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명조선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하신 지도 벌써 3백 년이 지났으니, 이는 천운이 바뀌고 인사가 변환하는 때인지라 신은 실로 두렵습니다

믿음을갖자 2023. 10. 31. 08:26

 > 고전번역서 > 백호전서 > 백호전서 제13권 > 경연강설 > 최종정보

백호전서 제13권 / 경연강설(經筵講說)

경연강설(經筵講說)

[DCI]ITKC_BT_0380B_0140_010_0010_2003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을묘년(1675, 숙종1) 1월 9일

사업(司業)을 제수한 명에 사은숙배하고 이어 소대(召對)에 들어갔다. - 승지 정유악(鄭維岳), 옥당(玉堂)이유(李濡)ㆍ이하진(李夏鎭), 가주서(假注書) 이담명(李聃命), 사관(史官) 이후항(李后沆)ㆍ남익훈(南益薰) - 상이 이르기를,

“학문이 고명(高明)하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이기에 매우 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불러도 오지 않더니, 지금 다행히 만나보게 되어 기쁜 마음을 다 말할 수 없다.”

하시기에, 신이 자리에 나아가 절하고 아뢰기를,

“우매하고 미천한 신에게는 어느 한 가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는데, 성상께서 유지(諭旨)를 내리시어 부르시는 데 있어 뜻이 근면하셨으므로 염치를 무릅쓰고 나와 은명(恩命)에 숙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은 황공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어 《강목(綱目)》의, ‘지 선자(智宣子)가 요(瑤)를 후사(後嗣)로 삼았다.’부터, ‘사람들이 배반하려는 뜻이 없었다.’까지 진강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이유(李濡)가 전독(展讀)하고 검토관(檢討官) 이하진(李夏鎭)이 해설하였다. ‘견사(繭絲)’와 ‘보장(保障)’의 설명에 대해서 승지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견사는 호구(戶口)의 부세(賦稅)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보장은 성지(城池) 등의 일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오로지 호구에 따라 부역을 내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전결(田結)에 따라 부역을 내고 있습니다.”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도 오로지 호구에 따라 부역과 조세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는 부역과 조세가 같지 않았던 것으로서, 부역은 호구에 따라 전포(錢布)를 내어 군병을 양성했던 것이고 조세는 정전(井田)의 10분의 1을 바치는 제도에 따라 속미(粟米)를 내어 녹봉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고어(古語)에, ‘부역으로써 군병을 풍족하게 하고 조세로써 양식을 풍족하게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부역과 조세를 모두 전결에 따라 내도록 하는데, 이것은 농민들을 이중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호구와 전결을 분리시켜 옛날의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군병을 풍족하게 한 제도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수긍하셨다. 강관(講官)들이 모두가 문장에 대해 해석하기를 끝내자, 신이 아뢰기를,

“역사를 읽는 데 있어서는 단지 그 사실을 알려고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일을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예컨대, 지백(智伯)이 다섯 가지 어진 것이 있고 한 가지 불인(不仁)한 것이 있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사람이 아무리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불인하면 패망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고, 지백이 한씨(韓氏)ㆍ위씨(魏氏)에게 토지를 떼어주기를 요청한 것에 대해서는 사람이 탐욕을 한없이 부리면 패망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고, 지백이 한 강자(韓康子)를 농락하고 단규(段規)를 모멸한 것에 대해서는 사람이 기세를 부려 남을 무시하면 패망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조 간자(趙簡子)의 진양(晋陽)이 보장(保障)이 된 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아랫사람을 잘 대우하면 위태롭더라도 망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께서도 수긍하였다. 강이 끝나자 신이 곧바로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말하는 것이 어눌하여 생각했던 것을 다 아뢸 수 없고, 또한 말할 때 전후 순서가 뒤바뀔까 염려되었으며, 아뢰고 난 뒤에 성상께서 기억하시지 못할 듯싶었으므로 감히 소차(小箚)에다 신의 뜻을 대략 진술하여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아뢰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내놓으라고 하였다. 정유악이 아뢰기를,

“그것을 어전(御前)에 나아가 읽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기에, 그대로 앞에 나아가 읽었다. 다 읽고 나자, 상께서 내시(內侍)에게 그 차자를 가져다 책상 위에 놓도록 하시고 끝까지 유심히 보시고서 하교하시기를,

“아뢴 일이 모두가 격언(格言)이기에 나는 착실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정유악이 아뢰기를,

“윤휴(尹鑴)가 늙도록 세상에 나와 벼슬을 하지 않는 데에 있어 이러한 의리를 지니고서 출처를 결정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 점에 특별히 유념하소서.”

하였다. 신이 또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오늘날 국가의 형세가 어떠하다고 여기십니까? 태평한 시대입니까, 어지러운 시대입니까? 위태로운 시대입니까, 편안한 시대입니까? 어떠한 방도를 써야만 위태로운 시대를 편안한 시대로 전환시키고, 어지러운 시대를 태평한 시대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하니, 상께서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 어린 나로서는 어떠한 계책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신이 또 절하고 아뢰기를,

“전하의 말씀이 참으로 그러합니다. 우매한 신의 생각으로는, 오늘 신이 차자에서 아뢴 것처럼 해야만 세도(世道)를 만회하여 화단(禍端)을 복으로 전환시키고 위태로운 시대를 편안한 시대로 변경시킬 수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상의 생각은 끝내 어떠하다고 여기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뜻을 이미 알았으니, 내일 대신(大臣)들과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분부하기를,

“대신들을 들어오게 할 수 있느냐?”

하자, 승지가 아뢰기를,

“내일 대신들을 명초(命招)하시어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신을 보시고 이르기를,

“내일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두 번 절하고 나왔다. - 궁전에 올린 차본(箚本)은 계사권(啓辭卷)에 보임 -

 

을묘년(1675, 숙종1) 1월 10일

대신을 명초(命招)하였다. 오시(午時)에 대신 허적(許積), 옥당 이유(李濡)ㆍ이하진(李夏鎭), 승지 정유악(鄭維岳), 사관 이후항(李后沆)ㆍ남익훈(南益薰), 주서(注書) 이담명(李聃命)과 함께 입시(入侍)하여 《강목(綱目)》의, ‘지백(智伯)이 물을 순시(巡視)했다.’부터 사마공(司馬公)이, ‘재주가 덕(德)보다 우수하다.’고 논한 데까지 진강(進講)하였다. 아침에 합문(閤門) 밖의 강습하는 곳에 가서 여러 강관(講官)들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영상(領相)이 아직 오지 않았다.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을 살펴보건대, 대궐 안에서는 절하는 예가 없고 절을 한 자에 대해서는 벌이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영상을 만나보는 데 있어 어떠한 예를 해야겠는가?”

하니, 승지 정유악이 말하기를,

“이전부터 영상이 오면 여러 관원들이 앞에 나아가 배례를 행했다.”

하였고, 수찬 이하진이 말하기를,

“대궐 안에서는 절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나도 들었는데 오늘 강론하여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정유악이 말하기를,

“이것은 이미 근래의 규례가 되었고 3백 년 동안 시행해 온 것이라 갑자기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인 듯하다. 하지만 이 예가 어느 서책에 나온 것인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 예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금제조(禁制條)에 보인다.”

하고, 이어 하리(下吏)를 시켜 《경국대전》의 형전(刑典)ㆍ예전(禮典)을 가져 오게 하였는데, 아직 오지도 않아서 영상이 왔다. 정유악이 말하기를,

“이른바, ‘대궐 안에서는 절을 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내정(內庭)에서의 일을 말한 것인 듯하다. 대궐 안의 외정(外庭)에서는 모두 배례를 행하는 것이 이미 근래의 규례가 되었으니, 지금 갑자기 변경시킬 수 없다.”

하기에, 앞에 나아가 배례를 행하고 물러났다. 오시에 일관(日官)이 시간을 알리고 사알(司謁)이 절하고 아뢰자, 들어가 곡배(曲拜)를 행하고 입시하여 《강목》을 진강하였다. ‘한 강자(韓康子)가 참승(驂乘)했다.’는 데에 대해서 강관(講官)이 아뢰기를,

“어자(御者)와 참승은 모두가 천한 자의 일입니다. 한씨(韓氏)ㆍ위씨(魏氏) 두 사람이 모두 지백(智伯)의 참승, 어자가 된 것은 한씨ㆍ위씨가 지백에게 자신을 낮춘 까닭입니다.”

하였는데, 신이 아뢰기를,

“삼가(三家)는 모두 진(晋)나라의 대부(大夫)로서 서로 낮추어 신하 노릇할 리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지백이 삼가 중에 제일 강하기 때문에 한씨ㆍ위씨가 굴복하여 어자가 된 것이지 반드시 자신을 낮추어 신복(臣僕) 노릇한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하였다. 강관 중에 어떤 사람이 아뢰기를,

“한씨ㆍ위씨가 지백에게 신(臣)이라 칭하였으니, 이는 자신들을 낮춘 것입니다.”

하니, 영상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옛사람은 신하가 아니더라도 서로 말할 때 신이라 칭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였다. 치자(絺疵)가 지백에게, ‘두 사람이 신의 아래만 보고 빨리 달려갔다.’고 한 데에 대해서 검토관 이하진이 아뢰기를,

“‘신의 아래만 보고 빨리 달려갔다.’고 한 것은 그들이 두려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신이 아뢰기를,

“이 주석의 내용을 살펴보건대, ‘아래만 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두려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고, ‘빨리 달려갔다.’는 것은 치자가 두 사람에게 지백의 앞에 함께 가자고 하여 그들의 실정이 탄로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니, 강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말은 너무 지나친 해석인 듯하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이 말이 너무 지나친 것인 듯하지만, 주석가(註釋家)의 뜻이 또한 꼭 맞는 해석이 있는 것으로서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는 바로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시어 제가(諸家)의 주석을 모아 직접 재정(裁定)하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강목》의 고금(古今)의 주석가에 있어 이것보다 더 훌륭한 주석을 낸 자는 없습니다.”

하니, 영상이 아뢰기를,

“《사정전훈의》의 설명에 대해서는 신이 전에 이미 아뢰었습니다. 신도 중국에서 편찬한 《강목》의 주석을 보았는데, 대부분 토지의 연혁(沿革), 명물(名物) 등을 기록한 것으로서 매우 번잡하기만 하여 이것처럼 명확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온공(溫公)이, ‘총명(聰明)과 강의(剛毅)를 재(才)라 하고, 정직(正直)과 중화(中和)를 덕(德)이라 한다.’고 논한 것에 대해서 여러 강관들이 모두 아뢰기를,

“사람이 총명하고 굳센 것은 재주이고, 정직하고 화평한 것은 덕입니다. 지백이 망한 까닭은 재주만 있고 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신은 아뢰기를,

“옛말에,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임금이 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총명하고 지혜로운 덕을 지닌 것이 만민에 으뜸이 되고 백관(百官)을 다스릴 수 있는 것으로서 진실로 모두 좋은 것이지만, 단지 그것을 믿고서 남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백이 패망한 까닭은 그가 총명하고 굳세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가 다섯 가지 훌륭한 재주를 지니고서 남을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그렇다. 총명하고 강의한 것이 나쁜 덕이 아니라, 자신의 총명과 굳건함을 믿고서 남에게 이기려고 한 것이 바로 지백이 패망한 까닭이다.”

하였다. ‘덕이 재주보다 우수한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고, 재주가 덕보다 우수한 사람을 소인(小人)이라 한다.’고 한 데에 대해서 내가 강관들에게 말하기를,

“군자 소인 등의 글자에 대해서도 주석(註釋)을 낼 만한 것이다.”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사업(司業)이 직접 아뢰라.”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옛날에 작위(爵位)는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의 다섯 등급이 있는데 이것은 군(君)이라 이르고, 관직은 공(公)ㆍ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의 네 등급이 있는데 이것은 자(子)라 이릅니다. 따라서 군자라 이르는 것은 그의 재주와 덕이 군이 될 수 있고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매우 좋은 말이다.”

하였고, 여러 사람들도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들이 전에 듣지 못했던 말이다.”

하였다. 그리고 소인에 대해서 물으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사람의 덕이 공정하면 큰 것이고 사사로우면 작은 것인데, 소인의 마음은 단지 자신의 사욕만 알고 남에게 공평히 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소인이란 칭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영상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옛날에 대인이란 이와 반대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영상 및 승지와 신을 앞으로 나오라 하시기에 신 등이 자리에서 나아가 부복하였다. 상이 내관을 시켜 한 폭의 소장(疏章) 및 한 권의 책자(冊子)와 차자를 가져오도록 하였는데, 그 소장은 신이 지난해 7월에 현종 대왕(顯宗大王)께 올린 소장이었고 그 책자는 신이 지난 12월에 금상(今上)께 올린 책자였고 그 차자는 어제 궁전에서 아뢴 것이었다. 상이 승지에게 그 소장을 읽도록 하였는데, 구절이 끝나는 곳마다 영상이 손으로 지적하고 승지가 언문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영상이 그 뜻을 설명하고, 때로는 승지가 설명하게 하거나 신이 직접 설명하도록 하였고, 긴요한 구절에 대해서는 반복해서 매우 상세히 아뢰었는데, 상도 일일이 경청하시어 싫어하시는 기색이 없었다. 끝까지 읽고 나자 해가 벌써 저녁때가 되었는데, 신은 상의 옥체가 피곤하실까 염려되어 아뢰기를,

“오늘은 늦었으므로 책자를 읽을 수 없습니다. 훗날 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우선 그만두고 내일 영상과 함께 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내관이 소장ㆍ차자ㆍ책자를 거두어 가지고 들어가자, 신과 영상ㆍ승지ㆍ강관들은 모두 나왔다. 잠시 정원(政院)에 앉았는데 승지 이당규(李堂揆)ㆍ안진(安鎭)ㆍ이동로(李東老)ㆍ정유악(鄭維岳)ㆍ정중휘(鄭重徽)가 자리에 있었고, 수찬 이하진(李夏鎭)도 왔고, 사관 이후항(李后沆)ㆍ남익훈(南益薰)ㆍ이담명(李聃命)이 모두 와서 말하기를,

“오늘의 아뢰는 일은 어째서 그리 오래 걸렸는가?”

