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元)나라가 망한 뒤 구라파 각국이 차례로 몽고의 왕을 축출하기는 했지만, 풍속은 여전히 부인의 복식에 몽고의 제도를 따랐기 때문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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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집 제9권 / 서독(書牘)
홍일능에게 보내는 편지〔與洪一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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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三斯) 존형(尊兄) 지기(知己) 각하께.
존형의 고향에서 오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근래의 안부를 물어보니, 모두들 “근년에 쇠락함이 몹시 심해졌고, 또한 비문의 글씨를 쓰다가 팔에 병이 생겨 글자를 쓰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것은 노년에 으레 나타나는 증세로 누구나 다 겪는 것입니다. 다만 이 벗의 심정은 이 때문에 서글퍼지니 어찌하겠습니까. 만약 영락한 벗들이 설령 오늘 모두 세상에 살아있어서 아침과 저녁을 함께 지낸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 2, 30년이 지나도록 흠결 없이 단란히 만날 리가 없으니, 또한 ‘태상(太上)은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다.〔太上忘情〕’라는 말에 붙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어찌하겠습니까.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들어 참으로 괴롭게 대하며 아무런 재미가 없었는데, 갑자기 어떤 객이 소매에서 형의 편지를 꺼내주기에 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비록 글자는 남의 손을 빌려 쓴 것이지만 그 내용은 형께서 불러주신 것이니, 기쁘고 위로됨이 얼굴을 마주한 것에 맞먹을 만하였습니다.
또 따로 경제(經濟)와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의 도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양가(兩家)의 선덕(先德 선조(先祖))께서 평생토록 고심하며 연구하던 것이었으니, 어찌 한두 가지 시험을 통해 효과를 확인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고루한 세속에서 끝내 본받지 않고 모두 시렁 위에 쌓아놓았으니, 조정에서 국가를 위한 계책을 세울 때 이런 것들을 급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 듯합니다. 무릇 연사(年使 동지사(冬至使))가 갈 때 급급하게 생각할 물건과 일이 따로 있어, 끝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종전에도 이와 같았으니, 누가 이 의혹을 풀고 이 길을 열 수 있겠습니까. 젊은 시절에는 이런 탄식을 할 때마다 ‘한 번 변해서 노나라에 이르는 것’을 직접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뜻과 기운이 쇠퇴해져 마침내 한쪽 구석에 밀쳐두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많은 일을 겪다보니 끝내 어쩔 방법이 없을 뿐이니, 지금 성대한 논의를 받들고도 그저 긴 탄식만 할 뿐입니다.
부인(婦人)의 복식으로 말하면, 이 또한 가정에서 일찍부터 강론하고 익혔던 것입니다. 제가 약관이었을 때 이미 한 부를 저술한 것이 있습니다. 고증(考證)해 낸 것이 제법 자세합니다만, 이것은 한 사람 한 집안에서 사사로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저 종이와 먹 사이에서 혼자 즐긴 것일 뿐입니다. 전에 북경에 갔을 때 또한 중국의 제도를 목도했으며, 교분을 맺은 여러분에게 남방과 북방의 풍속의 차이를 물어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게 되었지만, 역시 공언(空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근래에 또 크게 놀랄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연경(燕京)에서 들어온 서양 그림에서 저 오랑캐 여인의 복식을 보았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나라의 복식과 매우 흡사하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짧고 좁은 저고리가 흡사했으며, 큰 치마가 채붕(綵棚 아름다운 장막)처럼 펼쳐진 것이 흡사했으며, 노인의 저고리는 조금 길고 치마는 조금 짧은 것 역시 우리나라 시골 노파의 복식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머리를 싸매는 것도 완연하여 조금도 차이가 없었으니, 만 리 밖의 절역(絶域)이나 동서(東西)의 차이를 논할 것도 없이,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와 이처럼 비슷한 것일까요?
제 생각으로는, 몽고(蒙古)의 태조(太祖)가 일찍이 구라파(歐羅巴)의 각국을 병탄하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나누어 봉해 주었으므로 원(元)나라가 망한 뒤 구라파 각국이 차례로 몽고의 왕을 축출하기는 했지만, 풍속은 여전히 부인의 복식에 몽고의 제도를 따랐기 때문인 듯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부인의 복식이 이런 것도 원나라 공주가 우리나라로 왔기 때문인데, 세속에서 고려조의 궁궐 복식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양과 서양은 경계가 만 리의 절역이고 사는 곳도 떨어져 있고 풍속도 다르며 한 번도 서로 오간 적이 없었는데, 같기를 기약하지 않고도 이와 같이 저절로 같아진 것입니다. 이 어찌 놀라 구역질하며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대부들이 만약 이런 이유를 안다면 하루라도 인습하면서 개변(改變)하기를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를 감히 경솔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개변하는 것이 옛 법도와 완전히 합치되도록 하지 못할까 염려되며, 개변하는 과정에서 잘못을 반복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묵묵히 입을 다물고 다만 이러고 있을 뿐이니, 어쩌겠습니까.
