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명조선

우왕이 즉위한 지 20년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그가 왕씨(王氏)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믿음을갖자 2023. 11. 15. 02:22

임해군

사망
1609년 6월 3일 (향년 36세)
묘소

광해군이 고변을 들었을 때야 "내 형이 그럴 리 없다." 했지만 삼사가 절도 안치를 청하자[17] 혐의를 기정사실화하여 유배한 뒤 옥사를 벌였다. 그리고 죄가 없을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시한 채 종들의 입에서 자백이 나올 때까지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고, 그나마도 종 1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군기를 땅에 묻었다고 진술했는데 왕은 "바보가 아닌 이상 벌써 파냈을 거다."라며 자신의 머릿속 각본에 따라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대사헌 정구, 이덕형 등이 전은론을 펴자 못마땅하게 여긴 반면 정인홍이 임해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기뻐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역적이라는 결론부터 먼저 내린 후 원인을 밝혀내는 황당한 과정을 거친 것. 결국 광해군은 임해군을 붙잡아 교동도로 귀양 보내버렸고 임해군은 귀양지에서 의문사했다. 광해군이 암암리에 암살했거나 사사했을 것이라는 심증만 제기될 뿐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불명이다.[18] 훗날 인조 때 귀양지의 관리가 독살했다는 노비의 증언이 나오기는 했는데 이 독살설도 '반정 세력의 권력 정당화를 위해 조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려 제32대 군주. 폐위되어 묘호와 시호가 없다. 휘는 '우'(禑).

출생1365년(공민왕 14년) 7월 25일즉위1374년 11월 7일사망1390년 1월 8일(향년 24세), 고려 교주 강릉도 강릉부(現 강원도 강릉시)능묘미상
재위기간제32대 국왕, 1374년 11월 7일 ~ 1388년 7월 19일(13년 5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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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집 제52권 / 구정록 상(求正錄上)

춘성록(春城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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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마는 내가 무슨 죄를 졌기에 벼슬이 깎이고도 부족해서 방축(放逐)을 당하고 방축을 당하고도 부족해서 갇히는 몸이 되었는가. 춘성(春城 춘천(春川))이 아무리 궁벽한 곳이긴 하나 사람을 죽일 수야 있겠는가. 이때의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춘성록이라 한다. 정사년 가을에 방옹(放翁) 씀.

 

“백팔 염주 굴리면서 올라갔나니 지금도 꿈속에 휘감기는 구절양장[一百八盤携手上 祇今猶夢繞羊膓]” 이것은 산곡(山谷 송(宋) 황정견(黃庭堅))이 남쪽으로 귀양갔을 때 지은 시이다. 나는 석파령(席破嶺 춘천 서쪽의 재)에 이르렀을 때 그 험준함에 겁을 먹은 나머지 말을 놔 두고 걸어갔는데 바로 아래 낭떠러지를 보고 무척이나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생각해 보니, 이 고개가 오령(五嶺)이나 삼위(三危)의 길보다는 나을텐데도 오히려 이렇듯 험하여 걷기가 어려운데 산곡은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소자첨(蘇子瞻 소식(蘇軾))은 철종(哲宗) 소성(紹聖) 갑술년(1094, 고려 헌종1)에 정주(定州)를 맡고 다시 영주(英州)를 맡았다가 다시 혜주(惠州)로 귀양가 안치(安置)되었으며 정축년에 이르러서는 죄가 더해져 창화군(昌化軍)에 안치되었는데 여기가 바로 담이(儋耳 남만족(南蠻族)이 사는 곳)이다. 혜주에 있은 지 4년 만인 휘종(徽宗) 경진년(1100, 고려 숙종5)에야 비로소 양이(量移)되었는데, 담이에 거한 지 3년 만에 자유(子由)에게 보낸 시를 보면 “7년 동안 왕래한 일 내가 어찌 견뎠으랴[七年來往我何堪].”라고 하였으니, 혜주와 담이에 있은 기간이 통산 7년이 되는 셈이다. 나는 계축년(1613, 광해군5) 여름에 쫓겨나 시골로 돌아왔다가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이르러 죄가 더해져 춘천부(春川府)에 부처(付處)되었다. 시골에 거한 것이 4년이고 앞으로 또 몇 년이나 춘천에 있게 될는지 모르겠는데, 과연 동파 노인이 옥국(玉局)에 가 노닐던 것처럼 될 수 있을까. 우연히 연보(年譜)를 펼쳐 보던 중에 그가 죄를 얻은 기간이 4년인데다 죄가 더해진 것도 나와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기록해 두었다가 뒤에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춘천에 도착하니 춘천에도 사인(士人)이 많아 찾아오는 자들이 줄을 이었는데 모두 옛날부터 아는 얼굴들이 아니라서 서로 대하는 분위기가 썰렁하여 어색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오직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있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그래도 좀 나았다.

노량(露梁) 강상(江上)에서 겨울철 석 달을 보내는 동안 근력이 다 소진되었는데, 춘성(春城)에 도착하고 나서 자세를 다시 바로잡고 서책 공부를 하면서 이곳에서의 남은 날수를 보내 볼까 하였다. 그런데 경서(經書)는 사색하기가 귀찮고, 사전(史傳)을 보자니 다스려진 날은 적고 어지러웠던 때가 대부분이어서 혼란스러웠던 날을 볼 때면 늘 가슴이 문득 두근거려지는 것이 마치 고질병에 걸린 사람이 의서(醫書)에서 자기 증세와 비슷한 것을 보면 심장이 뛰는 것과 같은 점이 있었다. 그래서 경서나 사전에 대해 모두 이회(理會)하지 못한 채 때때로 몽수(蒙叟)의 우언(寓言)이나 펼쳐 보며 스스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오늘은 바로 목릉(穆陵 선조(宣祖))께서 승하하신 날이다. 10년 동안 화란을 겪었는데도 아직 끝이 나지 않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또 한번 눈물을 뿌렸다.

우리 나라 인물 중에서는 기묘(己卯)의 인사들을 사류(士類)의 첫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에 경박한 인사가 있었다 할지라도 모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온당하게 일을 바로잡고 도를 밝히려고 하였을 뿐 공리(功利)를 추구하는 마음은 아예 갖지도 않았으니, 이런 이들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 동방이 비록 요(堯) 임금 때부터 나라를 세웠다고는 하나 해외의 일개 둔장(屯長)에 지나지 않았고, 삼한(三韓)이나 사군(四郡 한 사군(漢四郡)을 말함)의 경우는 자취가 아물아물하여 상고할 수 없다. 고구려(高句麗)ㆍ신라(新羅)ㆍ백제(百濟)가 오래도록 나라를 향유하였다고 하나 그 국가의 제도를 따져 보면 오륜(五倫)도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고려 역시 고쳐지지 않다가 말기에 이르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이 건백(建白)하면서 비로소 관복(冠服) 및 상제(喪制)가 갖추어지게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고 말았다. 그 뒤 아조(我朝)에 이르러 모든 예문(禮文)과 법도를 일체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면서 문물이 성대하여 볼 만하게 되었는데, 저 무당이나 불당에 빌며 축원하는 일 같은 것은 여전히 좋지 않은 습속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조종조에서 위에 질병이 있을 경우에는 승도(僧徒)나 무격(巫覡)이 인정전(仁政殿) 위에서 경을 외우고 기도를 드리기까지 하였다. 그 중에서도 송악(松岳 개성(開城))의 신사(神祠)를 더욱 극진히 떠받들었는데, 신사에서 예를 행한 뒤에 무녀(巫女)가 연회를 베풀면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들어와 참여하였고 심지어는 무녀와 함께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도 태연하게 여긴 채 괴이하게 생각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무녀가 신사에 왕래하며 쓰는 집물(什物)은 모두 역(驛)을 갈마들며 관청에서 공급해 주었다. 그러다가 성묘조(成廟朝)에 이르러 비로소 언자(言者)의 말을 채택하여 혁파시켰다. 그 뒤 중묘조(中廟朝)에 이르러 기묘년 연간에 유자(儒者)들이 조정에 진출하여 그 말이 행해졌는데, 그 기간이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국가의 풍속이 크게 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법(禮法)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춘천은 평소 거처할 만한 골짜기와 산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집 지을 터를 잡으려 할 때에는 꼭 춘천을 말하곤 하였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도 거지반 춘천이라는 이름 때문에 끌려다녔는데, 막상 가서 보건대 소양(昭陽)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평할 뿐 그다지 기이한 절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땅도 척박해서 메밀이나 귀리ㆍ콩 등을 많이 심는데 민간에서 밥을 먹는 자는 드물고 죽을 쑤어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땅이 사방으로 막혀 상거래하기에 불편한 관계로 고을에 호족(豪族) 하나 없이 순박하고 어리숙하기만 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양남(兩南) 지방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근년 이래로 이곳의 풍속 역시 돈독했던 옛날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춘천부(春川府)에 와서 보니 부사 황공(黃公)은 오래 전부터 알던 친구였다. 그가 나에게 허름한 책상 하나를 주었는데, 이는 대체로 내가 독서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늙어 서적을 대하는 일이 드물었고 또 조정에 잘못 보여 이매(魑魅)를 막기에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오직 이 책상에 기대어 꿈나라에 들어가곤 하였는데 꿈을 꾸어도 주공(周公)을 만나 보지는 못하였다.

