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북쪽으로는 백두산(白頭山), 동쪽으로는 장백산(長白山)의 여러 봉우리가 둘러 있어서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

믿음을갖자 2023. 6. 2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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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일고 제3권 / 북정일록(北征日錄) ○ 기묘년(1579, 선조 12) 10월

8일(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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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새벽에 어둠을 무릅쓰고 황초령을 올랐는데, 고개가 높아서 하늘에 닿은 것 같았다. 중간 고개를 오르고 나서는 이미 높은 고개 위에 올랐다고 여겼는데, 고개 위에 올라서니 또다시 한 고개가 반공(半空)을 가로질러 있었다. 눈이 두어 자나 쌓여 있었으며, 양쪽 벼랑에는 고목이 구름 속에 치솟아서 하늘과 해가 보이지 않았다. 지세는 대개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았다. 초방원에서 고개를 오를 적에는 하늘에 오르는 듯하였으나, 고개 북쪽은 평지를 밟는 듯하여, 고개 꼭대기에 있는 줄을 몰랐다.
중간 고개에 오르니 함흥과 정평 지역이 모두 시야에 들어왔고, 만리 푸른 바다가 펼쳐져서 마치 산 아래에 있는 듯하였다. 고개를 몇 리쯤 내려가 눈을 쓸고 길 옆에 앉아서 조반을 지었다. 조반을 먹은 뒤에 길을 따라서 북쪽으로 갔는데, 소나무와 전나무가 산에 가득하여 위를 쳐다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이 거의 60리나 되었다. 고갯머리에서는 쫄쫄 흐르던 물이 고개 아래에 내려오자 벌써 큰 시냇물이 되어 배도 다닐 만큼 깊었으니, 고갯길의 길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
낮에 가을모노(加乙毛奴)라는 곳에 도착하여 잠시 쉬었다. 고개 위에는 사방 산이 감돌아 있고, 가운데에는 동부(洞府)를 이루었는데, 넓이가 수십 리 가량 되었다. 서쪽은 야인(野人)들이 그 안에서 농사를 지었는바, 참으로 별도로 한 구역을 이루고 있었다.
저녁에 배를 타고 석을모노강(石乙毛奴江)을 건넜다. 저녁 어스름이 질 때 범박구비원(范朴仇非院)에 도착하였는데, 주민이 겨우 7, 8호밖에 안 되었다. 여기에 와서 비로소 평지를 보았는데, 백성들은 귀리와 메밀만 먹고 살았으며, 딴 곡식은 없었다. 이 지역은 5월이 되어서야 눈이 녹고 8월이 되면 서리가 내리는 까닭에 그런 것이었다.
설한령(雪寒嶺)은 석을모노강 서북쪽에 있는데, 여기가 바로 평안도 강계(江界)와의 경계라고 한다. 여연(閭延), 무창(茂昌) 등 사군(四郡) 지역이 고개 서쪽에 있어, 관서(關西) 지방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지나다닌다. 그러므로 방백이 여기에 보(堡)를 설치하여 떠돌이 백성들을 방비하고자 하였다. - 4운시 1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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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일고 제3권 / 북정일록(北征日錄) ○ 기묘년(1579, 선조 12) 10월

20일(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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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아침에 남문을 나서서 장령(長嶺)에 올랐다. 고개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았는데, 서쪽으로의 높이는 20여 리이고, 동쪽으로의 높이는 20리였다. 길은 고개 등성이에 나 있고, 고개 꼭대기에는 원(院)이 있었다. 서쪽으로는 여연(閭延)과 무창(茂昌), 북쪽으로는 백두산(白頭山), 동쪽으로는 장백산(長白山)의 여러 봉우리가 둘러 있어서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 백두산 남쪽에는 오랑캐 땅의 산이 꾸불꾸불 이어져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면서 천 리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평야로 되어 있어서 바라보아도 산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고개에서 내려오니 인차외보(仁遮外堡)가 고개 기슭의 강 언덕에 있었는데, 한쪽 면은 산을 의지했고 삼면은 절벽을 의지해 있어 형세가 매우 견고하였다. 갑산 부사(甲山府使) 이행(李行)과 만호(萬戶) 한인제(韓仁濟)가 나와서 맞이하였다. 예를 받은 다음 관란헌(觀瀾軒)에 좌기하여 점고하였다. 이곳에서 유숙하면서 서울에서 보낸 편지와 감사가 보낸 편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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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일고 제3권 / 북정일록(北征日錄) ○ 기묘년(1579, 선조 12) 10월