하자, 정유악이 말하기를,

“매우 긴 소장인데다가 일일이 해석하고 아뢰느라고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다. 궁중에서 반드시 오찬(午餐)을 대접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은 필시 이 절차를 잊은 듯하다.”

하고, 나는 말하기를,

“그처럼 오래도록 아뢰었으나 상께서 피곤해 하시는 기색이 없었고 메아리처럼 대답하셨으니 훌륭하시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이담명이 탑전(榻前)에서 초기(草記)한 것을 가지고 왔는데, 내가 말하기를,

“오늘 탑전에서 한 말이 매우 많았는데 모두 기록하였는가?”

하니, 주서(注書)가 말하기를,

“오늘 한 말을 어떻게 다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한 가지만을 기록하고 만 가지는 빠뜨렸으며, 대략 줄거리만을 기재하였는데 훗날 생각해내어 기록해서 보여주겠다.”

하였다. 잠시 앉아 있었는데, 영상이 사람을 보내어 만나고 싶다고 하기에 나는 가서 뵙겠다고 대답하고 약방(藥房)에 나와 영상을 만나보았다. 영상이 말하기를,

“젊었을 때 서로 만났던 일을 기억할 수 없는가? 그 당시 얼굴이 희고 풍만했던 모습이 지금은 늙은 모습으로 변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소인이 대감을 뵈었을 때 저는 총각시절이었고 상공(相公)께서도 성년(盛年)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벌써 40여 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늙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이에 세도(世道)의 번복이나 인사(人事)의 변천이 또한 탄식할 만한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이 말하기를,

“보고 싶은 감회가 매우 간절하였으나 사람의 일이 고르지 못하여 오늘에 와서야 서로 만나보게 되었다.”

하고, 한참 동안 위로하고서 지난날 현종 대왕조 때 대신(大臣)이 내가 올린 밀소(密疏)를 논주(論奏)한 일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영상이 말하기를,

“당시에 나는 영부사(領府事) 정지화(鄭知和) 및 여러 재신(宰臣)들과 함께 입시(入侍)하였는데, 정상(鄭相)이 아뢰기를, ‘요즈음 괴이한 소장(疏章)을 올린 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러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러한 일이 있다.’고 하였다. 정상이 아뢰기를, ‘이는 매우 놀랍고 괴이한 일입니다. 그 일이 어찌 오늘날 말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런 상소를 정원이 어찌하여 받아 올렸습니까. 필시 나라에 큰 일을 발생시킬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신은 윤휴(尹鑴)의 상소를 보지 못했으므로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언론은 조정이 채택하느냐 않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으로서, 시행할 만한 것일 경우 시행하고 시행할 수 없는 것일 경우 내버려두면 됩니다. 어떻게 미리 옹폐시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영부사가 또 아뢰기를, ‘인조조(仁祖朝) 때부터 이러한 소장(疏章)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다시 아뢰기를, ‘인조조 때 이러한 분부가 있었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지난날과 다른 것인데 소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신은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상이 끝내 윤허를 내리지 않았다.”

하였다. 그리고 지난날 송상(宋相)을 논죄(論罪)한 일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영상이 말하기를,

“송상이 논한바, ‘단궁(檀弓)은 단문(袒免)을 하였고 자유(子游)는 마최(麻衰)를 입었다.’는 설에 대해서 사업(司業)의 생각에 어떻게 여기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송상의 이 말은 일시의 망발로서 나는 그가 사심(邪心)을 지닌 것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과연 사심을 지녔다면 어떻게 이 말을 효종(孝宗)이 지위에 계신 때에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송상은 효종의 특별하신 은우(恩遇)를 받았으니, 감격하여 보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인정(人情)인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고서 임금을 무시하는 패망(悖妄)스러운 말을 하여 큰 죄를 자초하려는 것은 인정이 아닙니다.”

하였다. 영상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 차자 내용에 또한, ‘단궁은 단문을 하였고 자유는 마최를 입었다.’는 말을 넣었는데, 그것을 본 사람이 말하기를, ‘송상의 이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지금 차자에서 언급할 경우 사람들이 필시 그 일을 고의적으로 제기시킨 것이라 여길 것이니 빼버리는 것만 못하다.’고 하기에, 나는 썼다가 삭제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 말은 실로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그 말이 한 번 나오면 송상이 반드시 죽게 된다고 여겨 말하지 않으려는 것인데, 오늘날 대신(臺臣)이 이미 발언하였습니다. 저는 송상의 그 말은 실로 망발이니 이러한 사실을 여러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버젓이 말하고 상공(相公)께서 그가 실제로 사심이 없는 것을 논하신다면 이것은 한 번의 서경(署經)을 한 것처럼 될 것이라 여깁니다. 그 일을 숨기고 은밀히 전하기만 하여 참으로 그 속에 잠재해 있는 큰 죄를 숨기는 것처럼 하는 것보다는 오늘날 그 말이 이미 드러난 때에 조정이 공론으로 그가 사심이 없다는 것을 밝힐 경우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영상이 웃으며 말하기를,

“과연 그러하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 평소에 늘 사업의 논의가 매우 준엄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이 말을 듣건대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또한 좋은 말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하직하고 나왔다.

 

을묘년(1675, 숙종1) 1월 10일

승지 정유악(鄭維岳)이 원소(元疏)를 읽었다. ‘병자(丙子), 정축년(丁丑年)의 일’이라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병자, 정축년의 난(亂)에 대해서 전하께서 나이가 어리시므로 알지 못하시는 것인데, 이는 병자, 정축년에 우리나라가 청(淸)나라의 침입을 받은 일을 말한 것입니다. ‘금수(禽獸)가 사람을 다그쳤다.’는 것은 저들이 사람이 아님을 지칭한 것이고, ‘회계(會稽)’는 월(越)나라 구천(勾踐)이 회계에 있었던 일을 지칭한 것이고, ‘청성(靑城)’은 송(宋)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청성에서 출항(出降)한 것을 지칭한 것으로서, 이 말은 모두가 우리 선왕(先王)께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출항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당시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남한산성에서 청인(淸人)들에게 포위되었는데, 사방의 근왕병(勤王兵)이 모두 패하고 강도(江都) 또한 함락되어 형세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끝내 출항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모두 그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오늘날 북방(北方)의 소문’이라 한 데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추류(醜類)’는 북쪽 오랑캐를 말한 것이고, ‘오(吳)’는 오삼계(吳三桂)를 말한 것이고, ‘공(孔)’은 윤휴(尹鑴)가 중원(中原)의 일을 잘 알지 못한 것으로서 남쪽에서 일어난 사람은 바로 정남왕(靖南王)경중명(耿仲明)의 아들인 정충(精忠)입니다.”

하였는데, 신이 아뢰기를,

“손연령(孫延齡)이란 사람도 남쪽에서 일어났는데 바로 공회덕(孔懷德)의 사위이므로 신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이 또 아뢰기를,

“‘달(㺚)’은 몽고(蒙古)를 말한 것이고, ‘정(鄭)’은 정금(鄭錦)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유민들에게 머리를 깎게 했다.[薙髮遺民]’고 한 것에 대해서 정유악이 아뢰기를,

“청인(淸人)이 중국에 들어가서 천하 사람들에게 모두 머리를 깎게 하였는데 이것을 ‘치발(薙髮)’이라 한 것이고, ‘유민(遺民)’은 명(明)나라의 유민을 지칭한 것입니다. ‘한(漢)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란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자, 사람들이 모두 회복시킬 것을 생각하였는데, 이리하여 사책(史策)에, ‘한나라를 생각한다.[思漢]’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바람 소리를 듣는다.’고 한 것은 진(晋)나라 모용수(慕容垂)의 일입니다. 모용수가 진(秦)나라 부견(符堅)에게 항복하고 나서 회복하려는 뜻을 가졌는데, 당시 그는 말하기를, ‘새장 속에 갇힌 매는 바람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하늘을 날고 싶은 뜻을 지닌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웃 나라’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이웃 나라’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저들과 국경이 연접해 있는 것을 말한 것이고, ‘요해(要害)의 곳’이라고 한 것은 이해가 서로 관계되는 것을 지칭한 것이고, ‘천하의 후면에 있다.’고 한 것은 우리나라가 저들의 후면에 있는 것을 말한 것이며, ‘그 형세를 흩어지게 한다.’는 것은 저들의 세력을 분산시키는 것을 말한 것이고, ‘그 마음을 떨게 한다.’는 것은 저들로 하여금 마음이 두렵게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천하의 근심을 함께하고 천하의 의리를 부지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또 아뢰기를,

“이는 윤휴의 오늘날의 뜻입니다. 현재 중국 각처에 의병(義兵)이 일어나 명나라 황실을 회복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기병(起兵)하여 저들과 대항할 경우 이는 천하의 근심을 함께하고 천하의 의리를 부지하는 것입니다. ‘칼을 잡고도 자르지 않는다.’는 것은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고, ‘활을 잡고 쏘지 않는다.’는 것은 기회를 잃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따르고 받든다.’ 한 것에 대해 영상이 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시경(詩經)》에, ‘그 효도를 따른다.’고 하였고, 《서경(書經)》에, ‘우리 선왕(先王)이 그 뜻을 받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선왕의 일을 계승하시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고려 말기에 국운이 개혁될 때[麗季鼎革之際]’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또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정(鼎)과 혁(革)은 모두 괘(卦)의 이름인데, 《역경》에, ‘정(鼎)은 새것을 취하는 것이고 혁(革)은 옛것을 버리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영상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말은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이 고려의 국운이 끝나고 아조(我朝)가 일어날 시기를 당한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동녕(東寧)을 공격했다.’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몽고(蒙古 원(元)을 말함)가 압록강(鴨綠江) 서쪽 지역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았는데 몽고가 명(明)나라에게 쫓겨나 북쪽으로 도망치자, 고려가 우리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동녕부를 공격하여 그들과의 교제를 끊게 하였는데, 《동사(東史)》에서 이른바, ‘서북면(西北面) 일대가 텅 비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이 아뢰기를,

“원(元)나라가 고려와 가장 친한 사이였는데 명나라가 일어났는데도 고려의 조신(朝臣)들이 원나라를 섬기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태조께서 동녕부를 공격하여 그들의 왕래를 끊은 것입니다. ‘요동(遼東)을 치는 군사를 돌려 역절(逆節)을 막았다.’는 것은 고려의 최영(崔瑩) 등이 신우(辛禑)에게 기병하여 중국을 칠 것을 권한 것이 역절인 것인데 이 때문에 우리 태조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입니다.”

하고, 신은 아뢰기를,

“신우가 요동을 치려고 했을 때 우리 태조께서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중로(中路)에 갔을 때 사졸들이 모두 원망하고 분개하여 창날을 되돌리려고 했으므로 태조께서 민심에 순응하시어 동쪽으로 돌아온 것인데, 이것이 우리 태조께서 천명(天命)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하였다. ‘우리 성상께서는 기력을 내소서.’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해석하자, 영상이 아뢰기를,

“그러합니다. 이것은 이문(吏文)인데 중국의 이문은 우리나라의 언문(諺文)과 같은 것으로서 공문(公文)에 사용하는 문자입니다.”

하였다. ‘우리 소경 대왕(昭敬大王)의 용사 도이(龍蛇島夷)의 난’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용(龍)은 진년(辰年)이고 사(蛇)는 사년(巳年)이고 도이(島夷)는 일본(日本)인 것으로서 이는 임진 왜란의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대부(大府)의 수백만 금을 내주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정유악이 아뢰기를,

“당시 만력 황제(萬曆皇帝)께서 우리나라가 적의 침입을 받고 흉년이 든 것을 걱정하시어 미곡을 운송하여 시장을 열도록 하고 내탕금을 풀어 구제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소비된 것이 7백만 금에 이른다 합니다.”

하였다. ‘힘이 은덕에 보답할 수 없고 일이 조화(造化)에 수응(酬應)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서 신이 아뢰기를,

“은덕이란 부모의 자애로운 은혜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고, 영상이 아뢰기를,

“조화라고 한 것은 천지의 조화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종신토록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지 않았다.’고 한 것에 대해서 신이 아뢰기를,

“이 말은 고(故)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이원익(李元翼)의 기록에 나옵니다.”

