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이르기를,“호남은 바로 중국의 강남으로 물산도 풍부하고 땅도 큰데, 백성들의 고초가 이보다 심한 곳이 없으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잠자리가 편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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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1년 갑오(1894) 10월 9일(임자)
31-10-09[12]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수령들에 대한 출척을 공정하게 하라는 내용으로 전라 감사 이도재에게 내린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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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 감사 이도재(李道宰)에게 교서(敎書)를 내렸다. 왕이 이르기를,
“백성을 함께 다스리는 이천석(二千石)의 장리(長吏)는 지금 바로 필요한 인재로서, 육십주(六十州)의 큰 번방을 나가 다스리도록 특별히 관찰사(觀察使)의 직임을 제수하여 한 지역을 맡기노니 선발한 것은 오직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돌아보건대 호남 한 지역은 실로 우리나라의 중요한 군사지역으로서, 원묘(原廟)에 의관(衣冠)을 모시고 있어 국가의 기반을 세운 곳으로 한(漢) 나라의 풍패(豐沛)와 같고, 우모(羽毛)와 치혁(齒革)이 생산되어 물자가 풍부하기로 우공(禹貢)의 형양(荊揚)과 같다. 산천(山川)과 문물(文物)은 작은 강남(江南)과 같은 곳으로서 우뚝하게 큰 도(道)가 되었고, 배와 수레가 모여드는 큰 도회지로서 상경(上京)임을 자부한다. 돌아보건대 오늘날 민생(民生)이 곤궁하여 백성들이 교화를 따르지 않게 된 것이 어찌 교외의 보루들이 많아서이겠는가. 탐오한 수령들이 재물을 탐하였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경은 대대로 벼슬해 온 집안의 후예로 젊은 나이에 명성이 났고, 승지에 오르고 이조 참의를 거치면서 국가의 원대한 계책을 도왔으며, 경기(京畿)에서 관동(關東)에 이르기까지 각 지방을 누비며 왕명을 받드느라 정성을 다 바쳤으니, 처신에 있어서는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하되 충성과 지조를 돈독히 힘쓰고,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종합적이고도 분명하게 사고하되 법도에 맞게 하였다. 이에 경을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친군무남영외사 전주부윤(全羅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親軍武南營外使全州府尹)에 제수하노니, 경은 삼가 명을 받아 가서 감사의 일을 수행하라.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백성들을 진정시키되 관용과 위엄을 조화롭게 적용하고 수령들을 살펴 그들의 치적(治績)을 평가하여 출척(黜陟)을 공정하게 하라. 바다와 육지의 요충지를 방어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반드시 짜임새 있는 계책을 먼저 짜 놓아야 하고, 전란에 대비하는 계책에 있어서는 백성들을 불러다 안정시키는 일에 더욱 힘을 다하도록 할 것이다. 비도(匪徒)의 괴수(魁首)는 섬멸하고 협박에 못이겨 가담한 무리들은 죄를 묻지 말되 사랑보다는 위엄을 앞세울 것이며, 도성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되 바닷가 먼 지역까지 임금의 은혜를 베풀도록 하라. 무릇 중대한 일은 나에게 아뢰어 재결을 받는 것이 본디 법으로 되어 있으니 그대로 시행하고 그 밖에 시행할 일은 모두 편의대로 하라.
오호라, 나의 남쪽을 돌아보는 근심을 풀어 없애도록 할 것이니 지위는 관찰사이고, 대궐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성대하게 할 것이니 반열은 협판과 같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경연청 시독 홍현철(洪顯哲)이 지어 올린 것이다
上曰, 湖南, 卽國之江南, 物重地大[物衆地大], 而民之困瘁, 莫此爲甚。 每念於此, 丙枕未安矣。 聲根曰, 湖南米穀, 三南中最多。 田稅·大同, 趁期到泊則沿江物情, 賴以息肩, 都下市直, 繼以減之。 臣於甲申臘月遞營後, 急於日下事勢, 督捧兩稅於五十三州。 行關雖嚴, 時値隆寒迫歲, 慮或未必矣。 二十一萬四千九百十五石, 先捧留於二十日給限之內, 正供所重, 莫敢違時民心則勤勤懇懇, 固如此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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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3년 병술(1886) 5월 30일(임술) 맑음
23-05-30[46] 건청궁에서 봉심한 승지를 소견할 때 도승지 김성근 등이 입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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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酉時).
상이 건청궁에 나아갔다. 봉심한 승지가 입시하였다. 도승지 김성근, 기사관 이범대, 기주관 윤기주(尹基周), 별겸춘추 이무로(李茂魯)가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어 봉심한 승지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김성근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어 성일헌으로 달려가 봉심하니 봉안하는 일이 안녕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殿) 안이 정결하고 봉안한 것이 태평하며 그 토지가 높고 시원하여 멀리서 바라보기에 훤하던가?”
