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진(六鎭)마을 광막한 사막 한가운데에, 그야말로 바다 위에 나타난다는 신기루처럼 누대(樓臺)와 궁실(宮室) 모습이 이따금씩 보이곤 하였다.”
임유관 전투(臨渝關戰鬪)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중 제1차 전쟁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임유관을 중심으로 수나라의 30만 병력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전투는 진주 강씨의 족보 및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국내외 다른 사료에는 1차 고수전쟁의 경과를 보급 부족 및 장마·태풍으로 인해 자진 철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원인[편집]
581년, 수 문제 양견은 황제에 등극하고, 589년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진주 강씨 족보에 따르면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 수나라는 국력을 과시하고자 고구려에 신하의 예로써 분수를 지키라는 모욕적인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도발하였다. 이에 대노한 영양왕은 신하들과 답서를 보낼 것을 의논하였고 강이식은 "이같이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화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화답할 것입니다."며 전쟁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후 벌어진 전투 역시 강이식이 병마원수(兵馬元帥)가 되어 주도하였다.
임유관 전투[편집]
개전을 결의한 영양왕은 강이식을 병마원수로 삼아 정병 5만으로 임유관을 공격하게 하였다. 먼저 말갈 군사 1만으로 하여금 요서에 침입하였고 수의 군사를 유인하였고, 거란 군사 수천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山東)을 쳤으나 패배하였고 이때부터 고구려와 수나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강이식은 수나라의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 (韋沖)과 접전하다 패하였고, 이에 분노한 수 문제는 양양(楊諒)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임유관에서 출정하게 하고 주나후(周羅喉)에게 수군을 맡겼다. 주나후는 수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나아가겠다고 소문을 퍼뜨렸으나 강이식은 속임수를 간파하고 요하로 향하는 수군을 요격하여 격파하였다. 이후 성채를 지키면서 지구전을 펼쳐 수나라 군대는 양식이 떨어지고 장마로 인해 전염병이 돌아 퇴군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임유관에서 섬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과는 진주 강씨 족보 및 그에 근거한 후대의 사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국내외 사료에는 고구려가 말갈 군사 1만으로 요서를 침입하였다가 영주총관 위충에게 격퇴된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이후 벌어진 수나라의 1차 공격도 특별한 전투 없이 요하 인근까지 진출하였다가 군량 부족 및 전염병, 폭풍우 등으로 인해 퇴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채호는 이러한 기록은 중국 측에서 패배를 감추기 위해 왜곡하여 기록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계곡만필 제1권 / [만필(漫筆)]
[광야에도 신기루가 있다[廣野亦有蜃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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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단지 바다 위에만 신기루(蜃氣樓)가 있는 줄 알지, 넓은 들판 가운데에도 신기루 현상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무변(武弁) 출신인 어떤 고관(高官) 한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젊었을 적에 육진(六鎭)의 변방 고을을 지키고 있었는데, 언젠가 오랑캐 지역을 바라다 보노라니, 아지랑이와 같은 기운이 자욱하게 일어나는 광막한 사막 한가운데에, 그야말로 바다 위에 나타난다는 신기루처럼 누대(樓臺)와 궁실(宮室) 모습이 이따금씩 보이곤 하였다.”
하였는데, 내가 그때 듣고서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뒤에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를 읽어 보니, “바닷가에서 보면 신기(蜃氣)가 누대(樓臺)의 모양을 만들고, 광야 역시 그곳의 기운이 궁궐의 형상을 이루어 낸다.” 하였으므로, 그의 말이 허망한 것이 아닌 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체로 우리나라는 지역이 협소하여 광야라고 할 것이 없는 반면에, 오랑캐 지역은 광막한 들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하다고 한다.