하였다. ‘수만 갈래의 물이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지상에 흐르는 물은 동서 남북으로 수만 가닥이 굽이져 흐르지만 그 물길이 모두 동해(東海)로 흘러가는데, 이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충성스러운 마음이 그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고, 신은 아뢰기를,

“이 말도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무술년(1598, 선조31)의 변무주문(辨誣奏文)에 적혀 있습니다.”

하였다. ‘재조번방(再造藩邦)이란 사대자(四大字)를 쓰셨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이 사대자는 오늘날 민간에도 인본(印本)이 있는데,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직접 쓰시어 경리(經理) 양호(楊鎬)의 생사(生祠)에 현판으로 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만년에 심하(深河)의 싸움에 복종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심하는 요동(遼東)의 지명입니다. 만력 무오년(1618, 광해10)에 중국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노추(老酋)의 소굴을 전복시키려 하면서 우리나라에 군사를 내어 서로 돕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광해는 강홍립(姜弘立)ㆍ김경서(金景瑞) 등을 장수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는 데 있어 몰래 밀지(密旨)를 주어 오랑캐와 서로 통하게 하여 중국 군대가 이 때문에 크게 패하고 용장(勇將)이 모두 죽었으며, 강홍립ㆍ김경서 등도 모두 추노(酋奴)에게 항복하여 요좌(遼左)가 끝내 함락되었는데, 상소에서 이른바, ‘중국이 그 화단을 받았다.’고 한 것이 이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 죄를 낱낱이 거론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우리 인조께서 반정하실 때 인목대비께서 폐주(廢主 광해군을 말함)의 열 가지 큰 죄를 헤아려 폐위시켰는데, ‘모후(母后)를 유폐(幽廢)하고 북쪽 오랑캐와 교통한 것이 첫 번째 죄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하늘을 섬기면 도움을 받고 하늘을 배반하면 죄를 받는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하늘을 섬긴다는 것은 중국을 섬기는 것을 말한 것이고, 하늘을 배반한다는 것은 중국을 배반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가도(椵島)의 사건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가도는 바로 피도(皮島)입니다. 이 섬은 평안도 서해에 있는데, 중국이 장수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여 북쪽 오랑캐가 우리나라에 충돌하는 것을 제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자년(1636, 인조14)에 명나라 군사가 돌아갈 때 북쪽 오랑캐가 우리나라 장수 유림(柳琳)ㆍ임경업(林敬業) 등을 위협하여 주사(舟師 수군(水軍)을 말함)로 함몰시켰습니다.”

하였다. ‘송산(松山)의 싸움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송산은 광녕(廣寧) 지방에 있는데 조대수(祖大壽)가 수년간 굳게 지켰습니다. 중국 조정이 30여만 명의 군사를 보내어 홍승주(洪承疇)를 장수로 삼아 구제하도록 하였는데, 우리나라 군사는 화포(火炮)에 섬멸되어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서, 상소에, ‘창귀(倀鬼)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맹호(猛虎)가 사람을 많이 잡아먹는 데 있어 죽은 자의 귀신이 범에게 잡아 먹혔지만 범의 사나운 것을 무서워하여 도리어 사역(使役)이 되고 앞잡이가 되어 장치해 놓은 기계나 함정을 만났을 때 반드시 앞서가며 제거합니다. 여기에 이른바, ‘창귀’는 바로 우리 군사가 저들의 사역노릇하기를 창귀처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고, 신은 아뢰기를,

“당시에 10만 명의 의사(義士)가 화포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노상승(盧象昇)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실로 천하의 명장(名將)으로서 지혜와 용력이 대적할 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전에 남쪽에서 싸워 승리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이 싸움에서 그도 또한 진중(陣中)에서 죽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 군사의 화포에 맞아 죽은 것으로서 그의 지혜와 용력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니, 참으로 애통한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탄식하시며 이르기를,

“그런가.”

하였다. 영상이 말하기를,

“갈석(碣石)이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갈석은 바다에 있는 것인데 여기서 말한 갈석은 요동을 가리키고, 산해(山海)는 관(關)의 이름을 말한 것인데 관내(關內)는 중국을 이릅니다.”

하였다. ‘크게 일을 시작하고 크게 변경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이 말은 오늘날 우리 국가가 반드시 큰 일을 해야만 중국 사람에게 보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초하루에 절하시고 애통해 하셨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당시 신이 시골에 있으면서 도로에서 전하는 말을 듣건대, 인조 대왕께서 병자ㆍ정축년에 출성(出城)하신 이후 초하루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실 때마다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셨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니, 영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일찍 잠에서 깨시고 새벽에 일어나셨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뜻을 신이 알고 있습니다. 이 상소에서 이른바, ‘무기를 수리하고 병사를 소집하라.’고 한 것은 무비(武備)를 닦는 것을 말한 것이고, ‘외적의 침입을 미리 대비하라.’고 한 것은 의외의 환난이 발생하는 것을 염려한 것이고, ‘북쪽으로 향한다.’고 한 것은 서쪽으로 오랑캐를 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천시(天時)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여 걱정이 전하에게 있게 되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반복해서 아뢰기를,

“선왕 때에 비록 큰 뜻을 지니셨지만 단지 천시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도에 돌아가시어 끝내 중대하고 어려운 사업을 후인(後人)에게 물려주시게 된 것이니, 이것이 ‘걱정이 전하에게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잔포하고 추악한 무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잔포 추악하다는 것은 모두가 저들의 잔포 추악한 일을 지적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큰 의리’란 것은 오늘날 저들을 토벌하여 분한을 씻는 대의(大義)를 말한 것이고, ‘큰 수치’란 것은 지난날의 치욕의 부끄러움을 지칭한 것입니다.”

하고, ‘시기와 형세를 틈타고 나라의 보존을 도모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아뢰기를,

“‘시기와 형세를 틈탄다.’는 것은 지금 저들이 패하여 무너진 때를 틈타려는 것이고, ‘나라의 보존을 도모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보존을 도모하는 것이 또한 이 거사에 달려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고, ‘오랑캐의 운이 점점 쇠미해지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아뢰기를,

“‘오랑캐’는 저들을 말한 것이고, ‘오(吳)’는 오삼계(吳三桂)를 말한 것이고, ‘일역(日域)’은 일본(日本)을 말한 것이고, ‘정인(鄭人)’은 정금(鄭錦)ㆍ정이사(鄭二舍)를 말한 것입니다. 윤휴의 생각에 우리나라가 일본과 정금의 화란(禍亂)을 받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중국이 군사를 일으키자 오랑캐의 형세가 이미 꺾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군사를 출발시킬 경우, 저들이 앞뒤로 공격을 받아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사신이 왕래하여 저들과 한편이 되었으니, 오삼계가 이러한 것을 알게 될 경우 필시 우리의 행위에 대해 분개하여, 혹은 정금 등으로 하여금 한 부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와 저들이 교통하는 길을 끊게 하고, 또는 우리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줄 경우 일본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인데, 이 점이 신이 이른바,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한심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병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있는데 혹시 광복(光復)시켰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우리가 시종 저들의 편당이 된 실정을 따져 물을 경우 우리로서는 대답할 말이 없을 뿐더러, 군신 상하가 다시 중국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게 되고, 또한 천지 사이에 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러하다고 하시고, 영상 및 정유악도 그렇다고 하였다. ‘지난날의 정예롭고 뛰어난 인물이 거의 모두 죽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저들이 애당초 천하를 얻을 때에는 그들의 장수와 재상 및 구왕(九王)ㆍ보정(輔政) 등이 모두가 뛰어난 인물들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사망하여 저들의 형세가 지난날과 같지 않습니다. 이에 윤휴가 이러한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중국의 사람들이 누구인들 저들에게 심복하겠습니까.’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청인(淸人)이 중국에 대해서 그 실책이 머리를 깎게 한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 사람들이 분개하여 모두가 쫓아내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진승(陳勝)ㆍ오광(吳廣)이 팔을 치켜든다.’고 한 것에 대해서 정유악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이것은 사책(史策)에서 이른바, ‘하걸(夏桀)ㆍ상주(商紂)가 임금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탕왕(湯王)ㆍ무왕(武王)이 일어났고, 진(秦)나라 사람이 도리를 잃자 진승ㆍ오광이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진승ㆍ오광이 제일 먼저 주창하여 진나라를 파멸시킨 공이 탕왕ㆍ무왕과 동등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주서(朱序)가 한 번 소리쳤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이 일은 《통감(通鑑)》에 보이는 것으로서, 이른바, ‘주서가 군대의 후미에서 소리쳐 말하기를, 「진(秦)나라 군사가 파멸되었다.」고 했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했다. ‘황하(黃河)의 제방과 회수(淮水)의 제방이 무너졌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이것은 천하의 형세가 토붕 와해(土崩瓦解)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제후들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큰 바람이 불어 모래가 날렸다.’고 한 것에 대해서 정유악이 아뢰기를,

“이 일도 또한 《통감》에 보이는 것으로서, 이른바, ‘한왕(漢王)이 다섯 제후의 군사들을 따라 팽성(彭城)에 들어갔는데, 큰 바람이 불어 모래와 돌을 날리고 낮인데도 캄캄하고 어두웠기 때문에 한왕이 수십 기(騎)를 따라 도망갈 수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급한 천둥이 치고 불이 맹렬히 탔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이 일도 역시 《통감》에 보입니다. 곤양(昆陽)의 싸움에 있어 하늘이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려 치천(滍川)의 물이 범람했으므로 왕심(王尋)ㆍ왕읍(王邑)이 도망갔습니다. 한(漢)나라 군사가 관중(關中)에 들어가 미앙궁(未央宮)을 태우자 왕망(王莽)이 선실(宣室)에 가서 불을 피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불길이 따라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왕망의 기세가 융성할 때에는 하늘이 그를 미워하여도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한나라 군사가 와서 그 죄를 성토하자 하늘도 그 성세(聲勢)를 돕는 데 있어 이처럼 한 것이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하늘과 사람의 일에 있어 요점은 사람이 주장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께서도 수긍하시며 그렇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정예로운 무기와 강한 화살 및 화포(火炮)ㆍ비환(飛丸)’에 대해서 신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본시 궁시(弓矢)가 예리한 것으로 천하에 알려졌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는 또한 화포의 기예가 알려졌습니다. 대체로 화포는 본시 남만(南蠻)에서 제조된 것인데, 임진년에 일본이 이것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공격하니 우리나라 사람은 화포 소리에 놀래어 닥치는 곳마다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노인들에게 듣건대, 당시 민가에서 기르는 개들이 화포 소리를 듣고 발광하여 도망쳤고 사람들도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군사들이 그 기예를 학습하여 병사들이 모두 조종할 수 있을 뿐더러 일본의 군인들보다 더 정통하여 천하의 어느 나라도 상대할 수 없는 형세를 지니고 있으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사방의 나라에 횡행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영상이 아뢰기를,

“이 말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군중(軍中)의 무기에 있어 어찌 조총(鳥銃)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어린아이도 항우(項羽)를 대적할 수 있는 것으로서 참으로 천하에 편리한 무기입니다.”

하였다. ‘선졸(選卒) 1만 대(隊), 무강거(武剛車) 1천 편(偏)’을 말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신을 돌아보며 진주(陳奏)하라고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대(隊)는 10인이 1대인데 이는 10만 명을 말한 것입니다. 무강거는 《한서(漢書)》에서 이른바, ‘위청(衛靑)이 무강거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고 한 것이고, 편(偏)은 수레 열다섯 대입니다. 무강거는 위에 방패를 설치하고 아래에 한 개의 바퀴가 있는데, 이른바, ‘편상거(偏箱車)’라는 것입니다. 진(晉)나라 때 마융(馬隆)이 이 수레를 사용하여 수기능(樹機能)을 토벌하는 데 있어 천리를 달려가 승리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대부분 산악지대이고 도로가 험난하기 때문에 이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북쪽 오랑캐와 교전(交戰)하는 데 있어 이 수레가 아니면 오랑캐 기마병(騎馬兵)의 충돌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이에 신이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장인(丈人)’이란 말과, ‘삼석(三錫)’이란 말은 《주역(周易)》에 나오는데, ‘장인’은 지략과 덕망을 지닌 사람으로서 충분히 삼군(三軍)의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말한 것이고, ‘세 번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은총으로 임명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주역》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데 있어 올바른 도리로 해야 하는데 장인이 군사를 거느리게 하는 것이 길하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사를 거느리는 데 있어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이 길한 것으로서 임금의 은총을 받게 된다.’고 하였고, 또 ‘임금이 세 번 명령을 내리는 것은 만방(萬邦)의 백성을 생각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연(燕)’은 연경(燕京)을 말한 것이고, ‘저들의 등을 치고 목을 조인다.’고 한 것은 우리나라가 저들의 왼쪽에 있는데 우리가 출병하여 요동(遼東)ㆍ계주(薊州)의 길을 끊을 경우, 저들의 등을 치고 목을 조르는 형세를 갖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통감》에 이른바, ‘천하의 목을 누르고 등을 친다.’는 것이다.”

