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국(琉球國)은 일본의 서쪽에 있는데, 둘레가 5, 6천 리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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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39년 갑진(1544) 3월 18일(병진)
39-03-18[03] 승정원이 유구국 표류자의 쇄환에 대해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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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홍문관(弘文館)이 《고려사》에서 고찰한 유구국(琉球國)에서 표류한 사람들을 쇄환(刷還)한 전례를 【공양왕(恭讓王) 3년에 유구국 중산왕(中山王) 찰탁(察度)이 그의 신하 옥지(玉之)를 보내 표문(表文)을 올려 신(臣)이라 일컫고 포로가 된 우리 나라 사람 김윤후(金允厚) 등 37명을 돌려보냈었다.】 가지고 아뢰기를,
“이는 바로 그 나라에서 송환(送還)한 것이고 소이전(小二殿)이나 일본(日本)에 의해 전송(轉送)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동사강목 제17상
기사년 후폐왕 창(後廢王昌) 원년 11월 이후는 공양왕(恭讓王)에 속한다.(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22, 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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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유구국(琉球國)이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조빙(朝聘)하였다.
유구국은 우리 나라의 동남 바다 가운데에 있고 동으로는 일본(日本)에 가까운데, 예전부터 사신을 교통한 일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나라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우리 나라가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그 신하 옥지(玉之)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바쳐 칭신(稱臣)하고, 왜(倭)에게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돌려보내 오고, 방물(方物)인 유황(琉黃)ㆍ소목(蘇木)ㆍ호초(胡椒)ㆍ갑(甲)을 바쳤다. 사신이 순천부(順天府)에 이르니, 도당(都堂)에서는 전대(前代)에 오지 않았었다 하여 그 접대를 유난(留難)하였으나, 창(昌)이 이르기를,
“먼 나라 사람이 조공(朝貢)하러 왔으니, 입경(入京)하게 하여 위로해서 보내는 것이 옳으리라.”
하고, 드디어 판사(判事) 진의귀(陳義貴)를 영접사(迎接使)로 보냈다. 창이 유구에서 바친 소목ㆍ호초를 궁중에서 쓰려 하매, 판사 유백유(柳伯濡)가 간(諫)하기를,
“예전에 충숙왕(忠肅王)께서 젓항아리[醢瓮]를 궁중에 두셨는데, 사신(史臣)이 그것을 써서 전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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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琉球)】
유구는 본국(本國)에 반드시 사책이 있으련만 중국에 흘러 들어온 것은 보지 못하였고, 다만 중국 사신들이 기록한 것으로 충분히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있으니, 서보광(徐葆光)의 《사유구기(使琉球記)》, 장학례(張學禮)의 《사유구기략(使琉球記畧)》, 청나라 주황(周煌)의 《유구국지략(琉球國志略)》 4권, 청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유구세찬도(琉球世纘圖)》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와 내가 지은 《유구교빙지(琉球交聘志)》가 있다. 대개 유구가 개국(開國)하던 초기에 천손씨(天孫氏)라는 자가 있어 25대를 전해 왔는데, 홍황(洪荒) 을축년에서부터 시작하여, 송(宋)나라 순희(淳熙) 13년(병오)에 이르러 역신(逆臣) 이용(利勇)이 임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자 순천(舜天)이 그를 토벌하여 죽였다. 이용이 죽고 나자 중의(衆議)에 의해 순천이 왕으로 추대되고 천손씨는 망하였는데, 모두 1만 7천 8백 2년 이었다. 순천은 순천으로부터 의본(義本)에 이르기까지 5대 만에 망하였는데, 모두 73년이다. 이때 천손씨의 후예인 영조(英祖)라는 자가 있어, 송나라 경정(景定 송 이종(宋理宗)의 연호. 1260~1264) 원년에 의본의 양위(讓位)를 받아 즉위하였으나, 7대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찰도(察度)라는 자가 있어 고려 창왕(昌王) 2년(기사)에 처음으로 고려와 통하면서 표(表)를 올려 신(臣)이라 칭하였고, 국조에 들어와서는 태조 정축년에 유구왕 무령(武寧)이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신하라 칭하였으며, 광해군(光海君) 1년(기유)에도 유구국에서 내빙(來聘)하였으며, 인조(仁祖) 6년(무진)에는 북경(北京)에 가 있는 우리 사신 편에 그들의 자문(咨文)을 체송(遞送)하였다. 세상에서는 ‘선조(宣祖) 때에 유구의 세자(世子)가 제주(濟州)에 유랑(流浪)한 것을 제주목사(濟州牧使) 이기빈(李箕賓)이 쳐 죽이고 물화를 빼앗음으로써 그들과 국교가 끊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말이다.
