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鴨綠江)에는 비록 세 길이 있으나 서쪽과 가까운 두 길은 물이 얕고 강폭이 좁아 말을 타고 뛰어서 건널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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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집 제4권 / 잡저(雜著)
〈피난행록〉 상〔避難行錄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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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경진)
아침에 비가 왔다. 이날,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근래 줄곧 행재소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밤낮으로 민망해하며 울고 있습니다. 동궁의 행차는 여전히 이천(伊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본현(本縣)의 사면, 이를테면 곡산(谷山), 우봉(牛峯), 김화(金化), 마전(麻田)에 모두 적이 침입하였다는 소문이 있으나, 다만 비가 연이어 내려 강과 내가 넘실거리는 데 힘입어 방어의 대책으로 믿고 있습니다. 만약 강의 여울이 점차 줄어든다면 매우 염려스러워서 적세(賊勢)의 긴급함과 느슨함을 살펴보아 편의대로 옮겨 피할 생각이옵니다.
근래에 각 도(道)의 형세를 보건대 여러 고을의 수령이 혹은 전쟁으로 사망하고, 혹은 고을을 버리고, 혹은 몸이 죽어서 수령이 없는 고을 아닌 곳이 없어서 백성이 모두 흩어지고 살인과 노략질을 일삼으며 으르고 협박하니 지금의 급선무는 각 읍의 수령들이 비는 대로 즉시 전보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을의 업무를 보며 민병을 모집케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재소가 멀어서 소식이 잘 통하지 않아 동궁이 행차하며 근방의 수령을 임명하는 것 이외에 다른 여러 고을에는 감히 관리를 임명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비어 있는 고을이 매우 많아 적을 토벌하는 데 두서가 없으니, 진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춘천(春川)은 영서(嶺西) 지역의 대읍(大邑)으로, 오랫동안 병화를 입지 않았으므로, 본도의 관찰사가 이에 의거하여 방비를 조치하였습니다. 만약 춘천의 방어가 실패한다면 가평(加平)과 양근(楊根) 등의 지역 역시 지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관방(關防)의 가장 요충지임에도 경기 감사 권징(權徵)의 치보(馳報)에 따르면 부사(府使) 조인후(趙仁後)는 몸에 중병이 있다며 여러 차례 숨고 피하여 본읍(本邑)이 버려진 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박종남(朴宗男)을 부사로 권차(權差 임시로 임명함)하여 이 고을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원호(元豪)는 적들과 접전을 펼치다 적에 의해 상해를 입었는데, 본읍(本邑)은 돌아오는 적의 요충지가 되기 때문에 하루라도 주군(主軍)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경기 감사의 치보를 받아본 바, 전 승지(承旨) 성영(成泳)이 천여 명을 모병하여 본주(本州)에 있다고 하므로, 그를 목사로 권차하였습니다.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은 대의를 내세워 의병을 일으켜 호남(湖南)에서부터 근기(近畿)까지 왔으니 충의(忠義)가 가상합니다. 그런데 아직 직명(職名)이 없어 부하를 호령할 수 없습니다. 또한 경상도와 전라도〔兩南〕에서 창의(倡義)한 사람들이 서로 연달아 일어나고 있으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김천일을 중추부사(中樞府事)로 승차시켰으나, 지극히 미안합니다. 춘천 부사 박종남과 여주 목사 성영의 관교(官敎)를 아울러 작성하여 보내심이 어떠하겠습니까?
광주(廣州)에서 모은 병사들이 많게는 수천 명에까지 이르러서 변언수(邊彦琇)가 병사를 거느리고 주둔하였는데, 갑자기 들이닥치는 적을 만나자 변언수가 진(陣)을 펼칠 수가 없어서 적을 보지도 않은 채 먼저 도망갔다고 합니다. 경기 감사의 장계에서 그의 죄를 청하여 백의종사(白衣從事)를 시키게 하여 훗날 공을 세우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남병(南兵)은 인천(仁川)과 안산(安山)에 와서 주둔하고 있다고 하는데, 병사들의 수가 많은지 적은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승첩을 거뒀다는 말도 혹 들려오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서울에 있는 적을 다시 정탐해 보니 그 수가 이전에 비해 매우 적습니다. 명나라 군대가 이미 압록강을 건넜다고 하는데, 전해 들었을 뿐이라서 어느 곳까지 왔는지 알지 못하여서, 지극히 민망하고 염려됩니다.