하였다. ‘해양(海洋)의 길을 튼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이 말은 정금(鄭錦)이란 자와 합세하려는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신이 세력을 합친다고 말한 것은 정금과 함께 일할 것을 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군사가 요동(遼東)ㆍ심양(瀋陽)으로 곧바로 쳐들어가고 정금이 회령(淮寧)ㆍ절강(浙江) 지방에서 함께 일어날 것을 약속하여 산동(山東) 지방을 동요시킬 경우 그 형세가 저절로 연속될 것이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세력을 합쳐 저들의 복부(腹部)를 동요시킨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곳에 격문(檄文)을 보낸다.’고 한 말은 천하 사람들이 듣고서 함께 기병하게 하려는 것이고, 또한 적들의 마음이 떨리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의무려(醫無閭)를 점거하여 유(幽)ㆍ심(瀋)의 적들을 내쫓는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의무려는 요녕(遼寧)의 진산(鎭山)이고 유(幽)는 연경이고 심(瀋)은 심양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요동 지방으로 출병하여 산해관(山海關) 밖의 지역을 점령할 경우 연경ㆍ심양의 적들이 저절로 쫓겨날 형편에 있게 될 것이니, 이때에 천하를 위하여 잔적(殘賊)을 제거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晋文公)이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주(周)나라를 높인 것도 또한 이처럼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거사는 분수에서 벗어나는 뜻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왕실(王室)을 높이고 왕자(王者)의 군사가 되려는 것뿐이니, 이 때문에 신이, ‘왕자의 군사’란 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일이 실패하더라도 대의(大義)를 천하에 드러낼 수 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진주(陳奏)하라고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승패(勝敗)와 존망(存亡)은 실로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승리할 경우 그대로 대의를 천하에 펼 수 있는 것이고, 성공하지 못하여 실패한다 하더라도 또한 충의(忠義)의 마음을 드러내어 천하 후세에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옛말에, ‘사람은 세 가지에서 산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섬겨야 하는데, 부모가 낳아 주시고 스승이 가르쳐 주시고 임금이 길러 주시니, 이분들은 나를 살려주신 분들이므로 처지에 따라 목숨을 바쳐야 한다. 살려준 은혜에는 죽음으로 보답하고 은덕을 베푼 데에는 힘으로 보답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명(明)나라에 군신의 의리가 있고 부자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라고 하였습니다. 공자(孔子)의 말씀에, ‘관중(管仲)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 그의 인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오(夷吾)는 관중의 이름인데, 이것이 신이 이른바, ‘우리의 인한 것이 이오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발을 떼자 복부가 무너진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저들이 떠돌이 민족으로서 중국을 차지하여 늘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일로 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침범해 올 경우, 중국 사람이 필시 시기를 틈타 일어날 것이니, 이는 저들이 발을 떼는 즉시 복부가 먼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신은, ‘발을 떼자 복부가 먼저 무너져 저들 스스로 구제하기에 여가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액액 만리(額額萬里)’란 말은, 한유(韓愈)의 평회서비(平淮西碑)에, ‘크나큰 채주(蔡州)의 성(城)이여, 그 지역이 천리이다.’라고 하였는데, 액액(額額)은 작지 않다는 뜻이고, 원 세조(元世祖)의 말에, ‘조선(朝鮮)은 만리의 나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수 양제(隋煬帝)가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패하여 돌아갔고, 당 태종(唐太宗)은 천하를 평정하고서 직접 동정(東征)하는 데 있어 곧바로 요동(遼東)에 와서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요(遼)나라는 고려(高麗)를 쳤으나 강감찬(姜邯贊)에게 패하였고, 금(金)나라도 고려를 쳤지만 조충(趙沖)ㆍ김취려(金就礪)에게 패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자년(丙子年)에 청인(淸人)만이 유독 우리에게 승리하였으니, 이는 전대(前代)에 없었던 일로서 실은 우리의 실책이었습니다. 우리가 미리 계책을 수립했더라면 어찌 갑자기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오늘날의 일에 있어 의리로 보나 형세로 보나, 이기거나 지거나 간에’라고 한 것에 대해서 신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의리와 형세에 있어 실로 승리하지 못할 리가 없고 불행히 패하더라도 또한 우리의 충의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습니다. 《주역(周易)》의 도리는 의리가 이익을 만드는 것이고, 《춘추(春秋)》의 의리에는 제후(諸侯)가 서로 싸우다 패했더라도 성인(聖人)이 허여한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노(魯)나라가 제후들과 싸우다 패했으면 성인이 반드시 기휘(忌諱)하였는데, 장공(莊公)이 제(齊)나라와 싸우다가 패했는데도 쓴 것은 영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저들과 싸워 승리하면 참으로 좋은 것이고, 패하더라도 또한 영광스러운 것이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이기거나 지거나 간에 모두 그만둘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한 광무(漢光武)는 다른 사람이 행하지 못한 것을 행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신이 아뢰기를,

“이 말은 풍이(馮異)가 광무에게 말한 것입니다. 당시 분잡하게 일어난 장수들이 미녀와 재물을 취하는 데에만 뜻이 있고 원대한 계략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에 풍이가 광무에게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것으로 천하를 얻는 근본으로 삼으라고 권했는데, 이 말은 그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신은 주(周)나라의 유민(遺民)입니다.’라고 한 이하는 승지가 읽는 데 있어 신이 자신에 해당되는 말이므로 다시 아뢰지 않았고 끝까지 읽고 나자 해가 벌써 신시(申時)가 되었다. 신은 상의 옥체가 피로하실 듯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벌써 날이 저물었는데 아뢸 상소는 아직도 두 통이 남아 있어 모두 아뢸 수 없기에 신은 물러가 훗날을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영상과 승지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영상과 사업(司業)은 내일 다시 들어오라.”

하시기에, 물러나왔다.

 

을묘년(1675, 숙종1) 1월 11일

다음날 주강(晝講)에 영상과 함께 들어갔을 때 승지 정유악(鄭維岳), 옥당 이유(李濡)ㆍ이하진(李夏鎭), 사관 이후항(李后沆)ㆍ남익훈(南益薰), 가주서 이담명(李聃命)이 입시하고 부제학(副提學) 김석주(金錫冑)도 동지사(同知事)로 입시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고 옥당관(玉堂官)과 함께 나오려 할 때 신이 아뢰기를,

“부제학도 역시 군병을 맡은 사람이니, 동참하도록 하시는 것이 괜찮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읽기를 끝내자, 신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의 대체적인 뜻을 상께서 이미 이해하셨으니, 오늘 가부(可否)의 판단을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악(帷幄)의 신하와 대신(大臣)ㆍ중신(重臣)이 모두 이 자리에 있으니, 바라건대 상께서 자문하시어 조처하소서.”

하니, 상이 영상에게 어떠한가 하고 물었다. 이에 영상이 절하고 아뢰기를,

“이는 윤휴 평생의 포부입니다. 그의 상소 내용을 보건대, 실로 천하의 대의(大義)이고 사직(社稷)의 지극한 계책입니다. 따라서 하루라도 그 내용대로 하지 않으면 사람이 사람 노릇 할 수 없고 나라가 나라꼴이 될 수 없는 것이니, 신이 이러한 뜻의 분부를 선왕(先王)에게서 받았습니다.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일찍이 후원(後園)에 있는 한 채의 초가(草家)에 계셨는데 그 방은 두서너 칸이고, 앞에 연당이 있으며 좌우에 수목이 있었습니다. 신을 불러 입대(入對)케 하시고 한 집안의 부자처럼 대해 주시며 이러한 뜻을 신에게 분부하셨습니다.”

하고, 이어 오열(嗚咽)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기를,

“이 일은 성상께서 신에게 물으실 것이 없습니다. 신이 명을 받은 이후 수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털끝만치의 보답도 한 일이 없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그런데 윤휴의 말이 이러하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 일만을 생각하시어 날마다 일삼으시고 수족을 움직이실 때마다 이 일에만 종사하소서. 하지만 우리나라는 수십 년 동안 한 가지도 대비한 일이 없으니 신의 우려는 실제로 이 점에 있습니다. 신은 이전에 윤휴가 이러한 형세를 알지 못하고서 이런 말을 한 것이라 여겼는데, 지금 이 상소를 보고 그와 말을 해보건대, 그의 뜻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서 신의 뜻과 다르지 않았으니 신의 생각이 어찌 윤휴의 말에서 벗어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신이 또 나아가 아뢰기를,

“김석주도 이 자리에 있으니 그에게도 하문(下問)하소서.”

하니, 상이 김석주에게 이르기를,

“경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자, 김석주도 절하고 아뢰기를,

“신은 애초에 윤휴의 면목을 알지 못했습니다. 7월의 상소는 신이 이미 보았지만 이 상소는 신이 때마침 숙직에 나아가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처음 이 상소를 보았는데, 내용이 강개(慷慨)할 뿐만 아니라 그 말이 실로 의리에 지당하고 천하의 대의(大義)이니 어떻게 거기에 다른 뜻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신의 하찮은 뜻이 성상께 관철되고, 대신들의 소견도 이러하니, 말할 수 없이 다행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작은 종이를 내놓았는데 바로 9일에 궁전에서 아뢴 일이었다. 영상 및 부제학이 돌려가며 보고 아뢰기를,

“이 일은 상소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서 딴 논의를 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날이 벌써 저물었기에 하직하고 나가야겠습니다.”

하고, 이에 절하고서 달려나왔다. 정원(政院)에 이르자, 승지들이 말하기를,

“오늘의 논의는 어떠했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수천 마디의 상소 내용을 영상과 승지가 읽기도 하고 해석도 하였으며, 중간에 이야기가 진지하여 종일토록 한 것이 수만 마디뿐만이 아니었다. 해가 벌써 신시(申時)가 되었는데도 전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고 메아리처럼 응답하셨다.”

하니, 승지들이 모두 기쁜 기색으로 말하기를,

“참으로 훌륭하다. 아조(我朝)의 수백 년 동안에 일찍이 없었던 성대한 일이다.”

하였다.

 

을묘년(1675, 숙종1) 3월 14일

청대(請對)에 입시(入侍)하였다. - 영의정 허적(許積), 이조 참판(吏曹參判) 허목(許穆), 참의(參議) 윤휴(尹鑴), 부응교(副應敎) 이하진(李夏鎭), 교리(校理) 권유(權愈) -허목이 아뢰기를,

“신이 여염(閭閻)에 있으면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을 말함)이 차자(箚子)를 올린 일을 듣고 마음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아직 원본(原本)을 보지 못했으므로 지적하여 아뢸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내관에게 청풍부원군의 차본(箚本)을 가져다 앞에 내놓게 하였다. 허적이, ‘맹자(孟子) 어머니가 세 번 이사하여 가르침’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아뢰기를,

“이는 무슨 말입니까? ‘이간하는 말’이란 것도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분통하고 놀라울 뿐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그 차자에,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고, 또, ‘이간하는 말에 저지되었다.’고 하였으니, 이 일은 변론해 밝혀야 하지만, 또한 곤란한 점이 있는 것으로서 이때의 인심은 참으로 두려워할 만한 것입니다. 이 일은 오직 전하께서 자전(慈殿)께 정성과 공경을 다하시고, 또한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여 안팎의 말이 서로 통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데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부의 말이 외부로 나가고 외부의 말이 내부로 들어가고 있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대처하는 도리는 오직 궁금을 엄하게 하고 안팎을 격절시키며, 자전께 정성과 효도를 다하셔야 할 뿐입니다.”

하고, 허목은 아뢰기를,

“‘이간하는 말에 저지되었다.’는 말은 참으로 극히 놀라운 것이라, 의당 청풍부원군을 불러 그 말의 진의를 변론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의혹을 풀도록 해야 합니다.”

하고, 신은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알고 계실 것인데 전하께서 자전께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이러한 말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하들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시어 신들로 하여금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하소서. 전하께서 이 일에 있어 조금이라도 미진한 일이 있을 경우 신들이 일에 따라 바로잡게 해야 하고, 전하께서도 또한 개과 천선(改過遷善)의 도리를 가지셔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역시 명백히 하교하시어 신하들의 의심을 풀어주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이 일은 본시 형적(刑跡)이 없는 일인데, 나도 또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아시지 못하는 일인데 청풍부원군이 이처럼 분명히 말했을 뿐더러, 심지어, ‘외간에 전파되어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필시 청풍이 들은 것이 있어 이처럼 말하여 상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잘못을 고치시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청풍으로 하여금 직접 설명하게 하여 그러한 일이 있을 경우 전하께서는 더욱 효성을 다하시어 자전의 뜻을 위로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자전의 가르침이 이간하는 말에 저지되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부인(婦人)은 전제(專制)하는 의리가 없고 삼종(三從)의 도리가 있습니다. 조정의 정사에 있어 전하께서 한결같이 자전의 분부만을 따르실 수 없는 것이니, 이는 이간하는 말에 저지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온화한 모습으로 자전을 받드시는 일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없어야 하는 것으로서 의당 더욱 공경하고 효도하시어 힘쓰셔야 합니다. 그리고 영상(領相)이 이른바, ‘내부의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아야 하고 외부의 말은 안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한 말에 대해서 신의 생각에는 또한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내부의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부인의 호령이 규문(閨門) 밖에 행해질 수 없고, ‘외부의 말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남자가 음식 마련하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지, 남녀가 격절하여 서로 왕래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안팎이 격절하여 서로 왕래하지 않을 경우에는 필시 사정을 모르는 화단이 있게 될 것인데 어떻게 몸을 닦고 가정을 다스려 안팎을 서로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사대부 집안의 경우에는 남자가 내간의 일을 전혀 모른다면 어떻게 내간의 사정을 환히 알아 가정의 도리를 바르게 할 수 있으며, 부인이 외부의 사정을 전혀 모른다면 또한 어떻게 외부의 사정을 살펴 군자(君子)를 보좌할 수 있겠습니까. 일반 가정이나 국가의 도리가 다를 것이 없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청풍부원군을 정원(政院)에 명초(命招)하여 묻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청풍을 정원에 명초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그리고 듣건대, 청풍이 판부(判付)하신 것을 듣고 현재 금부(禁府)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금부에서 대죄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릴 수 없으니, 우선 훗날에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정원에 명초하는 것은 실로 옳지 않은 것으로서 신의 생각에는 청풍으로 하여금 연중(筵中)에 같이 들게 하여 함께 설명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훗날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늘 시간이 아직 이르니, 사신이 갔다 올 수도 있고 밤에 들어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조정에 본시 촛불을 밝히고 밤에 기다린 때가 있었으니 지금 명초하는 데 있어 날이 저물더라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하였다. 허목이 아뢰기를,

“삼천(三遷)ㆍ간언(間言) 등의 말에 있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의 정사에 대해서 자전께서 어찌 간여하신 적이 있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전하께서 자전의 분부에 따르시지 않았고 이간하는 말에 저지되었다고 한다면, 성상의 덕에 누되는 일이 없고 성상의 효성에 빛나는 것입니다.”