동파(東坡)의 시에 “낙양의 상공 충효의 가문, 가련토다 그 역시 요황화를 바치다니.[洛陽相公忠孝家 可怜亦進姚黃花]”라고 하였는데, 내가 이 시를 볼 때마다 세도(世道)에 고금의 차이가 없는 것을 가슴아파하였다.

선묘(宣廟) 중기는 국가에 걱정이 없고 백성이 생업을 즐겼으니 소강(小康)의 세상이었다고 일컬을 만하다. 위에서 그동안 문학(文學)의 선비들을 등용하였는데, 재예(才藝)가 있는 연소한 신진(新進)으로서 가령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제인(諸人) 모두가 문장을 가지고 신명을 다 바칠 수 있어 끝내는 나라에 큰 쓰임이 되었으니,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뒤에 와서 묘당(廟堂)에 거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사잇길을 통해 진출한 자들로서 나라의 정사도 이에 따라 무너지고 말았는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할 만한 것이 없게 되었다.

내가 춘천에 도착한 뒤에 백사(白沙) 상공(相公)이 절구(絶句) 한 수를 보내오기를,

 그대나 나나 쫓겨난 신하 / 兩地同爲放逐臣
 중간에 소식 듣고 눈물을 훔쳤다오 / 中間消息各沾巾
 청평산 아래 소양강 물줄기는 / 淸平山下昭陽水
 밤낮으로 서쪽 흘러 광진까지 이르르네 / 日夜西流到廣津

하였는데, 내가 화답(和答)하기를,

 

늘그막에 유배되어 초 나라 신하 배우는 몸 / 白首湘潭學楚臣
허리에 난초 띠고 머리엔 벽지 두건 / 紉蘭爲佩薛爲巾
계속 부는 봄 바람 꿈 속에도 못 잊어서 / 東風無限相思夢
때때로 어선 좇아 한진을 향한다오 / 時逐漁舠向漢津

 

하였다.

무신년(1608, 광해군 원년) 이후로 큰 옥사(獄事)가 해마다 일어났는데, 집안을 일으키고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고변(告變)을 하거나 내통(內通)하는 방법을 쓴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크게는 피를 나눠 마시고 맹세를 하여 경(卿)이나 상(相)이 되고, 작게는 청색 인끈과 자주색 인끈을 차고는 득의양양하게 횡행하였다. 이런 길을 통하지 않은 자는 모두 험난한 지경에 떨어지고 심한 경우에는 죄를 얻어 법망에 걸렸는데, 죽음을 면한다 할지라도 거의 대부분이 유배되거나 방축(放逐)되곤 하였으므로 이끗만 좋아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임금과 가까운 간인(奸人)에게 빌붙어 못 할 짓이 없이 날뛰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잡채 상서(雜菜尙書)니 침채 정승(沈菜政丞 침채는 김치임)이니 하는 말들이 세상에 나돌았는데, 이는 대체로 잡채나 침채 등을 바쳐서 총애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옛날의 양두 관내후(羊頭關內侯)만 어떻게 나무랄 수 있겠는가.

명(明) 나라에서는 건문(建文)의 사절(死節)한 신하와 경태(景泰)의 중신(重臣)에 대해서 거의 모두 뒤에 신설(伸雪)해 주고 포증(褒贈)해 주었는가 하면 사람마다 전하고 집집마다 칭송하며 문자로 기록해 그 사적을 곧바로 쓰게 함으로써 뒷사람들을 권면하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무인(戊寅)의 변과 계유(癸酉)ㆍ을해(乙亥)의 변에 대해 거의 모두 쉬쉬 하며 감히 말하지 못했는데 2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이런 현상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이나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黃甫仁) 등이 억울하게 죽은 일이나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의 대절(大節)조차 모두 깜깜하게 묻혀진 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향기와 악취는 뒤섞이기 어려운 것으로서 하늘의 이치가 이렇듯 크게 밝으니 아무리 문자로 기록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입은 막을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이다.

박원종(朴元宗)의 공은 위대하다. 그는 무인(武人) 출신으로서 문치(文治)를 이룩하였다.

김종서(金宗瑞)의 충성심은 크기도 하다.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변혁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삼문(成三問)의 뜻은 애처롭기만 하다. 그는 안 될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일을 하였다.

어려서 읽은 진후산(陳后山 송(宋) 진사도(陳師道))의 시(詩)에 이르기를,

 

독서가 정말 유익함을 만년에야 알았는데 / 晩知讀書眞有益
앞으로 남은 시간 얼마나 될지 염려되네 / 却恐歲月來無多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노쇠한 지경에 이르고 보니, 옛사람들의 조어(措語)가 허탄하지 않음을 더욱 깨닫게 되어 한 번 읊고는 세 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

퇴지(退之 한유(韓愈))와 영숙(永叔 구양수(歐陽修))은 모두 치아와 머리카락이 일찍 빠졌는데, 시편(詩篇)을 보면서 당시의 나이를 상고해 보면 모두 45, 6세 때의 일이었으니, 예컨대 동파(東坡 소식(蘇軾))가 말한 바 “공이 한창 장년이라고 생각하려니 수염이 눈처럼 희네[謂公方壯鬚似雪].”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퇴지는 영숙에 비해 더욱 그 시기가 빨랐는데, 나는 마흔 한 살 때 앞니가 이미 결딴났고 지금 겨우 쉰인데도 머리가 성겨 빗질도 못 할 형편이 되었다. 양공과 같은 재주나 학식도 없이 유독 일찍 쇠하는 한 가지 일만 그들과 똑같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이다.

우리 나라는 사림(士林)으로 이름이 있었던 자들 대부분이 그 성명(性命)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였다. 영묘조(英廟朝 세종(世宗))에 배양되었던 자들은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폐위될 때 절개를 보이며 죽어갔고, 성묘조(成廟朝)에 배양되었던 자들은 연산(燕山) 때 온통 베임을 당했으며, 기타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으면서 위로는 유종(儒宗) 거경(巨卿)으로부터 아래로 대각(臺閣)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명묘(明廟)가 승하하고 선조(宣祖)가 들어와 대통을 계승한 40년 동안은 큰 형옥(刑獄)이 없었는데, 기축년(1589, 선조22) 사이에 옥사(獄事)가 일어나긴 하였어도 해를 넘기지 않고 곧바로 완결을 지었으며, 여기에 연좌되어 죄를 받은 사람들도 임진년 여름에 이르러 일체 탕척(蕩滌)해 주면서 대소를 묻지 않고 모두 사면해 석방하고 거두어 서용(敍用)하였으니, 망(網)에서 풀어내 주는 인(仁)으로서 그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 뒤에 송유진(宋儒眞)과 이몽학(李夢鶴) 등의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이산해(李山海)와 이덕형(李德馨) 같은 사람들도 모두 역적의 공초(供招)에 거론되었는데, 선조가 특별히 놔 두고 묻지 않았으며 역적만 복주(伏誅)시켰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파급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선조가 승하한 무신년 이후로는 고변(告變)하는 자가 날로 나아와 10년간에 걸쳐 국청(鞫廳)이 줄곧 설치되었으니,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는 훈계와는 동떨어진 것이라 하겠다.

