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명조선

신씨(辛氏)가 비록 위조(僞朝)의 임금이나, 한 나라에 군림(君臨)하기를 16년 동안이나 하였고,

믿음을갖자 2023. 11. 1. 05:22

우왕

재위 1374∼1388.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자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시비의 소생인 그가 아들임을 밝혔다. 공민왕은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해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다고 말하였다. 그 뒤 그는 신돈이 주살되자 궁중에 들어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생애 및 활동사항

우왕은 백문보(白文寶) · 전녹생(田祿生) · 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 · 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부터 북원(北元)이나 명나라와 복잡한 외교 문제가 계속 발생하였다. 더욱이 왜구의 침탈이 극심해 매우 불안정한 정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인임과 최영(崔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또는 악소배(惡少輩)들과 사냥이나 유희를 일삼았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그러자 크게 분개한 우왕은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성계에 의해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그 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경기도 여주)으로 이치(移置)되었다. 다시 1389년 11월 김저(金佇)와 모의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졌다. 다음 달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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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3년 계미(1403) 윤 11월 15일(무오)

03-윤11-15[01] 우왕의 비였던 왕흥의 딸을 아내로 삼은 통례문 판사 유은지가 귀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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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지(柳殷之)를 봉주(鳳州)로 귀양보내었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여 말하기를,

“군신(君臣)의 분수는 하늘이 세우고 땅이 베푼 것 같아서 어지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폐백(幣帛)을 잡고 북면(北面)하여 섬기었으면 그 신하가 된 것입니다. 어찌 신하로서 감히 분수를 범하고, 인륜(人倫)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 등이 보건대, 신씨(辛氏)가 비록 위조(僞朝)의 임금이나, 한 나라에 군림(君臨)하기를 16년 동안이나 하였고, 지금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유은지는 그 작록(爵祿)을 받고 북면하여 섬기었으니, 진실로 군신의 분수가 있습니다. 위주(僞主) 신씨(辛氏)가 일찍이 죽은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왕흥(王興)의 딸을 받아들여 이를 봉(封)해 비자(妃子)로 삼았었는데, 신씨가 망한 뒤에 은지가 전날의 군신의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않고, 그 비(妃) 왕씨(王氏)로 자기의 아내를 삼아서, 강상(綱常)을 더럽히고 예의(禮義)를 파괴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천지(天地)에 용납할 수 없고, 고금의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왕씨는 일찍이 국왕의 비(妃)가 되었으니, 비록 부모(父母)가 그 정(情)을 빼앗아서, 시집보내려고 하더라도, 마땅히 예(禮)로써 자수(自守)하여 절개를 잃지 않아서 그 몸을 마쳐야 할 것인데, 도리어 절개를 버리고, 남을 따라서 크게 부도(婦道)를 잃었으니, 또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은지의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왕씨와 함께 국문(鞫問)하여 과단(科斷)해서, 만세에 군신의 분수를 밝히고, 신자(臣子)의 더럽고 어지럽히는 마음을 막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혼할 것을 명령하고, 왕씨를 배주(白州)로 귀양보내었다.

【원전】 1 집 285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윤리(倫理) / 역사-전사(前史)

ⓒ 한국고전번역원 | 홍승균 (역)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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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1년 기묘(1399) 2월 1일(임인)

01-02-01[01] 왕흥을 개성에 안치할 것을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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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王興)을 개성(開城)에 안치(安置)할 것을 명하였다. 초하룻날에 백관이 궐문 밖에 반열을 지어 서 있었는데, 전 문하 평리(門下評理) 왕흥이 말을 타고 지나쳐 바로 궐문에 이르렀었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이를 탄핵하여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궁금(宮禁)은 신민(臣民)이 마땅히 공경하여야 할 곳이요, 조정은 국가에서 함께 높이는 것입니다. 전 문하 평리 왕흥은 한갓 광망한 사람으로서 위조(僞朝) 신씨(辛氏)에 빌붙어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고, 두 번이나 나라의 법을 범하였으나 다행히 용서를 입었으니, 더욱 마땅히 삼가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백관이 모두 궐문에 모였는데, 왕흥이 마음대로 말을 타고 지나쳐서 곧장 궐문에 이르렀으니, 조정을 능욕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하건대, 헌사(憲司)에 내려 그 직첩을 회수하고 그 이유를 국문하여 멀리 외방에 귀양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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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년 신사(1401) 4월 22일(경진)

01-04-22[02] 왕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갈대발을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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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상신(相臣) 왕흥(王興)의 집으로 옮겨 거처[移御]하고, 갈대로 만든 발[葦簾]을 쓸 것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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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1년 기미(1439) 12월 7일(신사)