장춘사(長春寺)의 유태후(劉太后) 초상은 저도 참배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받들어 모신 상자를 보니 그 안에 새로 모사하여 마치 어제 완성된 듯한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상히 여겨 주지 스님에게 물었더니, “구본(舊本)이 바랬으므로 다시 모사(模寫)하여 공양(供養)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참배하러 찾아온 동국(東國)의 대인(大人)을 만났으므로, 구본을 꺼내 게시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감동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중국 사람의 마음이 아직도 명나라 황실에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성문(阜成門)을 나가면 팔리장(八里庄)에 자수사(慈壽寺)가 있습니다. 이 절은 본래 만력(萬曆) 연간에 창건된 것이며 수황태후(壽皇太后)- 신종(神宗)의 모후(母后)이다. -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그을리고 낡았으므로, 가경(嘉慶) 연간에 미신(味辛) 조회옥(趙懷玉)과 오문(梧門) 법식선(法式善)이 다시 장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낡아버렸으므로 제가 돌아온 뒤에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패번(浿藩)에 있을 때 동문환(董文煥)과 왕헌(王軒) 등 여러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백금(白金) 50냥을 보내 다시 장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 두 사람이 마침내 저를 위해 뜻을 이루어 주었기에 이어 시문을 짓고 그 사정을 기록했습니다. 중원의 사우(士友)들이 먼 곳의 벗을 위해 이 일을 처리해 주었으니 거듭 감탄할 만하며, 저 역시 그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 일은 이전에 지우(知友)들과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본래의 의도가 뒤집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런저런 말들을 만들어 낼까 걱정했기 때문이니, 저는 이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형의 편지에 장춘사에서 화상을 배알한 일을 언급하셨기에 그저 여기에 적는 것이니, 형께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윤아(尹雅)가 돌아갈 때가 되었기에 이처럼 황급히 대략 적어 안부를 전합니다. 바빠서 드리고 싶은 말씀 다하지 못합니다. 오직 도체(道體)가 시절에 따라 맑고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임신년(1872, 고종9) 4월 12일.
[주-D001] 홍일능에게 보내는 편지 :
1872년(고종9) 4월 12일에 쓴 편지이다. 이때는 환재가 청나라 동치제(同治帝)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한 사행에서 막 돌아왔을 시점이다.
홍일능(洪一能)은 홍양후(洪良厚, 1800~1879)로, 자는 일능, 호는 삼사(三斯)ㆍ문사(文斯)ㆍ관거(寬居)ㆍ감목(甘木)ㆍ수전(壽田) 등이다. 홍대용의 손자이다. 1831년(순조31)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1840년경 음직(蔭職)으로 의령 현감(宜寧縣監)ㆍ천안 군수(天安郡守) 등을 지냈으며, 1850년대 이후에는 세거지인 충청도 천안군 수촌(壽村) 장명(長命) 마을로 낙향하여 조부 홍대용이 살던 집과 묘소를 지키며 은거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재는 북경을 통해 들어온 서양 그림에서 부인의 치마를 보았는데 조선 부인의 치마와 흡사해 놀랐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서양과 조선이 원나라 지배를 받았을 때의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또 이런 누습을 개혁하기 위해 젊은 시절에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를 저술한 적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홍양후는 그의 외숙인 신재식(申在植, 1770~1843)이 1826년(순조26)에 동지사의 부사(副使)로 연행했을 때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자격으로 북경에 다녀온 일이 있는데, 연행을 앞두고 환재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청한 바 있다. 이에 환재가 홍양후에게 답한 편지에서도 원나라의 누습을 따른 부인의 복식을 개혁하기 위해 중국 고유의 부인 복식을 자세히 조사해 올 필요가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瓛齋叢書 5冊 藏菴文稿, 與洪一能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96, 295~299쪽》 한편 북경 자수사(慈壽寺)에 걸린 명나라 효정태후(孝定太后)의 화상을 개수(改修)한 자세한 내막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