하였고, 신은 아뢰기를,

“조정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전하께서 자전의 분부에 대해 따르실 만한 것은 따르시고 받들 수 없는 것은 받들지 않으셔야 합니다. 자식된 도리에 있어 받들어야 하는 것은 받드는 것이 본시 효도이고 받들 수 없는 것은 받들지 않는 것도 또한 효도입니다. 청풍이 그런 말을 한 뜻의 소재를 알 수 없으나 오늘날 올린 차자도 또한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일 것이기에 신은 그를 불러다 물어서 변론하여 밝히고 싶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이어 복창군(福昌君) 형제를 석방시킬 수 없다는 내용에 대해서 아뢰었다. 신이 아뢰기를,

“상께서 이미 대신들과 의논하시어 그들을 잡아다 신문하도록 하셨는데, 지금 다시 대신들과 의논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석방하게 하시니, 이에 신하들이 불쾌하게 여기고 의심을 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있어서는 의당 조용히 밝혀내고 명백히 처결해야만 신하들의 의심을 풀 수 있는 것일 뿐더러, 또한 왕자(王者)가 형벌을 사용하고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데 있어 분명하고 신중하게 하는 도리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저들이 궁중에 출입하면서 근신하고 결백하게 처신했더라면 어찌 그러한 말이 있겠습니까. 이 일은 끝내 그대로 버려둘 수 없는 것이니, 궁인(宮人)과 같이 다시 잡아다 신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은 단지 저들 형제만 있을 뿐인데 어떻게 근거 없는 의심스러운 말을 가지고 다시 잡아다 신문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분명히 조사하지 않고 갑자기 석방시킬 경우 처치하는 도리가 또한 명백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있어 청풍부원군의 차자로 인하여 대신들과 의논하시어 잡아다 신문하라는 분부가 계셨으니, 오늘날 어떻게 쉽게 석방시킬 수 있겠습니까. 잡아다 신문한 뒤에 범죄가 있을 경우에는 국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의당하고, 죄가 분명하지 않을 경우에는 석방시키는 것도 또한 은애(恩愛)하는 도리입니다. 지금 대신들의 말을 따르시어 다시 잡아다 신문하도록 하시는 것이 실로 말을 잘 따르시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참으로 성상의 덕에 무방한 것입니다.”

하고, 허목은 아뢰기를,

“이 일에 있어 국법을 굽힐 수 있고, 대신의 말도 따르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국가에 불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선조(先祖)께서 저들 형제를 궁중에서 기르셨는데 저들이 참으로 김일제(金日磾)처럼 근신했더라면 어찌 이러한 말이 있었겠습니까. 이후로는 상께서 저들을 멀리하여 거절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왕자(王者)는 본시 친족을 친애하는 도리가 있는데, 저들이 죄가 없다면 지친간에 어떻게 멀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 말이 정론(正論)입니다. 하지만 말세(末世)에는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이러한 말이 어찌하여 성상의 몸에 이른단 말입니까. 말세의 풍속은 매우 두려운 것입니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왕자(王者)가 천하를 다스리는 구경(九經)의 도리에 또한 친족을 친애하는 의리가 있는데, 그 지위를 높혀주고 그 녹봉을 후하게 하고 호오(好惡)를 같이하는 것이 친족을 친애하는 의리를 돈독히 하는 것이니, 어찌 옛날과 지금이 다르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오늘날 복창군 형제를 도로 가두고 다시 유사로 하여금 처단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본시 가당치 않은 말로서 이미 석방시키도록 하였는데 어떻게 다시 가둘 수 있겠는가. 나인(內人) 등은 다시 가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물러나왔다.

 

을묘년(1675, 숙종1) 3월 17일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신이 나아가 아뢰기를,

“그저께 신이 청풍부원군을 불러 입시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은 그의 차자 내용에, ‘자전(慈殿)의 분부가 이간하는 말에 저지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전하께서는 모르신다고 하셨으므로 신은 그로 하여금 전석(前席)에 같이 들어와 그 일을 설명하도록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청풍은 패초(牌招)를 받고도 오지 아니하여 마침내 그 일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그날 자전께서 외전(外殿)에 직접 나오시어 두 왕손(王孫)을 문죄(問罪)하신 일이 있었다고 하니, 신은 듣고서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는 기색을 보였다. 신이 절하고 묻기를,

“간언(間言)이란 말에 대해서 그의 말에, ‘외부에 전파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였는데, 신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신은 이에 대해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애초에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청풍이 내가 이러한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말한 것뿐인데 따져 물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신이 또 아뢰기를,

“모후(母后)가 수렴(垂簾)하는 일은 한(漢)나라, 당(唐)나라 이후로 있었던 것으로서 신은 그 일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전대(前代)에 실제로 시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께의 일에 있어서는 신하들이 갑자기 당한 일이라 모두가 당황하고 법도를 잃어 조정의 체모를 이루지 못했고, 대신(大臣) 및 삼사(三司)의 관원들이 달려가 부복하여 대답할 줄만 알았고 잘못을 바로잡을 줄은 몰랐으니, 이것이 어떠한 일이겠습니까. 조정은 예법이 존재하는 곳이고 임금의 거둥은 당시의 첨앙(瞻仰)이 될 뿐만 아니라 후세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 점을 살피시지 못하셨는데, 신하들이 경계하는 도리로 삼았으니, 신은 이러한 거조에 대해서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후로 자전께서 미처 살피시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전하께서 유념하여 살피시어 자전으로 하여금 잘못된 거조가 없도록 하소서. 이것이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 정성과 공경을 다하는 도리이고 제왕(帝王)의 큰 효도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이 말은 참으로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을 경계삼아 이후로 이러한 거조가 없도록 하겠다.”

하고, 깊이 받아들이는 기색을 보였다. 이에 하직하고 물러났다.

 

을묘년(1675, 숙종1) 7월 22일

청대(請對)에 입시(入時)하였다. - 승지 이하진(李夏鎭), 가주서(假注書) 박진규(朴鎭圭), 기사관(記事官) 남익훈(南益薰) -윤휴(尹鑴)가 아뢰기를,

“신은 지난번 김수항(金壽恒)의 차자 내용에 대해서 더욱 송구하고 불안하게 여깁니다. 성상께서 벌써 환히 알고 계시지만 신의 마음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수항은 대신으로서 두 분 선왕(先王 효종ㆍ현종을 말함)의 후한 은총을 조금도 생각지 않고 단지 경들을 무함하기만을 생각하고 있다. ‘조관(照管)’이란 말을 한 것에 대해서, ‘동정(動靜)’이란 두 글자를 첨가시켰고, 심지어 정(楨)ㆍ연(㮒) 등의 일에 대해서도 문자(文字)를 따다가 남을 무함하려고만 하였으니, 나는 매우 통분하고 놀랍게 여긴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신의 평소 소행이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이 이러한 데에 이르렀으니, 신은 늘 두려워하며 자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조금도 혐의스럽게 여길 것이 없다.”

하였다. 이하진(李夏鎭)이 아뢰기를,

“당시 소신(小臣)도 입시(入侍)한 반열에 참여했었는데 윤휴가 조관이란 말을 한 것을 듣지 못했고, 전하께서 자전(慈殿)의 분부를 받들어 순종하고 간하여 말리시는 데 있어 미리 알고 계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대략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관(史官)이 기록한 일기(日記)를 보아도 조관이란 두 글자가 없었는데 조관이란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신이 당시에 실제로 조관이란 말을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을 하는 데 있어 사람들이 간혹 틀리게 말할 때도 있지만 이는 애초에 틀린 것이 아니고 고어(古語)를 인용한 것에 불과하니 잘못한 것이 없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김수항도 또한 조관이란 말의 뜻을 모르고서 이 말을 한 것이지 딴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어찌 몰랐겠는가. 마음속으로 해치려고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2) 1월 8일

인견(引見)하였다. 신 윤휴(尹鑴)가 나아가 아뢰기를,

“세월이 머물지 아니하여 시절이 바뀌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전하의 효성스러운 마음이 망극(罔極)하실 것인데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망극한 심회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형편없는 신은 어느 한 가지도 취택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은총이 융성하시고 예우가 특별하시어 근시(近侍)를 세 번이나 보내셨고 윤음(綸音)도 함께 내리셨기에, 신은 참으로 황공하고 부끄러워 눈물을 흘리며 몸 둘 곳을 몰랐습니다. 신은 지은 죄가 많고 공론이 중함으로 인하여 가까이 모시는 자리에 있을 수 없고 유지(諭旨)를 내리심에 있어 또한 태연히 물러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나온 것은 진심을 직접 아뢰어 직명(職名)을 해면받아 시골에 돌아가 일생을 보내면서 다시 조정에 치욕을 끼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말이 끝나자, 상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한 장의 글을 내보이게 하고 이르기를,

“나는 누구와 말을 할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 한 장의 글을 써서 경이 자세히 보도록 하였다.”

하시기에, 신이 일어나 절하고 읽었는데 그 글에,

“《시경(詩經)》에, ‘화살을 거두고 활을 간직한다.’고 하였는데, 심하다, 성인(聖人)이 무력을 숭상하지 않음이여. 대체로 무력은 완전히 없앨 수 없는 것이고, 또한 늘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옛 역사를 가지고 보더라도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치는 데 있어 와신 상담(臥薪嘗膽)하며 10년 동안 국력을 양성하고 10년 동안 교훈하여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런데 경은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인데다가 가르치지 아니한 약한 병졸을 가지고 멀리 휘몰아 전진하려고 하는데, 이 계책에 있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는 기강이 해이하여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혹시라도 떠도는 말이 저들에게 흘러 들어갈 경우 헛된 명분만 도모하다가 실제의 화란을 받을까 염려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경의 추상(秋霜)같은 절의(節義)와 백일(白日)같은 충정(忠情)에 대해서 누구인들 감탄하지 않을 것이겠는가. 그러나 세력이 하늘과 땅처럼 동등하지 않은데 어떻게 할 것이겠는가. 내가 우선 정지하여 기회를 기다리자고 한 것은 모두가 실상을 우선으로 하고 명분을 뒤로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다 읽고서 아뢰기를,

“전하의 문장이 찬란하시어 신이 어떠한 논의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신에게 충정(衷情)을 보이셨으니 신도 하찮은 소회를 다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살을 거두고 활을 간직한다.’고 한 것은 성인(聖人)의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무기를 정비하여 화란(禍亂)을 평정시킨다.’고 한 것은 성인이 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무기를 정비하는 것은 화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고, 화살과 활을 간직하는 것은 무력을 거두고 문덕(文德)을 닦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무기를 정비하여 화란을 평정한 공이 있어야만, 화살과 활을 간직하고서 무력을 거두고 문덕을 닦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인데, 만약에 화살과 활을 간직하는 일을 먼저 할 경우 이것은 옛사람이 이른바, ‘천하가 태평하더라도 전쟁에 대한 대비를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고 한 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치려고 와신 상담(臥薪嘗膽)하였는데, 그가 와신 상담하는 데 있어 기필코 그 일을 하려는 뜻을 가졌기 때문에 끝내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구천이 복수(復讐)의 뜻을 가질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며 그럭저럭 지내면서 복수의 뜻이 때때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을 보냈더라면 끝내 그도 멸망했을 것인데 어떻게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승리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10년 동안 양성하고 10년 동안 교훈한다.’고 한 것도 오늘날의 일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있었던 초기라면 말할 수 있지만, 병자년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인조대왕(仁祖大王) 이후 선왕(先王)들께서 이 일만을 염려하셨으니, 양성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고 교훈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지금은 시기를 틈타 분발하여 선왕들의 쌓인 울분을 풀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또 10년 동안 양성하고 10년 동안 교훈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천시(天時)를 잃고 인사(人事)가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가만히 앉아서 기회를 놓치는 데에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또한 오늘날의 일과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형세에 있어 기회에 따라 계책을 결정하여 지난날에 있었던 앙화(殃禍)를 모면하려고 하지 않고 다시 시대가 변하여 마침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를 경우 사직(社稷)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연대는 늘 중국과 서로 같았습니다.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고난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여 천하를 소유하였으니, 그 공덕이 백대의 제왕들보다 뛰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자손들이 떠돌아다니게 되었으니, 이것은 아마도 국운이 다하여 인사가 상응하는 것인 듯합니다. 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하신 지도 벌써 3백 년이 지났으니, 이는 천운이 바뀌고 인사가 변환하는 때인지라 신은 실로 두렵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이때이고 우리를 흥하게 하는 것도 이때입니다. 전하께서 이때에 사람들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행하시어 위로 천심(天心)에 부합되게 하신다면, 옛사람이 이른바,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한다.’고 한 것이 실로 이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계책을 하지 않고서 단지 하찮은 폐단을 막는 일로 세월을 보내면서 복수하려는 뜻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 뿐이고, 큰 뜻을 분발하고 훌륭한 계책을 세워 천하의 대의(大義)를 부지하고 고난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할 경우, 국가의 일이 날로 퇴폐하여 바다로 흘러가는 물과 서산에 지는 해처럼 끝내 멸망의 경지에 이르러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실로 국가 운수의 소재에 따라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은 형편없는 인물이지만 60년 동안 시골에서 지내며 출세하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큰 일을 하시려는 뜻을 지니신 것에 감격하고 천하의 일이 기회를 틈탈 수 있는 때를 당했으므로 염치를 무릅쓰고 벼슬길에 나와 노력할 것을 허락했던 것이지, 신의 마음이 실제로 벼슬살이로 의식(衣食)을 하려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에 명망과 은총을 차지하고 녹봉과 직위만을 탐내고 오늘날에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하여 마침내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경우, 이것은 또한 신의 마음에 기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마음을 나는 벌써 알고 있는데 나의 뜻도 경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세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고 우리에게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시세와 국력을 헤아려 훗날의 계획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지금 이 글을 내보여 경이 나의 마음을 알고서 함께 노력할 것을 원했을 뿐이다.”