> 고전번역서 > 옥오재집 > 옥오재집 제2권 > 시 > 최종정보
옥오재집 제2권 / 시(詩)
유관에서〔楡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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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은 예로부터 중국에 속했는데 / 楡塞從來屬漢封
거란족이 침범하여 원나라 멸망했지 / 契丹渝後渥溫終
명나라도 이 땅을 여전히 차지했는데 / 明朝此地還通甸
백년 뒤 이천에서 오랑캐 일어난 것과 같네 / 百歲伊川又作戎
구름 사이 많은 봉우리는 나는 새 너머에 있고 / 雲際亂峰飛鳥外
물가의 초라한 객점은 석양 가운데 있구나 / 水邊殘店夕陽中
아득한 지난 일 물을 곳 없으니 / 茫茫往事尋無處
한 곡조 슬픈 노래로 먼 바람 맞으며 간다 / 一唱悲歌溯遠風
[주-D001] 유관(楡關) :
원래 만리장성의 동쪽 끝 관문이 있던 곳인데, 명나라 초기에 여기 있던 성돌을 모두 옮겨 산해관을 새로 쌓았다. 지금은 무령현 소속으로 ‘유관’이라는 마을만 남아있고 옛 관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주-D002] 원나라 :
‘악온(渥溫)’은 원나라 황실의 성씨 기악온(奇渥溫)을 줄인 것이다.
[주-D003] 명나라도 …… 차지했는데 :
유관은 명나라의 서달(徐達)이 1381년 원나라의 잔존 세력 및 만주족들을 효율적으로 방비하기 위해 구축하여 1년여 만에 완공하였다.
[주-D004] 백년 …… 같네 :
‘이천(伊川)’은 하남성 숭현(嵩縣)과 이양현(伊陽縣)의 땅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22년 기사에 “전에 평왕이 동쪽으로 서울을 옮겼을 때에, 신유(辛有)가 이천으로 갔다가 머리를 풀고 들판에서 제사 지내는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앞으로 백년이 못가서 이 땅은 오랑캐가 살게 되겠구나. 그에 앞서 벌써 중국의 예가 없어졌다.’〔初, 平王之東遷也, 辛有適伊川, 見被髮而祭於野者曰, 不及百年, 此其戎乎, 其禮先亡矣.〕”라고 한 데서 그 예가 보인다. 여기서는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인 청나라가 들어섰다는 의미로 쓰였다.
渝關
本文
一作楡關。即山海關。
미산집에 .연도(燕都)는 천하의 북쪽에 자리한 옛날 변방의 요새로 큰 사막의 접경에 있는 고을이라 일컬어지던 곳인데, 사람들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풍속이 드물고, 그 지역엔 숭산(嵩山)과 낙양(洛陽)의 승경도 없어 다만 궁실과 성시로 그 부유하고 화려함을 과시한다. 우리나라와 땅이 가장 가까워서 다만 작은 강 하나를 떨어졌을 뿐으로, 사신의 수레가 조석(朝夕)으로 왕복하니 유람의 장엄함과 이별의 괴로움이야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6월 25일 > 최종정보
나라의 관문인 평안도를 바라보니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번(藩)이로다. 국경은 노룡현(盧龍縣)의 옛터와 접하고 한 줄기 긴 강을 한계로 삼는다.
> 고전번역서 > 지봉집 > 지봉집 제16권 > 속조천록 > 최종정보
지봉집 제16권 / 속조천록(續朝天錄) 신해년(1611, 광해군3) 8월부터 임자년(1612) 5월까지이다.
다시 오촌의 시에 차운하다〔又次梧村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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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성이 머나먼 사막에 임한 채 / 關城臨絶漠
저 멀리 바다구름 한쪽을 베고 있네 / 迥枕海雲偏
오로에서 오랑캐와 교통하고 / 五路通夷譯
삼면에서 재화가 모여든다오 / 三方輳貨泉
황제가 기세 높게 오랑캐 매질하니 / 皇威雄折箠
되놈들이 채찍 던질 뜻 꺾었네 / 胡意息投鞭
대지는 동쪽을 따라서 갈라지고 / 地軸從東拆
천문은 북쪽을 직면하여 걸렸네 / 天文直北懸
..................................