21-12-07[01] 사간원에서 강상죄에 해당하는 유은지의 직첩을 거두어 들이도록 상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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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성유(聖諭)를 받자오니 말씀하시기를, ‘유은지(柳殷之)의 죄는 친히 범(犯)한 것이 아닌데, 딸의 죄로써 그 아비에게 연좌(連坐)하는 그런 이치가 있겠느냐.’ 하시었습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기를, 은지의 누이가 일찍이 음행(淫行)으로 인하여 복주(伏誅)를 당하였사오니, 마땅히 근신(謹愼)하여야 할 것이온데, 생각이 그렇지 아니하고, 도리어 한 집의 장(長)으로서 황음(荒淫)만을 숭상하여 금수(禽獸)와 같은 행실이 다시 규문(閨門)에 성하게 된 것은, 진실로 은지가 요망하고 음란한 짓을 창도(倡導)한 소치이옵고, 비단 딸자식의 허물만이 아니옵니다. 급기야 일이 발각되매, 명(命)하여 유사(攸司)에 내리시어 이를 추문(推問)할 때에, 사정을 아는 종[婢]들이 돌려가며 전해 숨기고 거짓 도망갔다고 칭탁하여, 외람되게도 위에 아뢰어 천총(天聰)을 기망(欺罔)하였사오니, 어찌 다만 가도(家道)를 모독하고 어지럽게 하여 성치(聖治)에 누(累)가 되게 하였을 뿐이옵니까. 그 간사함이 심하옵니다.

이뿐이 아니옵고 그 소행을 찾아보오면, 신하로 위조(僞朝)를 섬기다가 도리어 왕비(王妃)에게 장가들었사오니, 비록 대(代)를 바꾸었다고 말하더라도, 명위(名位)가 이미 정하여져서 진실로 범할 수 없는 것이온데, 오직 욕심만을 따르고 예의(禮義)의 소재(所在)를 돌보지 아니하였사오니,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다 하오면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 마음을 논할 것 같사오면 진실로 천재(千載)의 죄인이옵니다. 그 마음에는 간사한 것을 품었고, 그 몸에는 추잡한 행실이 있사와, 음란한 기풍을 양성(釀成)하였사오니, 실로 추하고 더러움의 연수(淵藪)이므로, 사림(士林)이 모두 더럽게 여기옵는데, 어찌 조정(朝廷)에 낯을 들고 재보(宰輔)에 참예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이목(耳目)이 있는 자는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사와, 대소 신하들이 함께 열(列)에 끼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옵는데, 하물며 호종(扈從)의 구은(舊恩)에 있어 이미 촌공(寸功)도 없었사온데, 차마 급하게 버리지 못한다 하시옵니까. 설령 옛 공로가 있다 하여도, 어찌 능히 인륜을 파괴하고 임금을 기망한 죄를 속(贖)하겠습니까. 신 등은 그윽이 두렵건대, 대악(大惡)을 범하고 대륜(大倫)을 파괴한 자가 고관(高官)을 얻게 되오면, 사람들이 장차 말하기를, ‘음란하고 추잡한 것이 무엇이 해(害)되며, 곧고 바른 것이 무엇이 이(利)되느냐.’ 하면서, 강상(綱常)을 오염(汚染)시키고 취우(娶麀)의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자가 잇달아 생길 것이오니, 장차 어찌 처치하겠습니까. 풍속의 잘되고 못되는 기틀이 실로 이 사람을 등용하고 아니하는 데 관계되옵는지라, 신 등이 깊이 국가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聖上)께서는 한결같이 먼젓번 상소에 의하여 빨리 작명(爵命)을 거두시어, 사풍(士風)을 장려하시고 여망(輿望)에 부합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원전】 4 집 257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윤리-강상(綱常)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주-D001] 취우(娶麀) : 숫사슴이 여러 마리의 암놈을 거느리고 살므로,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사는 사람을 말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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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3년 신유(1441) 9월 12일(을사)

23-09-12[01] 동지중추원사 유은지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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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유은지(柳殷之)가 졸(卒)하였다. 은지의 초명(初名)은 유은지(柳隱之)인데, 황해도 문화(文化) 사람이며, 찬성사(贊成事) 유만수(柳曼殊)의 아들이었다. 음관(蔭官)으로 보직되어 여러 번 옮겨, 이조(吏曹)ㆍ병조(兵曹)의 정랑(正郞)이 되었고, 여러 벼슬을 지나 중추원 사(中樞院使)에 이르렀다. 은지의 성품은 호사(豪奢)하여 응견(鷹犬)과 성색(聲色)을 좋아하였으며, 불학무술(不學無術)하여 가도(家道)가 바르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신우(辛禑)가 평리(評理) 왕흥(王興)의 딸을 들여서 비(妃)를 삼았었는데, 우(禑)가 폐(廢)하게 되니, 은지가 맞아들여 아내를 삼았으므로, 유사(有司)가 논핵(論劾)하여 이혼하게 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72세이었다. 시호(諡號)를 황호(荒胡)라 하였으니, 음악을 좋아하고 정치를 게을리 한 것을 황(荒)이라 하고, 나이가 많도록 수(壽)하고 강녕한 것을 호(胡)라 하였다. 아들 유강(柳江)ㆍ유서(柳溆)ㆍ유수(柳洙)가 있었다.

【원전】 4 집 358 면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