이재(吏才)는 곧 도필리(刀筆吏)에나 해당되는 사항이니 귀하게 여길 것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재상이 된 자로서 이재를 구비한 자를 찾아보기도 역시 어렵다 하겠다. 내가 젊은 나이에 조정에 이름을 올리고 낭료(郞僚)로서 거공(巨公)들 틈에 끼어 노닐었는데, 오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세 명의 상국(相國)만이 이재가 넉넉했을 따름이었다. 임진년과 계사년, 왜구가 나라 안에 가득하고 중국 군대가 성을 꽉 채우던 날을 당하여 급히 전하는 격문(檄文)이 빗발치듯 하고 처리할 문서가 걸핏하면 산처럼 쌓이곤 하였다. 이때 서애가 청사에 출근하면 내가 글씨를 빨리 쓴다 하여 꼭 나에게 붓을 잡도록 명하고는 입으로 부르면서 문장을 작성해 나가곤 하였는데 몇 장이 되건 아무리 긴 글이라도 풍우가 몰아치듯 신속하게 지어나가 달리는 붓을 멈출 사이가 없이 하면서도 첨삭을 가할 필요도 없이 훌륭한 문장을 완성시키곤 하였다. 자문(咨文)이나 주문(奏文)을 지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사신(詞臣)이 분부를 받들어 지어 올린다 할지라도 그 사이에 가감을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정말 기재(奇才)였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한음과 백사의 재능도 그와 짝할 만하다 하겠다.

내가 만력(萬曆) 을유년(1585, 선조18)에 진사(進士)가 되고 나서 합격자 모임에 나갔더니 동년 급제자 중에 박건(朴楗)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모습도 추하고 비루할 뿐더러 사람됨도 바보스러워 숙맥(菽麥)조차 거의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으므로 같이 합격한 사람들 모두가 그를 천하게 여기며 동류로 끼워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내가 육경(六卿)의 반열에 올랐을 때 박건은 그때 비로소 낭서(郞署)에 올랐는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한 채 굽신거리며 뒤를 따라 추주(趨走)하곤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인아(姻婭)의 세력을 등에 업고 또 척리(戚里)와 혼인관계를 맺은 뒤 마침내 계축년의 화란을 배태시키고는 피를 나눠 마시고 맹세하여 성재(省宰)의 반열에 껑충 뛰어올라 내노라 하는 권세를 쥐게 되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박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근래 4, 5년 동안 무관직(武官職)과 음관직(蔭官職)에 대소 관원을 임명할 때 밖에서 의망(擬望)하고 안에서 낙점(落點)을 받는 일이 모두 뇌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때 시장 가운데의 장사치들이 그 주인 역할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어느 관직을 얻어 보려 할 경우, 장사치가 약간의 은냥(銀兩)을 꺼내어 그 관직의 높고 낮음과 좋고 나쁨을 비교해서 경중을 달아 본 뒤 한편으로는 은냥을 전관(銓官)에게 들여보내 의망될 수 있는 발판을 삼고 한편으로는 궁인(宮人)에게 들여보내 낙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터 놓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단 뇌물이 다 들어가고 보면, 그 관직을 희망하는 자는 앉아서 욕망을 충족시키게 되니, 병사(兵使)나 수사(水使)를 원하는 자는 병사나 수사가 되고 목사(牧使)나 부사(府使)를 원하는 자는 목사나 부사가 되는 것인데, 아래로 군현(郡縣)이나 진보(鎭堡)에 이르기까지 값을 치르지 않고 임명되는 자는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이에 장사치가 그 사람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부임을 한 뒤에는 그 사람이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 모으며 밤낮으로 가렴주구해서 원래 치른 값의 두 배를 갚아 주게 되니, 1백 냥을 쓴 자는 2백 냥을 얻고 2백 냥을 쓴 자는 4백 냥을 얻으며 이런 식으로 수천 냥을 썼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계산하게 된다. 그런데 혹시라도 관직을 얻은 자가 그 돈을 갚기 전에 낭패를 보거나 죽어 버리기라도 할 경우에는 장사치가 곧장 그 집으로 가서 배상을 요구하는데, 이 때문에 심지어는 가택(家宅)과 전장(田莊)과 장획(藏獲 노비)을 모조리 팔아 갚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정표(李廷彪)라는 자는 무반(武班) 중에서도 가장 무뢰한 자이다. 무신ㆍ계축년 사이에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일 때에 힘을 쓴 인연으로 발탁되어 곤수(閫帥)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가 갑인년에는 강화부사(江華府使)가 되었는데, 그 역시 장사치를 통해 은 수백 냥을 바치고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다. 그런데 진소(鎭所)에 막 가자마자 곧바로 악질(惡疾)에 걸려 죽었다. 이에 그 장사치가 자기 이익을 잃고 분통이 터져 전주(全州)의 본가(本家)에서 징발해 갔다 하니, 이것이 그 하나의 예라 하겠다.

성묘(成廟)가 친부(親父)를 추존(追尊)하여 덕종대왕(德宗大王)이라고 하였는데,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을 가지고 말한다면 송 영종(宋英宗)이 친부를 복왕(濮王)이라고 한 정도로 그쳤어야 마땅한 것으로서 조종(祖宗)과 나란히 하여 사당에 들이기까지 한 것은 예(禮)의 떳떳함이 되지 못한다 하겠다. 추존하려 하던 초기에 성묘가 공경들에게 여러 가지로 의논을 구하였더니 어떤 이는 가하다 하고 어떤 이는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삼사(三司)까지도 안 된다고 진달해 아뢰는 상황에서 오직 이승소(李承召)만이 홀로 추존의 정당성을 창언(倡言)하면서 매우 장황하게 상소했었다. 성묘가 비록 그의 말을 채택하여 결국 추숭(追崇)하는 계책을 이루긴 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미리 눈치채고 아첨하는 그의 태도를 추하게 여겨 승소를 끝까지 써 주지 않아 관직이 겨우 2품 정도로 그치고 말았으므로 식자들이 비웃었다.

추포(秋浦 황신(黃愼))가 이미 세상을 떠난 터에 동강(東岡 이항복(李恒福))마저 병에 걸렸으니, 소회(所懷)가 있다 한들 그 누가 알아줄 것이며 무슨 말을 한다 한들 그 누가 이해해 줄 것인가. 동파(東坡)의 이른바 “몇몇을 제외하곤 나도 경시해 왔으니 늘그막에 그 누구가 이 늙은이 생각하랴[平生我亦輕餘子 晩歲人誰念此翁].”라고 한 시 구절이야말로 오늘날의 나를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내 나이 15세에 유옥오(兪玉吾 송(宋) 유염(兪琰))가 주해한 《참동계(參同契)》를 얻어 그 방법대로 시험해 보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의 그물 가운데 떨어지고 또 전쟁이 일어나는 변고를 당하는 사이에 어느새 갑자기 나이 오십이 되고 치아도 이미 드문드문 빠졌으며 원래 숱이 적은 머리도 모두 민둥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정선고(鄭仙姑)의 “솥 그릇이 이미 망가졌다.”는 설을 읊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을 하곤 한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가 명묘조(明廟朝) 당시 경연에 입시하여 조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죄명(罪名)을 신설(伸雪)해 주기를 건의하자 명묘가 진노하여 즉시 외직(外職)에 보임케 하였다. 이는 대체로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의논이 명묘 중년에 이를 때까지도 여전히 고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니, 소인이 끼친 화가 참혹하다고 하겠다.

