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은 두 산 사이에 끼어 있어서 동쪽으로 우리나라와 닿았고 서쪽은 몽고와 닿았으며, 남쪽은 요하를 임했고 북쪽은 융적(戎狄)과 접경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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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日記) / 계사년(1713, 숙종 39)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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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평명에 길을 떠나서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니 여러 하인과 각 관청 배상(排床)이 여기에 베풀어져 있었다. 전동(磚洞) 영상(領相)과 기백(畿伯)도 나와서 먼저 상사를 보고, 상사가 먼저 간 다음에 주장을 와서 보았다. 주장도 잇따라 떠나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옷을 고쳐 입었다. 이 참의(李參議) 부자가 여기에 와서 주장을 뵈었다. 김 동료가 모시고 가서 예궐(詣闕)했고 나는 짐바리를 영솔해서 바로 명동으로 갔다. 수효대로 대조하여 납입한 뒤에 집에 돌아왔다. 상(上)이 세 사신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인견할 때에 신천(信川) 원이 나와서 기다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하기를 주청했다. 별도로 사은사(謝恩使)를 차송(差送)하기를 정탈(定奪)했는데, 연중(筵中)에 많았던 설화(說話)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서울에서 만상(灣上)까지 1070리, 만상에서 봉성(鳳城)까지 150리였다. 봉성에서 심양(瀋陽)까지는 400여 리에 불과하며, 심양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도 800여 리에 불과하였다. 산해관에서 북경(北京)까지는 600여 리에 불과하였으니, 통계해도 3100여 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저 나라 이수(里數)의 멀고 가까움을 비록 꼭 알지는 못하나, 일력(日力)의 길고 짧음과 행역(行役)의 더딤과 빠름으로써 비교한다면, 저 나라 50리 참(站)이란 것이 우리나라 40리 참보다 가까웠다. 만부(灣府)에서 으레 쌀ㆍ콩 아울러 60여 석(石)을 행량(行糧)으로 계산해서 만상 군관(灣上軍官)에게 지급하였다. 저 나라에서는 양식과 콩을 계산해 주었으나, 그 수량이 일정하지 않고 다만 보고 단자(報告單子)의 인원수에 따라서 계산해 공급하였다. 시초(柴草)와 찬물(饌物)은 참마다 계산해서 공급했는데, 돼지고기ㆍ거위ㆍ닭 등이었다. 봉성에서 심양, 산해관, 북경까지였다.
돌아올 때에는 통주(通州)에서 산해관까지, 산해관에서 심양까지, 심양에서 봉성까지, 양식과 콩을 공급하였다. 돌아올 때에 북경에서 심양까지는 참마다 찬물을 공급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고 도합해서 은자(銀子) 58냥을 지급하더니, 심양에서 봉성까지는 참마다 계산해 주었다. 그런데 만상 군관이 지급하는 양식과 콩을 사사로 써버리고 쇄마 인마 및 사사로 데리고 온 인마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 이미 내려오는 규례로 되어 있었다. 그 섬 수 및 쓴 곳을 여러 차례 따져 물었으나 끝내 분명하게 고백하지 않았다. (이하 누락된 것이 있는 듯함)
동쪽으로 달려가서 계주(薊州)의 반룡산(盤龍山), 옥전현(玉田縣)의 연산(燕山)이 되었다. 연산에서 동쪽으로 진자점(榛子店)에 가서는 또 두 지맥(支脈)으로 갈라졌는데, 남쪽으로 달려간 것은 토이산(兎耳山)으로 되어, 창려현(昌黎縣)을 지나고 바로 바다에 닿아서 갈석산(碣石山)으로 되었다. 한 가닥은 동북쪽으로 달려가서 영평(永平)ㆍ무령(撫寧)을 지나고 산해관 뒤에 와서는 각산(角山)으로 되었으며, 다시 꾸불거리며 동쪽으로 광령(廣寧)에 달려가서 의무려산(醫巫閭山)으로 되었다. 유주(幽州)의 북쪽 진산(鎭山)을 만들면서 잇따라 북쪽으로 달려갔는데 어느 쪽에 와서 그쳤는지, 산의 앞뒤로써 이(夷)ㆍ하(夏)의 경계를 분간하였다. 지금은 북쪽이 몽고 지역이고 남쪽이 관내(關內)이며, 동쪽이 요동(遼東) 들로 되어 있다. 그 사이에 큰 하수(河水) 셋이 있으니, 바로 난하(灤河)ㆍ주류하(周流河)ㆍ통진(通津) 등이다. 산이 줄기줄기 옆으로 달렸고, 물이 굽이굽이 가닥을 갈라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영평ㆍ무령ㆍ옥전 등 지역에는 산천이 극히 수려한 까닭으로, 절효 정문(節孝旌門)이 또한 많으니, 인걸(人傑)이 나는 것은 땅의 영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 줄기 낮은 산이 남쪽으로 달려서 십삼산(十三山)을 만들었고, 그대로 긴 언덕으로 되어서 바닷가에 이른 까닭으로 명 나라 때에는 이것을 경계로 하였다. 혹 돈대를 설치하고 혹 긴 담을 쌓아, 서쪽은 장성 동쪽에 닿았고 남쪽은 삼차하(三叉河) 서쪽에 이르러서 방어하는 곳으로 하였다. 지금에도 오히려 옛 흔적이 있고 그 너머에는 곧 망망한 학야(鶴野)였다. 지지난 무오년(1618)에 청 나라가 심양을 차지한 뒤에 소흑산(小黑山)을 경계로 해서 비로소 돈대를 설치하였다. 또 십삼산에서 바로 고평방산(高平方山) 등 지역을 거쳐, 우가장(牛家庄)을 지나고, 요하(遼河)를 건너서 바로 요동(遼東)에 통했다. 그러므로 요동의 번성함이 소주(蘇州)ㆍ항주(杭州)와 서로 비슷하였다. 지금은 거친 터로 되었으나 오히려 예스럽고 웅장한 남은 자국이 있었다.