[주-C001] 속조천록(續朝天錄) :
지봉이 동지사 겸 주청사(冬至使兼奏請使)로 명(明)나라에 갔다 올 때까지의 시록(詩錄)이다. 당시 정사(正使)는 이상의(李尙毅), 부사(副使)는 지봉, 서장관은 황경중(黃敬中)이었다. 《光海君日記 4年 6月 7日》 《少陵集 左贊成少陵李公年譜》
동광 제15호 > 民族과 民族語
間島 鄭載冕 우리 民族은 반만년 동안 긴 歲月을 두고 祖先의 珍重한 부탁을 받아서 그것을 保存하여 遺傳한 것은 오직 「우리 말」임니다. 우리말은 祖先에게서 받은 遺産인 동시에 더욱 우리 民族의 精粹임니다. 한 民族을 형성한다면 반듯이 그 民族語를 요할 것이며 民族語는 民族的 精神의 産品인 藝術임으로 참으로 민족적으로 보아서 과연 無上의 珍品일 것임니다. 그럼으로 모든 것이 瓦礫이 될찌라도 民族語는 힘쓰어 보전하려 하며 모든 것이 冷灰가 되었더라도 民族語는 보존함이 그 民族으로 당연한 使命임니다. 筆者는 다년간 外領生活을 계속하는 중에서 「우리 말」의 가치를 절실히 深感하였음니다. 露領에 在留하는 同胞나 中領에 在留하는 同胞에게서도 종종 우리말을 만족히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음니다. 혹 잘못된 생각으로 우리말을 말하기를 피하는 사람도 있다고 함니다. 그는 우리 民族과 우리말의 關係를 理解하지 못한 까닭임니다. 그들은 벌써 30여 년 전에 外領에 移住하였음으로 우리 文化에는 얼마나 뒤떨어지었으며 더욱 新文化에 애매함은 더 말할 것이 없었음니다. 그러하였으나 여러 방면으로 新運動이 계속됨을 딸아서 우리말의 귀중한 價値를 알고 더욱 힘쓰어 연구함은 그들의 새 주장임니다. 참 고맙은 일임니다. 그런데 筆者가 금년 7월경에 會寧에서 한 親友를 만났음니다. 그는 나의 손을 잡으면서 『곤니찌와 데이상』이란 간단한 말로 인사하더이다. 그는 常識이 구비한 사람인데 7년 간 隔阻하였던 사람을 향하여 『곤니찌와』로 代言하니 참으로 극도의 中毒이라고 解釋할 것임니다. 어찌 그 個人뿐이겠음니까? 靑年 少年 男女를 물론하고 그러한 추세로 향함을 상상하기에 不難함니다. 참으로 民族과 함께 民族語 곳 우리말이 危機一髮의 처지를 당함을 구할 자가 누구임니까. 참으로 유일한 遺産인 우리말은 잘 보존합세다. 그를 보존할 뿐만 아니라 光輝있게 하여야 겠음니다. 우리말은 참으로 古代에 있어서도 막심한 위기를 피하여 坦然히 보존되었음니다. 이제 史的 考察로 보면 檀朝 1,000여 년 간에 우리말은 우리 民族을 잘 紏合하였던 것임니다. 그러하나 殷國 王族인 箕子가 東遷하던 때에 우리말은 많은 變動이 되었음은 사실일 것임니다. 箕子는 殷末 당시에는 한 갸륵한 文士이었던 것은 그 徒黨을 보던지 그 政略인 洪範九疇를 보아도 넉넉히 추측할 바임니다. 그가 周發이 滅殷함을 보고 心氣가 沮喪하였을 것이며 참아 伯夷 叔齊와 같이 首陽山에 餓死하려는 消極政策을 취하지 아니 하였음니다. 그는 장래에 國의 殷祖業을 回復할 一念을 품고 同志를 秘密裡에서 紏合하여 멀리 東方을 향하여 理想的 新王國을 設하고 目的을 貫徹하려고 生聚와 敎訓을 設計하였음니다. 당시에 불평을 품고 志士로 결합된 亡命黨은 其數가 1,000家族으로 計算하도록 되었음니다. 箕子는 王族이며 더욱 學者임으로 그의 결속된 徒黨은 다 熱烈한 志士이었을 것임니다. 말이 곁길로 되니 雅諒을 구하나이다. 그들은 黃河를<11> 渡하여 東方을 향하게 되니 응당 山海關을 넘어 遼西를 지나 遼東에 당하였을 것임니다. 그 扶老携幼하고 먼 길에 시달리어 온 情形은 참으로 처참하였을 것임니다. 그 5,000으로 算하는 다수한 流民을 인솔한 箕子는 참으로 埃及의 紅海를 건느어서 파란 曠野를 당한 모세를 상상하게 되나이다. 그때에 山海關 以東을 管轄하는 檀朝에서 이 다수한 流氓이 국내에 들어옴을 보니 手無寸鐵하고 다만 亡命된 상태임으로 道義上 이를 보호함이 국제 간에 당연한 義務일 것임니다. 