8월 9일(병신)
순녕군(順寧君)이 방문하였다.
○이날,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유영길(柳永吉)이 근래 본도(本道)에 적의 기세가 확장됨에 따라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어서 책응(策應)에 뜻이 없는가 하면, 행차가 강원도 내에 머물러 있는데도 길이 막혀 있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배알하지 않아서 이미 대간(臺諫)들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습니다. 때문에 병조 참의(兵曹參議) 강신(姜紳)을 이전 성상(聖上)의 유지(諭旨)에 따라 순찰사(巡察使)로 임명하였고, 그로 하여금 관찰사의 직무를 임시로 맡게 하였습니다. 강신에 대한 관교(官敎)와 유교서(諭敎書)를 작성하여 보내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병조가 동궁을 호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므로 당상(堂上)이 한 사람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기에 정윤복(丁胤福)을 참판으로 제수하였으며, 박종남(朴宗男)은 일찍이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이미 차송(差送)하였습니다. 행차에 시위할 사람이 없어 김우고(金友皐)를 계속 시위로 남겨 놓았습니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부하 여러 장수와 황해도ㆍ평안도 병력 400명을 이끌고 평양으로 나아가 이빈(李薲)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양쪽에서 협공하여 적을 잡도록 하였습니다.
군공(軍功)에 대한 여타의 사항은 모두 시행하였으나, 그 가운데 의성 도정(宜城都正) 이옥윤(李玉潤), 월곶 첨사(月串僉使) 이빈(李蘋), 강화 부사(江華府使) 윤담(尹湛), 정포 만호(井浦萬戶) 안광국(安匡國), 전 선전관(前宣傳官) 전인룡(田仁龍), 선전관(宣傳官) 이현(李賢) 등은 응당 승급의 포상이 있어야 하나, 행차에서 마음대로 처결하기가 미안합니다.
고양(高陽)의 사노(私奴) 명복(明福)과 명회(明會) 형제가 자신의 부형이 해를 입은 것에 분노하여 적 70여 명을 쏘아 죽이고 16급을 참수하여서, 일찍이 이미 허통(許通)하여 우림위(羽林衛)에 제수하였습니다마는 이와 같이 특별한 공로에 대한 논상(論賞)은 여기에서 그쳐서는 아니 될 듯합니다.
경기 수사(京畿水使)는 죽은 지 이미 오래되어 최몽성(崔夢星)을 파견하겠다는 뜻을 전에 이미 장계로 아뢰었습니다마는 그 후 행재소의 조보(朝報)를 본 바, 변언수(邊彦琇)를 여기에 임명하셨습니다. 변언수가 이전 패전의 죄를 지고 백의종군하였던 일은 이미 아뢰었습니다. 대저 군공의 논상에 있어 잡다한 임명까지 만약 하나하나 행재소에 품신하여 재가를 받는다면 왕래하는 사이에 걸핏하면 시월(時月)이 지나서, 상이 때를 넘겨서는 안 된다는 뜻에 어긋나므로, 낱낱이 관직을 제수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제수는 거행하기가 어렵기는 하나, 적병들의 기세가 치열한 곳에서는 혹은 관아를 버리거나 혹은 죽었는데도 오랫동안 수령을 파견하지 못하여, 한 고을의 인민(人民)이 적의 수중에 맡겨진 채 수복할 기약이 없어서 부득이 전하여 들리는 말에 따라 관리를 차출하여 그 이름을 기록하여 올립니다.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권징(權徵)의 장계에 조경(趙儆)과 변응성(邊應星)이 패군(敗軍)한 죄를 군율에 따라 치죄(治罪)하기를 청하였으나, 지금 적들의 변란이 한창 극성한 이때에는 한 사람의 장수도 전쟁의 승패와 관련되므로 우선 관대한 볍령을 따라, 이의(李艤)ㆍ최몽성(崔夢星)ㆍ박기백(朴己百)은 모두 군령에 따라 곤장을 치라는 뜻으로 회답하였습니다. 이시언(李時言)은 이미 방어사(防禦使)로 제수되었고, 인천 부사(仁川府使)는 오랫동안 비어 있어 도총경력(都摠經歷) 윤건(尹健)을 임시로 파견하여 보내었습니다.