군자가 소인을 다스릴 때에는 늘 느슨하게 하기 때문에 소인이 틈을 살피다가 다시 일어나는 반면, 소인이 군자를 해칠 때에는 늘 참혹하게 하기 때문에 군자가 일망타진되는 화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말세가 된 뒤로는 소인을 제거하는 자는 바로 소인으로서 하나의 소인이 물러가면 하나의 소인이 나아오곤 하였다. 이렇게 소인들이 서로 승부를 겨루는 사이에 국가의 명맥이 상하고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졌는데, 그러다가 비로소 또 왕망(王莽)이나 조조(曹操) 같은 자가 나오면서 종묘 사직이 폐허가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당 현종(唐玄宗)은 장구령(張九齡)을 알면서도 그를 유배보내는 일을 면하지 못했고, 당 덕종(唐德宗)은 육지(陸贄)를 알면서도 끝내 그로 하여금 유배가는 일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다. 두 임금 모두 배척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현종의 경우는 그래도 애석해하는 뜻이 있었던 반면에 덕종은 그렇지 않았으니, 그것은 어째서인가. 장구령이 나간 것은 이임보(李林甫) 때문으로서 현종은 꼭 내보내려는 마음이 없었던 반면, 육지가 나간 것은 덕종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덕종이 더욱 강퍅했다 하겠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빗물이 갑자기 쏟아지면 벌레와 뱀이 변화하여 물고기와 자라가 되니, 세월의 추이(推移)에 따라 기(氣)가 물류(物類)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의 현상을 가지고 관찰해 보면 물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도(世道) 또한 바뀌는 것이다. 화복(禍福)에 관련된 일이 갑자기 일어나기라도 하면 사부(士夫) 모두가 그동안 지켜오던 신조를 바꾸고는 물결에 휩쓸려 요동치면서 권세 가도를 달리는 사람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을 하고 있으니, 사람의 사람된 것이 어찌 어떤 옷차림을 했느냐에 있는 것이겠는가. 그들 역시 벌레나 뱀일 뿐이다.

오래 사는 것이 오복(五福) 가운데 첫째로 꼽히는데, 이런 복을 누리는 자는 드물다. 선조조(宣祖朝)의 재신(宰臣)으로 90세까지 향유한 자는 송 판추 순(宋判樞純 판추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임), 원 판추 혼(元判樞混), 송 판추 찬(宋判樞贊)이었고, 근래에는 신 동추 발(申同樞撥 동추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임)이 역시 94세로 죽었다. 그런데 그는 기력이 90세에 이르러 더욱 강건해져 눈과 귀도 어둡지 않았을 뿐더러 음식도 잘 소화시켰으며 아무 병 없이 죽었으므로 이를 듣는 자들이 부러워하였는데, 그 아들 응구(應榘)도 이름난 사람으로서 해마다 큰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해 주곤 하였다. 세 명의 판추는 관직이 높았어도 모두 자손이 없었으니, 동추가 더 낫다고 하겠다.

아조(我朝)에서 부자(父子)가 서로 잇따라 정승이 된 경우를 보건대, 조종조(祖宗朝)엔 상당히 많았으나 중세에는 전혀 없다가 근대에 와서 홍언필(洪彦弼)ㆍ홍섬(洪暹) 부자가 나왔으며 최근에는 정유길(鄭惟吉)ㆍ정창연(鄭昌衍) 부자가 있었는데, 정(鄭)은 곧 고상(故相)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의 후예이다. 문익은 당시의 명상(名相)이었는데 유길은 바로 그의 손자이고 창연은 그의 증손이다. 그런데 창연의 종형인 지연(芝衍) 역시 정승으로 들어갔으니, 4 세(世)에 걸쳐 네 명의 정승이 나온 것은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다.

소씨(邵氏 소옹(邵雍))가 말하기를 “꽃을 감상하려면 피지 않았을 때 보아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개화(開花) 속에는 바로 낙화(落花)의 이치가 잠재해 있는 까닭에 이미 피고 나면 떨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 노인이 성쇠(盛衰)의 이치를 잘 살폈다 하겠는데, 천지의 세운(世運)과 국가의 흥망을 살필 때에도 또한 그러하다 하겠다.

십여 년 전부터 사부(士夫)들 간에 풍수(風水)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풍조가 일어나더니 자기 어버이 묘소를 천장(遷葬)하는 자까지 나오게 되었으므로 식자들이 탄식하였다. 그러다가 임자년(1612, 광해군4) 연간에는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 자가 나왔으므로 조정에 내려 이에 대해 의논들을 하게까지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지(性智)와 시문용(施文用) 같은 자들이 새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의논을 올리면서 토목공사가 크게 벌어지는 바람에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온 나라에 신음 소리가 가득 차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 먼저 나타나는 조짐이 있게 마련인 만큼 일을 할 때에는 그 시초부터 잘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성지(性智)는 승려이다. 처음에 풍수설을 가지고 사부(士夫)의 집에 출입하면서 산을 살피고 극택(剋擇)하더니 마침내는 그만 위의 총애를 받아 은총이 비할 데 없이 되었다. 그는 새 궁궐과 가까운 곳에 저택 하나를 차지하고 사미(沙彌)들을 길렀는데, 방외의 떠돌이 승려들이 무상 출입하였으니 완연히 하나의 가람(伽藍)을 형성하였다.

시문용(施文用)은 임진년에 중국 군사로 있다가 도망친 뒤 돌아가지 않은 자인데, 정인홍(鄭仁弘)이 그의 족매(族妹)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문용이 풍수와 점서(占筮)에 대해 이야기하자 인홍이 일동 일정을 모두 그에게 자문하여 길흉을 점쳤는데, 마침내는 위에 그를 소개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계기를 만든 것이었다.

국가에서 영진(營鎭)을 설치하고 군액(軍額)을 배정하여 입방(入防)하게 한 뒤 평시에는 훈련을 하고 비상사태를 당하면 수비하도록 하면서 때때로 어사(御史)를 보내 염찰(廉察)케 해 아랫사람을 포학하게 부리는 변장(邊將)이 있으면 율(律)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금제(禁制)가 있었는데도 가렴주구하며 침탈하는 자들은 여전히 있었으며 그동안 채무(債務)를 안고 부임한 장수들이 끼치는 폐단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이들이 개인적으로 자신만 살찌울 계책을 하는 데 따른 폐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령 공사 비용을 돕도록 하라고 요구하며 받아내는 조정의 색목(色目)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만큼 아무것도 얻어 낼 것이 없는 변장의 경우는 오직 군사를 침해하는 한 가지 일밖에는 할 것이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북도(北道)의 진보(鎭堡)가 더욱 심하였다. 모르겠으나 낭연(狼煙 봉화(烽火))이 한번 일어나면 어떻게 뒷수습을 하려는 것인가.

한(漢) 나라에는 공문거(孔文擧 공융(孔融))가 있었는데 조만(曹瞞 조조(曹操))이 죽여 버렸고, 송(宋) 나라에는 소자첨(蘇子瞻 소식(蘇軾))이 있었는데 장돈(章惇)이 쫓아내고 말았다. 하늘이 이미 문거와 자첨을 내놓고 또 만과 돈을 내놓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쫓겨나 동쪽으로 갔을 때 시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맹덕이 어떻게 북해를 용납하랴 유안도 돌아가 요동에서 늙으려 했네[孟德豈能容北海 幼安還欲老遼東].”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파집(東坡集)》을 열람해 보니 이것은 바로 파옹(坡翁)의 전구(全句)였다. 이에 은연중에 합치된 것을 기뻐하며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여주(女主 문정왕후(文貞王后)를 말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여 진신(搢紳)이 도륙되긴 하였으나 몇 년이 지난 뒤엔 그래도 청류(淸流)를 등용시켰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명사들을 모조리 쫓아내 한 사람도 조정에 남아 있지 못하게 한 경우는 참으로 옛날엔 없었던 일이다.

잔뜩 배가 고파져야 밥을 먹고 배가 부르기 전에 숟가락을 놓으며 산보하고 소요하면서 가급적 뱃속이 비워지게 한다. 뱃속이 비워질 때쯤 되면 바로 방에 들어가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앉거나 눕거나 편한 자세를 취하고 오직 몸을 조섭하면서 목제 인형(木製人形)처럼 되게 한다. 그리고는 비단백(鼻端白)을 보고 들고 나는 숨의 수를 헤아리면서 면면약존(綿綿若存)하게 하면 하루종일 해도 피곤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몸이 무심한 상태로 허공과 같이 되어 모든 병이 자연히 없어지고 모든 업장(業障)이 저절로 소멸된다. 이상은 동파가 혜주(惠州)에 있을 때 사용했던 방편법(方便法)인데, 이를 써 놓고 나 혼자 음미하였다.