그러나 그 가련한 流民이 言語를 不通함에 生活上 많은 불편이 있겠음으로 그들을 안전히 보호하기 위하여 일정한 지역을 劃 與하고 廣濶한 農場을 가지게 하였음니다. 그들은 원래 강고한 결속이 있는 徒黨이며 더욱 理想的 國家를 건설하여 生聚와 敎訓에 전력할 大計劃을 세우었을 것이며 그들 중에는 萬全한 학술과 技藝가 구비하였었고 심지어 醫藥, 卜筮까지 능한 者가 많이 있었다고 함니다. 그들 중에는 鐵工, 木工, 其他 百工이 많이 있었음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家屋은 模制있게 건축되었으며 그들의 도로는 井然하게 修開되었으며 그들의 農具는 精銳하였으며 그들의 井田制度는 참으로 보기 좋게 그 넓은 들가운대 劃定되었음니다. 그 넓고 좋은 땅에서 그 가진 農具로 힘쓰어 일함으로 그들의 진보는 日就月將되었음니다. 그때에 檀朝에서 그들의 生活上 幸福을 도아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政治上 自治를 주어 自由로 활동하게 함으로 참으로 그들의 計劃한 바의 理想國을 형성하였음니다. 그때 檀朝 人民들은 그들을 流民生活이라고 등한시할 수 없었음니다. 그들의 理想的 施設과 그들의 生氣가 充溢하는 活動은 참으로 老腐한 檀朝 人民에게 瞠目할 價値를 與하였음니다. 당시에 漢族의 全般生活은 一大 異彩를 呈하는데 그 名譽는 전부 箕子에게로 돌아가게 됨은 그가 引率者가 된 까닭이었음니다. 箕子를 酋長으로 한 漢族의 文化는 참으로 檀族에게 막대한 欽羡을 받았으며 더욱 互相傳告하여 箕子의 領域을 觀光하며 그 政治를 시찰함이 盛하였음니다. 그리하여 漢族文化에 특히 農具와 醫藥에 心醉한 檀族은 그만 箕子를 王으로 추대하자는 운동이 勃發하여 檀朝가 顚覆함에 至하였음니다. 註 (그런데 現今 平壤을 箕子의 都城이라는 傳說은 참 새밝한 거짓말이다. 大洞江 一名을 浿江이라 하니 浿江은 즉 배를(船으로 渡하는 水)이란 의의다. 그러면 淸川江도 배물이라 하였고 鴨綠江도 배물이며 遼江도 배물이라고 魏文志에 말하였다. 箕子가 배물 東에 居하였다 하였으니 現今 平壤은 배물 西에 位하였으니 그 誤謬됨이 明白하고 險澶(검터) 즉 錦州는 遼江 東 즉 배물 東에 있으니 錦州가 箕都됨이 近理하며 더욱 5,000 流民이 男負女戴하고 어찌 7,000里 旅行을 감행하였으리오. 海路 외 便도 없고 宿泊의 便도 難한 그때 遼江 東까지 당함도 극히 疲勞하였을 것이다. 箕都가 遼江 東임이 타당함.) 그때에 箕子는 檀朝 人民의 重托을 받고 만반 政治를 施設하려 하였으나 文言이 불통함으로 于先 互相간 通情한 言語와 文化를 가르칠 方法을 강구하고 자기의 部下를 各 鄕村에 派送하여 學校 같은 것을 設하고 漢書를 가르치게 되었음니다. 그들은 朝鮮 農村에 가서 자신의 生活을 謀하며 지나는 동안에 점점 檀朝 風俗에 感梁이 됨은 불가피의 일이라 그의 말은 자연히 檀朝의 固有한 말을 하게 되고 古來風俗을 지키는 檀朝 風俗으로 생활하면서 互相 通婚하게 되니 자연 檀朝 人民에게 同化되었음니다. 그리하여 小數인 漢族의 同化는 그들이 政權 잡은 까닭으로 인하였으며 檀族은 그들과 政權을 같이 활동하기 위하여 漢學을 배호게 되니 그때로붙어 檀朝의 오랜 文化는 남김없이 몰락될 運을 當하였음니다. 그러나 檀族의 習俗과 말 즉 「우리 말」만 그 危機를 면하였으나 다소 變革이 있었다 함니다. 그리하여 箕子의 引率하였던 漢族 5,000은 참으로 一躍하여 朝鮮의 政權을 잡았으나 결국은 檀族에게 同化되었으니 만사는 終局을 보와서 辨定할 바임니다.(以下 21行 삭제-원문)<12> <11-12> |
김소월 삭주(朔州)구성(龜城) 1923년 작품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三千里)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
삭주(朔州)구성(龜城)은 산을 넘는 육천리(六千里)요.