하였다. 신이 사례를 올리고서 그 글을 주시기를 청하여 소매 속에 넣고 다시 절하고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이러하시니 참으로 신이 듣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신도 소매 속에 하찮은 소회를 대략 기록한 소차(小箚)를 넣어가지고 왔는데 성상께 올려 보시게 할 수는 없으나 신이 펴 읽어 소회를 다 아뢰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하고, 소매 속의 차본(箚本)을 꺼내어 읽었는데, 그 차본은 다음과 같았다.

“신은 타고난 성품이 거칠고 우직하여 말을 하거나 일을 행하는 데 있어 마음내키는 대로 행할 줄만 알고, 시의(時議)를 따르지 않으며 하찮은 혐의도 피하지 않았으므로 원망과 비난이 집중되고 종적이 불안합니다. 이러한데 어떻게 조정의 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의 은총이 높을수록 신의 마음은 더욱 불안하고 신의 종적이 더욱 낭패스러우니, 삼가 바라건대, 일찍 해면시키시어 국가와 개인이 다행하게 하소서. 성명(聖明)께서 큰 뜻을 세우시어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평탄한 때이거나 험난한 때를 가리지 않고서 목숨을 바쳐 종사할 것이지만, 헛된 예우(禮遇)로 잡아두시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게 하신다면 차라리 신의 사퇴를 윤허하시어 필부(匹夫)의 뜻을 온전히 할 수 있게 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명의 조정에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는 신하 한 사람이 있게 하는 것이 또한 한 가지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의논이 떠들썩하여 국가의 계획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 인심이 불선한 데에서 그러한 것이지만, 또한 성상의 뜻이 정해지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옛날의 임금들이 위대한 공적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의 뜻을 굳게 정했습니다. 예컨대, 구천(句踐)이 쓸개를 맛보고 손권(孫權)이 책상을 쪼갠 것처럼 하여 소인(小人)의 참소하는 말이 그 사이에 낄 수 없도록 해야만 일을 제대로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임금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서 잠깐 시행했다가 곧바로 그만두어 일을 담당한 신하들이 믿을 수 없고 소인들의 사설(邪說)이 틈을 노리게 하는데, 이러하고서도 천하의 큰 공을 이루고 난망(亂亡)에서 벗어난 자는 없었습니다.

병거(兵車)의 일에 있어 신은 진중(陣中)에서 사용하는 한 가지 기계를 가지고 자신의 진퇴(進退)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오랑캐를 막는 기구에 있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하건대, 맹수(猛獸)는 발톱과 이빨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아니면 위력을 쓸 수 없고, 밭가는 사람은 쟁기를 사용하고 김매는 사람은 우장과 삿갓을 쓰는데 이것이 아니면 풀밭을 개간하고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리하여 신은 미리 만들어 조치하여 적이 쳐들어왔을 때 대비하고 우리가 적을 칠 때에 사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을 저지하는 자들은 본시 적을 토벌하여 치욕을 씻으려는 마음이 없고 의리를 부지하려는 계책도 없으면서 이것을 빙자하여 신을 배척하고 천하의 대의(大義)를 저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 현종(唐玄宗)은 요원지(姚元之)에게 말하기를, ‘경을 재상으로 삼았으니 어떻게 경의 말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전하께서 신을 조정에 있게 하려고 하신다면 또한 신의 말을 시행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말에 동요되시어 신이 하려고 하는 것을 시행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전하께서도 신의 말을 채택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시고, 신 또한 어떠한 것을 가지고도 임금을 섬길 수 없는 것인데, 신이 또 어떻게 이 일을 가지고 거취(去就)를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조정 신하들의 논의를 살펴보건대, 인심과 세도(世道)가 벌써 어쩔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고 성상의 마음도 많은 사람의 말에 동요되시지 않을 수 없으니, 신은 이 때문에 감히 다시 조정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할 경우 또한 신이 건의한 일을 모두 혁파하여 여러 사람의 말에 보답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훗날에 간인(奸人)들이 신을 공척하는 구실로 삼아 끝내 국가가 그 폐단을 받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괜찮겠습니다.

그리고 신도 국력을 헤아리거나 시세를 살펴보지 않고서 칼을 만지고 노려보며 장수를 제수하고 군사를 진출시키는 하루아침의 계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큰 뜻을 세우고 조정을 바르게 하며, 백성을 무마하고 군졸을 훈련시키며 기계를 정비하여 무비(武備)를 닦고 적을 물리치는 실상을 다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신이 급급하게 여기는 것으로서 지난번 상소 내용에 모두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을 공척하는 자들이 신이 시행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일체 저지하여 우리가 안으로 무비를 닦는 기구에 있어 한 가지 일도 믿을 만한 것이 없게 할 뿐더러, 단지, ‘저들이 군사를 출발시킬 기일이 이미 정해졌다.’느니, ‘함부로 출동하는 것은 망함을 재촉하는 것이다.’ 등의 말을 가지고 신을 공척하는 소재로 삼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그들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떠들어대고 비난하는 소리가 세상에 가득한데 신이 또한 어떻게 태연히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스스로 물러날 계책을 하지 않고 큰소리를 쳐서 자신이 훌륭한 명성을 차지하고 나라가 실제의 화란을 받는 데에 이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이 또한 신이 사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유(傳諭)하신 내용에, ‘내가 경을 예우(禮遇)하는 데 있어 은애하는 마음이 실로 특별한데도 경은 나의 성의를 헤아려 생각하지 못한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성명(聖明)께서 하찮은 신을 예우해 주시는 것이 매우 특별하신데, 신이 목석(木石)이 아닌 이상 어떻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성상의 보살펴주심이 돈독하지 않기 때문에 물러가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세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유하신 내용에, ‘단지 헛된 명성만 있을 뿐이고 끝내 실제로 거행된 것이 없다. 이리하여 한 가지 일을 할 때마다 여러 사람의 말에 저지되어 일이 그대로 되지 못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러하기 때문에 신이 1년 동안 조정에 있었으나 끝내 한 가지 일도 시행된 것이 없었으니, 이것이 또한 신이 개탄하는 것입니다. 이러할 뿐이라면 아무리 몸이 조정에 있더라도 국가에 어떠한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전유하신 내용에, ‘한 사람이 주창한 것에 대해서 여러 사람의 말이 번갈아 일어나고 있는데 그 말이 퍼져 저들의 귀에 흘러 들어갈 경우 실로 좋은 대책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필시 신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들이 거짓말을 지어내고 기필코 국가의 일을 그르쳐 그 화단을 신에게 돌리려고 한 것이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알고서 따져 묻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로서 어찌 대답할 말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저들의 오늘날 형세로는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공갈을 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국가의 그만둘 수 없는 일에 있어서 저들의 형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쓰지 못한다면, 신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고 어떠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유하신 내용에, ‘민심이 동요되기 쉽고 나라의 근본이 이러한 상황인데 남의 나라를 넘보는 것은 예전에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성상의 유지가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신도 백성들의 일을 걱정하지 않고 함부로 군병을 출동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민심이 진정되고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지는 것은 조정이 조처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이 말씀은 조정 신하들의 고식적이고 지체하는 자들의 말에 동요되신 것인 듯싶습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큰 뜻을 세우시어 기어이 큰 일을 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몸이 지치도록 노력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고 참소와 비방이 날마다 이른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을 것이지만, 단지 그러한 말씀만 하시고 기필코 하려는 마음이 없으시며 안일만 취하시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시려고 하신다면, 전하께서는 실제로 신을 쓰실 것이 없고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만으로도 충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작명(爵名)을 내리시고 헛된 예우로 잡아두시어 신으로 하여금 평소의 지조를 상실하고 명교(名敎)에 죄를 짓게 하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날 연중(筵中)에 있었던 진교(陳橋)의 설은 더욱더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이 시기에 이러한 말은 단지 오늘날의 대계(大計)를 저지하고 전하의 군신(君臣)을 이간시킬 뿐만 아니라, 참소하는 말이 한번 행해지면 훗날 사변(事變)이 발생했을 때 누가 나라를 위해 일을 담당하여 스스로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려고 하겠습니까. ‘한 마디 말이 나라를 잃게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성명(聖明)께서는 특별히 살피시고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시어 사설(邪說)을 하는 자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선대왕(先大王)의 행장(行狀)을 짓는 일은 매우 중대한 일로서 불초(不肖)한 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자신의 재능을 헤아리지 않고 명을 받았는데 전에 지은 행장이 소략하여 편년(編年)으로 하지 않았고 16년 동안의 사적(事蹟)이 매우 많으므로 문자(文字)가 호번(浩繁)하여 일일이 들추어 상고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신의 정력이 쇠하였고 직무가 바쁨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지연되었는데 더욱 황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신의 이러한 실정을 이해하시고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도로 맡기시어 신의 부담을 풀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초야 출신으로 식견이 고루한 인물인데 외람되이 전형(銓衡)의 직임을 맡았으나 인물을 알아보는 감식과 인재를 열람하는 일도 없이 단지 공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써만 보답하는 소지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듣건대, 어제 연중(筵中)에서 영상이 신이 친척을 분간하지 않았다고 말하였고, 신이 주의(注擬)한 사람에 대해서 대간(臺諫)의 탄핵이 잇달아 전조(銓曹)가 사정(私情)을 따르고 편리한 자를 취택한 것처럼 했다고 하는데, 신은 매우 두려우며 많은 변론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상이, ‘친척을 분간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필시 박세면(朴世冕) 등의 일을 지적한 것인데, 세면은 신의 동서(同婿)입니다. 주의하던 날 수령의 자리가 빈 곳이 많았는데, 비단 인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늙었으나 정력이 강성하여 수령의 직임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이 혐의를 피하는 것을 잊고서 의흥군(義興郡)에 의망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신이 자기가 아는 사람을 천거하는 뜻이었고, 또한 국전(國典)에도 당상관(堂上官)은 서로 피혐하는 조항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정을 따르는 마음을 갖지 않았는데도 물의(物議)가 이러하니, 이 또한 신의 죄입니다.”

 

병진년(1676, 숙종2) 1월 11일

인견(引見)에 입시(入侍)하였다. - 이조 판서(吏曹判書) 윤휴(尹鑴), 우승지(右承旨) 이우정(李宇鼎), 주서(注書) 신학(申㶅), 기주관(記注官)이박(李煿), 기사관(記事官)이후항(李后沆) - 상이 이르기를,

“간곡한 유지(諭旨)를 여러 번 내렸는데 경이 이제서야 들어왔으니 기쁨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시기에, 신 윤휴가 아뢰기를,

“상께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은총을 특별히 내리셨기에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들어온 것은 다시 진심을 아뢰고서 물러가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있은 지 1년도 채 못 되었는데 갑자기 도성(都城)을 나갔기에 마음에 매우 섭섭하였다. 그런데 지금 또 나가려고 하니 더욱 섭섭하다. 바라건대, 경은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경연에 출입하며 임금의 덕을 보도(輔導)하도록 하고 버리고 떠나가지 말라.”

하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전하의 은우(恩遇)에 감격하여 스스로 노력할 것을 허락하였는데 물러나기를 청하는 것이 어찌 신의 마음이겠습니까. 신이 시행하려던 일이 세상에 행해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은총을 탐내고 헛되이 작록(爵祿)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세가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행장을 짓는 일은 중대한 것인데 지체되어 참으로 미안스러우니 경은 떠나가서는 안 된다.”