동팔참(東八站)은 분수령(分水嶺) 한 가닥이 두 가닥으로 갈라지면서, 한 가닥은 서북쪽으로 달려 가서 안산(鞍山)ㆍ천산(千山) 등의 산으로 되었고 한 가닥은 송골(松鶻)ㆍ봉황(鳳凰) 등의 산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겹쳐진 봉우리와 포개진 멧부리가 창 같고 칼 같으며, 긴 골짜기 깊은 골이 정형(井陘)과 같은데 동쪽으로 압록강에 와서 그쳤다. 분수령 동쪽 큰 물은 곧 팔도하(八渡河)로서 중강(中江)에 들어가고, 서쪽 큰 물은 바로 태자하(太子河)로서 삼차하에 들어가서 요하게 통한다.
심양은 두 산 사이에 끼어 있어서 동쪽으로 우리나라와 닿았고 서쪽은 몽고와 닿았으며, 남쪽은 요하를 임했고 북쪽은 융적(戎狄)과 접경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나라 및 몽고와 화친하지 않으면 결코 지킬 만한 곳이 못 된다. 그러므로 지금 황제(皇帝)가 우리를 정성껏 대하고 몽고와 혼인하는 뜻은 알 만하다. 저들 나라 병기(兵器)를 보니, 한 가지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활이 약하고 나무로 만든 살[箭]이어서, 화살 날아가는 것이 100보(步)도 미치지 못했다. 칼도 날이 무르고 또 짧아서 말 위에서 쓰기에는 합당하지 않았다. 창과 총도 또한 정리(精利)하지 않으니, 이것도 곧 말 위의 무딘 무기(武技)라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다만 평상시에 입은 옷이 전장(戰場)에도 편리한 옷이어서 입기에 가볍고 편리하였다. 또 평상시에도 말타기를 익히고 말 먹이는 것 또한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날마다 수백 리를 달려도 사람과 말이 다 피로해지지 않고 또 지형이 평탄해서 달리고 쫓기에 편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보졸(步卒)이 가서 당적할 수 없을 듯하나, 또 저들의 기병(騎兵)이 우리 땅에 들어오면 우리 보병을 당적할 수 없음도 분명하였다. 또 관 안팎이 오랜 태평으로 인해서 인구가 매우 번성하였다. 예전에 왕래한 사람은 100리 사이에서 겨우 세 곳 촌사(村社)를 볼 수 있었다 했는데, 지금은 10리 사이에도 촌락이 서로 연해서 닭소리ㆍ개소리가 서로 연달아 들렸다.
광녕 이서에는 묵은 땅이 자못 적었고, 소흑산에서 동쪽은 바로 요동 들로서, 비록 묵은 땅은 많았으나, 촌락이 서로 바라보였다. 이로써 말한다면, 물(物)이 성한 다음에 쇠(衰)함이 있는 것은 곧 천리(天理)의 변화(變化)이나, 민정(民情)으로 본다면, 청 나라가 망하기에는 아직도 멀었다. 다만 여러 왕 중에 사람 같은 자가 하나도 없고 또 황장자(皇長子)와 태자(太子)가 연달아 죄과(罪過)로써 갇혀 있었다. 그 뱃속이 이미 어지러워졌으니 사지(四肢)도 장차 따라서 어지러워질 것이다. 강희(康煕)가 죽는 날이면 천하가 어지러워질 것도 손가락을 꼽으면서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때를 당하면 우리나라가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기필할 수는 없다.