물 맞아 함빡이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 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리(六千里)
가끔 가끔 꿈에는 사오천리(四五千里)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南北)으로 오며가며 아니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반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 텐고
삭주(朔州)구성(龜城)은 산 넘어
먼 육천리(六千里)
계곡만필 제1권 / [만필(漫筆)]
[광야에도 신기루가 있다[廣野亦有蜃樓]]
무변(武弁) 출신인 어떤 고관(高官) 한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흑룡은 백두산(알타이산), 태원은 산서성 영파,절강
-노래 “신흥무관학교교가”-
서북(西北)으로 흑룡(黑龍) 태원(太原) 남(南)에 영절(寧浙)에
독립운동가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1881∼1964)선생께서 기록한 애국가 가사
김승학 선생의 애국가 가사
3절
우랄산부터 대마도까지 수륙 수만리 우리 선조 즐기시던 보금자리라
무궁화 화려한 금수강산 배달민족 배달나라 길이 보전하세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10년 갑자 > 1월 19일 > 최종정보
숙종 10년 갑자(1684) 1월 19일(을유)
10-01-19[01]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재이에 대하여 묻다
[DCI]ITKC_JT_S0_A10_01A_19A_00010_2005_008_XML DCI복사 URL복사
. 임금이 신하들에게 묻기를,
“왜서계(倭書契)의 진위(眞僞)는 어떠한가?”
하니, 김석주가 말하기를,
“정금(鄭錦)이 바다 만리를 건너서 남의 나라를 친다는 것은 사리(事理)가 반드시 어려울 것이고, 또 청인(淸人)이 이미 오삼계(吳三桂)를 멸망시켰고, 또 해구(海寇)와 서로 치므로 정금은 바야흐로 청인을 막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우리 나라까지 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근년에 남이성(南二星)이 연경(燕京)에 사행(使行)하였을 때에 우연히 정금의 글을 베낀 것을 얻었는데 ‘돛 하나만 달면 고려(高麗)까지 갈 듯한데, 어느 땅엔들 나라를 세울 수 없겠는가?’ 하였고, 또 예전에 동방의 땅을 다스린 자는 거의 다 다른 땅에서 왔는데 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이것이며, 유복통(劉福通)은 중국에서 크게 일어나 곧바로 송경(松京)을 쳤고, 납합출(納哈出)은 북방에서 반란하여 자주 변방의 우환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보면 왜서(倭書)가 참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劉福通大創於中原, 而直擣松京;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29년 정묘 > 7월 27일 > 최종정보세종 29년 정묘(1447) 7월 27일(정사)29-07-27[01] 사졸 훈련과 징병에 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다
옛적에 요(遼)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여진(女眞)의 군사가 만 명이 차면 천하에 적대할 이가 없다.’ 하더니, 요(遼)나라가 과연 만 명이 차고 남은 것에 패하였삽고, 고려 때에는 사적(沙賊)이 망한 원(元) 나라의 남은 졸병들로써 갑자기 서쪽 지방을 침범할 제, 변방이 막아내지 못하매, 드디어 거침없이 사뭇 밀어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니, 이런 것이 곧 은감(殷鑑)이 되옵니다. 其在前朝, 沙賊以亡元之餘燼, 卒犯西鄙, 邊方失馭, 遂長驅不止, 如入無人之境, 是謂殷鑑。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7일 甲子 1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또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들 돌 위에다 흙을 북돋우고 보리를 심어 먹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접대(接待)받지 않으면 먹고 살 것이 없어 장차는 궁지에 빠진 도적이 되어 부득이 노략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서·북 변방의 일도 또한 매우 허술하여 침범해 오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전조 말년에 거란[契丹]이 한없이 밀려와 양근(楊根)·충주(忠州)·원주(原州)에까지 들어왔으므로, 문반(文班)과 종친까지 모두 군액에 충당했었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또 시운으로 보더라도 백년토록 태평한 시운은 없었으니, 이번에 왜노들을 거절하는 것은 경솔한 일인듯 싶습니다. 그 왜노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항복을 애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와서 항복하면 반드시 경솔하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두 세 차례 와서 애걸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납관(納款)267) 을 허락하게 될 것이니, 변방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많을까 염려됩니다."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 9월 25일 甲辰 2번째기사 1769년 청 건륭(乾隆) 34년