21일(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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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다가 눈이 내림.
아침에 출발하여 강가의 자갈길과 잔도(棧道)를 따라서 갔는데, 길이 매우 위험하였다. 벼랑이 끊어진 곳에는 목책을 얽어서 허공에 걸쳐 놓아 겨우 한 갈래 길만이 통해 있었다. 이곳을 - 원문 2자 빠짐 - 비탈(非脫)이라고 부르는데, 이 비탈을 넘어야만 회곡(檜谷)의 수호소(守護所)를 지나가게 된다. 강가의 자갈길을 따라서 가다가 강 어귀를 건너서 신안보(新安堡)로 들어갔다.
신안보는 옛날에는 수호소였는데, 병자년(1576, 선조 9)에 묘파보(廟坡堡)의 김수리동(金愁里同)이 잡혀간 뒤에 남병사(南兵使) 곽흘(郭屹)이 이 보를 설치하였다. 보는 압록강과 갑산강(甲山江)이 교류하는 곳에 있었는데, 형세가 불편하였다. 서쪽에 있는 산이 성을 굽어보고 있어서 적들이 이 산 위에 올라가 활을 쏘고 돌을 굴려 내릴 경우 성 안에는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또 성 안에는 샘과 우물이 없어서 강물을 길어다가 먹어야 하며, 성 밖에는 전지(田地)가 없어서 토병들이 생활할 수가 없었다. 이에 모두들 회곡으로 보를 옮기기를 원하였다. 보에서 혜산(惠山)까지의 거리가 겨우 10리밖에 안 되어서 본디 보를 설치할 곳이 아니었는바, 곽흘이 새로 보를 설치한 뜻을 알 수가 없다.
문루(門樓)에 좌기하여 점고하였다. 배종(陪從)하던 아전이 누에서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낙상하였으므로, 가리(假吏)에게 임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취암(鷲巖)이 보의 북쪽 강가에 있었는데, 만 길 절벽이 구름 속에 거꾸로 꽂힌 듯이 솟아 있어서 제법 경치가 기이하였다.
저녁에 혜산진(惠山鎭)에 들어갔다. 진은 압록강 상류에 있는데, 강물 깊이가 말의 배에도 미치지 않아서 관방(關防)이 아주 긴급하였다. 이날 군기를 점고하였다. 밤에 우후(虞候) 이유(李蕤)를 만나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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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일고 제3권 / 북정일록(北征日錄) ○ 기묘년(1579, 선조 12) 12월

28일(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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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병 때문에 좌기하지 못하였다. 훈융진에서 경원까지는 넓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으며, 두만강이 그 복판을 가르면서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렀다. 번호(藩胡)들이 강을 따라서 둔(屯)을 만들었는데, 부락이 매우 번성하였다. 이쪽은 땅이 모두 메마르고 소금기가 있는 탓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 거친 갈대밭만 끝없이 바라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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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일고 제3권 / 북정일록(北征日錄) ○ 경진년(1580, 선조 13) 1월

10일(경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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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아침에 몸이 노곤하여 군관을 시켜 활쏘기를 시험하게 하였다. 낮에 나아가서 좌기했는데, 방비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이 대부분 정돈되지 않았으므로 만호 이하에게 벌을 내렸다. 창고에 올라가서 군량을 적간하고, 곧바로 말에 올랐다. 큰 들을 지나서 두만강 가에 이르니, 호인 80여 명이 와서 맞이하였다. 한 고개를 넘어서 저녁에 무이보(撫夷堡)에 도착하였다.
무이보는 산기슭이 강을 임해서 불쑥 솟아난 곳에 있었다. 호인 땅의 100여 리나 되는 큰 들판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서쪽에는 금장 다루가치[金粧達魯火赤]의 옛터가 있고, 북쪽에는 야춘(也春) 부락이 있었으며, 서북쪽에는 시전(時錢) 부락이 있었다. 8개의 못이 들판 한복판에 있었는데, 바라다보니 마치 바다의 눈알과 같았으며, 산하의 형세가 극히 웅장하였다. 두만강이 보 앞을 둘러 흘러서 누런 모래와 마른 풀이 아무리 바라보아도 끝이 없었다. - 4운시 3수를 지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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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일고 제3권 / 북정일록(北征日錄) ○ 경진년(1580, 선조 13) 1월