8월 17일(갑진)
○이날,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설번(薛藩)이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주문(奏文)과 허의후(許儀後)의 조목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부기한다.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의 소직(小職)인 저 설번(薛藩)은 왜적들의 심성이 하도 교활하여서 참으로 우려할 만하다 여기옵니다. 병사들을 징발하여 왜적을 징벌하는 것이 급하기에 한두 가지 합당한 일을 아울러 개진하여 성명(聖明)의 채택에 대비코자 하옵니다.
이전에 우리 명나라 병부가 왜적들이 반란을 일으켜 서로 분쟁하고 있을 때 왜적들의 정황을 예측하기 어려워서 성명(聖明)께 간절히 빌어, 문무 대신(文武大臣)을 급히 파견하여 왜적의 토벌을 경략하여 그들의 미친 기도를 정벌하여 급한 후환을 해결하라는 성지(聖旨)를 받든 바 “조선이 왜적에게 침략을 당하여 함몰할 지경에 이르러서 조선 국왕이 매우 급하게 병력을 요청하고 있다. 이미 여러 관료들의 회의를 거쳤고 그대들 병부 또한 정탐을 하여 실태 파악을 하였을 것이니, 곧장 출정할 사의(事宜)를 참작하여 속히 가서 조선을 구원하되, 달리 병력 지원이 늦어져 제때 미치지 못하는 일로 뒷날 우리나라 변경이 해를 입을 우려를 나에게 끼치지 말라. 관직을 설치하고 장수를 보내는 일은 모두 선유(宣諭)한 대로 알아서 하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병부의 자문(咨文)을 예부(禮部)에 송부한 바, 소직(小職) 설번을 제청하여 관직을 주어서 파견하며 칙서를 가지고 가서 조선의 국왕을 선유(宣諭)하게 하였습니다. 소직은 이를 공손히 받들어 시행하여 곧장 조선으로 달려와서 칙서(勅書)를 개봉하여 선유한 바, 조선의 군왕과 신하 모두가 감격하여 목메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다 같이 말하기를 “‘황은(皇恩)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시니 참으로 하늘이 모든 것을 덮고 땅이 모든 것을 싣고 있는 인자함과 같습니다.’ 하면서 목을 길게 뽑아 왕사(王師)를 기다리는 것이 또한 큰 가뭄에 비가 올 징조를 지닌 구름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의 군신들이 슬피 부르짖는 절박한 말에 근거하고 또 백성들의 곤궁함과 유랑하는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니, 진실로 조선의 존망은 호흡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사세(事勢)의 절박함이 조선에만 있지 않고 우리나라 변경에도 있으니, 어리석은 소직(小職)이 깊이 우려하는 것은 변경만이 아니라 내지(內地)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병사를 조발하여 토벌하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반드시 닥쳐올 일의 형세를 감안하여 미리 첨병(添兵)하여 지방(地方)을 지켜야 한다는 사의(事宜)를 황상(皇上)께 진달하여 올립니다.