장괴애(張乖崖 송(宋) 장영(張詠))가 진도남(陳圖南 송(宋) 진단(陳摶))과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이는 대체로 괴애 또한 선도(仙道)의 경지를 터득한 사람으로서 심상하게 벼슬만 추구하는 부류 속에 포함시킬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본전(本傳)을 보니 소싯적에 협객(俠客)의 유파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송(宋) 나라 포종맹(蒲宗孟)은 지극히 부유하여 시중드는 계집종이 천여 명이나 되었고 날마다 돼지 열 마리와 양 열 마리를 잡았으며 밤에는 백 개의 촛불을 태우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수양하는 도를 구하고자 하였으므로 동파(東坡)가 그를 나무랐는데, 우리 나라의 윤춘년(尹春年)이 선술(仙術)을 배운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탕왕(湯王)은 하대(夏臺)에 갇히고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에 구금되었다. 성인은 예방책을 필시 주밀하게 갖추고 있었을텐데 그만 이런 결과를 면치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옛날 소성(紹聖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1094~1098)ㆍ원부(元符 송 철종의 연호 1098~1100) 연간에 간당비(姦黨碑)를 세워 사인(邪人)과 정인(正人)의 명부를 작성하고 등급을 분류하면서 자신들의 진상을 엄폐하고 변호한 것이 어찌 상세하고 치밀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이로써 말한다면 소성ㆍ원부의 뒤에 태어난 자들은 장돈(章惇)과 채확(蔡確)을 군자라고 하고 사마광(司馬光)과 소식(蘇軾)을 소인으로 여겨야 할 법도 한데, 지금 보면 그렇지 않아 청천백일(靑天白日)처럼 분변하여 말하기를 “사마광과 소식은 군자이고 장돈과 채확은 소인이다.”고 하며,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들조차 모두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를 가리킨 것이라 하겠다.

남사고(南師古)라는 이는 명묘조(明廟朝)의 인물로서 관동(關東)에서 살았는데 풍수(風水)를 잘 알고 천문ㆍ복서(卜筮)ㆍ상법(相法)에 모두 전해오지 않는 비결을 터득하여 한번 말하면 반드시 적중시키곤 하였다. 명묘 말년에 서울에 와 노닐면서 판서 권극례(權克禮)와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언젠가 그에게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조정에 분당(分黨) 현상이 일어날 것이고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왜변(倭變)이 있을 것인데 진년(辰年)에 일어난다면 그래도 구할 수 있겠지만 사년(巳年)에 일어난다면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또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직동(社稷洞)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으니 태평시대를 이룰 임금이 그 동네에서 나올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김윤신(金潤身)과 동쪽 교외를 지나가다가 태릉(泰陵) 근처의 한 지역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년에 태산(泰山)을 동쪽에 봉(封)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윤신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 묻자 사고가 말하기를 “내년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 조정이 을해년(1575 선조 8) 무렵부터 반목하기 시작하더니 지금 5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종식되지 않고 있고, 왜변은 진년에 일어났으며, 선조(宣祖)가 사직동 잠저(潛邸)에서 들어와 대통을 계승하였고, 태산은 곧 태릉을 말함인데 문정왕후(文貞王后)가 그 다음해에 붕어하여 태릉에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었으니, 기이하다 하겠다.

시골집에 있었던 4년 동안 날마다 들리는 서울 소식이라는 것이 고변(告變)하여 사람 죽이는 것이 아니면 꼭 논계하여 사람 쫓아내는 것뿐이었으며 우리들 네 명을 주목하여 기필코 없애 버린 뒤에야 그만두겠다는 분위기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기변(機變)이야 한량없었지만 이와 같은 때는 있지 않았다.

풀이 썩어 반디가 되고 별이 떨어져 돌이 되고 마는 것이야말로 물(物)이 변하는 것 중에서 가장 심한 것이라 하겠는데, 군자가 액을 당하고 소인이 뜻을 얻는 것도 모두 이것과 같다 할 것이다.

일찍이 위(魏)ㆍ진(晉) 두 나라의 역사를 보건대, 천리(天理)가 순환하여 어긋남이 없음을 더욱 알겠다. 조만(曹瞞)이 헌황후(獻皇后)에게 굴욕을 안겼는데, 그 누가 알았으랴 겨우 3세(世)를 전하고 나서 성제(成濟)의 칼날이 갑자기 고귀(高貴)의 몸에 미치게 될 줄을. 가후(賈后)가 양후(楊后)를 폐위시키고 시해하여 진(晉) 나라 왕실에 화를 끼쳤는데, 가후는 바로 가충(賈充)의 딸이요 가충은 바로 성제의 모주(謀主)였으니, 가후의 손을 빌려 사마씨(司馬氏)의 국운을 상하게 한 것 같은 점이 있다. 아비는 위 나라 임금을 죽이고 딸은 진 나라 황후를 죽인 결과 마침내는 가씨(賈氏)의 족속이 잇따라 씨를 말리게 되었는데, 혜제(惠帝)의 양후(羊后)가 세 번 폐위되고 세 번 복위되었다가 끝내는 유총(劉聰)에게 대권이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 어찌 보응(報應)이 아니겠는가.

서진(西晉)의 인사 중에서는 동양(董養)을 첫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푸른 거위가 나온 것을 보고 호변(胡變)이 있을 줄을 이미 알았고 보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요, 난리가 나기 전에 떠나 어디에서 생애를 마쳤는지 모르게 하였으니 조짐을 보고 결행(決行)할 줄을 알았던 것이다.태학(太學) 마루에서 길게 탄식하던 자들만 어질다고 할 일이 아니다.

옛날 천문을 논한 학파에 3가(家)가 있었으니, 하나는 개천(蓋天), 하나는 선야(宣夜), 하나는 혼천(渾天)의 설을 주장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혼천의 설이 정밀하였다. 채옹(蔡邕)이 말한 주비(周髀)라는 것은 바로 개천의 설인데, 주공(周公)이 은고(殷高)에게서 전수받은 것을 주 나라 사람이 기록하였기 때문에 주비라고 한 것이다.

〈춘추문요구(春秋文耀鉤)〉에 “당요(唐堯)가 즉위함에 희화(羲和)가 혼의(渾儀)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혼의는 당요 때부터 설치된 것이다. 그 뒤에 낙하굉(洛下閎)ㆍ선우망인(單于妄人)ㆍ경수창(耿壽昌)ㆍ장형(張衡) 등 이를 만드는 자들이 각 시대마다 나왔지만 요컨대 모두 고제(古制)에 의거한 것이었다.

8음(音)은 8방(方)의 기풍을 대변한다. 건(乾 북서쪽)의 음이 석(石)이니 그 기풍이 두루하지 못하고, 감(坎 북쪽)의 음이 혁(革)이니 그 기풍이 광막하고, 간(艮 북동쪽)의 음이 포(匏)니 그 기풍이 온화하고, 진(震 동쪽)의 음이 죽(竹)이니 그 기풍이 밝고, 손(巽 남동쪽)의 음이 목(木)이니 그 기풍이 청명하고, 이(離 남쪽)의 음이 사(絲)니 그 기풍이 따스하고, 곤(坤 남서쪽)의 음이 토(土)니 그 기풍이 서늘하고, 태(兌 서쪽)의 음이 금(金)이니 그 기풍이 짓밟는 듯하다.

진 무제(晉武帝)가 문제(文帝)를 위해 삼년복(三年服)을 입으려 하자 뭇 신하들이 만류하였는데, 양거평(羊鉅平 양호(羊祜))만은 그러지 않았으니, 위대하다 하겠다.

소 방울 소리를 듣고 음률을 맞출 줄 알았으며, 오래 사용한 기구를 때어 밥을 지은 것을 알았으니, 순욱(荀勖)의 재능은 정말 쓸 만하였다. 그런데 그 재능을 좋지 않게 사용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유향(劉向)의 아들이 흠(歆)이고 가규(賈逵)의 아들이 충(充)이니, 이 또한 세상 가운데 하나의 불행이라고 하겠다.

범엽(范曄)과 반악(潘岳)의 문장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범엽은 반적(反賊)이 되었고 반악은 가후(賈后)를 도와 태자를 폐하는 글을 지었으니, 재주란 쓸데없는 것이 이와 같다.