하니, 김성근이 아뢰기를,
“차례로 봉심하였더니, 묘(廟) 내부가 일신하여 탁 트이고 넓었습니다. 신이 비록 알지 못하지만 계동(桂洞)의 여러 궁궐 터들에 비해 더욱 좋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연 전번의 궁보다 좋으며 날도 길하고 좋았다.”
하니, 김성근이 아뢰기를,
“장맛비가 갤 것 같지 않아 매우 걱정했는데 오늘 날씨가 쾌청하니 천만다행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장(工匠)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지금 이미 옮겨 봉안하였으니 매우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김성근이 아뢰기를,
“흉악한 무리들의 변고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오늘의 일이 있겠습니까. 갑신년 10월의 반란은 옛날에 없던 일로 왕장(王章)이 아직 시원스레 펴지지 못하여 여론이 분개하는 것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각 전궁(殿宮)이 태평하게 환궁하시는 것이 신민(臣民)들의 무궁한 축원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흉악한 역도들이 아직도 다 섬멸되지 않아 국법이 펴지지 않고 있으나 하늘이 종묘를 도와 국운이 회복되어 태평하여졌다.”
하였다. 김성근이 아뢰기를,
“전하를 가까이에서 뵙지 못한 지가 지금 4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지나간 일을 끌어대어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떨리고 찢어지는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 감사를 지내는 동안 어떤 병폐가 있었는가?”
하니, 김성근이 아뢰기를,
“신이 감영을 떠난 지 이미 1년이 되었습니다. 그간의 일이 시행된 것을 상세하게 듣지 못하였기에 지금 낱낱이 진달할 수는 없습니다만, 감영에 있는 진고(賑庫)에 각읍에서 상납하는 것을 대부분 다 모아서 결국에는 상납을 어기거나 지체시키고 마는데, 이 문제가 아니면 달리 고질적인 병폐는 없습니다. 영문(營門)의 꾸려나가기 어려운 형편은, 삼가 듣건대 팔도가 마찬가지라고 하니 참으로 근심할 만합니다만, 신이 진고의 포흠을 추쇄하여 장부를 정리한 것이 30만 냥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들었다.”
하였다. 김성근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기 때문에 오직 농사일에 달려 있으니, 영남과 호서, 모두 기우제를 지냈고, 호남은 2년 동안 비와 햇빛이 적절하여 처음에는 크게 풍년이 들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홍수에 망치기도 하고 태풍에 손해를 입기도 하며 어떤 때는 일찍 내린 서리에 상하기도 하고 병충해를 입기도 하여 끝내 흉년이 드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해당 수령이 보살피고 보호해 주는 정치에 달려 있으니, 방백(方伯)이 높은 관리를 꺼리지 않은 뒤에야 자연히 혜택이 아래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방백과 수령이 백성들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명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성근이 아뢰기를,
“험한 여울로 조운선(漕運船)을 운항하는데 어찌 전복될 염려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근래 고의로 전복시키는 일이 많아 열에 다섯이 그러하니, 기강을 생각건대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영남 수령의 파직을 아뢴 뒤에, 선주(船主)를 효수(梟首)하여 경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의로 전복시키는 일이 많다고 하니, 그들의 마음을 따져보건대 너무나도 괘씸하다.”
하였다. 김성근이 아뢰기를,
“방백이 참된 마음으로 대양(對揚)하고 수령이 자신의 직분을 각기 잘 수행한다면, 아래에서 농간을 감히 부리지 못할 것이고, 법을 벗어나 죄를 짓는 일이 놀라운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겠기에 이렇게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은 바로 중국의 강남으로 물산도 풍부하고 땅도 큰데, 백성들의 고초가 이보다 심한 곳이 없으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잠자리가 편치 못하다.”
하니, 김성근이 아뢰기를,
“호남은 미곡이 삼남(三南) 가운데 가장 많은데, 전세(田稅)와 대동세(大同稅)가 기한에 맞춰 도착하면 강 연안의 물정(物情)이 이에 힘입어 한시름 놓고 도성의 시장 가격이 그것에 이어 떨어집니다. 신이 갑신년(1884, 고종21) 12월에 감영에서 체직된 뒤에도 도성의 사세가 다급하여 53주(州)에 전세와 대동세를 독촉하여 받도록 하였는데, 공문을 비록 엄하게 하였지만, 마침 큰 추위와 연말을 만났으므로 혹시 기필하지 못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에 21만 4915석을 납부할 기한인 20일 이전에 먼저 받아 보관하도록 하였습니다. 중요한 정공(正供)은 감히 기한을 어길 수 없으나 민심은 흉흉하고 어려웠으니 사정이 참으로 이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 가운데 누가 명성과 공적이 있던가?”
하니, 김성근이 아뢰기를,
“그 사이에 많이 옮겨 수령의 고과를 상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장흥 부사(長興府使) 유치희(兪致喜)가 여러 번 주군(州郡)을 맡아, 노련하게 다스렸으므로 절로 법도가 있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신이 감영에 있을 때에 한 도의 최고가 될 만하였는데, 지금은 어느 읍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명성과 공적은 나도 이미 그러한 줄 알고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자리로 가라.”
하고, 이어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대로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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