요진(遼鎭)은 경사(京師 북경)의 왼팔이며, 조선은 요진의 울타리입니다. 영평(永平)은 기보(畿輔 북경 근지)의 중요한 땅이며, 천진(天津)은 또한 경사(京師)의 문정(門庭)입니다. 200여 년 동안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은 항상 왜적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양과 천진에는 왜구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조선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입니다. 압록강(鴨綠江)에는 비록 세 길이 있으나 서쪽과 가까운 두 길은 물이 얕고 강폭이 좁아 말을 타고 뛰어서 건널 수 있고, 그 가운데 하나의 길은 동서의 거리가 (적이 오면) 화살을 두 번 먹일 수도 없는 거리입니다. 어찌 이에 의지하여 방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왜적들이 조선을 차지하여 웅거한다면 요양의 백성들은 하룻밤도 편안히 베개를 베고 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바람이 세차게 한 번 불어서 돛을 올려 서쪽으로 온다면 영평과 천진이 제일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니, 경사의 백성들이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소직(小職)은 그 우려와 잘못된 계책을 견디지 못해 발걸음이 닿는 곳곳마다 자세히 물어보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차출하여 곧장 평양 지역으로 보내어 정탐한 바, 그들이 돌아와 보고한 것에 따르면 모두 “왜구들이 각자 인가와 부녀자를 차지하여 짝을 이루어 살림을 꾸리고 집을 수리하여 많은 식량을 쌓으며 오랫동안 주둔할 계책을 세우는가 하면, 병기를 더 만들고 민가에 있는 활과 화살을 모아서 전쟁에 사용합니다.”라고 말하니, 이는 왜적의 뜻이 작은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臣)이 도착하던 날, 들으니 왜적이 서쪽으로 압록강에 와서 군대를 열병하겠다고 큰소리치자 조선의 신민(臣民)들이 갈팡질팡하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유격(游擊) 심유경(沈惟敬)이 힘을 다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 담판을 지어서 50일 동안 교전하지 않기로 약조를 하여 왜적들의 침범을 늦추고 아군의 도착을 기다리게 하였으나, 우리가 이 술책으로 저들을 속였는데, 저들 역시 이 술책으로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왜적들은 간사하고 교활하여 평양을 함락시킬 때에는 “길을 빌려 원수를 갚고자 한다.”고 말하더니 지금은 “길을 빌려 조공을 하고자 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바야흐로 중국과 대적할 수 없음을 천고의 한(恨)으로 여기더니, 또 심유경을 만나고서는 조공을 통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갑자기 무시하는 말을 하다가 돌연 공손한 말을 하니, 여기에 그들은 간사하여 믿기 어렵다는 것을 대충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왜는 10년에 한 번씩 조공을 바치는 기한이 원래 정해져 있고, 영파부(寧波府)로 조공을 바치는 장소 역시 원래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을 끼고서 우리에게 맹약을 요구하니, 어리석은 생각에 중간(조선)을 거쳐 조공을 바치는 것〔來王 來朝〕은 이 제도만 못할 듯합니다. 여전히 그냥 놓아두고 문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臣)이 왜적의 계략을 헤아려 보건대 조공을 허락받아 간사하게 죄를 용서받고서는 우리 병력의 출정을 늦추려는 기도에 불과합니다. 혹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가 요양(遼陽)을 침범하거나, 혹은 봄을 기다려 바닷길로 천진(天津)을 침범할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제때에 속히 대군(大軍)을 파견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침범하여 이르는 곳마다 ‘누가 감히 우리를 어찌할 것인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선뜻 순순히 배의 키를 돌리리라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지금 조선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러서, 위기가 아침저녁에 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말씀〔綸音 