17일(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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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아침에 몸이 편치 않았다. 늦게서야 동성을 나서서 고개 하나를 넘으니 7, 8리나 되는 넓은 호수가 있었다. 호숫가를 지나서 또다시 큰 고개를 하나 넘은 다음, 해안을 따라가서 서수라보(西水羅堡)에 들어갔다.
서수라보는 해안의 산 어귀에 있는데, 동남쪽은 큰 바다가 하늘과 닿은 듯하였다. 보의 진산(鎭山)은 두리산에서 한 가닥 산줄기가 근근이 이어져 30여 리를 내려오다가 보가 있는 곳에 와서 끝맺음을 하였다. 보에서 동쪽으로 1리쯤 되는 곳에 큰 바위가 바다 어귀에 서 있으면서 보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그 복판이 항구로 되었는데, 바위는 조촉암(鳥蜀巖)이라고 부른다. 바위 뒤로 8, 90리 너머에 후라도 등 여러 섬이 바다 복판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보의 서쪽에는 난도(卵島), 적도(赤島), 소서근도(小鋤斤島), 대서근도(大鋤斤島) 등 여러 개의 작은 섬이 있는데, 적도는 바로 도조(度祖)가 피란했던 곳이다. 보를 설치한 지는 오래됐으나 성이 없고 오직 해작(海作) 40여 집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자년(1552, 명종 7) 무렵에 부사(府使) 김수문(金秀文)이 이응거도(伊應巨島)에 보를 설치한 뒤로 호인들이 분하게 여겨, 해구(海口)를 지나 300여 명이 자피선(者皮船)을 타고 와서 100여 일 동안이나 약탈하다가 갔다. 이로 말미암아 성을 쌓고 권관(權管)을 두었다. 이날 이곳에서 묵었다.

[-D001] 해작(海作) : 

해착(海錯)으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을 말한다.

[-D002] 자피선(者皮船) :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배로, 피선(皮船)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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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일고 제3권 / 북정일록(北征日錄) ○ 경진년(1580, 선조 13) 2월