찰도에서부터 상목(尙穆)에 이르기까지는 24세이고, 찰도에서부터 사소(思紹)에 이르기까지는 성씨를 상고할 수가 없다. 상파지(尙巴志)에서부터 상목에 이르기까지는 상(尙)으로 성을 삼았는데, 상목은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1736~1795) 때에 해당한다.
이종덕(李鍾德)의 《표해록(漂海錄)》에 “우리 순종(純宗) 13년(계유)에 살마도주(薩摩島主)가 유구국의 왕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칭신(稱臣)하게 함으로써, 지금은 일본(日本) ‘살마도주내유구국왕(薩摩島州內琉球國王.’이라는 직함으로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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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유구국기(琉球國紀)
국왕대서(國王代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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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은 세습(世襲)한다. 홍무(洪武) 23년 경오(1390, 고려 공양왕 2)에 국왕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來朝)하였는데,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이라 일컬었다.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었고, 그 세자(世子) 무녕(武寧)도 방물(方物)을 헌상(獻上)하였다. 영락(永樂) 7년 기축(1409, 태종 9)에 그 손자 사소(思紹)가 사신을 보내어 유구국 중산왕이라 일컬었다. 그 서장(書狀)의 대략에,
“선조왕(先祖王) 찰도(察度)와 선부왕(先父王) 무녕(武寧)이 잇따라 훙서(薨逝)하여 각 채(寨)가 불화(不和)하게 되었으므로, 여러 해 동안 싸우느라 그동안 소원했었습니다. 금번에 명 나라 황제의 은전(恩典)으로 왕작(王爵)의 봉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16년 무술(1418, 태종 18)에 또 사신을 보내어, 유구국 중산왕 이남 하통 연우진(琉球國中山王二男賀通蓮寓鎭)이라 일컬었다. 그 서장의 대략에,
“나의 형이 금년에 서거(逝去)하였으므로 내가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통문(通問)합니다.”
하였다. 선덕(宣德) 6년 신해(1431, 세종 13)에는, 유구국 중산왕 상파지(琉球國中山王尙巴志)라 일컫고 사신을 보냈으며, 경태(景泰) 4년 계유(1453, 단종 1)에는, 유구국 중산왕 상금복현(琉球國中山王尙金福見)이라 일컫고 사신을 보냈으며, 6년 을해(1455, 세조 1)에는, 유구국왕 상태구(琉球國王尙泰久)라 일컫고 사신을 보냈으며, 천순(天順) 2년 무인(1458, 세조 4)에는, 유구국왕 현(琉球國王見)이라 일컫고 사신을 보냈으며, 3년 기묘에는 다시, 상태구(尙泰久)라 일컫고 사신을 보내었다. 5년 신사(1461, 세조 7)에는 사신을 보내어, 유구국왕 상덕(琉球國王尙德)이라 일컬었으며, 성화(成化) 2년 병술(1466, 세조 12)에는 또, 상덕이라 일컫고 사신을 보내었다. 7년 신묘(1471, 성종 2) 겨울에는 국왕이 사신 자단서당(自端書堂)을 시켜 내조(來朝)하였는데, 자단이 말하기를,
“상파지(尙巴志) 이상은 알 수 없으되, 상(尙)은 성(姓)이고, 파지(巴志)는 호이고, 이름은 억재(億載)이며, 상금복현(尙金福見)의 이름은 김황성(金皇聖)이요, 상태구(尙泰久)의 이름은 진물(眞物)이요, 상덕(尙德)의 이름은 대가(大家)인데, 형제가 없습니다. 지금 왕의 이름은 중화(中和)이고, 아직 호는 없는데, 나이 16세에 종성단봉전주(宗姓丹峯殿主)의 딸에게 장가들었습니다. 왕의 아우의 이름은 어사(於思)인데, 나이 13세이고, 다음 아우의 이름은 절계(截溪)인데 나이 10세입니다. 국왕이 거주하는 지명이 중산(中山)이므로 중산왕(中山王)이라 일컬었습니다.”
하였다. 찰도(察度) 때부터 사신을 보내기 시작한 이래,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았으며, 방물(方物)의 진상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더러는 직접 자기 나라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더러는 자기 나라에 있는 일본 사람을 이용하여 사신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 서(書)를 혹은 전(箋)으로, 혹은 자문(咨文)으로, 혹은 서장(書狀)을 보내기도 하여 격식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그 칭호와 성명도 또한 일정하지 않았다. 유구국은 우리나라와 거리가 가장 멀어서, 그 상세한 것을 구명할 수 없으므로, 우선 그 조빙(朝聘) 및 명호(名號)의 차례만을 기록하여 후일의 고증을 기다린다.