생각건대, 사리에 밝고 슬기 있는 자를 시켜, 그 나라 내란을 틈타서, 몽고와 화친을 맺고 심양 이북 지역을 떼어서 차지한다면, 중원에서도 반드시 내응해서 잇따라 일어나는 자가 있어,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게 될 것이다. 먼저 발동해서 저쪽을 제압하면 공연히 그 해를 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뒷일도 잘하려는 방책을 보통 사람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심양ㆍ영고탑(寧古塔) 등 지역을 공략(攻略)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하다. 청국 군신(君臣)이 천하(天下) 보기를 여관(旅館)같이 여겨서 성지(城池)와 대관(臺觀)이 무너져도 그냥 두고, 하나도 수선하는 것이 없다. 모든 정령(政令)과 관제(官制)를 한결같이 명 나라 제도를 따르고 금하여 억제(抑制)하지 않았다.
또 만족(滿族)의 글과 말, 한인(漢人)의 글과 말을 아울러 시행하나, 반드시 만족 측을 주로 하는 것은 그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을 알 수 있고, 민중을 거스리지 않음도 알 수 있다. 또 쓰임새를 절약하고 스스로 검소해서 부고(府庫)가 충족하며,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니 인심이 기뻐하고, 날마다 수고로움을 익혀서 문무(文武)가 아울러 온전하였다. 또 각 관직에 권세를 없앤 까닭에 3종족(種族)의 사람이 감히 서로 시기하여 해치지 못하고 다만 봉직(奉職)을 잃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이 있을 뿐이니, 그 사람을 거느리는 방법이 결코 등한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고지식해서 변통이 없고 간이(簡易)함을 따르기만 힘쓰는 까닭으로 상하에 분간이 없고 귀천도 구별이 없으니, 이것은 제왕(帝王)의 법이 아니었다. 다만 풍속이 여러 번 변했고 또 이 사람들이 들어온 지가 벌써 오래되니 한대(漢代)를 사모하는 모습이 하나도 없었다. 의복의 짧고 비좁음과, 비린내 나고 더러운 것을 한 그릇에 담는 것도 이미 호인(胡人) 풍습으로 되어 버렸다. 이후에 만약 진인(眞人)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오랜 동안 감염(感染)된 더러움을 갑자기 변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며, 강북(江北) 풍습은 반드시 호인의 풍속을 숭상할 것이니 통탄됨을 어찌 견디겠는가?
마을마다 묘당(廟堂)이 있고 집마다 부처의 탱화(幀畫)를 걸어서 조석으로 분향(焚香)하니 그 불도를 숭상함을 알 수 있으며, 각 전사(廛舍) 물화(物貨) 중에 종이로 만든 은(銀)ㆍ금(金)과 자루로 된 향(香)이 매우 많아서 산처럼 쌓이고 구름같이 무더기져 있었다. 향은 자작나무 껍질을 아울러 갈아서 가루로 만들고 색목(色木)에 타서 자루 향으로 만든 것이었다. 만약 부유한 집이면 집 앞에 별도로 사당집을 지어서 불상을 앉히고 관왕(關王)의 영정(影幀)을 걸었으니, 그 관 장군을 존경함은 비록 말을 배우는 작은 아이라도 모두 알았다. 안장(安葬)할 때에는 종이로 만든 은ㆍ금을 태우니, 이것은 옛날 저전(楮錢)과 같은 것이었다.
또, 집에 방아 찧기와 절구질하는 일이 없었다. 둥근 돌을 바닥으로 하고 그 위에 길쭉하게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자루를 꽂아서 나귀를 멍에 메워 그 눈을 가리우고 갈아낸다. 싸전[米廛]에는 혹 방아와 절구가 있었으나 곧 □□ 방아였다. 곡식을 담는 데 짚으로 만든 섬을 쓰지 않고 모두 포대(布袋)와 고리짝을 쓰고 있었다. 또 집 뒤에 별도로 우산각(雨傘閣)을 여러 곳에 짓고 사면에 벽을 쌓아서 각색 곡식을 담아 두었는데 한 우산각에 넣은 것이 100여 섬은 될 만하였다.
내가 연경(燕京)에 들어간 것은 오로지 그곳 풍물(風物)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 동료는 병들어 누웠고 한 동료는 선래(先來)로 되어서, 내 한 몸이 홀로 행중 모든 일을 전적으로 담당한 까닭으로 뜻대로 출입하지 못했다. 또 식견이 고루해서 당초 마음처럼 하지 못하고 다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곳에 따라 기록했을 뿐이다. 그리고 문사(文辭)가 무디어서 아울러 뜻대로 기초(起草)하지 못했음이 더욱 애석하다.
[주-D001] 정형(井陘) :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지명이다. 태항산(太行山) 지맥(支脈)으로서 사방이 높은 산이고 복판은 낮아져서 우물 같다. 형세(形勢)가 험준해서, 유명한 요해처였다.
[주-D002] 저전(楮錢) :
즉 지전(紙錢)을 말한다. 제사(祭祀) 때나, 신(神)ㆍ불(佛)에게 기도(祈禱)할 때에 태워서 폐백(幣帛)으로 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