칙서〕이 한 번 반포되면서 조선 백성들이 충의로운 마음이 고무되고 적개(敵愾)하는 의기(義氣)가 진작되어, 모두가 국가 회복의 염원을 지니지 않는 이가 없어 왜적들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으니 이러한 인심(人心)을 타고 정예의 병력을 더해주어 그들과 함께 협공한다면 왜적들을 반드시 섬멸하게 될 것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차히 시일을 기다린다면 왜적들이 가난한 자들을 불러 모으고 흩어져 유랑하는 사람들을 어루만져 위로하여 조선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하고 새로운 군주를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100만의 병사가 있기로서니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군사를 일으켜 토벌을 나가는 것은 다만 왜적의 침범을 재촉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 소직(小職)은 토벌하여도 침범할 것이고 토벌하지 않아도 침범할 것이라면, 왜적을 토벌하여 평양의 동쪽으로 끌어낸다면 왜적의 침범에 늦어져서 재난도 적을 것이나 토벌하지 않는다면 평양의 바깥에서 마음대로 날뛰어 왜적의 침범이 빨라져서 재난도 클 것이며, 또 빨리 토벌하면 우리는 조선의 힘을 빌려 왜적을 잡을 수 있으나 더디 토벌하면 왜적이 조선 사람들을 거느리고 우리를 대적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臣)은 진실로 병사를 징발하여 왜를 토벌하는 일은 잠시도 늦출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설령 대군(大軍)을 한꺼번에 모을 수는 없을지라도 마땅히 연이어 군사를 징발하여 보내어 조선 군사의 성세를 부추겨주어야 합니다. 아마 만에 하나 개나 양과 같은 왜적들의 혼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군대를 일으키는 데 드는 비용이 군량미 보다 더 드는 것은 없습니다. 소직(小職)이 물어본 바, 조선이 현재 비축하고 있는 군량미는 겨우 7~8천의 군사를 한 달 먹일 수 있는 양밖에 없다고 하며 부족한 양은 우리 측의 지원을 받아서 이어대려고 하며, 조선국 군왕과 신하들이 또 사람과 말을 징발하여 압록강 강변에서 이를 인수 받아 수송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평양을 평정한 후에는 조선국 군신들 역시 우리 명나라 군사들이 자신들의 부모 형제를 위해 복수해 주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기꺼이 군량미를 바칠 것이니, 자연스레 가는 곳마다 군량을 이어 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왜적들에게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이를테면 관전(寬奠)ㆍ대전(大奠)ㆍ애양(靉陽) 등의 지방에 있어서는 서북쪽으로는 달로(㺚虜)와 인접해 있고 동남쪽은 압록강에 기대어 있어 5백여 리나 뻗쳐 있는데도, 원래 정원의 관병 그 숫자가 이미 매우 적은 데다 지금 각 군영에서 징발해 간 선봉(選鋒 정예 돌격대)ㆍ초마(哨馬 초계를 하는 기병) 및 절년(節年 퇴직병)ㆍ도망병과 사망병을 제외하면 관전보(寬奠堡)에 실재하는 군사는 단지 1300여 명에 그치고 애양보(靉陽堡)에 실존하는 군사는 7500여 명에 그치며, 대전보(大奠堡)에 실존하는 군사는 330여 명에 그칩니다. 이미 왜적을 막으면서 또 북쪽 오랑캐〔虜〕를 방어하려 한다면 보(堡)를 지키는 병사가 없을 수 없고 적의 길을 막는 데 사람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가령 왜적들이 정말 침범해 온다면 어떻게 막겠습니까?
소직이 생각건대, 관전보 등의 관병을 속히 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방의 사람(하북과 요동인)은 북쪽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 뛰어나고, 남방의 사람(복건과 절강인)은 왜적을 막는 데 뛰어납니다. 만약 왜적과 전투를 함에 있어 남병(南兵) 2만을 얻지 않으면 어찌 왜적들의 예봉(銳鋒)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남병을 빨리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장기는 말을 몰며 활을 쏘는 데 있고, 왜적의 장기는 조총에 있습니다. 화살이 미치는 곳은 갑옷〔盔甲〕으로 피할 수 있으나 조총을 쏘는 것은 병사들과 말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등 방패〔藤牌〕가 있으면 몸도 은폐할 수 있고 말〔馬〕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등 방패와 조총을 모두 속히 만들어야 합니다.