[주-C001] 유구국기(琉球國紀) :
대만(臺灣)의 동북방, 일본 구주 남방에 있던 나라. 지금의 충승제도(沖繩諸島)이다. 유구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이 《수서(隋書)》인데, 유구(流求), 또는 유규(流虯)로 되어 있고, 《당서(唐書)》에는 유구(流求)ㆍ유귀(流鬼), 《원사(元史)》에는 유구(瑠求)로 되어 그 명칭이 다르나, 《명사(明史)》이후의 기록에는 유구(琉球)로 표시되어 있다. 수(隋) 나라 이후 역대로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명(明) 나라 때는 정식으로 중국의 책봉(冊封)을 받았다. 일본에게도 실정막부 때부터 조공을 바치고 교역의 이(利)를 획득해 왔는데, 1875년 무렵 일본이 왕을 폐하고 충승현으로 만들었다.
고전번역서 > 지봉집 > 지봉집 제9권 > 유구사신증답록 > 최종정보
지봉집 제9권 / 유구사신증답록(琉球使臣贈答錄)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연경(燕京)에 갔을 때이다.
[지〔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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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년(1612, 광해군4) 정월에 우리 일행이 북경(北京)에 있으면서 유구 사신과 서로 만나고 5월에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7월에 이르러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현(李玹)이 급히 다음과 같이 장계(狀啓)하였다.
“이달 12일에 이양선(異樣船) 한 척이 본주(本州)의 마라도(麽羅島) 항구에 정박하고는 여덟 명의 사람을 배에서 내리게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구국 사신이 공물을 바치고 귀환하는 도중에 거센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음식이 떨어졌으니, 물과 쌀을 얻어 돌아가기를 요청합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본 목사가 군병(軍兵)을 거느리고 나아가 장차 응접하고자 하였는데, 배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하선한 사람들을 내버린 채 돛을 걸고 달아나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하선한 여덟 사람 가운데 이름이 마희부(馬喜富)라는 자가 있는데 조금 중국어를 알았습니다. 그가 진술하기를, ‘저희는 장사(長史) 채견(蔡堅)을 수행하여 천조(天朝)에 공물(貢物)을 바쳤는데, 귀국의 사신 아무, 아무와 서로 만났습니다. 금년 정월 23일에 북경을 떠나 5월에 복건(福建)에 도착하였고, 7월 1일에 배를 타고 출발하였는데 12일에 바다에서 거센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귀국 땅으로 와서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 즉시 마희부 등을 서울의 역관(譯官)과 조사하는 관원에게 보내어 의관과 노자를 지급하고 천조로 압송(押送)하도록 하였다.
유구국은 우리나라와의 거리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매우 멀리 떨어져 있고, 게다가 북경에서 복건까지, 그리고 복건에서 우리나라까지의 거리는 더더욱 멀리 떨어져 있어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로 경유하는 거리가 몇 만 리나 될지 모를 정도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나라 사람들과 북경에서 서로 만나고, 겨우 수개월 사이에 또 우리나라에 표류하여 왔으니, 아,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 “섬라국은 사방 1천여 리가 되는 나라이다. 본디 섬(暹)과 나곡(羅斛) 두 나라의 땅으로, 섬은 바로 적미(赤眉)의 후예가 세운 나라인데, 원(元)나라 지정(至正) 연간에 비로소 하나의 나라로 합쳐졌다.” 하였다.
만력(萬曆) 20년(1592, 선조25) 9월에 경략(經略)인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이 아뢰기를, “섬라국의 정사(正使) 악팔리(握叭唎) 등이 군대를 통솔하여 왜적의 소굴을 소탕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황제의 교지를 받들어 보니, “오랑캐 사신이 말한 내용에서 충(忠)과 의(義)를 모두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사안인 만큼 특별히 일에 능숙한 관원 한 명을 선발해 저 나라에 함께 가게 해서 조정의 덕의(德意)를 선유(宣諭)하고 회답하는 자문(咨文)을 받아 오도록 한 뒤에야 비로소 거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무릇 섬라국은 일본(日本)과의 거리가 수만 리나 되는데도, 충의에 분발되어 군대를 일으켜 위난을 구제하기를 원하였다. 이 일은 비록 행해지지 않았지만 그 지기(志氣)는 가상하다고 하겠다.
또 살펴보건대, 유구는 변방의 오랑캐 중에서 가장 작고 험하다. 복건(福建)의 매화소(梅花所)에서 배를 타고서 순풍(順風)을 타고 순조롭게 항해하면 7일 만에 이를 수 있다. 그 나라는 예로부터 중국과 통교하지 않았으니, 원나라 때 사람을 보내 초유(招諭)하게 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황명(皇明) 홍무(洪武) 연간 초기에 중산왕(中山王)이 자제(子弟)를 보내 학교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후로 오랑캐 풍습이 조금 변하여 관디(冠帶)를 착용하고 시문을 지어서 화풍(華風)이 있게 되었다.