청천강을 준설하고 남당성을 쌓고 돌아온 전 평안 병사 구선행을 소견하다
전 평안 병사 구선행(具善行)을 소견하였다. 이때에 구선행이 청천강(淸川江)을 준설(浚渫)했으며 남당성(南塘城)을 쌓고 돌아왔는데, 임금이 불러서 물으니 구선행이 대답하기를,
"일찍이 국초(國初)에 서변(西邊)을 모두 흙으로 성을 쌓았던 것은 거란[契丹]이 아침에 쳐들어왔다가 저녁에 물러가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 쌓기가 쉽고 또한 허물기 어려웠기 때문에 흙으로 쌓고 돌로 쌓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신도 또한 흙으로 쌓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많은 사람들의 의논을 물리치고 흙으로 성을 쌓았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성을 쌓은 장교(將校)들을 논상(論賞)하도록 명하였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동환봉사 > 동환봉사 > 올리려던 16조의 상소[擬上十六條疏] > 최종정보
아! 이 수십 만이라는 것이 모두 정병(精兵)이라 하더라도, 가령 전조(前朝)의 말에 왜선(倭船)이 하삼도(下三道)와 경기ㆍ황해에 운집(雲集)하고, 몽고의 홍건적(紅巾賊)이 양계(兩界)에서 봉기(蜂起)하듯 한다면 이 20만으로는 능히 분담하여 방어하지 못할 것이 명백합니다.設如前朝之季。倭船雲集於下三道。畿,黃之境。蒙古紅巾。蜂午於兩界之地。
봉기[蜂起] 뜻이 맞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떼 지어 세차게 들고일어남
○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흘러 들어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고가노(高家奴)ㆍ서질(徐質) 등이 고려로 말을 사러 갈 때에 미쳐서 예전에 원나라에서 항복해 온 장수 교주(咬住) 등이 이 사실을 말하자, 황제가 고가노 등에게 명하여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려가 판 말을 보내는 편에 이들을 보내어 드디어 요양과 심양에서 옮겨간 유민 나타리(奈朶里)ㆍ불반(不反) 등 45호(戶) 3백 58명이 돌아왔다. 《이상 모두 엄주별집(弇州別集)》
총서
태조가 환조의 적장자인 이천계를 극진히 대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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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환조(桓祖)가 세상을 떠나니, 이천계(李天桂)는 자기가 적사(嫡嗣)가 된 이유로써 마음속으로 태조를 꺼리었다. 태조의 종[奴]이 양민(良民)임을 하소하는 사람이 있으니, 천계는 그 누이인 강우(康祐)의 아내와 모여 모의(謀議)하고 양민(良民)임을 하소한 사람과 서로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태조는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들을 처음과 같이 대접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천계의 관하(管下) 사람의 이미 혼인한 아내를 빼앗으므로, 천계가 노하여 구타해 죽이니, 천계를 마침내 옥에 내려 가두었다. 천계가 일찍이 권세를 부리[用事]는 재상(宰相)을 꾸짖어 욕하였으므로, 재상이 드디어 그전 감정으로써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태조가 변명하여 구원하고 힘써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원하여 내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이를 슬피 여겨 여러 고아(孤兒)들을 어루만져 양육하고 무릇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들을 모두 자기가 주관(主管)하였다. 강우(康祐)의 아내는 집이 가난하니, 태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를 많이 주어 그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다. 개국(開國) 후에 천계의 아들을 모두 높은 관작에 임명하였다. 천계는 곧 교주(咬住)이다.
【원전】 1 집 7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외교(外交) / 신분(身分)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