가남풍(賈南風 가후(賈后))이 민회태자(愍懷太子)를 무함하여 죽일 때에 그의 계책을 사람들이 모르게 했을 것이 분명한데 사전(史傳)에 기록되어 눈으로 보는 것처럼 뚜렷이 드러났으니, 귀신이 보는 것이 번갯불 같다고 한 속담이 어찌 틀린 말이겠는가.

유곤(劉琨)은 가밀(賈謐)의 문하 출신이고 조사아(祖士雅)는 닭 소리를 듣고서 화란이 일어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니, 두 사람 모두 경박하게 미봉만 하면서 치란(治亂)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끝내는 의리에 입각하여 왕자(王者)를 존숭함으로써 아름다운 이름이 역사에 길이 빛나게 되었으니, 과거의 행실을 바꾸고 절의(節義)를 행한 것이 후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도간(陶侃)은 8주(州) 군사의 도독(都督)을 맡고 5등(等)의 작위를 누린 기간이 무려 41년으로서 잉첩(媵妾)이 수십 명에 이르렀고 가동(家僮)이 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진기한 보화가 임금의 곳간보다도 더 많았으니 큰 복을 향유했다고 할 것인데, 이에 반하여 팽택(彭澤)은 삼순구식(三旬九食)할 정도로 가난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하지만 옛사람의 인품을 평하는 인사들은 이것을 저것과 바꾸지 않으니, 공명(功名)이 도덕보다 못하고 부유한 것이 은거해서 검소하게 사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시(詩)는 요컨대 내용이 좋아야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것으로서 외경(外境)을 인하여 정서가 우러나오고, 그 정서로 말미암아 적절한 어휘가 표출되고, 그 어휘에 따라 모형(模型)이 생겨나는 것인데, 운(韻)이니 격(格)이니 하는 것들은 이 네 가지 외에 있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굴이 다른 것처럼 같지가 않다. 시문(詩文)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또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지금 세상 사람들은 당(唐)의 시문을 보고 왜 한(漢) 때와 같지 않은가 하고 책망하며 송(宋)의 시문을 보고 왜 당(唐) 때와 같지 않으냐고 흠을 잡는다. 그리고는 어쩌다 한 마디 표현이 옛적의 것과 비슷하게 되면 반드시 스스로 과시하며 말하기를 “내 글은 한 나라 때의 문체이다.”느니 “내 시는 당 나라 때의 것과 같다.”느니 하고 있으니 오활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산이나 강에 비유해 보자. 산에는 오악(五岳)이 있으나 형질이 모두 다르고 강에는 구하(九河)가 있으나 그 근원이 각각 다르다. 하지만 험준하게 높이 솟은 것은 마찬가지이고 서로 부딪치며 물결이 이는 것은 동일하니, 모두 산이 되고 강이 되는 데에는 상관이 없다. 다만 산은 산이면서도 구릉 정도밖에 되지 않거나 물은 물이면서도 도랑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은 단계가 낮은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만약 천만 가지로 다른 형태를 꼭 귀일시키려 하여 하나의 틀 속으로 몰아넣는다면 자연의 이치에 비추어 볼 때 병되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가령 왕세정(王世貞)이나 이반룡(李攀龍) 같은 사람들은 자기네 시문이 한대(漢代)와 당대(唐代)의 것을 뛰어넘었다고 하는데, 나의 안목으로 볼 때는 그것 역시 본디 명대(明代)의 시나 명대의 글일 따름이다. 그런데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왕세정이 어떤 사람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명대의 시는 당대의 그것에 참으로 미치지 못한다.”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단안(斷案)이라 하겠다. 그런데 왕세정이나 이반룡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들마저 한갓 입으로만 떠들며 당(唐)이니 송(宋)이니 하고 다투는데, 막상 그네들이 써 놓은 작품을 보면 외양은 비록 눈[雪]ㆍ달ㆍ바람ㆍ꽃 등을 점철하면서 윤색을 가했어도 품격이 시들하고 기상이 나른하기만 하니, 무관(務觀 송(宋) 육유(陸游)의 자(字))이나 다산(茶山 송(宋) 증기(曾幾)의 호) 정도에만 견주어 보려 해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우스울 따름이다.

역대(歷代)에 천하를 소유한 것을 보건대 오직 한(漢) 나라만이 정당했고 한 나라 이후는 모두 신하가 임금 자리를 빼앗은 것이었다. 당(唐) 나라를 세운 것이 흡사 도적떼에게서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고조(高祖) 자신도 수신(帥臣)의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황조(皇朝 명 나라)의 경우는 실로 치욕의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 개벽(開闢)한 공이 있는데, 대위(大位)에 오르는 일도 반드시 평정한 뒤에 했지 천자가 되려고 급급해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세우고 공묘(孔廟)를 설치하고 인재를 일으키고 절검(節儉)을 앞세우는 것이었으며 사방을 교화시키기 위해 내린 분부가 거의 셀 수 없을 정도였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백성의 성명(性命)을 보존시킬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장사성(張士誠)이 잡혔을 때에도 기필코 온전하게 해 주고 해치지 않으려 하였으며 관곽(棺槨)을 하사하여 장사지내게까지 하였다. 진리(陳理)가 항복해 왔을 때에는 그의 손을 잡아주기까지 하면서 그의 친족들을 보호해 주었으며, 원(元) 나라 세자가 잡혔을 때에도 헌부(獻俘 포로를 종묘에 바치고 공을 보고하는 것)하지 말라고 명하면서 “원(元)이 이적(夷狄)이긴 하지만 중국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한 1백 년 동안에 인구가 많이 늘어났고 어떤 집이나 사람들을 봐도 모두 풍족한 생활을 해 왔는데 짐의 조부(祖父) 역시 그 태평시대를 같이 향유했었다. 따라서 옛날부터 헌부하는 예가 있었다 하더라도 차마 그에게 행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아, 이 말이야말로 천하 만세(萬世)를 덮어주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주(周) 나라 무왕(武王)을 성인이라고 칭하지만 주(紂)는 보옥(寶玉)의 옷을 입은 채 불에 타 죽었고 달기(妲己)는 태백기(太白旗) 끝에 매달렸으니, 명조(明祖)와 비교하여 어떻다 하겠는가. 더구나 백년에 걸친 오랑캐의 습속을 중국 땅에서 몰아내고 삼대(三代)의 일월(日月)을 다시 보게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그래서 그의 공이 우(禹) 임금보다 못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홍무(洪武) 갑술년(1394) 연간에 상이 천하가 태평하게 되었다 하여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같이 하려는 목적으로 이에 강동(江東) 제문(諸門) 밖에 열 개의 누각을 세우도록 명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사이에 술집을 개설하여 사방의 나그네들을 접대하게 하였다. 그 누각들은 학명(鶴鳴)ㆍ취선(醉仙)ㆍ구가(謳歌)ㆍ고복(鼓腹)ㆍ내빈(來賓)ㆍ중역(重譯) 등의 호를 갖고 있었는데, 문무 백관 약간 명에게 조서를 내려 취선루에서 연회를 베풀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창업(創業)한 임금으로서 몸소 태평시대를 이루고 70세까지 수명을 누린 이는 오직 명조(明祖) 한 사람뿐이었으니, 정말 대영웅인 동시에 대복록을 누린 이로서 하늘이 백성을 위해 임금으로 내려준 인물이라 하겠다.

명(明) 나라가 천하를 차지했던 초기에 사방을 정벌해 확보한 강역(疆域)을 보니 종(縱)으로는 1만 9백 리(里)였고 횡(橫)으로는 1만 1천 5백 리였다.

왕현(王賢)은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1403~1424) 연간의 사람이다.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책을 주며 말하기를 “내 책을 읽으면 비단옷을 입겠지만 내 책을 읽지 않으면 초록색 옷밖에 입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꿈을 깨고나서도 괴이하게 여겨지던 중에 며칠 지난 뒤 길가에서 책 한 권을 얻었는데 내용을 보니 바로 청오가(靑烏家 풍수가(風水家))의 학설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그 책에 몰두하며 탐구하여 풍수를 잘 안다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당시에 태종(太宗)의 황후 서씨(徐氏)를 장사지내려 하였는데, 태종이 왕현을 불러 인근의 산들을 보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이곳은 공후(公侯)에 적합한 지역일 따름이다.” 하였다. 그러다가 두씨(竇氏) 집안의 장원이 있던 옛터에 이르러 말하기를 “형세를 보건대 마치 1만 마리의 말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천자에 적합한 지역이다.” 하여 이에 그곳으로 정했는데, 지금의 천수산(天壽山)이 바로 이곳이다. 그런데 왕현이 그 앞에 있는 조그마한 언덕을 없애 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황사(皇嗣)에 방해가 될 듯하다.”고 하였는데, 상이 후손이 없게 되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그게 아니고 단지 서출(庶出)이 많을 것이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출도 상관없다.” 하고 마침내 없애지 않았다. 뒤에 왕현은 관직이 순천 부윤(順天府尹)에 이르렀으니, 비단옷을 입게 되리라는 이야기가 이에 징험되었다 하겠다.