하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시세는 할 수 없는 때가 아니라 단지 하지 않을 뿐입니다.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칠 경우 무슨 일인들 할 수 없겠습니까마는 지금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신이 대궐에 미련을 지니고 있지만 헛되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행장을 짓는 일은 중대한 것이니 다시 나가지 말라.”

하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행장을 봉환(封還)하는 것이 매우 미안한 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도성을 떠나는 데 있어 행장을 찬집(纂集)하는 것은 또한 불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정에 있는 신하들 중에도 할 만한 사람이 많을 것인데 하필 신뿐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기(軍器) 수련 등의 일도 끝내 버려둘 수 없는 것이다.”

하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우선의 안일만을 취하여 시행하려다가 하지 않았는데 신을 머물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물러나기를 청하는 것에 따라 물리치시는 것만 못합니다. 바라건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시어 조처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비망기(備忘記)에도 이 내용을 언급하였는데 병자(丙子)ㆍ정축년(丁丑年)의 치욕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현재 흉년이 잇달아 백성들이 고난을 겪고 있으니 군무(軍務) 등의 일은 차차 거행하려고 한다. 그러나 병거(兵車)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는 칙사(勅使)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데, 수레는 바다에 사용할 수 없는 기구이니 저들이 듣게 되어 힐문하는 일이 있으면 대답하기에 곤란할 듯하다.”

하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항상 대의(大義)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서 그 일만을 생각해야 하는데 신이 어찌 국력과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서 시행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들의 뜻은 이러한 것마저 버리려 하고 전하께서도 여러 사람의 말에 동요되시지 않을 수 없는데, 신이 전후 반복해서 아뢴 것이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전후의 소장(疏章)을 상께서 살펴보시면 신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소장을 보지 않더라도 경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원수를 보복하고 치욕을 씻는 일에 있어 시기를 기다리고 형세를 보아 차차 도모하려는 것이지 아주 잊은 것은 아니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그러하시다면 신은 의당 목숨을 바쳐 종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정의 신하들도 어찌 그러한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이처럼 저지하는 것은 필시 일을 가지고 신을 공척(攻斥)하려는 뜻인 것입니다. 병거(兵車)는 육지에 사용하는 것이고 바다에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서 대답하기에 곤란한 것이 참으로 상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적선(賊船)이 바람을 타고 갑자기 쳐들어올 경우 아무리 주사(舟師 수군(水軍)을 말함)가 있더라도 미처 방어할 겨를이 없을 것인데 육군(陸軍)이 어떻게 대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말로 대답할 수 있는데 어찌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서(海西)는 저들이 왕래하는 길이므로 우선 그만두도록 하였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양남(兩南)은 그렇지 않은데 또한 그만두게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시 소문이 퍼져 저들의 귀에 흘러 들어갈까 염려해서이다.”

하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그것은 지나친 염려입니다. 지난번 연중(筵中)에서 그 일을 그만두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배척하는 데 있어 심지어 그 논의를 한 자의 소장(疏章)까지도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라고 하셨으니, 이는 기필코 그 일을 막으려는 계책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한 계책에 있어 병거 이외의 일은 버린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한 가지 계책이 시행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경솔하게 거취(去就)를 결정할 수 있겠는가?”

하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신의 거취가 어찌 하나의 기계 때문이겠습니까. 하지만 국가에 사변이 발생하여 오랑캐의 기마병(騎馬兵)이 충돌해 오면 우리의 약한 병력으로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병거는 없어서는 안 되는 무기로서 이것이 아니면 적군(敵軍)을 제압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진정 사직(社稷)의 큰 계책인 것입니다. 병거를 만드는 일이 시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만두게 하였으니, 이에 신은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2월 말이나 3월 초에 저들의 사신이 올 것인데, 지금 우선 그만두었다가 적정(敵情)을 자세히 알고서 만들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경은 다시 이 일을 가지고 물러가지 말라.”

하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상께서는 조정을 바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 무비(武備)를 닦는 것으로써 자수(自修)하는 근본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대의(大義)를 펴려는 마음을 지니시어 그 일만을 생각하신다면 신이 목숨을 바쳐 종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필코 하려는 뜻이 없으시면 신이 물러가려고 할 때에 물러가도록 하소서. 그리고 만나보고 싶으실 때에는 부르시고 물으실 것이 있을 때에는 물으신다면 군신이 교제하는 도리에 있어 훌륭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의(大義)를 펴는 일에 있어서도 실로 차차 거행하려는 것으로서 내가 잊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성상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신이 어떻게 물러날 것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다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정을 바로잡고 무비를 닦고 백성을 무마하는 것으로써 자수의 근본을 삼으소서. 이러하지 않고서 큰 일을 도모하려고 할 경우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선의 안일만을 취하려고 하시면서 신을 머물게 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물러갈 것입니다. 옛말에, ‘헛된 소원은 지극한 소원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이 점에 유념하시어 허위로 신을 만류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심이 그러하다. 원수를 보복하고 치욕을 씻으려는 마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차차 거행하는 데 있어 형세를 보아 하려는 것인데 어찌 그만둘 뿐이겠는가.”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이것은 타고난 성품인 것으로서 누구인들 그러한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단지 성실하고 성실하지 못한 것뿐이니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길흉과 성패가 모두 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이 마음이 성실한가 성실하지 못한가를 생각해 보소서. 단지 그러한 마음이 있는 듯 없는 듯할 뿐이라면 끝내 성공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은 이미 다 말하였다. 다만 경이 그대로 머물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신데 신이 어떻게 감히 돌아가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후로는 군신 상하가 각자 권면하고 노력하여 임금이 그러하지 못할 경우 신하가 바로잡아 간하고, 신하가 그러하지 못할 경우 임금이 엄하게 문책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온갖 법도가 해이해져 그야말로 쇠란(衰亂)의 시대입니다. 쇠란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그 공력을 백배나 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 무사하기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옛사람은 대부분 한 마디 말에 계책을 결정하였는데, 제갈량(諸葛亮)은 소열(昭烈)에게 초려(草廬)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사이에 뜻이 부합하였고, 한신(韓信)은 한 고조(漢高祖)에게 단(壇)에 올라 명을 받을 때에 계책이 결정되었습니다. 신의 애초의 뜻은 전야(田野)에 물러가 하찮은 뜻을 지키려 했었는데, 전하의 말씀이 이러하시니, 진정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이러한 마음을 잊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신이 조정에 있은 지 1년이 지났는데 한 가지 일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은총에 감격하여 머문다면 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필시 은총을 탐내어 떠나가지 않는 것이라 하며 비난할 것이지만, 신의 간절한 뜻은 성상께서 훌륭한 일을 하시려는 뜻을 도우려는 것입니다. 신이 성상의 마음을 알고 성상께서 신의 마음을 알아주시어 상하가 서로 신임하여 심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신의 간절한 뜻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우정(李宇鼎)에게 이르기를,

“이판(吏判)이 이미 들어왔으니, 행장(行狀)을 도로 보내어 그로 하여금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2) 11월 22일

부호군(副護軍)을 제수한 명에 사은(謝恩)하고 인견(引見)할 때 영상(領相) 허적(許積), 좌상(左相) 권대운(權大運)과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좨주(祭酒)는 앞으로 가까이 나오라.”

하시기에, 신이 나아가 절하고 아뢰기를,

“신이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형편없이 하였고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 근신하지 못했을 뿐더러, 거짓된 말을 하였고 기휘(忌諱)할 줄을 알지 못하여 나라의 은총을 저버렸으니, 죄가 만 번 죽임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게다가 지난번에 신의 일로 인하여 성교(聖敎)를 내리시게 하였으니, 스스로 돌아보건대, 두렵고 부끄러워 용납할 데가 없기에 다시 대궐문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상례(喪禮)를 마치시고 부묘(祔廟)의 의식도 끝나자 옥체가 편찮으셨는데 곧바로 회복되셨기에 슬프고 기쁜 마음이 교착되어 충정(衷情)이 절로 감격하였습니다. 오늘 단지 전하의 모습을 뵈옵고 치사(致仕)를 청하여 물러가서 구학(丘壑)에서 일생을 보내려는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이것이 신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데 연연한 심회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누차 사신을 보내어 간절히 효유(曉諭)하였으나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한결같이 무정하였기에 나의 마음이 서운한 것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제 사신이 돌아왔을 때 오늘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오늘 인견하는 데 있어 이처럼 진심을 다 말하는 것이니, 경은 다시 도성을 나가지 말고 성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경연(經筵)에 출입하며 나의 부족한 것을 보도(輔導)하라.”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올린 상소의 내용은 단지 서로 권면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고의로 대신을 공척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대신들은 경계하는 마음을 가질 줄 모르고 공척한 것으로 여겼으며, 성상께서도 단지 대신들이 인혐(引嫌)한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시고 신의 상소 내용이 이러한 데에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시어 신을 거절하시는 기색을 상소의 비답에 드러내셨으니, 참으로 군신간의 제우(際遇)가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세도(世道)가 행해지기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자, 허적ㆍ권대운이 아뢰기를,

“이처럼 서로 경계하는 내용이었다면 신들이 어떻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뜻을 가졌겠습니까. 단지 당초에 상소 내용이 매우 준절하여 모두가 신하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기에 신들이 황공하고 불안하여 편안히 있을 수 없었으므로 해면시키시고 죄를 내려주시기를 청하는 소장(疏章)을 올려 몸 둘 곳이 없는 뜻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윤휴의 말을 듣건대, 지난번의 상소가 단지 서로 경계하는 내용이었고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니, 신들의 마음도 확 풀렸습니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신은 말이 어눌하여 소회를 다 아뢸 수 없기에 옛사람이 궁전에서 일을 아뢴 뜻을 본받아 소회를 써서 가지고 왔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신으로 하여금 펴 읽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시기에 나아가 읽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삼가 아뢰건대, 도(道)의 흥폐와 사람의 행지(行止)에 대해서 옛 성현(聖賢)들은 모두 천명(天命)으로 돌렸는데, 그것은 아마도 인력(人力)이 간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 듯합니다. 신은 본시 포의(布衣)로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옛사람이 행한 일을 희망하였으나 나이가 늙고 세월이 흘러 근력이 쇠퇴하였으므로 아예 출세하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명(聖明)의 시대를 만나 풍운(風雲)의 뜻에 감동하여 시골에서 농사짓던 늙은이로서 좌우 신하들의 받아들임을 기다리지 않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예우와 특별한 은총을 받아 지위가 이러한 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군신 상하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져 천하가 어려운 때에 함께 구제하려고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천재 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 할 수 있고 천명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진언(陳言)하고 시설한 것에 비록 말할 만한 것이 없으나 어찌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하며, 어렵고 위태로운 것을 부지하여 우리 임금이 우(禹) 임금ㆍ탕(湯) 임금보다 더 훌륭한 임금이 되시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신은 자질이 소략하고 오활하여 시기에 따라 적응하는 식견이 없으므로 시의(時議)에 어긋나고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일이 크게 잘못되어 그러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신이 하루도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지난번에 올린 상소에서도 또한 신의 재능이 부족한 정상과 시사(時事)의 어려운 상황과 임금의 덕위(德威)를 논열하여, 조금이나마 신이 간절히 임금을 연모하는 충정을 바치고 나라를 그르친 큰 죄를 모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정의 동료들이 신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신을 질타(叱咤)하고 욕한 것은 조정에 치욕이 되고 당세의 선비들을 부끄럽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신의 성의가 전하를 감격시키지 못했기에 성명께서도 생각지도 않은 일로 신을 의심하시어 잠시 노여워하셨는데, 이것은 아마도 신이 우직한 것을 경계하려고 하신 것으로서 지나친 말씀의 비답과 노하지 않고 타이르신 전교에 대해서 성상의 마음의 소재를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당시 조정이 경동하고 성상께서 걱정하시게 한 것은 신으로 하여금 붉은 죄수복을 입고 종일 방아를 찧게 하더라도 이 죄를 용서받을 수 없고, 신으로 하여금 머리를 풀고 산으로 들어가게 하더라도 이 수치를 없앨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인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에 신은 천명을 두려워하고 분수를 편안하게 여겨 시골에 물러가 있으면서 혼자 자다 깨어나 탄식하며 영원히 딴 생각을 하지 않겠다 다짐하기도 하고, 물고기, 새들의 무리에 어울려 깊은 산 바위굴 속에서 일생을 마치기도 하며,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여 애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개과 천선(改過遷善)하기에 분발하여 노년에 잘함으로써 옛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고 끝내 우리 임금에게 보답이 있기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서울에서 생장하여 지방에 전원(田園)이 없고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어 몸이 있을 곳이 없으므로 서울의 근교에 머물러 그럭저럭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의 조부의 사판(祠版)이 도성 안에 있으므로 제사를 지낼 때 왕래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또한 신이 염치를 무릅쓰고 머물러 있으면서 지조와 분수를 가질 수 없는 까닭인데, 어떻게 끝내 군부(君父)의 마음에서 스스로 소원해지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성명께서 신의 이러한 정세를 이해하시지 못하고 전후 잇따라 여러 번 사명(使命)을 내리셨고 간곡하신 전교가 아버지와 스승이 타이르고 벗들이 경계하여 깨우쳐주는 것보다 더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의 도량이 하늘 같으시어 어떠한 물건도 포용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추악한 신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어 우매한 신이 훗날에 선인(善人)이 되도록 책망하듯이 하셨습니다. 신이 아무리 형편없는 인물이지만 또한 임금을 사랑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군신의 의리에 대해서 대략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은명에 달려나아가 스스로 격려하고 결백하게 하여 성명의 은덕에 저버림이 없도록 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의 정세가 이상의 아뢴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신의 본성이 혼매하여 끝내 변화할 수 없는데 훗날 직임을 받아 보답하려고 하는 데 있어 성질대로 일을 처리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발언하여 지난날처럼 광패(狂悖)한 짓을 할 경우 어찌 다시 전하께 걱정을 끼치고 청명한 조정에 수치가 되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신이 부끄럽고 두려우며 우려하여 다시 사진(仕進)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오늘 나온 것은 단지 전하의 모습을 뵈옵고 신자(臣子)의 하찮은 정성을 바치려는 것이었고, 또한 끝내 못난 신의 몸을 물러가게 해 주시기를 청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잠시 살피시고 은덕을 내리시어 시종의 은총을 생각해 주시면 신은 이보다 더 큰 소원이 없겠습니다. 신은 늙고 병든데다 전하의 위엄에 떨리어 할 말을 다 할 수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재량하시어 살펴주소서.”

