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건성(福建省) 상선(商船)이 일본을 왕래한 것은 꼭 여름과 가을 사이였는데, 표류해서 우리 경내에 정박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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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30년 갑신(1704) 10월 16일(계미)
30-10-16[05] 표착한 중국 사람을 북경에 압송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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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착(漂着)한 중국 사람들은 북경(北京)에 압송(押送)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국(異國) 사람의 무리가 진도(珍島)의 도포(桃浦)에 표착(漂着)하였는데, 물어 보니 곧 복건성(福建省)ㆍ강소성(江蘇省)ㆍ절강성(浙江省) 등지의 사람으로 일본(日本)에 가서 장사하고 돌아가다가 침몰한 자들이었으며, 무릇 1백 13인이었다. 가지고 오던 상아(象牙)ㆍ서각(犀角)ㆍ소목(蘇木)ㆍ세등(細藤) 등 물종(物種)은 거의 모두 물속에 잠겨서 잃었는데, 조수(潮水)가 물러간 뒤에 비로소 배는 바다 밑에 잠겼으나 진창 위로 배의 한 귀퉁이가 조금 드러난 것을 보고 뭇사람을 거느리고 힘껏 끌어당겼지만 끝내 배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이 이미 스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조가(朝家)에서 하는 수 없이 그들의 나라로 호송(護送)하게 된 것이다. 또 그 물화(物貨)는 그들이 가지고 갈 힘이 없으므로, 호조(戶曹)에서 그 원하는 바에 따라 값을 주어서 이(利)를 잃지 않게 하였으니, 그 재화(財貨)를 탐낸 것이 아니라 먼 곳의 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이때에 와서 압송(押送)하여 도성(都城)에 이르러서, 옷ㆍ갓ㆍ신 등의 물건을 만들어 주고 노자(路資)를 넉넉하게 주어 현도(縣道)에서 차례로 먹여 보내게 하니, 그 사람들이 감축(感祝)을 금하지 못하여 사은(謝恩)하는 계첩(啓帖)을 지어 올리기를,
“황도(皇圖)에 건극(建極)하니 동국(東國)은 하늘과 땅 사이의 승구(勝區)가 되었고, 대대로 큰 덕이 전하니 명방(名邦)은 바로 철성(哲聖)의 거룩한 후예(後裔)입니다. 산수(山水)가 밝고도 빼어나니, 인물이 걸출(傑出)하고 지세(地勢)가 수려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인자하고 성스러운 아름다운 뜻으로, 백성 보기를 마치 우왕(禹王)이 몸소 기갈(飢渴)을 함께 하는 것처럼 하시고, 측은히 여기는 생각으로 고난(苦難)을 구휼(救恤)함은 문왕(文王)의 은택(恩澤)이 고골(枯骨)에 미친 것보다 나으셨습니다. 부재(覆載)의 은혜는 누의(螻蟻)에게 미치고, 생성(生成)의 덕은 전하여 하방(遐方)에까지 이르십니다. 사(使) 【사(使)는 그 이름이다.】 등이 7월 25일에 남쪽의 도포(桃浦)에서 갑자기 파선(破船)되어 몸을 북쪽 바다에 장사 지내는 줄 이미 알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황상(皇上)께서 하늘 같은 덕을 내리시고 호생(好生)의 인덕(仁德)을 넓히심을 힘입었습니다. 은혜는 의식(衣食)이 흡족하고, 역(驛)에서 마필(馬匹)을 공급하셨으며, 관원을 차견(差遣)하여 보호하여서 본국(本國)으로 돌려 보내 주시니, 사(使) 등의 백여 인은 죽을 힘을 다하여 몸을 바쳐도 끝없는 높은 은덕에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국(大國)에 이르러 기어가서 문을 두드릴 것을 생각하였으나, 미치지 못하므로, 하정(下情)을 피력(披瀝)하여 슬픔을 호소합니다. 회정(回程)하는 날에 다시 아뢰어 말씀을 진달하겠습니다. 사(使) 등은 하늘을 쳐다 보고 성상(聖上)을 우러러서 합사(合辭)하여 머리를 조아려 간곡하게 사례합니다.”
하고, 두사(頭辭)에 이르기를,
“대청국(大淸國) 복건성(福建省)의 잡상(雜商) 황사(黃使)ㆍ이시방(李時芳)ㆍ채진(蔡陳)ㆍ이사(李仕)ㆍ임삼(林森)ㆍ진난(陳鸞)ㆍ왕반(王攀)ㆍ추신(鄒臣) 등은 무리를 거느리고 사은(謝恩)합니다.”
하였다. 떠나갈 때에 또 계첩(啓帖)을 올렸다.
【원전】 40 집 115 면
【분류】 외교-야(野) / 어문학-문학(文學)
조선왕조실록 > 명종실록 > 명종 7년 임자 > 7월 3일 > 최종정보
명종 7년 임자(1552) 7월 3일(계미)
07-07-03[01] 삼정승이 제주의 변란과 안심승에 관해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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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기(李芑)와 좌상 심연원(沈連源)이 의논드리기를,
“해조(該曹)에서 아뢴 대로 왜사에게 말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우상 윤개(尹漑)는 의논드리기를,
“제주의 변란은 왜사들 역시 사사로이 들었을 것이니 끝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들었는데도 우리가 쉬이 말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우리의 천심(淺深)을 헤아리지 못하여 더욱 두려워할 것이니, 그 사이에 그들의 말과 기색을 잘 살펴보면 그들 마음의 소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제주의 변란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이 ‘안심승(安心僧)이 오는 것은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있으므로 먼저 적왜로 하여금 우리 변경을 침범하게 하여 왕년에 있었던 정사량(鄭蛇梁)의 일과 같이 겁을 주자는 계책이다.’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제주 지경을 침범한 것은 단지 1척의 대선(大船)뿐이고 인원도 많지 않으니 적변(賊變)을 일으키려는 자들 같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전에 복건성(福建省) 상선(商船)이 일본을 왕래한 것은 꼭 여름과 가을 사이였는데, 표류해서 우리 경내에 정박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른바 적변을 일으킨 자들은 상왜(商倭)로서 복건 등처를 왕래하는 자들인데, 파선(破船)을 당해 궁지에 몰린 나머지 할 수 없이 변장(邊將)과 서로 싸워 스스로 항복하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혹 그렇다면 더욱 그들의 정상을 살핀 다음에 말해 주어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삼공의 의논을 보니 우상의 의논이 합당할 듯하다.”
하였다.
【원전】 20 집 92 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軍事)
[주-D001] 영상 …… 심연원(沈連源) :
이기(李芑)는 4월 28일 죽었고 《명종실록(明宗實錄)》 권13 7년 4월 경진. 심연원은 이 기사(記事) 이전에 영의정에 제수되었는데 《명종실록(明宗實錄)》 권12 6년 8월 무인. 여기의 표기는 편집상 착오인듯 함.