또 《오학편(吾學編)》에 “유구의 부세하는 법은 대략 정전(井田)의 제도와 같아 임금 및 신하와 백성이 각기 땅을 나누어서 봉록과 양식을 마련하고 상하(上下) 사이에 세금을 거두는 일이 없다. 형벌을 쓰는 것은 매우 엄혹하며, 병기와 갑옷은 날카롭고 견고하다. 다투기를 좋아하여 사납게 싸우며 곧잘 칼로 사람을 죽이는데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헤아리면 배를 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였다. 대체로 그 풍속이 왜(倭)와 서로 비슷하다.
내가 살펴보건대, 고려(高麗) 때 홍무(洪武) 22년(1389, 창왕1)에 유구국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 옥지(玉之)를 보내 칭신(稱臣)하는 표문(表文)을 올리면서 방물(方物)을 바치고, 왜구에게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쇄환(刷還)하도록 하여, 사신 옥지가 순천부(順天府)에 도착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영접사(迎接使)를 보내어 유구 사신을 접대하게 하고, 전객시 영(典客寺令) 김윤후(金允厚) 등을 차출하여 유구국에 답례로 빙문(聘問)하게 하였다고 한다.
내가 지난해 북경(北京)에서 유구 사신 채견(蔡堅) 등을 만났을 적에 채견 등이 홍무 연간의 통빙(通聘)한 일에 대해 누차 말하였는데, 대개 이 일을 두고 이른 것이다.
또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르기를, “성묘조(成廟朝)에 유구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기를 구하였다.〔成廟朝 琉球遣使求貢〕” 하였는데, 본집(本集)에 〈유구국에서 흰 앵무새를 바친 데 대한 표〔琉球國進白鸚鵡表〕〉가 실려 있다. 그리고 지금 유구 사신을 접대하는 사례(事例)가 법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성묘조 이후로는 마침내 교류가 끊겨 통교하지 않았다. 선왕조(先王朝) 경인년(1590, 선조23)에 이르러 유구국 사람 요우(要宇) 등이 우리나라 땅에 표류해 왔는데, 그들을 요동(遼東)으로 압해(押解)하여 명나라 조정에 고국으로 쇄환하도록 전주(轉奏)하게 하였으니, 이른바 ‘그 사람들이 아직도 북산에 살고 있다.〔其人尙在北山生住〕’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범지능(范至能)의 《계해지(桂海志)》에 이르기를, “남방 사람들은 빈랑(檳榔)을 먹기를 좋아하는데, 빈랑은 현회(蜆灰)와 아울러 부류등(扶留藤)과 같이 씹으면 맛이 떫지 않다.” 하고, 또 이르기를, “빈랑과 합회(蛤灰)를 가지고 빈객을 접대하는데, 원주민들은 3개의 칸〔室〕이 있는 작은 합(盒)을 만들어 한 칸에는 합회를 담고, 한 칸에는 부류등을 담고, 한 칸에는 빈랑을 담는다.” 하였다.
내가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섬라국 사람들이 항상 석회(石灰)와 빈랑을 먹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괴이하게 여겼는데, 지금 이 책을 얻어 보고서야 비로소 그들이 먹은 것은 석회가 아니라 합회임을 알았다.
이수광이 쓰다.
조선왕조실록 > 정조실록 > 정조 10년 병오 > 3월 27일 > 최종정보
정조 10년 병오(1786) 3월 27일(신미)
10-03-27[05] 수역 이담이 중국에 다녀온 것을 보고하는 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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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역(首譯) 이담(李湛)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별단에 말하기를,
“지난 가을에 황제가 삼령(三嶺)에 이르러 사냥하다가 큰 호랑이를 보고 친히 조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근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늙어도 친히 사냥을 하는 것은 자손들이 보고 본받게 하고 싶어서이다. 근골(筋骨)을 수고롭게 해야 활쏘기나 말타기에 익숙해진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연경에 도착하여 유구국(琉球國) 사신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황박(黃帕)과 흑포(黑布)를 착용하였는데, 옷소매가 넓으면서 짧았습니다. 그 나라는 일본의 서쪽에 있는데, 둘레가 5, 6천 리이고, 3성(省)을 두어 35개 부(府)를 통솔하며, 중산(中山)에다 도읍을 두고 중산왕(中山王)이라고 일컫는데 명나라 초기부터 상씨(尙氏)가 계승해 왔고, 지금 왕의 이름은 목(穆)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원전】 45 집 562 면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