맹자(孟子)는 역(易)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선유(先儒)가 일컫기를 “맹자는 역을 잘 활용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바로 맹자를 잘 알았다고 할 수 있는 동시에 역을 잘 알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은 구차하게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상(象)을 보고 점을 칠 수 있고 수(數)를 가지고 헤아릴 수 있고 그 도를 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니, 제대로 점치고 제대로 헤아리고 제대로 행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역을 제대로 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이 역을 다루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아 그저 말로만 외우고 있을 따름이다.

《시경(詩經)》 삼백 편(三百篇)을 외우면 혼자서 처결할 수 있다고 전(傳)에 기록되어 있다.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열국(列國)의 경(卿)이 상국(上國)에 조회를 가거나 이웃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컫던 말들은 모두가 풍(風)ㆍ아(雅)ㆍ송(頌)과 같은 것들이었는데, 이를 듣는 자가 그 취지를 터득하고 선악과 길흉을 점침에 있어 적중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시경을 외우면 혼자서 처결할 수 있다고 한 의미이다. 그러다가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서는 이런 분위기가 완전히 없어졌고, 후대로 내려와서는 시경을 외우면 혼자서 처결할 수 있다고 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조차 모르게 되고 말았다. 가령 지금 다행히도 시편(詩篇)의 의미를 알고 제대로 말해 주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을 듣고서 이해할 자가 있기나 할까.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의 글을 삼분(三墳)이라고 하는데 분은 크다는 의미로서 대도(大道)를 말한다.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고신(高辛)ㆍ도당(陶唐)ㆍ유우(有虞)의 글을 오전(五典)이라고 하는데 전은 항상이라는 의미로서 상도(常道)를 말한다. 팔괘(八卦)의 설을 팔색(八索)이라고 하는데 색은 구한다는 의미로서 그 뜻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구주(九州)의 기록을 구구(九丘)라고 하는데 구는 모은다는 의미로서 구주의 일을 모두 모았다는 말이다. 육경(六經)이 나오기 전의 소위 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들이었는데, 주관(周官)의 태사(太史)ㆍ내사(內史)ㆍ외사(外史)ㆍ어사(御史)ㆍ소행인(小行人) 같은 직책은 모두 관부(官府)의 전적(典籍)을 담당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전적들은 진(秦) 나라의 분서(焚書) 때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ㆍ선제(宣帝)를 거쳐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 유향(劉向)은 경서를 전하게 하고 임굉(任宏)은 병서를 교열하게 하고 윤함(尹咸)은 수술(數術)을 교열하게 하고 이주국(李柱國)은 방기(方技)를 교열하게 하면서 유향이 이를 총괄하였다. 그리고 유향이 죽은 뒤에는 아들 흠(歆)이 그 사업을 계승해서 《칠략(七略)》을 만들어 올렸는데, 여기에 수록된 책이 모두 3만 3천 90권(卷)이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왕망(王莽)의 난 때 남김없이 불타 없어졌다.

동경(東京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후한(後漢)을 말함)의 기업이 새로 시작되면서 문교(文敎)가 눈에 띄게 일어났는데, 가령 난대(蘭臺)ㆍ석실(石室)ㆍ동관(東觀)ㆍ인수(仁壽)ㆍ백호(白虎) 같은 곳은 모두가 서적을 보관하고 고강(考講)하는 장소였으니 정말 성대했다 하겠다. 그런데 동탁(董卓)이 도읍을 옮길 즈음에 비단에 기록해 놓았던 도서들 모두가 찢겨져 장막이나 주머니 대용으로 쓰여졌는데 장안(長安)이 난리를 맞게 되면서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뒤 조위(曹魏 삼국 시대 조조의 위 나라) 때 모아 놓은 것들은 서진(西晉) 혜제(惠帝)와 회제(懷帝) 때에 없어졌고, 육조(六朝) 때 수집해 놓은 것들은 소양(蕭梁 소연(蕭衍)의 양(梁), 즉 남북조 시대의 양 나라)이 멸망하던 날에 없어졌으며, 당(唐)ㆍ송(宋) 때 모아 놓은 것들은 완안(完顔 금(金) 나라)이 변경(汴京 북송(北宋)의 서울)을 도륙할 때에 없어졌는데, 이것이 경적(經籍)이 겪은 기구한 운명의 대략이다.

수(隋) 나라 때 관문전(觀文殿) 앞에 서실(書室) 열네 칸을 지어 놓고 창문이니 마루니 주방의 장막 등을 모두 진귀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게 장식하였으며 세 칸마다 네모진 문을 열어 놓고 비단 휘장을 드리웠다. 그리고 위에는 비선(飛仙) 둘을 놔 두고 문 밖의 땅 속에는 기계 장치를 설치하였는데, 황제가 서실에 거동할 때 궁인(宮人)이 향로를 들고 앞서 가다가 그 기계 장치를 밟으면 위에 있던 비선이 내려오고 휘장이 말려 올라가면서 문이 저절로 열렸으며 황제가 나가면 다시 예전처럼 문이 닫히곤 하였다.

당 현종(唐玄宗)이 집현원(集賢院)을 창립하고 학사(學士)를 둔 뒤, 달마다 촉군(蜀郡)에서 나는 마지(麻紙) 5천 번(番)을 지급하고, 계절마다 상곡(上谷)에서 나는 묵(墨) 3백 36환(丸)을 지급하였으며, 해마다 하간(河間)ㆍ경성(景城)ㆍ청하(淸河)ㆍ박평(博平)에서 잡히는 토끼 1천 5백 피(皮)를 주어 붓의 재료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양도(兩都)에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의 사고(四庫)를 벌여 세우고 갑ㆍ를ㆍ병ㆍ정으로 차서를 삼은 뒤 축(軸)ㆍ대(帶)ㆍ질첨(帙籤)의 색깔을 모두 달리하여 구별하도록 하였다.

당(唐) 이전의 서적은 모두 사본(寫本)으로서 찍어 내는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당에 이르러 판각(板刻)하는 방법이 처음으로 행해졌고, 오대(五代)에 이르러 풍도(馮道)가 판각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으며, 송대(宋代)에 이르러 비로소 그 일이 성황을 이루었다.

《시경(詩經)》의 서(序)에 대해서는 사전(史傳)을 통해 보아도 모두 누구의 작품인지 명확히 밝힐 수가 없다. 혹은 자하(子夏)라고도 하고 혹은 위굉(衛宏)이라고도 하는데, 회암(晦庵 주희(朱熹))이 경을 해설하면서는 일체 이를 폐기하고 쓰지 않았다. 물론 시에는 서(序)를 의지할 필요 없이 분명히 밝혀지는 것이 있기도 하나 참고해야만 할 것도 있는데, 국풍(國風)의 경우는 더더욱 이 서 없이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학자들이 비록 회암의 해석을 위주로 하더라도 본 서를 또한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漢) 나라 초기에 고당생(高堂生)이 처음으로 예(禮) 17편(篇)을 전했고, 또 고경(古經)을 하간헌왕(河間獻王)이 편찬한 56편이 있었으며, 그 뒤로 후창(后蒼)ㆍ대덕(戴德)ㆍ대성(戴聖)이 모두 예를 정리했는데, 도합 85편으로 만든 것이 《대대례(大戴禮 대덕이 전한 것임)》이고 산삭해서 46편으로 만든 것이 《소대기(小戴記 대성이 전한 것임)》이다. 그런데 《의례(儀禮)》가 경(經)이라면 《예기(禮記)》는 이에 대한 주해서이다.