읽기를 끝마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을 전후의 비답과 오늘 탑전(榻前)의 유시에서 다 말했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미 말로써 누누이 물러가기를 청하였고, 또한 문자로서 서계(書啓)함에 있어서도, ‘구학(丘壑)에서 일생을 보내며 다시 애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였으니, 나는 매우 개탄스럽다.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다시 도성을 나가지 말고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경연에 출입하여 나의 부족함을 보필해 준다면 그 다행스러움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윤휴가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으로서 신들이 그에게 소원하게 한 것이 있기 때문인 듯한데 어찌 다시 개탄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건대, 국가의 일은 혼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채택해야만 일을 그르치는 걱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은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제멋대로 하지 못하고 비국(備局)이 회계(回啓)할 때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채택하여 시행하였습니다. 이전에 윤휴가 진언(陳言)한 것에 대해서 시행한 것도 있고 시행하지 않은 것도 있는데 그것은 시의(時宜)를 헤아려 시행하는 데 있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윤휴를 공격한 것이 아니며 전혀 채택하여 시행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아닙니다. 논쟁하는 것은 공적인 일인데 어떻게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그러했겠습니까.”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어떻게 자기의 의견이 옳다고 하여 남이 그대로 따르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생각건대, 사람은 과오가 없을 수 없는 것으로서 아무리 임금의 앞이라도 할 말을 다하여 기휘하지 않아야 하는데 더구나 동료 사이겠습니까. 따라서 임금도 또한 신하들의 옳고 그른 것을 살펴보아야 하고 대신의 말이라 하여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신의 지위가 아무리 높더라도 그의 말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며, 그의 일이 모두 온당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대신을 공경해야 한다고 하여 옳고 그른 것을 살피지 않고 그대로 따르기만 할 경우, 그것은 매우 불가한 것으로서 국가의 일은 끝내 어떠한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당초 상소의 내용은 또한 동료간에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는 뜻이었는데 성의가 미덥지 못하고 성상의 마음이 불안하시게 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죽임을 받더라도 여죄(餘罪)가 있습니다.”

하자, 권대운이 아뢰기를,

“당초 상소 내용이 매우 황송한 것이었는데 지금 또, ‘성의가 미덥지 못했다.’고 하니, 더욱 미안스럽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윤휴가 이미, ‘당초의 상소 내용이 온당치 못했다.’고 하였는데 지금 다시 제기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신의 상소의 말이 애초에도 지나친 것이 없는데 지금에 와서 어떻게 온당치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성의가 미덥지 못하여 전하를 감격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동료들에게 의심을 받게 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신들의 죄가 만 번 죽임을 받아도 남은 죄가 있습니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신의 상소 내용이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대신이 불안하게 여기는 것으로 인하여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이니 추급해 말할 것이 없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윤휴의 상소에, ‘천변(天變)이 모두가 대신의 잘못에 연유한 것이다.’ 하였는데, 신들이 대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천변이 이러한 데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면 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신들이 간사하고 불충하여 천변이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신들이 죽어도 여죄가 있는데 어떻게 직위에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권대운은 아뢰기를,

“신이 형편없는 것이야 어찌 윤휴의 말로 인하여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영상은 사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 정밀하고 익숙하여 그가 고려하는 데에는 옳고 그른 것이 있는데 어찌 윤휴의 말을 공척하려고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윤휴는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약간 있어 자기의 뜻을 기필코 행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것이 그의 병통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이 어찌 병통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한 가지 병통도 없다면 그는 바로 성인(聖人)일 것이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병통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윤휴가, ‘전에 계획한 것이 한 가지도 시행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모든 일에 있어 당연한 것인가를 살펴야 하고 또한 고금의 공통적인 도리를 살펴보아 시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윤휴의 말이라 하여 행할 수 없는 것을 시행하고, 또한 윤휴의 말이라 하여 행할 만한 것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행할 만한 것은 시행하고 시행할 수 없는 것은 시행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서 그 중에 시행할 만한 것은 이미 채택하여 시행하였는데 어찌 한두 가지도 시행한 것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윤휴는, ‘전혀 시행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말의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영상이, ‘이미 신의 계획을 채택하여 시행했다.’고 하였는데, 신의 본의와는 크게 다릅니다. 한두 가지 시행한 것이 있다고 하지만 본의를 크게 상실한 것으로서 도리어 폐단을 일으키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오가통(五家統)ㆍ지패법(紙牌法)은 본시 신이 건의한 것에 따른 것인데 중간에 병판(兵判)의 말에 따라 곧바로 파하였습니다. 그 후 신이 다시 들어가 진달하여 영상과 더불어 탑전(榻前)에서 함께 의논하여 시행하였으나, 도리어 남은 백성들을 모두 뽑아 군정(軍丁)을 뽑는 것이 되었고 신역(身役)을 이중으로 하는 고통이 있게까지 하였으니 신이 아뢴 바 인구수를 알아 정돈시키려는 뜻과는 아예 틀립니다. 그리고 만과(萬科)를 설행한 것도 또한 신이 건의한 것에 따른 것인데, 끝내 인재를 수용하는 일이 없고, 단지 부방(赴防)을 면제하는 미곡(米穀)을 거두는 데 있어 감당할 수 없는 자가 있게 하여 심지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는 자가 있고 패(牌)를 받고 우는 자도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떠한 기상입니까. 신이 군졸을 훈련시키고 인재를 수습하려는 뜻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데 신의 계획을 시행했다고 하는 것은 어찌 틀린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국가의 일은 차분히 강론해야 하고 급하게 서둘지 않아야만 실패하는 일이 적습니다. 이 일은 애당초 여러 사람에게 널리 의논하지 않고 윤휴가 독자적으로 담당하여 시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이 있게 된 것인데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신의 본의는 단지 인재를 수습하고 군졸을 훈련시켜 인심을 흥기시키는 일을 하고 중국이 어려운 때에 위력을 행사하여 위로 영고(寧考)께서 적을 치고 치욕을 씻으려고 하신 뜻에 보답하려는 것이고, 미곡을 바치게 하는 것은 실로 본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부대를 편성하고 군장(軍裝)과 말을 준비하여 조련(操鍊)에 나아가게 하는 것은 더욱더 신의 본의가 아닙니다. 예로부터 현재까지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어찌 백성들의 재물을 취하려고 하여 과거를 설치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부대를 편성하고 군장을 준비하게 했다는 것은 또한 출신(出身)한 자들이 난잡스럽게 행동하여 소속된 데가 없고 연습할 때 군장이 없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어찌 백성들을 해롭게 하려고 하여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애당초 잘못된 계획인데 지금 서로 논쟁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상의 체후가 미령(未寧)하시니, 우선 물러갔다가 훗날 입시(入侍)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성명께서는 윤휴에게 간곡히 타이르시어 떠나려는 계책을 하지 말고 도성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경연에 출입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잠시 머물라 하시고 이어 술을 내리도록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술을 내리신 것은 아마도 술잔을 들며 유감을 풀게 하시려는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신이 어찌 지난날 대신이 신을 좌절시키고 무시한 것에 대해서 유감을 품었겠습니까. 단지 신의 종적이 불안하여 다시 성안에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니, 허적ㆍ권대운이 아뢰기를,

“윤휴의 이 말은 아마도 신들에게 유감이 없을 수 없는 것인 듯합니다. 신들이 논쟁한 것은 단지 공적인 것이고 개인의 사사로운 유감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유감이 없었는데 지금 어찌 풀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국가의 일에 있어 독단할 수 없는 것이니, 윤휴로 하여금 다시 국사(國事)를 담당하게 하더라도 또한 그가 계획한 것을 모두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신이 다시 국사를 의논할 리가 없을 뿐더러 설사 의논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대신의 뜻에 따라 순종할 수 없는 것이고, 신은 의당 신의 경우를 지켜 애초의 의견을 변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대신의 일로 인하여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한다면 단지 신의 처신이 사람들의 천시와 증오를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의 복이 아닌 듯싶습니다. 그리고 대신의 직책은 천하의 선(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서 아무리 과도한 논의를 했더라도 의당 장려하고 용인하여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는 것이 바로 대신의 체모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반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남을 좌절시키고 욕한다면 신 같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의 처사가 이러할 경우 어떻게 천하의 진정 선비라 이르는 자들을 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번의 상소 내용을 보건대, 윤휴가 과연 신들을 욕한 것입니까, 신들이 과연 윤휴를 욕한 것입니까? 지금 윤휴가 욕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진정 이른바 자신에게 돌이킬 줄 모르고 오히려 남을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선비라 이르는 사람은 필시 시비를 확정하고 사무를 변론하여 조용히 처리하고 남을 욕하는 짓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남을 욕하는 것이 어찌 진정 선비라 이르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리고 일에는 본시 옛날에는 적합하고 지금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윤휴는 한번 그의 입에서 나오기만 하면 그 말이 옳다고 하고 꼭 시행할 만한 것이라 하고 그만둘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사람들이 시비를 가리거나 적당한 것인가 부당한 것인가를 가리지 않고서 기필코 따르게끔 하려고 하니, 이것이 신들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인데 제기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전하께서 신들을 명초(命招)하시는 데 있어 윤휴와 함께 입시하게 하시고 직접 주찬(酒饌)을 내리시며 간곡히 유시하신 데에는 그 뜻이 소재가 있는 것인데 신들이 어떻게 의견을 달리하는 혐의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애당초 윤휴가 물러나기를 청한 것은 아마도 신들의 일로 인한 것인 듯하니, 윤휴가 물러나기를 청하는 데 있어 더욱 강력히 할수록 신들의 불안함이 더욱 심합니다. 윤휴가 임금의 덕을 보필하고 임금의 마음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전하만이 아실 뿐만 아니라 신들도 깊이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연에 출입하도록 할 것을 누누이 하교하시어 도성을 나가지 말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여러 번 말하고 간곡히 타일렀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오늘 입시한 것은 단지 전하의 옥안을 뵈오려 한 것인데 지금 이미 성명을 모셨고 옥음(玉音)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국사를 담당하게 하신다면 해로움만 있고 도움됨이 없을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신의 직명을 해면시키시어 물러가 쉴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번이나 타일렀는데 또다시 많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알고서 나가지 말고 부족한 것을 보도하라.”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내일 도성을 나가야겠기에 이에 하직을 올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성의가 부족하여 경의 뜻을 돌리지 못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개탄스럽다. 나의 뜻을 헤아려 다시 나가지 말고 임금의 덕을 보도(輔導)하라.”

하였다. 이에 끝마치고 나왔다.

[주-D001] 곡배(曲拜) : 임금에게 올리는 절로서, 임금은 남쪽을 향하여 앉는데 신하가 마주 대하여 절할 수 없기 때문에 동쪽이나 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는 것이다.[주-D002] 단궁(檀弓)은 …… 입었다 :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에, “공의 중자(公儀仲子)의 상(喪)에 단궁이 단문을 하고 조문하였다.”고 하였고, 또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상에 자유는 마최를 입고 조문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공의 중자가 손자를 후사(後嗣)로 세우지 않고 서자(庶子)를 세웠고, 사구 혜자가 적자(嫡子) 호(虎)를 폐하고 서자를 세웠기 때문에 단궁과 자유가 예법에 맞지 않는 상복을 입고 조문하여 그들을 기롱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경자년(1660, 현종1) 3월에 올린 대왕대비복제의(大王大妃服制議)에 이 설을 인용하였다.[주-D003] 손권(孫權)이 책상을 쪼갠 것 :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 승상 조조(曹操)가 형주(荊州)를 점령하고 강릉(江陵)에 진주(進住)하자, 손권의 장사(將士)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손권에게 조조를 맞이하기를 권했으나 주유(周瑜)ㆍ노숙(魯肅)만이 반대하여 손권의 뜻과 같았다. 이에 손권은 칼을 뽑아 앞에 놓인 책상을 치며 말하기를, “조조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책상처럼 할 것이다.”라고 하여 끝내 적벽(赤壁)의 큰 승리를 거두었다. 《三國志 卷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