관원이 부임한 뒤에 자연 적당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러시아를 꺼리는 문제라면 더욱 그럴 필요가 없으니, 교린(交鄰)하는 의리로 볼 때 우리나라의 백성을 우리가 거느리는 것인데 저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또한 그곳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있는데, 그들이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은 바로 본국에서 관원을 파견하는 일이니,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국가의 대정(大政)입니다.
그리고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각국(各國)의 백성들은 수효로 따지면 우리나라의 반절에도 못 미치지만, 그들은 모두 관원을 파견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당한 대한(大韓)의 수많은 백성들을 내팽개친 채 돌보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아무런 조처도 없이 올해를 넘긴다면 러시아에 입적할 사람이 반을 넘을 것이니, 그런 뒤에야 관원을 파견한다면 어찌 교화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관원을 선정하는 문제는 오직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는 일이므로 비록 신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마침 해당 지역에 공사(公使)를 파견하자는 논의가 있기에 송구함을 무릅쓰고 감히 말미에 보잘것없는 말을 덧붙입니다.
지난 갑오 연간에 서울에 사는 진사 윤성선(尹聖善)이 유람하러 그곳에 들어갔다가 풍속이 우매한 것을 보고는 여섯 가지 사무를 널리 펴서 백성의 풍속을 바로잡았는데, 첫째, 각방(各坊)에 서숙(書塾)을 설립하여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위하는 도를 알게 하고, 둘째, 50가구를 한 부락으로 만들고 각각 두원(頭員)을 두어 백성들끼리 서로 보호하도록 하는 한편, 의지할 곳 없는 네 부류의 곤궁한 백성들을 부락에서 보호하되 생전에 잘 모시고 사후에는 정중히 장사 지낼 수 있도록 하며, 셋째, 러시아에 입적한 자들을 효유(曉喩)하여 각각 고국을 그리워하는 의리를 지키도록 하고, 넷째, 다섯 가구를 1통(統)으로 하여 술주정과 잡기(雜技), 사람을 상해하고 도둑질하는 것 등을 엄격히 금하며, 다섯째, 각 항구마다 공원(公員)을 두어 상민(商民)과 농민(農民)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법규를 감독하도록 하고, 여섯째,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본국의 옛 제도를 따름으로써 문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에 해당 지역의 백성들이 모두 그를 위해 성복(成服)하고 매우 칭송하여 마침내 그곳에 노래가 불려졌는데, ‘옛날에 윤 문숙공(尹文肅公 윤관(尹瓘))이 이곳에 왔는데, 아직까지도 은혜로운 유풍(遺風)이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 윤공(尹公)이 또 온다면, 연추(連秋)로부터 사막에 이르는 1만여 리의 땅이 다 그 혜택을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초창기인 지금 오합지중(烏合之衆)을 진무하려면 그 지역을 잘 어루만져 복종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 지역의 백성들이 매우 신임하는 사람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지금 이런 적임자와 비슷한 사람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 누가 이 사람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의정부에 특별히 명하여 윤성선을 불러들여 그가 쓸 만한 사람인지 시험하고 그곳의 형편을 물은 다음 특별히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 등용함으로써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미 처분이 있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