《주례(周禮)》가 체계화되어 나타난 것은 유향(劉向) 부자로부터 비롯되는데 후대의 유자(儒者)들은 이에 대해 반신반의하였다. 그런데 소자유(蘇子由 소철(蘇轍))가 유독 이에 대한 설을 지어 분명하다고 하였는데 그 주장이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보다도 더 격렬하였다.

좌구명(左丘明)은 공자(孔子)에게서 경(經 《춘추(春秋)》를 말함)을 받았고, 곡량적(穀梁赤)과 공양고(公羊高)는 모두 자하(子夏)에게서 얻었으니 부자(夫子)의 시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전(傳)은 근거를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그 논설 가운데 혹 의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는 것 같은 것은 견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호강후(胡康侯 북송(北宋) 호안국(胡安國). 《춘추전(春秋傳)》을 지었음)가 천고(千古)의 뒤에 태어나서는 곧장 억측을 가지고 논변하면서부터 제전(諸傳)이 마침내 폐기되고 말았는데, 강후의 논의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것이 경과 합치된다고 말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 일만큼은 삼전(三傳)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동 강도(董江都 한(漢) 동중서(董仲舒))가 지은 《춘추번로(春秋繁露)》는 위서(緯書) 가운데 한 맥(脈)을 형성한다.

이천(伊川 송(宋) 정이(程頤))의 《춘추전(春秋傳)》을 보면 대략적인 것만 거론했을 뿐 일일이 분석한 곳이 하나도 없고 양공(襄公)과 소공(昭公) 이하는 더욱 소략하기만 한데, 어쩌면 의심나는 곳은 잠시 제쳐두고 하느라 그렇게 된 것인가.

《국어(國語)》를 혹 《춘추(春秋)》의 외전(外傳)이라고도 하고 혹 《춘추》의 초고(草稿)라고도 하는데 이 모두가 정확한 논이 못 된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국어》의 문체를 보면 힘이 없으니 쇠퇴한 세상의 글이 분명하다.” 하였는데, 내가 보는 바로는 《좌씨전(左氏傳)》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 주자의 이 말도 옳은지 모르겠다.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 때부터 이미 돈이 사용되었다.

한(漢) 나라 초기에 시정(市井) 자손은 벼슬길에 나아가 관리가 될 수 없었으니, 대체로 농업을 숭상하고 상업을 억제시키면서 권면하고 징계함이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익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드는 것과 같은데, 화식전(貨殖傳) 가운데 소봉(素封 봉토(封土)는 없어도 재산이 제후만 못지 않은 사람)에 비유되는 호상(豪商)과 거고(巨賈)를 보면, 모두가 말리(末利)를 가지고 성취하였지 힘껏 농사를 지어 이룬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효무제(孝武帝) 때에 이르러 동곽 함양(東郭咸陽)은 소금 장수였고 공근(孔僅)은 대장장이였고 상홍양(桑弘羊)은 장사꾼의 아들이었는데도 대농(大農)과 어사(御史)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예전의 법이 모조리 폐기되었다고 하겠다.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막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다.

선조조(宣祖朝)의 사기(史紀)는 임진년 변란을 겪으면서 당시 사관(史官)인 조존세(趙存世)ㆍ박정현(朴鼎賢)ㆍ임취정(任就正)ㆍ김선여(金善餘) 등이 불태워 버리고 도주하는 바람에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에서 신묘년(1591, 선조24)까지 25년 동안의 사적이 깜깜해진 채 징험할 길이 없게 되었다. 선조가 승하한 뒤 장차 《실록》을 편수하려 할 때 나와 월사 이공(月沙李公)이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고 백사 이공(白沙李公)이 총재관(總裁官)이 되었는데, 내가 백사에게 말하기를 “25년 동안의 사적을 매일매일의 일을 따라 기록하려 한다면 10년이 걸려도 찾아 물어 볼 길이 없어 성취시킬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당시 명공(名公) 거경(巨卿)의 행적 가운데 사람들의 이목에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이 많으니, 이를 끄집어 내어 열전(列傳)을 서술하는 방식처럼 기록해 나간다면 당시의 사적도 자연히 거론될 수 있을 것이고 선묘(宣廟)에 대한 의리도 이에 따라 얻게 될 것이다.” 하니, 백사가 나의 말을 옳게 여기고 장차 나눠 맡아 기록하려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계축년의 화란이 일어나 내가 먼저 쫓겨나고 백사가 뒤따라 축출되었으며 월사 역시 파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권력을 장악한 자가 역사 편수하는 일을 한결같이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 따라 마음대로 처리하였으니, 나라가 망하기 전에 역사가 먼저 망한 셈이 되고 말았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내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그 당시 권력자가 바야흐로 집요하게 논핵(論劾)하면서 한창 임해군(臨海君)의 일을 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평소부터 그 논을 옳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즉시 사직소를 올려 면직되었는데, 열흘도 채 못 되어 또 그 자리에 임명되었으므로 곧바로 다시 사직소를 올려 면직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날 내가 쫓겨나 유배된 것은 모두가 두 번씩이나 사직한 데에 유래한다고 말들을 하고 있다.

우리 동방은 원래부터 문명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지만 학문에 종사한 자는 전혀 없었다. 설총(薛聰)이나 최치원(崔致遠) 같은 사람들이 공무(孔廡)에 배향되긴 하였지만 그들은 일개 문한(文翰)의 인사에 불과하다. 고려조에 들어와서는 굉유(宏儒)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탁(禹倬)ㆍ최충(崔冲)ㆍ안유(安裕) 등이 걸출한 자였다고 하겠으나 중국의 명유(名儒)에 비교하면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그런데 포은 정공(圃隱鄭公 정몽주(鄭夢周)) 같은 이는 당대의 숙학(宿學)으로서 그를 유종(儒宗)으로 추대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종횡무진으로 펼치는 설에 이치가 타당하지 않은 말이 없고 그의 높고 큰 충절 또한 하늘과 땅에 뻗치고 해ㆍ달ㆍ별에 견줄 정도로 불후(不朽)한 것이니, 그를 유종으로 받드는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그러나 돌아보건대 우왕(禑王)이 폐위되고 창왕(昌王)으로 바뀔 때에 그가 태도를 달리하지 않고 아홉 공신의 반열에 참여하기까지 하였는데, 나는 이것이 무슨 의리에 입각한 것인지 알지를 못하겠다. 우왕이 즉위한 지 20년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그가 왕씨(王氏)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애초부터 위지(委質)해서는 안 되었을 것이요 만약 왕씨였다면 그가 혁폐되는 것을 좌시해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공이 죽으면 사직도 망해 버릴 형편이었던 만큼 차라리 우왕이 폐위되는 것을 참고 견디면서 남은 기업이나마 부지해 보려 했던 것이 공의 뜻이 아니었을까.” 한다. 하지만 이것은 크게 그렇지 않다. “어떤 이도 늙은 소를 죽일 때는 감히 주역이 되려 하지 않는다[殺老牛 莫之敢尸].”고 하였는데, 어떻게 임금 보기를 바둑 구경하듯 하면서 종묘 사직을 안정시킬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임금을 폐위시키는 마당에 어떻게 다른 말로 핑계댈 수가 있겠는가.

선묘(宣廟) 말년에 혜성(彗星)이 자미(紫微)에서 나오더니 삼공(三公)의 낭관(郞官)이 일소되었고, 우림(羽林)이 시원(市垣)에 들어가더니 선묘가 세상을 뜨고 조정이 일신되었으며, 유성(流星)이 여러 차례 헌원(軒轅)에 들어가더니 궁인(宮人)이 모조리 비명에 죽고 말았다. 천상(天象)은 정말 속일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군자가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바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소인이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나라를 망치는 신하가 되기에 안성마춤이다. 같은 재주라도 혹 천만 가지로 길흉이 나눠지는데 어쩌면 이것도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조조(曹操)가 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을 때는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고 외부의 침입이 저지되었는데 한(漢)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고, 유유(劉裕)가 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을 때는 폐단이 개혁되고 도적의 발길이 끊어졌는데 진(晉)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 간웅(奸雄)이 권세를 도적질하고는 다들 잘 다스리려 노력하는데, 이는 일단 잘 다스려진 뒤에야 나라를 뺏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