12일(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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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새벽에 정승파오달에 들어갔다. 회령 판관 김흠조를 중위장(中衛將)으로, 무산 만호(茂山萬戶) 박응지(朴應趾)를 선봉장(先鋒將)으로, 양영만동 권관(梁永萬洞權管) 이종윤(李宗胤)을 척후장(斥候將)으로, 부령 가장(富寧假將) 이선(李瑄)을 한후장(捍後將)으로 삼았는데, 군마와 시역(廝役)이 모두 300여 명이었다. 차유령(車踰嶺)에 도착하니 해가 비로소 돋았다. 고개 높이는 겨우 수십 길이나, 꼭 문턱 같았다. 고개 이북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에 솟아 있었다. 군사와 말이 어지러운 숲 속을 20리쯤 지나가니 수목이 점점 듬성듬성해지고 가끔 작은 들판도 보였다.
정승파오달에 도착하니 양쪽 산이 조금 벌어져서 골짜기의 어귀를 이루었다. 한 줄기 물이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면서 대홍빈(大紅濱)과 소홍빈(小紅濱)을 지난 다음 정승파오달을 지나서 허수라동(虛修羅洞) 입구에 도착하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그 형세를 살펴보니, 장백산이 백두산에서 나와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세 고을에 가로로 뻗치다가 경성의 주을온보(朱乙溫堡) 뒤에 와서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한 줄기는 서북쪽으로 내려오다가 허수라동 입구에 와서 끝나고, 한 줄기는 동북쪽으로 내려오면서 보을하보의 운두성에 와서 끝났다. 차유령은 바로 동쪽 줄기의 중간이 끊어진 곳이었다.
물은 장백산이 갈라진 곳에서 나와 북쪽 두 줄기의 산 사이로 흐르면서 정승파오달 앞 시냇물로 되었다. 시냇물의 넓이는 겨우 베 한 필 길이이며, 깊이도 겨우 정강이가 잠길 정도였다. 한 산맥이 차유령 남쪽 편에서 나와 서쪽으로 20여 리를 내달리다가 시냇물에 임해서 끊어져서 양쪽 줄기를 가로막았는데, 동구(洞口)에는 물길만 겨우 통했다. 또 한 산맥은 차유령 북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내달리다가 또 시냇가에서 그쳤다. 양쪽 산이 긴 골짜기를 이루었는데, 골짜기의 길이가 거의 30리나 되었으나, 넓이는 겨우 몇 리밖에 안 되었다.
시냇물 서쪽 건너편은 장백산의 서쪽 줄기가 만 길이나 높이 가로막은 탓에 인마가 통행하지 못하였다. 보를 설치할 만한 곳은 바로 차유령 남쪽 줄기가 서쪽으로 내달리다가 시냇물을 임해서 문득 끊어진 곳이다. 차유령 북쪽 줄기가 서쪽으로 내달리다가 장백산 서쪽 줄기와 서로 만나는 곳은 넓이가 겨우 1, 2리이다. 골짜기 어귀가 항아리 주둥이처럼 비좁고, 양쪽 산은 높고 험해서 사람이 통행할 수가 없다.
여기에다 만약 진을 설치하고 골짜기 어귀에다 장성(長城)을 쌓아서 적로(賊路)를 차단한다면 적들이 들어올 길이 없게 되는바, 지리(地利)의 편리함은 이곳만한 데가 없다. 어유간보(魚游澗堡), 옥련보(玉蓮堡), 무산보(茂山堡), 양영만동보(梁永萬洞堡) 등 여러 보로 나오는 적로가 모두 여기를 경유해서 들어오게 되는바, 진을 여기에다 설치하면 위에서 말한 여러 보를 아울러서 한 진(鎭)으로 만들 수가 있다.
정승파오달에서 북쪽으로 5리 남짓 내려가면 부이서동(夫伊西洞)이 있는데, 산이 높고 길이 험하다. 대박가천(大朴加遷)과 소박가천(小朴加遷) 및 검천(檢天)은 적호가 경유하는 길이다. 또 5리쯤에 하대(何大) 등 부락과 소거(所居), 자동(自同) 부락이 있어 벌서(伐鋤), 응거(應巨) 등 부락과 거리가 10여 리이며, 자동 부락에서 금말갈(金靺鞨) 부락까지는 20여 리이다. 이상에서 말한 10여 부락은 모두 우리나라에 향화(向化)한 번호(藩胡)이다.
이날 하대 부락 앞 들판에서 진을 치니, 여러 부락의 남녀 500여 명이 모두 나와서 맞이하였다. 이들에게 모두 술과 고기를 먹이고 진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한가의 여부를 물으니, 모두들 “만약 진을 설치하면 대국(大國)의 성원에 의지하게 되어 을아(乙阿)의 오랑캐들이 범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호인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편리한데도 대국에서 오래도록 진을 설치하지 않으니, 실망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오후에 돌아오는 길에 산천의 토지를 두루 보았다. 무산보에 돌아오니, 초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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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일고 제3권 / 북정일록(北征日錄) ○ 경진년(1580, 선조 13) 3월

24일(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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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오후에 성을 나와 남산(南山)에 올라가 관망하니, 젊었을 때 다니던 자취가 완연하였다.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사방을 돌아보노라니 지난일에 대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바닷가를 지나서 함흥 경계에 도착하니, 푸른 소나무숲이 바닷가에 둘러선 속으로 길이 뚫려 있어서 매우 아름다운 정취가 있었다. 창령(倉嶺)을 넘었는데, 고개가 매우 높고 가팔랐다. 장성(長城)이 바닷가로부터 곧장 고개 위를 지나 함관령(咸關嶺)까지 뻗쳐 있는데, 여기가 바로 옛날의 국경이었던 곳이다. 퇴조창(退潮倉)에 도착하니 판관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창고에 앉아서 조운(漕運)하여 온 쌀을 점고하여 들였다. 저녁에 촌가에 유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