신이 말한 것은 진실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먼저 말하였을 줄로 압니다. 어찌 신의 진부한 번독을 기다리겠습니까? 돌이켜 생각건대 하루라도 빨리하면 조선이 하루에 멸망하는 근심을 면하게 되고, 하루라도 늦추면 우리 강역에 하루의 우환을 끼치게 됩니다.
간절히 빌건대, 성황(聖皇)의 명철한 판단으로 해부(該部 병부 및 해당 관부)에 조칙을 내려 논의를 거쳐서 시행케 하되 일을 맡은 신하들에게는 병마(兵馬)를 재촉하여 나오게 하신다면 강역에 다행이고, 종묘사직에도 다행이겠습니다.
소직(小職)은 기우(杞憂)를 견디지 못하여 곧장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나왔다가 도중에 병이 나서 빨리 달려 나갈 수가 없으나, 돌이켜 보건대 일념의 정성스런 충성이 지연되어 일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이 주본(奏本)을 갖추어 써서 먼저 집안 사람 설지(薛志)를 시켜 받들어 봉송하게 하오니 삼가 아뢰옵니다.
○이날, 또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근자에 성상의 옥체가 어떠하신지 지극히 염려되옵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광주 향교(廣州鄕校)의 생도 이운룡(李雲龍) 등이 이달 17일 이곳에 와서 말하기를 “동쪽 잠실(蠶室) 근처의 사노비 두리(頭里)와 불세(佛世)가 6월 보름께 선릉(宣陵 성종의 묘) 위의 잔디와 흙이 왜적들에 의해 파헤쳐져 있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전해 들은 말이 사실인지 알지 못하나, 그 말을 듣고 경악과 통탄을 이루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동궁께서 곧장 오산 도정(烏山都正) 이현(李鉉)과 선전관(宣傳官) 이응인(李應仁)을 보내신 바, 사수 군인(射手軍人) 다섯 명을 이끌고 급히 봉심(奉審)하러 당일 출발하였습니다. 그들이 돌아온 후 다시 아뢰어야 할 것이나, 일이 너무나도 경악스럽고도 슬퍼 먼저 아뢰옵니다.
봉심(奉審)하는 신하는 마땅히 벼슬이 높은 조정의 관리를 보내어야 하나, 왜적의 무리들이 지금 그곳에 진(陣)을 치고 있어 봉심의 목적을 달성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산 도정 이현은 나이는 젊지만 무재(武才)가 있어서 이에 차출하여 보낸 것입니다.
8월 27일(갑인)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서쪽 변방이 일찍 추울 터인데, 성상의 옥체가 어떠하신지요. 답답하고 염려되는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평양의 적이 병력을 증강한 흔적이 보이나 오랫동안 거사를 하지 않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본부(本府 성천부)는 평양성과 멀지 않아서, 강동(江東)의 얕은 여울물에 장수를 지정하여 방비하여야 하나, 여울이 많고 군사가 적어서 만전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대군(大軍)의 뒤로 옮겨가서 형세를 보아가며 나아가고 물러나겠다는 뜻을 전에 이미 장계로 아뢰었습니다마는, 그러나 동궁의 행차가 적과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어서 호위하는 장졸이 취약해서는 안 되는데, 본도(本道)의 장졸은 초발(抄發)한 나머지 모두가 지치고 허약하여 한갓 군량만 소비할 뿐 실제로 쓸모가 없습니다. 모름지기 활을 잘 다루는 정예의 병사를 얻어야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할 수 있으나, 모을 방법이 없습니다. 격려하고 권장할 수단으로는 단지 과거(科擧)라는 하나의 일에 달려 있으나 과거와 같은 중대한 일을 가벼이 논할 수 없어서 이전에 활쏘기를 시험하여 직부(直赴)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품계 한만큼 그에 대한 전하의 비답을 기다려서 확정하고자 합니다.
홍인상(洪麟祥)이 처음 행재소로 가려고 동궁을 배알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동궁을 모시는 여러 신하들이 대개가 늙고 병들어 일을 맡을 사람이 없어서 그를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권차(權差)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